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자호란 때 자결한 김상용은 우의정, 척화파 김상헌은 좌의정 지내
⊙ 노론의 선봉 김수흥·김수항, 영의정 지냈으나 당쟁 와중에 비극적 최후
⊙ “김수항은 처음부터 송시열에게 마음을 바쳐 그의 말이면 어기는 것이 없었다”(실록)
⊙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안동 김씨 세도의 길 열려
⊙ 김좌근, 김홍근, 김흥근 등 정승 자리에 올라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노론의 선봉 김수흥·김수항, 영의정 지냈으나 당쟁 와중에 비극적 최후
⊙ “김수항은 처음부터 송시열에게 마음을 바쳐 그의 말이면 어기는 것이 없었다”(실록)
⊙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안동 김씨 세도의 길 열려
⊙ 김좌근, 김홍근, 김흥근 등 정승 자리에 올라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김조순
자료를 보면 성씨별 정승 배출 순위에서 전주 이씨(22명), 동래 정씨(16명) 다음으로 안동 김씨(15명)가 바로 뒤를 잇는다. 이는 아마도 순조 때부터 안동 김씨 외척(外戚) 정치 시대가 열린 것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다음으로 청송 심씨(13명), 청주 한씨(12명), 파평 윤씨(11명), 여흥 민씨(11명)가 뒤를 잇는다. 전주 이씨와 동래 정씨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왕실 외척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 중에서 안동 김씨와 여흥 민씨는 당쟁(黨爭)과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모두 서인(西人)-노론(老論)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때 자결한 김상용
조선 중후기 안동 김씨의 도약은 김상헌(金尙憲·1570~1652년)에서 비롯된다. 사실 그는 한양에서 태어났고 집안은 그저 그런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것이 전부였고 아버지 김극효(金克孝·1542~1618년) 또한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한 진사였고 정승 정유길(鄭惟吉)에게서 학문을 익히고 그의 사위가 되면서 돈령부(敦寧府) 동지사가 된 것이 전부다. 돈령부란 외척을 관리하는 부서이고 종친을 관리하는 종친부(宗親府)와 대비를 이룬다. 즉 김상헌 외할아버지가 정유길이었다.
김극효에게는 김상용(金尙容·1561~1637년)과 김상헌을 포함한 다섯 아들이 있었다. 김상용은 장남, 김상헌은 넷째였다. 김상용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고 좌의정 정철(鄭澈)의 종사관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삼촌인 도원수 권율(權慄·1537~1599년)을 따라 영호남을 누볐다. 권율은 이항복(李恒福·1556~1618년)의 장인이었으니 김상용은 이항복과도 인척지간인 셈이었다.
전란이 한창이던 1594년 한 살 아래 부인 권씨가 33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김상용은 김장생(金長生)의 누이와 재혼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1598년 승지에 올랐다. 그의 졸기(卒記)는 이렇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했으며 선조를 섬겨 청직(淸職)과 화직(華職)을 두루 역임했으며 임금이 싫어해도 해야 할 일을 만나면 극언하였다. 광해군 때에 참여하지 않아 화가 임박했는데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먼저 들어가 사태가 급박해지자 남문루에 올라 화약을 장치한 뒤 손자 한 명, 노비 한 명과 함께 불에 뛰어들어 분사(焚死)했다. 그래서 졸기는 “정승으로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는 충분하다”고 평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광해군과도 인척 관계였다는 점이다. 정유길의 딸이 광해군 장인 유자신(柳自新)과 혼인하였으니 유자신은 김상용에게 이모부였고 광해군과는 이종사촌 간이었다.
광해군 때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廢母論)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인목대비가 폐비되자 강원도로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다시 부름을 받아 집권당 김장생의 매부이기도 했기에 여러 판서를 두루 거친 후에 1629년 우의정에 올랐다.
절의의 상징 김상헌
형 김상용이 벼슬길을 열었다면 동생 김상헌은 절의(節義)로 이름을 날렸다. 임란 중이던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다. 요직을 거쳐 광해군 4년(1611년) 동부승지가 되어 왕의 지근거리에서 일을 하였다. 그런데 북인(北人) 정권을 이끌던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배척하자 정인홍을 탄핵했다가 광주부사로 좌천되었다. 1613년 조작 논란이 있는 칠서지옥(七庶之獄)이 터져 인목대비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사형을 당할 때 김상헌 아들 김광찬(金光燦)이 김제남 아들 김래의 사위라 하여 파직되었고 이에 경상도 안동으로 내려가서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이조참의로 조정에 복귀하지만 공신들의 보합(保合) 정치에 반대하며 강경파로서 청서파(淸西派)를 이끌며 당파 영수로 떠올랐다. 이후 육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지만 1632년 인조 아버지 원종(元宗)을 추존하려는 인조의 뜻에 반대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서 최명길의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였으며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안동으로 물러나 지냈다. 1639년에 청(淸)나라가 명(明)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로 압송되어 6년 동안 억류 생활을 했고 이후 귀국하여 1645년에 좌의정에 제수되었다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후 송시열(宋時烈·1607~1689년), 김집(金集)의 노론 강경파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김상용·김상헌 형제가 모두 정승에 오르기는 했으나 다분히 상징적이었다. 당쟁 시대에 접어들어 김수흥(金壽興·1626~1690년)·김수항(金壽恒·1629~1689년) 형제가 정승에 오른다. 두 사람의 아버지 김광찬(金光燦·1597~1668년)은 본래 김상관의 아들이었으나 김상헌의 양자로 들어갔다. 김래의 딸과 결혼한 그 아들이다. 김광찬은 진사시에 그쳐 현달하지 못했고 군수와 목사 등을 지냈다.
송시열이 산림(山林)의 이론가였다면 김수흥·김수항은 조정의 행동가였다고 할 수 있다. 송시열은 김상헌을 사모하였기에 이들의 결합은 서인-노론의 법통(法統)이라 할 수 있다.
김수흥은 30세 때인 효종 6년(1655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효종 때는 김상헌-송시열의 영향력이 극에 이르던 때라 김수흥의 관리 생활도 탄탄대로였다. 현종 초기에도 대사간, 동부승지, 경기관찰사 등을 지냈고 현종 14년(1673년)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문과에 급제한 지 20년도 되지 않아 정승에 오른 것이다. 그는 이재(吏才)가 출중했다. 졸기의 일부다.
“문사(文詞)는 (동생인) 김수항보다 못하였으나 또한 아량이 있어 쓸 만하였다. 간사(幹事)하는 기량이 남보다 뛰어나서 과단(果斷)하고 민첩하게 처리하였으므로, 탁지(度支·호조)의 정사(政事)는 사람들이 근세에 드문 것으로 일컬었다.”
그는 현종 15년 4월 영의정에 오르지만 곧바로 험로(險路)를 만나게 된다. 예송(禮訟) 논쟁이다.
도신징의 상소
현종의 친모 인선대비가 세상을 떠나고 자의왕대비의 복제가 대공복(大功服·9개월 상복)으로 정해져 5개월이 흐른 현종 15년(1674년) 7월 6일 남인(南人) 계통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정국을 뒤흔드는 소를 올렸다. 이 소는 남인들의 논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실은 이 당시 서인들에 대한 현종 자신의 생각을 거의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왕대비께서 인선왕후를 위해 입는 복에 대해 처음에는 기년복(朞年服·1년 상복)으로 정하였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쳤는데 이는 어떤 전례를 따라 한 것입니까? 대체로 큰아들이나 큰며느리를 위해 입는 복은 모두 기년의 제도로 되어 있으니 이는 국조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기해년 국상 때에 왕대비께서 입은 기년복의 제도에 대해서 이미 ‘국조 전례에 따라 거행한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정한 대공복은 또 국조 전례에서 벗어났으니, 왜 이렇게 전후가 다르단 말입니까.
만약 주공(周公)이 제정한 ‘큰며느리를 위해서는 대공복을 입어준다’는 예에 따라 행하였다고 한다면, 《주례(周禮)》 가운데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고 큰며느리를 위해서는 대공복을 입는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모두 후세에서 준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나라 위징(魏徵)이 건의하여 이 부분을 고쳤고, 송나라 주자도 고전을 모아 《가례(家禮)》를 편찬하면서 ‘큰며느리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어준다’고 하였고, 명나라 구준(丘濬)이 《가례의절(家禮儀節)》을 편찬할 적에도 변동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리고 본조(조선)의 선정신(先正臣·옛 명신) 정구(鄭逑)가 만든 〈오복도(五服圖)〉 가운데 《주례》의 ‘큰며느리는 대공복을 입어준다’는 것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의심스러운 것은 그대로 전하는 ‘춘추(春秋)’의 예를 지킨 것일 뿐이지 후세에서 따라 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큰며느리에 대해 기년복을 입어주는 것은 역대 여러 선비들이 짐작해 정한 것으로서 성인이 나오더라도 개정할 수 없다는 것이 이처럼 명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사로운 견해로 참작해 가까운 명나라가 제정한 제도를 버리고 저 멀리 삼대(三代)의 옛날 예를 취하였으니 전도(轉倒)된 것이 아닙니까. 더구나 일찍이 국가에서 제정한 예에 따라 기해년에는 큰아들에 대한 기년복을 입어주었는데, 반대로 지금에 와서는 국가에서 제정한 뭇 며느리에게 입어주는 복을 입게 하면서 《예경(禮經)》에 지장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의리가 후일에 관계됩니다.
왜냐하면, 왕대비의 위치에서 볼 때 전하가 만일 뭇 며느리한테서 탄생한 것으로 친다면 전하는 서손(庶孫)이 되는데, 왕대비께서 춘추가 한이 있어 뒷날 돌아가셨을 경우 전하께서 왕대비를 위해 감히 중대한 대통을 전해받은 적장손(嫡長孫)으로 자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중대한 대통을 이어받아 종사의 주인이 되었는데도 적장자나 적장손이 되지 못한 경우가 과연 있었습니까. 전하께서 적장손으로 자처하신다면 양세(兩世)를 위해 복을 입어드리는 의리에 있어서 앞뒤가 다르게 되었으니 천리의 절문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무릇 혈기가 있는 사람치고 어느 누가 놀라고 분개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안으로는 울분을 품고도 겉으로는 서로가 경계하고 주의시키면서 아직까지도 누구 하나 전하를 위해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라는 한 글자가 세상 사람들이 기피하는 바가 되어 사람마다 제 몸을 아끼느라 감히 입을 열지 못하더니 더없이 중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러한 때를 당해서도 일절 침묵을 지키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어, 조정에 공론이 없어지고 재야의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참으로 선뜻 깨닫고 즉시 반성하여 예관으로 하여금 자세히 전례를 상고토록 분명하게 지시해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 올바른 제도로 회복시킨 다음, 후회한다는 전교를 널리 내려 안팎의 의혹을 말끔히 씻어준다면, 상례 치르는 예에 여한이 없을 것이고 적장손의 의리도 밝혀질 것입니다. 떳떳한 법을 바로잡아 도에 합치되게 하는 것이 참으로 이 일에 달려 있으며, 말 한마디로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오늘입니다. 이렇게 하였는데도 능히 백성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국시를 확실히 정하지 못하게 된다면, 망령된 말을 한 죄로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신은 실로 달게 여기겠습니다.
신이 대궐문 앞에서 이마를 조아린 지 반 달이 지났는데도 시종 기각을 당하기만 하였으니, 국가의 언로가 막혔으며 백성의 목숨이 장차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신이 말하려 하는 것은 오늘날 복을 낮추어 입은 잘못에 대한 것일 뿐인데, 승정원이 금지령을 어기고 예를 논한다는 말로 억압하면서 받아주지 않고 물리쳤습니다. 아, 기해년의 기년복에 대해서는 경상도 선비들이 올린 소로 인해 이미 교서를 반포하고 금령을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공복에 대해서는 금령을 만들지도 않았는데 지레 막아버리니 정원의 의도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과거에 기년복으로 정할 때 근거로 한 것은 국조 전례였는데 지금 대공복으로 정한 것은 상고해볼 데가 없으니, 맹자가 이른바 ‘예가 아닌 예’라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대공복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미천한 자들도 알 수 있는데 잘 알고 있을 정원으로서 이렇게까지 막아 가리고 있으니, 전하께서 너무 고립되어 있습니다. 재야의 아름다운 말이 어디에서 올 수 있겠습니까. 진(秦)나라는 시서(詩書)를 읽지 못하도록 금령을 만들었다가 결국 나라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성스러운 이 시대에 예경을 논하지 말라는 금령을 새로 만들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이 소를 올려 한번 깨닫게 되기를 기대하였는데 안에서 저지하니 뜻을 못 펴고 되돌아가다 넘어져 죽을 뿐입니다만, 국가가 장차 어느 지경에 놓일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조여들고 말이 움츠러들어 뜻대로 다 쓰지 못하였습니다. 대궐을 향해 절하고 하직하면서 통곡할 뿐입니다.〉
서인에게 고립된 현종
도신징 상소의 요지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송시열을 필두로 한 예론이 실은 효종을 서자로 취급하는 논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상소를 승정원에 포진된 서인 세력이 반달 동안이나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국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셔야 하는 승지들까지 자기편이 아니라는 데 현종은 경악했다. 도신징의 말대로 자신은 고립돼 있었다.
도신징의 상소가 올라오자마자 대사간으로 임명된 전 예조참판 김익경이 현종을 찾아와 인피(引避)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김익경은 김장생의 손자였다. 인피란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이 관직을 내놓고 물러나 처벌을 기다리겠다는 뜻을 말한다.
“삼가 듣건대, 어떤 유생이 소를 올려 왕대비께서 입은 복제에 대해 예조에서 정한 것이 예에 맞지 않다고 논하였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가 하달되지 않아 어떻게 말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는 데다가 또 옳고 그름과 잘잘못에 대해 지레 논해 가릴 필요는 없습니다만, 신은 그 당시 예관의 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일종의 선수를 치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도신징의 상소가 현종에게 전달되자마자 승정원에 포진된 서인 계통의 승지들이 김익경을 비롯한 서인의 핵심 인사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현종이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인 진영은 불안과 공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전전긍긍(戰戰兢兢). ‘과연 주상은 이 일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가?’
현종의 반격
김익경이 인피하자 사간원의 사간 이하진, 정언 안후태 등이 엄호사격에 나섰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이 일로 인피할 것까지야 뭐가 있겠습니까. 김익경으로 하여금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그러나 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하진이나 안후태의 지원 논리는 무성의한 것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 아니라 ‘잘못된 일’이라고 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닷새 후인 7월 11일 사헌부 장령 이광적이 나서 “상복 제도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데 유생이 올린 소는 망령되고 그릇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제대로 분변하지 못하여 공론으로부터의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하진과 안후태는 좌천시키고 김익경은 출사하게 하소서”라고 소를 올렸다.
‘공론으로부터의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또 공론인가?’ 현종이 볼 때 서인들의 ‘노는 꼴’이 가관이었지만 일단은 이광적의 상소를 받아들여 이하진과 안후태를 체차(遞差)하였다. 체차란 현직에서 내쫓았다는 뜻이다.
이때 현종은 몸이 좋지 않은 데다가 치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틈틈이 공부하고 연마해온 예론 탐구를 바탕으로 도신징의 상소에 대한 치밀한 검토에 들어갔다. 검토 결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현종은 7월 13일 영의정 김수흥을 비롯한 대신들을 부른다.
현종은 먼저 영의정 김수흥에게 질문을 던진다.
“왕대비께서 입을 상복 제도에 대해 예조가 처음엔 기년복으로 의논해 정하여 들였다가 뒤이어 대공복으로 고친 것은 무슨 곡절 때문에 그런 것인가?”
이 말을 듣는 순간 김수흥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송시열이 있었다.
송시열과 김상헌
송시열은 예론이라는 이론 면에서는 김장생·김집의 정신을 계승했다면 절의의 현실 정치에서는 김상헌을 이었다. 송시열에게 김장생·김집 부자가 마음이었다면 김상헌은 몸이었다. 송시열은 1645년(인조 23년) 경기도 모처에 은거하고 있던 김상헌을 직접 찾아뵈었고 자신의 아버지 송갑조의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하기도 했다. 당시 산림들 사이에 묘갈명을 부탁한다는 것은 그만큼 존경한다는 뜻이었다. 김상헌 또한 송시열을 ‘태평책을 품은 경세가’ ‘주자(朱子)를 이은 종유(宗儒)’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 김상헌은 75세였고 송시열은 38세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후 3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김수흥의 입장에서 보자면 효종을 서자로 보는 서인의 예론은 단순히 왕권(王權)에 대한 반대를 넘어 할아버지의 절개를 드높이 숭상하는 사안이기도 했다. 현종의 질문에 김수흥은 간단하게 답한다.
“기해년에 이미 기년복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현종을 너무 얕잡아본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현종은 예론에 관한 이론 무장을 거의 끝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때의 이야기를 다 기억은 못 하지만 중국 고대(古代)의 예법이 아닌 국제(國制)에 따라 1년 복으로 정한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이번 왕대비의 대공복도 국제에 따른 것인가?”
궁지에 몰린 김수흥
고례(古禮)란 주나라 예법인 주례(周禮)를 의미하고 국제란 《경국대전》에 명문화돼 있는 예법을 말한다. 주례에 따르면 장자(長子)의 상에는 참최복(斬衰服·3년 상복)을 입어야 하고 나머지 아들(衆子)의 상에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반면 국제에 따르면 장자와 중자는 구별 없이 그 상에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명확한 사실은 효종이 승하한 기해년 때 자의왕대비는 기년복을 입었다. 그런데 현종은 국제에 따랐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내심’ 고례를 따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문제는 다시 인선왕후가 죽자 자의왕대비의 복제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었다. 서인들도 외형적으로는 국제를 따랐다고 이야기를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자의왕대비의 복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제에 따라 기년복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서인들도 더 이상 내심을 숨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무리수를 써가며 기년복을 대공복으로 바꾼 것인데 도신징의 상소가 계기가 되어 자신들의 의도가 만천하에, 그것도 현종 앞에서 드러나게 돼버린 것이었다.
김수흥은 “고례에 따르면 대공복입니다”라고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문제는 이럴 경우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 점을 현종은 놓치지 않았다.
“기해년에는 국제를 사용하고 오늘날에는 옛날의 예를 쓰자는 말인데 왜 앞뒤가 다른가?”
김수흥이 “기해년에도 고례와 국제를 함께 참작해 사용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한 것”이라고 얼버무리며 넘어가려 하자 현종은 평소와 달리 단호함을 보였다.
“그렇지 않다. 그때는 분명 국제를 썼던 것이고 그 뒤 문제가 되어 고례대로 하자는 다툼이 있었을 뿐이다.”
김수흥이 수세에 몰리자 같은 서인 계열의 행(行)호조판서 민유중(閔維重·1630~1687년)이 거들고 나섰다.
“기해년에는 고례와 국제를 함께 참작해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들은 척도 아니하고 다시 김수흥에게 따져 물었다.
“자, 그러면 국제에 따를 경우 이번에는 어떤 복이 되는가?”
김수흥은 “국제에는 맏며느리의 복은 기년으로 되어 있습니다”고 답한다. 이에 현종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얼굴에도 노기(怒氣)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 왕대비께서 거행하고 있는 대공복은 국제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건 놀라운 일이다. 기해년에 사용한 것은 국제였지 고례가 아니다. 만일 경들의 주장대로 기해년에 고례와 국제를 함께 참작해 사용했다고 한다면 오늘날 대공복은 국제를 참작한 것이 뭐가 있는가? 내 실로 이해가 안 간다.”
맏며느리라면, 즉 효종을 장자로 간주했다면 국제로 하더라도 대공복이 아닌가 하는 정면 반박이었다. ‘효종을 적장자로 삼을 수 없다’는 서인들의 묵계(默契)는 하나둘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현종이 다시 한 번 “기해년에 조정에서 결정한 것은 국제를 따른 것”이라고 못 박으려 하자 결국 김수흥은 본심을 드러낸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례를 따랐기 때문에 따지는 자가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너무 나갔다. 현종은 확실하게 논의의 주도권을 잡았다.
“고례에서 장자의 복은 어떻게 되는가?”
김수흥으로서는 “참최 3년 복입니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모순의 덫에 단단히 걸려들었다. 자기 입으로 기해년에는 국제가 아닌 고례를 따랐다고 해놓고 장자의 복은 참최 3년 복이라고 말해버렸으니 당시 현종은 장자가 아닌 중자(衆子)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 돼버린 것이다.
현종의 환국
상황은 끝났다. 그때야 현종은 도신징의 상소를 김수흥에게 내보이며 읽어볼 것을 권한다. 김수흥과의 논쟁을 통해 현종은 자기 아버지가 서인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인조의 서자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더불어 도신징의 상소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후 현종은 자의왕대비의 복제를 기년복으로 바꾸고 영의정 김수흥을 춘천으로 귀양 보냈다. 또 예론의 주무부서인 예조의 판서·참판 등을 하옥한 다음 귀양을 보냈다. 그러고 충주에 물러나 있던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1610~1680년)을 불러올려 영의정으로 삼았다. 전광석화 같은 조치를 통해 정권 교체를 추진한 것이다. 훗날 숙종이 여러 차례 보여주게 되는 환국(換局)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송논쟁 불과 한 달여 만인 8월 10일 갑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던 현종이 위독한 상태에 빠진다. 허적이 명을 받고 한양으로 들어온 것은 8월 16일. 영의정 허적은 남인이었지만 좌의정 김수항, 우의정 정지화 등은 서인이었다. 김수항은 김수흥의 동생이었다.
송시열의 추종자 김수항
김수항은 김광찬의 셋째 아들이다. 노선은 김상헌·송시열·송준길 노선이었고 남인과는 분명한 대립을 보였다. 1651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서 효종 때 요직을 거쳐 현종 때 예조·이조참판을 거쳐 도승지와 대사헌을 거쳐 이조·예조·형조판서등을 두루 지냈고 현종 13년 44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올라 정승이 되었다.
이후 숙종 시대가 열리자 영욕이 교차하게 되는데 1차 경신환국 때는 남인들의 죄를 앞장서서 다스렸고 남인의 영수 윤휴(尹鑴·1617~1680년)와 허목(許穆·1595~1682년)을 처형하라는 여론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에 8년 동안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서인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러나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 정권이 세워지자 김수항도 전라도 진도로 위리안치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약(賜藥)을 받았다. 송시열도 같은 시기에 사약을 받았다. 졸기 그대로이다.
“김수항은 처음부터 송시열에게 마음을 바쳐 그의 말이면 어기는 것이 없었으며, 오로지 이것을 가계(家計)로 삼아 거의 옳다는 것은 있어도 그르다는 것은 없었다.”
형 김수흥도 숙종기에 부침을 거듭하며 한때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으나 동생이 죽은 이듬해인 1690년 유배지 경상도 장기(포항)에서 숨을 거두었다.
전형적으로 임금의 재상이 아니라 당파의 재상이었던 두 사람의 비극적 결말이라 하겠다.
두 사람의 형 김수증(金壽增·1624 ~1701년)은 어려서부터 조부 김상헌을 모시며 송시열은 사우(師友)로 삼아 가까이 지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그는 이런저런 중간급 관직을 지내면서 노론계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강원도 화천 화악산 북쪽에 거처를 마련하고 주희의 무이구곡을 본떠 자기 호를 붙여 곡운구곡(谷雲九曲)이라 이름 짓고 천수를 누렸다.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아버지에 이어 사사된 김창집
김수항에게는 창(昌)자 돌림 여섯 아들이 있어 흔히 육창(六昌)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아버지가 사사되자 김창집(金昌集·1648~1722년)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학문이나 글씨 혹은 그림에 전념하며 세상과 거리를 두었다.
김창집은 숙종 10년(168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살이에 나선다. 남들보다 많이 늦은 36세에 문과에 급제하게 된 데는 현종 말기 아버지가 유배를 갔기 때문이었다. 경신환국(1680년)이 일어나 남인들이 축출되고 서인들이 다시 득세하자 비로소 문과에 응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9년 후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유배지 진도에서 사사되자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관직을 멀리하고 향리에 머물렀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집권해 김창집도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했고 이후 동부승지·대사간 등도 받지 않았다. 그 후 철원부사로 민정을 잘 다스려 호조·이조·형조판서를 거쳐 1706년에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고 1717년 영의정이 되었다.
김창집은 숙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 원상(院相)이 되어 정사를 주도했다. 이때 경종이 즉위하여 34세가 되었는데 후사가 없어 노론과 소론(少論)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김창집은 중추부 영사 이이명(), 판사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과 함께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세우기로 하고 김 대비의 후원을 얻었다. 이들이 바로 노론 사대신(四大臣)이다.
그러나 경종비 어씨와 소론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여 결국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등이 주도한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인 1722년 경상도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아버지 김수항에 이어 부자가 사사된 것이다.
김창협(金昌協·1651~1708년)은 형 창집보다 빠른 숙종 8년(1682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쾌속 승진하여 동부승지, 대사성, 대사간 등을 지냈고 청풍부사로 있을 때 아버지 김수항이 사사되자 사직하고 형과 함께 지금의 경기도 포천인 영평(永平)으로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아버지가 신원되고 조정에서도 대제학과 예조판서 등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설을 절충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문장과 시에도 능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호는 농암(農巖)이다.
김창흡(金昌翕·1653~1722년)은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사사되자 형들을 따라 영평에 은거하면서 《장자(莊子)》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읽으며 시름을 달래고 세상을 멀리했으며 뒤에 성리학과 문장을 파고들어 일가를 이루었다.
김창업(金昌業·1658~1721년)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영평에 숨어 지냈다. 그림에 능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의 〈추강만박도(秋江晩泊圖)〉라는 그림이 전해진다.
김창즙(金昌緝·1662~1713년)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다고 한다. 제자로 유척기(兪拓基·1691~1767년)가 있다. 유척기는 훗날 영의정에 이른다.
순조의 장인 김조순
안동 김씨, 흔히 장동(壯洞) 김씨의 번성은 김창집의 현손(玄孫) 김조순(金祖淳·1765~1832년)에 이르러 활짝 열리게 된다. 흔히 세도 정치라고 하는 안동 김씨의 외척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마치 중국 한(漢)나라 말기의 외척 왕(王)씨를 떠올리게 할 정도다.
영조 시대에는 안동 김씨가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 김조순은 정조 9년(1785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어 정조가 중시했던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었다. 김조순은 1788년 규장각 대교(待敎)로 있으면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 투쟁에서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주장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3세였다. 김조순의 신중한 언행과 처신은 이미 어려서부터 탁월했다. 이후 김조순은 유연성을 발휘하면서 시파로 돌았고 정조의 노선을 도왔다.
이에 정조의 적극적 의지로 세자를 사위로 맞았다. 순조가 즉위하자 김조순에게 병조판서·이조판서 등이 제수되었으나 그는 진심으로 사양하며 순조를 뒤에서 도왔다. 그는 실권(實權)이 있는 자리는 맡지 않고 당연히 정승에도 오르지 않았다.
안동 김씨 세도 정치
김조순에게는 김유근(), 김원근(金元根), 김좌근(金左根)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김유근은 예조판서, 김원근은 이조참판에 올랐고 김좌근은 세도 정치의 중심에 서서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된다.
김좌근은 마흔 살이 넘은 1838년(헌종 4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당시 전권을 행사하던 대비의 동생이라는 배경으로 그는 일찌감치 이조판서·병조판서를 지냈다. 철종 1년(1850년)에는 총융사(摠戎使)를 맡아 병권(兵權)을 장악했고 당시 이반하던 민심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두루 판서를 지냈고 영의정만 세 번 보직되어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자 요직에서 물러났다.
고종 6년(1869년) 4월 25일 실록 졸기를 보면 그의 사람됨에 대해 “반듯한 마음가짐과 공평한 일 처리”를 칭찬하고 있다.
김창집의 아들 대에서 갈려 김조순의 사촌 김명순(金明淳)은 이조참판을 지냈고 그 두 아들 김홍근(金弘根·1788~1842년)과 김흥근(金興根·1796~1870년)은 모두 정승에 올랐다. 흥선대원군에게 훗날 석파정(石坡亭)이 된 별장을 빼앗긴 주인공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때 자결한 김상용
조선 중후기 안동 김씨의 도약은 김상헌(金尙憲·1570~1652년)에서 비롯된다. 사실 그는 한양에서 태어났고 집안은 그저 그런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것이 전부였고 아버지 김극효(金克孝·1542~1618년) 또한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한 진사였고 정승 정유길(鄭惟吉)에게서 학문을 익히고 그의 사위가 되면서 돈령부(敦寧府) 동지사가 된 것이 전부다. 돈령부란 외척을 관리하는 부서이고 종친을 관리하는 종친부(宗親府)와 대비를 이룬다. 즉 김상헌 외할아버지가 정유길이었다.
김극효에게는 김상용(金尙容·1561~1637년)과 김상헌을 포함한 다섯 아들이 있었다. 김상용은 장남, 김상헌은 넷째였다. 김상용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고 좌의정 정철(鄭澈)의 종사관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삼촌인 도원수 권율(權慄·1537~1599년)을 따라 영호남을 누볐다. 권율은 이항복(李恒福·1556~1618년)의 장인이었으니 김상용은 이항복과도 인척지간인 셈이었다.
전란이 한창이던 1594년 한 살 아래 부인 권씨가 33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김상용은 김장생(金長生)의 누이와 재혼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1598년 승지에 올랐다. 그의 졸기(卒記)는 이렇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했으며 선조를 섬겨 청직(淸職)과 화직(華職)을 두루 역임했으며 임금이 싫어해도 해야 할 일을 만나면 극언하였다. 광해군 때에 참여하지 않아 화가 임박했는데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먼저 들어가 사태가 급박해지자 남문루에 올라 화약을 장치한 뒤 손자 한 명, 노비 한 명과 함께 불에 뛰어들어 분사(焚死)했다. 그래서 졸기는 “정승으로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는 충분하다”고 평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광해군과도 인척 관계였다는 점이다. 정유길의 딸이 광해군 장인 유자신(柳自新)과 혼인하였으니 유자신은 김상용에게 이모부였고 광해군과는 이종사촌 간이었다.
광해군 때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廢母論)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인목대비가 폐비되자 강원도로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다시 부름을 받아 집권당 김장생의 매부이기도 했기에 여러 판서를 두루 거친 후에 1629년 우의정에 올랐다.
절의의 상징 김상헌
형 김상용이 벼슬길을 열었다면 동생 김상헌은 절의(節義)로 이름을 날렸다. 임란 중이던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다. 요직을 거쳐 광해군 4년(1611년) 동부승지가 되어 왕의 지근거리에서 일을 하였다. 그런데 북인(北人) 정권을 이끌던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배척하자 정인홍을 탄핵했다가 광주부사로 좌천되었다. 1613년 조작 논란이 있는 칠서지옥(七庶之獄)이 터져 인목대비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사형을 당할 때 김상헌 아들 김광찬(金光燦)이 김제남 아들 김래의 사위라 하여 파직되었고 이에 경상도 안동으로 내려가서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이조참의로 조정에 복귀하지만 공신들의 보합(保合) 정치에 반대하며 강경파로서 청서파(淸西派)를 이끌며 당파 영수로 떠올랐다. 이후 육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지만 1632년 인조 아버지 원종(元宗)을 추존하려는 인조의 뜻에 반대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서 최명길의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였으며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안동으로 물러나 지냈다. 1639년에 청(淸)나라가 명(明)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로 압송되어 6년 동안 억류 생활을 했고 이후 귀국하여 1645년에 좌의정에 제수되었다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후 송시열(宋時烈·1607~1689년), 김집(金集)의 노론 강경파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김상용·김상헌 형제가 모두 정승에 오르기는 했으나 다분히 상징적이었다. 당쟁 시대에 접어들어 김수흥(金壽興·1626~1690년)·김수항(金壽恒·1629~1689년) 형제가 정승에 오른다. 두 사람의 아버지 김광찬(金光燦·1597~1668년)은 본래 김상관의 아들이었으나 김상헌의 양자로 들어갔다. 김래의 딸과 결혼한 그 아들이다. 김광찬은 진사시에 그쳐 현달하지 못했고 군수와 목사 등을 지냈다.
송시열이 산림(山林)의 이론가였다면 김수흥·김수항은 조정의 행동가였다고 할 수 있다. 송시열은 김상헌을 사모하였기에 이들의 결합은 서인-노론의 법통(法統)이라 할 수 있다.
김수흥은 30세 때인 효종 6년(1655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효종 때는 김상헌-송시열의 영향력이 극에 이르던 때라 김수흥의 관리 생활도 탄탄대로였다. 현종 초기에도 대사간, 동부승지, 경기관찰사 등을 지냈고 현종 14년(1673년)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문과에 급제한 지 20년도 되지 않아 정승에 오른 것이다. 그는 이재(吏才)가 출중했다. 졸기의 일부다.
“문사(文詞)는 (동생인) 김수항보다 못하였으나 또한 아량이 있어 쓸 만하였다. 간사(幹事)하는 기량이 남보다 뛰어나서 과단(果斷)하고 민첩하게 처리하였으므로, 탁지(度支·호조)의 정사(政事)는 사람들이 근세에 드문 것으로 일컬었다.”
그는 현종 15년 4월 영의정에 오르지만 곧바로 험로(險路)를 만나게 된다. 예송(禮訟) 논쟁이다.
도신징의 상소
현종의 친모 인선대비가 세상을 떠나고 자의왕대비의 복제가 대공복(大功服·9개월 상복)으로 정해져 5개월이 흐른 현종 15년(1674년) 7월 6일 남인(南人) 계통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정국을 뒤흔드는 소를 올렸다. 이 소는 남인들의 논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실은 이 당시 서인들에 대한 현종 자신의 생각을 거의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왕대비께서 인선왕후를 위해 입는 복에 대해 처음에는 기년복(朞年服·1년 상복)으로 정하였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쳤는데 이는 어떤 전례를 따라 한 것입니까? 대체로 큰아들이나 큰며느리를 위해 입는 복은 모두 기년의 제도로 되어 있으니 이는 국조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기해년 국상 때에 왕대비께서 입은 기년복의 제도에 대해서 이미 ‘국조 전례에 따라 거행한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정한 대공복은 또 국조 전례에서 벗어났으니, 왜 이렇게 전후가 다르단 말입니까.
만약 주공(周公)이 제정한 ‘큰며느리를 위해서는 대공복을 입어준다’는 예에 따라 행하였다고 한다면, 《주례(周禮)》 가운데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고 큰며느리를 위해서는 대공복을 입는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모두 후세에서 준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나라 위징(魏徵)이 건의하여 이 부분을 고쳤고, 송나라 주자도 고전을 모아 《가례(家禮)》를 편찬하면서 ‘큰며느리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어준다’고 하였고, 명나라 구준(丘濬)이 《가례의절(家禮儀節)》을 편찬할 적에도 변동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리고 본조(조선)의 선정신(先正臣·옛 명신) 정구(鄭逑)가 만든 〈오복도(五服圖)〉 가운데 《주례》의 ‘큰며느리는 대공복을 입어준다’는 것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의심스러운 것은 그대로 전하는 ‘춘추(春秋)’의 예를 지킨 것일 뿐이지 후세에서 따라 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큰며느리에 대해 기년복을 입어주는 것은 역대 여러 선비들이 짐작해 정한 것으로서 성인이 나오더라도 개정할 수 없다는 것이 이처럼 명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사로운 견해로 참작해 가까운 명나라가 제정한 제도를 버리고 저 멀리 삼대(三代)의 옛날 예를 취하였으니 전도(轉倒)된 것이 아닙니까. 더구나 일찍이 국가에서 제정한 예에 따라 기해년에는 큰아들에 대한 기년복을 입어주었는데, 반대로 지금에 와서는 국가에서 제정한 뭇 며느리에게 입어주는 복을 입게 하면서 《예경(禮經)》에 지장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의리가 후일에 관계됩니다.
왜냐하면, 왕대비의 위치에서 볼 때 전하가 만일 뭇 며느리한테서 탄생한 것으로 친다면 전하는 서손(庶孫)이 되는데, 왕대비께서 춘추가 한이 있어 뒷날 돌아가셨을 경우 전하께서 왕대비를 위해 감히 중대한 대통을 전해받은 적장손(嫡長孫)으로 자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중대한 대통을 이어받아 종사의 주인이 되었는데도 적장자나 적장손이 되지 못한 경우가 과연 있었습니까. 전하께서 적장손으로 자처하신다면 양세(兩世)를 위해 복을 입어드리는 의리에 있어서 앞뒤가 다르게 되었으니 천리의 절문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무릇 혈기가 있는 사람치고 어느 누가 놀라고 분개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안으로는 울분을 품고도 겉으로는 서로가 경계하고 주의시키면서 아직까지도 누구 하나 전하를 위해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라는 한 글자가 세상 사람들이 기피하는 바가 되어 사람마다 제 몸을 아끼느라 감히 입을 열지 못하더니 더없이 중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러한 때를 당해서도 일절 침묵을 지키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어, 조정에 공론이 없어지고 재야의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참으로 선뜻 깨닫고 즉시 반성하여 예관으로 하여금 자세히 전례를 상고토록 분명하게 지시해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 올바른 제도로 회복시킨 다음, 후회한다는 전교를 널리 내려 안팎의 의혹을 말끔히 씻어준다면, 상례 치르는 예에 여한이 없을 것이고 적장손의 의리도 밝혀질 것입니다. 떳떳한 법을 바로잡아 도에 합치되게 하는 것이 참으로 이 일에 달려 있으며, 말 한마디로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오늘입니다. 이렇게 하였는데도 능히 백성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국시를 확실히 정하지 못하게 된다면, 망령된 말을 한 죄로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신은 실로 달게 여기겠습니다.
신이 대궐문 앞에서 이마를 조아린 지 반 달이 지났는데도 시종 기각을 당하기만 하였으니, 국가의 언로가 막혔으며 백성의 목숨이 장차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신이 말하려 하는 것은 오늘날 복을 낮추어 입은 잘못에 대한 것일 뿐인데, 승정원이 금지령을 어기고 예를 논한다는 말로 억압하면서 받아주지 않고 물리쳤습니다. 아, 기해년의 기년복에 대해서는 경상도 선비들이 올린 소로 인해 이미 교서를 반포하고 금령을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공복에 대해서는 금령을 만들지도 않았는데 지레 막아버리니 정원의 의도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과거에 기년복으로 정할 때 근거로 한 것은 국조 전례였는데 지금 대공복으로 정한 것은 상고해볼 데가 없으니, 맹자가 이른바 ‘예가 아닌 예’라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대공복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미천한 자들도 알 수 있는데 잘 알고 있을 정원으로서 이렇게까지 막아 가리고 있으니, 전하께서 너무 고립되어 있습니다. 재야의 아름다운 말이 어디에서 올 수 있겠습니까. 진(秦)나라는 시서(詩書)를 읽지 못하도록 금령을 만들었다가 결국 나라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성스러운 이 시대에 예경을 논하지 말라는 금령을 새로 만들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이 소를 올려 한번 깨닫게 되기를 기대하였는데 안에서 저지하니 뜻을 못 펴고 되돌아가다 넘어져 죽을 뿐입니다만, 국가가 장차 어느 지경에 놓일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조여들고 말이 움츠러들어 뜻대로 다 쓰지 못하였습니다. 대궐을 향해 절하고 하직하면서 통곡할 뿐입니다.〉
서인에게 고립된 현종
도신징 상소의 요지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송시열을 필두로 한 예론이 실은 효종을 서자로 취급하는 논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상소를 승정원에 포진된 서인 세력이 반달 동안이나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국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셔야 하는 승지들까지 자기편이 아니라는 데 현종은 경악했다. 도신징의 말대로 자신은 고립돼 있었다.
도신징의 상소가 올라오자마자 대사간으로 임명된 전 예조참판 김익경이 현종을 찾아와 인피(引避)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김익경은 김장생의 손자였다. 인피란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이 관직을 내놓고 물러나 처벌을 기다리겠다는 뜻을 말한다.
“삼가 듣건대, 어떤 유생이 소를 올려 왕대비께서 입은 복제에 대해 예조에서 정한 것이 예에 맞지 않다고 논하였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가 하달되지 않아 어떻게 말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는 데다가 또 옳고 그름과 잘잘못에 대해 지레 논해 가릴 필요는 없습니다만, 신은 그 당시 예관의 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일종의 선수를 치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도신징의 상소가 현종에게 전달되자마자 승정원에 포진된 서인 계통의 승지들이 김익경을 비롯한 서인의 핵심 인사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현종이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인 진영은 불안과 공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전전긍긍(戰戰兢兢). ‘과연 주상은 이 일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가?’
현종의 반격
김익경이 인피하자 사간원의 사간 이하진, 정언 안후태 등이 엄호사격에 나섰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이 일로 인피할 것까지야 뭐가 있겠습니까. 김익경으로 하여금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그러나 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하진이나 안후태의 지원 논리는 무성의한 것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 아니라 ‘잘못된 일’이라고 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닷새 후인 7월 11일 사헌부 장령 이광적이 나서 “상복 제도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데 유생이 올린 소는 망령되고 그릇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제대로 분변하지 못하여 공론으로부터의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하진과 안후태는 좌천시키고 김익경은 출사하게 하소서”라고 소를 올렸다.
‘공론으로부터의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또 공론인가?’ 현종이 볼 때 서인들의 ‘노는 꼴’이 가관이었지만 일단은 이광적의 상소를 받아들여 이하진과 안후태를 체차(遞差)하였다. 체차란 현직에서 내쫓았다는 뜻이다.
이때 현종은 몸이 좋지 않은 데다가 치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틈틈이 공부하고 연마해온 예론 탐구를 바탕으로 도신징의 상소에 대한 치밀한 검토에 들어갔다. 검토 결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현종은 7월 13일 영의정 김수흥을 비롯한 대신들을 부른다.
현종은 먼저 영의정 김수흥에게 질문을 던진다.
“왕대비께서 입을 상복 제도에 대해 예조가 처음엔 기년복으로 의논해 정하여 들였다가 뒤이어 대공복으로 고친 것은 무슨 곡절 때문에 그런 것인가?”
이 말을 듣는 순간 김수흥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송시열이 있었다.
송시열과 김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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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
김수흥의 입장에서 보자면 효종을 서자로 보는 서인의 예론은 단순히 왕권(王權)에 대한 반대를 넘어 할아버지의 절개를 드높이 숭상하는 사안이기도 했다. 현종의 질문에 김수흥은 간단하게 답한다.
“기해년에 이미 기년복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현종을 너무 얕잡아본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현종은 예론에 관한 이론 무장을 거의 끝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때의 이야기를 다 기억은 못 하지만 중국 고대(古代)의 예법이 아닌 국제(國制)에 따라 1년 복으로 정한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이번 왕대비의 대공복도 국제에 따른 것인가?”
궁지에 몰린 김수흥
고례(古禮)란 주나라 예법인 주례(周禮)를 의미하고 국제란 《경국대전》에 명문화돼 있는 예법을 말한다. 주례에 따르면 장자(長子)의 상에는 참최복(斬衰服·3년 상복)을 입어야 하고 나머지 아들(衆子)의 상에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반면 국제에 따르면 장자와 중자는 구별 없이 그 상에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명확한 사실은 효종이 승하한 기해년 때 자의왕대비는 기년복을 입었다. 그런데 현종은 국제에 따랐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내심’ 고례를 따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문제는 다시 인선왕후가 죽자 자의왕대비의 복제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었다. 서인들도 외형적으로는 국제를 따랐다고 이야기를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자의왕대비의 복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제에 따라 기년복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서인들도 더 이상 내심을 숨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무리수를 써가며 기년복을 대공복으로 바꾼 것인데 도신징의 상소가 계기가 되어 자신들의 의도가 만천하에, 그것도 현종 앞에서 드러나게 돼버린 것이었다.
김수흥은 “고례에 따르면 대공복입니다”라고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문제는 이럴 경우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 점을 현종은 놓치지 않았다.
“기해년에는 국제를 사용하고 오늘날에는 옛날의 예를 쓰자는 말인데 왜 앞뒤가 다른가?”
김수흥이 “기해년에도 고례와 국제를 함께 참작해 사용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한 것”이라고 얼버무리며 넘어가려 하자 현종은 평소와 달리 단호함을 보였다.
“그렇지 않다. 그때는 분명 국제를 썼던 것이고 그 뒤 문제가 되어 고례대로 하자는 다툼이 있었을 뿐이다.”
김수흥이 수세에 몰리자 같은 서인 계열의 행(行)호조판서 민유중(閔維重·1630~1687년)이 거들고 나섰다.
“기해년에는 고례와 국제를 함께 참작해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들은 척도 아니하고 다시 김수흥에게 따져 물었다.
“자, 그러면 국제에 따를 경우 이번에는 어떤 복이 되는가?”
김수흥은 “국제에는 맏며느리의 복은 기년으로 되어 있습니다”고 답한다. 이에 현종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얼굴에도 노기(怒氣)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 왕대비께서 거행하고 있는 대공복은 국제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건 놀라운 일이다. 기해년에 사용한 것은 국제였지 고례가 아니다. 만일 경들의 주장대로 기해년에 고례와 국제를 함께 참작해 사용했다고 한다면 오늘날 대공복은 국제를 참작한 것이 뭐가 있는가? 내 실로 이해가 안 간다.”
맏며느리라면, 즉 효종을 장자로 간주했다면 국제로 하더라도 대공복이 아닌가 하는 정면 반박이었다. ‘효종을 적장자로 삼을 수 없다’는 서인들의 묵계(默契)는 하나둘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현종이 다시 한 번 “기해년에 조정에서 결정한 것은 국제를 따른 것”이라고 못 박으려 하자 결국 김수흥은 본심을 드러낸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례를 따랐기 때문에 따지는 자가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너무 나갔다. 현종은 확실하게 논의의 주도권을 잡았다.
“고례에서 장자의 복은 어떻게 되는가?”
김수흥으로서는 “참최 3년 복입니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모순의 덫에 단단히 걸려들었다. 자기 입으로 기해년에는 국제가 아닌 고례를 따랐다고 해놓고 장자의 복은 참최 3년 복이라고 말해버렸으니 당시 현종은 장자가 아닌 중자(衆子)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 돼버린 것이다.
현종의 환국
상황은 끝났다. 그때야 현종은 도신징의 상소를 김수흥에게 내보이며 읽어볼 것을 권한다. 김수흥과의 논쟁을 통해 현종은 자기 아버지가 서인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인조의 서자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더불어 도신징의 상소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후 현종은 자의왕대비의 복제를 기년복으로 바꾸고 영의정 김수흥을 춘천으로 귀양 보냈다. 또 예론의 주무부서인 예조의 판서·참판 등을 하옥한 다음 귀양을 보냈다. 그러고 충주에 물러나 있던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1610~1680년)을 불러올려 영의정으로 삼았다. 전광석화 같은 조치를 통해 정권 교체를 추진한 것이다. 훗날 숙종이 여러 차례 보여주게 되는 환국(換局)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송논쟁 불과 한 달여 만인 8월 10일 갑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던 현종이 위독한 상태에 빠진다. 허적이 명을 받고 한양으로 들어온 것은 8월 16일. 영의정 허적은 남인이었지만 좌의정 김수항, 우의정 정지화 등은 서인이었다. 김수항은 김수흥의 동생이었다.
송시열의 추종자 김수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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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항 |
이후 숙종 시대가 열리자 영욕이 교차하게 되는데 1차 경신환국 때는 남인들의 죄를 앞장서서 다스렸고 남인의 영수 윤휴(尹鑴·1617~1680년)와 허목(許穆·1595~1682년)을 처형하라는 여론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에 8년 동안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서인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러나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 정권이 세워지자 김수항도 전라도 진도로 위리안치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약(賜藥)을 받았다. 송시열도 같은 시기에 사약을 받았다. 졸기 그대로이다.
“김수항은 처음부터 송시열에게 마음을 바쳐 그의 말이면 어기는 것이 없었으며, 오로지 이것을 가계(家計)로 삼아 거의 옳다는 것은 있어도 그르다는 것은 없었다.”
형 김수흥도 숙종기에 부침을 거듭하며 한때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으나 동생이 죽은 이듬해인 1690년 유배지 경상도 장기(포항)에서 숨을 거두었다.
전형적으로 임금의 재상이 아니라 당파의 재상이었던 두 사람의 비극적 결말이라 하겠다.
두 사람의 형 김수증(金壽增·1624 ~1701년)은 어려서부터 조부 김상헌을 모시며 송시열은 사우(師友)로 삼아 가까이 지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그는 이런저런 중간급 관직을 지내면서 노론계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강원도 화천 화악산 북쪽에 거처를 마련하고 주희의 무이구곡을 본떠 자기 호를 붙여 곡운구곡(谷雲九曲)이라 이름 짓고 천수를 누렸다.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아버지에 이어 사사된 김창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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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집 |
김창집은 숙종 10년(168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살이에 나선다. 남들보다 많이 늦은 36세에 문과에 급제하게 된 데는 현종 말기 아버지가 유배를 갔기 때문이었다. 경신환국(1680년)이 일어나 남인들이 축출되고 서인들이 다시 득세하자 비로소 문과에 응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9년 후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유배지 진도에서 사사되자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관직을 멀리하고 향리에 머물렀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집권해 김창집도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했고 이후 동부승지·대사간 등도 받지 않았다. 그 후 철원부사로 민정을 잘 다스려 호조·이조·형조판서를 거쳐 1706년에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고 1717년 영의정이 되었다.
김창집은 숙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 원상(院相)이 되어 정사를 주도했다. 이때 경종이 즉위하여 34세가 되었는데 후사가 없어 노론과 소론(少論)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김창집은 중추부 영사 이이명(), 판사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과 함께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세우기로 하고 김 대비의 후원을 얻었다. 이들이 바로 노론 사대신(四大臣)이다.
그러나 경종비 어씨와 소론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여 결국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등이 주도한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인 1722년 경상도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아버지 김수항에 이어 부자가 사사된 것이다.
김창협(金昌協·1651~1708년)은 형 창집보다 빠른 숙종 8년(1682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쾌속 승진하여 동부승지, 대사성, 대사간 등을 지냈고 청풍부사로 있을 때 아버지 김수항이 사사되자 사직하고 형과 함께 지금의 경기도 포천인 영평(永平)으로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아버지가 신원되고 조정에서도 대제학과 예조판서 등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설을 절충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문장과 시에도 능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호는 농암(農巖)이다.
김창흡(金昌翕·1653~1722년)은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사사되자 형들을 따라 영평에 은거하면서 《장자(莊子)》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읽으며 시름을 달래고 세상을 멀리했으며 뒤에 성리학과 문장을 파고들어 일가를 이루었다.
김창업(金昌業·1658~1721년)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영평에 숨어 지냈다. 그림에 능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의 〈추강만박도(秋江晩泊圖)〉라는 그림이 전해진다.
김창즙(金昌緝·1662~1713년)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다고 한다. 제자로 유척기(兪拓基·1691~1767년)가 있다. 유척기는 훗날 영의정에 이른다.
순조의 장인 김조순
안동 김씨, 흔히 장동(壯洞) 김씨의 번성은 김창집의 현손(玄孫) 김조순(金祖淳·1765~1832년)에 이르러 활짝 열리게 된다. 흔히 세도 정치라고 하는 안동 김씨의 외척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마치 중국 한(漢)나라 말기의 외척 왕(王)씨를 떠올리게 할 정도다.
영조 시대에는 안동 김씨가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 김조순은 정조 9년(1785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어 정조가 중시했던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었다. 김조순은 1788년 규장각 대교(待敎)로 있으면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 투쟁에서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주장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3세였다. 김조순의 신중한 언행과 처신은 이미 어려서부터 탁월했다. 이후 김조순은 유연성을 발휘하면서 시파로 돌았고 정조의 노선을 도왔다.
이에 정조의 적극적 의지로 세자를 사위로 맞았다. 순조가 즉위하자 김조순에게 병조판서·이조판서 등이 제수되었으나 그는 진심으로 사양하며 순조를 뒤에서 도왔다. 그는 실권(實權)이 있는 자리는 맡지 않고 당연히 정승에도 오르지 않았다.
안동 김씨 세도 정치
김조순에게는 김유근(), 김원근(金元根), 김좌근(金左根)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김유근은 예조판서, 김원근은 이조참판에 올랐고 김좌근은 세도 정치의 중심에 서서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된다.
김좌근은 마흔 살이 넘은 1838년(헌종 4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당시 전권을 행사하던 대비의 동생이라는 배경으로 그는 일찌감치 이조판서·병조판서를 지냈다. 철종 1년(1850년)에는 총융사(摠戎使)를 맡아 병권(兵權)을 장악했고 당시 이반하던 민심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두루 판서를 지냈고 영의정만 세 번 보직되어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자 요직에서 물러났다.
고종 6년(1869년) 4월 25일 실록 졸기를 보면 그의 사람됨에 대해 “반듯한 마음가짐과 공평한 일 처리”를 칭찬하고 있다.
김창집의 아들 대에서 갈려 김조순의 사촌 김명순(金明淳)은 이조참판을 지냈고 그 두 아들 김홍근(金弘根·1788~1842년)과 김흥근(金興根·1796~1870년)은 모두 정승에 올랐다. 흥선대원군에게 훗날 석파정(石坡亭)이 된 별장을 빼앗긴 주인공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