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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재상 열전 〈마지막 회〉 숙종 때 10번 이상 재상에 오른 최석정(崔錫鼎)

숙종에게 중용됐던 소론의 거두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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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명길 손자, 남구만과 박세채의 제자로 소론의 거두
⊙ 관료 생활 초기부터 숙종의 총애받아
⊙ “전도되고 망령된 일이 많았으며, 명분과 의리를 함부로 전도시켰다”(노론)
⊙ “당론을 타파하고 인재를 수습”(소론)
⊙ 《구수략(九數略)》 짓는 등 수학에 통달했던 르네상스적 인간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최석정
  최석정(崔錫鼎·1646~1715년)은 인조 때 정승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1586~1647년)의 손자다. 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가 묘사한 어린 시절 최석정의 모습이다.
 
  〈성품이 청명(淸明)하고 기상(氣像)이 화락(和樂)하고 단아(端雅)했으며 총명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어려서 남구만(南九萬)과 박세채(朴世采)를 따라 배웠는데, 이치를 분별하여 깨달아 12세에 이미 《주역(周易)》에 통달하여 손으로 그려서 도면을 만드니, 세상에서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남구만(南九萬·1629~1711년)은 1684년 회니(懷尼) 논쟁 당시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질 때 송시열(宋時烈)의 노론에 맞서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소론은 남인(南人)에 대해 좀 더 유화적이고 근왕(勤王)의식이 노론보다 강했다. 이것은 이미 최명길이 보여주었던 모습과도 통한다. 젊은 시절 최명길도 《주역(周易)》에 통달했다.
 
  박세채(朴世采·1631~1695년)도 회니 논쟁 때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지어 노론과 소론을 중재하려 했으나 끝내 소론의 편에 섰다. 이후 소론 윤증(尹拯·1629~1713년)을 옹호했다.
 
  회니 논쟁은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도 하는데 송시열과 윤증 간의 불화를 말한다. ‘회니’는 송시열이 회덕(懷德)에 살았고 윤증이 이성(尼城)에 살았기에 붙은 명칭이다. 송시열과 윤증은 원래 사제지간이었으나 현종 14년(1673년)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문(墓碣文)을 송시열에게 청하면서 박세채가 지은 행장(行狀)과 윤선거가 생전에 송시열에게 충고하기 위해 써놓은 편지를 함께 보냈는데 송시열은 그 편지를 못마땅하게 여겨 윤선거의 묘갈문을 지으면서 박세채가 지은 행장에다가 글자 몇 개만 살짝 수정하고 끝내 새로 짓지 않았다.
 
  숙종 6년(1680년) 남인의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자 윤증이 이런 개인감정과 함께 송시열의 덕행과 학문을 비난하면서 사제 관계를 끊었다. 이후 남인에 대한 처벌을 두고서 서인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자 윤증은 온건파인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강경파인 송시열의 노론과 불꽃 튀는 싸움을 전개했다.
 
  최석정은 이런 두 스승의 노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소론의 정치관을 갖게 됐다.
 
 
  벼슬길에 들어서다
 
회니논쟁을 벌인 송시열(왼쪽)과 윤증.
  최석정은 현종 12년(1671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4년 후인 숙종 1년(1675년) 홍문록(弘文錄)에 이름을 올렸다. 초급 관리로서 엘리트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숙종 초는 허적(許積·1610~ 1680년)의 남인 정권 시절이었다. 당시 최석정은 서인이었지만 초급 관리였기에 그런대로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해 숙종 6년 4월 13일 홍문관 정4품 응교(應敎)에 임명되고 넉 달 후인 윤(閏) 8월 21일에는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숙종의 각별한 총애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후 숙종 10년까지 줄곧 승정원에서 일하던 최석정은 7월 16일 성균관 정3품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됐다가 두 달 후인 9월에는 홍문관 부제학으로 옮긴다. 이를 보면 이때까지 최석정은 이재(吏才)보다는 학재(學才)를 인정받아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음을 알 수 있다.
 

  숙종 11년(1685년) 2월 9일 홍문관 부제학 최석정은 스승 윤증을 옹호하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을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소론의 논객으로 노론의 수장을 직격한 것이다. 이에 최석정은 파직당했다.
 
  6월 3일에는 좌의정 남구만과 이조판서 여성제(呂聖齊)가 연이어 최석정의 문학(文學)이 뛰어나니 다시 임용할 것을 청했으나 숙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특히 남구만은 숙종이 곧 《주역》을 강론해야 하니 최석정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해 10월 부제학으로 돌아오고 바로 다음 달 ‘특별 승진’해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숙종의 신임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숙종의 신임받아 출세 가도 달려
 
  2년 후인 숙종 13년(1687년) 9월 24일 최석정은 도승지에 제배(除拜)된다. 하지만 한 달도 안 돼 대사성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다시 부제학을 맡는다. 그러고 그해 10월 20일 이조참판에 제배된다. 이러다 두 달 후인 숙종 15년 1월 9일 홍문관 종2품 제학으로 자리를 옮긴다. 숙종 22년(1696년)에는 이조참판을 겸임했고 같은 해 특승(特陞·특진)하여 판윤에 이르고 다시 엿새 후에는 대사헌에 임명된다. 통상적인 관례대로라면 이미 대사간이나 대사헌을 지냈어야 하는데 뒤늦게 대사헌에 제수된 셈이다.
 
  숙종 22년 4월 28일 최석정은 이조판서에 제수된다. 이때 최석정은 대제학이었는데 임금이 직접 교서(敎書)를 지었다. 문장가로서 그의 실력이 당대 최고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를 문형(文衡)이라고 한다.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최석정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 관철시켰다. 이런 점을 높이 산 숙종은 재위 23년(1697년) 3월 12일 최석정을 우의정에 제수한다. 같은 날 윤증은 이조판서에 제수된다. 노론이 편찬한 《숙종실록》은 이 일에 대해 “최석정은 천박하여 정승의 그릇이 아니어서 중외(中外·조정 안팎)에서 실망하였다”고 적고 있다. 같은 날 최석정은 주청정사(奏請正使), 최규서(崔奎瑞)는 부사, 송상기(宋相琦)는 서장관에 임명되었다.
 
  최규서는 같은 소론으로 한때 최석정이 파직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는 등 일관되게 최석정과 노선을 함께한 인물이다. 송상기는 노론으로 부수찬 시절 장희빈의 어머니가 가마를 탄 채 대궐에 출입한 것을 두고 가마를 불태워야 한다고 청했다가 파직된 경력이 있을 만큼 강직한 인물이다.
 
  이번 사신의 임무는 청나라로부터 세자 책봉의 승인을 받아내는 중대한 것이었다. 당사자는 훗날의 경종(景宗·1688~1724년). 이때 나이 10세로 국내적으로는 세자로 사실상 책봉받았으나 청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아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국내 책봉 과정에서 서인들은 격렬하게 반대했고 송시열은 이 와중 사약까지 받았다. 즉 이들 모두의 정치적 미래가 이 사신단의 임무 성공 여부에 달려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앞에 두고 최석정을 정사로 하는 세자 책봉 승인을 위한 주청사는 같은 해 윤 3월 29일 도성을 출발했다.
 
  청나라는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근거로 삼아 세자 책봉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최석정은 같은 《대명회전》을 근거로 그것은 중국의 예식과 관계된 것으로 조선과 같은 외번(外藩)은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지를 펼쳐 책봉을 실현했다.
 
  9월 6일 주청사 최석정이 돌아와 숙종에게 복명(復命)했다. 숙종은 크게 기뻐했다.
 
 
  좌의정이 되어 민생 관련 건의
 
소론을 이끌었던 남구만(왼쪽)과 박세채.
  그러나 이것도 잠시일 뿐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과실이 발생, 숙종 24년(1698년) 5월 28일 최석정은 우의정에서 파직된다. 하지만 이러고 얼마 뒤 판중추에 오른다. 중추부 판사는 잠재적인 좌의정 후보군으로, 10월 29일 숙종은 특별히 유시(諭示)를 내려 이렇게 말한다.
 
  “일전에 봉사(奉使·사신 받드는 일)는 비록 착오가 있었으나 본래 다른 뜻은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내가 어찌 가슴에 품고 있겠으며, 경(卿)은 어찌 깊이 스스로 허물을 인책(引責)해야 하겠는가? 가슴에 품고 있다면 이는 임금의 아량이 못 되며, 깊이 허물을 인책한다면 이는 마음을 알아주는 도리가 아니다. 이 두 가지에 따라 경의 거취(去就)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나라에 큰 예(禮)가 있고 바야흐로 도제조(都提調)의 임무를 띠고 있으니 더욱 물러날 수가 없는 것이다.”
 
  최석정은 소를 올려 사양했으나 숙종은 재차 출사(出仕)할 것을 권했다. 이때 최석정은 봉릉도감 도제조(封陵都監 都提調)를 맡고 있었기에 숙종이 이런 말을 덧붙인 것이다.
 
  숙종 25년(1699년) 3월 13일 숙종은 최석정을 좌의정에 제배했다. 관례에 따라 최석정은 다섯 차례 글을 올려 사양했으나 마침내 4월 4일 제배의 명을 따라 좌의정에 오른다. 좌의정으로서 처음 한 일은 과거 시관을 맡아야 할 대제학과 제학이 모두 자리를 비워 홍문관 제학 박세당(朴世堂·1629~1703년)으로 하여금 그 일을 대신 맡도록 청한 것이다. 과거 시관을 주문인(主文人)이라고 했다.
 
  박세당은 관리보다는 학문으로 이름이 있었고 대체로 박세채, 남구만, 최석정 등과 가까웠다. 최석정은 자리나 지키는 구신(具臣)이 아니었기에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한 달에 두세 건씩 다양한 건의를 올렸는데 대개 민생과 관련한 것이었다. 또 당색이 소론이다 보니 노론과 남인의 중간에 서서 당쟁을 조정하는 일에도 힘썼다.
 
  좌의정으로서 대제학을 겸하며 《국조보감(國朝寶鑑)》 속편과 《여지승람》 증보를 건의해 관철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자리 또한 석 달도 넘기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이봉징의 상소
 
  숙종 27년(1701년) 6월 19일 최석정은 영의정에 제배된다. 그러나 좌의정 때와 마찬가지로 이 자리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숙종 27년 8월 14일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복상(服喪) 기간 중이던 8월 27일 남인인 행(行)부사직 이봉징이 대단히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는 상소를 올렸다. 장희빈의 경우 6년간 왕비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후궁과는 복제가 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름 일리가 있는 견해이기는 했다. 또한 남인들로서는 민씨의 죽음이 어쩌면 장희빈의 복위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이봉징이 남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조참판을 거쳐 행부사직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숙종이 제한적인 남인 포용 정책을 쓴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숙종 또한 이봉징의 상소를 그저 복제 문제에 관한 일리 있는 건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서인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9월 2일 영의정 최석정이 나서 문제를 제기했고 숙종도 “이봉징의 상소는 나도 옳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고 답한다. 다음 날 숙종은 이봉징을 삭탈관작하고 극변으로 유배를 보낸다.
 
  이후 한동안 잠잠하다 20여 일이 지난 9월 23일 숙종은 죽은 왕비를 무고했다는 이유로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1701년)를 처형하라는 비망기(備忘記)를 전격적으로 내린다. 사실 무고의 장본인은 장희재가 아니라 장희빈이었다. 장희빈은 틈만 나면 취선당 서쪽에 몰래 신당을 설치하고 민씨가 죽기를 기도했었다.
 
  밀고자는 다름 아닌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였다. 최씨는 갑술환국이 있던 1694년 9월 훗날의 영조가 되는 왕자를 출산했다. 최씨는 민씨의 사람이었다. 실록은 “숙빈 최씨가 평상시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잊지 못하고 원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임금에게 몰래 고했다”고 적고 있다. 물론 그 이상의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를 잇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애초부터 출신이 너무 낮았다.
 
 
  장희빈 사사 만류하다 귀양
 
  실록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인 쪽에서 남인의 재기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손을 썼을 수도 있다. 20여 일이면 생각하고 일을 꾸미기에 충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신하들은 어느 정도의 일이면 숙종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까지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고 이틀 후인 9월 25일 밤 숙종은 “희빈 장씨로 하여금 자진(自盡)토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놀란 승지 서종헌과 윤지인 등이 나서 만류했다. 세자의 생모인 장희빈을 보존해야 세자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금일의 조치는 국가를 위한 것이고 세자를 위한 것이지 즐거워서 하는 일이 아니다. 처음에 잘 처리하지 아니하여 그 화가 마침내 자라게 된다면 반드시 끝없는 걱정이 생길 것이니, 다만 이것은 국가를 위한 것이고 세자를 위한 것이다. 지금 비망기는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고 밤낮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한 나머지 부득이하여 낸 것이다”며 단호한 태도를 보이던 숙종도 승지들의 간곡한 만류가 계속되자 일단 한 걸음 물러선다. 특히 윤지인은 강경하게 맞섰다. 심지어 국가의 중대사를 순간의 격분한 마음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가 숙종의 분노까지 사게 된다.
 
  이후 여러 날 동안 숙종은 관련한 궁녀들에 대한 친국(親鞫)을 주관했다. 와중에 영의정 최석정은 10월 1일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간곡하게 청하다가 충청도 진천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중도부처(中途付處·유배지로 가는 중간지점의 한 곳에 머물게 하는 형벌)였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정승들을 비롯한 신하들의 반대 상소가 이어지는 가운데 10월 7일 숙종은 엉뚱하게도 빈이 후비의 자리를 이을 수 없도록 국법으로 정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고 다음 날 “장희빈이 내전을 질투하여 모해하려고 했다”며 자진 명령을 내린다. 당시 세자는 조정 대신들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어느 신하도 숙종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결국 10월 10일 장희빈은 사약을 마셨다.
 
  이듬해 1월 5일 숙종은 교서를 내렸다.
 
  “중도부처한 죄인 최석정은 지은 죄가 비록 무거우나 귀양을 간 지가 한 해를 넘겼고 바야흐로 양춘(陽春·음력 정월)을 당했으니 관대한 은전(恩典)이 없을 수 있겠는가? 특별히 방송(放送)하라.”
 
 
  숙종이 무한 신뢰한 賢相
 
  숙종의 최석정에 대한 신뢰는 장희빈의 사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았다. 본인이 구상하는 정국(政局)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재상이 바로 최석정이었기 때문이다.
 
  숙종 28년(1702년) 12월 2일 숙종은 최석정을 서용(敍用)할 것을 명하고서 다시 판중추에 제배했다. 최석정은 일단 진천에서 소를 올려 면직을 청했다. 숙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듬해 2월 11일 최석정을 다시 영의정에 임명한다. 이때부터 최석정은 영의정 폐출과 임명 사이에서 왔다 갔다하게 된다. 숙종 31년(1705년) 4월 13일 다시 최석정을 영의정으로 삼자 실록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숙종과 최석정이 서로 마음으로 의지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평이라고 하겠다.
 
  〈이날 임금이 우상(右相) 이유(李濡)에게 영상(領相)을 추천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유가 형세가 편안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재차 불러도 나오지 않으니, 전망(前望·예전에 후보로 추천된 사람) 단자(單子·명단)를 들이라고 명하여 최석정을 정승으로 삼았다.
 
  최석정은 성품이 명민(明敏)하고 유순(柔順)하며 또 은밀한 지원[奧援]이 있어서 임금이 총애하였다. 비록 비위를 거슬려 잠시 폐출(廢黜)되었지만, 연이어 중복(重卜·재차 정승에 임명됨)의 명령이 있음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럼에도 최석정이 소를 올려 대간(臺諫)의 비평이 있으니 나아갈 수 없다고 하자 4월 19일 숙종은 이렇게 답했다.
 
  “영의정[台司]에 재차 임명한 데에서 의지함이 돈독함을 상상할 수 있고, 승지(承旨)의 돈유(敦諭)에서 그리워함이 절실함을 알 수가 있을 터인데, 나의 뜻이 신뢰를 받지 못하여 사직하는 상소가 계속해서 이르니, 몹시 놀랍고 또 부끄러워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기왕의 일에 대하여는 완전히 용서하였으니, 지나친 대간의 상소를 가지고 한결같이 인혐(引嫌)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지금 조정이 거의 비다시피 하였고 국사(國事)는 해이되어 있으니, 경(卿)과 같이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으로써 더욱 수수방관(袖手傍觀)만 할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 부디 자신을 낮추지 말고 즉시 나오도록 하라.”
 
 
  조부 최명길의 일로 공격받아
 
최석정의 조부 최명길.
  숙종은 말년으로 갈수록 소론 중심에서 노론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숙종의 마음이 조금씩 노론 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노론에서는 최석정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예를 들면 그가 영의정으로 있던 숙종 32년(1706년) 3월 3일 사학유생(四學儒生) 송무원(宋婺源) 등이 소를 올려 영의정 최석정을 공격했다.
 
  “영의정 최석정은 (인조 때에) 화친을 주장한 사람인 최명길(崔鳴吉)의 손자로 수치를 잊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가 있으니 우리 임금을 대신하여 황단(皇壇)의 제사를 행하게 할 수 없습니다.”
 
  황단이란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보단제(大報壇祭)를 말한다. 조부 문제였기에 최석정은 소를 올려 조부 최명길을 다음과 같이 변호했다. 이 글은 《숙종실록》에는 실려 있지 않고 《숙종실록보궐정오》(3월 9일)에만 실려 있다. 이 글은 최석정이라는 재상의 식견을 보여줌과 동시에 조부 최명길을 변론하고 나아가 상경(常經)을 넘어 권도(權道)를 발휘해야 하는 재상론이라는 점에서 다소 길지만 채록할 필요가 있다.
 
  〈신의 조부가 또 말하기를, “오랑캐는 우리의 토지(土地)를 탐내서가 아니라 다만 이웃 나라에 위엄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니, 이는 반드시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신의 조부가 성대(聖代)를 만나서 직위(職位)가 숭현(崇顯)함에 이르렀으니, 충의(忠義)를 다한 것은 평소에 축적(蓄積)하였던 바이고 훼예화복(毁譽禍福)은 진실로 이미 끊어버렸던 것이며, 국가의 위급존망(危急存亡)의 날을 당하여 자기 혼자 식견(識見)의 명철함을 가지고 꼭 그렇게 될 계획을 믿어서 다만 성패(成敗)의 운수를 익숙히 강구(講究)했을 뿐만 아니라, 문득 또한 상경(常經·올바른 도리)과 권변(權變·형편에 따른 일처리 수단)의 의리를 살펴 정하였기 때문에 많은 구설에 걸려들어서 여러 번 전패(顚沛·엎어지고 자빠짐)의 지경을 당하였으나, 비방하고 원망하는 것이 들끓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명예에 누(累)를 끼치는 것도 따지지 않으면서 용감하게 곧장 앞으로 나가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으니, 그가 이치를 택하여 의리에 처한 것은 대개 인조(仁祖)에게 올린 봉사(封事)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를 폄손하여 권도를 행한다”
 
  거기에 이르기를 “《춘추전(春秋傳)》에 권도(權道)를 설행(設行)하는 것은 사망(死亡)이 아니면 설행하는 바가 없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권도를 행하는 것에는 도(道)가 있으니, 자기를 폄손(貶損)하여 권도를 행한다”고 하였으니, 대개 측량하기 어려운 것은 세상의 변고(變故)이고 한(限)이 없는 것은 의리(義理)입니다. 천하가 무사(無事)할 때에 경상(經常)을 조심해 지키는 것은 뛰어난 이나 뛰어나지 않은 이나 같이 한길로 돌아가겠지만, 역경(逆境)을 만나거나 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되면, 능히 이를 변통(變通)시켜서 도리(道理)와 함께 행한 뒤에야 바야흐로 그것을 성인(聖人)의 큰 권도라고 이르겠습니다.
 
  옛날 은(殷)나라 미자(微子) 계(啓)는 면박함벽(面縛啣璧·손을 뒤로 묶고 옥을 입에 물고서 항복하는 것)하면서 탕왕(湯王)의 제사를 보존(保存)하였고, 제(齊)나라 관중(管仲)은 죽지 않고 갇히기를 청하여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아 다스렸으니,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한 몸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하였다면 치욕(恥辱)스러운 사람으로 천한 행동을 한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 또한 무엇을 취하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그들은 때를 따라 정의(正義)를 마련하고 자신을 굴(屈)하여 권도를 행하였으며, 혹은 조종(祖宗)의 혈식(血食)을 귀중함으로 삼았고, 혹은 이익과 은택(恩澤)이 남에게 미치게 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았기 때문에, 공자(孔子)가 모두 인(仁)으로써 그들에게 허여(許與)하였는데, 더구나 지금 전하(殿下)께서는 종사(宗社)를 온전히 하시고 생령(生靈)을 보존하신 공이 옛일에 비하여 빛이 납니다.
 
  만약에 세상에 공자가 있었다면 반드시 두 사람에게 허여한 것을 전하에게 돌렸을 것입니다. 혹은 국군(國君)이 되어서는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말로 오늘의 일을 의논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매우 의혹될 뿐입니다. 무릇 국군이 사직을 위하여 죽는 것은 곧 《예기(禮記)》의 말인데, 해석하는 자가 이르기를 “나라가 망하면 군주도 또한 망한다”라고 한 것이니, 그 나라가 망하지 않았는데 그 임금이 죽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소급해 책망한다는 것은 신이 들은 바가 없습니다.
 
  미자는 은나라의 한 공자(公子)이고 관중은 제나라의 미천(微賤)한 신하로서 모두 종사(宗祀)나 생민(生民)의 책임이 없는데도, 오히려 수금(囚禁)과 치욕(恥辱)의 부끄러움도 사피하지 않고 반드시 조선(祖先)의 계통(系統)을 잇고 천하를 구제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거늘, 하물며 천승(千乘)의 임금으로 종사(宗祀)와 생령(生靈)이 의탁한 바인데, 도리어 스스로 그 몸을 가볍게 여겨서 구독(溝瀆·도랑에 빠져 죽음)의 행동을 달갑게 여기면서 이를 돌아보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유리(羑里)의 좁은 곳에서 성철(聖哲)이 구유(拘幽)된 것은 사문(斯文·유학)의 양구(陽九·재앙)라고 이를 만하지만, 문왕(文王)은 능히 준양시회(遵養時晦·도를 따라 반성하고 때가 불리할 때 숨어 지냄)하며 지혜로써 주밀히 방비하여 그 정당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누설(縲絏·감옥에 갇힘)에 걸려들었으나 치욕스럽게 여기지 않고, 도(道)를 굽혀 면함을 구하였으나 아첨(阿諂)스럽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척화와 출성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명이(明夷)는 어려움을 알아 그 정직함을 지키면 이롭다 하고, 안으로 문명(文明)한 덕을 가지고 밖으론 유순(柔順)하여 큰 어려움을 당했으니 문왕(文王)이 이를 실행했다”고 하였으니, 대개 성인(聖人)도 일찍이 곤궁할 때가 없지 않았으나 다만 그 대처하는 데에 방도가 있으니, 오늘은 곧 전하께서 명이를 지킬 때입니다. 전하로 하여금 더욱 어려운 때에 정직한 덕을 행하시면 역시 문왕(文王)이 될 따름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봉장(封章)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경훈(經訓)을 끌어 증거를 대고 의리(義理)를 참고하여 증험한 것은 구차하지 않을 뿐입니다. 비록 그렇지마는 또한 감히 만족한 마음으로 오랑캐를 섬기고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으로써 군상(君上)에게 우러러 인도한 것은 아니니, 대개 말하기를 “나라를 다시 회복시키는 계획과 내정(內政)을 다스려 외적(外敵)을 물리치는 계책을 스스로 다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라” 한 때문에 그 말에 이르기를 “근심이 깊으면 성지(聖智)를 계도(啓導)하고, 어려운 일이 많으면 나라를 일으킨다”고 하였으니, 대개 편안한 데 익숙하여 주색(酒色)에 빠져서 정사에 게으르면 반드시 전복(顚覆)의 화(禍)가 있게 되고, 어려울 때에 처해서도 부지런하고 두려워하면 마침내 난국(難局)을 구제하는 효과를 거두는 것은 이치에 반드시 그렇게 됨이 있어서 결단코 의심할 것이 없으니, 국가(國家)가 상망(喪亡)하는 데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 지난해에 화친(和親)을 배척한 일은 진실로 실착(失着)이 되었으나 천조(天朝·명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세웠으니 그 명분이 올발랐고, 올해에 출성(出城·성을 나와 항복함)한 일은 진실로 수치스러웠기는 하나 생민을 위하여 모욕(侮辱)을 참았으니 그 마음이 어진 것입니다. 본조(本朝)에 있어 천의(天意)가 끊어지지 않은 것과 인심(人心)이 성상(聖上)에게서 떠나지 않은 것이 어찌 연유한 바가 없이 그렇게 되겠습니까?
 
  진실로 능히 성상의 뜻을 분발(奮發)하여 동요되거나 저지되는 바가 없게 하고, 앞일을 징계 삼아 뒷일을 삼가는 계책에 더욱 힘쓰고, 내정(內政)을 다스려 외적을 물리치는 정치를 힘써 다하시며, 진정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어려움에 처한 처지에서 주선(周旋)을 하고 지극한 정성을 펼쳐 밝게 강림(降臨)하는 하늘이 감동한다면, 실패가 성공(成功)이 되고 재앙(災殃)이 바뀌어서 복(福)이 되는 것은 반드시 오늘부터 비롯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夏)나라에서는 일성(一成·사방 10리 땅)을 가지고도 소강(少康)이 흥기(興起)하였고, 월(越)나라에서는 회계(會稽)에 머물면서 구천(句踐)이 패권(覇權)을 잡았었는데, 더구나 지금 국가의 경토(境土)가 결손(缺損)된 바가 없으며, 조종의 덕택(德澤)도 오히려 다 없어지지 않았으니, 변란(變亂)이 비록 비참하나 사방으로 호령(號令)이 막히지 않았고, 재용(財用)이 비록 써서 없어졌지마는 남은 힘이 아직 삼남(三南)에 있으니, 오늘의 일은 오직 전하께서 뜻을 세우시기를 어떻게 하시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일을 하려고 하시면 어찌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노론의 공격으로 결국 사직
 
  이에 숙종은 대신을 흔들고 조정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송무원에게 변방 유배를 명했다. 송무원은 송시열의 증손(曾孫)이며 그 아들 송덕상(宋德相)은 홍국영과 정치 노선을 함께하다가 홍국영이 몰락할 때 함께 패망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송무원의 당색을 짐작할 수 있다.
 
  3월 25일 최석정이 올린 사직소를 보면 노론의 공격이 최석정의 목 아래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풍문(風聞)에 좌상(左相)이나 우상(右相)이 송무원의 일을 아뢰고 인하여 구해(救解)하는 말이 있다고 하기에, 처음에는 놀라서 의혹한 마음이 없지 않다가, 좌상의 차자(箚子)를 보고 난 후에야 그 본뜻이 그렇지 않음을 비로소 깨우쳤으나, 정세가 위축(危蹙)되는데 어찌 감히 안연(晏然)하게 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 좌상은 서종태(徐宗泰), 우상은 김창집(金昌集)이었다. 김창집은 노론이었다.
 

  최석정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같은 해 6월 11일 노론 대신 병조판서 이이명(李頤命·1658~1722년)을 직격했다. 이에 숙종은 곧바로 이이명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 것을 명했다. 아직은 최석정에 대한 숙종의 신임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이이명은 이경여(李敬輿)의 손자로 일찍부터 송시열의 지원을 받으며 이선(李選), 이수언(李秀言) 등과 함께 노론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우의정에 오르고 숙종의 총애를 얻어 1708년 좌의정에 올라 숙종 말기 노론 정권의 핵심 인물이 된다.
 
  최석정은 노론 일색으로 바뀌어가는 조정 상황을 보면서 숙종 33년(1707년) 여러 차례 사직소를 올려 마침내 영의정에서 물러난다.
 
 
  노론 반격의 빌미가 된 《예기유편》
 
  최석정은 숙종 19년(1693년) 《예기유편(禮記類編)》이라는 주석서를 편찬했다. 대체로 조선 초 권근(權近)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기본으로 원문의 장구(章句)가 혼동을 주거나 일탈된 것을 정밀하게 바로잡은 책이다.
 
  노론 입장에서 서술된 실록은 숙종 35년(1709년) 1월 18일 자에서 이 책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당초에 최석정이 예서(禮書)를 찬집(纂輯)하여 《유편》이라고 이름했는데, 모든 예경(禮經)의 장구(章句)를 거개 분류(分類)하여 모아, 이쪽에서 끊어다가 저쪽에다 보충하고 위에서 잘라다가 아래로 옮기곤 하였는데, 되도록이면 번잡하고 중복된 것들을 없애어 고열(考閱)하기 편리하게 하였다. 또 《중용》과 《대학》을 가져다가 도로 그전의 자리에 편차(編次)하되 편제(篇題)를 첨산(添刪)하기도 하고 장단(章段)을 없애버리기도 하였고, 주자의 설명은 전부 없애고 단지 주설(註說)만 남긴 것도 있고, 정자(程子)의 해설을 끊어내고 자기의 설명으로 대신한 것도 있고, 아랫장(章)을 위에다 넣고서 그 장의 끝에 있는 해석을 삭제해 버린 것도 있고, 딴 주(註)를 새로 붙여 본주(本註)의 뜻을 어지럽힌 것도 있어, 대개 조목(條目)의 배치는 교묘하게 되었지만 큰 본령(本領)은 깎여버리게 되었다.〉
 
  “주자의 설명은 전부 없애고 단지 주설(註說)만 남긴 것도 있고”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발화성(發火性)이 강한 책이었다. 이이명의 동생 이관명(李觀命·1661~1733년)이 깃발을 들었다. 최석정의 책은 “성인을 모함하고 현인을 업신여겼다”는 것이다. 이관명이 댕긴 불은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선비들에게까지 옮아 붙었다. 최석정은 15차례나 사직 의사를 밝혔고 그때마다 숙종은 반려했다. 이에 성균관 유생 이병정 등이 소를 올려 최석정을 공격했다.
 
  〈우리 주부자(朱夫子)가 천 년이나 추락(墜落)했던 통서(統緖)를 이어받고 뭇 성현들의 것을 집대성(集大成)하여 사도(斯道)의 오묘(奧妙)한 뜻을 천명(闡明)하되, 집주(集註)와 장구(章句)를 확정하고 저술하여 만세에 교훈을 남겨놓았으니, 이는 바로 천지의 떳떳한 법이고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불행히도 지난날에 난적(亂賊) 윤휴(尹鑴)가 선현(先賢)을 가볍게 보고서 《중용(中庸)》의 장구를 멋대로 고쳤었으니, 윤휴가 종말에 창궐(猖獗)하게 된 것이 실지는 이에서 비롯하게 된 것인데,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이 또한 뒤따라 일어나게 되고, 이번에는 최석정이 또한 그가 만든 《예기유편》이란 것으로 신엄(宸嚴)을 간범하고 있습니다.〉
 
  예학(禮學) 혹은 예론(禮論)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정면충돌이었다. 결국 이 일로 최석정은 숙종 35년 6월 29일 40여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린 끝에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다시 영의정을 맡지만 숙종 36년 2월 30일에는 병을 핑계로 영의정에서 물러나 판중추에 머물렀다. 그러나 판중추에서도 물러나야 했고 마침내 사헌부에서는 최석정을 유배 보낼 것을 청하기도 했다.
 
  판부사(판중추)로 있던 숙종 40년(1714년) 8월 12일 윤증의 상사에 최석정이 제문을 지었는데 그 안에 송시열을 침척(侵斥)하는 말이 있다 하여 유생들이 소를 올렸다. 그러나 숙종은 사사로운 제사에 쓴 글을 갖고서 나라에서 문제 삼을 수 없다는 논리로 유생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품이 경솔하고 천박”(노론)
 
  그러나 이미 노론의 세상이었다. 이듬해인 숙종 41년(1715년) 최석정은 세상을 떠났다. 숙종은 교서를 내려 말했다.
 
  “지극한 슬픔으로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었다.”
 
  그러나 당시에 최석정을 보는 시각은 정확히 둘로 갈렸다. 먼저 노론이 쓴 《숙종실록》 숙종 41년 11월 11일 졸기다.
 
  〈최석정은 성품이 바르지 못하고 공교하며 경솔하고 천박하였으나,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어 여러 서책을 널리 섭렵했는데, 스스로 경술(經術)에 가장 깊다고 하면서 주자(朱子)가 편집한 《경서(經書)》를 취하여 변란(變亂)시켜 삭제하였으니, 이로써 더욱 사론(士論)에 죄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번 태사(台司·삼정승)에 올랐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전도되고 망령된 일이 많았으며, 남구만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그의 언론(言論)을 조술(祖述)하여 명분(名分)과 의리(義理)를 함부로 전도시켰다. 경인년(숙종 36년)에 시약(侍藥)을 삼가지 않았다 하여 엄지(嚴旨)를 받았는데, 임금의 권애(眷愛·총애)가 갑자기 쇠미해져서 그 뒤부터는 교외(郊外)에 물러가 살다가 졸하니 나이는 70세이다. 뒤에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이번에는 소론이 쓴 《숙종실록보궐정오》 같은 날 졸기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최석정이 졸(卒)했다. 최석정은 자(字)가 여화(汝和)이고, 호(號)가 명곡(明谷)인데, 문충공(文忠公) 최명길의 손자이다. 성품이 청명(淸明)하고 기상(氣像)이 화락(和樂)하고 단아(端雅)했으며, 총명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어려서 남구만과 박세채를 따라 배웠는데, 이치를 분별하여 깨달아 12세에 이미 《주역(周易)》에 통달하여 손으로 그려서 도면을 만드니, 세상에서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구경(九經)과 백가(百家)를 섭렵하여 마치 자기 말을 외듯이 하였는데, 이미 지위가 고귀해지고 늙었으나 오히려 송독(誦讀)을 그치지 않으니, 경술(經術)·문장(文章)·언론(言論)과 풍유(風猷)가 일대 명류(名流)의 종주가 되었다. 산수(算數)와 자학(字學)에 이르러서는 은미(隱微)한 것까지 모두 수고하지 않고 신묘하게 해득(解得)하여 자못 경륜가(經綸家)로서 스스로 기약하였다. 열 번이나 태사(台司)에 올라 당론(黨論)을 타파하여 인재(人才)를 수습하는 데 마음을 두었으며, 《대전(大典)》을 닦고 밝히는 것을 일삼았다. 신사년(숙종 27년 1701년)에 세 번 차자를 올려 미움받았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이 하기 어려워하는 것이었으니, 조태채(趙泰采)가 매복(枚卜)에서 대신(大臣)의 풍도가 있다고 했다.
 
  소관(小官)에 있을 때부터 임금의 권애(眷愛)가 특별하여 만년까지 쇠하지 않자, 당인(黨人)들이 이를 매우 시기하여 처음에는 경서(經書)를 훼파(毁破)하고 성인을 업신여겼다고 무함하다가 마침내 시병(侍病)하는 데 삼가지 않았다고 구죄(構罪)하니, 하루도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편안히 지내면서 끝내 기미(幾微)를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너그러운 도량에 감복하였다.
 
  만년에는 더욱 경외(京外)를 왕래하다가 황야(荒野)에서 죽으니, 식자(識者)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문식이 지나치고 또 경솔하여 절실함이 깊지 못하였다. 정치를 논함에 있어서도 긴요한 듯하면서 실지로는 범연하여 남구만처럼 독실하고 정확(精確)하지는 못했다. 시호는 문정이며, 태묘(太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수학에 통달했던 르네상스적 인간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쓴 최석정의 《구수략》.
  최석정은 1710년 사실상 영의정을 그만둔 뒤부터 전원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는 졸기에서 말한 대로 산수와 자학 연구에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학과 관련한 《구수략(九數略)》이라는 책을 지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린 소개다.
 
  〈4권 2책. 목판본. 갑·을·병·정(부록)의 4편으로 엮어졌다. 갑편은 주로 가감승제(加減乘除)의 4칙에 관한 기본적인 설명, 을편은 이들 기본연산(基本演算)을 다룬 응용문제, 병편은 개방(開方)·입방(立方)·방정(方程) 등에 관해서, 그리고 정편은 문산(文算)·주산(籌算) 등의 새로운 산법 및 마방진(魔方陣)의 연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수학의 형이상학적인 역학사상에 의거, 수론을 전개한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수학의 계산을 도외시하면서 삼위일체설에 근거를 둔 수의 분류를 주제로 한 서양의 보에티우스(Boethius) 수학에 견줄 수 있다.
 
  수사(數詞)·단위·산목(算木)·포산(布算·산목의 배열법)·가감승제의 계산 원칙을 비롯하여, 심지어 동양수학의 대표적 고전인 《구장산술(九章算術)》의 각 장을 음양사상과 결부시켜 분류하고 있다. (이하 생략)〉

 
 
  동생 최석항도 좌의정 지내
 
  최석항(崔錫恒· 1654~1724년)도 소론의 거물이며 좌의정에 이르렀다. 경종 4년(1724년) 그의 졸기다.
 
  〈최석항은 고(故) 상신(相臣) 최석정의 아우인데, 외모는 왜소하였으나 강한 정신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관찰사로 나갔을 적에는 재국(才局)이 있다 이름을 날렸고, 평생의 처사에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항상 후진(後進)에게 경고하기를 ‘사소한 일을 가지고 남과 서로 따지지 마라. 그러다가는 걸핏하면 실패하고 나랏일을 성취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승으로 들어가 임인년(경종 2년 1722년)·계묘년(경종 3년 1723년)의 큰 옥사를 당하여서는 뜻을 아예 평반(平反·억울한 죄를 다시 조사하여 무죄로 하거나 감형하는 일)에 두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필경 대각(臺閣)의 어긋나고 과격한 논의에 끌려서 모든 일을 스스로 주장하지 못한지라, 식자는 그의 역량이 적었던 것을 결함으로 여겼다. 부음을 알리자 임금이 하교하여 애도의 뜻을 전하였고, 세제(世弟·훗날의 영조)도 거애(擧哀)의 의식을 거행하였으니, 예문(禮文)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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