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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난파한 보수,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문화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이승만·박정희 넘어서 현대 일상 속 ‘보수의 가치’ 보여줘야

글 :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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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가진 자는 도덕적으로 타락’ 공식 제시
⊙ 미국 영화 〈포레스트 검프〉, 코믹물 〈고스트버스터즈〉,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 등에는 우파 가치 녹아 있어
⊙ 트럼프, 가족주의·개인주의 그리고 전통적인 남성성과 여성성 회복 등 보수 가치를 자연스럽게 전파
⊙ 좌파, 다양한 지점에서 가치 요소를 발생시키고 그들 하나하나를 선으로 연결해 하나의 세계관으로 만들어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문화계 ‘보수(保守)의 위기’론이 처음 적극적으로 제기된 건 노무현 정권 시절, 그러니까 벌써 20년도 넘은 얘기다. 그리고 이후 20여 년 동안 해당 문제는 딱히 해소된 일이 없다. 오히려 2010년대 들어서부터는 비판의 수위나 관련 보도의 빈도(頻度) 차원에서 한층 거세지고 있다는 인상이다. 2007년 5·18 소재 영화 〈화려한 휴가〉의 일대 흥행이 같은 해 제17대 대통령선거와 맞물리며 선거 판도의 변수로서 지목되자 이후 문화시장의 ‘이념 성향 불균형’ 문제에 한층 민감해진 셈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그럼 이 같은 문제는 언제부터 발생한 걸까? 일단 문화시장에서 좌파 성향 콘텐츠 유행이 시작된 건 문학계, 그중에서도 1978년 출간된 조세희의 중편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부터라 볼 만하다. 물론 그 전에도 주로 문학계에서 좌파 성향 콘텐츠는 적지 않았고, 심지어 일제시대부터도 사회주의에 경도(傾倒)된 문인들은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이후로도 몇몇 문인들의 좌편향 필화(筆禍) 사건이 시시때때로 일어났지만 대중 시장 차원에서 처음 충격을 준 건 역시 《난쏘공》이다.
 
  《난쏘공》은 출간 즉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켜 1980년대 내내 스테디셀러 자리를 지켰고, 2024년 2월까지 총 판매 부수 150만 부를 기록한 메가셀러다. 《난쏘공》은 사회 고발물 성격으로, 기업가 가정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가진 자’들 자체를 뚜렷한 ‘악(惡)의 근원’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좌파 성향 대중소설의 기본 틀을 제시했다는 평가다. ‘부유한 자는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공식의 등장이다.
 
  여기서부터 좌파 성향 콘텐츠 붐이 시작되고, 전두환 정권의 사회 문화 자유화 흐름을 타고 유행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문학계에선 같은 사회 고발물 성격에 ‘부유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다’ 공식으로 김홍신 소설 《인간시장》이 1981년 첫 권 출간 이후 3년 만에 100만 부 판매를 돌파했다. 이어 이적(利敵) 논란까지 일으킨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출간되며 현재까지 800만 부 넘게 팔려나간 ‘세기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영화계 역시 〈어둠의 자식들〉 〈바보선언〉 〈서울황제〉 〈칠수와 만수〉 등 수많은 영화들이 사회 고발물의 외양(外樣)으로 등장해 상당수가 흥행에도 성공하는 흐름이 이어졌다.
 
  그래도 한동안 이 모든 흐름은 일부의 반발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너그럽게 받아들여졌다. 1990년대 들어 빨치산 미화 논란을 일으킨 영화 〈남부군〉, 국군의 양민 사살 설정이 들어간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 5·18과 삼청교육대 등을 다룬 SBS 드라마 〈모래시계〉 등이 연속적으로 성공했어도 마찬가지다. 주류 문화에 뒤따를 수밖에 없는 반(反)문화 또는 대항(對抗)문화의 부상(浮上)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 좌편향 콘텐츠가 실질적 문화계 ‘대세’로서 자리 잡게 됐어도 마찬가지였다.
 
 
  문화에서 ‘보수의 가치’란
 
  문제는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를 통해 김대중에 의한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노무현 정권이 그 뒤를 이으면서부터다. 이미 좌파 성향 콘텐츠는 대중문화계의 ‘대세’가 된 지 오래고 이제 정권까지 연장돼 정치 사회 권력까지 좌파 진영이 장기간 쥐게 됐는데, 앞선 반문화·대항문화 개념에서 보수 콘텐츠는 성장은커녕 시장에서 사실상 사멸(死滅)되다시피 했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느낀 것이다. 다시 말해, 대중문화시장의 주류가 좌파 성향 콘텐츠가 된 것은 자유사회에서 대중의 욕망을 액면 그대로 반영하는 대중문화산업의 특성상 받아들일 수 있고, 또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 각국에서도 그런 경향이 여실히 드러나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에 대응하는 보수 성향 콘텐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세계 어느 시장에서도 발견하기 힘든 기현상(奇現象)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의문과 문제 제기가 시작돼 지금까지 무려 20여 년 걸쳐 같은 화두(話頭)가 반복되는 중이다. 문화계 ‘보수의 위기’론의 실체는 문화계에서 ‘보수가 약세’라는 위기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수의 실종’이라는 경악(驚愕)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영화계에선 ‘몇 년에 한 편’ 보수 성향 콘텐츠가 나오는 정도, TV드라마나 문학 등 다른 서사(敍事) 장르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이어진다. 시장에서 선택받는 콘텐츠는 그중에서도 또 소수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까? 좌파 문화세력의 관련 공적(公的) 단체 장악, 좌경(左傾) 상업주의에 경도된 시장 공급자들의 상혼(商魂), 젊은 층이 중심에 포진한 문화시장 소비자 구성에서 단순히 ‘보수=낡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젊은 층 풍토 등이 차례로 제시됐고 모두 일정 수준 영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의 극단적 상황을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는 의견이다.
 
  그럼 뭘까? 여기서부턴 보다 근원적인 부분을 재점검해 봐야 할 필요도 생긴다. 문화계 ‘보수의 위기’를 논하기 이전, 과연 ‘보수 문화 콘텐츠’란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다. 보수 콘텐츠란 결국 ‘보수의 가치’를 담고 있는 콘텐츠를 말할 텐데, 그럼 문화적 ‘보수의 가치’란 무엇을 말하느냐는 것. 단순 메시지 차원에서 ‘반공(反共)’과 ‘반북(反北)’이라는 기치(旗幟), 여기 추가돼 봤자 이승만(李承晩)·박정희(朴正熙) 대통령 등 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긍정적 시각 정도 외에, ‘보수의 가치’로서 두루 공감할 수 있는 문화적 요소들은 무엇이냐는 의문이다.
 
  거기다 이 모든 것은 엄밀히 ‘소재’ 차원이다. 6·25전쟁이나 각종 대북(對北) 충돌 및 갈등,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시절 등이 소재와 배경으로 선택됐을 때만 작동한다는 얘기다. 문화 콘텐츠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현대 배경의 일상’ 설정에서 담을 수 있는 문화적 ‘보수의 가치’란 무엇인지의 문제는 해소되지 않는다. ‘가진 자’들이 무조건 악하게 그려지지 않고, 반대로 ‘못 가진 자’들이 무조건 선하게 그려지지 않으면 그것은 ‘보수의 가치’에 준하는 설정일까? 이른바 ‘정상(正常)가족 이데올로기’에 따른 가족 구성만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면 그것은 또 과연 ‘보수의 가치’에 준하는 설정이 맞을까 말이다. 누구도 이렇다 할 답을 내리기 힘들다.
 
 
  ‘보수주의자는 배금주의자의 노예’라는 상징 조작
 
  이처럼 문화계 ‘보수의 위기’론은 시장에 온통 좌편향 콘텐츠밖에 없다는 비판 이전에, 그럼 그에 대응하는 우파 보수 콘텐츠란 무엇인지부터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하기조차 힘들다는 게 진정한 핵심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보수의 가치’에 대한 흐릿한 제시들이 작동한다.
 
  이 부분은 생각보다 상당히 중요하다. 좌파 성향 콘텐츠의 면면들을 잘 관찰해 보면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좌파 성향 콘텐츠는 단순히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문화정책 노선, 즉 ‘즈다노프 교리’ 기반의 문화이론으로 점철(點綴)돼 있는 형태가 아니다. 계급투쟁과 노동운동만 주야장천 부르짖는 모습은 아니라는 얘기다. 여기에 신(新)좌파가 내세우는 반(反)권위주의, 반(反)제국주의, 다문화주의, 소수자 권리, 성(性)문화 해방, 여성주의, 생태주의, 교육 평준화 등 다양한 지점의 주의주장들이 함께 어우러져 소화된다. 이렇듯 다양한 지점에서 가치 요소를 발생시키고 그들 하나하나를 선(線)으로 연결해 하나의 세계관으로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관 속으로 대중을 끌어들여 선으로 연결된 하나의 가치관을 형성시키는 게 좌파 성향 문화 콘텐츠의 위력이다.
 
 
  좌파 콘텐츠가 주입하는 보수像이 더 치명적
 
  물론 ‘보수의 접근과 방식은 다르다’는 입장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지점을 오래 방치하다 보니 다수의 대중은 저 ‘보수의 가치’ 부분을 좌파 성향 콘텐츠에서 그려지는 보수주의자 모델을 통해서만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 보다 치명적이다. 소위 ‘가진 자’들을 악(惡)으로 모는 극단적 대립 설정을 제외하고도 그렇다.
 
  예컨대 2000년작 미국 영화 〈패밀리 맨〉에 등장하는 성공한 월스트리트 투자자 잭 캠벨(니콜라스 케이지 扮)은 크리스마스에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가족 및 지인 등과 시간을 보내지 않고 일에만 몰두한다. 그런 그에게 투자회사 사장은 “자네야말로 자본주의의 총아(寵兒)”라 칭찬한다. 이처럼 가족 가치 등 인본주의(人本主義) 부분을 상실한 배금주의(拜金主義)의 노예가 곧 보수주의자라는 인상 조작이 일반 대중, 즉 애초 좌파 성향인 대중은 물론 일부 우파 성향 대중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2010년대 들어 다양한 우파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들에서 배금주의 기조를 당연시하고 그에 제동을 걸면 고리타분하게 이상(理想)을 부르짖는다며 폄하하는 분위기가 연출돼 온 것도 이처럼 ‘보수의 가치’를 우파–보수가 아닌 좌파–리버럴 콘텐츠를 통해 익혀온 탓이 크다.
 
  한국의 보수 언론이나 각종 보수 단체 등에서 다양한 문화적 ‘보수의 가치’들을 특별히 제시해 오지 않은 탓에, 또 ‘보수의 가치’ 지점을 역설(力說)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지지하고 최소 이런 것이 보수주의 콘텐츠라 홍보해 주지도 못한 탓에, 반대로 좌파 성향 콘텐츠가 보여주는 보수주의자 모델을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보수주의 영화의 걸작 〈포레스트 검프〉
 
〈포레스트 검프〉
  이에 같은 지점을 오랜 기간 고민하고 분석해 온 미국에서 ‘보수의 가치’를 담았다고 평가되는 영화들을 통해 한번 상황을 재점검해 보자. 물론 한국 실정과 맞지 않는 부분도 일부 지적될 수 있겠지만, 이처럼 다양한 지점들에서 ‘보수의 가치’를 찾아내 하나의 세계관을 제시해 줄 수 있다는 점 정도는 충분히 참고해 볼 만하다. 꼽아본 5편의 영화는 미국의 권위 있는 보수 주간지 《내셔널 리뷰》에서 2009년 선정한 ‘최고의 보수주의 영화 25편’을 비롯, 다양한 언론 미디어에서 제시한 보수주의 영화 걸작들 중 한국 대중 입장에서 가장 의외라 여겨질 수 있는 경우들을 택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1994년작 〈포레스트 검프〉는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며 한국에서도 크게 히트했다. 위 《내셔널 리뷰》의 ‘최고의 보수주의 영화 25편’은 물론 거의 모든 언론 미디어의 보수주의 영화 걸작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간다. 경계선 지능을 가진 한 소년이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바라본 미국 사회 풍경과 그 속에서 벌어진 개인적 일화들을 담았다. 그 기간 동안 주인공 포레스트(톰 행크스 扮)는 오직 빠르게 달릴 줄 안다는 재주 하나로 대학에 들어가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한 뒤 사업가로 성공한다. 와중에 소꿉친구 제니(로빈 라이트 扮)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대학 진학 후 1960년대 신좌파 운동에 휩쓸려 각종 과격단체 및 히피들과 함께 혼란스럽게 살아가지만, 포레스트는 그런 그녀의 곁에 서서 아무런 대가 없이 그녀를 보듬는다.
 
  포레스트는 미국적 보수 가치의 총체와도 같다고 평가된다. 타고난 한계에도 불구,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은 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 선명한 애국심으로 고민 없이 전쟁에 참여한 애국자이면서,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실성과 긍정적 자세로 성공을 거둔 사업가이기도 하다. 또 무엇보다 가족을 사랑하며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의 믿음에 보답한다. 그런 인물이 1960~70년대 미국의 사회문화적 격동기 동안 가치관 혼란 속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보수 가치의 책임감 있고 따뜻한 품으로 받아들인다는 주제다.
 
 
  〈허트 로커〉, 反戰 영화 아닌 보수 영화
 
〈허트 로커〉
  2009년 나온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허트 로커〉 역시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다. 이라크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미군 폭발물제거반을 다뤘다. 영화를 감상한 이들은 왜 이 영화가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지 의아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반전(反戰) 영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전쟁의 광기(狂氣)에 노출되면서 특유의 긴장감에 중독돼 귀향 후에도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전장(戰場)으로 되돌아가는 병사의 비극을 다뤘다. 그렇게 전쟁은 인간성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할리우드 영화의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는 “모든 전쟁영화는 결국 반전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전쟁을 다룬 영화는 무릇 승리의 영광뿐 아니라 그에 따른 희생도 보여주게 되고, 그 외에 민간인들이 겪는 갖가지 참상(慘狀)들도 함께 묘사되므로, 영화를 보고 난 뒤 ‘전쟁이란 흥분되고 멋진 것’이라 생각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그럼 신좌파 반전주의 사상에서 나온 콘텐츠와는 어떻게 구분되는 걸까? 단순하다. 신좌파 견지에서 반전 영화는 그 전쟁을 통해 국가와 개인이 얻고 지킨 것이 아무것도 없거나, 있어도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비관주의로 치닫는다. 속되게 말하면 적군이든 아군이든 희생된 모두가 ‘개죽음’이었다는 식이다. 〈허트 로커〉는 그런 식의 비관주의나 허무주의, 냉소주의를 내세운 영화가 아니다. 아군을 가해자로, 적군은 피해자로 그리며 자국인 미국을 비판하는 종류도 아니다. 그 정도만 해도 일단 보수 가치에 준하는 전쟁영화로 충분히 분류될 만하다는 관점이다.
 
 
  레이건 자유주의 메시지 담은 〈고스트버스터즈〉
 
〈고스트버스터즈〉
  1984년 아이반 라이트먼 감독의 〈고스트버스터즈〉는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어 현(現) 중장년층에서 많이들 기억하는 클래식 엔터테인먼트다. 뉴욕에서 유령 소동이 빈번히 일어나자 일련의 과학자들이 유령 퇴치 전문 업체를 만들어 활약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가 보수 가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할 수 있지만,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미국 환경보호국(EPA) 직원 캐릭터가 반면교사 역할을 맡는다. 해당 인물은 저 유령 퇴치 전문 업체 ‘고스트버스터즈’를 찾아와 환경 훼손이 의심된다며 운영을 중단하라 요구하고, 거절당하자 영장(令狀)을 가져와 회사를 폐쇄시키며 잡아놓은 유령들의 보관 장치 스위치까지 내려버리는 통에 풀려나온 유령들로 온 뉴욕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민간에서 필요가 발생해 민간이 알아서 관련 업체를 꾸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민간만큼 사정을 알지 못하는 공적(公的) 개념에서 이에 개입해 자유로운 비즈니스에 규제를 가하려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다분히 우파 리버태리언(libertarian)적인 메시지이며, 영화 속 작은 에피소드임에도 레이건 행정부 시절 정책 기조와 맞아떨어져 깊은 인상을 남긴 덕에 대표적 보수주의 영화로도 꼽히게 됐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유명한 코멘트, “영어에서 가장 끔찍스런 아홉 단어는 ‘I’m from the government and I’m here to help(당신을 돕기 위해 정부에서 나왔습니다)’이다”를 떠올려보면 쉽게 짐작이 간다.
 
  2007년 나온 영화 〈주노〉의 감독인 제이슨 라이트먼은 바로 〈고스트버스터즈〉의 아이반 라이트먼의 아들이다.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주노〉는 한 10대 고등학생 소녀가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임신을 하게 되는데, 둘이 키울 능력은 안 되지만 그렇다고 낙태(落胎)를 할 수는 없다는 판단으로 신문에 광고를 내서 아이를 원하는 불임(不姙) 부부를 찾아 아기를 낳은 후 그들에게 건네줄 계획을 세운다는 줄거리다.
 
  10대 임신과 같은 도발적인 설정을 담고 있어 왜 이런 내용이 보수 가치와 연결되는지 궁금할 수 있지만, 그만큼 미국 보수 진영은 ‘생명 존중(pro–life)’ 어젠다에 큰 힘을 실어주며 낙태를 금기시하는 기조로 가고 있다는 뜻이 된다. 굳이 10대를 대상으로 삼은 건 자극적 소재로 상업적 노선을 타려는 듯도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태하려 하지는 않는 ‘생명 존중’ 선택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자유주의 메시지 담은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
 
〈인크레더블〉
  〈인크레더블〉은 2004년 브래드 버드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다. 초능력을 지닌 슈퍼히어로들로 구성된 어느 가족을 중심으로, 너무나도 큰 힘과 능력을 지녀 일반 대중으로부터 공포와 우려를 사는 통에 정부가 이들의 초능력을 규제하고 신분을 숨긴 채 일반시민으로 살아가도록 강제하는 상황을 다룬다. 뛰어난 조건이나 능력을 지닌 이들을 시기하거나 두려워해 그들을 공적 규제로 억압할 생각 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이 자기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자유를 줘야 그 수혜를 모두가 나눠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매우 노골적인 우파 리버태리언 메시지다. 미국 소설가 아인 랜드(Ayn Rand)의 《아틀라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유소년층 타깃의 콘텐츠가 이렇게 노골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는 건가 싶지만, 의외로 미국 애니메이션의 경우 리버태리언적 메시지를 담는 경우가 꽤 많다. 또 다른 CG(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 〈레고 무비〉만 해도 좌파 특유의 설계주의 사상을 맹렬히 비판하며 리버태리언적 자유 메시지를 역설한 바 있다.
 
  이 밖에도 많다. 자유가 제한된 대신 안락과 유복(裕福)이 보장된 삶보다, 철저히 자유의지에 따른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메시지의 SF영화 〈컨트롤러〉, 담배 회사 로비스트를 주인공으로 흡연이 아무리 건강에 해롭더라도 공적 개념이 그것을 규제해선 안 되며 그것을 즐길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땡큐 포 스모킹〉, 세상에서 맞닥뜨리는 진정한 악당은 선한 의도로 포장된 이상주의적 전체주의자임을 역설하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등등, 수도 없다.
 
  중요한 점은, 이렇듯 다양한 ‘보수의 가치’들을 일정 부분이나마 반영한 영화들에 보수 언론 미디어가 하나하나 반응해, 앞선 《내셔널 리뷰》의 ‘최고의 보수주의 영화 25편’처럼 기사로까지 소화해 홍보하며 대중에 알리고 있다는 부분이다. 그렇게 미국적 보수 가치들은 하나의 세계관을 이루게 되고, 그 세계관과 좌파–리버럴 세계관을 비교해 보며 진정으로 자신이 공감하는 쪽을 구분하게도 된다. 최소한도 좌파 성향 콘텐츠가 제시하는 왜곡된 보수주의자 모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게 된다.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다.
 
 
  트럼프, ‘문화전쟁’에서 승리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정치계는 한창 ‘문화전쟁’에 돌입해 있는 국면이다. 2024년 11월 5일 치러진 미국 대통령선거도 한 예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대승으로 끝난 이 선거 결과의 원인 분석은 다양하다. 일단 조 바이든 민주당 정권의 수많은 정책 실패들, 특히 인플레이션 대처 실패와 극단적으로 악화된 치안 문제,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대외 전쟁 지원이 회의감을 불러일으킨 점 등에 책임론을 피해 갈 수 없었다는 논리 등이 주로 거론된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측면도 크게 강조된다. 이 모든 정책들에서 일일이 실패하면서 바이든 정권은 4년 내내 오직 ‘문화전쟁’에만 몰두해 왔다는 것이다.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주의를 근거 삼은 수많은 전선(戰線)들이 한없이 펼쳐지며 대중의 피로와 염증을 가중시키고 여기서 비롯된 이른바 ‘정체성(正體性) 정치’ 개념 역시 분열과 갈등만 양상하며 모두를 지치게 했다는 것이다. 반면 트럼프 후보는 문화적 차원에서 ‘보수의 가치’를 상당히 여유 있고 자연스럽게, 또 적절한 창구를 통해 피력해 왔다는 분석이다.
 

  트럼프는 미국적 보수 가치의 핵심인 가족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전통적인 남성성과 여성성 회복 등의 테마를 남초(男超) 온라인 커뮤니티에 해당하는 ‘매노스피어(Manosphere)’를 통해 전달하며 인종을 초월한 다양한 남성층에 어필해 왔다는 것이다. 그저 UFO의 존재나 영화 〈양들의 침묵〉의 연쇄살인마 캐릭터 한니발 렉터, 종합격투기(UFC) 같은 가벼운 소재들로 대화를 풀어나가도 그 안에서 ‘보수의 가치’들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와 미국의 ‘이대남’들을 열광시켰다는 보도다. 반면, 해리스 측은 기존 PC주의 기반 ‘문화전쟁’ 요소들이 선거가 다가올수록 중도층 유권자들에 반발을 일으키며 불리한 양상을 드러내자 오로지 트럼프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전략으로 일관하며 미래 비전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는 분석이 많다.
 
 
  미국 보수, 수십년간 ‘문화전쟁’ 경험 쌓아
 
  흔히 “한국에서 공직 선거와 직결되지 않는 사회문화운동은 힘을 얻지 못한다”고들 한다. 이미 7~8년 전부터 일기 시작해 이제 공직 선거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한 젠더 갈등 등의 지점이 엄밀히 ‘문화전쟁’의 일부이며, 그들 하나하나는 각자 외따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들을 연결한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작동한다는 점을 알아차리기 힘들어 그렇다. 그렇게 다시 문화계 ‘보수의 위기’론만 20여 년째 이어지고, 이 모든 건 문화계가 좌파 천지여서 그렇다는 한탄만 반복된다. 어떤 의미에선 이처럼 ‘문화전쟁’ 한복판에 이미 들어서 있으면서도 그것이 문화의 문제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 진정한 문화계 ‘보수의 위기’일 수도 있겠다.
 
  끝으로, ‘보수적 가정(家庭)’이라 했을 때 가부장제, 남존여비(男尊女卑), 잘해 봤자 ‘엄격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정도나 떠올리며 몸서리치는 한국의 젊은 대중에게, 앞선 〈포레스트 검프〉는 ‘다른 아버지’를 보여준다. 자녀에게 다정하니 엄격하니 하는 태도 문제는 각 가정이 알아서 택할 문제이고, 가치 차원에서 ‘보수 가치에 준하는 아버지’는 자녀를 포함해 자기 가정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가리킨다는 점을 말이다. 그리고 자녀 양육의 궁극적 목표는 그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녀의 자립(自立)과 독립이라는 점도 함께 짚는다. 미국 보수 진영은 이 문화 지점을 놓고 처음 신좌파 문화와 충돌이 일어난 1960년대 후반부터 수십 년 논의를 거치며 차근히 형태를 쌓아나갔다. 한국도 최소 ‘보수 문화’를 결정짓는 문화적 ‘보수의 가치’ 부분을 진지하게 논의라도 시작해 봐야 할 시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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