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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물만 파서 성공한 기업ㆍ기업인 (4) - BYC 韓泳大 회장

『애국심으로 하니 저절로 돈이 벌렸다』

조남준    njch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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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상표 도입과 自社 브랜드를 놓고 격돌
  1985년 초.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있는 주식회사 백양(지금의 BYC)의 간부회의에서 대판 논쟁이 벌어졌다. 수출상품에 외국 유명업체의 브랜드를 도입해서 부착할 것이냐, 自社의 독자적 브랜드를 사용할 것이냐를 놓고 벌어진 싸움이었다.
 
  『얼굴 없는 OEM(주문자 상표 부착)방식으로 수출했다가는 외국 유명 메이커의 하청공장 신세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우리 상표로 떳떳하게 세계 시장에 얼굴을 내밀어야 회사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수출파트의 주장.
 
  『누가 우리 상표를 부착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냐. 우리 상표로 외국에 나가서 경쟁할 수 있나. 기업이 무슨 수를 쓰든지 돈을 벌어야지, 체면이 밥 먹여 주냐』는 것이 영업팀의 반론. 양쪽 모두 합리적 논거가 있는 만큼, 팽팽한 대립 속에 결론이 나지 않았다.
 
  종전까지의 상표는 BAIK YANG, 또는 WHITE SHIP. 그러나 메이커 白羊(백양)의 상호를 직설적으로 강조하는 이 개념으로 외국의 소비자들을 설득하기는 어려웠고, 흰 양의 이미지만으로는 메리야스 內衣의 기능적 우위성을 강조하기에는, 시대적 패션 조류와 소비자 감각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브랜드를 개발하자는 의견이 대두된 지 오래였다.
 
 
 
 『自社 브랜드로 고난의 길을 걷자』
 
  결국 이 논쟁은 이사회에 회부됐다. 기립투표까지 벌어지는 박빙의 대결 속에서 키를 쥔 창업주 韓泳大(한영대·78) 회장은 수출부의 손을 들어 줬다. 찬반 논쟁을 지켜본 韓회장은 『많은 어려움이 예견되지만 새로운 독자 브랜드를 개발해서 白羊제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고난의 길을 택하자』고 결론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상표가 「BYC」다. 「세계인은 BYC를 입는다」는 로고를 내걸고, 빨간색 바탕에 흰색으로 「BYC」 상표를 새겨넣어 전성기에는 세계 78개국에 8000만 달러 어치의 메리야스를 수출한 실적이 있으며, 지금도 26개국에 5600만 달러 어치를 팔고 있는 원동력이 여기에 있다. 물론 아직도 100% 완전한 고유브랜드는 아니지만, 自社 상표 수출비율이 52%에 달한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같은 自社 상표 비율은 국내 수출기업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상표 BYC의 인지도는 매년 높아져서 1996년에는 아예 회사 이름도 주식회사 비와이씨(영문명 BYC)로 바꿔버렸을 정도다. BYC의 21세기 비전은 「세계 제1의 BYC」다. 170여 개국에 달하는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BYC 제품을, 100% 自社 브랜드를 부착하여 팔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8·15 광복 전후에 태어난 사람치고 백양메리야스를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1946년 창업한 지 이제 만 55년. 오랜 세월 우직하게 메리야스라는 한 우물만 파서 연간 2000여 억원의 매출과 160억원이 넘는 순이익을 올리고 있는 성공한 대표적인 기업이 주식회사 BYC다.
 
  BYC는 국내 기업분석 기관들의 조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超우량기업의 전형이다. 우선 2000년 기준 기업의 성적표부터 보자. 매출액 2063억원, 순이익 161억원. 매출액 대비 순이익률은 상장기업 평균보다 조금 높은 편일 뿐 별 것 아니다.
 
  그러나 이 회사의 진면목은 內實(내실)에 있다. 자본금이 42억원이므로 자본이익률은 400%에 달한다. 순익이 자본금의 4배라는 얘기다. 稅前이익은 235억원인데, 영업이익은 95억원밖에 안 되고 영업외 이익이 140억원으로 영업이익보다 많다. 이는 대부분 은행이자 소득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상장기업 10개 중 4개는 영업에서 벌어들인 이익금으로 금융기관에서 차입한 이자도 못 내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예금한 돈에서 나오는 이자가 영업이익보다 더 많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만큼 현금자산이 많다는 것이다.
 
  1975년 證市(증시)에 上場한 이래, 26년 동안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으며, 1990년 이후로는 매년 100억원대의 순이익을 올리고 있다.
 
  금융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회사의 부채비율은 32%에 불과하다. 30大 재벌 부채비율이 우량한 곳 200%대, 불량한 곳 400%대인 것과 비교하면 거의 10분의 1 수준. 700여 개의 상장기업체 중 최상위 그룹에 해당한다. 재무구조가 탄탄하기로 이름난 태광산업, 영풍, 신영와코루가 모두 40%대다.
 
  1996년의 대차대조표를 보면 자본금 42억원, 자본잉여금 79억원, 이익잉여금 1030억원으로 나와 있다. 자본잉여금이란 유상증자를 하면서 생긴 주식발행 초과금이나 자산재평가에 따른 再평가 차익을 말하고, 이익잉여금은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이익 중 주주들에게 배당을 하고 남아서 社內에 축적해 놓은 돈을 말한다. 그 잉여금이 1110억원으로, 자본금의 26배나 된다. 이것을 社內留保金(사내유보금)이라고 하는데, 2000년의 경우는 자본금 대비 3861%에 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社內에 유보된 자본으로 회사를 만든다면 지금의 BYC 같은 규모의 회사 38개는 더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자본금으로 전입, 無償增資(무상증자)를 한다면 현재 주주는 자신이 보유한 주식의 38배나 되는 주식을 무상으로 받을 수 있다. 액면가 5000원짜리 주식의 실질가치는 19만원이라는 얘기도 된다. 2001년 5월7일 현재, BYC 주가는 4만원대에 불과하다.
 
  BYC는 2000년 12월에는 대한상의와 중앙일보가 공동제정한 제1회 새천년 새기업상 부가가치 창출부문 수상자로 뽑힌 것을 비롯하여, 능률협회가 주는 「최우량기업상」, 「최우수중견기업상」, 「한국섬유대상」, 노사협의가 잘 되는 기업에 주는 「보람의 일터상」 등을 받았다.
 
 
 
 돈버는 데는 소질이 없는 사람
 
  1998년 한국투신이 선정한 「생존능력이 뛰어난 상장회사 28개社」 가운데 미래산업, 한국단자, 퍼시스, 동아타이어, 한국카프로락탐, SJM, 국동, 한섬, 에스원 등과 함께 10위 안에 들었다. 11위 기업이 삼성전자였으며, 현대차, 신도리코, 포항제철, 서흥캅셀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같은 실적은 창업주의 경영 스타일과 무관치 않다. 창업주 韓泳大 회장은 창업한 지 50여 년 동안 한눈 팔지 않고 오직 「속옷」 외길의 전문경영과 품질제일주의를 실천해왔다. 『메리야스로 세계 1등 가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확고한 경영철학에 바탕을 두고 자금 여력이 풍부한 데도 다른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지 않았다.
 
  그는 입만 열면, 「착실히」와 「열심히」를 외친다. 어려서부터 착실히, 열심히 사업에 열중했기 때문에 同種업계에서 남들보다 조금 낫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겸손해 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돈버는 데 소질은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착실히, 열심히 일만 했지, 기업을 남들처럼 크게 키우지 못한 것은 사업가로서 자질이 모자라기 때문인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1923년 전북 정주군 북면 태곡리에서 韓性琪와 南陽 洪씨 사이의 5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난 韓泳大씨는 북면 소재 4년제 소학교와 정읍에 있는 6년제 정읍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가난을 유산처럼 물려받고 살던 당시의 농촌에서는 中農집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태어났지만, 형제가 많았던 만큼 일찌감치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정읍 시내에서 포목점을 하던 백부 가게의 점원노릇을 했다.
 
  아버지로부터 소 한 마리를 판 돈을 사업자금으로 받은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전거포, 미싱조립상점 등을 자영해봤다. 당시 미싱 한 대 값이 쌀 열 가마에 해당될 만큼 비쌌다. 한 달에 10~15대의 미싱을 조립, 판매할 만큼 자리를 잡아갔으나, 전쟁 말기를 맞은 日帝가 미싱 부품 생산공장을 군수공장으로 바꾸는 바람에 부품 생산이 중단된 데다 징용이 실시되자, 농촌지도원이 되어 귀향, 징용을 피했다.
 
 
 
 양말기 4대, 횡편기 2대로 공장 시작
 
  광복을 맞은 그에게 포목점과 수동 양말기 4대, 수동 횡편기 2대, 직공 5명을 거느린 家內수공업을 운영하던 백부가 사업을 인수해 줄 것을 제의했다. 그는 미싱사업을 하면서 벌어들인 재산과 공장을 바꾸기로 하고 이 공장을 인수, 광복 1주년이 되던 1946년 8월15일, 「한흥메리야스」를 설립하고 개업식을 가졌다. 이것이 오늘날 BYC의 시작이다.
 
  광복 직후는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때였다. 당시 국내의 內衣 생산량이 연간 52만 매 정도였다. 남쪽 인구만 2000만명이었으니, 속옷 입은 사람이 얼마나 됐을지 짐작할 만하다.
 
  그는 양말기의 몸통을 넓히면 內衣도 짤 수 있지 않을까 궁리를 한 끝에 대전에 있는 수동 양말기 제작소를 찾아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세히 설명하고 양말기의 통을 크게 제작해 달라고 부탁했다. 5개월의 제작기간을 거쳐 그가 설계한 기계가 완성됐다. 바늘을 구할 수 없어 양말기 바늘을 하나하나 숫돌에 갈아서 끼워야 했다.
 
  어렵게 제작된 메리야스 內衣 편직기 가동은 성공적이었다. 성능이 제대로 발휘되면 하루에 40벌의 內衣가 생산됐다. 이것이 BYC 메리야스 생산의 효시다. 당시 양말 1족의 가격은 쌀 한 되 값이었던 데 비해, 메리야스 內衣 가격은 쌀 두 말 값과 맞먹었으므로 수익성은 양말보다 훨씬 높았다. 생산성 측면에서도 양말기 한 대의 1일 생산량이 50족에 불과한 데 비해 內衣 생산량은 40벌이었으므로, 內衣 편직기가 양말기의 16배나 됐다.
 
  창업 4년째를 맞은 1950년에는 상당액의 잉여자금을 축적할 수 있었다. 6ㆍ25가 터지면서 내장산, 덕유산에서 빨치산들이 출몰, 사업하기가 어려워지자 韓泳大는 6ㆍ25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전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전쟁 후, 인플레를 염려한 韓泳大는 여유자금으로 原絲(원사)를 구입하여 친지 집에 맡겨놓았다. 이것이 전쟁 후 큰 도움이 됐다.
 
  아직 38선 근처에서는 교전이 계속되고 있던 1951년, 그는 전주의 기존 공장을 인수하여 정읍에 있던 기계를 옮겨다 신장개업을 했다. 마침 전주에는 정읍 공장을 물려준 백부의 아들, 즉 사촌형이 전북도 공무원으로 있어서 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결국은 그 사촌형의 권유로 개인회사 한흥 메리야스는 자본금 4000만환 규모의 한흥실업주식회사로 바뀌게 됐고, 그 형은 훗날 전무이사로 사업에 동참하게 된다.
 
 
 
 
5ㆍ16 후 수출에 주력하며 聲價 얻기 시작

 
  한국메리야스공업협동조합의 조사에 따르면 한흥이 주식회사로 변신한 지 10년 후인 1965년, 우리나라 메리야스 업체 중 주식회사는 5%에 불과했고, 개인회사가 94%, 기타 1%였다. 그러니까 이 조사시점보다 10년 전인 1955년에는 주식회사란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주식회사로의 변신은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 자본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韓泳大는 시대를 앞서나갔다.
 
  1955년 창경원에서 광복 10주년 행사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박람회에 한흥은 면內衣를 출품, 대회장상을 수상함으로써, 한흥과 한흥이 만드는 메리야스 內衣는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복을 입고 살았고, 도시 학생과 상류층에서만 메리야스 內衣를 입을 때였다.
 
  이때 이후 한흥은 국내 최초로 아염산소다에 의한 최신 표백기술을 개발했고, 순백색의 이미지가 강한 白羊이라는 상표를 출원, 등록하여 국산 메리야스 內衣의 대명사로 인식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白羊이라는 상표는 1985년 BYC로 바뀔 때까지 30년 동안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 국산 브랜드 가운데 하나였다.
 
  1960년대는 한흥이 또 한번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각종 산업정보의 수집과 본격적인 전국 영업망 조직을 위해 부득이하다고 판단한 韓泳大는 4·19가 일어나기 직전인 1960년 4월4일, 본사를 서울로 옮겼다. 그리고 이은 5·16 군사혁명과 정부가 내세운 수출입국의 기치는 한흥을 수출에 눈 뜨게 해 줬다.
 
  우리나라 메리야스 제품류 수출은 1963년부터 실험적으로 시작되어 1년 만에 320만 달러의 실적을 올렸다. 메리야스 內衣는 한 건의 수출 실적도 없었다. 1964년에 들어와서야 1만5000달러 규모의 수출 실적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한흥의 對일본 수출 실적이었다.
 
  까다롭기로 이름난 일본이 한흥의 백양메리야스를 수입해 가기 시작한 것은 사연이 있다. 1963년 초가을 어느 날, 한흥 본사에 일본 미쓰비시 해외영업부 직원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한국 메리야스 시장에서 은밀히 샘플을 수거, 검토한 결과 한흥의 제품이 가장 우수하니 일본에 수출할 생각이 없느냐는 의사타진을 해왔다.
 
  이 솔깃한 제의를 받은 韓泳大는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직 우리 제품이 일본에 수출할 만큼 우수하지 못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우리 제품이 일본의 소비자들로부터 형편 없다는 평을 들으면 국가의 체면이 손상될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 韓泳大의 회고다.
 
  거절당한 미쓰비시는 이듬해 또 한흥을 찾아왔다. 이번에는 일본의 메리야스 기술자를 데려 왔다. 그는 이 기술자에게 한흥의 메리야스 제조과정과 완제품을 면밀히 검사케 하고 이 기술자의 평가를 받아본 후, 수출계약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 기술자는 1주일 간에 걸쳐 전주 공장에서 한흥의 생산과정을 지켜보고 완제품에 대한 품질검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원료, 편직, 표백, 염색, 봉제, 가공의 全 공정이 우수하고 완제품을 일본 시장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 결과를 듣고 韓泳大는 대단히 만족했고, 그동안 품질관리에 들인 노력에 대한 보람도 느꼈다.
 
  미쓰비시 상사 직원은 즉시 수입 계약을 체결하고 판매상황을 보아가며 물량을 매년 늘려가자고 제안했다. 당시 한흥으로서 自社 제품의 일본 수출은 不敢聽固所願(불감청고소원ㆍ감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대단히 바라는)인 형편이었다. 그렇게 해서 수출시장에 눈을 뜬 한흥은 수출에 주력하기 시작, 10여 년 동안 생산량 대부분을 수출하게 된 것이다. 통계가 잡힌 1971년부터 수출비중을 보면 1971년 91.5, 1972년 93.8, 1973년 92.4, 1974년 89.9, 1975년 88.8, 1976년 75.8, 1977년 54.6, 1978년 49.7% 등으로 나와 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한흥은 내수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한흥의 수출 치중은 내수를 노린 경쟁적 메리야스 업체의 탄생을 불러왔다. 쌍방울은 처음엔 한흥의 제품을 사다가 파는 도매업체였으나, 한흥으로부터 물량을 받지 못하자, 자체 생산에 나서서 부도가 나기 전까지 BYC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3大 메리야스 업체인 태창은 쌍방울에서 임원으로 근무하던 사람이 나가서 창업한 회사.
 
 
 
 『수출 전념하니까 세무서에서 귀찮게 안 해서 좋았다』
 
  한흥이 이처럼 수출에 주력한 이유 가운데는 前近代的(전근대적) 국내 유통시장의 문제점도 포함돼 있다. 다음은 韓泳大의 직접 회고.
 
  『당시 메리야스 유통시장은 엉망이었습니다. 도매업자들이 물건을 사가면서 세금을 안 내려고 세금자료를 끊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가짜로 매출전표를 만들어야 했어요. 세무서에서는 사정을 뻔히 알면서 매번 찾아와서 탈세했다고 큰 소리치죠. 그 사람들은 배 부르게 해 줘야 가만히 있어요. 아주 진력이 났습니다. 그런데 수출하면 그런 꼴을 안 보고 살 수 있거든요. 그래서 수출에 전념했습니다』
 
  처음 1만5000달러로 시작한 수출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70년에는 100만 달러, 1973년 700만 달러 어치를 수출했다. 그러나 석유파동으로 증가세가 둔화돼 1000만 달러 수출은 1976년에야 달성, 무역의 날에 1000만 달러 수출의 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11년 후인 1987년엔 5000만 달러(실제수출액 7300만 달러) 수출탑을 받았다.
 
  특히 일본 수출은 1971년부터 매년 늘어 1975년 500만 달러를 돌파했다. 그때의 미쓰비시 바이어는 40년 가까운 지금까지 BYC와 거래하고 있다. 가족끼리도 친한 그런 사이가 됐다.
 
  그는 아예 일본에 「BYC自販」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100% BYC 제품만 수입해다 팔고 있다. 연평균 75%의 수출 성장률을 자랑하면서 1990년에는 1000만 달러를 돌파했고, 1995년에는 4000만 달러를 돌파, 일본 內衣 시장의 10위권 안에 들게 됐다.
 
  내수비중은 매년 조금씩 늘어 2000년에는 70%대에 이르고 있다.
 
  수출 감소의 가장 큰 이유는 인건비 상승에 따른 경쟁력 저하와 값싼 중국제품의 진출 때문이다. 이때문에 BYC는 7~8년 전부터 중국 上海에 공장을 짓고 여기서 값 싸게 만든 생산량 전량을 수출하는 방식으로 수출 패턴을 바꿔가고 있다.
 
  1979년 회사 이름을 브랜드와 일치한 주식회사 백양으로 바꾼 지 7년 만인 1986년에는 총매출액이 1000억원대를 돌파, 국내 기업 랭킹 86위를 차지했다.
 
 
 
 
경쟁업체의 덤핑 판매로 매출액 대폭 감소

 
  매출액은 1990년 2000억원, 1992년 3000억원을 돌파했으며 1995년 3746억원을 기록했으나, 1996년 3382억원, 1997년, 1998년 2414억원, 1999년 2391억원, 2000년 2063억원으로 매년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매출 감소의 가장 큰 이유는 국내 시장의 교란에 있다는 것이 BYC측의 설명이다. 경쟁업체가 부도가 난 후, 중국 연변지방에 공장을 세우고 값싼 노동력으로 低價(저가) 제품을 만들어 국내시장에 덤핑 판매하기 때문이란다.
 
  다음은 韓泳大 회장의 말.
 
  『S社도 우리처럼 중국 연변에다 공장을 세워 제품을 만들고 있다. 전량 수출조건으로 수출입은행에서 외화대부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수출 약속을 어기고 대부분 국내로 들여다 덤핑 판매를 하고 있다. 법적으로 위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도덕적으로는 문제다.
 
  법정관리를 받으면서 수천억원의 이자 탕감, 빚 유예 혜택을 받는 기업이 외화대부를 받아 공장을 지어 생산량 전량을 수출하겠다고 해놓고 대부분을 국내에 들여다 덤핑하는 바람에 수백개 국내 영세 메리야스 업자들이 도산지경에 놓여 있다. 국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국가에 도움되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 기업을 왜 살리려는지 정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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