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6년 개척사맥주양조소 설립, 이듬해 일본 최초 맥주 ‘냉제 삿포로맥주’ 출시
⊙ 라벤더로 유명한 후라노, 체다의 풍미와 와인의 향기가 깊이 스며든 치즈 생산
⊙ 후라노시, 포도과수연구소 설립하고 ‘후라노’ 와인 출시
⊙ 산토리·닛카위스키 만든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다케쓰루 마사타카
牟鍾赫
1971년생. 중국정법대학 경제법학과 / 한국 투자기업 노무관리 컨설턴트. 중국문제 기고가, 방송 VJ·PD, 취재 코디네이터로 활동 / 저서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웹소설 《七天的愛在新疆》(중국어)
[연재를 시작하며]
필자는 1996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2000년부터 프리랜서 기고가와 방송 VJ·PD 및 코디네이터로 일하면서 중국 내 31개 성(省)·시·자치구를 모두 방문했다. 또한 대만·홍콩·마카오·싱가포르 등도 방문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은 도시와 마을마다 현지의 역사·산업·사회·문화·인물 등과 관련 있는 술 브랜드와 양조장을 발전시켜 온 사실을 알았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0년쯤 전 《월간조선》에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을 연재했다.
코로나19 사태 기간에는 일본을 다음 대상으로 정해 자료를 조사했다. 왜냐하면 일본은 오랜 봉건 체제 기간 도시와 마을마다 독특한 문화를 꽃피우고 각기 다른 술 브랜드와 양조장을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2023년 1월부터 8차례 77일 동안 일본의 4대 섬과 오키나와를 방문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친일이나 반일을 떠나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술’을 매개로 샅샅이 살펴보고, 우리가 얻을 시사점을 찾아본다.
⊙ 라벤더로 유명한 후라노, 체다의 풍미와 와인의 향기가 깊이 스며든 치즈 생산
⊙ 후라노시, 포도과수연구소 설립하고 ‘후라노’ 와인 출시
⊙ 산토리·닛카위스키 만든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다케쓰루 마사타카
牟鍾赫
1971년생. 중국정법대학 경제법학과 / 한국 투자기업 노무관리 컨설턴트. 중국문제 기고가, 방송 VJ·PD, 취재 코디네이터로 활동 / 저서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웹소설 《七天的愛在新疆》(중국어)
[연재를 시작하며]
필자는 1996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2000년부터 프리랜서 기고가와 방송 VJ·PD 및 코디네이터로 일하면서 중국 내 31개 성(省)·시·자치구를 모두 방문했다. 또한 대만·홍콩·마카오·싱가포르 등도 방문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은 도시와 마을마다 현지의 역사·산업·사회·문화·인물 등과 관련 있는 술 브랜드와 양조장을 발전시켜 온 사실을 알았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0년쯤 전 《월간조선》에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을 연재했다.
코로나19 사태 기간에는 일본을 다음 대상으로 정해 자료를 조사했다. 왜냐하면 일본은 오랜 봉건 체제 기간 도시와 마을마다 독특한 문화를 꽃피우고 각기 다른 술 브랜드와 양조장을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2023년 1월부터 8차례 77일 동안 일본의 4대 섬과 오키나와를 방문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친일이나 반일을 떠나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술’을 매개로 샅샅이 살펴보고, 우리가 얻을 시사점을 찾아본다.
- 삿포로를 방문한 이들이 즐겨 찾는 삿포로맥주박물관. 앞에 보이는 것은 증류기이다. 사진=모종혁
2023년 4월 하순 필자는 일본 4대 섬 중 3번째로 홋카이도(北海道)를 갔다. 나고야(名古屋)에서 일본 국내선 여객기를 타고 1시간 35분을 비행하여 신치토세(新千歲)공항에 도착했다.
드넓은 대륙인 중국과 달리, 일본은 크지 않은 섬나라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홋카이도에 가서야 3월 중순에 방문했던 오키나와(沖繩)와 비교되면서 일본이 얼마나 큰지 실감했다. 삿포로(札幌)는 첫날에 잠시 거쳐 갔다가 마지막 일정으로 다시 방문해 구경했다. 삿포로는 인구 522만 명의 홋카이도에서 40%에 가까운 195만 명이 산다. 일본 기초자치단체인 시·정·촌(市町村) 가운데 네 번째 해당하고, 도쿄(東京) 이북의 도시 중 가장 많다.
삿포로는 일본 최북단에 있는 정령(政令)지정도시다. 정령지정도시는 일본 지방자치법에서 정한 인구 50만 명 이상의 대도시를 가리킨다. 현재 정령지정도시는 20개가 있는데, 정령지정도시로 되면 광역자치단체인 도·도·부·현(都道府縣)의 권한을 많이 위임받는다.
홋카이도 개척과 農학교 설립
18세기에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정복하고 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진출하면서 에도(江戶) 막부는 홋카이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 19세기 초에 측량 조사를 벌였다.
1855년 에도 막부는 전국(戰國)시대 이래 홋카이도 남단에서 살았던 마쓰마에(松前) 가문의 영지 대부분을 직할령으로 삼았다. 이에 대한 보상을 지급했으나, 주요 경작지를 뺏긴 마쓰마에번(藩)의 불만은 컸다. 따라서 마쓰마에번 군대는 막부군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1869년 메이지(明治)유신으로 판적봉환(版籍奉還)이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으로 홋카이도라는 명칭을 쓰게 됐다. 본래 일본에서 도(道)라는 행정체계는 8세기 율령제(律令制)가 실시되었을 때부터 사용돼 온 것인데, 홋카이도만 ‘도(道)’로 남긴 것은 혼슈, 규슈, 시코쿠와 전혀 다른 새로운 북방 영토로 홋카이도를 설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삿포로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홋카이도개척사(開拓使)를 설치했다. 1871년 메이지 정부가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했지만, 홋카이도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런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니,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1840~1900년)이다. 기요타카는 1870년에 홋카이도개척사의 개척차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홋카이도를 어떻게 개발할지 찾기 위해서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기요타카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인의 대량 이주가 절실하다고 느꼈다. 이를 위해서 이주하는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했기에, 미국의 서부 개척 노하우와 기술을 전수받고자 했다. 따라서 미국 전문가를 초청하여 컨설팅을 받고 지식을 전수받았다.
미국 전문가는 홋카이도에 기계를 이용한 밭농사와 축산업이 적당하다고 조언했다. 또한 개척을 추진할 인재의 양성을 역설했다. 1872년 기요타카는 도쿄에 개척사 임시학교를 설립하여 학생을 모집하고, 졸업 후에는 의무적으로 홋카이도 개척에 종사토록 했다. 1875년에는 학교를 삿포로로 옮겼다. 이듬해에는 일본 최초로 학사학위를 수여하는 삿포로농학교로 확대해서 개편하는데, 오늘날 홋카이도대학의 전신(前身)이다.
일본 최초의 맥주 삿포로맥주
이런 가운데 한 미국 전문가가 홋카이도에서 야생 홉(hop)을 발견했다. 홉은 혹독한 영하 기온에서도 잘 자라는 내한성(耐寒性) 식물. 춥고 척박한 홋카이도에서 재배하기 적합했다. 그래서 미국 전문가는 야생종을 개량하여 대규모로 경작할 것을 권장했다. 향후 일본에서도 서구처럼 맥주를 마실 것으로 전망해서 홋카이도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홉은 맥주의 독특한 쓴맛과 향기를 만들고, 잡균(雜菌)으로 인한 산화(酸化)를 방지하는 필수 원료다. 전 세계 맥주가 각기 다른 향을 가진 것은 나라마다 지방마다 생산되는 홉의 꽃향기가 다른 조건에서 비롯됐다.
이렇게 홉을 생산하면서 1876년 삿포로에 일본 최초의 맥주 양조장인 개척사맥주양조소(釀造所)를 설립했다. 사실 처음에는 개척사의 농업시험장이 있던 도쿄에서 맥주를 생산하려고 했다. 하지만 건설 책임자였던 무라하시 히사나리(村橋久成·1842~1892년)가 반대했다. 히사나리는 삿포로 건설을 위해서 토지를 측량하고 도로와 가옥을 만드는 데 종사했기에 삿포로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 또한 도쿄는 맥주 생산을 위한 기반 환경이 부적합하다고 여겨 건의서를 제출했다.
히사나리는 “홋카이도는 양조장을 건설하기 위한 목재가 풍부하고, 맥주를 저온에서 발효시키고 이송하는 데 필요한 얼음이 많다”면서 “삿포로는 편리한 운송로도 갖추어져 맥주를 혼슈로 보내서 판매하는 데 이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구로다 기요타카도 독일을 견학하고 온 관리의 의견을 들었던 터라, 양조소 입지를 홉과 보리의 생산지인 홋카이도로 최종 낙점했다. 마침 독일의 베를린맥주양조회사에서 맥주 양조 기술을 배우고 귀국한 나카가와 세이베이(中川淸兵衛)가 참여하면서 개척사맥주양조소는 순조롭게 문을 열었다.
1877년 일본 최초의 맥주인 냉제(冷製) 삿포로맥주가 출시됐다. 냉제는 품질 유지를 위해서 맥주를 얼음과 함께 이송하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삿포로맥주의 병 라벨에는 북극성을 그렸는데, 홋카이도개척사의 문양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을 훗날 보리 위의 북극성으로 조정해서 ‘아카(赤)’라는 애칭이 붙었다.
삿포로맥주는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맥주를 맛본 일본인을 중심으로 차츰 대중화됐다. 1887년에는 오쿠라(大倉)가 개척사맥주양조소를 양도받아 민영화하여 지금의 삿포로맥주회사를 설립했다.
후라노의 라벤더
중국에서는 라벤더(lavandula)를 ‘쉰이차오(薰衣草)’라고 부른다. 주로 신장(新疆)위구르족자치구 서북부인 이리(伊犁)카자흐자치주에서 대규모로 자란다. 필자도 여름에 현지를 취재하면서 처음 보았다.
라벤더는 일본에서는 주로 홋카이도에서 자란다. 라벤더가 유명해지게 된 것은 후라노(富良野)시의 한 라벤더 농장에서 비롯됐다. 1937년 화장품의 향료로 라벤더가 주목받으면서 프랑스에서 씨를 수입해 일본 각지에서 재배를 시도했다. 1940년에는 삿포로에서, 1953년에는 후라노에서 재배했다.
1903년 후라노에 정착해서 땅을 개간했던 도미타 도쿠미(富田德馬)는 1958년부터 라벤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규모가 계속 늘어나서 1970년 후라노에서는 250가구나 라벤더 재배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1972년에 인공 향료 기술의 발전과 저렴한 외국 향료 수입으로 후라노의 라벤더 농가는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특히 향료회사의 구매가 중단되어 존폐 위기까지 몰렸다. 그런데 1976년에 JR의 캘린더 사진작가가 도쿠미의 팜 도미타(ファ-ム富田)에 와서 사진을 찍어 전국적으로 소개했다.
그 뒤 홋카이도에서 후라노의 라벤더 농장은 반드시 방문해야 할 성지로 떠올랐다. 1980년에는 라벤더 오일의 추출에 성공하여 향수를 생산하면서 후라노의 라벤더는 전성기를 누렸다.
닌구르 테라스
필자가 후라노를 찾은 4월은 라벤더가 꽃피는 시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곳곳에 널려 있는 라벤더 농장을 보면서 그 위상과 아름다움을 체감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후라노는 라벤더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행객을 위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만들었고, 새로운 지역 산업을 계속 발굴해서 개발했다.
볼거리는 닌구르 테라스(ニングルテラス)가 대표적이다. 신후라노 프린스호텔에서 운영하는 15채의 통나무집 상점이다. 각 통나무집마다 홋카이도와 후라노의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다양한 수공예품을 판매한다. 닌구르는 1977년 후라노로 이주하여 살아온 소설가 구라모토 소(倉本聰)의 작품 《닌구르》에 등장하는 요정이다. 홋카이도의 숲에 살고 있는 작은 요정으로, ‘숲의 지혜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닌구르 테라스는 눈이 내리는 겨울에 가면 환상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닌구르 테라스에서 걸어서 25분 거리에는 후라노 치즈공방이 자리 잡고 있다. 치즈공방은 1983년부터 후라노 각 곳의 젖소 농가에서 갓 짜낸 우유를 운반해서 치즈를 제조해 왔다. 우유 살균, 우유 가열 및 유산균 첨가, 우유 단백질의 절단과 수축, 유청 배출, 우유 단백질의 반전 수축, 우유 단백질의 파쇄와 와인 절임, 소금 첨가, 치즈 포장, 치즈 압착, 치즈 숙성 등의 과정을 거친다. 영국의 체다(Cheddar) 치즈 방식을 채용해 치즈가 단단하고 맛이 강한 편이다.
체다의 풍미와 와인의 향기가 결합
특히 숙성고에서 4개월 동안 숙성되면서 체다의 풍미와 와인의 향기가 깊이 스며들어 맛있어진다. 이런 치즈는 공방의 1층에서 제조되는데, 일부 과정을 창밖에서 참관할 수 있다. 2층은 시식, 판매, 전시, 체험 등 코너로 나뉘어 있다. 시식 코너에서는 후라노 치즈공방이 제조하는 모든 치즈를 맛볼 수 있다. 전시 코너는 치즈의 발전 역사와 제조 과정을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 소개한다. 체험 코너에서는 여행객이 사전에 신청하면 치즈를 직접 제조해 볼 수 있다. 물론 본인이 만든 치즈는 가져간다.
후라노 치즈공방에서 생산되는 치즈의 가장 큰 특징은 우유 단백질의 파쇄와 와인 절임 과정에서 후라노산 와인을 넣는다는 점이다. 이는 정통 체다 치즈와 구분되는 차별점이다.
사실 필자가 후라노에 도착해서 처음 방문한 곳은 후라노 와이너리(富良野ワイン工場)이었다. 아사히카와(旭川)에서 보통열차를 타고 출발하여 가쿠덴(學田)에서 내려서 걸어갔다. 다른 교통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30분 동안 산까지 타면서 힘들었지만, 그 덕분에 와이너리에 제공되는 포도를 재배하는 포도밭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라벤더 농장도 볼 수 있었다.
후라노市가 경영하는 와이너리
와이너리는 후라노시가 운영하는 지자체 공기업이다. 일본에서 지자체가 주류업체를 경영하는 일은 거의 없다. 본래 와이너리는 1972년 후라노 시정부가 새 경작물을 개발하기 위해서 양조용 포도의 재배를 목표로 한 포도과수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당시만 해도 후라노에는 야생 산포도를 제외하고 포도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라노시는 와인의 본고장인 프랑스와 비슷한 후라노의 기후 풍토에 주목했다. 게다가 계속된 개간으로 1만 헥타르의 농지를 확보했다.
당시 라벤더가 계속 재배되었으나, 상황은 악화하고 있었다. 따라서 후라노시는 경사지나 돌 섞인 토지에 적합한 작물로 포도를 선택했다. 이에 따라 자본금으로 500만엔을 출자하여 연구소를 열었고, 일본에서 포도 재배와 와인 제조 전문가로 유명한 이와노 사다오(岩野貞雄)를 초빙하여 자문했다. 연구소는 다각적인 조사와 연구를 통해서 후라노에서는 레드 와인용으로 세이벨 13053이, 화이트 와인용으로 세이벨 5279가 적합하다고 결론 내렸다.
세이벨종은 수확량이 많고 병충해에 강한 강점이 있었다. 또한 연구소는 봄부터 가을까지 기온 차가 큰 후라노의 기후를 고려하여 단맛이 강한 포도 품종을 선택했다. 이를 위해 울타리를 기어오르는 포도나무를 재배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태양광선을 흡수하는 포도나무 잎의 면적이 시렁 방식보다 약 30%나 증가하는 이점이 있다. 이런 노력 끝에 12가구가 호응하여 세이벨종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에 발맞추어 연구소는 와인 제조에 박차를 가했다. 1974년 첫 와인을 생산했고, 이듬해 국민체육대회(國體) 동계 스키대회에 참가한 임원과 선수에게 제공해 호평 받았다. 사업성을 확신한 후라노시는 연구소를 확대하여 와이너리와 사무소를 건설했다. 이것이 1976년에 완공된 후라노 와이너리다. 이듬해에는 국제스키연맹이 공인한 월드컵을 후라노에 개최하면서 참가 임원과 선수를 대상으로 와인 시음회를 진행했다. 이렇게 차근차근 단계를 밟은 뒤 1978년에 ‘후라노 와인’을 정식으로 출시했다.
1980년에는 몬드 셀렉션이 주최한 제20회 월드 셀렉션에서 후라노 와인이 와인 부문 금상(金賞)을 수상했다. 전 세계에서 지자체의 공기업이 제조한 와인이 국제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후 후라노 와인의 지명도는 단박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후라노의 산포도와 세이벨 13053을 교배해서 새 포도 품종을 개발했고, 이를 담가서 ‘후라노 2호’를 제조했다. 후라노 2호는 통에 1년, 병에 1년을 숙성시킨다. 이렇게 후라노시는 포도 재배와 와인 사업을 통한 지역 산업의 진흥에 성공했다.
요이치로 가는 길
2023년에 필자는 30년 만에 일본을 찾아 8차례, 66일 동안 4대 섬과 오키나와를 다녔다. 일본을 입출국하는 날을 제외하고 날마다 여러 곳을 두루 구경을 다녔다. 그런데 홋카이도 여행 4일차에는 오직 한 곳만 방문할 수 있었다. 중부의 도시인 후라노에서 남부의 요이치정(余市町)까지 내려와야 했고, 다시 삿포로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날은 정말 JR 삿포로~후라노 레일패스의 혜택을 톡톡히 받았다. 물론 홋카이도를 방문하기 전에 동선과 기차 시간은 파악한 상태였다.
오전 10시 7분에 후라노에서 보통열차를 타고 출발, 1시간 5분을 달려 다키카와(瀧川)에 도착했다. 다키카와역에서 20분을 대기한 뒤 삿포로로 가는 특급열차를 탔다. 52분을 달려 도착한 삿포로역에서 나와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 다시 역으로 들어가 오타루(小樽)로 가는 에어포트를 탔다. 33분만에 도착한 오타루역에서 요이치로 향하는 보통열차를 바로 갈아탔다. 그렇게 해서 오후 2시 16분에 요이치역에 내려서, 일본의 양대 위스키회사 중 하나인 닛카(Nikka)위스키의 요이치증류소(余市蒸溜所)에 도착했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이렇듯 힘들게 요이치증류소를 찾은 이유는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인 다케쓰루 마사타카(竹鶴政孝·1894~1979년)의 생애와 업적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케쓰루는 히로시마(廣島)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술을 빚는 주조(酒造)업에 종사했다. 아버지는 신념이 강하고 자신에게 엄격했다. 이런 가풍과 생활태도는 다케쓰루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에 따라 오사카(大阪)고등공업학교(현 오사카대 공학부)에서 양조학(釀造學)을 전공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서구에서 유입된 양주(洋酒)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다케쓰루는 당시 일본에서 양주로 유명했던 셋쓰주조(攝津酒造)에 입사했다. 다케쓰루는 입사 후 능력을 발휘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에 위스키를 만들고자 했던 사장의 눈에 들어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가게 됐다.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는 미국 버번 위스키의 모방품만 생산했을 뿐 정통 위스키 제조는 엄두도 못 냈다. 1918년 영국에 도착한 다케쓰루는 위스키의 본고장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대에서 유기화학을 전공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스코틀랜드의 여러 증류소에서 견습생으로 현장을 익혔다.
그곳에서 다케쓰루는 제시 로베르타 코완(애칭 ‘리타’)을 알게 되어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두 연인의 사랑은 리타 가족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어쩔 수 없이 두 연인은 1920년 1월 등기소에서 공무원이 증인을 서주는 가운데 외롭게 결혼했다. 같은해 11월 리타와 미국을 거쳐서 일본으로 귀국했으나, 역시 친가 가족이 반대했다. 그래서 분가하여 살게 됐다. 당시 일본은 경제 상황이 좋지 못했기에, 셋쓰주조는 위스키 제조 계획을 포기했다. 다케쓰루는 퇴사하고 고등학교 화학교사로 일했다.
산토리 위스키의 탄생
1923년 양주 판매업자인 도리이 신지로(鳥井信治郞·1879~1962년)가 정통 위스키를 제조하려는 회사를 세운 뒤 생산 책임자를 스코틀랜드에서 초빙하려 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에서 “일본에 적임자가 있다”면서 다케쓰루를 추천했다. 도리이는 이미 다케쓰루를 알고 있었기에, 찾아가서 파격적인 연봉을 제시하며 설득했다. 감복한 다케쓰루는 10년 계약으로 입사했는데, 이 회사가 오늘날의 산토리(Suntory)다. 이듬해 다케쓰루의 주도 아래 미시마군(三島郡)에 일본 위스키산업의 산 증인 격인 야마자키(山崎)증류소를 완공했다.
그러나 야마자키증류소에는 기술자가 소장인 다케쓰루밖에 없었다. 증류 시설도 열악했다. 결국 여러 어려움을 하나하나씩 극복한 끝에 1929년에 첫 위스키인 산토리 화이트를 출시했다.
당시까지 일본인에게 정통 스코틀랜드 위스키는 생소한 술이었다. 게다가 값도 비싸서 시장에서 판매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산토리는 맥주공장을 인수하면서 업종 다각화로 위기를 탈출하려고 했다. 맥주공장의 책임도 다케쓰루에게 맡겼다. 이러는 동안 도리이와 다케쓰루는 의견이 대립하면서 사이가 조금씩 벌어졌다.
도리이는 일본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대중적인 위스키를 원했으나, 다케쓰루는 정통 스카치 위스키를 추구했다. 결국 1934년 노동계약 기간이 끝난 다케쓰루가 퇴사하고 홋카이도 요이치정으로 이주해 자신의 증류소를 세웠다. 그 과정에서 사업가인 가가 마사타로(加賀正太郞)의 투자를 받아 지금의 닛카위스키인 대일본과즙(果汁)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닛카위스키
다케쓰루는 처음부터 섣불리 위스키를 제조하지 않았다. 요이치의 특산물인 사과를 이용해서 과일주스를 먼저 생산했고, 더욱 발전시켜 애플브랜디를 제조했다. 위스키로 수익을 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산토리에서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장 회사에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과일주스를 생산하고 판매하면서 운영자금을 모았다. 사업의 기반이 잡히자, 다케쓰루는 아내를 위한 집을 짓고 리타를 요이치로 데려왔다. 그러고 1940년에 위스키를 출시했다. 대일본과즙의 ‘닛(日)’과 ‘카(果)’를 따서 닛카위스키로 사명을 바꾸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에서는 저가의 질 나쁜 위스키가 판을 쳤다. 다케쓰루는 3류 위스키는 제조할 수 없다고 버텼다. 하지만 당장 생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회사 주주의 설득으로 저가 위스키를 개발해 출시했다. 이 과정에서 다케쓰루에게 큰 힘이 되어준 이는 아내 리타였다. 오직 다케쓰루만 믿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고 일본에 왔기에, 리타는 줄곧 남편을 격려했다. 이들의 깊은 부부애는 2014년 일본 NHK가 150부작 아침드라마 〈맛상(マッサン)〉으로 제작하여 방영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맛상은 리타가 다케쓰루를 부르는 애칭이었다. 〈맛상〉은 주 시청자인 주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덕분에 산토리에게 줄곧 밀렸던 닛카위스키의 판매량은 급증했다.
큰 힘이 되어준 아내 리타
다만 다케쓰루와 리타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젊은 시절에 연이어 유산(流産)했기 때문이다. 1943년에 조카를 입양하여 가업을 잇게 했다. 부부는 단란했으나 1961년 리타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다케쓰루는 슬픔 속에서도 사업에 매진해 1969년 센다이(仙台)에 2번째로 미야기쿄(宮城峽)증류소를 완공했다. 같은 해 일본 정부로부터 위스키 제조자로는 최초로 훈장을 받았다. 1979년에 폐렴으로 죽은 뒤 요이치에 리타와 함께 묻혔다.
필자는 1시간 30분 동안 요이치증류소를 견학하고 닛카위스키를 시음하며 곳곳에 스며 있는 다케쓰루의 자취를 체감했다. 견학 시 가이드는 일본어로 설명했다. 하지만 참가자 중 필자와 대만인 가족이 있었기에, 경비가 줄곧 구간에 맞는 영어 설명문을 들고 다니며 이해를 도와주었다. 이날 필자는 처음 맛본 닛카위스키가 마음에 들어 싱글 몰트 요이치를 한 병 구입했다. 저녁에 삿포로에 돌아온 뒤 호텔에서 제공하는 얼음으로 온더락으로 마셨다. 다음날에는 호텔 식당에서 노징 글라스를 빌려서 니트로 즐겼다.⊙
드넓은 대륙인 중국과 달리, 일본은 크지 않은 섬나라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홋카이도에 가서야 3월 중순에 방문했던 오키나와(沖繩)와 비교되면서 일본이 얼마나 큰지 실감했다. 삿포로(札幌)는 첫날에 잠시 거쳐 갔다가 마지막 일정으로 다시 방문해 구경했다. 삿포로는 인구 522만 명의 홋카이도에서 40%에 가까운 195만 명이 산다. 일본 기초자치단체인 시·정·촌(市町村) 가운데 네 번째 해당하고, 도쿄(東京) 이북의 도시 중 가장 많다.
삿포로는 일본 최북단에 있는 정령(政令)지정도시다. 정령지정도시는 일본 지방자치법에서 정한 인구 50만 명 이상의 대도시를 가리킨다. 현재 정령지정도시는 20개가 있는데, 정령지정도시로 되면 광역자치단체인 도·도·부·현(都道府縣)의 권한을 많이 위임받는다.
홋카이도 개척과 農학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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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를 개척한 구로다 기요타카(사진 왼쪽). 삿포로의 명소 중 하나인 시계탑은 원래 삿포로농학교의 연무당 건물이다. 사진=모종혁 |
1855년 에도 막부는 전국(戰國)시대 이래 홋카이도 남단에서 살았던 마쓰마에(松前) 가문의 영지 대부분을 직할령으로 삼았다. 이에 대한 보상을 지급했으나, 주요 경작지를 뺏긴 마쓰마에번(藩)의 불만은 컸다. 따라서 마쓰마에번 군대는 막부군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1869년 메이지(明治)유신으로 판적봉환(版籍奉還)이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으로 홋카이도라는 명칭을 쓰게 됐다. 본래 일본에서 도(道)라는 행정체계는 8세기 율령제(律令制)가 실시되었을 때부터 사용돼 온 것인데, 홋카이도만 ‘도(道)’로 남긴 것은 혼슈, 규슈, 시코쿠와 전혀 다른 새로운 북방 영토로 홋카이도를 설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삿포로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홋카이도개척사(開拓使)를 설치했다. 1871년 메이지 정부가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했지만, 홋카이도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런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니,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1840~1900년)이다. 기요타카는 1870년에 홋카이도개척사의 개척차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홋카이도를 어떻게 개발할지 찾기 위해서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기요타카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인의 대량 이주가 절실하다고 느꼈다. 이를 위해서 이주하는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했기에, 미국의 서부 개척 노하우와 기술을 전수받고자 했다. 따라서 미국 전문가를 초청하여 컨설팅을 받고 지식을 전수받았다.
미국 전문가는 홋카이도에 기계를 이용한 밭농사와 축산업이 적당하다고 조언했다. 또한 개척을 추진할 인재의 양성을 역설했다. 1872년 기요타카는 도쿄에 개척사 임시학교를 설립하여 학생을 모집하고, 졸업 후에는 의무적으로 홋카이도 개척에 종사토록 했다. 1875년에는 학교를 삿포로로 옮겼다. 이듬해에는 일본 최초로 학사학위를 수여하는 삿포로농학교로 확대해서 개편하는데, 오늘날 홋카이도대학의 전신(前身)이다.
일본 최초의 맥주 삿포로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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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 개척사맥주양조소. 지금은 지역 특산물 등을 파는 ‘삿포로팩토리’가 되어 있다. 사진=모종혁 |
이렇게 홉을 생산하면서 1876년 삿포로에 일본 최초의 맥주 양조장인 개척사맥주양조소(釀造所)를 설립했다. 사실 처음에는 개척사의 농업시험장이 있던 도쿄에서 맥주를 생산하려고 했다. 하지만 건설 책임자였던 무라하시 히사나리(村橋久成·1842~1892년)가 반대했다. 히사나리는 삿포로 건설을 위해서 토지를 측량하고 도로와 가옥을 만드는 데 종사했기에 삿포로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 또한 도쿄는 맥주 생산을 위한 기반 환경이 부적합하다고 여겨 건의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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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 맥주 양조장의 초기 모습. 사진=모종혁 |
1877년 일본 최초의 맥주인 냉제(冷製) 삿포로맥주가 출시됐다. 냉제는 품질 유지를 위해서 맥주를 얼음과 함께 이송하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삿포로맥주의 병 라벨에는 북극성을 그렸는데, 홋카이도개척사의 문양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을 훗날 보리 위의 북극성으로 조정해서 ‘아카(赤)’라는 애칭이 붙었다.
삿포로맥주는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맥주를 맛본 일본인을 중심으로 차츰 대중화됐다. 1887년에는 오쿠라(大倉)가 개척사맥주양조소를 양도받아 민영화하여 지금의 삿포로맥주회사를 설립했다.
후라노의 라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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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맥주박물관에 가면 맥주를 골라서 시음할 수 있다. 사진=모종혁 |
라벤더는 일본에서는 주로 홋카이도에서 자란다. 라벤더가 유명해지게 된 것은 후라노(富良野)시의 한 라벤더 농장에서 비롯됐다. 1937년 화장품의 향료로 라벤더가 주목받으면서 프랑스에서 씨를 수입해 일본 각지에서 재배를 시도했다. 1940년에는 삿포로에서, 1953년에는 후라노에서 재배했다.
1903년 후라노에 정착해서 땅을 개간했던 도미타 도쿠미(富田德馬)는 1958년부터 라벤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규모가 계속 늘어나서 1970년 후라노에서는 250가구나 라벤더 재배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1972년에 인공 향료 기술의 발전과 저렴한 외국 향료 수입으로 후라노의 라벤더 농가는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특히 향료회사의 구매가 중단되어 존폐 위기까지 몰렸다. 그런데 1976년에 JR의 캘린더 사진작가가 도쿠미의 팜 도미타(ファ-ム富田)에 와서 사진을 찍어 전국적으로 소개했다.
그 뒤 홋카이도에서 후라노의 라벤더 농장은 반드시 방문해야 할 성지로 떠올랐다. 1980년에는 라벤더 오일의 추출에 성공하여 향수를 생산하면서 후라노의 라벤더는 전성기를 누렸다.
닌구르 테라스
필자가 후라노를 찾은 4월은 라벤더가 꽃피는 시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곳곳에 널려 있는 라벤더 농장을 보면서 그 위상과 아름다움을 체감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후라노는 라벤더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행객을 위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만들었고, 새로운 지역 산업을 계속 발굴해서 개발했다.
볼거리는 닌구르 테라스(ニングルテラス)가 대표적이다. 신후라노 프린스호텔에서 운영하는 15채의 통나무집 상점이다. 각 통나무집마다 홋카이도와 후라노의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다양한 수공예품을 판매한다. 닌구르는 1977년 후라노로 이주하여 살아온 소설가 구라모토 소(倉本聰)의 작품 《닌구르》에 등장하는 요정이다. 홋카이도의 숲에 살고 있는 작은 요정으로, ‘숲의 지혜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닌구르 테라스는 눈이 내리는 겨울에 가면 환상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닌구르 테라스에서 걸어서 25분 거리에는 후라노 치즈공방이 자리 잡고 있다. 치즈공방은 1983년부터 후라노 각 곳의 젖소 농가에서 갓 짜낸 우유를 운반해서 치즈를 제조해 왔다. 우유 살균, 우유 가열 및 유산균 첨가, 우유 단백질의 절단과 수축, 유청 배출, 우유 단백질의 반전 수축, 우유 단백질의 파쇄와 와인 절임, 소금 첨가, 치즈 포장, 치즈 압착, 치즈 숙성 등의 과정을 거친다. 영국의 체다(Cheddar) 치즈 방식을 채용해 치즈가 단단하고 맛이 강한 편이다.
체다의 풍미와 와인의 향기가 결합
특히 숙성고에서 4개월 동안 숙성되면서 체다의 풍미와 와인의 향기가 깊이 스며들어 맛있어진다. 이런 치즈는 공방의 1층에서 제조되는데, 일부 과정을 창밖에서 참관할 수 있다. 2층은 시식, 판매, 전시, 체험 등 코너로 나뉘어 있다. 시식 코너에서는 후라노 치즈공방이 제조하는 모든 치즈를 맛볼 수 있다. 전시 코너는 치즈의 발전 역사와 제조 과정을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 소개한다. 체험 코너에서는 여행객이 사전에 신청하면 치즈를 직접 제조해 볼 수 있다. 물론 본인이 만든 치즈는 가져간다.
후라노 치즈공방에서 생산되는 치즈의 가장 큰 특징은 우유 단백질의 파쇄와 와인 절임 과정에서 후라노산 와인을 넣는다는 점이다. 이는 정통 체다 치즈와 구분되는 차별점이다.
사실 필자가 후라노에 도착해서 처음 방문한 곳은 후라노 와이너리(富良野ワイン工場)이었다. 아사히카와(旭川)에서 보통열차를 타고 출발하여 가쿠덴(學田)에서 내려서 걸어갔다. 다른 교통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30분 동안 산까지 타면서 힘들었지만, 그 덕분에 와이너리에 제공되는 포도를 재배하는 포도밭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라벤더 농장도 볼 수 있었다.
후라노市가 경영하는 와이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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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라노 와이너리의 고급 포도주 저장고. 사진=모종혁 |
당시만 해도 후라노에는 야생 산포도를 제외하고 포도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라노시는 와인의 본고장인 프랑스와 비슷한 후라노의 기후 풍토에 주목했다. 게다가 계속된 개간으로 1만 헥타르의 농지를 확보했다.
당시 라벤더가 계속 재배되었으나, 상황은 악화하고 있었다. 따라서 후라노시는 경사지나 돌 섞인 토지에 적합한 작물로 포도를 선택했다. 이에 따라 자본금으로 500만엔을 출자하여 연구소를 열었고, 일본에서 포도 재배와 와인 제조 전문가로 유명한 이와노 사다오(岩野貞雄)를 초빙하여 자문했다. 연구소는 다각적인 조사와 연구를 통해서 후라노에서는 레드 와인용으로 세이벨 13053이, 화이트 와인용으로 세이벨 5279가 적합하다고 결론 내렸다.
세이벨종은 수확량이 많고 병충해에 강한 강점이 있었다. 또한 연구소는 봄부터 가을까지 기온 차가 큰 후라노의 기후를 고려하여 단맛이 강한 포도 품종을 선택했다. 이를 위해 울타리를 기어오르는 포도나무를 재배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태양광선을 흡수하는 포도나무 잎의 면적이 시렁 방식보다 약 30%나 증가하는 이점이 있다. 이런 노력 끝에 12가구가 호응하여 세이벨종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에 발맞추어 연구소는 와인 제조에 박차를 가했다. 1974년 첫 와인을 생산했고, 이듬해 국민체육대회(國體) 동계 스키대회에 참가한 임원과 선수에게 제공해 호평 받았다. 사업성을 확신한 후라노시는 연구소를 확대하여 와이너리와 사무소를 건설했다. 이것이 1976년에 완공된 후라노 와이너리다. 이듬해에는 국제스키연맹이 공인한 월드컵을 후라노에 개최하면서 참가 임원과 선수를 대상으로 와인 시음회를 진행했다. 이렇게 차근차근 단계를 밟은 뒤 1978년에 ‘후라노 와인’을 정식으로 출시했다.
1980년에는 몬드 셀렉션이 주최한 제20회 월드 셀렉션에서 후라노 와인이 와인 부문 금상(金賞)을 수상했다. 전 세계에서 지자체의 공기업이 제조한 와인이 국제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후 후라노 와인의 지명도는 단박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후라노의 산포도와 세이벨 13053을 교배해서 새 포도 품종을 개발했고, 이를 담가서 ‘후라노 2호’를 제조했다. 후라노 2호는 통에 1년, 병에 1년을 숙성시킨다. 이렇게 후라노시는 포도 재배와 와인 사업을 통한 지역 산업의 진흥에 성공했다.
요이치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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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이치의 닛카증류소. 영국의 고성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진=모종혁 |
오전 10시 7분에 후라노에서 보통열차를 타고 출발, 1시간 5분을 달려 다키카와(瀧川)에 도착했다. 다키카와역에서 20분을 대기한 뒤 삿포로로 가는 특급열차를 탔다. 52분을 달려 도착한 삿포로역에서 나와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 다시 역으로 들어가 오타루(小樽)로 가는 에어포트를 탔다. 33분만에 도착한 오타루역에서 요이치로 향하는 보통열차를 바로 갈아탔다. 그렇게 해서 오후 2시 16분에 요이치역에 내려서, 일본의 양대 위스키회사 중 하나인 닛카(Nikka)위스키의 요이치증류소(余市蒸溜所)에 도착했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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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카증류소 내의 위스키 판매장. 왼쪽에 다케쓰루 마사타카와 리타의 사진이 보인다. 사진=모종혁 |
다케쓰루는 히로시마(廣島)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술을 빚는 주조(酒造)업에 종사했다. 아버지는 신념이 강하고 자신에게 엄격했다. 이런 가풍과 생활태도는 다케쓰루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에 따라 오사카(大阪)고등공업학교(현 오사카대 공학부)에서 양조학(釀造學)을 전공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서구에서 유입된 양주(洋酒)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다케쓰루는 당시 일본에서 양주로 유명했던 셋쓰주조(攝津酒造)에 입사했다. 다케쓰루는 입사 후 능력을 발휘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에 위스키를 만들고자 했던 사장의 눈에 들어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가게 됐다.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는 미국 버번 위스키의 모방품만 생산했을 뿐 정통 위스키 제조는 엄두도 못 냈다. 1918년 영국에 도착한 다케쓰루는 위스키의 본고장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대에서 유기화학을 전공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스코틀랜드의 여러 증류소에서 견습생으로 현장을 익혔다.
그곳에서 다케쓰루는 제시 로베르타 코완(애칭 ‘리타’)을 알게 되어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두 연인의 사랑은 리타 가족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어쩔 수 없이 두 연인은 1920년 1월 등기소에서 공무원이 증인을 서주는 가운데 외롭게 결혼했다. 같은해 11월 리타와 미국을 거쳐서 일본으로 귀국했으나, 역시 친가 가족이 반대했다. 그래서 분가하여 살게 됐다. 당시 일본은 경제 상황이 좋지 못했기에, 셋쓰주조는 위스키 제조 계획을 포기했다. 다케쓰루는 퇴사하고 고등학교 화학교사로 일했다.
산토리 위스키의 탄생
1923년 양주 판매업자인 도리이 신지로(鳥井信治郞·1879~1962년)가 정통 위스키를 제조하려는 회사를 세운 뒤 생산 책임자를 스코틀랜드에서 초빙하려 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에서 “일본에 적임자가 있다”면서 다케쓰루를 추천했다. 도리이는 이미 다케쓰루를 알고 있었기에, 찾아가서 파격적인 연봉을 제시하며 설득했다. 감복한 다케쓰루는 10년 계약으로 입사했는데, 이 회사가 오늘날의 산토리(Suntory)다. 이듬해 다케쓰루의 주도 아래 미시마군(三島郡)에 일본 위스키산업의 산 증인 격인 야마자키(山崎)증류소를 완공했다.
그러나 야마자키증류소에는 기술자가 소장인 다케쓰루밖에 없었다. 증류 시설도 열악했다. 결국 여러 어려움을 하나하나씩 극복한 끝에 1929년에 첫 위스키인 산토리 화이트를 출시했다.
당시까지 일본인에게 정통 스코틀랜드 위스키는 생소한 술이었다. 게다가 값도 비싸서 시장에서 판매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산토리는 맥주공장을 인수하면서 업종 다각화로 위기를 탈출하려고 했다. 맥주공장의 책임도 다케쓰루에게 맡겼다. 이러는 동안 도리이와 다케쓰루는 의견이 대립하면서 사이가 조금씩 벌어졌다.
도리이는 일본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대중적인 위스키를 원했으나, 다케쓰루는 정통 스카치 위스키를 추구했다. 결국 1934년 노동계약 기간이 끝난 다케쓰루가 퇴사하고 홋카이도 요이치정으로 이주해 자신의 증류소를 세웠다. 그 과정에서 사업가인 가가 마사타로(加賀正太郞)의 투자를 받아 지금의 닛카위스키인 대일본과즙(果汁)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닛카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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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이치 닛카증류소의 리타하우스. 리타는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다케쓰루 마사타카의 아내 이름이다. 사진=모종혁 |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에서는 저가의 질 나쁜 위스키가 판을 쳤다. 다케쓰루는 3류 위스키는 제조할 수 없다고 버텼다. 하지만 당장 생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회사 주주의 설득으로 저가 위스키를 개발해 출시했다. 이 과정에서 다케쓰루에게 큰 힘이 되어준 이는 아내 리타였다. 오직 다케쓰루만 믿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고 일본에 왔기에, 리타는 줄곧 남편을 격려했다. 이들의 깊은 부부애는 2014년 일본 NHK가 150부작 아침드라마 〈맛상(マッサン)〉으로 제작하여 방영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맛상은 리타가 다케쓰루를 부르는 애칭이었다. 〈맛상〉은 주 시청자인 주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덕분에 산토리에게 줄곧 밀렸던 닛카위스키의 판매량은 급증했다.
큰 힘이 되어준 아내 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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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닛카상’. 사진=모종혁 |
필자는 1시간 30분 동안 요이치증류소를 견학하고 닛카위스키를 시음하며 곳곳에 스며 있는 다케쓰루의 자취를 체감했다. 견학 시 가이드는 일본어로 설명했다. 하지만 참가자 중 필자와 대만인 가족이 있었기에, 경비가 줄곧 구간에 맞는 영어 설명문을 들고 다니며 이해를 도와주었다. 이날 필자는 처음 맛본 닛카위스키가 마음에 들어 싱글 몰트 요이치를 한 병 구입했다. 저녁에 삿포로에 돌아온 뒤 호텔에서 제공하는 얼음으로 온더락으로 마셨다. 다음날에는 호텔 식당에서 노징 글라스를 빌려서 니트로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