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논단 李度珩 발행인: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상고중)
●한길소식 발행인 咸允植:징역 1년 만기 출소
●한길소식 편집인 孫昌植: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확정)
●인사이드 월드 발행인 孫忠武:징역 2년 확정(복역중)
●월드 코리아 발행인 千奉宰:민사소송 1심 패소(손해배상 5천만원 지급 판결),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항소중)
●「피고인이 사실이라 주장한 것은 허위 사실이며, 보도 내용은 평가가 아닌 사실 摘示로 볼 수 있다」(李度珩 사건 2심 판결문)
●「대통령은 王과 같은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 특히 대통령은 언론의 혹독한 비판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姜信玉 변호사)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자신의 명예훼손을 문제삼아 고소한 사례가 없다』(咸成得 교수)
●한길소식 발행인 咸允植:징역 1년 만기 출소
●한길소식 편집인 孫昌植: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확정)
●인사이드 월드 발행인 孫忠武:징역 2년 확정(복역중)
●월드 코리아 발행인 千奉宰:민사소송 1심 패소(손해배상 5천만원 지급 판결),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항소중)
●「피고인이 사실이라 주장한 것은 허위 사실이며, 보도 내용은 평가가 아닌 사실 摘示로 볼 수 있다」(李度珩 사건 2심 판결문)
●「대통령은 王과 같은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 특히 대통령은 언론의 혹독한 비판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姜信玉 변호사)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자신의 명예훼손을 문제삼아 고소한 사례가 없다』(咸成得 교수)
「예상했던 대로」 有罪
지난 11월9일 오후 2시. 서울 고등법원 403호 법정. 金大中(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인 1997년에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며 고발한 사건의 2심 宣告(선고)가 있었다. 피고인은 한국논단 발행인 李度珩(이도형)씨. 李씨는 「金大中씨의 평생 거짓말을 한 번도 안했다는 거짓말을 벗긴다」는 기사 등을 한국논단에 실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이날 재판은 현직 대통령이 관련된 刑事(형사)사건에 대한 2심 宣告여서 주목을 끌었다. 대법원의 판단이 한번 더 남아 있긴 하지만 대법원에서는 법률 적용 여부를 다루는 법률심이고, 사실 여부에 대한 심리는 2심에서 끝이다. 吳制道(오제도) 金東煥(김동환) 姜信玉(강신옥) 林炚圭(임광규) 변호사가 이 사건에서 李씨를 변론했다.
姜信玉 변호사는 2심 선고를 앞둔 결심 공판에서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은 최고의 공직자로 옛날 王(왕)과 같은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며 『모든 공직자가 다 언론의 감시와 비판을 받는데 인색해서는 안되지만 특히 대통령은 언론의 혹독한 비판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고, 이것이 바로 민주정치의 관용성이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근본적인 보루』라고 주장했다.
姜변호사는 『만약에 대통령 후보를 비판한 내용을 가지고, 그 비판한 언론인을 형사상 문제를 삼는다고 하면, 언론인이 형사상 소추될지 모른다는 恐怖(공포) 때문에 용기 있게 자기 의견을 말할 수가 없게 되고, 그러면 이 땅에서 언론의 자유는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는 취지로 無罪(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고법 형사 10부(재판장·이강국 부장판사)는 『피고인이 사실이라고 주장한 것은 허위 사실이며, 보도 내용이 의견이나 논평일 뿐 사실을 摘示(적시)한 것이 아니므로 명예훼손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피고인은 주장하나, 사실 摘示로 볼 수 있으며, 피고인의 사회적 활동 前歷(전력)과 한국논단의 보도 성향으로 미루어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항소를 기각했다.
李씨 변호인단은 『보도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사실관계 규명이 재판의 쟁점인데 李씨의 사회적 활동과 한국논단의 성향 등을 문제삼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고 말했다. 당사자인 李씨는 『정치적 판단에 따른 판결이며, 예상했던 결과』라고 말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였을 때, 그를 비판해 金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당해 有罪(유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李度珩씨 혼자가 아니다. 주간지 「인사이드 월드」 발행인 孫忠武(손충무)씨, 「한길소식」 발행인 咸允植(함윤식)씨와 편집인 孫昌植(손창식)씨, 월간지 「월드 코리아」 발행인 千奉宰(천봉재)씨도 고소고발되어 모두 1심에서 有罪를 선고받았다. 이들은 모두 언론·출판계 종사자인데, 金대통령은 이들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5대 0」으로 이겼다.
孫忠武씨의 경우,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의 확정 판결을 받고 춘천교도소에서 복역중이며, 징역 1년을 선고받았던 咸允植씨는 지난 3월6일 滿期(만기) 출소했다. 1심, 2심에서 똑같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孫昌植씨는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지난 10월26일 기각당했다.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千奉宰씨는 항소심을 남겨두고 있다.
金대통령 취임 후엔, 한나라당 金洪信(김홍신) 의원이 대통령 모욕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金의원은 1998년 5월26일, 경기도 시흥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경기 知事(지사) 후보 孫鶴圭(손학규)씨를 위한 정당연설회에서 대통령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金의원은 「金大中 대통령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사람이 죽으면 염라대왕이 거짓말한 것만큼 바늘로 뜨는데 金대통령은 거짓말을 하도 많이 하고 너무 많이 속여서 바늘로 한뜸한뜸 뜰 시간이 없어 공업용 미싱을 갖다가 드르륵 드르륵 박아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연설함으로써 공연히 金大中 대통령을 모욕하고 비방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공업용 미싱」 발언을 한 金의원은 이 발언이 있은 지 한달 후인 1998년 6월22일, 金大中 대통령에 대한 모욕죄 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다. 이 사건은 지난 6월 말로 심리가 종결돼 선고를 남겨두고 있다. 검찰은 金의원에게 모욕죄의 최고 형량인 징역 1년을 구형했다.
帝王的 대통령제下의 언론자유
「대통령學(학)」 전공인 고려대 행정학과 咸成得(함성득) 교수는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帝王的(제왕적) 대통령제」이기 때문에 감히 대통령에게 도전하는 발언을 하기가 어렵다』며 『우리나라도 대통령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 자유로워야 하고, 그 비판을 대통령이 겸허히 받아들이는 「민주적 대통령제」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咸교수는 미국의 예를 들었다.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에게 토머스 제퍼슨은 눈엣가시였습니다. 「신문없는 정부보다 정부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제퍼슨은 사사건건 대통령을 비판했습니다. 이를 못하게 하기 위해 애덤스 대통령은 法(법)을 만들었습니다. 「반란 및 선동에 관한 법(Sedition Act)」입니다.
대통령 또는 의회나 정부에 대한 허위사실이나 그 醜聞(추문)을 언급하든가 인쇄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입니다. 이 法은 1798년 의회를 통과했습니다. 2년 후인 1800년, 토머스 제퍼슨이 애덤스를 꺾고 3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된 제퍼슨은 「반란 및 선동에 관한 법」을 폐기했습니다. 제퍼슨 대통령이 이 法을 폐기한 이후, 미국에서 대통령이 자신의 명예훼손을 문제삼아 고소한 사례가 없습니다』
咸교수는 『미국의 한 대학생이 정부의 월남전 참전 정책을 반대하기 위해 星條旗(성조기)를 거꾸로 걸어둔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또 1981년 댈러스 市廳(시청)앞에서 열린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星條旗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국 대법원은 언론자유 차원에서 이같은 행동을 보호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언론의 자유를 충분히 보호하는 미국에서도 私生活(사생활) 침해에 관해서만은 엄격하다』고 밝힌 咸교수는 『그러나 언론 보도로 인한 私生活 침해에 있어서도 미국은 피해자가 개인이냐 公人(공인)이냐에 따라 책임을 묻는 잣대가 다르다』고 말했다. 咸교수의 설명이다.
『개인인 경우에는 언론사가 사실규명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을 立證(입증)하면 배상을 받지만, 公人이면 기사가 허위라는 사실뿐 아니라 언론사측이 잘못을 알면서도 고의로 기사화했다는 「사실적 악의」(Actual Malice)와 「진실 여부에 대한 부주의」(Reckless Disregard)까지도 公人이 입증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의 이해와 직결되는 公的(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公人에 대해서는 이처럼 엄격한 책임을 지우기 때문에 소송제기 자체가 어렵습니다.
이 公人의 개념에 대해 미국 대법원은 1967년 판례에서는 「공무원」이라고 해석했으나 1991년 판례에서는 공무원을 포함하여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Public Figures)로 넓게 해석하여 언론·출판의 자유를 더욱 보호하고 있습니다』
公人에 대한 명예훼손 여부는 국민이 판단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소속 林炚圭(임광규) 변호사는 『클린턴 대통령은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 보도와 관련하여 미국 언론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이 정부에 들어와서는 명예훼손이 괘씸죄 차원에서 남용되고 있으며, 명예훼손 송사를 빌미로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고 말했다.
林변호사는 『대통령의 私生活이나 도덕성 등은 公共(공공)의 이해에 해당하며 이에 대한 최종 심판은 국민이 하는 것이지, 법원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고 덧붙였다.
한 중견 언론인은 『우리나라 대통령은 內亂(내란) 또는 外患(외환)의 罪(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訴追(소추)를 받지 않는 특권을 갖고 있다』며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때 있었던 언론·출판 보도와 관련하여 대통령이 된 후에도 형사상 책임을 묻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라고 말했다.
판사 출신의 한 원로 변호사는 대통령 후보 시절에 있었던 金大中 대통령 명예훼손 사건과 관련, 『대통령도 국민이니까 개인의 인격권 침해를 내세워 고소고발하는 것은 법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으며, 또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므로 대통령 후보 시절에 있었던 사건들의 訴(소)를 취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法질서 문란으로 볼 수도 있다』며 『법적인 측면에서는 문제될 게 없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그 사건을 붙들고 있을 경우, 정치적 도의적 측면에서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그 이유로 『아무리 대통령이 아니고 대통령 후보 시절에 있었던 고발사건이라 할지라도, 고발인이 현직 대통령이라는 사실 자체가 검찰이나 법원에 無言(무언)의 압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언론·출판인들을 고발한 사건이 그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언론 자유의 측면에서 중요한 사건이며, 재판 과정을 감시, 추적, 보도하는 것은 언론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지금부터, 대통령과 언론·출판인이 관련된 명예훼손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검찰 수사기록과 재판 기록, 당사자와 그 변호인의 주장을 토대로 추적해 본다.
「한국논단」발행인 李度珩 명예훼손 사건
국민회의 고발장
한국논단 발행인 李度珩(66)씨가 명예훼손과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으로 고발된 것은 1997년 12월1일이다. 고발장은 「국민회의」 명의로 서울지검에 제출됐다. 국민회의는 한국논단 1997년 12월호에 보도된 「金大中씨의 평생 거짓말 한 번도 안했다는 거짓말을 벗긴다」는 기사속의 일부 내용이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했다. 국민회의가 고발장에서 허위, 비방, 왜곡, 날조라고 지적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金大中씨의 생각이 아직도 贊託(찬탁)노선에 변함이 없으며, 이는 당시 그가 속해 있던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8대 강령의 으뜸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그대로의 노선이기도 하다. 「民戰(민전)」 중앙위원이었던 金大中씨는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民戰은 그후 오늘날까지 비록 몇 차례의 조직개편은 거쳤지만 의연 「조선노동당 對南(대남) 담당 비서 제3국 청사」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남조선 지하당 산하의 한민전으로 계속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들과 연대 또는 함께 통일전선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한국 내의 비합법, 반합법, 또는 합법단체들로는 「민노련」 「민교협」 「민예총」 「민가협」 「전교조」 「한총련」 「전노련」 등 16개 단체와 「서울연합」을 비롯한 12개 지역별 조직이 있다. 매우 복잡 다단하게 얽히고 설킨 이들의 공통된 정치적 목표는 ①대한민국의 정통성 부정과 궁극적인 체제 전복, ②국가보안법 철폐, ③주한 미군 철수, ④연방제에 의한 평화적 통일이다.
金大中씨는 어떤 때는 직설적으로(①, ②의 경우), 어떤 때는 은유적으로(④의 경우), 또 어떤 때는 정반대로(③의 경우) 주장하거나 설득해 왔다. 그래서 그는 『집권하면 1년 내에 남북문제를 해결한다』 『집권하면 정상회담은 제안(에 그치는 게 아니라)이 아니라, 한다(일본 아사히 신문과의 회견)』는 등 자신만만한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 덕으로 金大中씨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치자. 그것은 마치 바이마르 공화국의 방만한 정치에 염증을 느낀 대다수 독일 국민이 히틀러의 특이한 정치적 수완과 대중심리에 대한 악마적 투시력으로 꾸며내는 웅변과 巧言令色(교언영색)에 놀아난 거나 다름없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金大中씨는 공산당에 총살당할 뻔한 게 아니라, 6·25 후 미군이 목포에서 철수하면서 사살대상자로 지목됐었으며(GHQ·연합군 총사령부 CIC 기록), 「未拂(미불) 노임 및 횡령 등 혐의로 북한군 산하 내무서에 검거됐다가 9·28 수복 때 탈출했다」(1980년 7월호 일본 중앙공론 게재. 紫田穗 산케이 전 서울특파원 글)는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집권하면 양심수를 사면하겠다는 것은 공산주의 사상이 아니라 활동을 보장한다는 뜻일 수밖에 없다. 이건 중대한 문제다.
▲吳益濟(오익제)가 천도교 교령일 때(87.4.~94.6) 金씨는 63빌딩 일식당, 소공동 롯데호텔 지하식당, 마포가든 호텔 옆 일식당 등에서 주로 저녁 늦은 시간에 배석자 없이 단독으로 여러 차례 만났다>
검찰, 불기소했다가 다시 공소제기
「李度珩 사건」은 서울지검 공안1부 朱盛英(주성영) 검사에게 배당됐다. 검찰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인 1997년 12월18일자로 李씨를 출국금지 조치했다. 조사를 벌인 검찰은 대통령 취임식 하루 전날인 1998년 2월24일, 李씨에게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불기소란 罪(죄)가 성립되지 않아 재판에 회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朱盛英 검사는 불기소 처분을 내린 근거를 이렇게 밝혔다.
<▲피의자는 위 사실이 각종 책자나 언론보도 내용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변명하며 그 범의를 극구 부인.
▲1972년 12월20일 광명출판사 발행 「공산주의 활동과 실체」(김형욱 著), 1986년 2월20일 경향신문사 출판국 編(편) 「김대중 정치방황 30년」, 1986년 9월25일 동방출판사 발행 「김대중, 그의 생애와 정치」(김영수 著), 1988년 5월20일 과학과 사상사 발행 「해방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 편) 등 저서와 1996년 2월호 일본 「政界(정계·SEIKAI), 1996년 4월호 「인사이더 월드」 등 잡지 및 국내 각 언론보도 관련 내용도 이에 부합.
▲다른 論據(논거)가 없는 일부 내용은 자신의 평가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거나 그 평가의 표현 내용을 이루는 것에 불과하여 「사실의 摘示(적시)」 인정 곤란.
▲나아가 이 글의 게재 경위가 한국논단 誌上(지상)을 통한 상호논쟁 과정에서 발생한 점 및 이 글은 피의자의 「親共(친공) 대통령은 안된다」(한국논단 10월호)에 대한 국민회의 韓和甲(한화갑) 국회의원의 「김대중은 反共(반공) 노선을 걸어왔다」(한국논단 11월호)라는 反論(반론)에 대한 재반론으로 게재.
▲이런 내용이 선거를 의식해 급조한 것이 아니라 평소 필자의 정치적 의견으로 봄이 상당한 점 등을 종합하면 피의자의 범죄 인정 곤란. 피의자는 1989년 6월 한국논단을 창간하여 지금까지 통권 1백여 권을 발간하였고, 현재 月(월) 2만5천부 가량을 발행하여 판매중에 있는 바, 그동안 같은 취지의 정치적 입장에 근거하여 각 분야에 걸친 필자의 견해를 계속 집필중에 있음.
▲달리 피의사실을 인정할 만한 뚜렷한 증거가 없어, 결국 범죄 혐의 인정키 어려움>
검찰이 李度珩씨에게 罪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자 金大中 대통령측은 서울 高檢(고검)에 항고했다. 서울 高檢에서도 서울지검의 결정이 옳다며 항고를 기각하자, 金大中 대통령측은 大檢(대검)에 재항고했다. 大檢에서 한동안 머물고 있던 이 사건은 고발되고 7개월 만인 1998년 6월17일, 서울지검 趙祥洙(조상수) 검사에 의해 공소제기됐다. 이에 따라 李씨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애초 罪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결정한 朱盛英 검사는 그후 全州(전주)지검으로 전출됐다.
「평가」만으로 처벌 못해
趙祥洙 검사는 공소장에서 「金大中 후보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체제전복을 주장한 사실이 없다. 金大中 후보가 6·25 당시 미군에 의해 사살 대상자로 지목된 사실이 없다. 金大中 후보가 북한의 노선에 동조하여 대한민국을 소멸시키려는 음모를 꾸민 사실이 없다. 金大中 후보가 고정간첩과 내통하여 대한민국의 기밀을 북한에 누설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李度珩)은 15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새정치국민회의 金大中 후보를 비방하여 당선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허위내용의 글을 게재하여 대통령 후보자인 金大中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고 했다.
검찰이 무혐의 처분했다가 뒤늦게 공소제기한 데 대해 李度珩씨 변호인 林炚圭 변호사는 『공소사실 중 半(반)은 한국논단 1997년 12월호 기사이며, 나머지 半은 고발장에서 언급하지 않은 한국논단 1998년 1월호 기사』라며 『李씨를 어떤 식으로든 처벌하려는 검찰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李度珩 사건」은 서울지방법원 형사 23부(재판장 김대휘 부장판사)에 배당됐다.
형법 제307조에 따르면 명예훼손은 「공연히 사실을 摘示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摘示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 해당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 摘示」이며, 의견이나 논평 같은 평가의 경우에는 처벌하지 않는 게 우리 법원의 판례다. 林炚圭 변호사의 말이다.
『예컨대 「저 사람은 죽일 놈」이라 보도했을 경우, 이것은 평가의 문제이며 사실 摘示가 아닙니다. 명예훼손에 해당되지 않으며, 정 문제를 삼는다면 모욕죄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모월 모일 몇시에 어디에서 누구를 죽였다」 하는 것이 사실을 摘示한 것인데, 이것이 근거가 없는 허위라면 명예훼손이 되는 것입니다.
「李度珩 사건」에서 검찰은 9가지 점을 문제삼았습니다. 이 가운데 7개는 사실을 사실에 기초하여 보도했다는 것이 변호인의 판단이며 이에 따라 관련 증거들을 재판부에 제출했습니다. 나머지 2개는 「사실 摘示」가 아닌 평가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金大中씨가 대통령 후보라는 公人이고 그와 관련된 내용은 公共의 이익에 관한 것으로서 피고인은 진실한 것이라 믿었고 또 그렇게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므로 위법성이 없다는 게 우리의 주장이었습니다』
집행유예 근거
李度珩씨의 주장을 立證(입증)하기 위해 변호인이 제출한 증거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한국일보 문화일보 국민일보에 보도된 관련 기사,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다』는 金大中 대통령의 취임사, 金大中 대통령의 저서(「한국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해방 50주년과 우리 민족의 내일」), 일본의 아사히 신문, 산케이 신문 관련 기사, 일본 월간지 中央公論(중앙공론) 기사, 미국 워싱턴 포스트紙(지) 기사 등 1백 30여건이었다. 검찰의 공소사실과 이를 반박하는 변호인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공소사실 관련 증거표」도 재판부에 제출되었다.
1심 판결은 공소 제기 후 1년이 지난, 1999년 6월24일에 있었다. 재판부는 李度珩씨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판결문 要旨(요지)는 이렇다.
<이 사건에서 피고인이, 비방할 목적이나 당선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출판물에 의하여 허위의 사실을 공표 내지 摘示하여 명예를 훼손하였고, 그에 대한 (미필적) 故意(고의)도 인정되는 이상 위법성 조각 사유가 적용될 수 없고, 따라서 그 사실들을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할 여지도 없으므로 피고인의 주장은 이유 없다>
징역 2년의 實刑(실형)을 선고하면서 집행유예를 한 이유에 대해 판결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피고인이 고령의 언론인으로서 벌금형 이외의 前科(전과)가 없고, 이 사건 기사 내용은 (주관적) 사실적 측면뿐만 아니라 의견 내지 평가적 측면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피고인의 허위 인식의 정도가 약하고, 한편 한국논단 1997년 11월호에서 金大中 후보측의 反論을 게재하여 주기도 하였으며, 자유언론 내지 사상의 자유시장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최종적인 의사형성과 결정권은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유보되어 있고, 피고인의 행위로 인한 영향이나 피해가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피고인이 이 사건의 刑으로 인하여 장래 피선거권 등 여러 가지 자격이 제한되는 불이익한 결과도 함께 받게 되는 점 등의 정상을 참작하여 판결한다>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
「李度珩 사건」 변호인 林炚圭 변호사에게 소감을 물어보았다.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재판 과정을 녹음해 달라는 변호인측 요구도 재판부가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李씨 재판은 그날 예정된 재판 중 항상 맨 뒤로 밀렸습니다. 텅 빈 법정을 지키는 사람은 李씨 가족뿐이었죠. 방청객보다 변호인이 더 많은 희귀한 재판이고, 망각된 사건이 되었습니다』
「李度珩 사건」의 2심은 서울고법 형사 10부에 배정됐다. 재판장은 金大煥(김대환) 부장판사. 林炚圭 변호사는 2심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2심에서 피고인을 직접 신문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피고인 직접 신문을 갖고 「金大中 후보를 낙선시킬 목적을 갖고 보도하지 않았느냐」는 점을 물었습니다. 李度珩 피고인은 「언론인도 公共의 이익과 관련해 개인적 견해가 있다. 이 사건을 선거운동 차원으로 보지 말라. 나는 金大中 후보를 대통령감으로 보지 않는다는 내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다. 설혹 낙선시킬 목적이라 하더라도 기사 내용은 진실이다」고 말했습니다.
재판장은 李피고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하라고 했고, 검찰은 우리 변호인의 주장을 듣기만 할 뿐 반박을 하지 않았습니다. 2심 역시 맨 꼴찌로 진행돼 보통 저녁 6시30분쯤 끝났습니다. 심리는 金大煥 부장판사가 담당했는데 結審(결심)을 하고 난 후, 법원 人事로 다른 자리로 갔습니다. 새로 온 재판장은 재판을 한 번도 안한 상태에서 선고했습니다』
1심을 그대로 인정한 2심 선고는 11월9일에 있었지만, 이 기사를 쓰는 동안에 판결문이 나오지 않아 有罪를 내린 정확한 근거는 알 수가 없다. 대강의 취지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보도 내용은 (평가가 아닌) 사실 摘示로 볼 수 있으며, 피고인의 사회적 활동 前歷(전력)과 한국논단의 보도 성향으로 미루어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李씨 변호인단은 『2심에서의 특징이라면 피고인의 사회적 활동 前歷과 한국논단의 보도 성향으로 미루어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한다고 지적한 점』이라고 말했다. 林炚圭 변호사는 『대법원 상고 때 1심에서부터 했던 法廷(법정) 녹음을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명예훼손이 아니라 언론자유에 대한 재판』
有罪 판결의 한 근거가 된 「李度珩씨의 사회적 활동 前歷」을 알아보기 위해 재판부에 제출된 「李度珩씨의 경력」을 살펴보았다.
<1933년 서울 출생. 1950년 서울 공고 5학년 때 6·25 전쟁 발발, 軍(군) 입대. 1953년 육군 중위 임관. 1958년 정훈학교 교관. 1963년 대위로 예편, 조선일보사에 입사. 1966년∼1967년 駐越(주월) 특파원. 1974년 조선일보 외신부 차장. 1978년 관훈기자클럽 제1회 言論賞(언론상) 수상. 1978년∼1985년 駐日특파원. 1983년 중앙대 제정 承堂(승당) 言論賞 제1회 언론문화 보도 부문 수상. 1984년 「한국인이 본 일본」으로 일본 「라디오 단파 아시아賞」 제1회 수상. 1985년 조선일보 부국장, 관훈클럽 29대 총무. 1989년 조선일보 통한문제 연구소장. 1992년 4월 한국논단 발행인 겸 대표이사>
林炚圭 변호사는 「李度珩 사건」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결론지었다.
『한국논단의 보도는 사실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사실 관계에서 질 것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재판부에 제출한 각종 증거들은 金大中 대통령의 思想(사상) 단편을 보여주는 폭발력을 갖고 있습니다. 다소 대통령을 모욕한 부분이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이 사건을 정말 문제 삼겠다면 명예훼손이 아니라 모욕죄로 다뤄야 합니다(참고로 모욕죄는 최고 형이 징역 1년이며, 명예훼손죄는 5년이다).
이 정도 문제로 언론인을 기소하면 우리나라에 언론의 자유는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 체제도 아니고요. 결론적으로 李度珩씨 사건은 괘씸죄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李씨를 변호해온 姜信玉 변호사는 「자유·번영의 길」(憲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기관지)에 2심의 최종 변론 要旨(요지)를 기고했다. 내용은 이렇다.
<언론인이 한 의사표시가 대통령의 비위를 건드린다 하더라도 다른 언론인이 대통령을 좋게 써 줌으로써, 그것이 바로 토론의 시작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대통령 후보에 대한 평가가 나중에 이루어져, 대통령에 당선되거나 낙선되는 그런 정치구조가 바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사건의 경우에는 피고인이 자기 나름대로 언론이 가져야 할 용기와 인격을 갖고 정말로 나라를 위해서 이런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런 글을 썼으며, 쓴 글의 내용이 허위도 아닐 뿐아니라 피고인이 확신하고 있는 내용들이고, 이런 글을 쓰는 피고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기 있는 언론인으로서 표창받아야 할 행위이지 형사소추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은 피고인 한 사람의 명예훼손이라는 단순한 사건으로 기소되어 재판받고 있지만, 사실은 헌법의 기본권인 언론의 자유가 재판받고 있는 것입니다>
「한길소식」 발행인 咸允植 명예훼손 사건
金대통령의 前 경호 책임자
「한길소식」 발행인 咸允植(57)씨는 본래 金大中 대통령의 경호 책임자였다. 咸씨는 대통령 선거를 한달 가량 앞둔 1997년 11월19일, 金大中 후보를 대리한 국민회의 민원실장 吳吉祿(오길록), 전문위원 金日洙(김일수)씨 이름으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됐다.
金大中 후보측은 고발장에서 「咸씨는 金후보를 낙선시킬 의도하에 선거를 불과 2개월 앞두고 「한길소식지」라는 제호의 정기간행물을 등록, 1호부터 8호까지 발행하면서 金후보의 출생, 사상, 경력, 건강, 병력 등에 관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주장했다.
고발장에 기록된 허위사실은 다음과 같다.
<▲한길소식지 제2호에서 「金大中 출생 비밀 및 家系(가계)의 비밀을 밝힌다」는 제목 아래, 金大中은 諸葛成祚(제갈성조)와 張鹵島(장노도) 간에 태어난 것으로, 金大中은 본래 姓(성)이 諸葛(제갈)임에도 우리나라 제일의 姓氏인 金海(김해) 金씨를 자신의 본관으로 내세우면서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이용하였다.
▲위 소식지에서 「영웅주의에 빠진 食言(식언)의 정치인 金大中」이란 제하로, 한 시대의 정치지도자라는 사람이 거짓말을 식은 죽 먹듯이 하고 모든 것을 음해와 공작으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본인의 이미지 손상 차원을 넘어 국가의 운명을 파멸로 이끌고 가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온다. 이러한 점에서 金大中씨는 거짓말쟁이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건국 이래 정치인으로서는 제일 많은 거짓말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한길소식지 제3호에서 「金大中씨 사상 전력 무엇이 문제인가」 제하로, 1949년 여름에는 보성경찰서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전남경찰서에 구속된 사실이 있다. (중략) 金大中씨와 정태묵의 관계는 매우 미묘하다. 정태묵이 전쟁 전에 전남 벌교 부근을 기점으로 서남 빨치산 부위원장을 맡고 있을 당시 金大中씨도 같은 지역에서 좌익 활동을 하고 있었다.
▲위 소식지에서 「병역 기피자 金大中, 대통령 후보 자격없다」는 제하로, 병역에 관해서 金大中씨는 할 말이 없다. 그가 병역필증(제대증)도 없는, 병역을 기피한 병역 미필자라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별 이유
이에 대응, 咸允植씨는 『한길소식지에 게재된 내용은 철저한 사실확인 작업과 증언을 통해 쓰여진 것』이라며 자신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 金大中 후보와 고발 대리인 吳吉祿, 金日洙씨를 명예훼손과 무고혐의로 大檢에 고발했다.
咸씨는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부터 검찰 조사를 받았다. 신문조서에 따르면, 검찰은 咸씨를 상대로 보도 내용의 사실 여부와 함께 「한길연구회」란 단체의 설립 배경과 그 배후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였다.
咸씨는 『金大中씨와 뜻을 같이하여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金大中씨의 실체를 알고서 결별한 사람들이 金大中씨의 실체를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한길연구회를 설립했다』고 진술했다.
咸씨는 金대통령을 알게 된 데 대해 『1969년 고향 선배 權魯甲(권노갑)씨로부터 「내년 대통령 선거에 金大中씨가 출마하는 데 도와달라」고 하여 그때부터 1985년 11월까지 金大中씨 수행 비서 겸 경호 총책임자로 일했다』며 『金大中씨를 보좌하는 동안 네 차례에 걸쳐 구속 수감되어 6년7개월을 복역했다』고 진술했다.
검찰이 『金大中씨를 오랫동안 도와주다가 결별하게 된 이유』를 묻자 咸씨는 이렇게 진술했다.
<1980년 新軍部(신군부)가 들어설 때, 저에게 金大中씨에게 전해달라면서 1급비밀을 건네준 친구 아들이자 육군 중령이 있었다. 그는 『비밀로 해달라』고 하면서 비밀문서가 든 봉투를 아홉 차례에 걸쳐 주었다. 그의 부탁대로 누가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고 金大中씨에게 건네주었는데, 5·18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인 5월17일에 金大中씨와 제가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받으면서 金大中씨가 미처 없애지 못한 1급 정보에 대한 출처에 대해 『咸允植이가 안다』라고 저에게 떠넘겨 버려 배신감을 느꼈다.
1985년 金大中씨가 미국에서 귀국하여 자택연금 상태에 있다가 연금이 풀리자마자 수안보 온천으로 휴양하러 가게 되었다. 많은 국민들이 전화로 망월동 묘지에 들르냐고 문의하여 제가 金大中씨에게 망월동 묘지에 먼저 들르겠느냐고 물어보니 대뜸 『또 의심을 받게 망월동 묘지에는 왜 들르느냐』고 하여 실망감을 주었다.
또한 동교동 자택을 신축할 때 많은 돈이 필요하여, 국민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제가 반대를 하였는데 金大中씨가 『나도 이제 편하게 살려는데 왜 그렇게 반대를 하느냐』고 하여 저에게 다시 실망감을 주었고, 1985년 국회부의장직을 둘러싼 갈등으로 金大中씨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완전히 결별하게 된 것입니다>
검찰은 咸允植씨를 상대로 한길연구회 사무실의 임대와 운영자금의 출처, 회원 현황, 筆陣(필진), 한길소식지 배포처, 배포 부수 등을 조사하는 한편, 咸씨 진술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咸씨와 그 가족들의 예금통장을 압수했다. 또 한길소식지를 인쇄한 공장의 관계자와 한길소식지 우편 발송 대행업체 이사, 한길연구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대학생들을 소환 조사했다.
咸允植씨는 「한길소식」에 게재한 「金大中 후보의 家系 비밀」이란 글 내용의 사실여부에 대해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같이 학교를 다닌 金大中 후보의 친척과 金후보 生家(생가)와 가까운 이웃에 살았던 諸葛씨 姓(성)을 가진 노인으로부터 들었고, 한길연구회 편집인 孫昌植씨가 직접 金후보의 고향 하의도로 내려가 마을 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진술했다.
咸씨는 「食言의 정치인 金大中」이란 기사와 관련해서는 『金大中씨와 결별한 이유도 많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며 정치 지도자로서 국민과의 약속을 金大中씨 만큼 많이 깨뜨린 사람이 없다』고 진술했다. 咸씨는 『확실한 자료에 의하여 주장한 것인데 허위 기사로서 김대중씨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은 억지 주장』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자료들을 증거로 제출했다.
金大中 명예훼손 관련 구속 1호
이 정부가 출범하기 전인 1998년 2월20일, 검찰은 咸씨를 명예훼손과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咸씨는 金大中 대통령 명예훼손 사건과 관련된 언론·출판인 가운데 구속 1호이다. 咸씨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공소장에 기재된 咸씨 혐의는 최초 국민회의측이 고발한 한길소식 2호, 3호의 내용에 검찰이 명예훼손이 된다고 판단한 한길소식 4호(金大中씨는 불치의 병을 갖고 있다」), 5호(「金大中씨의 여우의 기지」), 8호(「金大中씨, 당신의 붉은 사상 더 이상 감출 수 없다」) 등이다.
1998년 3월31일, 咸씨는 자신이 명예훼손과 무고혐의로 大檢에 고발했던 국민회의 金大中 총재, 국민회의 민원실장 吳吉祿, 민원실 전문위원 金日洙씨에 대한 고소를 취하했다. 서울구치소에서 작성해 재판부에 제출한 「고소 취소에 따른 진술서」에서 咸씨는 이렇게 밝혔다.
<진술인은 金大中 대통령이 대한민국 최고 국가지도자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소신 하에 오랜 기간 金大中 대통령을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 국민은 金후보를 선택하였습니다. 자유민주 국가에서 정치적 쟁점의 최종 선택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확신하는 바, 그 결정이 최종적인 기준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고소를 취하합니다>
1998년 4월17일, 咸씨는 변호인 李承煥(이승환) 변호사를 통해 재판부에 보석허가 청구서를 제출했다. 李변호사는 보석허가 청구서에서 「金大中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不可論(불가론)이 우리 사회의 현실로 존재하였고, 선거가 金大中 대통령의 승리로 끝난 이상, 金대통령의 身上(신상)과 관련하여 벌어졌던 사건들은 국민 대통합을 통하여 갈등을 해소한다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관용하고 용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한 평생 피고인의 옥바라지에 좋은 시절을 다 보낸 피고인의 妻(처)가 폐암으로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남편으로서의 고통과 회한을 주지 않기 위해 피고인을 보석해달라」고 요청했다.
보석청구는 기각되었다. 이어 1998년 6월 초, 咸씨는 수감중인 서울구치소에서 「본인은 이후 어떠한 형태의 정치운동이나 선거운동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가족과 함께 생업에만 종사할 것」이라는 진술서를 써,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검찰은 1심에서 咸씨에게 징역 4년을 구형했다. 1998년 7월2일, 서울지방법원 형사23부(재판장·최세모 부장판사)는 咸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 사실을 그대로 인정했다. 이 판결에 검찰과 피고인 모두 불복했다.
검찰은 항소 이유서에서 「이 사건은 특정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하여 사전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진 의도적 범행이며,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검찰이 단속한 흑색선전 사범 중 가장 重(중)한 사건」이라며 「흑색선전이 근절되지 않고서는 공명하고 깨끗한 선거문화의 정착이 어렵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咸씨 변호인 李承煥 변호사는 「검찰은 한길소식지 발행 배후에 의구심을 갖고 기소 前은 물론, 기소 後에도 수사를 집중하였으나 피고인이 수사에 협조하여 취재원과 자금출처 등을 모두 밝혔고, 수사 결과 피고인의 진술과 같이 음해적 차원의 사주나 자금지원은 전혀 없음이 밝혀졌다」며 「피고인 나름의 정치적 소신에 기하여 피고인이 독자적으로 수집한 자료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근거로 기사를 작성했고, 그 기사는 사실이다」고 주장했다.
2심 선고는 1심 선고가 있고 석달 후인 1998년 10월13일에 있었다. 재판부는 「李度珩 사건」을 담당한 서울고법 형사 10부(재판장 金大煥 부장판사)였다. 재판부는 검찰, 변호인 양쪽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선고 要旨(요지)는 이렇다.
「여러 증거들에 의하면 피고인의 범죄사실을 넉넉히 인정할 수 있고, 사실 인정이나 판단 과정에 어떠한 위법을 발견할 수 없다. (중략) 피고인의 연령과 경력, 이 사건 범행의 동기, 수단과 방법, 출판물의 배포 범위, 범행 후의 정황 등 이 사건 기록에 나타난 모든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피고인에 대하여 선고한 형량(징역 1년)은 무겁거나 가볍지 아니하고 적절하다고 인정된다」
咸씨는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올해 1월26일 기각돼, 징역 1년이 확정되었다. 1998년 2월20일에 구속된 咸씨는 刑量(형량)보다 15일을 더 옥살이 한 끝에 1999년 3월6일 滿期(만기) 출소했다. 출소 두달 후, 폐암으로 투병 중인 咸씨의 아내는 사망했다.
변호사 선임 않고 대응
孫昌植(51)씨는 「한길소식」 편집인이라는 이유로 발행인 咸允植씨와 같은 날, 동시에 고발됐다. 孫씨는 그후 7개월 동안 18회에 걸쳐 검찰 조사를 받았다. 검찰에서 孫씨는 『고발 내용 중 金大中 후보의 家系의 비밀 기사는 내가 쓰지는 않았지만 나와 관련이 있고, 그외의 것은 기사 작성 경위를 모른다』고 진술했다. 조사 결과, 한길소식지가 咸允植씨의 책임 아래 발행되었다는 점이 드러나 검찰은 咸씨를 구속할 때 孫씨는 제외했다.
孫昌植씨는 지방의 모 대학 정외과 출신이다. 6·25 전쟁 때 인민군의 손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학창 시절, 4H클럽 회장을 맡았고, 대학 졸업 후엔 무역회사에 들어가 일본 교토에서 지점장을 지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金大中씨의 전남 유세를 지원하는 유세독찰반 책임을 맡은, 같은 고향(완도) 선배인 金善太(김선태 초대 무임소 장관)씨가 孫씨에게 같이 일하자고 제의하면서 孫씨는 金大中씨를 알게 되었다. 대통령 선거 후에 孫씨는 야당인 통일당에서 인권국장을 지냈다.
1980년 5·18 사건 때, 孫씨는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돼 1년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고 출소 후엔 「한국 민주화투쟁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을 8년간 맡았다. 「정치범 동지회」 초대 회장은 尹攀熊(윤반웅) 목사였고 文益煥(문익환), 芮春浩(예춘호), 金相賢(김상현)씨가 뒤를 이었다. 孫씨는 金大中씨가 1987년에 평민당을 창당하자 따라갔으나, 야당 후보 단일화가 실패로 끝나자 金大中씨와 관계를 끊었다.
1998년 4월, 전직 언론인과 언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자유언론수호 국민포럼」이 결성됐다. 이 단체는 李哲承(이철승)씨가 회장인 자유민주총연맹에서 발행하는 「자유신문」에서 보수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던 李京植(이경식)씨 주도로 결성됐다. 孫씨는 사무총장에 앉았다. 두 사람은 보수세력의 행사에 빠지지 않았다.
金大中 변호위해 家系 조사했으나…
그로부터 두 달 후인 1998년 6월16일, 검찰은 孫昌植씨를 咸允植씨와 같은 혐의로 공소제기했다. 그 다음날 검찰은 검찰에서 이미 무혐의 처분을 내린 李度珩씨에 대해서도 공소제기했다.
그전의 조사에서 「金大中 후보 출생의 비밀」 외의 기사에는 관련이 없다고 결론 내린 검찰은 그러나 공소장에서 咸允植씨와 똑같은 혐의를 孫씨에게 적용했다. 「孫昌植 사건」은 「咸允植 사건」 재판부인 서울지법 형사23부가 맡았다.
孫씨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사건을 맡겠다는 변호사도 없고, 돈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孫씨는 설명했다. 첫 재판에서 孫씨는 『제가 갖고 있는 자료를 공개하면 金대통령이 40년∼50년 전에 한 일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다』며 검찰에 공소 취소를 요구했으나 검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8년 7월14일, 孫씨는 「대통령의 출생 비밀」과 관련한 진술서를 제출했다.
<피고인이 金大中 대통령의 姓氏(성씨) 眞否(진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1년 대통령 선거 후부터 정가에 설왕설래하던 풍문 때문이 아닙니다. 1980년 5월부터 6개월간 일본 산케이신문에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논설위원이 연재한 기사와 그가 쓴 「김대중의 좌절」이란 책과 1980년 5월8일 경주 金山大祭(금산대제)에서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과 유인물이 나부꼈다는 기사를 보고, 당시 金大中씨의 열혈 지지자였던 피고인은 울분과 충정의 일념에서, 그런 음해들에 대해 반박 자료를 만들기 위해 金大中씨 출생에 대해 깊이 探査(탐사)해왔습니다.
그런데 探査가 계속될수록 金大中씨측이 『정치적 모함』이라 일관해온 주장이 한낱 강변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金大中씨 호적에 드러난 것만 보아도, 張鹵島(장노도·金대통령의 어머니)씨가 金대통령을 庶子(서자)로 출생신고하여, 1924년 7월7일에 접수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중략).
이같은 의문들 속에서 피고는 1990년 5월부터 1997년 10월까지 약 8년간, 金大中씨 출생지 하의도를 13회, 그 인근인 안좌도, 진도, 임자도, 비금도 지역을 10회(1회 평균 3박4일) 방문하여 金大中씨를 아는 사람 28명을 만나 대화, 녹음, 촬영 등 자료 수집을 해왔습니다(중략).
재판부의 객관적인 조사나 규명작업이 진행된다면 그동안 피고인이 수집해 둔 자료를 제공하고 기꺼이 고증에 협력할 것입니다. 따라서 별도 제출한 金大中씨의 호적 사본과 관련자들의 호적 사본 등은 증거보존해 원본과 대조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全斗煥, 金鍾泌을 증인 신청
1998년 8월17일, 孫씨는 光州(광주)지방법원 木浦(목포)지원에 있는 金대통령의 호적 原簿(원부), 전남 신안군 하의면 하의초등학교에 있는 金대통령의 학적부, 金대통령 아버지 金云式의 호적 원부, 金대통령 어머니 張鹵島씨의 호적 원부, 諸葛成祚(제갈성조·金대통령 어머니의 첫 남편)의 호적 원부, 諸葛成福(제갈성복·제갈성조의 형)의 호적 원부 등에 대해 증거보존 신청을 냈다. 재판부는 이를 기각하고 변론을 종결했다.
증거보존 신청이 기각된 그 다음날인 8월26일, 孫씨는 재판부에 변론재개 신청을 하고 金대통령의 호적등본 변조 여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증거보존 신청한 서류들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金鍾泌(김종필) 국무총리와 全斗煥(전두환) 전 대통령을 증인 신청했다.
金총리의 경우,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과 유인물이 나부낀 1980년 5월8일 경주 金山大祭에서 초헌관으로 참석했기 때문이며, 全 전 대통령은 『金大中씨는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姓씨나 찾도록 하라』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게 孫씨의 주장이다.
심리가 종결된 이 사건은 1998년 9월3일자로 변론재개되었으나 孫씨가 요구한 증인 신청은 기각됐다. 재판부는 한 차례 더 재판을 갖고, 10월27일 結審(결심)했다.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孫씨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다. 孫씨는 최후 진술에서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을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지법 형사 23부는 1998년 11월26일, 孫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선고 이유는 咸允植 피고인 때와 거의 같았다. 검찰은 刑量에 불복, 항소했다. 孫씨에 대한 검찰의 항소 이유는 咸씨에 대한 것과 거의 같은 맥락이었다.
孫씨도 항소했다. 孫씨는 자기가 직접 쓴 항소 이유서에서 「피고인을 처벌하려면 金大中씨가 諸葛씨가 아니라 金海 金씨가 확실하다는 것을 검찰은 재판과정에서 분명하게 거증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2심 재판부는 孫씨에게 國選(국선) 변호인을 선정하라고 알렸지만 孫씨는 거부했다.
孫씨는 2심에서 光州지법 木浦지원 호적계에 보관 중인 金대통령의 아버지 金云式과 金대통령의 외할아버지 張之淑(장지숙), 그리고 「諸葛永凡(제갈영범)」이란 사람의 호적 원부와 除籍(제적) 원부의 「인증등본 송부촉탁」을 신청했다. 호적 원부와 제적 원부에는 본인은 물론, 자식들의 출생·결혼·사망 등 변동 사항이 기록돼 있다. 「認證등본」이란 법원에 보관중인 金대통령 관련의 호적등본이 官(관)에서 인증하는 절차로 발급되었음을 말한다. 재판부는 孫씨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1999년 4월19일, 光州지법 木浦지원은 항소심 재판부에 사실조회에 대한 회신을 보내, 「호적 예규 제475호에 의해 폐기되었다」고 통보했다.
諸葛成祚의 기록 미스터리
孫昌植씨에게 金대통령의 父系(부계)나 母系(모계)와 무관한 「諸葛永凡」의 호적과 제적 원부를 신청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諸葛永凡이 戶主(호주)로 돼 있는 호적에 金대통령의 어머니 張鹵島씨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諸葛永凡 호적등본에 따르면 「張鹵島 1893년 6월6일 출생. 諸葛成祚 妻. 무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번지 戶主 張之淑 家 親族 入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1893년에 태어난 金대통령의 어머니 張鹵島씨가 諸葛成祚라는 사람과 결혼했다가 다시 아버지 張之淑 앞으로 호적을 옮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확인한 諸葛永凡의 호적등본에 따르면, 諸葛永凡의 장남 이름은 成福이고, 차남은 成祚입니다. 그런데 이 호적등본에는 앞에서부터 장남 成福, 成福의 아내, 成福의 자식 順(순)으로 이름이 나오다가 갑자기 張鹵島(2남 成祚의 처)란 이름이 등장합니다. 張鹵島 다음에는 諸葛永凡의 3남 이름이 나옵니다. 장남에서 3남으로 건너뛰어 둘째 아들 成祚의 기록이 없는 것입니다. 金대통령의 어머니 張鹵島씨는 3남과 같은 난에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호적 원부는 면사무소와 법원, 두 군데서 보관하는데, 하의면 사무소에서 발급받은 호적이 이렇기 때문에 木浦지원의 호적 원부를 떼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만일, 木浦지원 호적 원부에 諸葛成祚의 기록이 나온다면, 하의면 사무소 호적 원부는 누군가가 成祚의 기록이 있는 페이지를 毁棄(훼기)한 셈이 됩니다.
대통령의 외할아버지 張之淑의 호적등본에 따르면 장녀 張鹵島는 「1911년 諸葛成祚와 혼인신고 제적. 1925년 호주 張之淑 입적 신고. 1960년 金云式과 혼인신고 제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대통령의 어머니 張鹵島씨는 18세에 諸葛成祚와 결혼했으나 33세에 親家(친가)로 왔다가 67세에 金云式과 혼인을 한 게 됩니다.
金대통령 호적에 따르면, 金대통령은 어머니 張鹵島의 庶子로 출생신고가 되어있는데, 신고 접수일이 1924년 7월7일로 되어 있습니다. 기록대로라면 金대통령은 적어도 1924년 7월7일 이전에 태어난 셈이 되는데, 그때 아버지가 누구냐가 출생의 비밀인 것입니다. 대통령의 어머니 張鹵島씨의 첫 남편 諸葛成祚의 호적이 있어야 복잡하게 얽혀 있는 家系의 내막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리고 제 주장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에 세 사람의 호적 원부와 제적 원부를 신청한 것입니다』
金鍾泌 全斗煥 증인 신청 기각
孫씨는 이와 별도로 자신이 갖고 있던 자료들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①金大中 호적초본 ②金대통령의 동생 金大義 제적등본 ③하의면 면사무소 민원담당 메모 ④張之淑 제적등본 ⑤諸葛成祚 제적등본 ⑥諸葛永凡의 호적등본 ⑦경주 金山大祭에서 「尹大中은 물러가라」 는 등의 유인물, 현수막이 있었다고 보도한 1980년 5월9일자 동아일보 조선일보 대구매일 기사 ⑧「유신공화국 몰락」(1986년 1월30일 발행·저자 이한두)이란 책의 36쪽에서 47쪽의 「윤성만」 부분 ⑨1980년 5월1일터 6개월간 일본 산케이신문에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논설위원이 연재한 기사 ⑩金海 金씨 성명서 등이다.
孫씨는 또 A4 용지로 8백75쪽에 이르는 녹취록을 증거로 제출했다. 녹취록은 孫씨가 하의도를 비롯해 그 인근인 안좌도, 진도, 임자도, 비금도 지역에서 『金大中씨는 金海 金씨가 아니다』라고 증언한 주민 28명의 녹음이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 녹취록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孫씨가 또 다시 요구한 金鍾泌 총리와 全斗煥 전 대통령에 대한 증인 신청도 기각했다.
孫씨는 1999년 6월22일 재판부에 제출한 최후 진술서에서 이렇게 썼다.
<金대통령의 측근이 현역 국회의원을 세 차례나 피고의 집에 보내, 피고가 가지고 있는 金대통령과 관련한 일체의 호적원본과 28명의 녹음 테이프를 돌려주고, 한길소식지 발행인 咸允植씨를 별도 형사고발하면 피고의 사건을 취하해주고 생활과 자리를 보장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헌법에 검찰이 항소까지 한 사건을 취하할 수 있습니까. 피고가 변호사도 없이 이 어려운 재판을 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헌법체제와 독립된 사법부, 현명하신 재판부의 명철한 심판을 믿기에 회유와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 10부는 1999년 7월13일, 검찰과 孫씨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판결문 要旨(요지)는 이렇다.
<원심이 적법하게 조사 채택한 여러 증거들을 종합하면, 원심이 판시한 피고인에 대한 이 사건 각 범죄사실을 넉넉히 인정할 수 있고, 기록을 살펴보아도 원심의 사실 인정이나 판단과정에 어떠한 위법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항소 논지는 이유없다.
이 사건 출판물에 적시한 사실들이 15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정치적 쟁점으로 다루어졌으나 피해자가 결국 대통령에 당선된 점, 이 사건 한길소식지의 원고 작성이나 편집 제작 등을 함윤식이 사실상 주도하였고, 피고인의 가담 정도는 상대한 경미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원심이 피고인에 대하여 선고한 형량(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은 적절하다고 보이고, 너무 무겁다거나 너무 가볍다고는 인정되지 않으므로 양형 부당 주장은 모두 이유없다>
孫씨는 審理(심리) 미진, 採證(채증) 법칙 위반 등을 이유로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10월26일, 孫씨의 상고를 기각했다.
孫忠武 「김대중 X-파일」 사건
鄭昇和가 본 「金大中 자료철」
「인사이드 월드」 발행인 孫忠武(59)씨는 5명의 언론·출판인 중 가장 먼저, 1997년 9월1일에 고발됐다. 고발장도 金大中 총재 이름으로 제출됐다. 金총재가 문제삼은 것은 孫씨가 쓴 「김대중 X파일」이란 책의 내용과 그 내용을 인용 보도하는 주간지 「인사이드 월드」였다. 金총재는 고발장 제출에 이어 「김대중 X파일」과 「인사이드 월드」의 발행, 판매, 배포 등 금지 가처분신청도 냈다.
형사 고발사건은 서울지검 형사 1부 秋有燁(추유엽) 부부장 검사가 맡았다. 검찰은 1997년 9월19일 金총재를 대리해 검찰에 출두한 국민회의 종합민원실장 吳吉祿씨로부터 고발취지를 들었다.
吳씨는 검찰에서 『孫씨가 「김대중 X-파일」이란 책을 통해 金총재가 공산당에 입당한 전력이 있고, 아직까지 전향하지 아니한 공산주의자인 것처럼 허위사실을 공표하고, 또 金日成(김일성)과 우스노미야(일본 자민당 중의원·사망) 대담록을 수록하면서 마치 金日成이 金총재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지원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金총재를 비방했다』고 진술했다.
이어 1997년 10월9일에는 孫忠武씨를 조사했다. 孫씨는 『공개된 자료, 보도된 자료를 근거로 저술했기 때문에 허위나 거짓이 없다』며 『고발인 측에서 문제삼은 부분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에서 金후보의 훌륭한 점을 부각시켜 변호해 주었다』고 진술했다.
검찰 조사와 별도로 서울지방법원 민사 50부는 「김대중 X-파일」의 내용을 인용, 보도하는 「인사이드 월드」 인쇄와 배포를 중지시켜달라는 가처분신청 심리를 벌였다. 이에 대응, 孫씨는 前 육군참모총장 鄭昇和(정승화)씨가 작성한, 「1979년 10·26 직후 계엄사령관 시절에 金大中 자료철을 보았고 필요하면 그 내용을 증언할 용의가 있다」는 진술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金大中 자료철」과 관련된 鄭昇和씨 발언은 孫씨가 쓴 「김대중 X-파일」에 상당 부분 인용되었다. 진술서 내용은 이렇다.
<본인은 계엄사령관 재직 중 金大中씨에 대한 자료철을 읽은 바 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①金大中은 정권획득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다, ②그는 일본에서 좌경 단체들의 후원을 받아 선동적인 정치행위를 하였다는 말도 들었다, ③그는 8·15 해방 직후 공산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한 바 있다, ④그는 또 6·25 전에 좌익활동을 하다가 자수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했었다, ⑤그는 또 6·25 때에는 예비 검속되어 총살 대상자로 분류되었으나 실무자의 착오로 총살을 면했다, ⑥그후 북괴군이 그의 고향인 木浦를 점령하자 돈을 빌려주고 못 받은 사람들의 고발로 내무서에 구금되었다가 국군이 목포를 탈환하는 바람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본인은 또 金大中이 일본의 反韓(반한)파 사회주의자 政客(정객)인 우스노미야 도쿠마가 1974년에 북한을 방문하여 金日成과 회담하고 그 회담 기록을 일본에서 출판한 것을 읽어본 일이 있다. 본인은 이에 따라 1979년 11월26일부터 1979년 12월 초 사이, 각 언론사 발행인, 편집국장, 계엄사령부 출입기자들을 세 차례 초청, 金大中씨에 대한 자세한 배경을 설명한 바 있다.
초청되어 온 언론인들에게 『金大中씨는 과거 공산주의자였으며 그후에도 전향한 뚜렷한 증거가 없다』 『국회의원으로서 활동했고,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여 많은 표를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정치활동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고 말한 사실이 있다>
1997년 10월10일, 서울지방법원 민사 50부는 金大中 총재측의 「인사이드 월드」 배포 금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였다. 검찰은 고발장이 접수된 지 5개월 후인 1998년 2월20일 孫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金大中 총재는 공산당에 가입한 사실도 없고, 공산주의를 신봉하지 않았음에도 전향하지 않은 공산주의자인 양 표현한 책자를 판매해 金총재의 명예를 훼손했고, 金日成이 우스노미야 의원에게 『金大中과는 만난 적도 없고 원조한 적도 없지만 그의 주장은 올바르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음을 이용하여 金日成의 金大中 만들기란 제목을 단 책을 배포한 것은 金총재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孫씨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1998년 5월12일에 열린 첫 재판에서 孫씨 변호인은 冒頭(모두) 진술을 통해 『검찰은 「김대중 X-파일」이란 책이 金총재의 어떤 점을 비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단지 책의 소제목과 사진의 배열이 독자로 하여금 金총재의 이념과 사상을 오인할 가능성이 있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기소한 것은 형사소송법에 위배된다』며 『허위의 사실이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소기각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2차 재판은 1998년 6월2일로 예정돼 있었는데, 그 전날 오전에 孫씨는 그의 집에서 긴급 체포됐다. 그때문에 피고인 불참으로 재판은 공전됐다. 孫씨를 구속 수사한 검찰은 그후 孫씨에게 「權寧海 前 안기부장으로부터 돈을 받고 金大中 후보 비방기사를 썼으며, 金후보를 음해하기 위해 사진 변조를 했다」는 새로운 혐의를 추가했다.
「金大中 X-파일」 제작비를 안기부가 지원
孫씨가 긴급 구속되면서 수사 주체가 형사 1부에서 공안 1부로 바뀌었고 재판부도 서울형사지법 합의 23부에서 합의 30부로 교체됐다. 검찰은 1998년 6월17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과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혐의 등으로 孫씨를 구속 기소했다.
孫씨 공소장에 따르면, 孫씨는 權寧海 전 안기부장에게 돈을 받아 「金大中 X-파일」과 「인사이드 월드」를 발행했으며, 權씨의 비서실장이었던 李강수씨는 權 전 부장으로부터 돈을 받아 孫씨에게 전달했고, 李상생 전 안기부 감찰실장은 權 전 부장의 지시에 의해 「김대중 X-파일」을 안기부 내에 배포한 혐의를 받았다.
「孫忠武 사건」은 이른바 「북풍 사건」에 묻혀 명예훼손 여부는 쟁점이 되지 못했다. 「김대중 X-파일」이란 책 제작비를 안기부가 지원하게 된 과정, 지원 금액, 「인사이드 월드」 운영자금 지원 배경과 그 액수, 「김대중 X-파일」이란 책을 안기부가 구입해 간부들에 배포한 과정 등이 중요시 되었다. 안기부 내부에서 작성된 「인사이드 월드」 대통령 음해기사 내용 검토 보고서, 「인사이드 월드」 문제기사 요약 보고서 등이 증거로 재판부에 제출됐다.
孫씨에게는 국가안전기획부법 위반이 추가되었다. 孫씨가 안기부 직원들과 공모했기 때문이라는 게 검찰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법원에서 무죄가 되었다.
孫忠武씨 변호인은 『변조 사진은 존재하지만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쟁점으로 약하며, 孫씨가 안기부 돈을 받은 시점과 「김대중 X-파일」 출판 시점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 역시 쟁점이 될 수 없다』며 『이 재판의 핵심은 「김대중 X-파일」과 「인사이드 월드」 기사가 金大中 후보의 명예를 훼손했느냐, 아니냐에 있다』고 말했다.
孫씨는 지난 4월23일 대법원의 상고 기각으로 징역 2년이 확정돼 춘천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월드 코리아」 발행인 千奉宰 사건
「김대중 양날개 정치」 등
千奉宰(39)씨는 새앎출판사 대표이자 월간지 「월드 코리아」 발행인이었다. 국민회의측이 金大中 후보의 명예훼손과 관련하여 문제삼은 것은 「월드 코리아」 1997년 10월호와 새앎출판사 발행의 책 두 권이다. 金大中 총재 비서실의 전문위원 출신이었던 李泰昊(이태호)씨가 쓴 「김대중 양날개 정치」와 소설가 李진수씨가 쓴 「거짓말 선생님」이다. 李진수씨는 소설 「뺑끼통」의 작가다.
고발장은 金大中 국민회의 총재 이름으로 작성해 국민회의 민원실장 吳吉祿씨를 통해 1997년 10월14일에 제출됐다. 국민회의측은 발행인 千奉宰씨와 「거짓말 선생님」의 著者(저자) 李진수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민·형사 고발했다. 李泰昊씨는 제외됐다.
고발장에 따르면 월드 코리아 10월호 기사 중 <김대중 법정에 선다, 특집 김대중 다시 보기, 김대중은 공산주의 활동가였다, DJ 색깔론 사라지지 않는 이유> 등과 「거짓말 선생님」이란 책의 <김대중은 기만술의 대가다, 김대중도 과격하지만 그 추종자들이 더 과격하다, 지역색을 조장한 사람은 김대중이다, 김대중 혐오증이 왜 생겼는가, 김대중은 왜 대통령이 될 수 없나 등>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金후보를 비방했다는 것이다.
고발장은 「김대중 양날개 정치」란 책의 경우에는 <이 나라 정치 지도자 중에서 김대중에게 배신 한 번 당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나 김대중이 오늘날까지 배신하지 않고 신의를 지키는 대상이 金日成, 金正日 부자이다> 등의 표현도 허위사실이라 주장했다.
국민회의측은 월드 코리아 10월호와 두 권의 책에 대해 발행, 판매, 배포 금지 등 가처분신청도 냈다. 「김대중 양날개 정치」는 대통령 선거 1년 前인 1996년 1월20일에 출간됐고, 「거짓말 선생님」은 그 두달 후인 3월20일에 나왔다.
1997년 12월8일, 국민회의 민원실장 吳吉祿씨가 20여명과 함께 월드 코리아 사무실을 방문해, 金大中 후보의 X-레이 사진을 내놓으라며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여 마포경찰서에서 출동했다. 기자들이 吳씨를 폭행혐의및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했으나 吳씨에게 무혐의 처분이 떨어졌다. 千씨는 『X-레이 필름은 뺏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千奉宰씨는 검찰에서 명예훼손 여부를 조사받았다. 千씨는 『검찰은 우호적으로 대해 주었다. 신경써서 진술하라는 조언도 했다. 그러나 이 정부가 출범하면서 태도를 바꿔, 내 예금계좌도 추적했다. 보도 내용은 다 근거가 있고, 사실이라 믿기 때문에 재판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대통령 변호인 명의의 독촉장
명예훼손에 따른 형사고발과 별도로 진행되던 민사소송에서 千씨는 패소했다. 작년 7월,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민사 6부는 金대통령측 千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1억원 청구 소송에서 『피고(千奉宰)는 원고(金大中 대통령)에게 5천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선고 후 20일이 지난, 1998년 7월29일, 千씨는 金大中 대통령을 대리한 安상운 변호사로부터 독촉장을 받았다. 민사소송 패소에 따른 손해배상금 5천만원과 그 이자 6백30만원 등 총 5천6백30만원을 1998년 8월3일까지 납부해달라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후 千씨는 두번 더 독촉장을 받았다.
형사사건 1심 선고는 지난 2월25일에 있었다. 千奉宰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千씨는 『항소를 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재판이 열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千씨는 이렇게 말했다.
『작년에 金대통령의 호적과 金대통령 어머니의 호적을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했다. 재판장과 검사가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재판부는 내 변호사에게 제출을 하지 말라고 한 것 같았다. 사실 입증에 필요한 자료를 왜 재판부가 거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후 1심 판결을 받아들이고 항소를 취하하라는 압력이 여기 저기서 오고 있다』
千씨는 요즘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선거 전에는 사무실이 동교동에 있었는데 매일 돌멩이가 날아와 서울 신당동으로 옮겼다. 부수도 줄고 광고도 끊어져 월드 코리아는 지난 4월에 자진 停刊(정간)했다. 20여명이 넘던 직원이 지금은 3명으로 줄었다. 「애들을 맨홀에 빠뜨려 죽이겠다」 「돌담길 조심하라」는 협박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와 가족과도 헤어졌다. 작년에 「국경없는 기자회」에서 찾아와 나를 취재했다. 국내 언론은 내 사건에 관심이 없다』
1998년 4월2일, 국제언론인 보호위원회(CPJ·Committee to Protect Journ alists)는 「한국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발생한 명예훼손을 이유로 제소된 4명의 언론인 사건에 대해 알고 싶다」는 편지를 金大中 대통령과 대법원장, 법무장관, 駐韓(주한) 미국대사관에 보냈다. 이들은 李度珩, 孫忠武, 咸允植, 千奉宰씨 이름을 거명했다.
이들은 「명예훼손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형사범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언론인도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 결과 감옥에 가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金大中 대통령이 정치적인 탄압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위 언론인들의 상태에 관한 우리의 정보 요구에 부응할 것으로 믿습니다」며 끝을 맺었다.
金대통령의 법정 대리인측은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날 재판은 현직 대통령이 관련된 刑事(형사)사건에 대한 2심 宣告여서 주목을 끌었다. 대법원의 판단이 한번 더 남아 있긴 하지만 대법원에서는 법률 적용 여부를 다루는 법률심이고, 사실 여부에 대한 심리는 2심에서 끝이다. 吳制道(오제도) 金東煥(김동환) 姜信玉(강신옥) 林炚圭(임광규) 변호사가 이 사건에서 李씨를 변론했다.
姜信玉 변호사는 2심 선고를 앞둔 결심 공판에서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은 최고의 공직자로 옛날 王(왕)과 같은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며 『모든 공직자가 다 언론의 감시와 비판을 받는데 인색해서는 안되지만 특히 대통령은 언론의 혹독한 비판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고, 이것이 바로 민주정치의 관용성이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근본적인 보루』라고 주장했다.
姜변호사는 『만약에 대통령 후보를 비판한 내용을 가지고, 그 비판한 언론인을 형사상 문제를 삼는다고 하면, 언론인이 형사상 소추될지 모른다는 恐怖(공포) 때문에 용기 있게 자기 의견을 말할 수가 없게 되고, 그러면 이 땅에서 언론의 자유는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는 취지로 無罪(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고법 형사 10부(재판장·이강국 부장판사)는 『피고인이 사실이라고 주장한 것은 허위 사실이며, 보도 내용이 의견이나 논평일 뿐 사실을 摘示(적시)한 것이 아니므로 명예훼손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피고인은 주장하나, 사실 摘示로 볼 수 있으며, 피고인의 사회적 활동 前歷(전력)과 한국논단의 보도 성향으로 미루어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항소를 기각했다.
李씨 변호인단은 『보도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사실관계 규명이 재판의 쟁점인데 李씨의 사회적 활동과 한국논단의 성향 등을 문제삼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고 말했다. 당사자인 李씨는 『정치적 판단에 따른 판결이며, 예상했던 결과』라고 말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였을 때, 그를 비판해 金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당해 有罪(유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李度珩씨 혼자가 아니다. 주간지 「인사이드 월드」 발행인 孫忠武(손충무)씨, 「한길소식」 발행인 咸允植(함윤식)씨와 편집인 孫昌植(손창식)씨, 월간지 「월드 코리아」 발행인 千奉宰(천봉재)씨도 고소고발되어 모두 1심에서 有罪를 선고받았다. 이들은 모두 언론·출판계 종사자인데, 金대통령은 이들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5대 0」으로 이겼다.
孫忠武씨의 경우,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의 확정 판결을 받고 춘천교도소에서 복역중이며, 징역 1년을 선고받았던 咸允植씨는 지난 3월6일 滿期(만기) 출소했다. 1심, 2심에서 똑같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孫昌植씨는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지난 10월26일 기각당했다.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千奉宰씨는 항소심을 남겨두고 있다.
金대통령 취임 후엔, 한나라당 金洪信(김홍신) 의원이 대통령 모욕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金의원은 1998년 5월26일, 경기도 시흥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경기 知事(지사) 후보 孫鶴圭(손학규)씨를 위한 정당연설회에서 대통령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金의원은 「金大中 대통령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사람이 죽으면 염라대왕이 거짓말한 것만큼 바늘로 뜨는데 金대통령은 거짓말을 하도 많이 하고 너무 많이 속여서 바늘로 한뜸한뜸 뜰 시간이 없어 공업용 미싱을 갖다가 드르륵 드르륵 박아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연설함으로써 공연히 金大中 대통령을 모욕하고 비방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공업용 미싱」 발언을 한 金의원은 이 발언이 있은 지 한달 후인 1998년 6월22일, 金大中 대통령에 대한 모욕죄 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다. 이 사건은 지난 6월 말로 심리가 종결돼 선고를 남겨두고 있다. 검찰은 金의원에게 모욕죄의 최고 형량인 징역 1년을 구형했다.
帝王的 대통령제下의 언론자유
「대통령學(학)」 전공인 고려대 행정학과 咸成得(함성득) 교수는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帝王的(제왕적) 대통령제」이기 때문에 감히 대통령에게 도전하는 발언을 하기가 어렵다』며 『우리나라도 대통령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 자유로워야 하고, 그 비판을 대통령이 겸허히 받아들이는 「민주적 대통령제」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咸교수는 미국의 예를 들었다.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에게 토머스 제퍼슨은 눈엣가시였습니다. 「신문없는 정부보다 정부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제퍼슨은 사사건건 대통령을 비판했습니다. 이를 못하게 하기 위해 애덤스 대통령은 法(법)을 만들었습니다. 「반란 및 선동에 관한 법(Sedition Act)」입니다.
대통령 또는 의회나 정부에 대한 허위사실이나 그 醜聞(추문)을 언급하든가 인쇄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입니다. 이 法은 1798년 의회를 통과했습니다. 2년 후인 1800년, 토머스 제퍼슨이 애덤스를 꺾고 3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된 제퍼슨은 「반란 및 선동에 관한 법」을 폐기했습니다. 제퍼슨 대통령이 이 法을 폐기한 이후, 미국에서 대통령이 자신의 명예훼손을 문제삼아 고소한 사례가 없습니다』
咸교수는 『미국의 한 대학생이 정부의 월남전 참전 정책을 반대하기 위해 星條旗(성조기)를 거꾸로 걸어둔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또 1981년 댈러스 市廳(시청)앞에서 열린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星條旗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국 대법원은 언론자유 차원에서 이같은 행동을 보호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언론의 자유를 충분히 보호하는 미국에서도 私生活(사생활) 침해에 관해서만은 엄격하다』고 밝힌 咸교수는 『그러나 언론 보도로 인한 私生活 침해에 있어서도 미국은 피해자가 개인이냐 公人(공인)이냐에 따라 책임을 묻는 잣대가 다르다』고 말했다. 咸교수의 설명이다.
『개인인 경우에는 언론사가 사실규명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을 立證(입증)하면 배상을 받지만, 公人이면 기사가 허위라는 사실뿐 아니라 언론사측이 잘못을 알면서도 고의로 기사화했다는 「사실적 악의」(Actual Malice)와 「진실 여부에 대한 부주의」(Reckless Disregard)까지도 公人이 입증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의 이해와 직결되는 公的(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公人에 대해서는 이처럼 엄격한 책임을 지우기 때문에 소송제기 자체가 어렵습니다.
이 公人의 개념에 대해 미국 대법원은 1967년 판례에서는 「공무원」이라고 해석했으나 1991년 판례에서는 공무원을 포함하여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Public Figures)로 넓게 해석하여 언론·출판의 자유를 더욱 보호하고 있습니다』
公人에 대한 명예훼손 여부는 국민이 판단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소속 林炚圭(임광규) 변호사는 『클린턴 대통령은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 보도와 관련하여 미국 언론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이 정부에 들어와서는 명예훼손이 괘씸죄 차원에서 남용되고 있으며, 명예훼손 송사를 빌미로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고 말했다.
林변호사는 『대통령의 私生活이나 도덕성 등은 公共(공공)의 이해에 해당하며 이에 대한 최종 심판은 국민이 하는 것이지, 법원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고 덧붙였다.
한 중견 언론인은 『우리나라 대통령은 內亂(내란) 또는 外患(외환)의 罪(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訴追(소추)를 받지 않는 특권을 갖고 있다』며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때 있었던 언론·출판 보도와 관련하여 대통령이 된 후에도 형사상 책임을 묻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라고 말했다.
판사 출신의 한 원로 변호사는 대통령 후보 시절에 있었던 金大中 대통령 명예훼손 사건과 관련, 『대통령도 국민이니까 개인의 인격권 침해를 내세워 고소고발하는 것은 법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으며, 또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므로 대통령 후보 시절에 있었던 사건들의 訴(소)를 취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法질서 문란으로 볼 수도 있다』며 『법적인 측면에서는 문제될 게 없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그 사건을 붙들고 있을 경우, 정치적 도의적 측면에서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그 이유로 『아무리 대통령이 아니고 대통령 후보 시절에 있었던 고발사건이라 할지라도, 고발인이 현직 대통령이라는 사실 자체가 검찰이나 법원에 無言(무언)의 압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언론·출판인들을 고발한 사건이 그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언론 자유의 측면에서 중요한 사건이며, 재판 과정을 감시, 추적, 보도하는 것은 언론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지금부터, 대통령과 언론·출판인이 관련된 명예훼손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검찰 수사기록과 재판 기록, 당사자와 그 변호인의 주장을 토대로 추적해 본다.
「한국논단」발행인 李度珩 명예훼손 사건
국민회의 고발장
한국논단 발행인 李度珩(66)씨가 명예훼손과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으로 고발된 것은 1997년 12월1일이다. 고발장은 「국민회의」 명의로 서울지검에 제출됐다. 국민회의는 한국논단 1997년 12월호에 보도된 「金大中씨의 평생 거짓말 한 번도 안했다는 거짓말을 벗긴다」는 기사속의 일부 내용이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했다. 국민회의가 고발장에서 허위, 비방, 왜곡, 날조라고 지적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金大中씨의 생각이 아직도 贊託(찬탁)노선에 변함이 없으며, 이는 당시 그가 속해 있던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8대 강령의 으뜸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그대로의 노선이기도 하다. 「民戰(민전)」 중앙위원이었던 金大中씨는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民戰은 그후 오늘날까지 비록 몇 차례의 조직개편은 거쳤지만 의연 「조선노동당 對南(대남) 담당 비서 제3국 청사」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남조선 지하당 산하의 한민전으로 계속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들과 연대 또는 함께 통일전선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한국 내의 비합법, 반합법, 또는 합법단체들로는 「민노련」 「민교협」 「민예총」 「민가협」 「전교조」 「한총련」 「전노련」 등 16개 단체와 「서울연합」을 비롯한 12개 지역별 조직이 있다. 매우 복잡 다단하게 얽히고 설킨 이들의 공통된 정치적 목표는 ①대한민국의 정통성 부정과 궁극적인 체제 전복, ②국가보안법 철폐, ③주한 미군 철수, ④연방제에 의한 평화적 통일이다.
金大中씨는 어떤 때는 직설적으로(①, ②의 경우), 어떤 때는 은유적으로(④의 경우), 또 어떤 때는 정반대로(③의 경우) 주장하거나 설득해 왔다. 그래서 그는 『집권하면 1년 내에 남북문제를 해결한다』 『집권하면 정상회담은 제안(에 그치는 게 아니라)이 아니라, 한다(일본 아사히 신문과의 회견)』는 등 자신만만한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 덕으로 金大中씨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치자. 그것은 마치 바이마르 공화국의 방만한 정치에 염증을 느낀 대다수 독일 국민이 히틀러의 특이한 정치적 수완과 대중심리에 대한 악마적 투시력으로 꾸며내는 웅변과 巧言令色(교언영색)에 놀아난 거나 다름없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金大中씨는 공산당에 총살당할 뻔한 게 아니라, 6·25 후 미군이 목포에서 철수하면서 사살대상자로 지목됐었으며(GHQ·연합군 총사령부 CIC 기록), 「未拂(미불) 노임 및 횡령 등 혐의로 북한군 산하 내무서에 검거됐다가 9·28 수복 때 탈출했다」(1980년 7월호 일본 중앙공론 게재. 紫田穗 산케이 전 서울특파원 글)는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집권하면 양심수를 사면하겠다는 것은 공산주의 사상이 아니라 활동을 보장한다는 뜻일 수밖에 없다. 이건 중대한 문제다.
▲吳益濟(오익제)가 천도교 교령일 때(87.4.~94.6) 金씨는 63빌딩 일식당, 소공동 롯데호텔 지하식당, 마포가든 호텔 옆 일식당 등에서 주로 저녁 늦은 시간에 배석자 없이 단독으로 여러 차례 만났다>
검찰, 불기소했다가 다시 공소제기
「李度珩 사건」은 서울지검 공안1부 朱盛英(주성영) 검사에게 배당됐다. 검찰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인 1997년 12월18일자로 李씨를 출국금지 조치했다. 조사를 벌인 검찰은 대통령 취임식 하루 전날인 1998년 2월24일, 李씨에게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불기소란 罪(죄)가 성립되지 않아 재판에 회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朱盛英 검사는 불기소 처분을 내린 근거를 이렇게 밝혔다.
<▲피의자는 위 사실이 각종 책자나 언론보도 내용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변명하며 그 범의를 극구 부인.
▲1972년 12월20일 광명출판사 발행 「공산주의 활동과 실체」(김형욱 著), 1986년 2월20일 경향신문사 출판국 編(편) 「김대중 정치방황 30년」, 1986년 9월25일 동방출판사 발행 「김대중, 그의 생애와 정치」(김영수 著), 1988년 5월20일 과학과 사상사 발행 「해방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 편) 등 저서와 1996년 2월호 일본 「政界(정계·SEIKAI), 1996년 4월호 「인사이더 월드」 등 잡지 및 국내 각 언론보도 관련 내용도 이에 부합.
▲다른 論據(논거)가 없는 일부 내용은 자신의 평가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거나 그 평가의 표현 내용을 이루는 것에 불과하여 「사실의 摘示(적시)」 인정 곤란.
▲나아가 이 글의 게재 경위가 한국논단 誌上(지상)을 통한 상호논쟁 과정에서 발생한 점 및 이 글은 피의자의 「親共(친공) 대통령은 안된다」(한국논단 10월호)에 대한 국민회의 韓和甲(한화갑) 국회의원의 「김대중은 反共(반공) 노선을 걸어왔다」(한국논단 11월호)라는 反論(반론)에 대한 재반론으로 게재.
▲이런 내용이 선거를 의식해 급조한 것이 아니라 평소 필자의 정치적 의견으로 봄이 상당한 점 등을 종합하면 피의자의 범죄 인정 곤란. 피의자는 1989년 6월 한국논단을 창간하여 지금까지 통권 1백여 권을 발간하였고, 현재 月(월) 2만5천부 가량을 발행하여 판매중에 있는 바, 그동안 같은 취지의 정치적 입장에 근거하여 각 분야에 걸친 필자의 견해를 계속 집필중에 있음.
▲달리 피의사실을 인정할 만한 뚜렷한 증거가 없어, 결국 범죄 혐의 인정키 어려움>
검찰이 李度珩씨에게 罪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자 金大中 대통령측은 서울 高檢(고검)에 항고했다. 서울 高檢에서도 서울지검의 결정이 옳다며 항고를 기각하자, 金大中 대통령측은 大檢(대검)에 재항고했다. 大檢에서 한동안 머물고 있던 이 사건은 고발되고 7개월 만인 1998년 6월17일, 서울지검 趙祥洙(조상수) 검사에 의해 공소제기됐다. 이에 따라 李씨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애초 罪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결정한 朱盛英 검사는 그후 全州(전주)지검으로 전출됐다.
「평가」만으로 처벌 못해
趙祥洙 검사는 공소장에서 「金大中 후보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체제전복을 주장한 사실이 없다. 金大中 후보가 6·25 당시 미군에 의해 사살 대상자로 지목된 사실이 없다. 金大中 후보가 북한의 노선에 동조하여 대한민국을 소멸시키려는 음모를 꾸민 사실이 없다. 金大中 후보가 고정간첩과 내통하여 대한민국의 기밀을 북한에 누설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李度珩)은 15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새정치국민회의 金大中 후보를 비방하여 당선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허위내용의 글을 게재하여 대통령 후보자인 金大中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라고 했다.
검찰이 무혐의 처분했다가 뒤늦게 공소제기한 데 대해 李度珩씨 변호인 林炚圭 변호사는 『공소사실 중 半(반)은 한국논단 1997년 12월호 기사이며, 나머지 半은 고발장에서 언급하지 않은 한국논단 1998년 1월호 기사』라며 『李씨를 어떤 식으로든 처벌하려는 검찰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李度珩 사건」은 서울지방법원 형사 23부(재판장 김대휘 부장판사)에 배당됐다.
형법 제307조에 따르면 명예훼손은 「공연히 사실을 摘示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摘示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 해당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 摘示」이며, 의견이나 논평 같은 평가의 경우에는 처벌하지 않는 게 우리 법원의 판례다. 林炚圭 변호사의 말이다.
『예컨대 「저 사람은 죽일 놈」이라 보도했을 경우, 이것은 평가의 문제이며 사실 摘示가 아닙니다. 명예훼손에 해당되지 않으며, 정 문제를 삼는다면 모욕죄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모월 모일 몇시에 어디에서 누구를 죽였다」 하는 것이 사실을 摘示한 것인데, 이것이 근거가 없는 허위라면 명예훼손이 되는 것입니다.
「李度珩 사건」에서 검찰은 9가지 점을 문제삼았습니다. 이 가운데 7개는 사실을 사실에 기초하여 보도했다는 것이 변호인의 판단이며 이에 따라 관련 증거들을 재판부에 제출했습니다. 나머지 2개는 「사실 摘示」가 아닌 평가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金大中씨가 대통령 후보라는 公人이고 그와 관련된 내용은 公共의 이익에 관한 것으로서 피고인은 진실한 것이라 믿었고 또 그렇게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므로 위법성이 없다는 게 우리의 주장이었습니다』
집행유예 근거
李度珩씨의 주장을 立證(입증)하기 위해 변호인이 제출한 증거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한국일보 문화일보 국민일보에 보도된 관련 기사,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다』는 金大中 대통령의 취임사, 金大中 대통령의 저서(「한국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해방 50주년과 우리 민족의 내일」), 일본의 아사히 신문, 산케이 신문 관련 기사, 일본 월간지 中央公論(중앙공론) 기사, 미국 워싱턴 포스트紙(지) 기사 등 1백 30여건이었다. 검찰의 공소사실과 이를 반박하는 변호인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공소사실 관련 증거표」도 재판부에 제출되었다.
1심 판결은 공소 제기 후 1년이 지난, 1999년 6월24일에 있었다. 재판부는 李度珩씨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판결문 要旨(요지)는 이렇다.
<이 사건에서 피고인이, 비방할 목적이나 당선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출판물에 의하여 허위의 사실을 공표 내지 摘示하여 명예를 훼손하였고, 그에 대한 (미필적) 故意(고의)도 인정되는 이상 위법성 조각 사유가 적용될 수 없고, 따라서 그 사실들을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할 여지도 없으므로 피고인의 주장은 이유 없다>
징역 2년의 實刑(실형)을 선고하면서 집행유예를 한 이유에 대해 판결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피고인이 고령의 언론인으로서 벌금형 이외의 前科(전과)가 없고, 이 사건 기사 내용은 (주관적) 사실적 측면뿐만 아니라 의견 내지 평가적 측면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피고인의 허위 인식의 정도가 약하고, 한편 한국논단 1997년 11월호에서 金大中 후보측의 反論을 게재하여 주기도 하였으며, 자유언론 내지 사상의 자유시장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최종적인 의사형성과 결정권은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유보되어 있고, 피고인의 행위로 인한 영향이나 피해가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피고인이 이 사건의 刑으로 인하여 장래 피선거권 등 여러 가지 자격이 제한되는 불이익한 결과도 함께 받게 되는 점 등의 정상을 참작하여 판결한다>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
「李度珩 사건」 변호인 林炚圭 변호사에게 소감을 물어보았다.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재판 과정을 녹음해 달라는 변호인측 요구도 재판부가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李씨 재판은 그날 예정된 재판 중 항상 맨 뒤로 밀렸습니다. 텅 빈 법정을 지키는 사람은 李씨 가족뿐이었죠. 방청객보다 변호인이 더 많은 희귀한 재판이고, 망각된 사건이 되었습니다』
「李度珩 사건」의 2심은 서울고법 형사 10부에 배정됐다. 재판장은 金大煥(김대환) 부장판사. 林炚圭 변호사는 2심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2심에서 피고인을 직접 신문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피고인 직접 신문을 갖고 「金大中 후보를 낙선시킬 목적을 갖고 보도하지 않았느냐」는 점을 물었습니다. 李度珩 피고인은 「언론인도 公共의 이익과 관련해 개인적 견해가 있다. 이 사건을 선거운동 차원으로 보지 말라. 나는 金大中 후보를 대통령감으로 보지 않는다는 내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다. 설혹 낙선시킬 목적이라 하더라도 기사 내용은 진실이다」고 말했습니다.
재판장은 李피고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하라고 했고, 검찰은 우리 변호인의 주장을 듣기만 할 뿐 반박을 하지 않았습니다. 2심 역시 맨 꼴찌로 진행돼 보통 저녁 6시30분쯤 끝났습니다. 심리는 金大煥 부장판사가 담당했는데 結審(결심)을 하고 난 후, 법원 人事로 다른 자리로 갔습니다. 새로 온 재판장은 재판을 한 번도 안한 상태에서 선고했습니다』
1심을 그대로 인정한 2심 선고는 11월9일에 있었지만, 이 기사를 쓰는 동안에 판결문이 나오지 않아 有罪를 내린 정확한 근거는 알 수가 없다. 대강의 취지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보도 내용은 (평가가 아닌) 사실 摘示로 볼 수 있으며, 피고인의 사회적 활동 前歷(전력)과 한국논단의 보도 성향으로 미루어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李씨 변호인단은 『2심에서의 특징이라면 피고인의 사회적 활동 前歷과 한국논단의 보도 성향으로 미루어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한다고 지적한 점』이라고 말했다. 林炚圭 변호사는 『대법원 상고 때 1심에서부터 했던 法廷(법정) 녹음을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명예훼손이 아니라 언론자유에 대한 재판』
有罪 판결의 한 근거가 된 「李度珩씨의 사회적 활동 前歷」을 알아보기 위해 재판부에 제출된 「李度珩씨의 경력」을 살펴보았다.
<1933년 서울 출생. 1950년 서울 공고 5학년 때 6·25 전쟁 발발, 軍(군) 입대. 1953년 육군 중위 임관. 1958년 정훈학교 교관. 1963년 대위로 예편, 조선일보사에 입사. 1966년∼1967년 駐越(주월) 특파원. 1974년 조선일보 외신부 차장. 1978년 관훈기자클럽 제1회 言論賞(언론상) 수상. 1978년∼1985년 駐日특파원. 1983년 중앙대 제정 承堂(승당) 言論賞 제1회 언론문화 보도 부문 수상. 1984년 「한국인이 본 일본」으로 일본 「라디오 단파 아시아賞」 제1회 수상. 1985년 조선일보 부국장, 관훈클럽 29대 총무. 1989년 조선일보 통한문제 연구소장. 1992년 4월 한국논단 발행인 겸 대표이사>
林炚圭 변호사는 「李度珩 사건」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결론지었다.
『한국논단의 보도는 사실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사실 관계에서 질 것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재판부에 제출한 각종 증거들은 金大中 대통령의 思想(사상) 단편을 보여주는 폭발력을 갖고 있습니다. 다소 대통령을 모욕한 부분이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이 사건을 정말 문제 삼겠다면 명예훼손이 아니라 모욕죄로 다뤄야 합니다(참고로 모욕죄는 최고 형이 징역 1년이며, 명예훼손죄는 5년이다).
이 정도 문제로 언론인을 기소하면 우리나라에 언론의 자유는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 체제도 아니고요. 결론적으로 李度珩씨 사건은 괘씸죄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李씨를 변호해온 姜信玉 변호사는 「자유·번영의 길」(憲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 기관지)에 2심의 최종 변론 要旨(요지)를 기고했다. 내용은 이렇다.
<언론인이 한 의사표시가 대통령의 비위를 건드린다 하더라도 다른 언론인이 대통령을 좋게 써 줌으로써, 그것이 바로 토론의 시작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대통령 후보에 대한 평가가 나중에 이루어져, 대통령에 당선되거나 낙선되는 그런 정치구조가 바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사건의 경우에는 피고인이 자기 나름대로 언론이 가져야 할 용기와 인격을 갖고 정말로 나라를 위해서 이런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런 글을 썼으며, 쓴 글의 내용이 허위도 아닐 뿐아니라 피고인이 확신하고 있는 내용들이고, 이런 글을 쓰는 피고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기 있는 언론인으로서 표창받아야 할 행위이지 형사소추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은 피고인 한 사람의 명예훼손이라는 단순한 사건으로 기소되어 재판받고 있지만, 사실은 헌법의 기본권인 언론의 자유가 재판받고 있는 것입니다>
「한길소식」 발행인 咸允植 명예훼손 사건
金대통령의 前 경호 책임자
「한길소식」 발행인 咸允植(57)씨는 본래 金大中 대통령의 경호 책임자였다. 咸씨는 대통령 선거를 한달 가량 앞둔 1997년 11월19일, 金大中 후보를 대리한 국민회의 민원실장 吳吉祿(오길록), 전문위원 金日洙(김일수)씨 이름으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됐다.
金大中 후보측은 고발장에서 「咸씨는 金후보를 낙선시킬 의도하에 선거를 불과 2개월 앞두고 「한길소식지」라는 제호의 정기간행물을 등록, 1호부터 8호까지 발행하면서 金후보의 출생, 사상, 경력, 건강, 병력 등에 관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주장했다.
고발장에 기록된 허위사실은 다음과 같다.
<▲한길소식지 제2호에서 「金大中 출생 비밀 및 家系(가계)의 비밀을 밝힌다」는 제목 아래, 金大中은 諸葛成祚(제갈성조)와 張鹵島(장노도) 간에 태어난 것으로, 金大中은 본래 姓(성)이 諸葛(제갈)임에도 우리나라 제일의 姓氏인 金海(김해) 金씨를 자신의 본관으로 내세우면서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이용하였다.
▲위 소식지에서 「영웅주의에 빠진 食言(식언)의 정치인 金大中」이란 제하로, 한 시대의 정치지도자라는 사람이 거짓말을 식은 죽 먹듯이 하고 모든 것을 음해와 공작으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본인의 이미지 손상 차원을 넘어 국가의 운명을 파멸로 이끌고 가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온다. 이러한 점에서 金大中씨는 거짓말쟁이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건국 이래 정치인으로서는 제일 많은 거짓말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한길소식지 제3호에서 「金大中씨 사상 전력 무엇이 문제인가」 제하로, 1949년 여름에는 보성경찰서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전남경찰서에 구속된 사실이 있다. (중략) 金大中씨와 정태묵의 관계는 매우 미묘하다. 정태묵이 전쟁 전에 전남 벌교 부근을 기점으로 서남 빨치산 부위원장을 맡고 있을 당시 金大中씨도 같은 지역에서 좌익 활동을 하고 있었다.
▲위 소식지에서 「병역 기피자 金大中, 대통령 후보 자격없다」는 제하로, 병역에 관해서 金大中씨는 할 말이 없다. 그가 병역필증(제대증)도 없는, 병역을 기피한 병역 미필자라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별 이유
이에 대응, 咸允植씨는 『한길소식지에 게재된 내용은 철저한 사실확인 작업과 증언을 통해 쓰여진 것』이라며 자신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 金大中 후보와 고발 대리인 吳吉祿, 金日洙씨를 명예훼손과 무고혐의로 大檢에 고발했다.
咸씨는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부터 검찰 조사를 받았다. 신문조서에 따르면, 검찰은 咸씨를 상대로 보도 내용의 사실 여부와 함께 「한길연구회」란 단체의 설립 배경과 그 배후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였다.
咸씨는 『金大中씨와 뜻을 같이하여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金大中씨의 실체를 알고서 결별한 사람들이 金大中씨의 실체를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한길연구회를 설립했다』고 진술했다.
咸씨는 金대통령을 알게 된 데 대해 『1969년 고향 선배 權魯甲(권노갑)씨로부터 「내년 대통령 선거에 金大中씨가 출마하는 데 도와달라」고 하여 그때부터 1985년 11월까지 金大中씨 수행 비서 겸 경호 총책임자로 일했다』며 『金大中씨를 보좌하는 동안 네 차례에 걸쳐 구속 수감되어 6년7개월을 복역했다』고 진술했다.
검찰이 『金大中씨를 오랫동안 도와주다가 결별하게 된 이유』를 묻자 咸씨는 이렇게 진술했다.
<1980년 新軍部(신군부)가 들어설 때, 저에게 金大中씨에게 전해달라면서 1급비밀을 건네준 친구 아들이자 육군 중령이 있었다. 그는 『비밀로 해달라』고 하면서 비밀문서가 든 봉투를 아홉 차례에 걸쳐 주었다. 그의 부탁대로 누가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고 金大中씨에게 건네주었는데, 5·18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인 5월17일에 金大中씨와 제가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받으면서 金大中씨가 미처 없애지 못한 1급 정보에 대한 출처에 대해 『咸允植이가 안다』라고 저에게 떠넘겨 버려 배신감을 느꼈다.
1985년 金大中씨가 미국에서 귀국하여 자택연금 상태에 있다가 연금이 풀리자마자 수안보 온천으로 휴양하러 가게 되었다. 많은 국민들이 전화로 망월동 묘지에 들르냐고 문의하여 제가 金大中씨에게 망월동 묘지에 먼저 들르겠느냐고 물어보니 대뜸 『또 의심을 받게 망월동 묘지에는 왜 들르느냐』고 하여 실망감을 주었다.
또한 동교동 자택을 신축할 때 많은 돈이 필요하여, 국민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제가 반대를 하였는데 金大中씨가 『나도 이제 편하게 살려는데 왜 그렇게 반대를 하느냐』고 하여 저에게 다시 실망감을 주었고, 1985년 국회부의장직을 둘러싼 갈등으로 金大中씨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완전히 결별하게 된 것입니다>
검찰은 咸允植씨를 상대로 한길연구회 사무실의 임대와 운영자금의 출처, 회원 현황, 筆陣(필진), 한길소식지 배포처, 배포 부수 등을 조사하는 한편, 咸씨 진술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咸씨와 그 가족들의 예금통장을 압수했다. 또 한길소식지를 인쇄한 공장의 관계자와 한길소식지 우편 발송 대행업체 이사, 한길연구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대학생들을 소환 조사했다.
咸允植씨는 「한길소식」에 게재한 「金大中 후보의 家系 비밀」이란 글 내용의 사실여부에 대해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같이 학교를 다닌 金大中 후보의 친척과 金후보 生家(생가)와 가까운 이웃에 살았던 諸葛씨 姓(성)을 가진 노인으로부터 들었고, 한길연구회 편집인 孫昌植씨가 직접 金후보의 고향 하의도로 내려가 마을 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진술했다.
咸씨는 「食言의 정치인 金大中」이란 기사와 관련해서는 『金大中씨와 결별한 이유도 많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며 정치 지도자로서 국민과의 약속을 金大中씨 만큼 많이 깨뜨린 사람이 없다』고 진술했다. 咸씨는 『확실한 자료에 의하여 주장한 것인데 허위 기사로서 김대중씨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은 억지 주장』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자료들을 증거로 제출했다.
金大中 명예훼손 관련 구속 1호
이 정부가 출범하기 전인 1998년 2월20일, 검찰은 咸씨를 명예훼손과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咸씨는 金大中 대통령 명예훼손 사건과 관련된 언론·출판인 가운데 구속 1호이다. 咸씨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공소장에 기재된 咸씨 혐의는 최초 국민회의측이 고발한 한길소식 2호, 3호의 내용에 검찰이 명예훼손이 된다고 판단한 한길소식 4호(金大中씨는 불치의 병을 갖고 있다」), 5호(「金大中씨의 여우의 기지」), 8호(「金大中씨, 당신의 붉은 사상 더 이상 감출 수 없다」) 등이다.
1998년 3월31일, 咸씨는 자신이 명예훼손과 무고혐의로 大檢에 고발했던 국민회의 金大中 총재, 국민회의 민원실장 吳吉祿, 민원실 전문위원 金日洙씨에 대한 고소를 취하했다. 서울구치소에서 작성해 재판부에 제출한 「고소 취소에 따른 진술서」에서 咸씨는 이렇게 밝혔다.
<진술인은 金大中 대통령이 대한민국 최고 국가지도자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소신 하에 오랜 기간 金大中 대통령을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 국민은 金후보를 선택하였습니다. 자유민주 국가에서 정치적 쟁점의 최종 선택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확신하는 바, 그 결정이 최종적인 기준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고소를 취하합니다>
1998년 4월17일, 咸씨는 변호인 李承煥(이승환) 변호사를 통해 재판부에 보석허가 청구서를 제출했다. 李변호사는 보석허가 청구서에서 「金大中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不可論(불가론)이 우리 사회의 현실로 존재하였고, 선거가 金大中 대통령의 승리로 끝난 이상, 金대통령의 身上(신상)과 관련하여 벌어졌던 사건들은 국민 대통합을 통하여 갈등을 해소한다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관용하고 용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한 평생 피고인의 옥바라지에 좋은 시절을 다 보낸 피고인의 妻(처)가 폐암으로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남편으로서의 고통과 회한을 주지 않기 위해 피고인을 보석해달라」고 요청했다.
보석청구는 기각되었다. 이어 1998년 6월 초, 咸씨는 수감중인 서울구치소에서 「본인은 이후 어떠한 형태의 정치운동이나 선거운동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가족과 함께 생업에만 종사할 것」이라는 진술서를 써,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검찰은 1심에서 咸씨에게 징역 4년을 구형했다. 1998년 7월2일, 서울지방법원 형사23부(재판장·최세모 부장판사)는 咸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 사실을 그대로 인정했다. 이 판결에 검찰과 피고인 모두 불복했다.
검찰은 항소 이유서에서 「이 사건은 특정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하여 사전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진 의도적 범행이며,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검찰이 단속한 흑색선전 사범 중 가장 重(중)한 사건」이라며 「흑색선전이 근절되지 않고서는 공명하고 깨끗한 선거문화의 정착이 어렵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咸씨 변호인 李承煥 변호사는 「검찰은 한길소식지 발행 배후에 의구심을 갖고 기소 前은 물론, 기소 後에도 수사를 집중하였으나 피고인이 수사에 협조하여 취재원과 자금출처 등을 모두 밝혔고, 수사 결과 피고인의 진술과 같이 음해적 차원의 사주나 자금지원은 전혀 없음이 밝혀졌다」며 「피고인 나름의 정치적 소신에 기하여 피고인이 독자적으로 수집한 자료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근거로 기사를 작성했고, 그 기사는 사실이다」고 주장했다.
2심 선고는 1심 선고가 있고 석달 후인 1998년 10월13일에 있었다. 재판부는 「李度珩 사건」을 담당한 서울고법 형사 10부(재판장 金大煥 부장판사)였다. 재판부는 검찰, 변호인 양쪽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선고 要旨(요지)는 이렇다.
「여러 증거들에 의하면 피고인의 범죄사실을 넉넉히 인정할 수 있고, 사실 인정이나 판단 과정에 어떠한 위법을 발견할 수 없다. (중략) 피고인의 연령과 경력, 이 사건 범행의 동기, 수단과 방법, 출판물의 배포 범위, 범행 후의 정황 등 이 사건 기록에 나타난 모든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피고인에 대하여 선고한 형량(징역 1년)은 무겁거나 가볍지 아니하고 적절하다고 인정된다」
咸씨는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올해 1월26일 기각돼, 징역 1년이 확정되었다. 1998년 2월20일에 구속된 咸씨는 刑量(형량)보다 15일을 더 옥살이 한 끝에 1999년 3월6일 滿期(만기) 출소했다. 출소 두달 후, 폐암으로 투병 중인 咸씨의 아내는 사망했다.
변호사 선임 않고 대응
孫昌植(51)씨는 「한길소식」 편집인이라는 이유로 발행인 咸允植씨와 같은 날, 동시에 고발됐다. 孫씨는 그후 7개월 동안 18회에 걸쳐 검찰 조사를 받았다. 검찰에서 孫씨는 『고발 내용 중 金大中 후보의 家系의 비밀 기사는 내가 쓰지는 않았지만 나와 관련이 있고, 그외의 것은 기사 작성 경위를 모른다』고 진술했다. 조사 결과, 한길소식지가 咸允植씨의 책임 아래 발행되었다는 점이 드러나 검찰은 咸씨를 구속할 때 孫씨는 제외했다.
孫昌植씨는 지방의 모 대학 정외과 출신이다. 6·25 전쟁 때 인민군의 손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학창 시절, 4H클럽 회장을 맡았고, 대학 졸업 후엔 무역회사에 들어가 일본 교토에서 지점장을 지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金大中씨의 전남 유세를 지원하는 유세독찰반 책임을 맡은, 같은 고향(완도) 선배인 金善太(김선태 초대 무임소 장관)씨가 孫씨에게 같이 일하자고 제의하면서 孫씨는 金大中씨를 알게 되었다. 대통령 선거 후에 孫씨는 야당인 통일당에서 인권국장을 지냈다.
1980년 5·18 사건 때, 孫씨는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돼 1년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고 출소 후엔 「한국 민주화투쟁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을 8년간 맡았다. 「정치범 동지회」 초대 회장은 尹攀熊(윤반웅) 목사였고 文益煥(문익환), 芮春浩(예춘호), 金相賢(김상현)씨가 뒤를 이었다. 孫씨는 金大中씨가 1987년에 평민당을 창당하자 따라갔으나, 야당 후보 단일화가 실패로 끝나자 金大中씨와 관계를 끊었다.
1998년 4월, 전직 언론인과 언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자유언론수호 국민포럼」이 결성됐다. 이 단체는 李哲承(이철승)씨가 회장인 자유민주총연맹에서 발행하는 「자유신문」에서 보수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던 李京植(이경식)씨 주도로 결성됐다. 孫씨는 사무총장에 앉았다. 두 사람은 보수세력의 행사에 빠지지 않았다.
金大中 변호위해 家系 조사했으나…
그로부터 두 달 후인 1998년 6월16일, 검찰은 孫昌植씨를 咸允植씨와 같은 혐의로 공소제기했다. 그 다음날 검찰은 검찰에서 이미 무혐의 처분을 내린 李度珩씨에 대해서도 공소제기했다.
그전의 조사에서 「金大中 후보 출생의 비밀」 외의 기사에는 관련이 없다고 결론 내린 검찰은 그러나 공소장에서 咸允植씨와 똑같은 혐의를 孫씨에게 적용했다. 「孫昌植 사건」은 「咸允植 사건」 재판부인 서울지법 형사23부가 맡았다.
孫씨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사건을 맡겠다는 변호사도 없고, 돈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孫씨는 설명했다. 첫 재판에서 孫씨는 『제가 갖고 있는 자료를 공개하면 金대통령이 40년∼50년 전에 한 일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다』며 검찰에 공소 취소를 요구했으나 검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8년 7월14일, 孫씨는 「대통령의 출생 비밀」과 관련한 진술서를 제출했다.
<피고인이 金大中 대통령의 姓氏(성씨) 眞否(진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1년 대통령 선거 후부터 정가에 설왕설래하던 풍문 때문이 아닙니다. 1980년 5월부터 6개월간 일본 산케이신문에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논설위원이 연재한 기사와 그가 쓴 「김대중의 좌절」이란 책과 1980년 5월8일 경주 金山大祭(금산대제)에서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과 유인물이 나부꼈다는 기사를 보고, 당시 金大中씨의 열혈 지지자였던 피고인은 울분과 충정의 일념에서, 그런 음해들에 대해 반박 자료를 만들기 위해 金大中씨 출생에 대해 깊이 探査(탐사)해왔습니다.
그런데 探査가 계속될수록 金大中씨측이 『정치적 모함』이라 일관해온 주장이 한낱 강변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金大中씨 호적에 드러난 것만 보아도, 張鹵島(장노도·金대통령의 어머니)씨가 金대통령을 庶子(서자)로 출생신고하여, 1924년 7월7일에 접수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중략).
이같은 의문들 속에서 피고는 1990년 5월부터 1997년 10월까지 약 8년간, 金大中씨 출생지 하의도를 13회, 그 인근인 안좌도, 진도, 임자도, 비금도 지역을 10회(1회 평균 3박4일) 방문하여 金大中씨를 아는 사람 28명을 만나 대화, 녹음, 촬영 등 자료 수집을 해왔습니다(중략).
재판부의 객관적인 조사나 규명작업이 진행된다면 그동안 피고인이 수집해 둔 자료를 제공하고 기꺼이 고증에 협력할 것입니다. 따라서 별도 제출한 金大中씨의 호적 사본과 관련자들의 호적 사본 등은 증거보존해 원본과 대조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全斗煥, 金鍾泌을 증인 신청
1998년 8월17일, 孫씨는 光州(광주)지방법원 木浦(목포)지원에 있는 金대통령의 호적 原簿(원부), 전남 신안군 하의면 하의초등학교에 있는 金대통령의 학적부, 金대통령 아버지 金云式의 호적 원부, 金대통령 어머니 張鹵島씨의 호적 원부, 諸葛成祚(제갈성조·金대통령 어머니의 첫 남편)의 호적 원부, 諸葛成福(제갈성복·제갈성조의 형)의 호적 원부 등에 대해 증거보존 신청을 냈다. 재판부는 이를 기각하고 변론을 종결했다.
증거보존 신청이 기각된 그 다음날인 8월26일, 孫씨는 재판부에 변론재개 신청을 하고 金대통령의 호적등본 변조 여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증거보존 신청한 서류들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金鍾泌(김종필) 국무총리와 全斗煥(전두환) 전 대통령을 증인 신청했다.
金총리의 경우,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과 유인물이 나부낀 1980년 5월8일 경주 金山大祭에서 초헌관으로 참석했기 때문이며, 全 전 대통령은 『金大中씨는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姓씨나 찾도록 하라』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게 孫씨의 주장이다.
심리가 종결된 이 사건은 1998년 9월3일자로 변론재개되었으나 孫씨가 요구한 증인 신청은 기각됐다. 재판부는 한 차례 더 재판을 갖고, 10월27일 結審(결심)했다.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孫씨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다. 孫씨는 최후 진술에서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을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지법 형사 23부는 1998년 11월26일, 孫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선고 이유는 咸允植 피고인 때와 거의 같았다. 검찰은 刑量에 불복, 항소했다. 孫씨에 대한 검찰의 항소 이유는 咸씨에 대한 것과 거의 같은 맥락이었다.
孫씨도 항소했다. 孫씨는 자기가 직접 쓴 항소 이유서에서 「피고인을 처벌하려면 金大中씨가 諸葛씨가 아니라 金海 金씨가 확실하다는 것을 검찰은 재판과정에서 분명하게 거증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2심 재판부는 孫씨에게 國選(국선) 변호인을 선정하라고 알렸지만 孫씨는 거부했다.
孫씨는 2심에서 光州지법 木浦지원 호적계에 보관 중인 金대통령의 아버지 金云式과 金대통령의 외할아버지 張之淑(장지숙), 그리고 「諸葛永凡(제갈영범)」이란 사람의 호적 원부와 除籍(제적) 원부의 「인증등본 송부촉탁」을 신청했다. 호적 원부와 제적 원부에는 본인은 물론, 자식들의 출생·결혼·사망 등 변동 사항이 기록돼 있다. 「認證등본」이란 법원에 보관중인 金대통령 관련의 호적등본이 官(관)에서 인증하는 절차로 발급되었음을 말한다. 재판부는 孫씨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1999년 4월19일, 光州지법 木浦지원은 항소심 재판부에 사실조회에 대한 회신을 보내, 「호적 예규 제475호에 의해 폐기되었다」고 통보했다.
諸葛成祚의 기록 미스터리
孫昌植씨에게 金대통령의 父系(부계)나 母系(모계)와 무관한 「諸葛永凡」의 호적과 제적 원부를 신청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諸葛永凡이 戶主(호주)로 돼 있는 호적에 金대통령의 어머니 張鹵島씨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諸葛永凡 호적등본에 따르면 「張鹵島 1893년 6월6일 출생. 諸葛成祚 妻. 무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번지 戶主 張之淑 家 親族 入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1893년에 태어난 金대통령의 어머니 張鹵島씨가 諸葛成祚라는 사람과 결혼했다가 다시 아버지 張之淑 앞으로 호적을 옮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확인한 諸葛永凡의 호적등본에 따르면, 諸葛永凡의 장남 이름은 成福이고, 차남은 成祚입니다. 그런데 이 호적등본에는 앞에서부터 장남 成福, 成福의 아내, 成福의 자식 順(순)으로 이름이 나오다가 갑자기 張鹵島(2남 成祚의 처)란 이름이 등장합니다. 張鹵島 다음에는 諸葛永凡의 3남 이름이 나옵니다. 장남에서 3남으로 건너뛰어 둘째 아들 成祚의 기록이 없는 것입니다. 金대통령의 어머니 張鹵島씨는 3남과 같은 난에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호적 원부는 면사무소와 법원, 두 군데서 보관하는데, 하의면 사무소에서 발급받은 호적이 이렇기 때문에 木浦지원의 호적 원부를 떼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만일, 木浦지원 호적 원부에 諸葛成祚의 기록이 나온다면, 하의면 사무소 호적 원부는 누군가가 成祚의 기록이 있는 페이지를 毁棄(훼기)한 셈이 됩니다.
대통령의 외할아버지 張之淑의 호적등본에 따르면 장녀 張鹵島는 「1911년 諸葛成祚와 혼인신고 제적. 1925년 호주 張之淑 입적 신고. 1960년 金云式과 혼인신고 제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대통령의 어머니 張鹵島씨는 18세에 諸葛成祚와 결혼했으나 33세에 親家(친가)로 왔다가 67세에 金云式과 혼인을 한 게 됩니다.
金대통령 호적에 따르면, 金대통령은 어머니 張鹵島의 庶子로 출생신고가 되어있는데, 신고 접수일이 1924년 7월7일로 되어 있습니다. 기록대로라면 金대통령은 적어도 1924년 7월7일 이전에 태어난 셈이 되는데, 그때 아버지가 누구냐가 출생의 비밀인 것입니다. 대통령의 어머니 張鹵島씨의 첫 남편 諸葛成祚의 호적이 있어야 복잡하게 얽혀 있는 家系의 내막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리고 제 주장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에 세 사람의 호적 원부와 제적 원부를 신청한 것입니다』
金鍾泌 全斗煥 증인 신청 기각
孫씨는 이와 별도로 자신이 갖고 있던 자료들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①金大中 호적초본 ②金대통령의 동생 金大義 제적등본 ③하의면 면사무소 민원담당 메모 ④張之淑 제적등본 ⑤諸葛成祚 제적등본 ⑥諸葛永凡의 호적등본 ⑦경주 金山大祭에서 「尹大中은 물러가라」 는 등의 유인물, 현수막이 있었다고 보도한 1980년 5월9일자 동아일보 조선일보 대구매일 기사 ⑧「유신공화국 몰락」(1986년 1월30일 발행·저자 이한두)이란 책의 36쪽에서 47쪽의 「윤성만」 부분 ⑨1980년 5월1일터 6개월간 일본 산케이신문에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논설위원이 연재한 기사 ⑩金海 金씨 성명서 등이다.
孫씨는 또 A4 용지로 8백75쪽에 이르는 녹취록을 증거로 제출했다. 녹취록은 孫씨가 하의도를 비롯해 그 인근인 안좌도, 진도, 임자도, 비금도 지역에서 『金大中씨는 金海 金씨가 아니다』라고 증언한 주민 28명의 녹음이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 녹취록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孫씨가 또 다시 요구한 金鍾泌 총리와 全斗煥 전 대통령에 대한 증인 신청도 기각했다.
孫씨는 1999년 6월22일 재판부에 제출한 최후 진술서에서 이렇게 썼다.
<金대통령의 측근이 현역 국회의원을 세 차례나 피고의 집에 보내, 피고가 가지고 있는 金대통령과 관련한 일체의 호적원본과 28명의 녹음 테이프를 돌려주고, 한길소식지 발행인 咸允植씨를 별도 형사고발하면 피고의 사건을 취하해주고 생활과 자리를 보장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헌법에 검찰이 항소까지 한 사건을 취하할 수 있습니까. 피고가 변호사도 없이 이 어려운 재판을 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헌법체제와 독립된 사법부, 현명하신 재판부의 명철한 심판을 믿기에 회유와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 10부는 1999년 7월13일, 검찰과 孫씨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판결문 要旨(요지)는 이렇다.
<원심이 적법하게 조사 채택한 여러 증거들을 종합하면, 원심이 판시한 피고인에 대한 이 사건 각 범죄사실을 넉넉히 인정할 수 있고, 기록을 살펴보아도 원심의 사실 인정이나 판단과정에 어떠한 위법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항소 논지는 이유없다.
이 사건 출판물에 적시한 사실들이 15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정치적 쟁점으로 다루어졌으나 피해자가 결국 대통령에 당선된 점, 이 사건 한길소식지의 원고 작성이나 편집 제작 등을 함윤식이 사실상 주도하였고, 피고인의 가담 정도는 상대한 경미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원심이 피고인에 대하여 선고한 형량(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은 적절하다고 보이고, 너무 무겁다거나 너무 가볍다고는 인정되지 않으므로 양형 부당 주장은 모두 이유없다>
孫씨는 審理(심리) 미진, 採證(채증) 법칙 위반 등을 이유로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10월26일, 孫씨의 상고를 기각했다.
孫忠武 「김대중 X-파일」 사건
鄭昇和가 본 「金大中 자료철」
「인사이드 월드」 발행인 孫忠武(59)씨는 5명의 언론·출판인 중 가장 먼저, 1997년 9월1일에 고발됐다. 고발장도 金大中 총재 이름으로 제출됐다. 金총재가 문제삼은 것은 孫씨가 쓴 「김대중 X파일」이란 책의 내용과 그 내용을 인용 보도하는 주간지 「인사이드 월드」였다. 金총재는 고발장 제출에 이어 「김대중 X파일」과 「인사이드 월드」의 발행, 판매, 배포 등 금지 가처분신청도 냈다.
형사 고발사건은 서울지검 형사 1부 秋有燁(추유엽) 부부장 검사가 맡았다. 검찰은 1997년 9월19일 金총재를 대리해 검찰에 출두한 국민회의 종합민원실장 吳吉祿씨로부터 고발취지를 들었다.
吳씨는 검찰에서 『孫씨가 「김대중 X-파일」이란 책을 통해 金총재가 공산당에 입당한 전력이 있고, 아직까지 전향하지 아니한 공산주의자인 것처럼 허위사실을 공표하고, 또 金日成(김일성)과 우스노미야(일본 자민당 중의원·사망) 대담록을 수록하면서 마치 金日成이 金총재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지원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金총재를 비방했다』고 진술했다.
이어 1997년 10월9일에는 孫忠武씨를 조사했다. 孫씨는 『공개된 자료, 보도된 자료를 근거로 저술했기 때문에 허위나 거짓이 없다』며 『고발인 측에서 문제삼은 부분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에서 金후보의 훌륭한 점을 부각시켜 변호해 주었다』고 진술했다.
검찰 조사와 별도로 서울지방법원 민사 50부는 「김대중 X-파일」의 내용을 인용, 보도하는 「인사이드 월드」 인쇄와 배포를 중지시켜달라는 가처분신청 심리를 벌였다. 이에 대응, 孫씨는 前 육군참모총장 鄭昇和(정승화)씨가 작성한, 「1979년 10·26 직후 계엄사령관 시절에 金大中 자료철을 보았고 필요하면 그 내용을 증언할 용의가 있다」는 진술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金大中 자료철」과 관련된 鄭昇和씨 발언은 孫씨가 쓴 「김대중 X-파일」에 상당 부분 인용되었다. 진술서 내용은 이렇다.
<본인은 계엄사령관 재직 중 金大中씨에 대한 자료철을 읽은 바 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①金大中은 정권획득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다, ②그는 일본에서 좌경 단체들의 후원을 받아 선동적인 정치행위를 하였다는 말도 들었다, ③그는 8·15 해방 직후 공산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한 바 있다, ④그는 또 6·25 전에 좌익활동을 하다가 자수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했었다, ⑤그는 또 6·25 때에는 예비 검속되어 총살 대상자로 분류되었으나 실무자의 착오로 총살을 면했다, ⑥그후 북괴군이 그의 고향인 木浦를 점령하자 돈을 빌려주고 못 받은 사람들의 고발로 내무서에 구금되었다가 국군이 목포를 탈환하는 바람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본인은 또 金大中이 일본의 反韓(반한)파 사회주의자 政客(정객)인 우스노미야 도쿠마가 1974년에 북한을 방문하여 金日成과 회담하고 그 회담 기록을 일본에서 출판한 것을 읽어본 일이 있다. 본인은 이에 따라 1979년 11월26일부터 1979년 12월 초 사이, 각 언론사 발행인, 편집국장, 계엄사령부 출입기자들을 세 차례 초청, 金大中씨에 대한 자세한 배경을 설명한 바 있다.
초청되어 온 언론인들에게 『金大中씨는 과거 공산주의자였으며 그후에도 전향한 뚜렷한 증거가 없다』 『국회의원으로서 활동했고,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여 많은 표를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정치활동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고 말한 사실이 있다>
1997년 10월10일, 서울지방법원 민사 50부는 金大中 총재측의 「인사이드 월드」 배포 금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였다. 검찰은 고발장이 접수된 지 5개월 후인 1998년 2월20일 孫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金大中 총재는 공산당에 가입한 사실도 없고, 공산주의를 신봉하지 않았음에도 전향하지 않은 공산주의자인 양 표현한 책자를 판매해 金총재의 명예를 훼손했고, 金日成이 우스노미야 의원에게 『金大中과는 만난 적도 없고 원조한 적도 없지만 그의 주장은 올바르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음을 이용하여 金日成의 金大中 만들기란 제목을 단 책을 배포한 것은 金총재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孫씨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1998년 5월12일에 열린 첫 재판에서 孫씨 변호인은 冒頭(모두) 진술을 통해 『검찰은 「김대중 X-파일」이란 책이 金총재의 어떤 점을 비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단지 책의 소제목과 사진의 배열이 독자로 하여금 金총재의 이념과 사상을 오인할 가능성이 있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기소한 것은 형사소송법에 위배된다』며 『허위의 사실이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소기각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2차 재판은 1998년 6월2일로 예정돼 있었는데, 그 전날 오전에 孫씨는 그의 집에서 긴급 체포됐다. 그때문에 피고인 불참으로 재판은 공전됐다. 孫씨를 구속 수사한 검찰은 그후 孫씨에게 「權寧海 前 안기부장으로부터 돈을 받고 金大中 후보 비방기사를 썼으며, 金후보를 음해하기 위해 사진 변조를 했다」는 새로운 혐의를 추가했다.
「金大中 X-파일」 제작비를 안기부가 지원
孫씨가 긴급 구속되면서 수사 주체가 형사 1부에서 공안 1부로 바뀌었고 재판부도 서울형사지법 합의 23부에서 합의 30부로 교체됐다. 검찰은 1998년 6월17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과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혐의 등으로 孫씨를 구속 기소했다.
孫씨 공소장에 따르면, 孫씨는 權寧海 전 안기부장에게 돈을 받아 「金大中 X-파일」과 「인사이드 월드」를 발행했으며, 權씨의 비서실장이었던 李강수씨는 權 전 부장으로부터 돈을 받아 孫씨에게 전달했고, 李상생 전 안기부 감찰실장은 權 전 부장의 지시에 의해 「김대중 X-파일」을 안기부 내에 배포한 혐의를 받았다.
「孫忠武 사건」은 이른바 「북풍 사건」에 묻혀 명예훼손 여부는 쟁점이 되지 못했다. 「김대중 X-파일」이란 책 제작비를 안기부가 지원하게 된 과정, 지원 금액, 「인사이드 월드」 운영자금 지원 배경과 그 액수, 「김대중 X-파일」이란 책을 안기부가 구입해 간부들에 배포한 과정 등이 중요시 되었다. 안기부 내부에서 작성된 「인사이드 월드」 대통령 음해기사 내용 검토 보고서, 「인사이드 월드」 문제기사 요약 보고서 등이 증거로 재판부에 제출됐다.
孫씨에게는 국가안전기획부법 위반이 추가되었다. 孫씨가 안기부 직원들과 공모했기 때문이라는 게 검찰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법원에서 무죄가 되었다.
孫忠武씨 변호인은 『변조 사진은 존재하지만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쟁점으로 약하며, 孫씨가 안기부 돈을 받은 시점과 「김대중 X-파일」 출판 시점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 역시 쟁점이 될 수 없다』며 『이 재판의 핵심은 「김대중 X-파일」과 「인사이드 월드」 기사가 金大中 후보의 명예를 훼손했느냐, 아니냐에 있다』고 말했다.
孫씨는 지난 4월23일 대법원의 상고 기각으로 징역 2년이 확정돼 춘천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월드 코리아」 발행인 千奉宰 사건
「김대중 양날개 정치」 등
千奉宰(39)씨는 새앎출판사 대표이자 월간지 「월드 코리아」 발행인이었다. 국민회의측이 金大中 후보의 명예훼손과 관련하여 문제삼은 것은 「월드 코리아」 1997년 10월호와 새앎출판사 발행의 책 두 권이다. 金大中 총재 비서실의 전문위원 출신이었던 李泰昊(이태호)씨가 쓴 「김대중 양날개 정치」와 소설가 李진수씨가 쓴 「거짓말 선생님」이다. 李진수씨는 소설 「뺑끼통」의 작가다.
고발장은 金大中 국민회의 총재 이름으로 작성해 국민회의 민원실장 吳吉祿씨를 통해 1997년 10월14일에 제출됐다. 국민회의측은 발행인 千奉宰씨와 「거짓말 선생님」의 著者(저자) 李진수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민·형사 고발했다. 李泰昊씨는 제외됐다.
고발장에 따르면 월드 코리아 10월호 기사 중 <김대중 법정에 선다, 특집 김대중 다시 보기, 김대중은 공산주의 활동가였다, DJ 색깔론 사라지지 않는 이유> 등과 「거짓말 선생님」이란 책의 <김대중은 기만술의 대가다, 김대중도 과격하지만 그 추종자들이 더 과격하다, 지역색을 조장한 사람은 김대중이다, 김대중 혐오증이 왜 생겼는가, 김대중은 왜 대통령이 될 수 없나 등>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金후보를 비방했다는 것이다.
고발장은 「김대중 양날개 정치」란 책의 경우에는 <이 나라 정치 지도자 중에서 김대중에게 배신 한 번 당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나 김대중이 오늘날까지 배신하지 않고 신의를 지키는 대상이 金日成, 金正日 부자이다> 등의 표현도 허위사실이라 주장했다.
국민회의측은 월드 코리아 10월호와 두 권의 책에 대해 발행, 판매, 배포 금지 등 가처분신청도 냈다. 「김대중 양날개 정치」는 대통령 선거 1년 前인 1996년 1월20일에 출간됐고, 「거짓말 선생님」은 그 두달 후인 3월20일에 나왔다.
1997년 12월8일, 국민회의 민원실장 吳吉祿씨가 20여명과 함께 월드 코리아 사무실을 방문해, 金大中 후보의 X-레이 사진을 내놓으라며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여 마포경찰서에서 출동했다. 기자들이 吳씨를 폭행혐의및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했으나 吳씨에게 무혐의 처분이 떨어졌다. 千씨는 『X-레이 필름은 뺏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千奉宰씨는 검찰에서 명예훼손 여부를 조사받았다. 千씨는 『검찰은 우호적으로 대해 주었다. 신경써서 진술하라는 조언도 했다. 그러나 이 정부가 출범하면서 태도를 바꿔, 내 예금계좌도 추적했다. 보도 내용은 다 근거가 있고, 사실이라 믿기 때문에 재판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대통령 변호인 명의의 독촉장
명예훼손에 따른 형사고발과 별도로 진행되던 민사소송에서 千씨는 패소했다. 작년 7월,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민사 6부는 金대통령측 千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1억원 청구 소송에서 『피고(千奉宰)는 원고(金大中 대통령)에게 5천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선고 후 20일이 지난, 1998년 7월29일, 千씨는 金大中 대통령을 대리한 安상운 변호사로부터 독촉장을 받았다. 민사소송 패소에 따른 손해배상금 5천만원과 그 이자 6백30만원 등 총 5천6백30만원을 1998년 8월3일까지 납부해달라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후 千씨는 두번 더 독촉장을 받았다.
형사사건 1심 선고는 지난 2월25일에 있었다. 千奉宰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千씨는 『항소를 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재판이 열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千씨는 이렇게 말했다.
『작년에 金대통령의 호적과 金대통령 어머니의 호적을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했다. 재판장과 검사가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재판부는 내 변호사에게 제출을 하지 말라고 한 것 같았다. 사실 입증에 필요한 자료를 왜 재판부가 거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후 1심 판결을 받아들이고 항소를 취하하라는 압력이 여기 저기서 오고 있다』
千씨는 요즘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선거 전에는 사무실이 동교동에 있었는데 매일 돌멩이가 날아와 서울 신당동으로 옮겼다. 부수도 줄고 광고도 끊어져 월드 코리아는 지난 4월에 자진 停刊(정간)했다. 20여명이 넘던 직원이 지금은 3명으로 줄었다. 「애들을 맨홀에 빠뜨려 죽이겠다」 「돌담길 조심하라」는 협박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와 가족과도 헤어졌다. 작년에 「국경없는 기자회」에서 찾아와 나를 취재했다. 국내 언론은 내 사건에 관심이 없다』
1998년 4월2일, 국제언론인 보호위원회(CPJ·Committee to Protect Journ alists)는 「한국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발생한 명예훼손을 이유로 제소된 4명의 언론인 사건에 대해 알고 싶다」는 편지를 金大中 대통령과 대법원장, 법무장관, 駐韓(주한) 미국대사관에 보냈다. 이들은 李度珩, 孫忠武, 咸允植, 千奉宰씨 이름을 거명했다.
이들은 「명예훼손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형사범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언론인도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 결과 감옥에 가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金大中 대통령이 정치적인 탄압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위 언론인들의 상태에 관한 우리의 정보 요구에 부응할 것으로 믿습니다」며 끝을 맺었다.
金대통령의 법정 대리인측은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