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시열의 제자 민정중, 숙종 때 우의정 지내며 노론 실세로 활약
⊙ 민정중의 동생 민유중, 숙종의 장인 되어 재정권·병권 장악
⊙ 민진후·민진원 형제 영조 때 좌의정 지내… “黨同伐異에 과감” “黨에 대한 병통이 가장 고질” 평 들어
⊙ 민유중의 6대손 명성황후 민씨가 고종의 왕비 되면서 여흥 민씨 척족 세도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민정중의 동생 민유중, 숙종의 장인 되어 재정권·병권 장악
⊙ 민진후·민진원 형제 영조 때 좌의정 지내… “黨同伐異에 과감” “黨에 대한 병통이 가장 고질” 평 들어
⊙ 민유중의 6대손 명성황후 민씨가 고종의 왕비 되면서 여흥 민씨 척족 세도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경기도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 민씨의 생가. 사진=조선DB
여흥 민씨는 고려 때 명문가로 조선 건국을 도왔고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를 배출한 집안이다. 그래서 태종 장인 민제(閔霽·1339~1408년)는 좌정승을 지냈다. 그러나 민제의 네 아들, 즉 태종의 처남 4명이 모두 정치적으로 제거되면서 여흥 민씨 집안은 조선 중기까지 이렇다 할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다 선조 때에 이르러 비로소 정승에 오르는 인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세에 뛰어났던 민기
민기(閔箕·1504~1568년)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해 명종 시대를 거치며 대사헌, 이조참판, 형조판서,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는 문재(文才)가 뛰어나 조정의 기대를 모았다. 《명종실록》 명종 4년(1549년) 3월 22일 자다. 좌의정 황헌(黃憲)이 아뢰었다.
“정사룡, 남응룡(南應龍), 김주(金澍), 민기는 다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입니다. 신이 그들 문장(文章)의 높낮음은 잘 알지 못하나 이런 사람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그가 이조판서에 임명된 명종 21년(1566년) 1월 18일에 사관은 민기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지략과 계려가 있어 사변을 잘 처리하였다. 소시에 학문이 있었으나 만년에의 소득(所得)은 알 수 없다. 기량이 평탄하고 식려(識慮)가 심원(深遠)하였다. 그러나 집에 있을 적에는 미세(微細)한 조행(操行)을 힘쓰지 않았다.”
민기는 선조 즉위년(1567년) 우의정에 올랐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년(1568년) 2월 1일 자 졸기(卒記)다.
“민기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이이(李珥)가 낭관(郞官)이었는데 언제나 전선(銓選·인사 선발)을 공평히 함으로써 청탁의 길을 막으려 하면, 민기는 곧 ‘너무 지나치게 하다가 일을 발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하였다. 이에 이이가 사람에게 말하기를 ‘민공(閔公)이 뛰어난 재상이기는 하나 다만 소인(小人)을 두려워할 뿐 군자(君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다. 이이가 대답하기를 ‘민공이 만약 군자에게 죄를 얻는다면 현반(顯班)에다 두지 않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나 소인은 성품이 각박하여 만약 서로 거슬렸을 경우 혹 멸족(滅族)의 화도 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민공은 소인을 두려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식자들은 민기를 일러 섭세(涉世)의 재주가 뛰어났다고 하였다.”
섭세(涉世)란 처신섭세(處身涉世)를 말하는 것으로 처세술을 말한다.
폐모에 앞장선 민몽룡
민몽룡(閔夢龍·1550~1618년)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해 요직을 거쳤고 형조판서와 대사헌을 맡아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축출에 앞장섰다. 선조 말 북인(北人)이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열되자 정인홍(鄭仁弘)을 따라 대북이 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을 앞장서서 관철시켰다. 《광해군일기》 광해 10년(1618년) 1월 30일 자에 서궁(西宮·인목대비)을 깎아내리는 절목을 좌의정 한효순(韓孝純·1543~1621년)과 함께 앞장서서 올렸다.
〈존호(尊號)를 낮추고 전에 올린 본국의 존호를 삭제하며,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내오며, 대비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서궁이라 부르며, 국혼(國婚) 때의 납징(納徵)·납폐(納幣) 등 문서를 도로 내오며, 어보(御寶)를 내오고 휘지표신(徽旨標信)을 내오며, 여연(輿輦)·의장(儀仗)을 내오며, 조알(朝謁)·문안(問安)·숙배(肅拜)를 폐지하고, 분사(分司)를 없애며, 공헌(貢獻)을 없애며, 서궁의 진배(進排)는 후궁(後宮)의 예에 따르며, 공주의 늠료(廩料)와 혼인은 옹주(翁主)의 예에 따르며, 아비는 역적의 괴수이고 자신은 역모에 가담했고 아들은 역적의 무리들에 의해 추대된 이상 이미 종묘에서 끊어졌으니 죽은 뒤에는 온 나라 상하가 거애(擧哀)하지 않고 복(服)을 입지 않음은 물론 종묘에 들어갈 수도 없으며, 궁궐 담을 올려 쌓고 파수대를 설치한 다음 무사를 시켜 수직(守直)하게 한다.〉
이에 대한 사관의 비평이 신랄하다.
〈민몽룡이 신임 정승으로서 팔을 걷어붙이고 수염을 휘날리면서 흔연히 떠맡았는데, 폄손하는 절목 일체에 대하여 이이첨(李爾瞻)으로부터 익히 지시를 받은 뒤 물음에 응하여 물 흐르듯 거침없이 외워 나갔으며, 한효순은 머리를 구부린 채 ‘예. 예’ 하고 대답만 할 따름이었다.〉
얼마 후 병으로 사망했으며,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추탈(追奪)당했다. 서인 입장에서 쓴 《광해군일기》 광해 10년(1618년) 5월 13일 자 졸기는 극도로 비판적이다.
〈몽룡은 용렬한 비부(鄙夫)로서 세상의 버림을 받고 오래도록 서위(西衛·무반)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정인홍이 한 번 보고는 남명(南冥)의 기절(氣節)이 있다고 하여 극력 천거하였다. 그러다가 대론(大論·폐모론)이 나오자 앞장서서 떠맡고 나서면서 이이첨과 합동으로 한마음이 된 결과 갑자기 전부(銓部·이조)로 들어가게 되었고 곧바로 정승의 지위에 올랐다. 폄손하는 절목(節目)을 의논할 적에 뻐기면서 의정부에 앉아 턱으로 지시하고 입으로 부르는 등 의기양양했었는데 그 모임이 파하기도 전에 갑자기 뻐개지는 듯한 두통을 느끼고 부축받아 나갔다. 그 길로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사람들이 천벌을 받았다고들 하였다. 그 아내와 장자 민준철(閔濬哲)도 잇달아 죽었다.〉
민기와 민광훈
조선 중·후기 여흥 민씨 번성의 뿌리는 민기(閔機·1568~1641년)다. 민기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7년(선조 30년) 문과에 급제해 외직(外職)을 두루 역임했다. 《인조실록》 인조 3년(1625년) 12월 25일 자 기사다.
“민기를 병조 참지(參知)로 삼았다. 민기는 사람됨이 청백(淸白)하고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인조가 즉위하고서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했으며 인조도 그를 아껴 지방직을 돌던 그를 불러올려 승지로 삼아 가까이에 두었다. 인조 4년(1626년) 9월 19일 자 기록이다. 인조의 말이다.
“민기의 청백함과 선치(善治)에 대해서 내가 전부터 듣고서 가상히 여겨왔다. 그 고을 선비가 올린 상소를 보니 전에 들은 바가 헛말이 아니었다. 뛰어난 수령 한 사람 얻기가 매우 어려운 때이니, 백성을 위해서 죄를 용서하고 그대로 유임시켜 나의 근심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고, 겸하여 그의 선치(善治)를 포상해서 다른 사람들을 분발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정원은 의논해서 아뢰라.”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민기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인조 19년(1641년) 사망하자 송준길(宋浚吉)이 묘표를 짓고 송시열(宋時烈)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이로써 우리는 민기가 서인(西人)이 존중하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민기의 아들 민광훈(閔光勳·1595~ 1659년)은 인조 때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원손(元孫)을 모시고 인근 섬으로 피신하여 공신에 책록되었다. 관직은 호조참의와 강원도 관찰사에까지 올랐다. 당색은 서인 노론(老論)이었다.
민시중과 그의 아들 민진주
민광훈에게는 민시중(閔蓍重· 1625~1677년), 민정중(閔鼎重· 1628~1692년), 민유중(閔維重· 1630~1687년)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민시중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현종 5년(166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다. 특히 경상도 관찰사로 큰 치적을 남겼다. 그는 대사헌에까지 이르렀는데 숙종 3년(1677년) 2월 3일 자 졸기를 보면 “민시중은 민정중의 형인데 재주와 방책은 두 아우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충후(忠厚)함은 앞서므로 당시에 선인(善人)으로 불리었다”라고 평하고 있다. 숙종 초에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다행히 정치적 격랑을 겪지는 않았다.
그의 둘째 아들 민진주(閔鎭周·1646~1700년)는 환국의 파고를 온몸으로 넘어야 했다. 1685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부응교가 되었을 때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이 집권하면서 유배를 가야 했다. 1694년에 다시 서인이 집권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자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간으로 승진했고 도승지에 올랐으며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숙종 26년(1700년) 8월 24일 자 졸기다.
〈민진주는 민시중의 아들로 사람됨이 장자(長者·덕망 있는 사람)답고 후덕하였으며 말과 의논이 강직하였다. 조사석(趙師錫)이 오전(奧殿·중전)의 도움으로 정승에 배명(拜命)되었으나 온 조정이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민진주 홀로 항소(抗疏)로 말하고 거듭 임금의 뜻을 어기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니 청의(淸議)가 옳게 여겼다. 일찍이 부개(副价·부사)로 연경(燕京)에 갔더니, 상사(上使) 서문중(徐文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민모(閔某)는 실로 다른 사람이 알기를 두려워하는 깨끗한 지조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조행(操行)을 가다듬고 구차스럽게 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향용(嚮用·한마음으로 임용함)이 바야흐로 한창이었는데 갑자기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민광훈의 둘째 아들 민정중은 인조 27년(1649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와 승정원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했고 남인에 대해서는 개방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예송(禮訟)논쟁 때는 남인의 주장에 강경하게 반박하기도 했다.
민정중의 사람됨은 매우 강직했다. 《현종실록》 현종 3년(1662년) 6월 10일 대사성 서필원(徐必遠)이 현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민정중처럼 과감하고 강직한 자마저 입을 꾹 다문 채 체직(遞職)되려고만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오늘날의 나랏일이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현종이 점차 서인에 대해서 등을 돌릴 무렵인 현종 14년(1673년) 9월 14일 자에는 다음과 같은 하교가 나온다.
“민정중은 대대로 국록(國祿)을 받은 신하이므로 산림(山林)에서 은거하는 선비와 같지 않은데도, 이때를 당하여 감히 먼 외지에 물러앉아 누차 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더니 지금 또 교외(郊外)에 와 있으면서 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고 있으니, 송 판부사(判府事·송시열)가 한 일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인가? 판부사는 정승의 직을 사면하고 물러갔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으나, 민정중은 누차 온당치 않다는 분부를 내린 연후에야 비로소 올라왔는데 이르는 곳마다 소를 올렸으니 교만하고 방자함이 심하다. 관작을 삭탈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바로 다음 날 민정중을 유배 보낸다.
“민정중의 행신(行身)과 처사(處事)는 조금도 볼 만한 것이 없다.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내려간 것도 명분이 없고 밖에 있으면서 소를 올린 것도 사군자(士君子)의 기풍과 절개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전 정언 성호징이 감히 민정중을 찬양하기를 ‘나오기는 어려워하고 물러가기를 쉽게 하는 것은 사군자의 기풍이요 절개이다’라고 하고, ‘쓸쓸하고 적막한 곳에 스스로 들어 앉는 것은 필시 마음속에 스스로 지키는 바가 있고 시기가 의리상 갑자기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고 하며, ‘전하의 이 일은 정말 천고에 없었던 일이다’고도 하는 등 말을 이리저리 둘러대어 억양(抑揚)하면서 민정중에게 아부하고 임금을 멸시하였으니, 그 정상이 극히 가증스럽다. 엄히 징계하고 다스려 그 죄를 바루지 않을 수 없다.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라.”
현종은 송시열의 제자들이 자신을 농락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노론의 중심이 된 민정중
민정중은 숙종 초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얼마 후 남인이 득세하면서 쫓겨났고 1679년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당했다. 이러다 이듬해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 송시열과 함께 유배에서 풀려나 같은 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때 그의 승진은 현기증이 날 정도다. 숙종 6년 4월 19일 공조판서가 됐고 4월 29일에는 우의정에 제수됐다. 우의정이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5월 24일 민정중은 송시열의 방면(放免)을 청했다.
“송시열은 당초 ‘임금을 깎아내리고 종통(宗統)을 어지럽혔다’는 것이 그의 죄명인데, 이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원통한 것이고, 남에게 화(禍)를 전가한 자들이 억지로 꾸민 죄목입니다. 지난번에 성상께서 그의 본심을 특별히 살피시어 즉시 양이(量移)토록 명하시니, 보고 듣는 모든 사람이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소결은 이미 아무 허물도 없는 듯이 석방하시는 것인데, 송시열은 일찍이 대신의 반열에 있었고, 또 빈사(賓師)의 지위에 있었으니, 일의 체모로 보아 다른 죄인들과 차이가 있어야겠습니다. 성상께서는 신 등이 문서를 가지고 하나하나 이름을 아뢰기를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참작하여 처리하심이 일의 대체에 맞을 듯합니다.”
한마디로 서둘러 특명으로 송시열을 유배에서 풀어주라는 요청이었고 숙종은 그날 바로 재가했다. 우의정에 오른 지 5개월도 채 안 된 10월 12일 민정중은 좌의정에 오른다. 민정중은 숙종 10년 10월 21일 병을 이유로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경신환국 이후 4년 동안 서인 정권의 핵심 지도자로 떠오른 것이다.
1683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할 때 노론을 선택해 여흥 민씨가 줄곧 송시열 노선을 따른 것은 민정중으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송시열·송준길 등이 가장 중시”
이러다 숙종 15년(1689년) 다시 남인이 집권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하루아침에 신분이 ‘죄인’으로 바뀌었다.
11월 18일 남인 영수 이현일(李玄逸)이 숙종을 뵙고 말했다.
“민정중의 죄악은 하늘에까지 가득 찼는데 어찌 일찍이 대신이었던 사람이라고 해서 끝내 안률(按律)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민정중은 숙종 18년(1692년) 6월 25일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끝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졸기다.
〈전(前) 좌의정 민정중이 (평안북도) 벽동(碧潼)의 적소(謫所·유배지)에서 졸(卒)했는데 65세였다.
민정중은 자(字)가 대수(大受)로 사람됨이 영특(英特)하고 강직하여 굴하지 않았으며 예법으로 자신을 신칙하였다. 일찍이 괴과(魁科·과거)에 올랐고 극력 청의(淸議)를 붙들었으며, 송시열·송준길 등 제현(諸賢)이 가장 중시하는 바가 되었다. 국자감(國子監·성균관)의 장관(長官)이 되어 선비들을 조성해내는 데에 매우 공효가 있게 되므로, 당시에 정엽(鄭曄) 이후의 제일인 사람이라고 했다. 그 뒤 다른 관직에 뽑혀서도 그대로 겸임, 체직되지 않았으며, 게을리하지 않고 교도(敎導)하므로 선비들의 풍습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관북(關北)을 안찰(按察)하게 되어서는, 북쪽의 풍속은 오로지 무예(武藝)만 숭상하고 문사(文事)에는 소홀하여 진실로 친상사장(親上死長·윗사람을 공경하고 어른을 위해 죽는 일)하는 의리에 어두우므로, 비록 재질과 능력이 강건(强健)하여도 쓸 데가 없었다. 드디어 자신이 솔선시범(率先示範)하며 선비들의 교화(敎化)를 크게 천명(闡明)하므로, 얼마 되지 않아서 빈빈(彬彬·문무가 조화를 이룸)해져 볼 만하게 되었다.
그 뒤에 윤휴(尹鑴)와 허적(許積)이 나라의 일을 맡아 보게 되면서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갔었는데, 비록 배척받는 가운데 있었지만 여망(輿望)은 더욱 높아져, 오늘날의 (송나라 명신) 진요옹(陳了翁)이나 (송나라 학자) 유원성(劉元城) 같은 사람이라고 하게 되었다.
경신년의 경화(更化) 때에는 제일 먼저 태부(台府·의정부)에 들어오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 있는 몇 해 동안 한결같이 임금의 덕을 바로잡는 것과 선비들의 공론을 붙잡기에 주력하고, 여타의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만년(晩年)에는 윤증(尹拯)이 스승(송시열)을 배반하는 것을 보자 김수항(金壽恒)과 함께 입대(入對)하여 옳음과 그름을 구별하여 밝히므로 세상의 도의(道義)가 더욱 힘입는 바가 있게 되었다.
기사년의 변(變) 뒤에는 뭇 간신들이 기필코 죽이려고 하면서도 오히려 돌아보며 두렵게 여기는 바가 있어 실행하지 못했다.〉
우의정에 임명되자마자 사망한 민진장
아버지에 이어 정승이 되는 민정중의 아들 민진장(閔鎭長·1649~ 1700년)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숙종 12년(1686년) 문과에 급제해 도승지와 형조·병조·호조판서 등을 두루 거쳐 숙종 26년(1700년)에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명을 받고 숙배(肅拜·임금에게 작별을 아뢰던 일)도 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우의정의 업무는 하루도 보지 못한 정승이라 하겠다.
숙종 26년(1700년) 3월 16일 자 졸기다. 매우 상세하다.
〈민진장은 가정의 행실이 매우 지극하여 아버지 민정중을 섬김에 뜻을 잘 받들어 어김이 없었고 그 어머니가 중병을 앓았는데 밤낮으로 간호(看護)하면서 수십 년을 하루같이 하여 효성이 천성(天性)에서 타고 나와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조정에서 벼슬할 적에는 일을 공평히 처리하고 법을 지켜서 한결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임하고 오랫동안 군국(軍國)의 중요한 임무를 통괄하여 마음과 힘을 다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민정중은 강직(剛直)하고 민진장은 온화 중후하여 부자(父子)가 타고난 성품은 비록 같지 않았으나 성심으로 나라를 위하여 사림을 도와 권장하는 데는 다를 것이 없었다. 한때 사람들이 모두 민정중의 착한 아들이라고 칭송하였고 정승에 임명되자 여론이 만족해하며 앞으로 큰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숙배도 하기 전에 갑자기 죽으니 조야(朝野)에서 매우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숙종의 환국정치
숙종은 1674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임금 자리에 올랐다. 대체로 이런 나이일 경우 수렴청정을 받는 것이 관례였으나 총명했던 그는 곧바로 친정(親政)을 시행했다. 이때 그의 왕비는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로 김장생(金長生)의 증손 김만기(金萬基·1633~1687년)의 딸이었는데, 숙종과의 사이에 딸 둘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본인도 천연두를 앓다가 숙종 6년(1680년) 10월 26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했다.
이듬해 숙종은 계비로 민유중의 딸을 맞아들인다. 환국으로 1689년 폐위되기도 하고 1694년 복위되기도 하는 비운의 왕비다. 또 왕비면서도 후궁 장희빈(張禧嬪)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경신환국은 1680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영의정 허적(許積·1610~ 1680년)의 경솔한 처신이 빌미가 되어 남인 정권이 궤멸한 사건을 말한다. 허적은 조부의 잔치를 위해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유악(油幄·기름칠한 천막)을 숙종 허락도 없이 가져다 써서 숙종의 분노를 샀다. 당시까지 숙종 정권은 남인 일색이었지만 서인 중에서 송시열과는 거리를 둔 김석주(金錫胄·1634~1684년)가 숙종의 외종숙(5촌)으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다가 이때 남인에 일대 타격을 가한 것이다.
경신환국 이후 송시열은 배후에 있고 김석주-김만기-민정중이 연합하여 전면에서 정국을 주도했다. 1683년에 서인은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尹拯·1629~1714년)의 소론(少論)으로 갈라졌다.
노론 정권은 숙종 15년(1689년) 남인들이 지지하던 후궁 장희빈이 낳은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반대하다가 일거에 축출당하고 남인이 집권했다. 이를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그러나 숙종 20년(1694년) 남인이 소수파임에도 독선적임에 넌더리를 느껴 숙종은 마음을 바꿔 다시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과 손을 잡는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금위대장 민유중
민유중은 형제 정승이자 역시 부자 정승이기도 했다.
민유중은 송준길과 송시열 문인으로 1651년 문과에 급제해 1671년 형조판서·대사헌·호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했다. 송시열·송준길의 산당(山黨)에 속해 김육(金堉)의 한당(漢黨)을 공격하는 데 앞장서 현종비 집안인 김좌명(金佐明)·김우명(金佑明)·김석주 등과 크게 불화했다. 숙종이 즉위해 남인이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충주에서 조용히 지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민유중은 형 민정중을 도와 남인을 축출하는 데 앞장서 실권을 장악했다. 3년 후에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자 형과 함께 노론이 되었다. 1681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둘째 딸이 송시열과 김석주의 추천으로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다. 이에 임금의 장인인 국구(國舅)가 되어 돈녕부 영사(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종친부는 친척, 돈녕부는 외척을 관리하는 기구였다.
민유중은 이듬해 금위영(禁衛營·왕실 경호 부대) 창설을 주도해 금위대장을 맡았다. 국구로서 병권과 재정권을 장악한 민유중은 전권을 휘둘렀다. 이를 옛날에는 천권(擅權·권력을 마음대로 부림)이라고 했다. 숙종 9년(1683년) 5월 5일 자 《숙종실록》이다. 소론의 윤증을 조정에서 불렀으나 윤증은 과천에 이르러 자기가 대궐에 이를 수 없는 사정을 담아 소(疏)를 올렸다. 그리고 과천까지 찾아온 박세채(朴世采·1631~1695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나갈 수 없는 이유가 셋이 있다. 남인의 원한[怨毒]을 화평하게 할 수 없는 것이 그 하나이고 삼척(三戚)의 위병(威柄·위세)을 제지(制止)할 수 없는 것이 하나이며, 우옹(尤翁·송시열)의 세도(世道)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하나이다.”
이징명의 경고
이에 대한 실록의 풀이다.
“삼척(三戚)이란 두 김가(金家)와 민가(閔家)를 가리킨 것이다. 그때 윤증은 이미 송시열을 배반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뒷날의 화복(禍福)을 깊이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박세채와 더불어 같이 자면서 밤새도록 나눈 이야기는 모두 송시열을 헐뜯고 해치는 말이었으며 또 박세채에게 반드시 송시열과 각립(角立·서로 버팀)하여줄 것을 권하였다.”
두 김가란 김석주의 청풍 김씨와 김장생의 광산 김씨를 가리키는 것이다. 3년 후인 숙종 12년(1686년) 7월 6일 홍문관 부교리 이징명(李徵明·1648~1699년)이 소를 올려 외척을 경계할 것을 건의했다. 노론이었던 이징명은 장희빈 주변을 비판함과 동시에 인현왕후 집안도 함께 겨냥했다.
“오늘날의 외척은 모두가 사류(士類)이므로, 아직은 염려할 만한 자취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처와 봉양에 습성이 바뀌니 인정이 변하기 쉽고, 대간(臺諫)의 탄핵에 충격을 받으면 행여 반성에 어둡기 마련인 만큼 일에 앞서서 경계하는 것은 억측에 가깝다 하더라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옛사람의 명백한 교훈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 곤성(坤聖·왕비)을 면계(勉戒)하고 외척을 칙려(飭勵)하여 근신하시기를 마치 후한(後漢) 명덕황후(明德皇后)의 외가와 같이 하신다면, 국가의 행복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곤성의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아름다운 덕이 또한 영원히 보전되어 휴손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징명의 준엄한 지적에 대해 사관(史官)은 이렇게 평했다.
“이징명이 학식은 모자란다 하더라도 원래 편협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남이 하기 어려운 말을 능히 하여, 그 가세(家世)의 경직(勁直)한 기풍을 떨어뜨리지 않았는데, 그의 말은 기사환국에 이르러 더욱 증험이 되어 드디어 후세 사람의 귀감(龜鑑)이 되었는지라, 온 세상이 다 함께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한다.”
이징명은 송시열 문인으로 현종 말기 갑인예송(甲寅禮訟)이 일어나 송시열을 죽이라는 탄핵이 빗발칠 때 몸소 유생들을 모아 이에 항의하는 소를 올렸다. 그만큼 서인 노론 노선을 강하게 고집한 인물이다. 1689년 노론이 축출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그도 남해로 유배되었다. 관직은 참판급에 머물렀다.
이후 숙종은 더 이상 민유중을 사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민유중은 모든 관직을 내어놓고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다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민유중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민진후(閔鎭厚·1659~1720년)와 민진원(閔鎭遠·1664~1736년)이 현달했다. 특히 민진원은 경종과 영조 때 노론의 영수로 활약했으며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민진후는 인현왕후의 친오빠이고 명성황후의 5대조이다. 어릴 때 송시열에게 수학했고 1686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정자가 되었으나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숙종 20년에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중용되어 형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숙종실록 보궐정오》 숙종 46년(1720년) 5월 13일 자 졸기다.
〈민진후가 내행(內行)을 신칙(申飭)하고 국사(國事)에 근로(勤勞)한 것은 세상에 이론(異論)이 없었다. 그러나 지론(持論)이 편벽되고 가혹하여 당동벌이(黨同伐異)에 과감하였다. 재물을 관장하면서 남은 이익을 추구했고, 여항(閭巷)의 간교한 자들을 높이 써서 한 시대에 폐해를 끼친 것은 그의 단점이다. 그러나 그의 동궁(東宮·훗날의 경종)을 위한 적심(赤心)만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만일 민진후가 생존해 있었다면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의 무리들이 반드시 감히 제멋대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마 이른바 ‘사직(社稷)의 보위(保衛)’라 할 것이다.〉
소론 입장에서 쓴 졸기라 하겠다.
‘노론의 공격수’ 민진원
민진원은 1691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2년 전에 일어난 기사환국과 누이동생 인현왕후의 폐비로 등용되지 못했다.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드디어 등용되어 요직을 두루 거치며 노론의 공격수로 활약하며 소론의 윤증과 박세채 등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숙종 말기 형조·공조·예조·이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다. 특히 숙종이 세상을 떠나고 경종이 즉위하자 김창집·조태채·이이명·이건명 등 노론 4대신을 앞세워 숙빈 최씨 아들 연잉군(延礽君·영조)을 왕세제로 삼을 것을 압박했다. 1721년 신임옥사(辛任獄事)로 노론이 실각하자 성주로 유배되었다.
신임옥사란 노론 4대신이 경종의 병을 이유로 왕세제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장하자 경종이 이를 승인했는데 소론의 조태구(趙泰耉) 등이 그 부당성을 상소함으로써 대리청정이 취소되었고 소론이 역공하여 노론을 축출한 사건을 말한다.
1725년 우여곡절 끝에 영조가 즉위하자 민진원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고 영조가 소론 영수 이광좌(李光佐·1674~1740년)와의 화해를 주선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민진원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죽은 노론 4대신의 복권과 소론 5대신에 대한 탄핵·추탈·부관참시 등을 요구하였다. 1727년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는 정미환국(丁未換局) 때 파직되어 평안도 순안에 안치되었다.
탕평에 동조한 민응수
그런데 이듬해 소론 강경파가 남인과 손을 잡고 삼남(三南) 지역에서 대규모 난을 일으켰다.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그것이다. 이에 소론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된 영조는 노론 강경파의 영수 민진원을 다시 불러들였다. 민진원은 소론과 남인 세력에 대해 ‘이인좌의 잔당’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숙정을 감행했다. 1729년 중추부 영사가 됐고 1736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실록》 12년(1736년) 11월 28일 자 졸기에서 사관은 이렇게 짧게 평했다.
〈성품이 집요(執拗)한데다가 당(黨)에 대한 병통이 가장 고질이었다. 그러나 벼슬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일컬어졌다.〉
민진주의 아들 민응수(閔應洙·1684~1750년)는 집안 노선에 따라 노론을 견지했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해 대사헌을 지냈고 이조·예조·형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른다. 그런데 그는 민진원과 달리 유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26년(1750년) 7월 26일 졸기다.
〈민응수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다고 일컬어졌고 등과 후에는 청요직을 거쳤다. 이때에 조정에서는 붕당을 타파하고 조정(調停)을 하고자 하였는데 민응수가 지론(持論)을 평이하게 하여 조현명(趙顯命)·송인명(宋寅明)과 서로 맞부딪힘이 없자 임금이 드디어 현저하게 탁용(擢用)하여 병조와 이조를 맡은 지 오래지 않아 의정에 올랐다. 마침 그때 삼사에서 이광좌(李光佐)와 조태억(趙泰億)의 추탈(追奪)을 논하자 임금이 진노하여 모두를 내치니 민응수가 전상(殿上)에 올라가 힘써 만류하다가 뜻을 거슬러 사면(辭免)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졸한 것이었다.〉
고종 때 민씨 천하를 이루다
정조나 순조·헌종·철종 때 여흥 민씨는 침체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1864년 1월 16일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1820~1898년)의 아들이 즉위하자 뜻하지 않게 다시 여흥 민씨의 세상이 열린다.
흥미롭게도 대원군의 어머니도 여흥 민씨였고 부인도 여흥 민씨였다. 부인은 인경왕후 민씨 아버지인 민유중의 5대손 민치구(閔致久·1795~1874년)의 딸이다. 민치구는 명성황후 친정아버지 민치록(閔致祿·1800~1858년)과는 10촌 동항렬이다. 민치구는 고종이 즉위해 훗날 공조판서에까지 올랐다.
민규호(閔奎鎬·1836~1878년)는 민유중의 아들 민진원의 5대손이다. 철종 10년(1859년) 문과에 급제했고 고종 4년(1867년) 이조참의가 되어 승승장구했으며 흥선대원군에 맞서 서구 문물에 대한 개국론(開國論)을 주창했다. 훗날 우의정에 올랐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비 순명효황후 민씨 또한 여흥 민씨다.
여흥 민씨는 조선 개국을 함께한 집안임과 동시에 패망을 함께한 집안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부분 조선 말기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항거한 사람과 일본에 굴복한 사람들이 어느 집안보다 많다.⊙
처세에 뛰어났던 민기
민기(閔箕·1504~1568년)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해 명종 시대를 거치며 대사헌, 이조참판, 형조판서,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는 문재(文才)가 뛰어나 조정의 기대를 모았다. 《명종실록》 명종 4년(1549년) 3월 22일 자다. 좌의정 황헌(黃憲)이 아뢰었다.
“정사룡, 남응룡(南應龍), 김주(金澍), 민기는 다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입니다. 신이 그들 문장(文章)의 높낮음은 잘 알지 못하나 이런 사람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그가 이조판서에 임명된 명종 21년(1566년) 1월 18일에 사관은 민기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지략과 계려가 있어 사변을 잘 처리하였다. 소시에 학문이 있었으나 만년에의 소득(所得)은 알 수 없다. 기량이 평탄하고 식려(識慮)가 심원(深遠)하였다. 그러나 집에 있을 적에는 미세(微細)한 조행(操行)을 힘쓰지 않았다.”
민기는 선조 즉위년(1567년) 우의정에 올랐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년(1568년) 2월 1일 자 졸기(卒記)다.
“민기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이이(李珥)가 낭관(郞官)이었는데 언제나 전선(銓選·인사 선발)을 공평히 함으로써 청탁의 길을 막으려 하면, 민기는 곧 ‘너무 지나치게 하다가 일을 발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하였다. 이에 이이가 사람에게 말하기를 ‘민공(閔公)이 뛰어난 재상이기는 하나 다만 소인(小人)을 두려워할 뿐 군자(君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다. 이이가 대답하기를 ‘민공이 만약 군자에게 죄를 얻는다면 현반(顯班)에다 두지 않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나 소인은 성품이 각박하여 만약 서로 거슬렸을 경우 혹 멸족(滅族)의 화도 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민공은 소인을 두려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식자들은 민기를 일러 섭세(涉世)의 재주가 뛰어났다고 하였다.”
섭세(涉世)란 처신섭세(處身涉世)를 말하는 것으로 처세술을 말한다.
폐모에 앞장선 민몽룡
민몽룡(閔夢龍·1550~1618년)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해 요직을 거쳤고 형조판서와 대사헌을 맡아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축출에 앞장섰다. 선조 말 북인(北人)이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열되자 정인홍(鄭仁弘)을 따라 대북이 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을 앞장서서 관철시켰다. 《광해군일기》 광해 10년(1618년) 1월 30일 자에 서궁(西宮·인목대비)을 깎아내리는 절목을 좌의정 한효순(韓孝純·1543~1621년)과 함께 앞장서서 올렸다.
〈존호(尊號)를 낮추고 전에 올린 본국의 존호를 삭제하며,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내오며, 대비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서궁이라 부르며, 국혼(國婚) 때의 납징(納徵)·납폐(納幣) 등 문서를 도로 내오며, 어보(御寶)를 내오고 휘지표신(徽旨標信)을 내오며, 여연(輿輦)·의장(儀仗)을 내오며, 조알(朝謁)·문안(問安)·숙배(肅拜)를 폐지하고, 분사(分司)를 없애며, 공헌(貢獻)을 없애며, 서궁의 진배(進排)는 후궁(後宮)의 예에 따르며, 공주의 늠료(廩料)와 혼인은 옹주(翁主)의 예에 따르며, 아비는 역적의 괴수이고 자신은 역모에 가담했고 아들은 역적의 무리들에 의해 추대된 이상 이미 종묘에서 끊어졌으니 죽은 뒤에는 온 나라 상하가 거애(擧哀)하지 않고 복(服)을 입지 않음은 물론 종묘에 들어갈 수도 없으며, 궁궐 담을 올려 쌓고 파수대를 설치한 다음 무사를 시켜 수직(守直)하게 한다.〉
이에 대한 사관의 비평이 신랄하다.
〈민몽룡이 신임 정승으로서 팔을 걷어붙이고 수염을 휘날리면서 흔연히 떠맡았는데, 폄손하는 절목 일체에 대하여 이이첨(李爾瞻)으로부터 익히 지시를 받은 뒤 물음에 응하여 물 흐르듯 거침없이 외워 나갔으며, 한효순은 머리를 구부린 채 ‘예. 예’ 하고 대답만 할 따름이었다.〉
얼마 후 병으로 사망했으며,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추탈(追奪)당했다. 서인 입장에서 쓴 《광해군일기》 광해 10년(1618년) 5월 13일 자 졸기는 극도로 비판적이다.
〈몽룡은 용렬한 비부(鄙夫)로서 세상의 버림을 받고 오래도록 서위(西衛·무반)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정인홍이 한 번 보고는 남명(南冥)의 기절(氣節)이 있다고 하여 극력 천거하였다. 그러다가 대론(大論·폐모론)이 나오자 앞장서서 떠맡고 나서면서 이이첨과 합동으로 한마음이 된 결과 갑자기 전부(銓部·이조)로 들어가게 되었고 곧바로 정승의 지위에 올랐다. 폄손하는 절목(節目)을 의논할 적에 뻐기면서 의정부에 앉아 턱으로 지시하고 입으로 부르는 등 의기양양했었는데 그 모임이 파하기도 전에 갑자기 뻐개지는 듯한 두통을 느끼고 부축받아 나갔다. 그 길로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사람들이 천벌을 받았다고들 하였다. 그 아내와 장자 민준철(閔濬哲)도 잇달아 죽었다.〉
민기와 민광훈
조선 중·후기 여흥 민씨 번성의 뿌리는 민기(閔機·1568~1641년)다. 민기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7년(선조 30년) 문과에 급제해 외직(外職)을 두루 역임했다. 《인조실록》 인조 3년(1625년) 12월 25일 자 기사다.
“민기를 병조 참지(參知)로 삼았다. 민기는 사람됨이 청백(淸白)하고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인조가 즉위하고서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했으며 인조도 그를 아껴 지방직을 돌던 그를 불러올려 승지로 삼아 가까이에 두었다. 인조 4년(1626년) 9월 19일 자 기록이다. 인조의 말이다.
“민기의 청백함과 선치(善治)에 대해서 내가 전부터 듣고서 가상히 여겨왔다. 그 고을 선비가 올린 상소를 보니 전에 들은 바가 헛말이 아니었다. 뛰어난 수령 한 사람 얻기가 매우 어려운 때이니, 백성을 위해서 죄를 용서하고 그대로 유임시켜 나의 근심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고, 겸하여 그의 선치(善治)를 포상해서 다른 사람들을 분발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정원은 의논해서 아뢰라.”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민기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인조 19년(1641년) 사망하자 송준길(宋浚吉)이 묘표를 짓고 송시열(宋時烈)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이로써 우리는 민기가 서인(西人)이 존중하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민기의 아들 민광훈(閔光勳·1595~ 1659년)은 인조 때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원손(元孫)을 모시고 인근 섬으로 피신하여 공신에 책록되었다. 관직은 호조참의와 강원도 관찰사에까지 올랐다. 당색은 서인 노론(老論)이었다.
민시중과 그의 아들 민진주
민광훈에게는 민시중(閔蓍重· 1625~1677년), 민정중(閔鼎重· 1628~1692년), 민유중(閔維重· 1630~1687년)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민시중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현종 5년(166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다. 특히 경상도 관찰사로 큰 치적을 남겼다. 그는 대사헌에까지 이르렀는데 숙종 3년(1677년) 2월 3일 자 졸기를 보면 “민시중은 민정중의 형인데 재주와 방책은 두 아우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충후(忠厚)함은 앞서므로 당시에 선인(善人)으로 불리었다”라고 평하고 있다. 숙종 초에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다행히 정치적 격랑을 겪지는 않았다.
그의 둘째 아들 민진주(閔鎭周·1646~1700년)는 환국의 파고를 온몸으로 넘어야 했다. 1685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부응교가 되었을 때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이 집권하면서 유배를 가야 했다. 1694년에 다시 서인이 집권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자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간으로 승진했고 도승지에 올랐으며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숙종 26년(1700년) 8월 24일 자 졸기다.
〈민진주는 민시중의 아들로 사람됨이 장자(長者·덕망 있는 사람)답고 후덕하였으며 말과 의논이 강직하였다. 조사석(趙師錫)이 오전(奧殿·중전)의 도움으로 정승에 배명(拜命)되었으나 온 조정이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민진주 홀로 항소(抗疏)로 말하고 거듭 임금의 뜻을 어기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니 청의(淸議)가 옳게 여겼다. 일찍이 부개(副价·부사)로 연경(燕京)에 갔더니, 상사(上使) 서문중(徐文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민모(閔某)는 실로 다른 사람이 알기를 두려워하는 깨끗한 지조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조행(操行)을 가다듬고 구차스럽게 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향용(嚮用·한마음으로 임용함)이 바야흐로 한창이었는데 갑자기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민광훈의 둘째 아들 민정중은 인조 27년(1649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와 승정원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했고 남인에 대해서는 개방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예송(禮訟)논쟁 때는 남인의 주장에 강경하게 반박하기도 했다.
민정중의 사람됨은 매우 강직했다. 《현종실록》 현종 3년(1662년) 6월 10일 대사성 서필원(徐必遠)이 현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민정중처럼 과감하고 강직한 자마저 입을 꾹 다문 채 체직(遞職)되려고만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오늘날의 나랏일이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현종이 점차 서인에 대해서 등을 돌릴 무렵인 현종 14년(1673년) 9월 14일 자에는 다음과 같은 하교가 나온다.
“민정중은 대대로 국록(國祿)을 받은 신하이므로 산림(山林)에서 은거하는 선비와 같지 않은데도, 이때를 당하여 감히 먼 외지에 물러앉아 누차 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더니 지금 또 교외(郊外)에 와 있으면서 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고 있으니, 송 판부사(判府事·송시열)가 한 일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인가? 판부사는 정승의 직을 사면하고 물러갔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으나, 민정중은 누차 온당치 않다는 분부를 내린 연후에야 비로소 올라왔는데 이르는 곳마다 소를 올렸으니 교만하고 방자함이 심하다. 관작을 삭탈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바로 다음 날 민정중을 유배 보낸다.
“민정중의 행신(行身)과 처사(處事)는 조금도 볼 만한 것이 없다.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내려간 것도 명분이 없고 밖에 있으면서 소를 올린 것도 사군자(士君子)의 기풍과 절개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전 정언 성호징이 감히 민정중을 찬양하기를 ‘나오기는 어려워하고 물러가기를 쉽게 하는 것은 사군자의 기풍이요 절개이다’라고 하고, ‘쓸쓸하고 적막한 곳에 스스로 들어 앉는 것은 필시 마음속에 스스로 지키는 바가 있고 시기가 의리상 갑자기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고 하며, ‘전하의 이 일은 정말 천고에 없었던 일이다’고도 하는 등 말을 이리저리 둘러대어 억양(抑揚)하면서 민정중에게 아부하고 임금을 멸시하였으니, 그 정상이 극히 가증스럽다. 엄히 징계하고 다스려 그 죄를 바루지 않을 수 없다.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라.”
현종은 송시열의 제자들이 자신을 농락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노론의 중심이 된 민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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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
“송시열은 당초 ‘임금을 깎아내리고 종통(宗統)을 어지럽혔다’는 것이 그의 죄명인데, 이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원통한 것이고, 남에게 화(禍)를 전가한 자들이 억지로 꾸민 죄목입니다. 지난번에 성상께서 그의 본심을 특별히 살피시어 즉시 양이(量移)토록 명하시니, 보고 듣는 모든 사람이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소결은 이미 아무 허물도 없는 듯이 석방하시는 것인데, 송시열은 일찍이 대신의 반열에 있었고, 또 빈사(賓師)의 지위에 있었으니, 일의 체모로 보아 다른 죄인들과 차이가 있어야겠습니다. 성상께서는 신 등이 문서를 가지고 하나하나 이름을 아뢰기를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참작하여 처리하심이 일의 대체에 맞을 듯합니다.”
한마디로 서둘러 특명으로 송시열을 유배에서 풀어주라는 요청이었고 숙종은 그날 바로 재가했다. 우의정에 오른 지 5개월도 채 안 된 10월 12일 민정중은 좌의정에 오른다. 민정중은 숙종 10년 10월 21일 병을 이유로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경신환국 이후 4년 동안 서인 정권의 핵심 지도자로 떠오른 것이다.
1683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할 때 노론을 선택해 여흥 민씨가 줄곧 송시열 노선을 따른 것은 민정중으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송시열·송준길 등이 가장 중시”
이러다 숙종 15년(1689년) 다시 남인이 집권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하루아침에 신분이 ‘죄인’으로 바뀌었다.
11월 18일 남인 영수 이현일(李玄逸)이 숙종을 뵙고 말했다.
“민정중의 죄악은 하늘에까지 가득 찼는데 어찌 일찍이 대신이었던 사람이라고 해서 끝내 안률(按律)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민정중은 숙종 18년(1692년) 6월 25일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끝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졸기다.
〈전(前) 좌의정 민정중이 (평안북도) 벽동(碧潼)의 적소(謫所·유배지)에서 졸(卒)했는데 65세였다.
민정중은 자(字)가 대수(大受)로 사람됨이 영특(英特)하고 강직하여 굴하지 않았으며 예법으로 자신을 신칙하였다. 일찍이 괴과(魁科·과거)에 올랐고 극력 청의(淸議)를 붙들었으며, 송시열·송준길 등 제현(諸賢)이 가장 중시하는 바가 되었다. 국자감(國子監·성균관)의 장관(長官)이 되어 선비들을 조성해내는 데에 매우 공효가 있게 되므로, 당시에 정엽(鄭曄) 이후의 제일인 사람이라고 했다. 그 뒤 다른 관직에 뽑혀서도 그대로 겸임, 체직되지 않았으며, 게을리하지 않고 교도(敎導)하므로 선비들의 풍습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관북(關北)을 안찰(按察)하게 되어서는, 북쪽의 풍속은 오로지 무예(武藝)만 숭상하고 문사(文事)에는 소홀하여 진실로 친상사장(親上死長·윗사람을 공경하고 어른을 위해 죽는 일)하는 의리에 어두우므로, 비록 재질과 능력이 강건(强健)하여도 쓸 데가 없었다. 드디어 자신이 솔선시범(率先示範)하며 선비들의 교화(敎化)를 크게 천명(闡明)하므로, 얼마 되지 않아서 빈빈(彬彬·문무가 조화를 이룸)해져 볼 만하게 되었다.
그 뒤에 윤휴(尹鑴)와 허적(許積)이 나라의 일을 맡아 보게 되면서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갔었는데, 비록 배척받는 가운데 있었지만 여망(輿望)은 더욱 높아져, 오늘날의 (송나라 명신) 진요옹(陳了翁)이나 (송나라 학자) 유원성(劉元城) 같은 사람이라고 하게 되었다.
경신년의 경화(更化) 때에는 제일 먼저 태부(台府·의정부)에 들어오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 있는 몇 해 동안 한결같이 임금의 덕을 바로잡는 것과 선비들의 공론을 붙잡기에 주력하고, 여타의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만년(晩年)에는 윤증(尹拯)이 스승(송시열)을 배반하는 것을 보자 김수항(金壽恒)과 함께 입대(入對)하여 옳음과 그름을 구별하여 밝히므로 세상의 도의(道義)가 더욱 힘입는 바가 있게 되었다.
기사년의 변(變) 뒤에는 뭇 간신들이 기필코 죽이려고 하면서도 오히려 돌아보며 두렵게 여기는 바가 있어 실행하지 못했다.〉
우의정에 임명되자마자 사망한 민진장
아버지에 이어 정승이 되는 민정중의 아들 민진장(閔鎭長·1649~ 1700년)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숙종 12년(1686년) 문과에 급제해 도승지와 형조·병조·호조판서 등을 두루 거쳐 숙종 26년(1700년)에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명을 받고 숙배(肅拜·임금에게 작별을 아뢰던 일)도 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우의정의 업무는 하루도 보지 못한 정승이라 하겠다.
숙종 26년(1700년) 3월 16일 자 졸기다. 매우 상세하다.
〈민진장은 가정의 행실이 매우 지극하여 아버지 민정중을 섬김에 뜻을 잘 받들어 어김이 없었고 그 어머니가 중병을 앓았는데 밤낮으로 간호(看護)하면서 수십 년을 하루같이 하여 효성이 천성(天性)에서 타고 나와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조정에서 벼슬할 적에는 일을 공평히 처리하고 법을 지켜서 한결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임하고 오랫동안 군국(軍國)의 중요한 임무를 통괄하여 마음과 힘을 다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민정중은 강직(剛直)하고 민진장은 온화 중후하여 부자(父子)가 타고난 성품은 비록 같지 않았으나 성심으로 나라를 위하여 사림을 도와 권장하는 데는 다를 것이 없었다. 한때 사람들이 모두 민정중의 착한 아들이라고 칭송하였고 정승에 임명되자 여론이 만족해하며 앞으로 큰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숙배도 하기 전에 갑자기 죽으니 조야(朝野)에서 매우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숙종의 환국정치
숙종은 1674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임금 자리에 올랐다. 대체로 이런 나이일 경우 수렴청정을 받는 것이 관례였으나 총명했던 그는 곧바로 친정(親政)을 시행했다. 이때 그의 왕비는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로 김장생(金長生)의 증손 김만기(金萬基·1633~1687년)의 딸이었는데, 숙종과의 사이에 딸 둘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본인도 천연두를 앓다가 숙종 6년(1680년) 10월 26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했다.
이듬해 숙종은 계비로 민유중의 딸을 맞아들인다. 환국으로 1689년 폐위되기도 하고 1694년 복위되기도 하는 비운의 왕비다. 또 왕비면서도 후궁 장희빈(張禧嬪)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경신환국은 1680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영의정 허적(許積·1610~ 1680년)의 경솔한 처신이 빌미가 되어 남인 정권이 궤멸한 사건을 말한다. 허적은 조부의 잔치를 위해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유악(油幄·기름칠한 천막)을 숙종 허락도 없이 가져다 써서 숙종의 분노를 샀다. 당시까지 숙종 정권은 남인 일색이었지만 서인 중에서 송시열과는 거리를 둔 김석주(金錫胄·1634~1684년)가 숙종의 외종숙(5촌)으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다가 이때 남인에 일대 타격을 가한 것이다.
경신환국 이후 송시열은 배후에 있고 김석주-김만기-민정중이 연합하여 전면에서 정국을 주도했다. 1683년에 서인은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尹拯·1629~1714년)의 소론(少論)으로 갈라졌다.
노론 정권은 숙종 15년(1689년) 남인들이 지지하던 후궁 장희빈이 낳은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반대하다가 일거에 축출당하고 남인이 집권했다. 이를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그러나 숙종 20년(1694년) 남인이 소수파임에도 독선적임에 넌더리를 느껴 숙종은 마음을 바꿔 다시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과 손을 잡는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금위대장 민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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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 |
민유중은 송준길과 송시열 문인으로 1651년 문과에 급제해 1671년 형조판서·대사헌·호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했다. 송시열·송준길의 산당(山黨)에 속해 김육(金堉)의 한당(漢黨)을 공격하는 데 앞장서 현종비 집안인 김좌명(金佐明)·김우명(金佑明)·김석주 등과 크게 불화했다. 숙종이 즉위해 남인이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충주에서 조용히 지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민유중은 형 민정중을 도와 남인을 축출하는 데 앞장서 실권을 장악했다. 3년 후에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자 형과 함께 노론이 되었다. 1681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둘째 딸이 송시열과 김석주의 추천으로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다. 이에 임금의 장인인 국구(國舅)가 되어 돈녕부 영사(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종친부는 친척, 돈녕부는 외척을 관리하는 기구였다.
민유중은 이듬해 금위영(禁衛營·왕실 경호 부대) 창설을 주도해 금위대장을 맡았다. 국구로서 병권과 재정권을 장악한 민유중은 전권을 휘둘렀다. 이를 옛날에는 천권(擅權·권력을 마음대로 부림)이라고 했다. 숙종 9년(1683년) 5월 5일 자 《숙종실록》이다. 소론의 윤증을 조정에서 불렀으나 윤증은 과천에 이르러 자기가 대궐에 이를 수 없는 사정을 담아 소(疏)를 올렸다. 그리고 과천까지 찾아온 박세채(朴世采·1631~1695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나갈 수 없는 이유가 셋이 있다. 남인의 원한[怨毒]을 화평하게 할 수 없는 것이 그 하나이고 삼척(三戚)의 위병(威柄·위세)을 제지(制止)할 수 없는 것이 하나이며, 우옹(尤翁·송시열)의 세도(世道)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하나이다.”
이징명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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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 민씨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난 후 살았던 서울 안국동 안동별궁. 후에 풍문여고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서울공예박물관이 됐다. 사진=조선DB |
“삼척(三戚)이란 두 김가(金家)와 민가(閔家)를 가리킨 것이다. 그때 윤증은 이미 송시열을 배반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뒷날의 화복(禍福)을 깊이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박세채와 더불어 같이 자면서 밤새도록 나눈 이야기는 모두 송시열을 헐뜯고 해치는 말이었으며 또 박세채에게 반드시 송시열과 각립(角立·서로 버팀)하여줄 것을 권하였다.”
두 김가란 김석주의 청풍 김씨와 김장생의 광산 김씨를 가리키는 것이다. 3년 후인 숙종 12년(1686년) 7월 6일 홍문관 부교리 이징명(李徵明·1648~1699년)이 소를 올려 외척을 경계할 것을 건의했다. 노론이었던 이징명은 장희빈 주변을 비판함과 동시에 인현왕후 집안도 함께 겨냥했다.
“오늘날의 외척은 모두가 사류(士類)이므로, 아직은 염려할 만한 자취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처와 봉양에 습성이 바뀌니 인정이 변하기 쉽고, 대간(臺諫)의 탄핵에 충격을 받으면 행여 반성에 어둡기 마련인 만큼 일에 앞서서 경계하는 것은 억측에 가깝다 하더라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옛사람의 명백한 교훈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 곤성(坤聖·왕비)을 면계(勉戒)하고 외척을 칙려(飭勵)하여 근신하시기를 마치 후한(後漢) 명덕황후(明德皇后)의 외가와 같이 하신다면, 국가의 행복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곤성의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아름다운 덕이 또한 영원히 보전되어 휴손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징명의 준엄한 지적에 대해 사관(史官)은 이렇게 평했다.
“이징명이 학식은 모자란다 하더라도 원래 편협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남이 하기 어려운 말을 능히 하여, 그 가세(家世)의 경직(勁直)한 기풍을 떨어뜨리지 않았는데, 그의 말은 기사환국에 이르러 더욱 증험이 되어 드디어 후세 사람의 귀감(龜鑑)이 되었는지라, 온 세상이 다 함께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한다.”
이징명은 송시열 문인으로 현종 말기 갑인예송(甲寅禮訟)이 일어나 송시열을 죽이라는 탄핵이 빗발칠 때 몸소 유생들을 모아 이에 항의하는 소를 올렸다. 그만큼 서인 노론 노선을 강하게 고집한 인물이다. 1689년 노론이 축출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그도 남해로 유배되었다. 관직은 참판급에 머물렀다.
이후 숙종은 더 이상 민유중을 사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민유중은 모든 관직을 내어놓고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다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민유중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민진후(閔鎭厚·1659~1720년)와 민진원(閔鎭遠·1664~1736년)이 현달했다. 특히 민진원은 경종과 영조 때 노론의 영수로 활약했으며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민진후는 인현왕후의 친오빠이고 명성황후의 5대조이다. 어릴 때 송시열에게 수학했고 1686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정자가 되었으나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숙종 20년에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중용되어 형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숙종실록 보궐정오》 숙종 46년(1720년) 5월 13일 자 졸기다.
〈민진후가 내행(內行)을 신칙(申飭)하고 국사(國事)에 근로(勤勞)한 것은 세상에 이론(異論)이 없었다. 그러나 지론(持論)이 편벽되고 가혹하여 당동벌이(黨同伐異)에 과감하였다. 재물을 관장하면서 남은 이익을 추구했고, 여항(閭巷)의 간교한 자들을 높이 써서 한 시대에 폐해를 끼친 것은 그의 단점이다. 그러나 그의 동궁(東宮·훗날의 경종)을 위한 적심(赤心)만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만일 민진후가 생존해 있었다면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의 무리들이 반드시 감히 제멋대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마 이른바 ‘사직(社稷)의 보위(保衛)’라 할 것이다.〉
소론 입장에서 쓴 졸기라 하겠다.
‘노론의 공격수’ 민진원
민진원은 1691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2년 전에 일어난 기사환국과 누이동생 인현왕후의 폐비로 등용되지 못했다.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드디어 등용되어 요직을 두루 거치며 노론의 공격수로 활약하며 소론의 윤증과 박세채 등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숙종 말기 형조·공조·예조·이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다. 특히 숙종이 세상을 떠나고 경종이 즉위하자 김창집·조태채·이이명·이건명 등 노론 4대신을 앞세워 숙빈 최씨 아들 연잉군(延礽君·영조)을 왕세제로 삼을 것을 압박했다. 1721년 신임옥사(辛任獄事)로 노론이 실각하자 성주로 유배되었다.
신임옥사란 노론 4대신이 경종의 병을 이유로 왕세제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장하자 경종이 이를 승인했는데 소론의 조태구(趙泰耉) 등이 그 부당성을 상소함으로써 대리청정이 취소되었고 소론이 역공하여 노론을 축출한 사건을 말한다.
1725년 우여곡절 끝에 영조가 즉위하자 민진원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고 영조가 소론 영수 이광좌(李光佐·1674~1740년)와의 화해를 주선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민진원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죽은 노론 4대신의 복권과 소론 5대신에 대한 탄핵·추탈·부관참시 등을 요구하였다. 1727년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는 정미환국(丁未換局) 때 파직되어 평안도 순안에 안치되었다.
탕평에 동조한 민응수
그런데 이듬해 소론 강경파가 남인과 손을 잡고 삼남(三南) 지역에서 대규모 난을 일으켰다.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그것이다. 이에 소론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된 영조는 노론 강경파의 영수 민진원을 다시 불러들였다. 민진원은 소론과 남인 세력에 대해 ‘이인좌의 잔당’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숙정을 감행했다. 1729년 중추부 영사가 됐고 1736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실록》 12년(1736년) 11월 28일 자 졸기에서 사관은 이렇게 짧게 평했다.
〈성품이 집요(執拗)한데다가 당(黨)에 대한 병통이 가장 고질이었다. 그러나 벼슬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일컬어졌다.〉
민진주의 아들 민응수(閔應洙·1684~1750년)는 집안 노선에 따라 노론을 견지했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해 대사헌을 지냈고 이조·예조·형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른다. 그런데 그는 민진원과 달리 유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26년(1750년) 7월 26일 졸기다.
〈민응수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다고 일컬어졌고 등과 후에는 청요직을 거쳤다. 이때에 조정에서는 붕당을 타파하고 조정(調停)을 하고자 하였는데 민응수가 지론(持論)을 평이하게 하여 조현명(趙顯命)·송인명(宋寅明)과 서로 맞부딪힘이 없자 임금이 드디어 현저하게 탁용(擢用)하여 병조와 이조를 맡은 지 오래지 않아 의정에 올랐다. 마침 그때 삼사에서 이광좌(李光佐)와 조태억(趙泰億)의 추탈(追奪)을 논하자 임금이 진노하여 모두를 내치니 민응수가 전상(殿上)에 올라가 힘써 만류하다가 뜻을 거슬러 사면(辭免)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졸한 것이었다.〉
고종 때 민씨 천하를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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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민씨의 아버지 민치록의 묘. 사진=조선DB |
흥미롭게도 대원군의 어머니도 여흥 민씨였고 부인도 여흥 민씨였다. 부인은 인경왕후 민씨 아버지인 민유중의 5대손 민치구(閔致久·1795~1874년)의 딸이다. 민치구는 명성황후 친정아버지 민치록(閔致祿·1800~1858년)과는 10촌 동항렬이다. 민치구는 고종이 즉위해 훗날 공조판서에까지 올랐다.
민규호(閔奎鎬·1836~1878년)는 민유중의 아들 민진원의 5대손이다. 철종 10년(1859년) 문과에 급제했고 고종 4년(1867년) 이조참의가 되어 승승장구했으며 흥선대원군에 맞서 서구 문물에 대한 개국론(開國論)을 주창했다. 훗날 우의정에 올랐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비 순명효황후 민씨 또한 여흥 민씨다.
여흥 민씨는 조선 개국을 함께한 집안임과 동시에 패망을 함께한 집안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부분 조선 말기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항거한 사람과 일본에 굴복한 사람들이 어느 집안보다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