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옹플뢰르항은 백년전쟁 때 프랑스군이 영국군을 막던 곳이다. 지금은 요트계류장으로 쓰이고 있다.
인상파의 산실(産室)이 된 옹플뢰르
대서양 쪽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는 몽생미셸이다. 바다 한복판에 우뚝 솟은 근육질 바위산에 건설된 성당을 보기 위해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이곳으로 몰려온다. 그 북쪽에 옹플뢰르라는 도시가 있다. 가이드북에 빠져 있어 지나치는 이가 많지만 예술 애호가들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관통하는 센 강은 흘러흘러 대서양으로 빠져 나간다. 센 강이 대서양으로 합쳐지기 직전의 위치에 형성된 도시가 바로 옹플뢰르다. 이 작은 도시는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백년(百年)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대영(對英) 전초기지로, 도시 전체가 요새처럼 단단하다.
백년전쟁이 끝난 뒤 이곳에 대륙을 향해 떠나는 모험가들이 몰려들었다. 지금도 그때의 선술집들이 도시 안 선박 계류장에 즐비하다. 다만 모험가들이 탔던 배 대신 관광객들과 해양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세워 놓은 형형색색의 요트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다.
미술 애호가라면 옹플뢰르는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하나같이 옹플뢰르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던 것이다. 모네, 쿠르베, 세잔, 르누아르가 옹플뢰르를 화폭에 담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화가가 바로 외젠 부댕(Eugene Louis Boudin·1824~1898)이다.
옹플뢰르에서 태어나 도빌에서 사망한 부댕은 거의 독학으로 화가가 된 인물이다. 르 아브르, 루앵 같은 프랑스 동부의 도시들을 옮겨 다니며 해경화(海景畵), 즉 바다의 풍경을 즐겨 그렸다. 그런 그는 훗날 인상(印象)주의를 선도하게 된다.
그의 그림은 해변의 모습과 태양빛으로 이뤄져 있다. 이게 외광파(外光派)가 되며 나중에 인상파로 발전하는 것이다. 옹플뢰르에서 멀지 않은 쥐베르니에 살던 ‘수련(睡蓮)의 작가’ 모네는 “내가 화가가 된 것은 모두 외젠 부댕 덕분이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부댕 이전의 화가들은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부댕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즐겼다. 해안가에서 빛이 드러내 주는 색채를 풍성하게 표현하는 기법은 모네에게도 전수됐는데 부댕은 제자 모네에게 자연광을 스케치하도록 자주 권했다고 한다.
옹플뢰르의 어느 골목길을 걷다 보니 부댕 미술관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으나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아쉬웠다. 프랑스의 미술관과 박물관은 대부분 10월 말에 문을 닫고 이듬해 3월 초나 4월 초에 다시 문을 여는 게 관행이다.
옹플뢰르의 또 다른 상징은 도시 한복판에 서 있는 성 카트린 성당이다. 프랑스에서는 보기 드물게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이 목조 성당은 백년전쟁이 끝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옹플뢰르 주민들이 십시일반 재료를 모아 건축했다고 한다.
이중섭의 유토피아가 된 제주도 서귀포
부댕을 비롯한 일군(一群)의 인상파 화가들이 찾았던 옹플뢰르 같은 곳이 우리의 제주도다. 제주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이중섭(李重燮·1916~1956)미술관이 있는 제주도 서귀포시다. 서귀포시는 이 미술관 일대에 ‘이중섭거리’라는 이름을 헌정했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1935년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으나 곧 싫증을 느끼고 문화학원 미술과로 옮겼다. 거기엔 평양 종로 공립보통학교를 다닐 때의 친구였던 가람 이병기와 오산학교 선배 문학수가 있었다.
평양에서 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그는 1946년 월남(越南)했다. 친구였던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이 반동적인 내용이라고 비판받자 그 시집의 표지를 그렸던 이중섭에게도 비판의 화살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이중섭은 부산으로 갔다가 1951년 가족과 함께 제주도 서귀포로 왔다. 서귀포에 머문 시간은 1년 남짓이었으나 꽤 의미가 깊다고 평론가 오광수는 말한다. 다음은 이중섭 미술관 홈페이지에 나오는 그의 글이다.
1·4후퇴 때 원산을 떠난 이중섭과 그 가족은 잠시 부산에 머문 후 제주 서귀포에 도착한다. 제주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대단히 주요한 시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길 떠나는 가족〉이라는 작품 속에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는 이중섭 가족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소달구지 위에 여인과 두 아이가 꽃을 뿌리고 비둘기를 날리며 앞에서 소를 모는 남정네는 감격에 겨워 고개를 제끼고 하늘을 향하고 있다. 하늘에는 한 가닥 구름이 서기처럼 그려져 있다. 소를 모는 남정네는 작가 자신이고 소달구지 위에 있는 여인과 두 아이는 부인과 두 아들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가족이라는 모티브는 이중섭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한다. 그렇긴 하지만 이처럼 가족의 흥겨운 한순간을 포착한 작품은 〈길 떠나는 가족〉 외에 따로 없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잠깐 어디를 향해 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은 거처를 옮기는 이주를 나타낸다. 정든 고향을 버리고 가는 슬픈 이주가 태반이지만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은 즐거운 소풍놀이라도 가듯 흥에 겨운 이주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향해 가고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지상의 낙원으로서의 따뜻한 남쪽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주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있어 지상의 유토피아로서의 공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언덕배기에 위치한 이중섭미술관에서 내려다보면 그가 머물렀던 집이 보인다. 아무 때나 아름답지만 봄이면 그 집 주변에 흰 목련이 흐드러지게 만개한다. 그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인다. 넘실대는 푸른 파도는 옹플뢰르에서 본 노르망디 바다의 파도와 비슷하다. 이런 풍경은 양(洋)의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예술가들을 자극하는 모양이다.⊙
대서양 쪽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는 몽생미셸이다. 바다 한복판에 우뚝 솟은 근육질 바위산에 건설된 성당을 보기 위해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이곳으로 몰려온다. 그 북쪽에 옹플뢰르라는 도시가 있다. 가이드북에 빠져 있어 지나치는 이가 많지만 예술 애호가들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관통하는 센 강은 흘러흘러 대서양으로 빠져 나간다. 센 강이 대서양으로 합쳐지기 직전의 위치에 형성된 도시가 바로 옹플뢰르다. 이 작은 도시는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백년(百年)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대영(對英) 전초기지로, 도시 전체가 요새처럼 단단하다.
백년전쟁이 끝난 뒤 이곳에 대륙을 향해 떠나는 모험가들이 몰려들었다. 지금도 그때의 선술집들이 도시 안 선박 계류장에 즐비하다. 다만 모험가들이 탔던 배 대신 관광객들과 해양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세워 놓은 형형색색의 요트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다.
미술 애호가라면 옹플뢰르는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하나같이 옹플뢰르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던 것이다. 모네, 쿠르베, 세잔, 르누아르가 옹플뢰르를 화폭에 담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화가가 바로 외젠 부댕(Eugene Louis Boudin·1824~1898)이다.
![]() |
옹플뢰르의 어느 광장이다. |
그의 그림은 해변의 모습과 태양빛으로 이뤄져 있다. 이게 외광파(外光派)가 되며 나중에 인상파로 발전하는 것이다. 옹플뢰르에서 멀지 않은 쥐베르니에 살던 ‘수련(睡蓮)의 작가’ 모네는 “내가 화가가 된 것은 모두 외젠 부댕 덕분이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부댕 이전의 화가들은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부댕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즐겼다. 해안가에서 빛이 드러내 주는 색채를 풍성하게 표현하는 기법은 모네에게도 전수됐는데 부댕은 제자 모네에게 자연광을 스케치하도록 자주 권했다고 한다.
옹플뢰르의 어느 골목길을 걷다 보니 부댕 미술관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으나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아쉬웠다. 프랑스의 미술관과 박물관은 대부분 10월 말에 문을 닫고 이듬해 3월 초나 4월 초에 다시 문을 여는 게 관행이다.
옹플뢰르의 또 다른 상징은 도시 한복판에 서 있는 성 카트린 성당이다. 프랑스에서는 보기 드물게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이 목조 성당은 백년전쟁이 끝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옹플뢰르 주민들이 십시일반 재료를 모아 건축했다고 한다.
이중섭의 유토피아가 된 제주도 서귀포
![]() |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이중섭의 거주지다. |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1935년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으나 곧 싫증을 느끼고 문화학원 미술과로 옮겼다. 거기엔 평양 종로 공립보통학교를 다닐 때의 친구였던 가람 이병기와 오산학교 선배 문학수가 있었다.
평양에서 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그는 1946년 월남(越南)했다. 친구였던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이 반동적인 내용이라고 비판받자 그 시집의 표지를 그렸던 이중섭에게도 비판의 화살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이중섭은 부산으로 갔다가 1951년 가족과 함께 제주도 서귀포로 왔다. 서귀포에 머문 시간은 1년 남짓이었으나 꽤 의미가 깊다고 평론가 오광수는 말한다. 다음은 이중섭 미술관 홈페이지에 나오는 그의 글이다.
1·4후퇴 때 원산을 떠난 이중섭과 그 가족은 잠시 부산에 머문 후 제주 서귀포에 도착한다. 제주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대단히 주요한 시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길 떠나는 가족〉이라는 작품 속에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는 이중섭 가족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소달구지 위에 여인과 두 아이가 꽃을 뿌리고 비둘기를 날리며 앞에서 소를 모는 남정네는 감격에 겨워 고개를 제끼고 하늘을 향하고 있다. 하늘에는 한 가닥 구름이 서기처럼 그려져 있다. 소를 모는 남정네는 작가 자신이고 소달구지 위에 있는 여인과 두 아이는 부인과 두 아들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가족이라는 모티브는 이중섭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한다. 그렇긴 하지만 이처럼 가족의 흥겨운 한순간을 포착한 작품은 〈길 떠나는 가족〉 외에 따로 없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잠깐 어디를 향해 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은 거처를 옮기는 이주를 나타낸다. 정든 고향을 버리고 가는 슬픈 이주가 태반이지만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은 즐거운 소풍놀이라도 가듯 흥에 겨운 이주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향해 가고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지상의 낙원으로서의 따뜻한 남쪽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주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있어 지상의 유토피아로서의 공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 |
이중섭이 살았던 초가집 주변으로 목련꽃이 만발해 있다. 올봄에 촬영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