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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회고 - 서울고 김원규 교장

서울高를 人材 産室로 만든 金元圭 교장의 스파르타式 교육

김성동    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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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돼라』

● 人材양성의 핵심은 우수한 교사·학생 확보
● 투철한 反共·국가관 강조…한 해 육사 26명 합격
● 서울고 1회 졸업생 98% 서울大 합격시켜
● 지각을 결석보다 더 싫어해… 지각생 쫓다가 추락상

故 김원규
서울고 교장
1904년 황해도 옹진 출생, 1925년 평양고보 졸업, 1929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영문과 졸업, 1929년 함흥농업학교 교사, 1932년 경기여고 교사, 1945년 경기도 학무과장, 1946년 서울중학교장, 1957년 경기고등학교장, 1964년 서울시 교육감, 1966년 경기공업고교장. 1968년 사망.
『지금은 金元圭 교장의 교육관 再조명할 시기』
  이야기 하나:2000년 가을, 서울고 총동문회 임원들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는 서울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인연으로 당시 서울市 부교육감이던 任東權(임동권·63)씨도 참석했다. 모임 참석자들의 주요 화제 가운데 하나가 교육문제였다. 任부교육감은 그 자리에서 서울고 동문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제는 사회적 교육적 측면에서 金元圭(김원규) 교장의 교육관과 철학을 再조명해야 할 시점에 왔다』
 
  任부교육감이 再조명 필요성을 제기한 金元圭 교장은 서울고에서 초대 교장으로 11년(경기고 포함 39년 간 교직 생활)을 재직했던 인물이다.
 
  이야기 둘:2000년 봄. 서울고 총동문회(회장 曺昌煥·7회) 임원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金元圭 교장 흉상 건립이 논의됐다. 金교장의 흉상을 서울고 교내에 건립하겠다는 안건이었다. 임원회가 열리기 前 동문들의 의견은 갈렸다. 설립자도 아닌 사람의 흉상을, 그것도 私立(사립)도 아닌 公立(공립) 학교에서 세울 수는 없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 실제 公立學校 가운데 그 학교를 거쳐간 교장의 흉상이 세워진 곳은 없다고 한다. 이날 임원회는 이런 수면 아래서 벌어지는 논란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날 임원회는 만장일치로 金교장 흉상 건립안을 통과시켰다. 드러내놓고 비판하기에는 金교장이 서울고에 남겨놓은 정신적 유산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동창회 임원들이 흉상건립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명분은 『金교장이 서울고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교육적인 차원에서도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金교장의 흉상은 오는 5월에 서울고 교정에 세워질 예정이다.
 
  金元圭 교장. 그는 이미 33년 前인 1968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정년을 1년 남기고서였다. 金교장과 관계가 깊었던 주변인물들로부터이기는 하지만 새삼 死後(사후) 30여 년이 넘은 지금, 金교장의 어떤 삶 때문에 그의 교육관과 철학관의 再조명 필요성이 제기되고 제자들을 흉상 건립에 발벗고 나서게 했는가.
 
  金교장의 제자들이 말하는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은 나라 공동체를 생각하며 엘리트 양성에 힘썼던 그의 교육자적 열정이 필요한 시기다』
 
 
 
 『어디 가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돼라』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있던 서울고에는 교사들을 위한 사택이 있었다. 사택에는 교사들의 자제들이 많았는데 이들 대부분이 유년기의 아이들이었다. 당시는 유치원도 없고 놀이 시설도 없어 아이들은 서울고 校庭(교정)이 그야말로 놀이터였다. 이 아이들이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있다.
 
  『너희는 어디 가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돼라, 여기 있는 3000명이 이 나라 3000만을 이끌어야 한다…』
 
  金교장이 아침 조회 때마다 훈시를 통해 서울고생들에게 자주 한 말이다. 얼마나 자주 그 말을 했으면 유년의 아이들조차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였겠는가. 金교장의 이 말은 서울 서초동으로 이사한 서울고 본관 우측 화단에 높이 2.3m, 폭 1.5m의 자연석에 새겨져 「서울고의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10회 졸업생인 朝鮮日報 金大中(김대중) 주필은 최근 서울고 동창회보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 학교 하면 서울중학교밖에 없는 줄 알았고 교육자 하면 김원규 선생님밖에 없는 줄 알고 자랐습니다. 남 못지 않게 교육열이 강했던 나의 선친께서 5형제 가운데 네 명을 서울중·고교에 보냈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나는 태어나기도 서울중·고교가 있던 신문로 근처 광화문에서 태어나 무슨 숙명처럼 서울중학교를 다녔습니다. 나의 일생은 「서울」의 6년에서 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격, 학업, 우정, 知的(지적) 오만, 사랑이 그 6년 속에서 요동치며 나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별 느낌이 없이 받아들였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지난 40년 간 나를 채찍질했습니다>
 
  金주필처럼 서울고 동문 중 많은 이들은 金교장의 『어디 가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말이 오늘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金교장은 未完成(미완성) 회고록에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우리 학생들의 생활 목표는 한 마디로 표현하여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서의 수양인 것이다. 서울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재학 시절에 많은 교훈의 말을 들었지만 그 가운데서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를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학생이고 꼭 한 가지 말만은 기억하고 있을 것을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돼라」는 말일 것이다>
 
  金교장은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다.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은 반드시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한 위에 한 가지 기능에 특별히 뛰어난 사람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거나 政體(정체)가 여하히 변동하거나 그 사람의 기능을 빌지 아니하면 안 될 사람이면 또 그 사람은 반드시 등용되고 반드시 우대를 받는다』
 
  金교장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단정은 못하지만 「그런 사람」으로 살기 위해 애써왔다고 자부한다. 주변의 평가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 같다. 194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金교장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서울·경기고 출신들이 우리 사회의 중추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이튼 스쿨을 꿈꾸다
 
  金교장이 아침 조회 시간에 학생들에게 자주 들려준 이야기 중 하나가 영국의 웰링턴이 나폴레옹과의 워털루 전투에서 승전하고 돌아와서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워털루의 승전은 이튼校의 校庭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튼校에서 배운 정신이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을 인용하며 金교장은 자신이 재직했던 서울고와 경기고를 한국의 이튼으로 가꾸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이튼 스쿨(Eton School)은 해로 스쿨(Harrow School)과 더불어 영국의 대표적인 私立 명문교로 꼽히는 곳이다. 교육과정에서 페어플레이 정신에 투철한 사람, 외모를 위해 사치하지 않는 사람, 배신하지 않는 사람 등의 정신을 강조함으로써 영국 젠틀맨십 수호의 보루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영국의 정치가, 학자 등 명사로 꼽히는 인사들의 20% 이상이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영국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 양성소」라고 불러도 무방한 정도의 수치이다. 金교장은 서울고와 경기고를, 한국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 양성소」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서울중학교(6년제)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3월에 개교했다. 金교장은 이 학교의 초대 교장으로서 일제시대 경성중학교가 쓰던 집기를 다시 찾아오는 등 설립자와 다름없는 역할을 했다. 그 시기는 많은 人材를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金교장은 교육자로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人材양성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京畿高 교장 재직 때인 1958년 이 학교 교지인 「주간 경기」 2월28일자에서는 人材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양분되어 있고 전쟁에 파괴된 나라이다. 물자도 없고 돈도 없는 가난한 나라이다. 그러나 없는 돈은 나라에서 빌려올 수 있지마는 사람만은 남의 나라 사람을 빌려다가 우리나라 사람으로 만들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무엇이 중요하다 하여도 사람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우리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들을 어디서 찾겠느냐. 제군들이 곧 그 사람들이다」
 
  육군 제5군단장과 국방대학원장을 역임한 丁萬吉(정만길·서울고 7회) 예비역 육군 중장은 『金교장은 광복과 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그 시기에 국가 발전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人材양성을 해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던 것 같다』면서 『人材양성을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人材양성이 긴급한 국가적 과제였으므로 우수한 자질을 가진 학생들을 골라서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1회 졸업생 98% 서울大 합격
 
  丁예비역 중장이 말했듯이 金교장을 설명할 때 으레 등장하는 말이 「스파르타식 교육」이다. 교육계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의 교육방법이 「스파르타식이었다」는 데 동의한다. 金교장이 학생들에게 공부를 혹독하게 시켰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서울大 합격률이 명문高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던 시절에 서울고는 전국 최고의 서울大 합격률을 기록한다. 1회 졸업생(1949년) 135명 중 서울大 98% 합격, 2회 졸업생 195명 중 96% 합격 등 金교장이 서울고에 재임하는 동안 서울고의 서울大 입학률은 전국 최고를 기록했다. 1, 2회 졸업생 대부분이 월남자들로 이북에서 평양고보 등 명문고에 재학중이던 우수한 학생들이기는 했지만 이같은 서울大 합격률이 놀라운 것임에는 틀림 없다. 서울고 동문들은 『金교장이 열의와 성의를 다해 강하게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면 그같은 결과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서울고의 위치가 신문로에 위치한 것을 빗대 「신문로 감옥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학생들을 혹독하게 공부시킨 것을 빗댄 말이었다. 金교장은 교과 과목 중 단 한 과목이라도 60점 이하의 점수를 받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유급을 시켰다고 한다. 운동 선수도, 전국대회를 휩쓸던 합창반원도 예외가 없었다. 운동 연습도 교과 시간 외의 시간을 활용해야 했고, 합창 연습도 미술반 활동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영어, 수학을 100점 받고 음악이나 미술을 60점 이하로 받아도 유급이었다. 예습과 복습을 점검하는 시험은 거의 매일 치렀다. 부모가 불려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전체 과목 가운데 한 과목이라도 40점 미만짜리가 나오면 해당 학생은 어김없이 부모를 학교에 모셔와야 했다.
 
  서울고 14회 졸업생인 徐施哲(서시철) 총동창회 사무총장은 『선배들의 말을 빌면 어떤 기수는 매년 한 학급 정도가 유급되기도 했다고 한다』면서 『유급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학생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고 말했다. 徐총장은 『하지만 金교장의 그같은 규칙의 엄격한 적용이 있었기 때문에 서울고가 짧은 시간에 국내 유수의 명문고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金교장 본인은 자신의 교육방법을 주변에서 「스파르타식」이라고 평가하는 데 대해서 못마땅했던 것 같다. 未完成 회고록에서 『소위 새 교육을 한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우리의 교육방침을 스파르타식이라고 비방한 자도 있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 가운데서도 金교장의 교육방법이 「스파르타식이었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스파르타식 교육은 獨裁(독재)적 교육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金교장의 교육방침이 원칙의 적용을 바탕으로 한 강한 추진력에 있었지 非민주적이지는 않았다는 주장인 것이다.
 
  金聖鎭(김성진·서울고 2회) 前 문공부 장관은 『그분의 교육은 공동체를 생각하는 교육이었지 스파르타식 교육은 아니었다』면서 『민주주의 공동체의 틀을 깨뜨리지 못하도록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다가 보니까 주변에서는 너무 혹독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됐고 그것이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읽혀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無감독 시험과 매점 無人 판매

 
  京畿高 60회 졸업생인 金平一(김평일) 치과의원 원장은 『金교장의 교육을 설명하는 말로 더 적절한 것은 스파르타식 교육이 아니라 全人敎育(전인교육)』이라고 말한다.
 
  『金元圭 선생님은 自愛(자애)를 가르치셨습니다. 경기고에 재임하던 시절 그분의 교육은 스파르타식 교육이라기보다 진보된 인간을 만들기 위한 全人敎育을 강조하셨습니다. 치열한 대학입시를 목전에 둔 우리들에게 다른 학교에 없는 톱, 대패, 망치, 사포, 니스가 교재로 쓰이는 木工(목공)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또 전교생이 스케이팅, 수영, 사이클은 물론 각종 구기종목을 선택해서 배우도록 했습니다』
 
  徐사무총장의 증언도 金원장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서울고에 입학한 학생들은 예체능 분야의 특별활동을 반드시 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예능 분야나 체육 분야 중 하나가 아니라 예능 분야 하나, 체육 분야 하나 이렇게 두 가지를 특별활동으로 반드시 해야 했습니다. 영어와 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영어와 수학만을 위한 교육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그런 교육에 힘입었기 때문인지 서울고는 소위 명문고라고 불리는 고교 가운데 연극인 등 문화·예술인들을 가장 많이 배출했다. 성우 구민(본명 具敎汶·4회)을 비롯 탤런트 李純才(이순재·5회)·吳鉉京(오현경·8회)·沈洋弘(심양홍·14회), 가수 徐酉錫(서유석·15회)·李章熙(이장희·18회), 영화감독 李長鎬(이장호·16회)·裵昶浩(배창호·23회), 소설가 崔仁浩(최인호·16회) 등이 서울고가 배출한 문화·예술인들이다.
 
  명문고 가운데 서울고 출신 연예인들이 많은 이유는 「엄격한 규율」과 함께 「자율」을 학생들에게 부여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金교장이 학생들을 믿고 학생들의 자율에 맡겼던 대표적인 예가 無감독 시험, 매점 無人 판매 등이다. 학생들에 대한 金교장의 「기본적인 신뢰」를 엿보게 하는 것이 이 無감독 시험과 매점 無人 판매였던 것이다.
 
  金교장은 왜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학생들에게 엄격한 규칙을 적용했을까. 그는 중등교육을 받는 시기가 한 인간의 인격형성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1952년 3월24일, 그는 한 라디오 방송 강연에서 이런 견해를 피력한다.
 
  『인생의 모든 기초가 성립되는 때가 이 중등학교 시대입니다.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기초가 이때에 서는 것입니다. 중학 시대에 부정한 행동을 하던 사람은 혼인한 다음에도 부정한 사람이 되고, 중학시대에 배우기를 게을리 한 사람은 상급학교에 가서도 역시 학문을 게을리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중학시대에 애국자적 소질을 가졌던 사람이라야 나중에 애국자가 되는 법입니다』
 
  중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金교장은 주변에서 자신의 교육방법을 가리켜 「스파르타식 교육」이니, 「낡은 교육」이니 하는 데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서울고생들에게 그는 글을 통해 이런 말을 전한다.
 
 
 
 『좋은 강철을 만들려면 모진 불에 넣어 두들기고 또 두들겨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나의 교육관, 나의 교육신념에는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우리의 새 전통은 엄격한 규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만약 이 엄격한 규칙이 없어졌다면 서울중고등학교의 전통은 없어진 셈이다. …서울중고등학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 다음 세대의 우리나라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누워서 떡 먹는 것 같이는 안 되는 법이다. 좋은 강철을 만들려면 모진 불에 넣어 두들기고 또 두들겨야 한다. 두들기고 또 두들기는 것이 나의 교육방침이다>
 
  金교장이 강철을 단련하듯 학생들을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두들기고 또 두들기는 교육방침」으로 정한 것 중 하나가 엄격한 생활지도다. 그가 정한 서울고의 校訓(교훈)도 생활과 밀접한 것이다. 「깨끗하자, 부지런하자, 책임지키자」가 서울고의 敎訓이다. 추상적이지 않고 실천적이다.
 
  서울고 5회 졸업생인 申東澔(신동호) 동양위성방송 사장은 『사실 서울고 교훈은 중등교육 목표라기보다는 국민교육 목표에 더 잘 어울린다』면서 『金교장은 한국 사람들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점을 개선, 어려서부터 체질화, 생활화시키겠다는 생각으로 교훈을 정한 것 같다』고 말했다. 金교장 본인의 말도 申사장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서울고 校訓을 「깨끗하자, 부지런하자, 책임지키자」로 정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나쁜 점을 들 때에 흔히 하는 말이 한국 사람들은 더럽고 게으르고 무책임하다는 것이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 점을 止揚(지양)하기 위한 校訓을 정했다는 것이다.
 
  서울고의 校訓은 金교장의 자녀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한다. 金교장의 3남5녀 중 일곱째인 泳煥(영환·54·선인터내셔날 회장)씨는 『아버지가 가정교육에서 강조한 것은 서울고 교훈과 똑같았다』면서 『그 가운데서 특히 강조했던 것은 깨끗하라는 거였다』고 말했다. 물론 공부에 관해서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한 것처럼 혹독하고 엄격했다고 한다.
 
  金교장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세심한 분야까지 학생들의 생활교육을 시켰다. 공중 목욕탕에서 지켜야 할 매너에서 화장실 사용법까지 일일이 지시했고, 끝없이 잔소리했다. 동문들이 기억하는 잔소리 가운데 몇 가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침을 함부로 뱉지 말라」 「맨손으로 코를 풀지 말라. 야만인이나 하는 짓이다」 「손수건을 반드시 지니고 다녀라」 「공중 목욕탕에 가서는 다른 사람에게 물이 튀지 않도록 조심하라」 「소변을 볼 때는 소변이 소변기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도록 바짝 다가서서 소변을 보라」 「대변을 볼 때는 앞 벽과 이마 사이에 주먹 하나 거리만 두고 다가앉아 궁둥이를 낮춰라」 「단추 떨어진 옷은 입지 말라」 「바지 호주머니를 꿰매라」 「밥을 먹을 때는 소리나지 않게 입을 다물고 씹어라」 「복도를 걸을 때는 뛰지 말고 발뒤꿈치를 들고 소리나지 않게 걸어라」 「시간을 지켜라」 「지각하지 말라」>
 
  金교장의 이 지시는 곧 校則(교칙)이기도 했다. 이를 어기는 학생은 정학 등의 처벌을 받아야 했다. 심하면 퇴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생활교육은 학생들의 몸에 밸 때까지 반복적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각생 쫓다가 다리 골절상 입기도

 
  학생들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던 金교장은 왜 이토록 시시콜콜한 것까지 간섭을 하고 심하다고 느낄 정도의 처벌을 했던 것일까. 1949년 12월20일자 서울고 교지 「경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한 가지 한 가지의 공부, 무엇 하나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되고, 교칙과 교훈의 지극히 작은 일에도 전심과 전력을 다하여야 한다. 한 번쯤 예습이나 복습을 아니 한들, 한 번쯤 지각이나 결석을 한들, 복장이 좀 정비가 못 되었기로, 청소당번에 한 번쯤 빠졌기로, 시험 때 잠깐 남의 것을 보았기로, 이런 것들쯤이야 하고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 이런 조그마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불충실한 것이 그대로 습성이 되어 큰 일에도 자연히 불충실하게 되는 법이다. 그리하여 이런 사람들은 모든 일에 불충실한 사람으로서 세상의 낙오자가 될 것이다>
 
  金교장의 생활교육은 조회시간의 訓話(훈화)를 통해 주로 이루어졌다. 金교장의 제자들은 金교장이 해외 교육계 시찰이나 방학기간 등을 빼고는 訓話를 거른 일이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심지어 비오는 날이면 장소를 옮겨서라도 조회를 했다고 한다. 金교장의 訓話는 보통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고, 간혹 訓話가 길어져 수업시간을 조정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金교장의 생활교육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학교에 나온 그가 처음 하는 일은 청소였다. 교정에 떨어진 쓰레기를 일일이 줍고 다녔고, 등교시간이 지난 후에는 교문은 물론이고 학교 울타리를 돌며 지각생이 있나를 살폈다.
 
  1953년의 일이다. 지각생 한 명이 金교장의 눈을 피해 인왕산 쪽에 둘러쳐진 철조망을 통해 들어오려다 순찰중이던 金교장의 눈에 띄었고, 학생은 줄달음쳐 달아났다. 金교장은 그 학생을 붙들기 위해 쫓아가다가 그만 실족하고 말았다. 다리를 크게 다친 그는 한동안 목발에 의지해야 했다. 훗날 도망을 쳤던 그 학생은 金교장을 찾아가 참회의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서울고 동문들 사이에 전해진다.
 
  金교장이 정한 엄격한 교칙을 큰 무리 없이 학생들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교칙의 적용이 누구에게나 공평했기 때문인 것 같다.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金容俊(김용준·서울고 8회) 변호사는 어머니가 경기여고를 나온 金교장의 제자로 金교장과 잘 아는 사이다. 하루는 金변호사가 친구들과 극장을 갔다가 지도교사에게 들켰다. 함께 간 친구들은 모두 도망을 갔지만 소아마비였던 金변호사는 도망을 갈 수가 없었다.
 
  金변호사는 함께 간 동료들의 이름을 끝내 말하지 않고 교칙대로 처벌을 받았다. 무기정학이었다. 金변호사는 그후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로 진학했다.
 
  金교장이 서울고에 뿌리내린 정신 중 하나가 反共정신이다. 그는 1956년 8월에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열린 세계교육자연맹대회에서 『미개발지역일수록 공산주의자들이 그곳을 공산화하려고 노리고 있고 또 공산화하기 쉬운 곳인데 만약 어떤 나라이거나 어떤 지역이거나 공산화된다면 우리는 교육하는 자유까지 잃어버리게 되는데 이런 미개발지역에 있는 교사들은 무엇보다도 공산주의를 막아내는 反共교육에 철저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광복 직후 일본인들이 떠나가자 金교장이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경기여고로, 출옥한 좌익계 인사가 찾아왔다. 그는 金교장에게 『이제 우리나라는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는 것이니 그리 알고 나 하는 일에 협조해야 한다』면서 『이 건물을 당분간 공산당 본부로 사용하겠으니 빌려달라』고 강압적으로 이야기했다. 金교장은 좌익계 인사에게 『공산당 세상이 되면 교원 노릇도 안 할 결심』이라면서 그 요구를 거절했다.
 
 
 
 同盟休學 없던 유일한 학교 만들다
 
  이런 金교장의 反共정신은 서울고를 광복 이후 동맹휴학이 없던 유일한 학교로 만든다. 광복 후 좌익들에 의해 동맹휴학이 유행처럼 번질 때도 서울고만은 무풍지대였던 것이다. 國大案 반대 파동으로 각 학교들이 동맹휴학에 모두 나설 때의 일이다. 하루는 학생 한 명이 金교장을 찾아왔다. 그 학생은 金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에게나 학교당국에 대하여서는 아무 불평도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좋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적인 조류를 따르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國大案 반대의 동맹휴학을 하지 않으면 이 다음에 서울대학에는 입학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울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맹휴학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말에 대한 金교장의 대답은 단호했다.
 
  『만약 서울대학이 동맹휴학을 안 했다고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런 학교에 너희들을 보내지 않겠다. 학생들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이다』
 
  서울고는 國大案 반대 동맹휴학에 참여하지 않았다.
 
  金교장의 反共정신은 학생들에 대한 6·25 참전 격려로 나타난다. 6·25 전쟁 발발 다음 날 조회 시간에 金교장은 북한의 만행에 대해 비난을 하며 전쟁과 관련된 영국의 예를 하나 들었다.
 
  『주말에 자전거를 이용하여 교외로 생물채집을 나갔다가 시내로 돌아온 퍼블릭 스쿨의 생물선생과 학생은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잠시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말없이 모병소를 찾아가서 채집통을 어깨에 멘 채로 선생과 학생이 나란히 募兵(모병)대열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우리 젊은이들도 이 어려운 위기에 처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모두 궐기해야 할 것이다』
 
  다음날 高학년 위주로 募兵대열에 많이 동참했음은 물론이다.
 
  자유민주체제 수호라는 金교장의 투철한 국가관은 서울고를 육군사관학교로 가장 많은 人材를 보내는 학교로 만든다. 전쟁 직후에 졸업한 8회의 경우는 26명이 육사로 진학한다. 이 일은 전무후무한 기록이라고 한다. 월남전 파병 훈련장에서 부하들을 대신해 산화한 姜在九(강재구) 소령도 바로 서울고 8회 졸업생이다.
 
 
 
 『학교장의 권한에 압력을 가하지 말라』
 
  金교장을 평가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우수한 敎師(교사)와 우수한 학생 확보를 위한 노력이다.
 
  金교장은 양주동, 조병화, 안병욱, 황순원, 안현필, 조영식 등 당대의 내로라 하는 人材들을 교사로 스카우트했다. 미술을 담당했던 尹在玗(윤재우) 선생은 서울고로 오기 前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대학 교수를 고등학교 교사로 데려온 것이다. 실력과 함께 교사의 품성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서울고 교사 중 신현덕이라는 분이 있었다. 서울고가 개교할 당시 신 선생은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었는데 金교장이 어느 날 그 학교로 견학을 갔다. 견학을 간 金교장의 눈에 운동장에서 열심히 잡초를 뽑고 있는 교사가 있었다. 학교로 돌아온 金교장은 그를 즉각 스카우트했고, 그가 신현덕 선생이었던 것이다.
 
  金교장은 교사를 스카우트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교사들의 복리후생에 세심한 배려를 했다는 것이다. 전쟁으로 주택난이 심했던 당시에 사택을 지어 교사들이 집 걱정을 덜게 했고, 겨울에는 땔감을 마련해 주고 김장도 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복리후생 제도였다고 한다. 나중에는 우수한 교사들이 스스로 찾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학생들을 뽑을 때도 金교장은 직접 나섰다고 한다. 졸업식 무렵이면 인근 초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쓸 만한 재목을 추천 받기도 하고 人材가 될 재목으로 보이면 직접 만나서 서울중학교 입학을 권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일은 당시 공립학교일지라도 金교장에게 교사 및 학생 선발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지금과 같은 규제 下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40여 년 前에도 金교장은 학교장의 자율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1957년 10월1일자 「교육주보」에서 金교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입학·퇴학의 사항은 학교장의 권한에 속한 일이다. 입학·퇴학에 관하여 부정한 일이 없는 한 이 학교장의 권한에 제한을 가할 다른 압력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를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은 소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덮어놓고 모든 일을 천편일률적으로 획일적으로 규정지으려 한다. 일의 잘못은 이런 사고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경기고로의 전근
 
  1957년 3월 金교장은 11년 동안 몸담았던 서울고 교장직을 사임한다. 京畿高 교장으로 가기 위해서다. 金교장은 서울고의 초대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서울고 뒷동산에 뼈를 묻겠다』는 말을 다짐처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립학교에 있는 이상 당국의 轉勤(전근)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때 離任(이임)을 하는 서울고 교정은 울음바다가 됐고 金교장을 받아들이는 京畿高 교정은 환호로 넘쳤다고 한다.
 
  金교장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졌던 서울고 학생들은 훗날 이 일로 인해 金교장에 대한 서운함을 갖게 된다. 서울고 동산에 뼈를 묻겠다던 金교장이 경기고로 부임해서는 『꿈에 그리던 경기…』라는 말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정말 金교장이 했는지는 정확지 않다. 서울고생들의 金교장에 대한 애정의 깊이와 서운함의 크기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에피소드인 것만은 분명하다.
 
  金교장은 1958년 2월28일자 「주간 경기」에서 당시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작년 4월 천만의외에도 내가 창립하여 10여 년 동안 하여 내려오던 서울을 떠나 경기로 취임하게 되었었다. 나는 그 학교 뒷동산에 뼈를 묻을 것을 결심하고 비록 이름은 공립학교이지만 내 개인의 학교 이상으로 아끼고 아껴서 그 학교를 발전시켜왔던 것이다.
 
  세상에서 무슨 영광스러운 자리를 준다 하여도 내가 자진하여서 그 학교를 떠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나도 공립학교의 교장인 한 개의 공무원이다. (경기에) 취임할 때에 나의 결심은 서울은 내가 만든 학교이고 경기는 내가 중흥하는 학교로 하겠다는 것이다〉
 
  경기고로 轉勤한 1957년이 金교장에게는 가장 불운한 해였던 것 같다. 그는 이 해에 세 번이나 재직학교를 바꾸게 된다. 서울고에서 경기고로 轉勤한 지 7개월여 만에 서울사범학교(현 서울교육대학) 교장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京畿高 학생 가운데 두 명이 깡패들과 싸우다 칼을 휘두른 사건이 문제돼 京畿高를 떠나야 했던 것이다. 金교장은 이듬해 4월 다시 京畿高 교장으로 돌아와 4·19 직후인 1960년 5월 초 京畿高를 떠난다.
 
  경기고를 떠난 후 삼선중고등학교장, 北인천중고등학교장 등을 거쳐 서울시 교육감을 역임했다. 서울시 교육감을 그만 둔 1966년에 경기공업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 다시 일선에서 後學(후학) 양성에 힘썼으나 정년을 1년쯤 남긴 1968년 12월 일본 출장중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만 64세였다.
 
  金교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하루하루를 「이지 고잉(쉽게 살기)」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런 태도는 제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학생들을 들들 볶는」 극성으로 나타났다.
 
  어슬렁거리며 천천히 걷는 것을 싫어해 교내에서 3보 이상은 구보를 시키는 등 군대를 방불케 하는 校庭 분위기를 만들었다. 3만 평이 넘는 드넓은 校庭에 종이 조각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자연 재학생들의 몸과 마음은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 때문에 동문들은 金교장의 교육방법이 현재에도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다만 학생들에게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투철한 국가관을 심어 주려고 애썼던 그의 정신만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라고 말한다.
 
  「公교육이 붕괴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金교장의 나라의 지도자를 키우기 위한 교육가로서의 열정과 정신의 계승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모른다.
 
  「公교육 붕괴」의 한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학부형과 교사 간의 믿음의 不在(부재)다. 반대로 金교장에게는 학부형과의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金교장이 서울고에 재직하는 동안 李起鵬(이기붕) 국회의장, 趙炳玉(조병옥) 박사, 朴順天(박순천) 여사, 시인 朴木月(박목월) 등은 자제들을 당시로서는 역사가 일천한 서울고에 보냈다. 金교장을 믿고 자제들을 보낸 것이다.
 
  金교장의 이같은 학부형들의 믿음에 대한 답은 열정과 헌신이었고, 그 열정과 헌신의 결과는 제자들을 「어디 가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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