物證 드러나는 「代理전쟁」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인 6·25 전쟁이 스탈린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주장은 몇몇 학자들에 의해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한국전쟁에 관련된 소련측 비밀문건들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들을 제시할 수 없었다. 心證(심증)은 있지만 物證(물증)이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최근 공개한 6·25 전쟁관련 문건들을 검토해보면 역사의 베일에 숨겨져 있던 한국전쟁의 또다른 一面(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은 환희보다는 悲哀(비애)가 앞선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 전체를 절망과 고통의 굴레 속으로 빠져들게 했던 6·25가 우리 민족 스스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타인의 손에 의해서 操縱(조종)된 代理戰爭(대리전쟁)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센터(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는 1991년부터 맥아더 재단의 재정 지원을 받아 「冷戰國際歷史(냉전 국제역사) 프로젝트=The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이하 CWIHP로 약칭)를 추진하고 있다. 대규모로 진행중인 이 프로젝트는 공산권의 붕괴로 접근이 가능하게 된 舊공산권 국가들의 자료들을 연구 검토하여 냉전에 관련된 새로운 정보와 학술적 평가들을 全(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다. 1992년부터 러시아가 공개하기 시작한 舊소련의 한국전쟁 관련문건들도 우드로 월슨 센터의 주요 연구 대상이다. 이 기관에서는 입수한 문건들과 이를 분석한 학자들의 연구논문들을 「冷戰國際歷史 프로젝트 보고서(CWIHP Bulletin)」에 게재하여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金日成, 스탈린에게 48번 南侵 승인 간청
러시아 정부가 공개한 한국전쟁의 비밀문건을 검토한 플로리다 주립대의 케스린 웨더즈비 교수는 「윌슨 쿼터리」 1999년 여름호에 발표한 「다시 본 한국전쟁」이라는 글에서 한국전쟁은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계획되고 준비된 재래식 군사공격이 확실하다고 밝혔다(이전까지 그는 한국전쟁은 金日成의 개전의지에 의해 일어났다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이번 기고문에서 종래의 자기주장을 번복했다). 그리고 웨더즈비 교수는 북한의 金日成이 스탈린에게 1949년 초부터 1950년 초까지 「남조선 赤化(적화)」를 위한 南侵(남침)을 승인해줄 것을 무려 48차례에 걸쳐서 요청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밝혔다.
그의 논문에 의하면 金日成이 스탈린에게 남한을 점령하기 위해 全面戰(전면전)의 의사를 최초로 밝힌 것은 1949년 3월5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金日成은 「남조선 해방」을 위한 전쟁에 대해 소련측의 의사를 타진했다.
스탈린은 한국군과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美軍(미군)의 군사력 그리고 남북한 군사력의 優劣(우열)에 대해서 金日成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다음 인민군이 국군에 비해서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남한에 아직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점(소련군은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과 38선 분할에 관한 美·蘇간의 합의를 상기시키면서 확답을 미루었다.
스탈린으로서도 남한의 뒤에 미국이 도사리고 있는 한 자칫 잘못하면 한반도에서의 局地戰(국지전)이 아닌 미국과의 一戰(일전)을 감수해야만 하는 전쟁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날 金日成과 스탈린의 만남은 스탈린이 남한이 먼저 북한을 침공하는 경우에만 전면전으로 남한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을 金에게 강조하면서 南侵을 승인하지 않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金日成으로서도 자신의 代父(대부)나 마찬가지인 스탈린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자신은 없었다.
당시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하면 북한이 월등했으나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면 개입할 가능성이 높은 미국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던 북한으로서는 소련이라는 안전판의 확보가 무엇보다 급선무였던 것이다.
한편 소련으로서도 북한을 앞세운 代理戰爭을 통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굳이 거부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다만 스탈린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아직 북한이 한국전쟁에서 확실하게 승리를 장담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판단했을 따름이었다.
비록 스탈린이 명확한 태도 표명은 주저했지만 이때부터 평양과 모스크바 사이에는 물밑에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사전 整地(정지) 작업이 빈번하게 진행되었다. 스탈린으로서는 어차피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 있는 남한을 赤化시키기 위해서는 전쟁은 필요했고 다만 시기만이 문제였다.
『제한戰이라도…』 간청한 金日成
하지만 남한을 적화시킨다는 궁극적인 목표는 같았지만 평양의 金日成은 스탈린처럼 느긋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거치면서 전략과 전술의 운용에 老獪(노회)한 스탈린에 비해서 아직은 어리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30대 김일성이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金日成은 평양 주재 소련 대사인 슈티코프와의 면담(1949년 8월12일)을 통해 다시 한번 소련을 설득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있고 난 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인 9월3일에는 북한과 소련의 실무자급 접촉이 다시 이루어졌다. 金日成의 러시아어 통역관 문일은 金을 대신해 평양 주재 소련 대사관의 툰킨 공사에게 1949년 7월,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한 이후 38선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했다고 강조하면서 「남조선 해방」을 위한 전면적인 남침 공격의 승인을 요청했다. 金日成은 그것도 힘들면 최소한 옹진반도라도 점령하는 制限戰爭(제한전쟁)이라도 승인해달라고 모스크바에 호소했다.
한편 金日成의 거듭된 간청에도 불구하고 확답을 해주지 않던 스탈린은 주한 미군이 철수하고 나자 종전의 태도를 바꾸었다. 駐韓(주한) 미군의 철수가 好機(호기)라고 판단한 스탈린은 9월11일, 남북한의 정치 군사에 대한 정보와 북한의 남침 제의에 대한 평양 주재 대사관의 의견을 보고하도록 긴급 지시했다.
이에 대해 평양 주재 툰킨 공사는 金日成을 직접 면담한 후 작성한 보고서를 1949년 9월14일 모스크바에 打電(타전)한다. 그런데 툰킨 공사의 보고서에는 남침을 거듭 요청하던 金日成이 종전과 다른 見解(견해)를 보였다는 점이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金日成은 툰킨 공사를 만난 자리에서 전면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신하던 종전의 주장과는 달리 현 상태에서 速戰速決(속전속결)에 의한 승리는 어려우므로 대규모 전면전쟁을 早期(조기)에 개시하는 것보다는 옹진반도만이라도 제한 점령할 것을 제의했다.
한편 툰킨 공사는 이 보고서에서 남침할 경우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빨치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인민군이 조속한 시일 내에 승리할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 정부가 중국 공산당에게 무너진 점을 고려하면 미국의 강력한 군사개입이 예상되므로 한반도에서의 전면전쟁은 자칫 잘못하면 장기화될 가능성이 많아 현 상태에서의 남침은 적절치 않다는 현지 대사관의 의견을 첨부했다.
아울러 金日成이 제의한 옹진반도 점령과 같은 制限戰爭 또한 오히려 미국의 反蘇(반소) 운동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어 소련에 결코 이익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처럼 인민군의 남침에 대한 부정적인 현지 대사관의 보고에 접한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9월24일 평양 주재 대사에게 하달한 훈령을 통해 남한 내 빨치산 활동 강화계획은 승인하되, 전면적인 남침이나 옹진반도 점령 작전은 자칫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이 장기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어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점을 金日成에게 강조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평양의 金日成은 모스크바의 지시와는 달리 자신의 고집을 좀처럼 버리지 않았다. 金日成은 1950년 1월17일 북경으로 부임하는 駐中(주중) 이두연 대사를 환송하기 위한 연회에 참석한 소련대사관원들에게 이제는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졌으므로 다음은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했다. 이어 金은 『지난 한 해 동안 남조선이 북조선을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격 작전을 계기로 남침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對南(대남) 선제 공격만이 능사다. 따라서 이를 승인받기 위해 스탈린을 만나고 싶다』고 역설했다.
이 자리에서 金日成은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규율을 지키는 사람이고 스탈린의 말이 곧 법이기에 「그의 승인 없이는」 공격을 할 수 없다』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슈티코프 소련 대사에게 스탈린이 3일 만에 끝낼 수 있는 옹진점령 작전마저 승인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 전면적인 남침을 하면 며칠 안으로 서울을 점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모스크바의 지시를 무조건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슈티코프 대사의 답변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노회한 스탈린은 毛澤東 끌어들여
비신스키 外相(외상)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1950년 1월30일 슈티코프 대사에게 하달한 電文(전문)에서 『金日成의 불만은 이해하지만 큰일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며 위험이 없도록 잘 조직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를 만나 의논할 용의와 도와줄 의사가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金日成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남침에 대한 승인 유보에서 긍정적으로 바뀐 스탈린의 의사가 전달되자 金日成은 주저하지 않고 그해 봄, 북한정권의 2인자인 朴憲永(박헌영)을 대동하고 소련을 방문한다. 金日成으로서는 스탈린의 생각이 바뀌기 전에 얼른 담판을 짓고 싶었던 것이다. 최근 러시아가 공개한 舊소련의 비밀문서에는 金日成과 朴憲永이 1950년 3월30일 평양을 떠나 모스크바로 간 지 한달 만인 4월25일에야 귀국한 것으로 나와있다. 그렇지만 모스크바에서의 체류일정과 스탈린과의 면담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때 金日成과 스탈린 사이에서 어떤 내용의 얘기가 오고갔는지 추론해볼 수 있는 증거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련에서 돌아온 金日成은 그해 5월13일부터 5월16일까지 연이어 중국을 방문한다. 그리고 毛澤東(모택동)에게 남한 공격에 대한 스탈린의 意志(의지)를 전달했다. 毛澤東은 스탈린의 정확한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스탈린에게 확인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이 毛澤東에게 보낸 1950년 5월14일자 答信(답신)에는 스탈린이 金日成에게 강조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電文에 따르면 스탈린은 1950년 4월 金日成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가진 회담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환경이 변하고 있다. 북한이 통일과업을 시작하는 것에 동의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단서조항이 달려 있었다. 老獪한 스탈린은 남침에 대한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한이 함께 내려야 하며 만일 중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미루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스탈린이 중국을 굳이 한국전쟁에 끌어들이려는 목적에는 또다른 속셈이 숨어 있었다. 결코 만만치 않는 상대인 미국과 직접 충돌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과 동시에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유도함으로써 미국과 중국을 모두 견제하려는 음흉한 목적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처럼 스탈린은 겉으로는 金日成의 「남조선 赤化」를 지원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통해 소련의 國益(국익)을 최대한 챙기려고 했던 것이다. 一擧兩得(일거양득)의 노련한 전술을 구사하는 스탈린에게 북한과 중국이 들러리로 이용당한 셈이다.
스탈린의 「南侵 결정」 배경
1949년 초부터 계속된 金日成의 남침승인 요청을 거부하고 오히려 38선에서의 무력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양 주재 슈티코프 대사에게 金日成의 독단적인 행동을 철저히 감독하도록 지시했던 스탈린이 이처럼 갑자기 기존의 방침을 철회한 까닭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다. 지금까지 공개된 舊소련의 비밀문건에도 스탈린의 생각이 바뀐 연유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스탈린이 毛澤東에게 보낸 1950년 5월14일자 電文에서 「변화된 국제환경」이라고 표현한 어구에서 추론할 수 있을 따름이다.
스탈린이 말한 「변화된 국제환경」이라는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국제정세에 대한 스탈린의 인식변화이다. 스탈린은 중국 대륙에서 공산당의 승리와 소련의 원자탄 보유(1949년 8월 첫 原爆 실험)로 인해 美·蘇간에 벌어지는 냉전구도에 자신감을 가지면서 미국의 힘을 종전보다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1950년 1월5일 트루먼 美 대통령이 선포한 對中國 不干涉政策(대중국 불간섭정책)과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뒤에 발표된 애치슨 美 국무장관의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위치한다』는 새로운 방위정책인 이른바 「애치슨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세 번째는 1950년 1월 무렵 구체화되어 가고 있던 중국과 소련의 中·蘇友好同盟條約(중·소 우호동맹조약)의 체결이다.
이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와 함께 스탈린이 1950년 1월22일, 毛澤東과의 회담에서 美·英과 체결한 얄타협정의 취지를 위배하면서까지 중국과 우호동맹조약을 맺은 사실 등을 종합해 보면 스탈린은 이 무렵을 전후해서 金日成의 남침요청을 승인하기로 결정했던 것이 분명하다.
특히 그 당시는 중국 內戰(내전)에서 공산당이 국민당을 물리치고 승리함에 따라 아시아 全域(전역)의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공산진영에게 유리한 시점이었다. 거기에다 미국은 한반도가 自國(자국)의 방위권 밖에 있다고 스스로 털어놓기까지 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한반도를 삼키고 싶어 몸살이 나 있는 소련이라는 강도에게 칼까지 쥐어주며 등을 떠민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따라서 호시탐탐 한반도 全域의 赤化를 엿보던 스탈린으로서는 극동아시아의 요충인 한반도에서 미국의 의지와 능력을 시험해보기에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군수물자까지 事前 지원
金日成의 남침 요청을 미루기만 하던 스탈린이 남침을 승인한 데에는 그의 또다른 속셈이 숨겨져 있었다. 스탈린은 공산권 진영에서 종주국으로서의 지도권을 확보하고 또한 공산 혁명에 성공한 중국이 북한과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고 남한이 혹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의 소련 공격을 위한 교두보로 사용될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남침을 승인하기 이전부터 이미 스탈린은 북한 인민군의 군사력 강화를 위한 군수품을 별도로 지원하고 있었다. 소련은 북한이 3개 보병사단을 추가 창설하여 10개 사단으로 확대하는 데 필요한 군사물자를 지원했으며 남침을 승인하고 난 다음에는 이전까지 슈티코프 대사가 겸직하고 있던 인민군 군사고문단장에 소련의 전쟁영웅인 바실리예프 중장을 새로 임명했다.
BBC 방송국에서는 1994년 러시아에서 한국전쟁에 관련된 중요한 자료를 발굴했다. 북한 인민군의 작전동향과 開戰(개전) 초기인 1950년 6월25일 및 26일에 진행된 對南(대남) 공격 상황을 상세히 밝힌 보고서였다. 슈티코프 대사가 6월26일 당시 소련 육군총참모 차장으로서 북한의 남침작전을 지휘감독하고 있던 자카로프 장군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가 소련 군사고문관들과 수립한 작전계획에 의거, 인민군은 6월12일부터 23일까지 38선 인근 지역으로 집결을 완료하고 공격지점에 배치되었다. 사단급 작전계획과 정찰은 소련 군사고문관의 참여하에 진행되었다. 對南공격을 위한 모든 준비는 6월24일까지 완료되었다. 6월24일 사단장들은 공격 일시에 대한 명령을 받았다. 남한군이 38선을 넘어 군사적 도발을 해왔기 때문에 반격을 명한다는 국방상의 명령이 全軍에 낭독되었고 인민군 장교와 병사들은 이 명령을 열렬히 환영하는 반응을 보였다. 군사작전은 6월25일 새벽 4시 40분에 시작되었다. 북한의 지휘참모부는 전투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최전선에서 소련 군사고문관들이 철수하자 전투지휘는 매우 서툴렀고 특히 전투에서 포와 탱크를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작전명령 하달을 위한 통신체계도 제대로 운용하지 못했다>
이 보고서는 소련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작전계획의 수립에 참여할 정도로 6·25 전쟁에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과 스탈린이 소련의 한국전쟁 개입 사실을 숨기기 위해 開戰 직전 일선에 배치되었던 소련 군사고문관들을 후방으로 철수시켰다는 점을 밝히는 좋은 증거이다. 특히 스탈린은 미국의 監聽(감청)을 의식해 6월22일 이후부터는 암호전문을 모스크바로 보내지 말 것을 평양 주재 소련 대사관에 지시할 정도였다. 또한 이 보고서는 사단급 이상의 부대를 동원한 대규모 전투 지휘 경험이 별로 없는 인민군 고급지휘관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지적하고 있다. 슈티코프 대사는 소련 고문관들이 없는 상태에서 인민군이 가질 수밖에 없는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불안한 예견처럼 開戰 초기 승승장구하던 인민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자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쉽게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전쟁中 구체적 작전지시까지
한편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승인한 이후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스탈린은 인민군의 증강과 무기원조 등 전쟁준비의 감독은 물론 6·25 전쟁의 중요한 고비마다 구체적인 작전지시를 내렸다.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한 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스탈린은 평양 주재 슈티코프 대사에게 보낸 電文을 통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지체하지 말고 곧장 南進(남진)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탄약을 비롯한 군수품은 7월10일까지 원조해준다고 金日成에게 전달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유엔군이 참전하고 美 공군기의 무차별 공습으로 金日成의 사기가 떨어지자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세계 제2차대전 기간 중 겪은 소련 赤軍(적군)의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金日成을 격려했고 필요한 경우에는 소련 공군기를 추가 제공하겠다는 의사까지 밝혔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인민군에게 불리하게 되자 스탈린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측면 지원을 촉구했다. 스탈린은 중국 주재 로신 대사를 통해 周恩來(주은래) 外相에게 보낸 1950년 7월5일자 비밀電文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할 경우 인민군을 돕기 위하여 중국 인민해방군 9개 사단 병력을 韓·滿國境地帶(한·만 국경지대)에 집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이들에 대한 소련 공군기의 공중엄호를 약속했다.
뒤이어 毛澤東에게 보낸 스탈린의 비밀電文에는 「만주에 집결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9개 사단 병력을 엄호하기 위해 제트기 1백24대로 구성된 1개 항공사단을 보내는 것과 함께 중국인 조종사의 훈련과 훈련이 끝나면 중국인 조종사의 자체 비행훈련에 필요한 장비도 지원하겠다」는 미끼도 던졌다.
그래도 중국이 쉽사리 응하지 않자 다급해진 스탈린은 1950년 8월27일자로 周恩來에게 보낸 電文을 통해 「중국이 요청한 38명의 공군 및 對空(대공)방위 소련 군사고문관들을 중국에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약속대로 중국에 파견된 소련의 군사고문관들과 장비들은 중국 공군의 창설에 큰 보탬이 되었다.
9월16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자 스탈린은 이 상륙작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9월18일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인민군 3개 사단을 서울 방어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서울 인근으로 재배치하라는 작전계획을 바실리예프 소련 군사고문단장과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金日成에게 전달했다.
電文을 보내는 것으로도 안심하지 못한 스탈린은 같은 날 자카로프 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특별대표단을 평양으로 파견한다. 부산 점령을 위한 인민군의 공격을 중지하고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인민군 병력을 서울 방어작전에 투입시키라는 긴급명령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날 바실레프스키 국방상에게 평양을 공중엄호하기 위해 수개의 항공 대대, 레이더 부대, 防共砲(방공포) 대대를 소련의 연해주 기지로부터 평양 인근의 공군 기지로 이동시키는 것을 포함한 공군 지원 계획을 긴급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한편 스탈린은 평양에 긴급 파견된 자카로프 장군을 통해, 이후 인민군의 작전을 사실상 지휘통제하기 시작했다. 자카로프 장군을 통해 스탈린의 의사를 전해들은 金日成은 9월25일부터 全(전) 인민군은 방어작전으로 돌입한다는 명령을 하달했고 이를 위한 최고사령관 참모부를 설치했다. 인천상륙작전에 뒤이은 유엔군의 大(대)반격작전으로 인민군이 압록강 국경선까지 후퇴할 지경에 이르자 스탈린이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을 유도하고 정전협상전략까지 직접 하달했다. 이러한 증거는 1992년 이후 공개된 舊소련의 비밀문서들에 명명백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中共軍 참전 끈질기게 설득한 스탈린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평양과 모스크바는 무척 바빠졌다. 서울 함락 직전인 9월27일,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는 만약 서울을 빼앗기면 모든 인민군은 북한지역으로 철수하여 38선 방어작전에 돌입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막기 위해 취해야 할 군사적 조치를 하달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 직후인 9월30일 소집된 소련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는 金日成이 긴급 요청한 인민군 6개 사단의 창설에 필요한 군수품을 10월 5일부터 제공할 것을 지체하지 않고 결정했다.
한편 평양에서도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金日成은 9월28일 노동당 중앙위 정치위원회를 개최하여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北進(북진)해 올 경우 소련군이 직접 지원해주기를 희망했고 그것이 힘들면 중국과 기타 공산권 국가들로 이루어진 국제의용군을 조직하여 지원해 줄 것을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金日成과 朴憲永의 공동명의로 된 호소문을 접한 스탈린은 10월1일 최소한 5~6개 사단 규모의 중국의용군의 참전을 요청하는 서한을 毛澤東에게 보냈지만 毛澤東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10월2일 스탈린에게 보낸 電文에서 毛澤東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준비 부족과 중국이 참전할 경우 자칫 美·中간의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과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시 중국 내의 반동세력에 대한 미국의 지원 가능성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우면서 난색을 표시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10월5일 소련이 뒤에 있는 한 중국의 참전은 한반도가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대륙침략의 교두보가 될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하고 오히려 미국이 대만을 포기하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논리로 중국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중국은 참전을 결정했고 스탈린은 10월8일, 중국 인민해방군 9개 사단이 한국전에 참전한다는 사실을 金日成에게 통보했다.
중국도 같은 날 평양 주재 중국 대사를 통해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을 정식으로 통보했다. 그러나 정작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10월9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周恩來와 林彪(임표)가 몇 가지 이유를 내세워 참전 의사를 번복하려고 하자 스탈린은 10월13일 최악의 경우에는 북한을 포기한다는 카드를 내보이면서 중국의 참전을 유도했다.
중국은 만주지역으로 철수하는 북한 인민군들을 받아들이고 소련은 연해주 지역에 북한 再진입을 하기 위한 피난처를 북한정권에 일시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이 같은 북한군 철수계획을 같은 날 金日成에게도 통보했다. 金日成이 분명히 중국측에 확인해볼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한 스탈린의 교묘한 술책이었다. 스탈린은 소련군이 직접 美軍과 충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중국에게도 위협이 되는 북한 포기라는 마지막 카드를 내세운 것이다. 공산혁명에 성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가재건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중국으로서는 북한이라는 완충지대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달가운 바가 아니었다. 비록 중국대륙에서 공산혁명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毛澤東은 아직 스탈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美·蘇 직접 대결 피해
하지만 공산진영에서 최고지도자임을 자부하던 스탈린은 소련과 미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은 극도로 회피했다. 스탈린은 평양 주재 슈티코프 대사가 전쟁 초기 서울 점령 직후 바실리예프 군사고문단장 등 소련 고문관들을 북한의 전선참모부가 있는 서울로 이동시키는 것이 전체적인 작전운용에 도움이 된다면서 이를 허락해달라는 건의를 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였다.
스탈린은 북한을 대리로 내세워 미국을 한 번 두들겨보려는 국지전으로 제한하려고 했던 것이다. 자칫 전쟁이 비화되어 소련과 미국의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은 극력 피하려고 했다. 스탈린은, 2차대전의 피해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소련으로서는 미국과의 一戰(일전)에서는 아직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최근 공개한 舊소련의 문서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줄곧 미국과의 직접적인 군사대결을 회피하려는 정책을 폈던 스탈린이 북한지역으로 들어가는 중국 인민해방군 병력을 美 공군기의 폭격으로부터 엄호해주기 위해 소련 공군기를 출격시켰던 것이다.
이에 따라 1950년 11월1일, 압록강 다리 위에서 미국과 소련 공군기들의 교전이 처음으로 벌어졌다. 이후 소련인 조종사들은 만주에 위치한 중국 공군기지로부터 출격하여 압록강으로 접근하는 미군기와 교전을 벌였다.
미국 CNN 방송은 1998년 10월25일 냉전 특별기획 제5편 「모스크바 커넥션」에서 소련 공군기 조종사를 비롯하여 총 2만명의 병력이 최전선이 아닌 후방에 투입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소련측은, 소련군이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한 사실은 감추려고 노력했다.
당시 소련 공군 조종사들은 중국 인민해방군 복장에 毛澤東 배지를 달고 출격했다. 소련국적을 증명하는 일체의 신분증을 휴대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비행기가 격추되어 생포될 가능성을 대비하여 소련 전투기의 작전구역마저 압록강 일대로 제한할 정도였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유엔군의 大반격이 시작되고 보급로가 차단된 인민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스탈린은 1950년 9월30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여 처음으로 휴전 문제를 논의한다. 다음 날인 10월1일에는 외무성으로 하여금 한반도에서의 즉각 停戰(정전), 외국군 철수 및 국제 감시하의 總選(총선) 등을 요지로 한 소련측의 결의案(안)을 만들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이를 毛澤東과 협의한 후 유엔주재 소련 대표부에 타전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의도와는 달리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勝氣(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소련의 제안을 否決(부결)시켰다. 대신 유엔총회는 북한의 패배 후 유엔 주관으로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선거 실시 등을 요지로 한 결의案을 찬성 47, 반대 5, 기권 7표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통과시켰다. 서로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의 휴전이란 戰勢(전세)가 비슷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느 한쪽이 결정적으로 승리하고 있을 때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 냉엄한 세상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결국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인민해방군에 마지막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했던 유엔군이 10월19일 압록강을 건넌 중국 인민해방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게 되자 미국은 예전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공산진영의 휴전 제의에 관심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비록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로 참전한 유엔군이지만 자신들의 전쟁이 아닌 남의 전쟁에서 가급적이면 피해를 줄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1950년 12월 유엔 주재 인도, 영국, 스웨덴 대표와 리(Trygve Lie)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주재 중국 대표에게 중국이 수락할 수 있는 휴전 조건을 제시할 것을 요청했다.
毛澤東은 조속한 休戰 원해
당시 중국 外相이던 周恩來는 유엔으로부터 이러한 停戰 제의를 받자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의 철수, 대만 및 대만해협으로부터 미군 철수, 한국문제의 한국인 당사자 해결, 유엔에서 대만 대표를 축출하는 대신 중국정부의 대표가 참여할 것과 일본과의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4강국 外相회의 개최라는 중국이 마련한 휴전 조건案을 스탈린에게 제시하면서 그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미군이 주축을 이루는 유엔군이 퇴각을 거듭하고 공산진영이 반격작전에 성공하여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중국이 제시한 조건들은 적절하지 않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서울을 아직 점령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이 가지고 있는 모든 카드를 내보이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따라서 戰勢가 불리한 미국과 유엔이 停戰 조건을 먼저 제시하도록 하는 것이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점령하는 것이라는 훈수를 두었다. 이러한 스탈린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 중국은 서울을 일시 점령한 1951년 1월, 유엔측이 다시 휴전 제안을 해오자 스탈린의 권고대로 일단 유엔의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1951년 봄에 이르면서 유엔군의 대반격 작전으로 중국 인민해방군과 북한 인민군의 대공세가 실패로 돌아가고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스탈린은 미뤄두었던 휴전 문제를 다시 한번 심각하게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전선이 38선 일대에 교착된 채 서로 밀고 밀리는 소모전의 양상으로 바뀌자 유엔군은 대대적인 물량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공산진영에 비해 월등한 화력을 앞세운 유엔군의 물량공세에 중국 인민해방군과 북한 인민군의 인명 손실은 남쪽에 비해 크게 앞서고 있었다. 남북 어느 쪽의 승리도 쉽게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자 결국 스탈린은 유엔 주재 소련 대표부로 하여금 직접 휴전 협상에 나서도록 지시한다.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말리크 駐유엔 소련 대사는 1951년 6월5일 소련은 한반도에서의 평화를 원하며 따라서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한국전쟁의 평화적인 해결을 원한다는 스탈린의 뜻을 駐蘇 미국대사를 역임했던 케난을 통해 미국 정부에 통보하였다. 이 무렵 金日成과 중국의 高崗(고강)은 휴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毛澤東은 高崗을 통해 1951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중국 인민해방군과 북한 인민군이 수세에 몰려 있으므로 유엔군과 휴전협상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스탈린에게 제시했다. 스탈린으로서도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毛澤東의 의견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1951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휴전 회담의 초기 중국의 毛澤東은 중국이 만족할 만한 휴전조건들을 확보할 경우 휴전협정을 早期에 체결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毛澤東으로서도 비록 抗美援朝(항미원조)라는 大義(대의) 아래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기는 했으나 끝을 모르는 전쟁에 계속 자기네 병사들이 희생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毛澤東은 자신의 아들마저 한국전에서 잃는 슬픔을 맛보기도 했던 것이다.
스탈린의 사망으로 휴전 급진전
그러나 스탈린은 휴전의 필요성은 중국보다 미국이 더 많이 가지고 있다면서 중국과 북한이 휴전협약의 早期체결을 위해 서두르지 말 것을 제시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의견에 따라 조속한 시일 안에 체결될 것 같았던 휴전 회담은 공산진영이 강경한 자세로 나옴에 따라 답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처럼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휴전회담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만난다. 그동안 휴전회담의 걸림돌이었던 스탈린이 1953년 3월5일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이다.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휴전회담은 급진전을 보이게 된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모두 전쟁에 지쳐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스탈린이 죽은 지 겨우 2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던 3월19일에 열린 소련 각료회의는 한국전쟁을 조속한 시일 내에 끝내기로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물론 한국전쟁이 성급하게 휴전에 이르게 된 배경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래에서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덜레스는 미국 정부가 1953년 5월경 중국에 核(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위협함으로써 한국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對중국 핵무기 사용 경고가 스탈린의 사망 후 소련이 내부적으로 한국전쟁을 끝내기로 한 상태에서 휴전회담에 나선 중국과 북한측에 이 방침을 통보한 두 달 뒤에 있었다는 점에서 덜레스 국무장관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結者解之(결자해지)라는 말처럼 스탈린은 자신이 시작한 전쟁을 자신의 죽음으로 끝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舊소련의 한국전쟁 관련문서들을 통해 그동안 6·25 전쟁이 남한의 北侵(북침)에 대한 반격에서 비롯되었다는 억지 주장을 되풀이해 온 북한의 선전이 거짓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이른바 「南朝鮮(남조선) 해방」을 위한 金日成의 거듭된 南侵 요청을 마지못해 승인해주는 척했던 스탈린이 감추고 있었던 속셈이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났다. 스탈린은 표면적으로 내세웠던 주장과는 달리 오로지 自國(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를 제물로 바쳤던 것이다.
安保는 지금이 더 중요
비록 스탈린과 金日成은 갔지만 북한측은 여전히 우리 정부의 정통성과 實在(실재)를 부인, 대화를 거부하면서 대량 살상 무기 개발과 군사력 증강에 의한 강성대국 건설을 추진하고 있고, 동서 냉전체제는 해체되었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실상은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다. 우리가 이러한 국내외 정세하에서 다시는 한반도에서 6·25와 같은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의 안보의식을 다시 한번 다지고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보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서 시작되고 타인에 의해서 끝났던 슬픈 전쟁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자신의 운명은 자신의 손으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가. 국가도 그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은 환희보다는 悲哀(비애)가 앞선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 전체를 절망과 고통의 굴레 속으로 빠져들게 했던 6·25가 우리 민족 스스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타인의 손에 의해서 操縱(조종)된 代理戰爭(대리전쟁)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센터(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는 1991년부터 맥아더 재단의 재정 지원을 받아 「冷戰國際歷史(냉전 국제역사) 프로젝트=The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이하 CWIHP로 약칭)를 추진하고 있다. 대규모로 진행중인 이 프로젝트는 공산권의 붕괴로 접근이 가능하게 된 舊공산권 국가들의 자료들을 연구 검토하여 냉전에 관련된 새로운 정보와 학술적 평가들을 全(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다. 1992년부터 러시아가 공개하기 시작한 舊소련의 한국전쟁 관련문건들도 우드로 월슨 센터의 주요 연구 대상이다. 이 기관에서는 입수한 문건들과 이를 분석한 학자들의 연구논문들을 「冷戰國際歷史 프로젝트 보고서(CWIHP Bulletin)」에 게재하여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金日成, 스탈린에게 48번 南侵 승인 간청
러시아 정부가 공개한 한국전쟁의 비밀문건을 검토한 플로리다 주립대의 케스린 웨더즈비 교수는 「윌슨 쿼터리」 1999년 여름호에 발표한 「다시 본 한국전쟁」이라는 글에서 한국전쟁은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계획되고 준비된 재래식 군사공격이 확실하다고 밝혔다(이전까지 그는 한국전쟁은 金日成의 개전의지에 의해 일어났다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이번 기고문에서 종래의 자기주장을 번복했다). 그리고 웨더즈비 교수는 북한의 金日成이 스탈린에게 1949년 초부터 1950년 초까지 「남조선 赤化(적화)」를 위한 南侵(남침)을 승인해줄 것을 무려 48차례에 걸쳐서 요청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밝혔다.
그의 논문에 의하면 金日成이 스탈린에게 남한을 점령하기 위해 全面戰(전면전)의 의사를 최초로 밝힌 것은 1949년 3월5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金日成은 「남조선 해방」을 위한 전쟁에 대해 소련측의 의사를 타진했다.
스탈린은 한국군과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美軍(미군)의 군사력 그리고 남북한 군사력의 優劣(우열)에 대해서 金日成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다음 인민군이 국군에 비해서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남한에 아직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점(소련군은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과 38선 분할에 관한 美·蘇간의 합의를 상기시키면서 확답을 미루었다.
스탈린으로서도 남한의 뒤에 미국이 도사리고 있는 한 자칫 잘못하면 한반도에서의 局地戰(국지전)이 아닌 미국과의 一戰(일전)을 감수해야만 하는 전쟁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날 金日成과 스탈린의 만남은 스탈린이 남한이 먼저 북한을 침공하는 경우에만 전면전으로 남한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을 金에게 강조하면서 南侵을 승인하지 않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金日成으로서도 자신의 代父(대부)나 마찬가지인 스탈린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자신은 없었다.
당시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하면 북한이 월등했으나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면 개입할 가능성이 높은 미국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던 북한으로서는 소련이라는 안전판의 확보가 무엇보다 급선무였던 것이다.
한편 소련으로서도 북한을 앞세운 代理戰爭을 통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굳이 거부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다만 스탈린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아직 북한이 한국전쟁에서 확실하게 승리를 장담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판단했을 따름이었다.
비록 스탈린이 명확한 태도 표명은 주저했지만 이때부터 평양과 모스크바 사이에는 물밑에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사전 整地(정지) 작업이 빈번하게 진행되었다. 스탈린으로서는 어차피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 있는 남한을 赤化시키기 위해서는 전쟁은 필요했고 다만 시기만이 문제였다.
『제한戰이라도…』 간청한 金日成
하지만 남한을 적화시킨다는 궁극적인 목표는 같았지만 평양의 金日成은 스탈린처럼 느긋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거치면서 전략과 전술의 운용에 老獪(노회)한 스탈린에 비해서 아직은 어리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30대 김일성이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金日成은 평양 주재 소련 대사인 슈티코프와의 면담(1949년 8월12일)을 통해 다시 한번 소련을 설득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있고 난 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인 9월3일에는 북한과 소련의 실무자급 접촉이 다시 이루어졌다. 金日成의 러시아어 통역관 문일은 金을 대신해 평양 주재 소련 대사관의 툰킨 공사에게 1949년 7월,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한 이후 38선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했다고 강조하면서 「남조선 해방」을 위한 전면적인 남침 공격의 승인을 요청했다. 金日成은 그것도 힘들면 최소한 옹진반도라도 점령하는 制限戰爭(제한전쟁)이라도 승인해달라고 모스크바에 호소했다.
한편 金日成의 거듭된 간청에도 불구하고 확답을 해주지 않던 스탈린은 주한 미군이 철수하고 나자 종전의 태도를 바꾸었다. 駐韓(주한) 미군의 철수가 好機(호기)라고 판단한 스탈린은 9월11일, 남북한의 정치 군사에 대한 정보와 북한의 남침 제의에 대한 평양 주재 대사관의 의견을 보고하도록 긴급 지시했다.
이에 대해 평양 주재 툰킨 공사는 金日成을 직접 면담한 후 작성한 보고서를 1949년 9월14일 모스크바에 打電(타전)한다. 그런데 툰킨 공사의 보고서에는 남침을 거듭 요청하던 金日成이 종전과 다른 見解(견해)를 보였다는 점이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金日成은 툰킨 공사를 만난 자리에서 전면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신하던 종전의 주장과는 달리 현 상태에서 速戰速決(속전속결)에 의한 승리는 어려우므로 대규모 전면전쟁을 早期(조기)에 개시하는 것보다는 옹진반도만이라도 제한 점령할 것을 제의했다.
한편 툰킨 공사는 이 보고서에서 남침할 경우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빨치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인민군이 조속한 시일 내에 승리할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 정부가 중국 공산당에게 무너진 점을 고려하면 미국의 강력한 군사개입이 예상되므로 한반도에서의 전면전쟁은 자칫 잘못하면 장기화될 가능성이 많아 현 상태에서의 남침은 적절치 않다는 현지 대사관의 의견을 첨부했다.
아울러 金日成이 제의한 옹진반도 점령과 같은 制限戰爭 또한 오히려 미국의 反蘇(반소) 운동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어 소련에 결코 이익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처럼 인민군의 남침에 대한 부정적인 현지 대사관의 보고에 접한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9월24일 평양 주재 대사에게 하달한 훈령을 통해 남한 내 빨치산 활동 강화계획은 승인하되, 전면적인 남침이나 옹진반도 점령 작전은 자칫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이 장기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어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점을 金日成에게 강조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평양의 金日成은 모스크바의 지시와는 달리 자신의 고집을 좀처럼 버리지 않았다. 金日成은 1950년 1월17일 북경으로 부임하는 駐中(주중) 이두연 대사를 환송하기 위한 연회에 참석한 소련대사관원들에게 이제는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졌으므로 다음은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했다. 이어 金은 『지난 한 해 동안 남조선이 북조선을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격 작전을 계기로 남침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對南(대남) 선제 공격만이 능사다. 따라서 이를 승인받기 위해 스탈린을 만나고 싶다』고 역설했다.
이 자리에서 金日成은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규율을 지키는 사람이고 스탈린의 말이 곧 법이기에 「그의 승인 없이는」 공격을 할 수 없다』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슈티코프 소련 대사에게 스탈린이 3일 만에 끝낼 수 있는 옹진점령 작전마저 승인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 전면적인 남침을 하면 며칠 안으로 서울을 점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모스크바의 지시를 무조건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슈티코프 대사의 답변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노회한 스탈린은 毛澤東 끌어들여
비신스키 外相(외상)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1950년 1월30일 슈티코프 대사에게 하달한 電文(전문)에서 『金日成의 불만은 이해하지만 큰일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며 위험이 없도록 잘 조직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를 만나 의논할 용의와 도와줄 의사가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金日成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남침에 대한 승인 유보에서 긍정적으로 바뀐 스탈린의 의사가 전달되자 金日成은 주저하지 않고 그해 봄, 북한정권의 2인자인 朴憲永(박헌영)을 대동하고 소련을 방문한다. 金日成으로서는 스탈린의 생각이 바뀌기 전에 얼른 담판을 짓고 싶었던 것이다. 최근 러시아가 공개한 舊소련의 비밀문서에는 金日成과 朴憲永이 1950년 3월30일 평양을 떠나 모스크바로 간 지 한달 만인 4월25일에야 귀국한 것으로 나와있다. 그렇지만 모스크바에서의 체류일정과 스탈린과의 면담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때 金日成과 스탈린 사이에서 어떤 내용의 얘기가 오고갔는지 추론해볼 수 있는 증거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련에서 돌아온 金日成은 그해 5월13일부터 5월16일까지 연이어 중국을 방문한다. 그리고 毛澤東(모택동)에게 남한 공격에 대한 스탈린의 意志(의지)를 전달했다. 毛澤東은 스탈린의 정확한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스탈린에게 확인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이 毛澤東에게 보낸 1950년 5월14일자 答信(답신)에는 스탈린이 金日成에게 강조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電文에 따르면 스탈린은 1950년 4월 金日成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가진 회담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환경이 변하고 있다. 북한이 통일과업을 시작하는 것에 동의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단서조항이 달려 있었다. 老獪한 스탈린은 남침에 대한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한이 함께 내려야 하며 만일 중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미루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스탈린이 중국을 굳이 한국전쟁에 끌어들이려는 목적에는 또다른 속셈이 숨어 있었다. 결코 만만치 않는 상대인 미국과 직접 충돌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과 동시에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유도함으로써 미국과 중국을 모두 견제하려는 음흉한 목적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처럼 스탈린은 겉으로는 金日成의 「남조선 赤化」를 지원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통해 소련의 國益(국익)을 최대한 챙기려고 했던 것이다. 一擧兩得(일거양득)의 노련한 전술을 구사하는 스탈린에게 북한과 중국이 들러리로 이용당한 셈이다.
스탈린의 「南侵 결정」 배경
1949년 초부터 계속된 金日成의 남침승인 요청을 거부하고 오히려 38선에서의 무력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양 주재 슈티코프 대사에게 金日成의 독단적인 행동을 철저히 감독하도록 지시했던 스탈린이 이처럼 갑자기 기존의 방침을 철회한 까닭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다. 지금까지 공개된 舊소련의 비밀문건에도 스탈린의 생각이 바뀐 연유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스탈린이 毛澤東에게 보낸 1950년 5월14일자 電文에서 「변화된 국제환경」이라고 표현한 어구에서 추론할 수 있을 따름이다.
스탈린이 말한 「변화된 국제환경」이라는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국제정세에 대한 스탈린의 인식변화이다. 스탈린은 중국 대륙에서 공산당의 승리와 소련의 원자탄 보유(1949년 8월 첫 原爆 실험)로 인해 美·蘇간에 벌어지는 냉전구도에 자신감을 가지면서 미국의 힘을 종전보다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1950년 1월5일 트루먼 美 대통령이 선포한 對中國 不干涉政策(대중국 불간섭정책)과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뒤에 발표된 애치슨 美 국무장관의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위치한다』는 새로운 방위정책인 이른바 「애치슨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세 번째는 1950년 1월 무렵 구체화되어 가고 있던 중국과 소련의 中·蘇友好同盟條約(중·소 우호동맹조약)의 체결이다.
이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와 함께 스탈린이 1950년 1월22일, 毛澤東과의 회담에서 美·英과 체결한 얄타협정의 취지를 위배하면서까지 중국과 우호동맹조약을 맺은 사실 등을 종합해 보면 스탈린은 이 무렵을 전후해서 金日成의 남침요청을 승인하기로 결정했던 것이 분명하다.
특히 그 당시는 중국 內戰(내전)에서 공산당이 국민당을 물리치고 승리함에 따라 아시아 全域(전역)의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공산진영에게 유리한 시점이었다. 거기에다 미국은 한반도가 自國(자국)의 방위권 밖에 있다고 스스로 털어놓기까지 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한반도를 삼키고 싶어 몸살이 나 있는 소련이라는 강도에게 칼까지 쥐어주며 등을 떠민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따라서 호시탐탐 한반도 全域의 赤化를 엿보던 스탈린으로서는 극동아시아의 요충인 한반도에서 미국의 의지와 능력을 시험해보기에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군수물자까지 事前 지원
金日成의 남침 요청을 미루기만 하던 스탈린이 남침을 승인한 데에는 그의 또다른 속셈이 숨겨져 있었다. 스탈린은 공산권 진영에서 종주국으로서의 지도권을 확보하고 또한 공산 혁명에 성공한 중국이 북한과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고 남한이 혹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의 소련 공격을 위한 교두보로 사용될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남침을 승인하기 이전부터 이미 스탈린은 북한 인민군의 군사력 강화를 위한 군수품을 별도로 지원하고 있었다. 소련은 북한이 3개 보병사단을 추가 창설하여 10개 사단으로 확대하는 데 필요한 군사물자를 지원했으며 남침을 승인하고 난 다음에는 이전까지 슈티코프 대사가 겸직하고 있던 인민군 군사고문단장에 소련의 전쟁영웅인 바실리예프 중장을 새로 임명했다.
BBC 방송국에서는 1994년 러시아에서 한국전쟁에 관련된 중요한 자료를 발굴했다. 북한 인민군의 작전동향과 開戰(개전) 초기인 1950년 6월25일 및 26일에 진행된 對南(대남) 공격 상황을 상세히 밝힌 보고서였다. 슈티코프 대사가 6월26일 당시 소련 육군총참모 차장으로서 북한의 남침작전을 지휘감독하고 있던 자카로프 장군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가 소련 군사고문관들과 수립한 작전계획에 의거, 인민군은 6월12일부터 23일까지 38선 인근 지역으로 집결을 완료하고 공격지점에 배치되었다. 사단급 작전계획과 정찰은 소련 군사고문관의 참여하에 진행되었다. 對南공격을 위한 모든 준비는 6월24일까지 완료되었다. 6월24일 사단장들은 공격 일시에 대한 명령을 받았다. 남한군이 38선을 넘어 군사적 도발을 해왔기 때문에 반격을 명한다는 국방상의 명령이 全軍에 낭독되었고 인민군 장교와 병사들은 이 명령을 열렬히 환영하는 반응을 보였다. 군사작전은 6월25일 새벽 4시 40분에 시작되었다. 북한의 지휘참모부는 전투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최전선에서 소련 군사고문관들이 철수하자 전투지휘는 매우 서툴렀고 특히 전투에서 포와 탱크를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작전명령 하달을 위한 통신체계도 제대로 운용하지 못했다>
이 보고서는 소련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작전계획의 수립에 참여할 정도로 6·25 전쟁에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과 스탈린이 소련의 한국전쟁 개입 사실을 숨기기 위해 開戰 직전 일선에 배치되었던 소련 군사고문관들을 후방으로 철수시켰다는 점을 밝히는 좋은 증거이다. 특히 스탈린은 미국의 監聽(감청)을 의식해 6월22일 이후부터는 암호전문을 모스크바로 보내지 말 것을 평양 주재 소련 대사관에 지시할 정도였다. 또한 이 보고서는 사단급 이상의 부대를 동원한 대규모 전투 지휘 경험이 별로 없는 인민군 고급지휘관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지적하고 있다. 슈티코프 대사는 소련 고문관들이 없는 상태에서 인민군이 가질 수밖에 없는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불안한 예견처럼 開戰 초기 승승장구하던 인민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자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쉽게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전쟁中 구체적 작전지시까지
한편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승인한 이후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스탈린은 인민군의 증강과 무기원조 등 전쟁준비의 감독은 물론 6·25 전쟁의 중요한 고비마다 구체적인 작전지시를 내렸다.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한 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스탈린은 평양 주재 슈티코프 대사에게 보낸 電文을 통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지체하지 말고 곧장 南進(남진)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탄약을 비롯한 군수품은 7월10일까지 원조해준다고 金日成에게 전달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유엔군이 참전하고 美 공군기의 무차별 공습으로 金日成의 사기가 떨어지자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세계 제2차대전 기간 중 겪은 소련 赤軍(적군)의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金日成을 격려했고 필요한 경우에는 소련 공군기를 추가 제공하겠다는 의사까지 밝혔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인민군에게 불리하게 되자 스탈린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측면 지원을 촉구했다. 스탈린은 중국 주재 로신 대사를 통해 周恩來(주은래) 外相에게 보낸 1950년 7월5일자 비밀電文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할 경우 인민군을 돕기 위하여 중국 인민해방군 9개 사단 병력을 韓·滿國境地帶(한·만 국경지대)에 집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이들에 대한 소련 공군기의 공중엄호를 약속했다.
뒤이어 毛澤東에게 보낸 스탈린의 비밀電文에는 「만주에 집결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9개 사단 병력을 엄호하기 위해 제트기 1백24대로 구성된 1개 항공사단을 보내는 것과 함께 중국인 조종사의 훈련과 훈련이 끝나면 중국인 조종사의 자체 비행훈련에 필요한 장비도 지원하겠다」는 미끼도 던졌다.
그래도 중국이 쉽사리 응하지 않자 다급해진 스탈린은 1950년 8월27일자로 周恩來에게 보낸 電文을 통해 「중국이 요청한 38명의 공군 및 對空(대공)방위 소련 군사고문관들을 중국에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약속대로 중국에 파견된 소련의 군사고문관들과 장비들은 중국 공군의 창설에 큰 보탬이 되었다.
9월16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자 스탈린은 이 상륙작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9월18일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인민군 3개 사단을 서울 방어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서울 인근으로 재배치하라는 작전계획을 바실리예프 소련 군사고문단장과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金日成에게 전달했다.
電文을 보내는 것으로도 안심하지 못한 스탈린은 같은 날 자카로프 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특별대표단을 평양으로 파견한다. 부산 점령을 위한 인민군의 공격을 중지하고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인민군 병력을 서울 방어작전에 투입시키라는 긴급명령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날 바실레프스키 국방상에게 평양을 공중엄호하기 위해 수개의 항공 대대, 레이더 부대, 防共砲(방공포) 대대를 소련의 연해주 기지로부터 평양 인근의 공군 기지로 이동시키는 것을 포함한 공군 지원 계획을 긴급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한편 스탈린은 평양에 긴급 파견된 자카로프 장군을 통해, 이후 인민군의 작전을 사실상 지휘통제하기 시작했다. 자카로프 장군을 통해 스탈린의 의사를 전해들은 金日成은 9월25일부터 全(전) 인민군은 방어작전으로 돌입한다는 명령을 하달했고 이를 위한 최고사령관 참모부를 설치했다. 인천상륙작전에 뒤이은 유엔군의 大(대)반격작전으로 인민군이 압록강 국경선까지 후퇴할 지경에 이르자 스탈린이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을 유도하고 정전협상전략까지 직접 하달했다. 이러한 증거는 1992년 이후 공개된 舊소련의 비밀문서들에 명명백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中共軍 참전 끈질기게 설득한 스탈린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평양과 모스크바는 무척 바빠졌다. 서울 함락 직전인 9월27일,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는 만약 서울을 빼앗기면 모든 인민군은 북한지역으로 철수하여 38선 방어작전에 돌입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막기 위해 취해야 할 군사적 조치를 하달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 직후인 9월30일 소집된 소련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는 金日成이 긴급 요청한 인민군 6개 사단의 창설에 필요한 군수품을 10월 5일부터 제공할 것을 지체하지 않고 결정했다.
한편 평양에서도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金日成은 9월28일 노동당 중앙위 정치위원회를 개최하여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北進(북진)해 올 경우 소련군이 직접 지원해주기를 희망했고 그것이 힘들면 중국과 기타 공산권 국가들로 이루어진 국제의용군을 조직하여 지원해 줄 것을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金日成과 朴憲永의 공동명의로 된 호소문을 접한 스탈린은 10월1일 최소한 5~6개 사단 규모의 중국의용군의 참전을 요청하는 서한을 毛澤東에게 보냈지만 毛澤東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10월2일 스탈린에게 보낸 電文에서 毛澤東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준비 부족과 중국이 참전할 경우 자칫 美·中간의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과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시 중국 내의 반동세력에 대한 미국의 지원 가능성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우면서 난색을 표시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10월5일 소련이 뒤에 있는 한 중국의 참전은 한반도가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대륙침략의 교두보가 될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하고 오히려 미국이 대만을 포기하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논리로 중국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중국은 참전을 결정했고 스탈린은 10월8일, 중국 인민해방군 9개 사단이 한국전에 참전한다는 사실을 金日成에게 통보했다.
중국도 같은 날 평양 주재 중국 대사를 통해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을 정식으로 통보했다. 그러나 정작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10월9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周恩來와 林彪(임표)가 몇 가지 이유를 내세워 참전 의사를 번복하려고 하자 스탈린은 10월13일 최악의 경우에는 북한을 포기한다는 카드를 내보이면서 중국의 참전을 유도했다.
중국은 만주지역으로 철수하는 북한 인민군들을 받아들이고 소련은 연해주 지역에 북한 再진입을 하기 위한 피난처를 북한정권에 일시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이 같은 북한군 철수계획을 같은 날 金日成에게도 통보했다. 金日成이 분명히 중국측에 확인해볼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한 스탈린의 교묘한 술책이었다. 스탈린은 소련군이 직접 美軍과 충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중국에게도 위협이 되는 북한 포기라는 마지막 카드를 내세운 것이다. 공산혁명에 성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가재건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중국으로서는 북한이라는 완충지대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달가운 바가 아니었다. 비록 중국대륙에서 공산혁명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毛澤東은 아직 스탈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美·蘇 직접 대결 피해
하지만 공산진영에서 최고지도자임을 자부하던 스탈린은 소련과 미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은 극도로 회피했다. 스탈린은 평양 주재 슈티코프 대사가 전쟁 초기 서울 점령 직후 바실리예프 군사고문단장 등 소련 고문관들을 북한의 전선참모부가 있는 서울로 이동시키는 것이 전체적인 작전운용에 도움이 된다면서 이를 허락해달라는 건의를 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였다.
스탈린은 북한을 대리로 내세워 미국을 한 번 두들겨보려는 국지전으로 제한하려고 했던 것이다. 자칫 전쟁이 비화되어 소련과 미국의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은 극력 피하려고 했다. 스탈린은, 2차대전의 피해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소련으로서는 미국과의 一戰(일전)에서는 아직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최근 공개한 舊소련의 문서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줄곧 미국과의 직접적인 군사대결을 회피하려는 정책을 폈던 스탈린이 북한지역으로 들어가는 중국 인민해방군 병력을 美 공군기의 폭격으로부터 엄호해주기 위해 소련 공군기를 출격시켰던 것이다.
이에 따라 1950년 11월1일, 압록강 다리 위에서 미국과 소련 공군기들의 교전이 처음으로 벌어졌다. 이후 소련인 조종사들은 만주에 위치한 중국 공군기지로부터 출격하여 압록강으로 접근하는 미군기와 교전을 벌였다.
미국 CNN 방송은 1998년 10월25일 냉전 특별기획 제5편 「모스크바 커넥션」에서 소련 공군기 조종사를 비롯하여 총 2만명의 병력이 최전선이 아닌 후방에 투입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소련측은, 소련군이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한 사실은 감추려고 노력했다.
당시 소련 공군 조종사들은 중국 인민해방군 복장에 毛澤東 배지를 달고 출격했다. 소련국적을 증명하는 일체의 신분증을 휴대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비행기가 격추되어 생포될 가능성을 대비하여 소련 전투기의 작전구역마저 압록강 일대로 제한할 정도였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유엔군의 大반격이 시작되고 보급로가 차단된 인민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스탈린은 1950년 9월30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여 처음으로 휴전 문제를 논의한다. 다음 날인 10월1일에는 외무성으로 하여금 한반도에서의 즉각 停戰(정전), 외국군 철수 및 국제 감시하의 總選(총선) 등을 요지로 한 소련측의 결의案(안)을 만들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이를 毛澤東과 협의한 후 유엔주재 소련 대표부에 타전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의도와는 달리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勝氣(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소련의 제안을 否決(부결)시켰다. 대신 유엔총회는 북한의 패배 후 유엔 주관으로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선거 실시 등을 요지로 한 결의案을 찬성 47, 반대 5, 기권 7표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통과시켰다. 서로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의 휴전이란 戰勢(전세)가 비슷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느 한쪽이 결정적으로 승리하고 있을 때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 냉엄한 세상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결국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인민해방군에 마지막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했던 유엔군이 10월19일 압록강을 건넌 중국 인민해방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게 되자 미국은 예전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공산진영의 휴전 제의에 관심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비록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로 참전한 유엔군이지만 자신들의 전쟁이 아닌 남의 전쟁에서 가급적이면 피해를 줄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1950년 12월 유엔 주재 인도, 영국, 스웨덴 대표와 리(Trygve Lie)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주재 중국 대표에게 중국이 수락할 수 있는 휴전 조건을 제시할 것을 요청했다.
毛澤東은 조속한 休戰 원해
당시 중국 外相이던 周恩來는 유엔으로부터 이러한 停戰 제의를 받자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의 철수, 대만 및 대만해협으로부터 미군 철수, 한국문제의 한국인 당사자 해결, 유엔에서 대만 대표를 축출하는 대신 중국정부의 대표가 참여할 것과 일본과의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4강국 外相회의 개최라는 중국이 마련한 휴전 조건案을 스탈린에게 제시하면서 그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미군이 주축을 이루는 유엔군이 퇴각을 거듭하고 공산진영이 반격작전에 성공하여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중국이 제시한 조건들은 적절하지 않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서울을 아직 점령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이 가지고 있는 모든 카드를 내보이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따라서 戰勢가 불리한 미국과 유엔이 停戰 조건을 먼저 제시하도록 하는 것이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점령하는 것이라는 훈수를 두었다. 이러한 스탈린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 중국은 서울을 일시 점령한 1951년 1월, 유엔측이 다시 휴전 제안을 해오자 스탈린의 권고대로 일단 유엔의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1951년 봄에 이르면서 유엔군의 대반격 작전으로 중국 인민해방군과 북한 인민군의 대공세가 실패로 돌아가고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스탈린은 미뤄두었던 휴전 문제를 다시 한번 심각하게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전선이 38선 일대에 교착된 채 서로 밀고 밀리는 소모전의 양상으로 바뀌자 유엔군은 대대적인 물량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공산진영에 비해 월등한 화력을 앞세운 유엔군의 물량공세에 중국 인민해방군과 북한 인민군의 인명 손실은 남쪽에 비해 크게 앞서고 있었다. 남북 어느 쪽의 승리도 쉽게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자 결국 스탈린은 유엔 주재 소련 대표부로 하여금 직접 휴전 협상에 나서도록 지시한다.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말리크 駐유엔 소련 대사는 1951년 6월5일 소련은 한반도에서의 평화를 원하며 따라서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한국전쟁의 평화적인 해결을 원한다는 스탈린의 뜻을 駐蘇 미국대사를 역임했던 케난을 통해 미국 정부에 통보하였다. 이 무렵 金日成과 중국의 高崗(고강)은 휴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毛澤東은 高崗을 통해 1951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중국 인민해방군과 북한 인민군이 수세에 몰려 있으므로 유엔군과 휴전협상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스탈린에게 제시했다. 스탈린으로서도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毛澤東의 의견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1951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휴전 회담의 초기 중국의 毛澤東은 중국이 만족할 만한 휴전조건들을 확보할 경우 휴전협정을 早期에 체결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毛澤東으로서도 비록 抗美援朝(항미원조)라는 大義(대의) 아래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기는 했으나 끝을 모르는 전쟁에 계속 자기네 병사들이 희생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毛澤東은 자신의 아들마저 한국전에서 잃는 슬픔을 맛보기도 했던 것이다.
스탈린의 사망으로 휴전 급진전
그러나 스탈린은 휴전의 필요성은 중국보다 미국이 더 많이 가지고 있다면서 중국과 북한이 휴전협약의 早期체결을 위해 서두르지 말 것을 제시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의견에 따라 조속한 시일 안에 체결될 것 같았던 휴전 회담은 공산진영이 강경한 자세로 나옴에 따라 답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처럼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휴전회담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만난다. 그동안 휴전회담의 걸림돌이었던 스탈린이 1953년 3월5일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이다.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휴전회담은 급진전을 보이게 된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모두 전쟁에 지쳐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스탈린이 죽은 지 겨우 2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던 3월19일에 열린 소련 각료회의는 한국전쟁을 조속한 시일 내에 끝내기로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물론 한국전쟁이 성급하게 휴전에 이르게 된 배경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래에서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덜레스는 미국 정부가 1953년 5월경 중국에 核(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위협함으로써 한국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對중국 핵무기 사용 경고가 스탈린의 사망 후 소련이 내부적으로 한국전쟁을 끝내기로 한 상태에서 휴전회담에 나선 중국과 북한측에 이 방침을 통보한 두 달 뒤에 있었다는 점에서 덜레스 국무장관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結者解之(결자해지)라는 말처럼 스탈린은 자신이 시작한 전쟁을 자신의 죽음으로 끝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舊소련의 한국전쟁 관련문서들을 통해 그동안 6·25 전쟁이 남한의 北侵(북침)에 대한 반격에서 비롯되었다는 억지 주장을 되풀이해 온 북한의 선전이 거짓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이른바 「南朝鮮(남조선) 해방」을 위한 金日成의 거듭된 南侵 요청을 마지못해 승인해주는 척했던 스탈린이 감추고 있었던 속셈이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났다. 스탈린은 표면적으로 내세웠던 주장과는 달리 오로지 自國(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를 제물로 바쳤던 것이다.
安保는 지금이 더 중요
비록 스탈린과 金日成은 갔지만 북한측은 여전히 우리 정부의 정통성과 實在(실재)를 부인, 대화를 거부하면서 대량 살상 무기 개발과 군사력 증강에 의한 강성대국 건설을 추진하고 있고, 동서 냉전체제는 해체되었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실상은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다. 우리가 이러한 국내외 정세하에서 다시는 한반도에서 6·25와 같은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의 안보의식을 다시 한번 다지고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보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서 시작되고 타인에 의해서 끝났던 슬픈 전쟁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자신의 운명은 자신의 손으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가. 국가도 그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