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마약사범 극형에 처하면서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 미국에 적극 수출
⊙ 재래식 전쟁의 한계 뛰어넘는 중국의 ‘초한전(超限戰)’ 교범, ‘마약전’과 ‘밀수전’ 명시
⊙ 미국의 펜타닐 문제는 중국의 밀수출 외에 미국의 열악한 의료체계, 멕시코 마약 카트텔이 엮여 나타난 현상
⊙ 현대적 진통제의 사생아 헤로인
박한슬
1991년생. 차의과학대학교 약학과 졸업, 연세대 통계·데이터사이언스 석사 / 《중앙일보》 《주간조선》 칼럼니스트, 서울시 청년정책자문단 / 저서 《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 《숫자 한국》 외 다수
⊙ 재래식 전쟁의 한계 뛰어넘는 중국의 ‘초한전(超限戰)’ 교범, ‘마약전’과 ‘밀수전’ 명시
⊙ 미국의 펜타닐 문제는 중국의 밀수출 외에 미국의 열악한 의료체계, 멕시코 마약 카트텔이 엮여 나타난 현상
⊙ 현대적 진통제의 사생아 헤로인
박한슬
1991년생. 차의과학대학교 약학과 졸업, 연세대 통계·데이터사이언스 석사 / 《중앙일보》 《주간조선》 칼럼니스트, 서울시 청년정책자문단 / 저서 《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 《숫자 한국》 외 다수
- 지난 1월 29일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에서는 펜타닐 단속 강화 입법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한자로 된 팻말이 눈에 띈다. 사진=AP/뉴시스
재집권하자마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강경한 관세(關稅) 협박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2월 1일에는 국경을 맞댄 캐나다와 멕시코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유럽연합(EU)에 대해서도 반드시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맞불 관세를 외치던 양국은 결국 꼬리를 내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협상에 임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점에서 가장 곤경에 처한 건 중국이다. 기존 바이든 정부에서도 중국산 제품에 대해서는 약 20% 정도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여기에 10% 포인트를 더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중국 입장에선 정권이 바뀌자마자 총 30%의 관세를 부담해야 하는 처지가 된 셈이다.
본격적인 미중(美中) 관세전쟁의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관세 부과의 이유는 엉뚱하게도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 때문이다. 중국이 펜타닐 밀수출을 방치해 미국을 망치고 있다는 논리다. 이를 양국이 벌이는 패권(霸權) 경쟁을 감추려는 수사(修辭)로 가벼이 넘겨선 안 된다. 미국의 의료 환경과 진통제의 역사를 짚어보면 마약성 진통제 유행이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닐뿐더러 중국 인민해방군이 교리로 삼고 있는 초한전(超限戰)의 일환으로 볼 여지도 크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歷史)보다 오래된 통증을 둘러싼 국제 갈등의 본질을 살펴보자.
살아 있는 인간의 영원한 굴레
불교 경전인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삶이 고난의 연속이며, 이 세상은 고해(苦海)와 같기에, 중생(衆生)을 고통의 바다에서 건져내 피안(彼岸)으로 인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존재론적 고난 수준에 이르지 않더라도 인간은 평생 통증과 함께해야만 한다. 통증이 인간이란 종(種)의 생존을 담보해 주는 중요한 경보(警報) 장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병을 앓는 이들도 있다. 선천성 무통각증(CIP)이라고 불리는 유전병(遺傳病)을 앓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유전적으로 통증을 느끼는 신경에 이상이 있어 평생 통증을 경험하지 못하고 산다. 상처를 입어도 통증이 없으니 이를 인식하지 못해 상처가 곪는 일이 흔하고, 심지어는 뼈가 부러져도 모른다. 이 탓에 평범한 사람도 80세를 훌쩍 넘겨 사는 시대에 20대를 넘기기가 어렵다. 통증이 아무리 불편하긴 해도, 완전히 제거했다간 몸을 제대로 지켜낼 수 없다. 통증을 느끼는 신경을 제거하거나, 마비시키는 것은 보편적인 해법이 되지 못한다. 약을 써야 하는 것이다.
인류가 진통제의 축복을 받은 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19세기 말엽에야 우리가 흔히 아는 근대적 의미의 진통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통증은 개구리부터 두루미까지 공유하는 동물의 긴 진화적 산물이자 인간의 역사 시대보다 오래됐다.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고순도의 진통 물질을 대량 생산하기 훨씬 이전부터 통증은 일상이었다는 얘기다. 이 아득한 시차(時差) 동안 우리를 달래준 건 다양한 약용(藥用)식물, 그중에서도 특히 강력한 진통 효과를 가진 양귀비다.
양귀비와 아편
양귀비는 아편의 원료로 유명하지만, 사실 아편전쟁 시기의 아편과 양귀비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약용식물 중 하나로, 진통 목적으로 사용되던 양귀비는 씨주머니에 인위적으로 상처를 내 하얀 유액(乳液)을 모은 다음 이를 말려 가루를 내어 먹거나 뜨거운 물에 우려 먹는 수준이 고작이었다. 이런 전통적인 방식의 가공은 진통 효과를 내는 핵심 성분인 모르핀(morphine)의 농도가 10%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약효(藥效)가 순해 우리가 흔히 마약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고도의 의존성이 있지도 않았고, 시골 노파들이 배탈이 나면 쌈지에서 양귀비 씨앗을 몇 개 꺼내 먹을 정도로 일상적 처방에 가까웠다.
이런 상황이 바뀐 건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가 동남아시아와 중국 인근으로 진출하면서부터다. 이들은 특수 가공해 농도를 높인 가공 아편을 흡연(吸煙)하는 법을 전파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발명한 것인지 아님 어디선가 이러는 모습을 보고 전파한 것인지 정확한 선후(先後) 관계는 알 수 없다. 다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아편의 흡연이라는 새로운 양귀비 섭취법을 보급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약(藥)은 먹는 것보다, 폐로 흡입하거나 비강(鼻腔)을 통해 섭취하는 게 효율이 좋고, 흡수도 빠르다. 전통 의학에서 쓰이던 말린 양귀비도 달여 먹는 것보다 흡연하는 게 효율이 더 좋은데, 특수한 가공을 통해 모르핀이 고도로 농축된 아편을 피우면 어떨까? 가뜩이나 농도가 진한 약재를 훨씬 효율 좋은 방식으로 섭취하니 우리가 흔히 아는 마약(痲藥)의 효과가 그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행복한 환각을 보며, 의존성 속에서 허우적대게 된 것이다. 청(淸)나라 조정이 양귀비를 가공한 것으로만 알았던 아편의 실제 정체다.
영국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수십 년 전에 이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동남아시아 지역과 중국 남동부에 위치한 푸젠성(福建省), 현재 대만 지역에 아편 흡연을 널리 퍼트렸다. 인도 벵골 지역에서 생산한 아편을 동남아와 중국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누린다는 모델을 구축한 원조(元祖)가 바로 이들이다.
이후 영국 동인도회사(EIC)가 지역 패권을 강탈하고, 본격적으로 아편 무역에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인도에는 영국산 면직물을 팔고, 중국에선 아편 판매 대금으로 차(茶)와 은(銀)을 매입해 본토로 되가져가는 소위 아편 삼각무역(三角貿易) 구조가 완성됐다. 이후 중국 사회는 우리가 아는 역사대로 심대한 사회적·경제적 타격을 받았고 두 차례의 아편전쟁 끝에 몰락했다.
옛 중국과의 단절을 선언하며, 공산주의 신(新)중국을 건국했다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마약사범을 극형(極刑)에 처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중국인에게 아편전쟁은 여전히 서구 열강에 패배한 치욕적인 경험으로 인식되고 있다. 현대적 진통제 개발 이전에 벌어진 해프닝처럼 여겨지겠지만, 실은 진통제 개발 과정도 마약 제조와 그리 멀지 않다는 게 문제다.
헤로인의 탄생
현대 약학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은 약효라는 게 특정한 약재(藥材)가 가진 정성적(定性的)인 성질이나 기(氣)의 발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특정한 약리(藥理) 성분의 농도에 따라 정량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약재에는 약효(藥效)를 내는 핵심 성분이 따로 있고, 그 외의 것들은 허물 같은 부산물(副産物)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버드나무 껍질의 진통 효과는 껍질 속의 살리실산(salicylate)에 따른 것이지 그 외의 성분은 필요가 없으며, 인삼에서도 인삼사포닌(Ginsenoside) 성분이 중요한 것이지 약재 자체의 성질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단 강경한 환원주의(還元主義)다. 그래서 아편을 가공해 모르핀 농도를 더 높이는 접근이 나왔고, 19세기 초에는 모르핀이라는 양귀비의 핵심 성분을 추출하는 데도 성공한다. 이것이 약재에서 약리 성분을 독립적으로 추출한 세계 최초의 사례다.
이처럼 19세기 초에는 약재에서 약리 성분을 추출해, 고농도로 응축시키는 게 주된 약 제작 방법론이었다. 이러다 점차 이를 화학적으로 개량하는 방법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엔 영국에서 모르핀을 화학적으로 개량해 더 뛰어난 효과를 내는 마법 같은 진통제가 처음으로 합성됐다. 지금은 마약으로 지정되어 세계에서 퇴출된 헤로인(heroin) 얘기다. 독일의 제약회사 바이엘은 헤로인을 상업적으로 생산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이를 성인에게 판매하는 건 물론 어린이용 기침 약물로도 제공했다. 아편에서 진통 효과를 내는 물질만을 뽑아내, 이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사생아(私生兒) 격의 물질이 현재까지도 은밀히 마약으로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필로폰의 등장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는 한약재인 마황(麻黃)의 약리 성분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물질을 발견했다. 이 물질은 강력한 각성 효과를 내 피로감을 줄이고, 잠을 자지 않아도 버틸 수 있게 해줬으며, 허기를 달래고 통증도 줄여줬다. 흔히 필로폰(히로뽕)이라 부르는 마약 메스암페타민의 탄생이다. 일본에서는 노동자의 활력을 되찾고, 주부들의 피로를 회복시켜 주는 강장제(强壯劑)처럼 팔리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엔 독일과 일본 양국에서 병사들의 각성제로 보급됐다. 전통적으로 쓰던 약재에서 특정 성분을 추출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마약이 별다른 고민 없이 퍼진 것이다. 약학 발전 과정에서 남은 어두운 잔재다.
다행히 이 과정에서 버드나무 껍질 추출물을 가공한 진통제 아스피린이 개발됐고, 인류는 최초의 비(非)아편계 진통제를 확보하게 됐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에게 친숙한 타이레놀이나 이부프로펜 같은 진통제가 인류의 진통제 목록에 덧붙여졌으나, 여전히 우리는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뿐인가. 새로 개발된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은 미국에서 기존과 달라진 새로운 양상의 마약 중독 문제까지 일으키는데도 여전히 유통되고 있는 상태다. 버젓이 비마약성 진통제가 있는데도 마약성 진통제가 계속 사용되는 이유는 통증이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복잡한 현상이라는 게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어서다. 통증은 물리적 현상인 동시에 주관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통증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 아니다
유물론적(唯物論的)이고 물리적인 세계관에서는 통증도 분명 물리적 현상에 그쳐야 했다. 조직이 상처 혹은 손상을 입으면 통증 신호를 전달하는 물질이 만들어지고, 신호 물질이 조직과 연결된 신경에 도달하면 신경은 짜릿한 통증 신호를 뇌로 전달한다. 뇌가 이것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통증을 느끼고, 통각의 기계적 반응 모델이 완결된다.
그런데 통증에 대한 연구를 거듭할수록 인간이 통증을 인지하는 과정이 그리 명료한 기계적 반응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통증을 느끼는 데 있어 물리적으로 전달되는 통증 신호가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나, 최종적으로 인간이 인지하는 고통은 지극히 유심론적(唯心論的)인 뇌의 인지적 해석에 따라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신체의 감각 신호는 반응의 토대일 뿐, 내가 인지하는 감각은 나라는 존재의 주관적 해석의 결과다.
가장 친숙한 예를 들어보자. 연심(戀心)을 품은 이와 잘되기 위해서는 같이 공포 영화를 보거나, 짜릿한 스릴을 주는 놀이기구를 타러 가라는 조언을 들어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경험은 공통적으로 신체에 스트레스 반응을 유발해 심장이 평소보다 거세게 뛰게 만드는데, 공교롭게도 연인에 대한 사랑에 빠졌을 때도 두근거림이 발생한다. 현상적으로는 심장이 세차게 뛴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두근거림의 원인을 해석하는 건 우리의 의식이다. 그러니 서로를 알아가는 풋풋한 단계에서 가슴 뛰는 경험을 하면, 상대는 이것을 감정적 두근거림으로 해석할 개연성이 크니 인위적으로 가슴 뛰게 하는 데이트를 하는 게 연애의 성공 확률을 높인다는 논리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한 일이 통증을 두고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 통증도 해석(解析)의 문제란 것이다.
가령 저녁에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데 자신도 모르게 몸에 생긴 멍이나 상처를 발견할 때가 있다. 멍이 들 정도면 꽤 세게 부딪혔을 것 같은데 기억도 없고, 생채기가 난 곳도 어디서 긁혔는지 모르는 경우다. 그런데 문서 작업을 하다 종이에 손이 베이거나, 타격의 상황이 명확한 회초리 체벌은 그 통증의 기억이 무척 또렷하다. 훨씬 작은 통증이 전달되더라도, 그 자극이 무엇인지 원인을 짚다, 우리의 의식이 이를 ‘위협’으로 인식하면 통증을 더 크게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통계적 경향성은 있지만, 어느 정도의 손상을 입었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통증을 느낄지는 전적으로 주관적 해석에 좌우되는 지극히 개인적 경험이다. 소설적 과장이 섞였지만, 어깨에 박힌 독화살을 긁어내는 중에 태연히 바둑을 두는 관우(關羽) 같은 사람이 실존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러니 통증을 정량적으로 측정한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혈압이나 혈당 수치처럼 명확한 기준이 없는 주관적 경험을 묻는 것이다 보니, 1점(무통)에서 10점(극심한 통증) 사이의 감각을 질의하는 게 고작이고 이마저도 일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 그렇다고 당신이 겪는 통증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오온(五蘊)이 공(空)이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라고 했다간 환자보다 의사가 먼저 열반(涅槃)에 들 수도 있다.
그래서 통증 신호 자체를 차단해 버리는 마약성 진통제가 지금까지도 쓰인다. 일상적이고 자잘한 통증이야 통증 신호 물질 생성을 막는 통상의 진통제로 대처가 가능하나, 수술 후 통증 혹은 대상포진(帶狀疱疹)이나 암(癌)에 의한 통증 같은 극단적 통증에는 주관적 경험 이전에 통증 신호 자체를 막아버리는 강한 조치가 요구돼서다.
미국에서 펜타닐이 잘 팔리는 이유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의문은 이것이 왜 유독 미국에서 더 문제가 되냐는 부분이다. 각국이 필요시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하는 조건은 같은데, 왜 미국에서만 펜타닐 오남용 문제가 불거져 사회 문제로까지 인식되고 있냐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건, 미국의 펜타닐 중독 문제가 바로 미국 특유의 의료체계와 중국의 적극적 펜타닐 밀수출, 그리고 오랜 시간 미국에 마약을 반입해 온 멕시코 마약 카트텔이 복합적으로 엮여 나타난 현상이라서다.
미국의 의료보장 수준이 극도로 낮다는 건 익히 알려졌지만, 5분 거리에 편히 방문할 수 있는 의원 대여섯 곳을 끼고 사는 한국 대도시 거주민은 이를 체감(體感)하기가 어렵다.
통상의 미국인이 경험하는 의료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나라 농촌 지역 의료 취약지에 거주하는 상황을 상상해야 하는데, 미국 비도시 지역의 80%가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반경 30km 내에 아무런 의료기관이 없어, 최소 차를 타고 30분에서 1시간은 달려야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나라에 거주하는데 의료비와 약값마저 상상을 초월하게 비싸다. 치료받지 못한 증상 탓에 만성적(慢性的) 통증을 안고 사는 이들이 수두룩한 이유다. 그런데 도심지의 으슥한 곳에서 통상의 진통제보다 훨씬 강력한 물건을 공식적 의료 과정을 통해 구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게 판다면? 펜타닐 중독의 첫 루트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중국에서 펜타닐을 대규모로 제조해, 미국에 밀수출하는 일이 오래 이어졌기 때문이다. 중국 본토는 엄격하게 마약사범을 처벌하지만, 정작 ‘수출용’ 마약은 풀어주고 있는 상황이 무엇을 의미할까. 중국 정도의 강력한 통제-감시 국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적극적 권장까진 아니라도 최소 적당한 수준의 묵인은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만들어진 펜타닐이 멕시코로 건너가면, 멕시코 마약 카르텔은 오랜 유통망을 이용해 펜타닐을 미국 전역에 유통한다. 국경을 몰래 넘는 불법 이민자는 물론 멕시코에 친인척을 둔 합법 이민자들까지 동원하는 굳건한 유통망이 총동원돼 중국산 마약을 미국 전역에 퍼트리는 것이다.
21세기판 아편 삼각무역
이 결과는 21세기판 아편 삼각무역의 완성이다. 과거 영국이 아편을 팔아 청나라의 은을 유출했듯, 중국은 펜타닐을 팔아 미국 달러를 벌어들인다. 보편 화폐이던 은이 대영제국의 자본 축적과 산업혁명의 기틀이 됐듯, 보편 화폐인 달러는 중국이 필수재인 석유와 각국의 자원을 매입할 수 있게 돕는다. 상대국에는 해악(害惡)을, 자국에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악마적 전략이다.
우연이 겹친 공상이라기엔 중국은 이미 기존 재래식 전쟁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한전을 펴야 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인민해방군 교범으로 삼고 있다. 24개의 미래전(未來戰) 전법 중 초(超)군사 전법으로 ‘마약전’과 ‘밀수전’을 명시하고 있는 국가가 정말 이 사태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트럼프 정부가 멕시코에 대한 관세 부과 겁박에도 펜타닐을 언급하고, 중국에 대한 관세 위협에도 펜타닐을 언급하는 건 결코 사소한 시빗거리가 아니다. 미중 패권 경쟁에서 총성(銃聲) 없는 새로운 전장을 두고 벌어지는 전초전이자, 우리가 익숙하던 세계가 종언(終焉)을 고하고 있다는 슬픈 징조다. 이런 격변의 시기에 지도자도 없이 내던져진 우리나라의 운명이 아쉬울 뿐이다.⊙
이런 점에서 가장 곤경에 처한 건 중국이다. 기존 바이든 정부에서도 중국산 제품에 대해서는 약 20% 정도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여기에 10% 포인트를 더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중국 입장에선 정권이 바뀌자마자 총 30%의 관세를 부담해야 하는 처지가 된 셈이다.
본격적인 미중(美中) 관세전쟁의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관세 부과의 이유는 엉뚱하게도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 때문이다. 중국이 펜타닐 밀수출을 방치해 미국을 망치고 있다는 논리다. 이를 양국이 벌이는 패권(霸權) 경쟁을 감추려는 수사(修辭)로 가벼이 넘겨선 안 된다. 미국의 의료 환경과 진통제의 역사를 짚어보면 마약성 진통제 유행이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닐뿐더러 중국 인민해방군이 교리로 삼고 있는 초한전(超限戰)의 일환으로 볼 여지도 크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歷史)보다 오래된 통증을 둘러싼 국제 갈등의 본질을 살펴보자.
살아 있는 인간의 영원한 굴레
불교 경전인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삶이 고난의 연속이며, 이 세상은 고해(苦海)와 같기에, 중생(衆生)을 고통의 바다에서 건져내 피안(彼岸)으로 인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존재론적 고난 수준에 이르지 않더라도 인간은 평생 통증과 함께해야만 한다. 통증이 인간이란 종(種)의 생존을 담보해 주는 중요한 경보(警報) 장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병을 앓는 이들도 있다. 선천성 무통각증(CIP)이라고 불리는 유전병(遺傳病)을 앓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유전적으로 통증을 느끼는 신경에 이상이 있어 평생 통증을 경험하지 못하고 산다. 상처를 입어도 통증이 없으니 이를 인식하지 못해 상처가 곪는 일이 흔하고, 심지어는 뼈가 부러져도 모른다. 이 탓에 평범한 사람도 80세를 훌쩍 넘겨 사는 시대에 20대를 넘기기가 어렵다. 통증이 아무리 불편하긴 해도, 완전히 제거했다간 몸을 제대로 지켜낼 수 없다. 통증을 느끼는 신경을 제거하거나, 마비시키는 것은 보편적인 해법이 되지 못한다. 약을 써야 하는 것이다.
인류가 진통제의 축복을 받은 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19세기 말엽에야 우리가 흔히 아는 근대적 의미의 진통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통증은 개구리부터 두루미까지 공유하는 동물의 긴 진화적 산물이자 인간의 역사 시대보다 오래됐다.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고순도의 진통 물질을 대량 생산하기 훨씬 이전부터 통증은 일상이었다는 얘기다. 이 아득한 시차(時差) 동안 우리를 달래준 건 다양한 약용(藥用)식물, 그중에서도 특히 강력한 진통 효과를 가진 양귀비다.
양귀비와 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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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아편전쟁을 국치(國恥)로 여기고 있다. |
이런 상황이 바뀐 건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가 동남아시아와 중국 인근으로 진출하면서부터다. 이들은 특수 가공해 농도를 높인 가공 아편을 흡연(吸煙)하는 법을 전파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발명한 것인지 아님 어디선가 이러는 모습을 보고 전파한 것인지 정확한 선후(先後) 관계는 알 수 없다. 다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아편의 흡연이라는 새로운 양귀비 섭취법을 보급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약(藥)은 먹는 것보다, 폐로 흡입하거나 비강(鼻腔)을 통해 섭취하는 게 효율이 좋고, 흡수도 빠르다. 전통 의학에서 쓰이던 말린 양귀비도 달여 먹는 것보다 흡연하는 게 효율이 더 좋은데, 특수한 가공을 통해 모르핀이 고도로 농축된 아편을 피우면 어떨까? 가뜩이나 농도가 진한 약재를 훨씬 효율 좋은 방식으로 섭취하니 우리가 흔히 아는 마약(痲藥)의 효과가 그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행복한 환각을 보며, 의존성 속에서 허우적대게 된 것이다. 청(淸)나라 조정이 양귀비를 가공한 것으로만 알았던 아편의 실제 정체다.
영국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수십 년 전에 이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동남아시아 지역과 중국 남동부에 위치한 푸젠성(福建省), 현재 대만 지역에 아편 흡연을 널리 퍼트렸다. 인도 벵골 지역에서 생산한 아편을 동남아와 중국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누린다는 모델을 구축한 원조(元祖)가 바로 이들이다.
이후 영국 동인도회사(EIC)가 지역 패권을 강탈하고, 본격적으로 아편 무역에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인도에는 영국산 면직물을 팔고, 중국에선 아편 판매 대금으로 차(茶)와 은(銀)을 매입해 본토로 되가져가는 소위 아편 삼각무역(三角貿易) 구조가 완성됐다. 이후 중국 사회는 우리가 아는 역사대로 심대한 사회적·경제적 타격을 받았고 두 차례의 아편전쟁 끝에 몰락했다.
옛 중국과의 단절을 선언하며, 공산주의 신(新)중국을 건국했다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마약사범을 극형(極刑)에 처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중국인에게 아편전쟁은 여전히 서구 열강에 패배한 치욕적인 경험으로 인식되고 있다. 현대적 진통제 개발 이전에 벌어진 해프닝처럼 여겨지겠지만, 실은 진통제 개발 과정도 마약 제조와 그리 멀지 않다는 게 문제다.
헤로인의 탄생
현대 약학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은 약효라는 게 특정한 약재(藥材)가 가진 정성적(定性的)인 성질이나 기(氣)의 발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특정한 약리(藥理) 성분의 농도에 따라 정량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약재에는 약효(藥效)를 내는 핵심 성분이 따로 있고, 그 외의 것들은 허물 같은 부산물(副産物)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버드나무 껍질의 진통 효과는 껍질 속의 살리실산(salicylate)에 따른 것이지 그 외의 성분은 필요가 없으며, 인삼에서도 인삼사포닌(Ginsenoside) 성분이 중요한 것이지 약재 자체의 성질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단 강경한 환원주의(還元主義)다. 그래서 아편을 가공해 모르핀 농도를 더 높이는 접근이 나왔고, 19세기 초에는 모르핀이라는 양귀비의 핵심 성분을 추출하는 데도 성공한다. 이것이 약재에서 약리 성분을 독립적으로 추출한 세계 최초의 사례다.
이처럼 19세기 초에는 약재에서 약리 성분을 추출해, 고농도로 응축시키는 게 주된 약 제작 방법론이었다. 이러다 점차 이를 화학적으로 개량하는 방법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엔 영국에서 모르핀을 화학적으로 개량해 더 뛰어난 효과를 내는 마법 같은 진통제가 처음으로 합성됐다. 지금은 마약으로 지정되어 세계에서 퇴출된 헤로인(heroin) 얘기다. 독일의 제약회사 바이엘은 헤로인을 상업적으로 생산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이를 성인에게 판매하는 건 물론 어린이용 기침 약물로도 제공했다. 아편에서 진통 효과를 내는 물질만을 뽑아내, 이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사생아(私生兒) 격의 물질이 현재까지도 은밀히 마약으로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필로폰의 등장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는 한약재인 마황(麻黃)의 약리 성분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물질을 발견했다. 이 물질은 강력한 각성 효과를 내 피로감을 줄이고, 잠을 자지 않아도 버틸 수 있게 해줬으며, 허기를 달래고 통증도 줄여줬다. 흔히 필로폰(히로뽕)이라 부르는 마약 메스암페타민의 탄생이다. 일본에서는 노동자의 활력을 되찾고, 주부들의 피로를 회복시켜 주는 강장제(强壯劑)처럼 팔리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엔 독일과 일본 양국에서 병사들의 각성제로 보급됐다. 전통적으로 쓰던 약재에서 특정 성분을 추출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마약이 별다른 고민 없이 퍼진 것이다. 약학 발전 과정에서 남은 어두운 잔재다.
다행히 이 과정에서 버드나무 껍질 추출물을 가공한 진통제 아스피린이 개발됐고, 인류는 최초의 비(非)아편계 진통제를 확보하게 됐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에게 친숙한 타이레놀이나 이부프로펜 같은 진통제가 인류의 진통제 목록에 덧붙여졌으나, 여전히 우리는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뿐인가. 새로 개발된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은 미국에서 기존과 달라진 새로운 양상의 마약 중독 문제까지 일으키는데도 여전히 유통되고 있는 상태다. 버젓이 비마약성 진통제가 있는데도 마약성 진통제가 계속 사용되는 이유는 통증이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복잡한 현상이라는 게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어서다. 통증은 물리적 현상인 동시에 주관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통증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 아니다
유물론적(唯物論的)이고 물리적인 세계관에서는 통증도 분명 물리적 현상에 그쳐야 했다. 조직이 상처 혹은 손상을 입으면 통증 신호를 전달하는 물질이 만들어지고, 신호 물질이 조직과 연결된 신경에 도달하면 신경은 짜릿한 통증 신호를 뇌로 전달한다. 뇌가 이것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통증을 느끼고, 통각의 기계적 반응 모델이 완결된다.
그런데 통증에 대한 연구를 거듭할수록 인간이 통증을 인지하는 과정이 그리 명료한 기계적 반응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통증을 느끼는 데 있어 물리적으로 전달되는 통증 신호가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나, 최종적으로 인간이 인지하는 고통은 지극히 유심론적(唯心論的)인 뇌의 인지적 해석에 따라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신체의 감각 신호는 반응의 토대일 뿐, 내가 인지하는 감각은 나라는 존재의 주관적 해석의 결과다.
가장 친숙한 예를 들어보자. 연심(戀心)을 품은 이와 잘되기 위해서는 같이 공포 영화를 보거나, 짜릿한 스릴을 주는 놀이기구를 타러 가라는 조언을 들어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경험은 공통적으로 신체에 스트레스 반응을 유발해 심장이 평소보다 거세게 뛰게 만드는데, 공교롭게도 연인에 대한 사랑에 빠졌을 때도 두근거림이 발생한다. 현상적으로는 심장이 세차게 뛴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두근거림의 원인을 해석하는 건 우리의 의식이다. 그러니 서로를 알아가는 풋풋한 단계에서 가슴 뛰는 경험을 하면, 상대는 이것을 감정적 두근거림으로 해석할 개연성이 크니 인위적으로 가슴 뛰게 하는 데이트를 하는 게 연애의 성공 확률을 높인다는 논리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한 일이 통증을 두고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 통증도 해석(解析)의 문제란 것이다.
가령 저녁에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데 자신도 모르게 몸에 생긴 멍이나 상처를 발견할 때가 있다. 멍이 들 정도면 꽤 세게 부딪혔을 것 같은데 기억도 없고, 생채기가 난 곳도 어디서 긁혔는지 모르는 경우다. 그런데 문서 작업을 하다 종이에 손이 베이거나, 타격의 상황이 명확한 회초리 체벌은 그 통증의 기억이 무척 또렷하다. 훨씬 작은 통증이 전달되더라도, 그 자극이 무엇인지 원인을 짚다, 우리의 의식이 이를 ‘위협’으로 인식하면 통증을 더 크게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통계적 경향성은 있지만, 어느 정도의 손상을 입었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통증을 느낄지는 전적으로 주관적 해석에 좌우되는 지극히 개인적 경험이다. 소설적 과장이 섞였지만, 어깨에 박힌 독화살을 긁어내는 중에 태연히 바둑을 두는 관우(關羽) 같은 사람이 실존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러니 통증을 정량적으로 측정한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혈압이나 혈당 수치처럼 명확한 기준이 없는 주관적 경험을 묻는 것이다 보니, 1점(무통)에서 10점(극심한 통증) 사이의 감각을 질의하는 게 고작이고 이마저도 일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 그렇다고 당신이 겪는 통증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 오온(五蘊)이 공(空)이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라고 했다간 환자보다 의사가 먼저 열반(涅槃)에 들 수도 있다.
그래서 통증 신호 자체를 차단해 버리는 마약성 진통제가 지금까지도 쓰인다. 일상적이고 자잘한 통증이야 통증 신호 물질 생성을 막는 통상의 진통제로 대처가 가능하나, 수술 후 통증 혹은 대상포진(帶狀疱疹)이나 암(癌)에 의한 통증 같은 극단적 통증에는 주관적 경험 이전에 통증 신호 자체를 막아버리는 강한 조치가 요구돼서다.
미국에서 펜타닐이 잘 팔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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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7일 미국은 중국에 펜타닐 문제에 대해 항의했지만, 중국 국가마약통제위원회 위하이빈 부위원장은 자국이 고의로 미국에 펜타닐을 퍼뜨리고 있다는 미국 측 주장을 부인했다. 사진=AP/뉴시스 |
미국의 의료보장 수준이 극도로 낮다는 건 익히 알려졌지만, 5분 거리에 편히 방문할 수 있는 의원 대여섯 곳을 끼고 사는 한국 대도시 거주민은 이를 체감(體感)하기가 어렵다.
통상의 미국인이 경험하는 의료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나라 농촌 지역 의료 취약지에 거주하는 상황을 상상해야 하는데, 미국 비도시 지역의 80%가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반경 30km 내에 아무런 의료기관이 없어, 최소 차를 타고 30분에서 1시간은 달려야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나라에 거주하는데 의료비와 약값마저 상상을 초월하게 비싸다. 치료받지 못한 증상 탓에 만성적(慢性的) 통증을 안고 사는 이들이 수두룩한 이유다. 그런데 도심지의 으슥한 곳에서 통상의 진통제보다 훨씬 강력한 물건을 공식적 의료 과정을 통해 구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게 판다면? 펜타닐 중독의 첫 루트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중국에서 펜타닐을 대규모로 제조해, 미국에 밀수출하는 일이 오래 이어졌기 때문이다. 중국 본토는 엄격하게 마약사범을 처벌하지만, 정작 ‘수출용’ 마약은 풀어주고 있는 상황이 무엇을 의미할까. 중국 정도의 강력한 통제-감시 국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적극적 권장까진 아니라도 최소 적당한 수준의 묵인은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만들어진 펜타닐이 멕시코로 건너가면, 멕시코 마약 카르텔은 오랜 유통망을 이용해 펜타닐을 미국 전역에 유통한다. 국경을 몰래 넘는 불법 이민자는 물론 멕시코에 친인척을 둔 합법 이민자들까지 동원하는 굳건한 유통망이 총동원돼 중국산 마약을 미국 전역에 퍼트리는 것이다.
21세기판 아편 삼각무역
이 결과는 21세기판 아편 삼각무역의 완성이다. 과거 영국이 아편을 팔아 청나라의 은을 유출했듯, 중국은 펜타닐을 팔아 미국 달러를 벌어들인다. 보편 화폐이던 은이 대영제국의 자본 축적과 산업혁명의 기틀이 됐듯, 보편 화폐인 달러는 중국이 필수재인 석유와 각국의 자원을 매입할 수 있게 돕는다. 상대국에는 해악(害惡)을, 자국에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악마적 전략이다.
우연이 겹친 공상이라기엔 중국은 이미 기존 재래식 전쟁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한전을 펴야 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인민해방군 교범으로 삼고 있다. 24개의 미래전(未來戰) 전법 중 초(超)군사 전법으로 ‘마약전’과 ‘밀수전’을 명시하고 있는 국가가 정말 이 사태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트럼프 정부가 멕시코에 대한 관세 부과 겁박에도 펜타닐을 언급하고, 중국에 대한 관세 위협에도 펜타닐을 언급하는 건 결코 사소한 시빗거리가 아니다. 미중 패권 경쟁에서 총성(銃聲) 없는 새로운 전장을 두고 벌어지는 전초전이자, 우리가 익숙하던 세계가 종언(終焉)을 고하고 있다는 슬픈 징조다. 이런 격변의 시기에 지도자도 없이 내던져진 우리나라의 운명이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