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正史 CD-ROM 完刊으로 「지혜의 寶庫」를 여는 열쇠를 모두가 共有하게 됐다
한민족의 3대 正史 CD-ROM化하다
새로 시작되는 2천년을 눈앞에 두고 한민족 역사 2천년의 寶庫(보고)가 열렸다. 조선왕조실록에 이어 고려사, 삼국사기 등 3대 역사서(正史) CD-ROM 작업이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동양학 연구소장인 제임스 루이스 교수가 『과거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대 혁명』이라고 극찬했던 조선왕조실록 CD-ROM이 서울시스템(李雄根 회장)에 의해 처음 선보였던 것은 불과 4년여 전인 1995년 10월. 그 후 4년여 만에 조선왕조실록 CD-ROM 작업을 통해 확보한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삼국사기 고려사 CD-ROM 작업이 완성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2천여 년의 역사를 전산화했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일이다. 2천년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2천년의 역사를 시작할 한민족의 知的(지적) 데이터 베이스가 구축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외세의 간섭과 좌우 이념의 갈등으로 민족과 국토가 분단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한민족 앞에 놓인 화두는 통일일 수 밖에 없다. 분열된 국토를 하나로 통합했던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지혜를 얻는 작업이야말로 새로운 통일시대를 열기 위한 「첫 삽」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방대한 자료
그동안 서울시스템은 증보판 조선왕조실록 국역 CD-ROM을 간행했고(1997년 11월) 이듬해인 1998년 3월에는 학계로부터 사료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국역작업에서 빠져 있던 고종·순종실록 국역 CD-ROM을 세상에 내놓았다. 李雄根(이웅근·67) 회장의 집념이 낳은 결과였다. 몇 차례의 수정 작업을 통해 완성도를 더한 조선왕조실록 CD-ROM은 이제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인터넷상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번에 완성된 고려사 국역 CD-ROM 작업은 최초의 고려사 CD-ROM 작업은 아니다. 이미 지난 여름 누리미디어사의 「CD-ROM 고려사」가 시중에서 팔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북한 국역본을 원본으로 삼은 것이었다.
반면 서울시스템이 이번에 선보인 고려사 국역본은 부산 동아대 고전연구소가 간행한 「譯註(역주) 고려사」를 원본으로 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 CD-ROM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10여 년간의 산고 끝에 1997년 간행한 「역주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제 産苦(산고) 끝에 모습을 드러낸 3대 역사서의 면면을 살펴볼 차례다.
먼저 일반인에게도 낯설지 않은 조선왕조실록 CD-ROM을 보자.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백72년에 걸친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연 등 모든 분야를 상세히 기록한 正史(정사)로서 한문 원본 1천8백93권에 수록 글자만도 5천3백만 자가 넘는다. 26년간에 걸쳐 번역된 국역본은 16만 페이지, 1억7천2백만 자에 달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는 방대한 자료다.
조선왕조실록이 지닌 가치는 1997년 10월 유네스코에서 「세계 기록문화 유산」으로 지정했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국역 조선왕조실록 CD-ROM은 조선왕조실록 CD-ROM 간행위원회 위원으로부터 학계와 문화계, 정보산업계 등 사회 각 분야의 자문단, 전국 각 대학을 망라하는 교정 인력 및 자료 입력 작업을 담당한 직원에 이르기까지 연인원 10만 명과 50억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돼 1995년 초판본이 간행됐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민족문화추진회의 조선왕조실록 국역사업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1백61개 항목에 달하는 분류 색인 사업은 30여 년에 걸쳐 2백억원 정도의 예산과 5천여 명의 전문 연구 인력이 참여한 長征(장정)이었다.
조선왕조실록 CD-ROM 첫 출간은 출발점에 지나지 않았다. 1997년 증보판에는 윈도 95용 프로그램 개발과 철종조에 이르는 모든 기사에 대한 분류 색인 데이터 작업이 이루어졌다. 전문가를 위한 원전 소개 정보 데이터도 추가되었다. 이밖에 영어, 일본어, 불어 등 세계 각국의 언어 환경에서 실록을 열람할 수 있는 다국어판도 개발됐다.
이듬해 나온 보급판도 눈여겨 볼 만하다. 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기록 내용을 한 장의 CD-ROM에 담아 모든 정보를 한 번에 검색할 수 있게 되었고 괄호 속에 병기한 한자를 한 글자 단위로 검색할 수 있게 함으로써 전문정보 검색률을 높였다. KS 표준漢字는 물론 비표준漢字도 1만5천 자까지 편집이 가능하게 한 것이나,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을 위해 인터페이스를 개선한 것도 새로운 발전이었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이 문화혁명 야기
이처럼 다양하고 강력한 검색 기능을 갖춘 조선왕조실록 CD-ROM은 루이스 교수가 「예언」한 것처럼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일례로 드라마 「용의 눈물」의 작가 李煥慶(이환경)씨는 「용의 눈물」에서 새롭게 조명한 趙英茂(조영무) 같은 인물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조선왕조실록 CD-ROM이 존재했던 덕분이라고 고백했다.
이 때문에 趙英茂의 한 후손들은 서울시스템측에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비단 「용의 눈물」 같은 사극뿐 아니다. TV에선 「TV 조선왕조실록」 같은 역사 다큐멘터리 제작이 잇따랐고, 서점가에선 조선왕조실록 CD-ROM을 이용한 풍속서, 역사서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국민대 사학과의 池斗煥(지두환) 교수의 말을 들어본다.
『한자를 잘 모르고 전통과 컴퓨터는 전혀 별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세대가 요즘 대학생들입니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이 없었다면 이들과 함께 역사 연구작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 CD-ROM의 뒤늦은 출간에 아쉬움을 표시하는 이들도 있다. 1995년 10월 당시 출간기념회에 참석했던 외국어대 사학과 朴星來(박성래) 교수 같은 학자들이다.
朴교수는 모 방송사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심경을 털어놓았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을 처음 봤을 때 속된 말로 기분이 떨떠름했어요. 수십년간 수천 장의 기록을 뒤져 나름대로 2천 장에 가까운 기록을 만들어 정리했는데 다 쓸데없는 일이 돼버렸잖아요』
李成茂(이성무) 국사편찬위원장(당시 정신문화연구원 교수)도 『대단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 이런 CD-ROM이 나왔다면 노력이 절약될 수 있었을 텐데』 라며 말끝을 흐렸다.
놀라움은 해외에서도 이어졌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이 처음 해외에 소개된 것은 1997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한국학관련 학술 연구회였다. 옥스퍼드 대학의 루이스 교수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이제 자료 검색이란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가히 혁명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참석자들은 놀랐고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또한 試演(시연)이 끝난 뒤에는 모두 일어나 질문을 던지는 등 열광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일본 천리대학의 한국학 학자 히라키(平木實) 교수도 조선왕조실록 CD-ROM의 발간을 누구보다 기뻐했던 사람 중의 하나다. 그는 한문 원문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잘 번역돼 있다는 점에서 조선왕조실록 CD-ROM은 한국 역사를 연구하는 자신과 같은 외국인 학자에게 더할 수 없이 편리한 도구로 이용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원전 1백39권 1백 책의 고려사는 고려왕조 34대 4백75년에 대한 대표적인 正史로서 고려시대 전공자는 물론 한국사 연구자에게 빼놓을 수 없는 사료다.
고려사 편찬 작업은 조선 태조가 開國(개국) 후 鄭道傳(정도전) 등에게 명하여 고려의 역대 실록과 閔漬(민지)의 綱目(강목), 李齊賢(이제현)의 史略(사략) 등을 참고, 37권의 編年體(편년체:연대에 따라 엮는 역사편찬 체제)로 간행한 것이 시작이었다. 후대에 태종이 다시 교정을 명하고 세종의 명으로 史局(사국)을 열어 鄭麟趾(정인지)·金宗瑞(김종서) 등이 紀傳體(기전체:중국의 史記에서 시작된 역사 서술방법. 본기, 열전, 志表 등으로 나뉨)로 고쳐 편찬하기 시작했다. 완성을 본 것은 문종에 이르러서였으며 단종 2년인 1454년 간행이 시작되었다.
고려사의 편찬 양식인 기전체는 중국 司馬遷(사마천)의 史記(사기)에서 유래한 역사 서술방식의 하나로 고려사의 경우는 世家(세가), 志(지), 表(표), 列傳(열전)의 네 항목으로 나뉘어 서술되었다. 하지만 고려사의 가치는 역시 고려시대의 근본 사료에 의거해 씌어졌다는 점에서 크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고려사 譯註 작업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공교롭게도 고려사 역주사업은 남북한에서 비슷한 시기에 추진되었다. 남한에서는 동아대 고전연구소가, 북한에서는 사회과학원 고전연구실이 담당했다.
북한의 역주사업은 朴時亨(박시형) 등 역사학·한문학·민속학 관련 학자 60여 명이 참여해 1962년부터 1966년까지 5년여에 걸쳐 추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고려사 역주본은 세가 4책, 지·표가 3책, 열전 4책 등 모두 11책으로 완간되었는데 우리말로 쉽게 풀어썼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주석 처리가 제한적이며 부분적으로 의역이 심하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동아대의 고려사 역주사업은 1960년 10월 이 대학교에 고전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우리 고전의 수집과 역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 대학 鄭在煥(정재환) 총장이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였다. 영남의 원로 한학자인 成純永(성순영), 河性在(하성재)씨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고려사 역주사업의 초역이 나온 것은 연구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1962년. 그러나 이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출판하지 못하고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역주사업이 다시 본 궤도에 오른 것은 1963년 2월, 丁仲煥(정중환) 교수가 연구소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車柱環, 金光哲 교수 등이 참여
丁소장은 우선 집필진을 새롭게 구성했다. 서울대 車柱環(차주환) 교수 등 한문과 역사에 조예가 깊은 학자를 뽑아 연구위원으로 위촉하고 이들에게 이미 씌어진 舊稿(구고)에 관계없이 다시 집필을 부탁했다.
이 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65년에 「譯註 高麗史(역주 고려사)」 제1책이 출간되고 1973년엔 색인 1책을 포함하여 全11권이 완간되었다.
고려사 譯註사업은 대학 연구소의 역량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삼국사기 등 비교적 소규모 原典(원전)은 일찍이 학자의 관심에 따라 개인적으로도 譯註가 이루어졌지만 고려사와 같은 거질(巨帙)의 史書가 대학 차원에서 譯註되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譯註가 1960년대 후반에야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됐다는 사실에 비추어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번에 서울시스템에서 간행한 고려사 국역 CD-ROM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문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주석을 붙여 간행한 국역본과 함께 마침표, 쉼표, 나열점 등 표점기호를 사용해 정리한 原典을 동시에 수록했다는 점이다.
둘째, 고종·순종실록에 이어 고려사 原典에도 一字(낱자) 검색 방법을 채택, 한문 典籍(전적)연구에 진전을 이루었다. 버튼 하나로 한문 原典과 국역본을 바로 참조할 수 있도록 신경을 쓴 것이다.
고려사 紀傳體 서술체제에 맞춰 CD-ROM을 편찬했으며 각종 자료를 손쉽게 찾을 수 있도록 王代·연도별 검색, 항목별 검색, 자연어 검색 등의 강력한 기능을 첨가했다.
동아대학교 사학과 金光哲 교수는 고려사 CD-ROM 작업의 핵심 인물이다. 그의 설명을 들어본다.
『사실 CD-ROM 작업의 필요성에 대해선 저를 비롯한 우리 대학 교수들도 진작부터 인식을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시스템에서도 고려사까지 CD-ROM化가 완성돼야 삼국사기에서 출발한 일련의 正史가 전산화되는 셈이니까 적극적으로 나섰구요』
金교수는 국역작업을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1998년 겨울부터 거의 매일 서울시스템 팀과 E-메일을 주고받으며 CD-ROM 제작 全과정에 걸쳐 참여했다.
金교수는 『국역본 자체가 북한 것에 비해 주석이 많고 내용에 인용된 유교 13 경전을 충실히 소개한 만큼, 역사뿐 아니라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활용도가 클 것』이라며 『조선왕조실록 CD-ROM 과 마찬가지로 고려사 CD-ROM 역시 이번 간행 후에도 譯註를 부드럽게 하는 등 보완 작업이 계속될 것』 이라고 말했다.
삼국사기 CD-ROM의 의미
三國史記는 앞서 설명한 조선왕조실록 나 고려사와는 달리 광복 이후 지금까지 남북한 양쪽 모두 수십 종의 번역본이 간행됐다. 상대적으로 原典의 내용이 적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울시스템은 어떤 국역본을 원전으로 삼을 것인지에 대해 세심한 신경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번에 원본으로 선택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역주 삼국사기」는 1987년부터 4년여에 걸쳐 이루어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공동연구 산물이다.
한국정신문화원 鄭求福(정구복) 교수에 따르면 현재 삼국사기 정본으로 인정받는 中宗(조선조 11대 왕) 목판본조차 오자가 대단히 많다고 한다. 때문에 여러 판본을 대조해가며 한자 한자 수정작업을 거쳐야 했다. 그런 상황이니 기존에 나온 번역본의 부실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鄭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막상 국역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우선 원본이 여러 종류였고, 이미 나와 있던 국역본도 오류가 심해 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앞서 국역을 한 것조차 참조하지 않고 작업했기 때문인지 뒤에 나온 번역물이 더 엉성한 경우도 적잖았습니다. 일례로 故 李丙燾(이병도) 박사 것은 우리 나라 학자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지 않은 채 일본 학자 것만 참조해 해석의 폭이 좁았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鄭교수 등은 「역주 삼국사기」를 만들면서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국역본을 참고하는 등 성의를 다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역주 삼국사기」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본문의 정확한 국역. 둘째, 학계의 연구 성과가 집적된 주석. 끝으로 완벽에 가까운 한문 원전과의 교감이 그것이다.
CD-ROM 삼국사기는 「역주 삼국사기」를 더욱 발전시켜 본문의 열람은 물론, 번역문, 원문, 역주 검색기능, 출력, 인쇄 등 다양한 컴퓨터상의 기능을 지원했다.
특히 한문 原典을 스캐닝해서 수록한 뒤 「原文 이미지 보기」 기능을 통해 한 화면에서 동시에 참조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인도 손쉽게 삼국시대의 생생한 모습을 접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1998년 초 시작된 삼국사기 CD-ROM 작업은 1999년 11월까지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다. 내용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原典에 있는 한자들이 없어 일일이 새로 활자를 만들고 이를 컴퓨터에 심는 프로그램을 짜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鄭교수를 비롯한 한국정신문화원 학자들이 서울시스템 기술진과 세밀한 협의를 하는 등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사 CD-ROM 작업에서 엿볼 수 있듯 삼국사기 CD-ROM 작업도 한국정신문화원과 서울시스템의 의지가 以心傳心(이심전심)으로 통한 케이스다. 지적소유권은 한국정신문화원 쪽에 있지만 비용을 댄 서울시스템에서 판매권을 가지고 판매수익의 10% 정도를 한국정신문화원 쪽에 양도하는 방식이다.
『한국이 IMF 수모를 겪은 최근 1~2년 간 미국 등 외국에선 문화기반이 약한 나라가 졸부 행세를 한 당연한 결과라는 시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 민족이 가진 문화적 역량이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합니다』
외국의 한국학 연구가들이 애용
서울시스템 李南姬(이남희) 실장은 조선왕조실록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역사서 CD-ROM 작업이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李실장의 이러한 생각은 1997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발표자로 참석했던 하버드대학의 마일란 교수와 만남에서 확인된 것이다.
당시 한국의 書院(서원)에 관심을 갖고 있던 마일란 교수는 이미 조선왕조실록 CD-ROM을 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李 실장과 만난 마일란 교수는 『조선왕조실록 CD-ROM이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서의 CD-ROM 작업은 한민족에 있어선 선조가 남긴 지혜의 寶庫를 여는 열쇠가 되지만, 외국인에게는 한국이란 나라의 존재와 문화적 뛰어남을 홍보하는 매개체가 된다는 말이다.
어떤 첨단 문화상품이라 해도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문화 기반 위에서 나온다.
지난 10여년간 영화팬을 사로잡았던 「스타워즈」 스토리가 일본 무사들의 이야기 구조를 차용했던 것이나, 얼마 전 개봉돼 마니아들의 관심을 모았던 영화 「매트릭스」가 성서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처럼 가치 있고 중요한 사업이 어떻게 추진돼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동안 서울시스템과 李雄根 회장이 도맡다시피 역사서 CD-ROM 작업을 진행한 것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찬사와 격려를 보냈다.
하지만 한 켠에서는 중소기업에게 이런 중요한 사업을 맡기기보다는 국가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했어야 하지 않았냐는 의문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CD-ROM 보급에 힘써야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CD-ROM 작업의 실무작업을 총괄했던 金炫(김현) 박사(전 서울시스템 상무·대덕연구단지 연구개발정보센터)는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가 처음부터 조선왕조실록 CD-ROM 작업 등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지원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국가가 추진하는 사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완전한 공익적 사업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어느 기업에게 특혜를 줄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이윤이 창출되는 사업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서를 CD-ROM으로 만든다는 것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만약 정부가 서울시스템을 대신해 사업을 진행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우수한 성과물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같은 사업이야말로 신명을 바쳐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李雄根 회장 같은 이가 있어야 하고, 동시에 민간기업의 장점인 치밀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의 할 일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 金박사의 생각이다. 그것은 바로 조선왕조실록 CD-ROM처럼 민간기업에서 주도적으로 진행한 성과물이 국가적 지식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있어 뚜렷한 효과가 인정된다면, 이것의 보급을 지원하는 일이다.
각급 학교나 연구소에서 역사, 사회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CD-ROM을 구입하는 경우 그 비용을 지원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아직 우리 정부의 생각은 이에 못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1995년 조선왕조실록 CD-ROM 출간으로 촉발된 문화적 파장은 사람들의 가치관 자체를 바꾸었다. 학문하는 방법, 시간과 노력의 투자에 대한 생산성 자체가 달라졌다.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제 비슷한 성과물이 나온다 해도 그 반향은 지금처럼 크지 않을 것이다.
金炫 박사는 최근 들어서는 가치관의 변화가 너무 급속히 일어나 역사서를 CD-ROM으로 만드는 작업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는 조선왕조실록 CD-ROM 작업을 콜럼버스의 달걀에 비유한다.
『돈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섬세한 작업을 해낼 수 있는 기술과, 문화 사업 의지를 가진 기업가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金炫 박사는 요즘 사람들이 서울시스템이 이루어낸 일련의 성과물에 도취돼 이것이 나오기까지 어떤 준비와 희생이 있었는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더불어 金박사는 이제 첨단 정보자원과 무형의 데이터 베이스라는 「무기」를 자유자재로 쓸 줄 알면서도 조상이 남긴 우리 문화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가진 20~30代 젊은이들이 李박사나 자신의 뒤를 이어 이 사업에 뛰어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동양학 연구소장인 제임스 루이스 교수가 『과거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대 혁명』이라고 극찬했던 조선왕조실록 CD-ROM이 서울시스템(李雄根 회장)에 의해 처음 선보였던 것은 불과 4년여 전인 1995년 10월. 그 후 4년여 만에 조선왕조실록 CD-ROM 작업을 통해 확보한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삼국사기 고려사 CD-ROM 작업이 완성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2천여 년의 역사를 전산화했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일이다. 2천년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2천년의 역사를 시작할 한민족의 知的(지적) 데이터 베이스가 구축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외세의 간섭과 좌우 이념의 갈등으로 민족과 국토가 분단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한민족 앞에 놓인 화두는 통일일 수 밖에 없다. 분열된 국토를 하나로 통합했던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지혜를 얻는 작업이야말로 새로운 통일시대를 열기 위한 「첫 삽」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방대한 자료
그동안 서울시스템은 증보판 조선왕조실록 국역 CD-ROM을 간행했고(1997년 11월) 이듬해인 1998년 3월에는 학계로부터 사료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국역작업에서 빠져 있던 고종·순종실록 국역 CD-ROM을 세상에 내놓았다. 李雄根(이웅근·67) 회장의 집념이 낳은 결과였다. 몇 차례의 수정 작업을 통해 완성도를 더한 조선왕조실록 CD-ROM은 이제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인터넷상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번에 완성된 고려사 국역 CD-ROM 작업은 최초의 고려사 CD-ROM 작업은 아니다. 이미 지난 여름 누리미디어사의 「CD-ROM 고려사」가 시중에서 팔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북한 국역본을 원본으로 삼은 것이었다.
반면 서울시스템이 이번에 선보인 고려사 국역본은 부산 동아대 고전연구소가 간행한 「譯註(역주) 고려사」를 원본으로 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 CD-ROM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10여 년간의 산고 끝에 1997년 간행한 「역주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제 産苦(산고) 끝에 모습을 드러낸 3대 역사서의 면면을 살펴볼 차례다.
먼저 일반인에게도 낯설지 않은 조선왕조실록 CD-ROM을 보자.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백72년에 걸친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연 등 모든 분야를 상세히 기록한 正史(정사)로서 한문 원본 1천8백93권에 수록 글자만도 5천3백만 자가 넘는다. 26년간에 걸쳐 번역된 국역본은 16만 페이지, 1억7천2백만 자에 달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는 방대한 자료다.
조선왕조실록이 지닌 가치는 1997년 10월 유네스코에서 「세계 기록문화 유산」으로 지정했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국역 조선왕조실록 CD-ROM은 조선왕조실록 CD-ROM 간행위원회 위원으로부터 학계와 문화계, 정보산업계 등 사회 각 분야의 자문단, 전국 각 대학을 망라하는 교정 인력 및 자료 입력 작업을 담당한 직원에 이르기까지 연인원 10만 명과 50억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돼 1995년 초판본이 간행됐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민족문화추진회의 조선왕조실록 국역사업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1백61개 항목에 달하는 분류 색인 사업은 30여 년에 걸쳐 2백억원 정도의 예산과 5천여 명의 전문 연구 인력이 참여한 長征(장정)이었다.
조선왕조실록 CD-ROM 첫 출간은 출발점에 지나지 않았다. 1997년 증보판에는 윈도 95용 프로그램 개발과 철종조에 이르는 모든 기사에 대한 분류 색인 데이터 작업이 이루어졌다. 전문가를 위한 원전 소개 정보 데이터도 추가되었다. 이밖에 영어, 일본어, 불어 등 세계 각국의 언어 환경에서 실록을 열람할 수 있는 다국어판도 개발됐다.
이듬해 나온 보급판도 눈여겨 볼 만하다. 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기록 내용을 한 장의 CD-ROM에 담아 모든 정보를 한 번에 검색할 수 있게 되었고 괄호 속에 병기한 한자를 한 글자 단위로 검색할 수 있게 함으로써 전문정보 검색률을 높였다. KS 표준漢字는 물론 비표준漢字도 1만5천 자까지 편집이 가능하게 한 것이나,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을 위해 인터페이스를 개선한 것도 새로운 발전이었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이 문화혁명 야기
이처럼 다양하고 강력한 검색 기능을 갖춘 조선왕조실록 CD-ROM은 루이스 교수가 「예언」한 것처럼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일례로 드라마 「용의 눈물」의 작가 李煥慶(이환경)씨는 「용의 눈물」에서 새롭게 조명한 趙英茂(조영무) 같은 인물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조선왕조실록 CD-ROM이 존재했던 덕분이라고 고백했다.
이 때문에 趙英茂의 한 후손들은 서울시스템측에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비단 「용의 눈물」 같은 사극뿐 아니다. TV에선 「TV 조선왕조실록」 같은 역사 다큐멘터리 제작이 잇따랐고, 서점가에선 조선왕조실록 CD-ROM을 이용한 풍속서, 역사서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국민대 사학과의 池斗煥(지두환) 교수의 말을 들어본다.
『한자를 잘 모르고 전통과 컴퓨터는 전혀 별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세대가 요즘 대학생들입니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이 없었다면 이들과 함께 역사 연구작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 CD-ROM의 뒤늦은 출간에 아쉬움을 표시하는 이들도 있다. 1995년 10월 당시 출간기념회에 참석했던 외국어대 사학과 朴星來(박성래) 교수 같은 학자들이다.
朴교수는 모 방송사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심경을 털어놓았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을 처음 봤을 때 속된 말로 기분이 떨떠름했어요. 수십년간 수천 장의 기록을 뒤져 나름대로 2천 장에 가까운 기록을 만들어 정리했는데 다 쓸데없는 일이 돼버렸잖아요』
李成茂(이성무) 국사편찬위원장(당시 정신문화연구원 교수)도 『대단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 이런 CD-ROM이 나왔다면 노력이 절약될 수 있었을 텐데』 라며 말끝을 흐렸다.
놀라움은 해외에서도 이어졌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이 처음 해외에 소개된 것은 1997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한국학관련 학술 연구회였다. 옥스퍼드 대학의 루이스 교수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이제 자료 검색이란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가히 혁명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참석자들은 놀랐고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또한 試演(시연)이 끝난 뒤에는 모두 일어나 질문을 던지는 등 열광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일본 천리대학의 한국학 학자 히라키(平木實) 교수도 조선왕조실록 CD-ROM의 발간을 누구보다 기뻐했던 사람 중의 하나다. 그는 한문 원문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잘 번역돼 있다는 점에서 조선왕조실록 CD-ROM은 한국 역사를 연구하는 자신과 같은 외국인 학자에게 더할 수 없이 편리한 도구로 이용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원전 1백39권 1백 책의 고려사는 고려왕조 34대 4백75년에 대한 대표적인 正史로서 고려시대 전공자는 물론 한국사 연구자에게 빼놓을 수 없는 사료다.
고려사 편찬 작업은 조선 태조가 開國(개국) 후 鄭道傳(정도전) 등에게 명하여 고려의 역대 실록과 閔漬(민지)의 綱目(강목), 李齊賢(이제현)의 史略(사략) 등을 참고, 37권의 編年體(편년체:연대에 따라 엮는 역사편찬 체제)로 간행한 것이 시작이었다. 후대에 태종이 다시 교정을 명하고 세종의 명으로 史局(사국)을 열어 鄭麟趾(정인지)·金宗瑞(김종서) 등이 紀傳體(기전체:중국의 史記에서 시작된 역사 서술방법. 본기, 열전, 志表 등으로 나뉨)로 고쳐 편찬하기 시작했다. 완성을 본 것은 문종에 이르러서였으며 단종 2년인 1454년 간행이 시작되었다.
고려사의 편찬 양식인 기전체는 중국 司馬遷(사마천)의 史記(사기)에서 유래한 역사 서술방식의 하나로 고려사의 경우는 世家(세가), 志(지), 表(표), 列傳(열전)의 네 항목으로 나뉘어 서술되었다. 하지만 고려사의 가치는 역시 고려시대의 근본 사료에 의거해 씌어졌다는 점에서 크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고려사 譯註 작업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공교롭게도 고려사 역주사업은 남북한에서 비슷한 시기에 추진되었다. 남한에서는 동아대 고전연구소가, 북한에서는 사회과학원 고전연구실이 담당했다.
북한의 역주사업은 朴時亨(박시형) 등 역사학·한문학·민속학 관련 학자 60여 명이 참여해 1962년부터 1966년까지 5년여에 걸쳐 추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고려사 역주본은 세가 4책, 지·표가 3책, 열전 4책 등 모두 11책으로 완간되었는데 우리말로 쉽게 풀어썼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주석 처리가 제한적이며 부분적으로 의역이 심하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동아대의 고려사 역주사업은 1960년 10월 이 대학교에 고전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우리 고전의 수집과 역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 대학 鄭在煥(정재환) 총장이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였다. 영남의 원로 한학자인 成純永(성순영), 河性在(하성재)씨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고려사 역주사업의 초역이 나온 것은 연구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1962년. 그러나 이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출판하지 못하고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역주사업이 다시 본 궤도에 오른 것은 1963년 2월, 丁仲煥(정중환) 교수가 연구소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車柱環, 金光哲 교수 등이 참여
丁소장은 우선 집필진을 새롭게 구성했다. 서울대 車柱環(차주환) 교수 등 한문과 역사에 조예가 깊은 학자를 뽑아 연구위원으로 위촉하고 이들에게 이미 씌어진 舊稿(구고)에 관계없이 다시 집필을 부탁했다.
이 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65년에 「譯註 高麗史(역주 고려사)」 제1책이 출간되고 1973년엔 색인 1책을 포함하여 全11권이 완간되었다.
고려사 譯註사업은 대학 연구소의 역량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삼국사기 등 비교적 소규모 原典(원전)은 일찍이 학자의 관심에 따라 개인적으로도 譯註가 이루어졌지만 고려사와 같은 거질(巨帙)의 史書가 대학 차원에서 譯註되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譯註가 1960년대 후반에야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됐다는 사실에 비추어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번에 서울시스템에서 간행한 고려사 국역 CD-ROM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문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주석을 붙여 간행한 국역본과 함께 마침표, 쉼표, 나열점 등 표점기호를 사용해 정리한 原典을 동시에 수록했다는 점이다.
둘째, 고종·순종실록에 이어 고려사 原典에도 一字(낱자) 검색 방법을 채택, 한문 典籍(전적)연구에 진전을 이루었다. 버튼 하나로 한문 原典과 국역본을 바로 참조할 수 있도록 신경을 쓴 것이다.
고려사 紀傳體 서술체제에 맞춰 CD-ROM을 편찬했으며 각종 자료를 손쉽게 찾을 수 있도록 王代·연도별 검색, 항목별 검색, 자연어 검색 등의 강력한 기능을 첨가했다.
동아대학교 사학과 金光哲 교수는 고려사 CD-ROM 작업의 핵심 인물이다. 그의 설명을 들어본다.
『사실 CD-ROM 작업의 필요성에 대해선 저를 비롯한 우리 대학 교수들도 진작부터 인식을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시스템에서도 고려사까지 CD-ROM化가 완성돼야 삼국사기에서 출발한 일련의 正史가 전산화되는 셈이니까 적극적으로 나섰구요』
金교수는 국역작업을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1998년 겨울부터 거의 매일 서울시스템 팀과 E-메일을 주고받으며 CD-ROM 제작 全과정에 걸쳐 참여했다.
金교수는 『국역본 자체가 북한 것에 비해 주석이 많고 내용에 인용된 유교 13 경전을 충실히 소개한 만큼, 역사뿐 아니라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활용도가 클 것』이라며 『조선왕조실록 CD-ROM 과 마찬가지로 고려사 CD-ROM 역시 이번 간행 후에도 譯註를 부드럽게 하는 등 보완 작업이 계속될 것』 이라고 말했다.
삼국사기 CD-ROM의 의미
三國史記는 앞서 설명한 조선왕조실록 나 고려사와는 달리 광복 이후 지금까지 남북한 양쪽 모두 수십 종의 번역본이 간행됐다. 상대적으로 原典의 내용이 적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울시스템은 어떤 국역본을 원전으로 삼을 것인지에 대해 세심한 신경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번에 원본으로 선택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역주 삼국사기」는 1987년부터 4년여에 걸쳐 이루어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공동연구 산물이다.
한국정신문화원 鄭求福(정구복) 교수에 따르면 현재 삼국사기 정본으로 인정받는 中宗(조선조 11대 왕) 목판본조차 오자가 대단히 많다고 한다. 때문에 여러 판본을 대조해가며 한자 한자 수정작업을 거쳐야 했다. 그런 상황이니 기존에 나온 번역본의 부실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鄭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막상 국역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우선 원본이 여러 종류였고, 이미 나와 있던 국역본도 오류가 심해 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앞서 국역을 한 것조차 참조하지 않고 작업했기 때문인지 뒤에 나온 번역물이 더 엉성한 경우도 적잖았습니다. 일례로 故 李丙燾(이병도) 박사 것은 우리 나라 학자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지 않은 채 일본 학자 것만 참조해 해석의 폭이 좁았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鄭교수 등은 「역주 삼국사기」를 만들면서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국역본을 참고하는 등 성의를 다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역주 삼국사기」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본문의 정확한 국역. 둘째, 학계의 연구 성과가 집적된 주석. 끝으로 완벽에 가까운 한문 원전과의 교감이 그것이다.
CD-ROM 삼국사기는 「역주 삼국사기」를 더욱 발전시켜 본문의 열람은 물론, 번역문, 원문, 역주 검색기능, 출력, 인쇄 등 다양한 컴퓨터상의 기능을 지원했다.
특히 한문 原典을 스캐닝해서 수록한 뒤 「原文 이미지 보기」 기능을 통해 한 화면에서 동시에 참조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인도 손쉽게 삼국시대의 생생한 모습을 접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1998년 초 시작된 삼국사기 CD-ROM 작업은 1999년 11월까지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다. 내용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原典에 있는 한자들이 없어 일일이 새로 활자를 만들고 이를 컴퓨터에 심는 프로그램을 짜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鄭교수를 비롯한 한국정신문화원 학자들이 서울시스템 기술진과 세밀한 협의를 하는 등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사 CD-ROM 작업에서 엿볼 수 있듯 삼국사기 CD-ROM 작업도 한국정신문화원과 서울시스템의 의지가 以心傳心(이심전심)으로 통한 케이스다. 지적소유권은 한국정신문화원 쪽에 있지만 비용을 댄 서울시스템에서 판매권을 가지고 판매수익의 10% 정도를 한국정신문화원 쪽에 양도하는 방식이다.
『한국이 IMF 수모를 겪은 최근 1~2년 간 미국 등 외국에선 문화기반이 약한 나라가 졸부 행세를 한 당연한 결과라는 시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 민족이 가진 문화적 역량이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합니다』
외국의 한국학 연구가들이 애용
서울시스템 李南姬(이남희) 실장은 조선왕조실록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역사서 CD-ROM 작업이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李실장의 이러한 생각은 1997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발표자로 참석했던 하버드대학의 마일란 교수와 만남에서 확인된 것이다.
당시 한국의 書院(서원)에 관심을 갖고 있던 마일란 교수는 이미 조선왕조실록 CD-ROM을 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李 실장과 만난 마일란 교수는 『조선왕조실록 CD-ROM이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서의 CD-ROM 작업은 한민족에 있어선 선조가 남긴 지혜의 寶庫를 여는 열쇠가 되지만, 외국인에게는 한국이란 나라의 존재와 문화적 뛰어남을 홍보하는 매개체가 된다는 말이다.
어떤 첨단 문화상품이라 해도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문화 기반 위에서 나온다.
지난 10여년간 영화팬을 사로잡았던 「스타워즈」 스토리가 일본 무사들의 이야기 구조를 차용했던 것이나, 얼마 전 개봉돼 마니아들의 관심을 모았던 영화 「매트릭스」가 성서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처럼 가치 있고 중요한 사업이 어떻게 추진돼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동안 서울시스템과 李雄根 회장이 도맡다시피 역사서 CD-ROM 작업을 진행한 것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찬사와 격려를 보냈다.
하지만 한 켠에서는 중소기업에게 이런 중요한 사업을 맡기기보다는 국가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했어야 하지 않았냐는 의문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CD-ROM 보급에 힘써야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CD-ROM 작업의 실무작업을 총괄했던 金炫(김현) 박사(전 서울시스템 상무·대덕연구단지 연구개발정보센터)는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가 처음부터 조선왕조실록 CD-ROM 작업 등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지원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국가가 추진하는 사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완전한 공익적 사업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어느 기업에게 특혜를 줄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이윤이 창출되는 사업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서를 CD-ROM으로 만든다는 것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만약 정부가 서울시스템을 대신해 사업을 진행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우수한 성과물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같은 사업이야말로 신명을 바쳐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李雄根 회장 같은 이가 있어야 하고, 동시에 민간기업의 장점인 치밀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의 할 일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 金박사의 생각이다. 그것은 바로 조선왕조실록 CD-ROM처럼 민간기업에서 주도적으로 진행한 성과물이 국가적 지식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있어 뚜렷한 효과가 인정된다면, 이것의 보급을 지원하는 일이다.
각급 학교나 연구소에서 역사, 사회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CD-ROM을 구입하는 경우 그 비용을 지원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아직 우리 정부의 생각은 이에 못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1995년 조선왕조실록 CD-ROM 출간으로 촉발된 문화적 파장은 사람들의 가치관 자체를 바꾸었다. 학문하는 방법, 시간과 노력의 투자에 대한 생산성 자체가 달라졌다.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제 비슷한 성과물이 나온다 해도 그 반향은 지금처럼 크지 않을 것이다.
金炫 박사는 최근 들어서는 가치관의 변화가 너무 급속히 일어나 역사서를 CD-ROM으로 만드는 작업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는 조선왕조실록 CD-ROM 작업을 콜럼버스의 달걀에 비유한다.
『돈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섬세한 작업을 해낼 수 있는 기술과, 문화 사업 의지를 가진 기업가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金炫 박사는 요즘 사람들이 서울시스템이 이루어낸 일련의 성과물에 도취돼 이것이 나오기까지 어떤 준비와 희생이 있었는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더불어 金박사는 이제 첨단 정보자원과 무형의 데이터 베이스라는 「무기」를 자유자재로 쓸 줄 알면서도 조상이 남긴 우리 문화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가진 20~30代 젊은이들이 李박사나 자신의 뒤를 이어 이 사업에 뛰어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