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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재상 열전 20 | 김육(金堉)전

백성의 삶을 정치하는 최우선으로 삼은 ‘대동법 재상’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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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법 실시, 화폐 유통, 수레 도입 등 주장
⊙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나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일을 당하면 할 말을 다 했다”(실록 졸기)
⊙ “회포가 있을 때마다 임금에게 아뢰었는데, 비록 엄중한 견책을 받아도 굽힌 바가 없었다”(이경석)
⊙ 죽기 직전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서 세자의 스승으로 정적인 송시열·송준길 추천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김육
  ‘대동법 재상’ 김육(金堉·1580~ 1658년)은 본관은 청풍(淸風)이고 호는 잠곡(潛谷)으로 선조 13년(1580년) 한양 마포의 외조부 조신창(趙新昌)의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 김흥우(金興宇·1564~1594년)는 사마시에 급제했지만 벼슬이 참봉에 머물렀고 성혼(成渾)과 이이(李珥) 문하에 출입했다. 훗날 김육이 서인(西人)으로 분류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김비(金棐)가 임지인 평안도 강동현에 갈 때 7~8세 무렵의 김육이 따라갔다가 마침 그곳으로 유배온 퇴계 제자 조호익(曺好益·1545~1609년)을 만나 경전을 익혔다. 조호익은 특히 《주역》에 밝아 이에 관한 여러 책을 지었다. 훗날 김육이 서인의 주자학 일변도에 국한되지 않고 열린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데는 어릴 때 조호익으로부터 감화받은 바가 컸기 때문이다.
 
 
  10년간 은거
 
김장생
  김육은 25세 때인 1605년(선조 38년)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성균관 시절 그는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를 올려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5인을 문묘에 종사(宗祀)해달라 청했다. 당시 북인(北人) 정권의 실력자였던 정인홍(鄭仁弘·1536~1623년)은 이에 반대했다. 이 사건 때문에 문과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는 금고(禁錮)를 당하자 김육은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潛谷)으로 가 은거하였다. 그는 당시 심정을 ‘유감(有感)’이라는 시(詩)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세상의 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으니
  슬픈 마음 그 어찌 말로 다 풀어내리
  봄바람 불 때 두 줄기 눈물 흘리며
  깊은 산속에 홀로 누워 지내노라.”

 
  이곳에 머물며 회정당(晦靜堂)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학문을 닦았다. 이때 스스로 호를 잠곡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10여 년에 걸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은거 생활이 이어졌다. 형편조차 넉넉지 않았다. 남의 밭의 김을 매주고 숯을 구워 팔아 근근이 끼니를 이어나갔다. 이런 빈궁한 생활이 훗날 그가 정치인으로서 무엇보다 민생(民生)을 첫머리에 두는 계기가 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623년, 그의 나이 43세 때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서인 세상이 열렸다. 반정 직후 광해군 시절 직언하다가 죄를 입은 유생과 학행(學行)이 있는 유생을 발탁해 6품직을 제수했는데 이때 김육의 이름은 김장생(金長生·1548~1631년)의 아들 김집(金集·1574~1656년)과 함께 학행 유생에 포함돼 있었다. 이듬해인 1624년(인조 2년) 9월 29일에 김육은 증광 별시에서 문과에 급제했다.
 
  문과 급제 후 김육의 벼슬 생활은 주로 사간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인조 3년(1625년) 7월 3일에는 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 문학(文學)에 제수됐는데 당시 실록은 그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김육은 천성이 본디 단정하고 성실하며 지조가 있었다. 일찍이 혼조(昏朝·광해군 조정)에서는 과거에 응시할 생각을 버리고 산골짜기에서 몸소 농사를 지어 사뭇 옛사람의 풍도가 있었고 반정 뒤에 맨 먼저 학행으로 발탁되었다.〉
 
  인조 7년(1629년), 순조로운 벼슬살이에 처음으로 위기가 찾아온다. 인사 문제를 조정하려다가 오히려 공격을 당해 하옥되었다가 축출되었다. 이때는 강관(講官)으로서의 공로로 하사 받은 호피(虎皮)로 전답을 사서 한적하게 지냈다. 이 당시 그의 학문은 공리공담(空理空談)보다는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잡학(雜學)에 관심을 쏟았다. 군사, 천문, 지리, 의학, 산학 등이었다. 3년 후인 인조 10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다.
 
 
  명나라에서 맞은 병자호란
 
  인조 14년(1626년) 병자년 3월 5일 김육은 동지사(冬至使)에 제배(除拜)됐다. 이때는 명(明)나라와 청(淸)나라의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을 때였다. 김육 비명(碑銘)에 이경석(李景奭·1595~1671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꺼리었으나 공은 태연히 길을 나서 8월에 남신구(南汛口)에 정박하였다. 그때 청나라 군사가 이미 명나라 수도 연경(燕京)을 육박하는데도 도독(都督) 진홍범(陳洪範)은 군사를 거느리고 관문(關門) 밖에 있는지라 공이 서찰을 보내어 대의(大義)로 격동시키니, 진홍범이 부끄럽게 여기어 그 군졸이 11월에 연경에 도착하였다. 그때 천하가 전란에 빠졌는데, 공만 일찍 하례(賀禮)의 사절로 도착하였으므로 예부상서(禮部尙書) 강봉원(姜逢元)이 위로하고 절일(節日)에는 함께 참례(參禮)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대우였다. 정축년(丁丑年·1637년 인조 15년) 2월에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기 앞서 명나라에서 관례에 따라 연회를 베풀어주려고 하자 공은 국모[國母·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의 상중(喪中)이라고 하여 사양하고 또 은(銀) 값을 쳐서 주는 것을 사양하였다. 우리나라가 전란(戰亂)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듣고 공이 동쪽을 향해 통곡하니, 중국 사람 또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었다. 전후로 각부(閣部)에서 올린 공문 10여 건이 우리나라의 정황을 아뢴 것으로, 황제가 우리 조정의 성의를 가상히 여기고 힘이 부족한 것을 민망히 여겨 상을 후히 내림과 아울러 병부(兵部)에 명하여 3000의 병력으로 호송하여 바다로 나가게 하였다. 도중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임명되었는데 임무를 보고하고 나서 사양하여 면직되었다. 예조(禮曹)를 거쳐 승정원(承政院)으로 들어가 주상이 내린 하교에 불평(不平)한 내용이 있는 것을 보고는 봉하여 다시 올리고 얼마 안 되어 사직하였다.〉
 
  김육은 명나라에서 병자호란을 맞았던 것이다.
 
 
  충청도 관찰사로 대동법 시행
 
  인조 16년(1638년) 6월 25일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된다. 그의 문집에 〈호서대동절목서(湖西大同節目序)〉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 공직에 임하는 그의 자세가 생생하게 적혀 있다. 호서란 충청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군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려서는 학문에 힘쓰고 학문을 닦아서는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 도덕을 닦고 관직을 받는 것이 어찌 이록(利祿)을 위하고 명예를 노려서이겠는가? 장차 그 뜻을 실천하여 백성들에게 펴고자 하는 것이다. 관직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진실로 그 뜻을 시행하는 데 뜻을 둔다면 성현의 말씀을 법으로 삼아야 한다. 한 고을에서 시행하면 한 고을이 편해지고 한 나라에서 시행하면 그 나라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며 온 천하에 시행하면 온 천하의 백성들을 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부임한 지 석 달 후인 9월 27일 실록이다.
 
  〈충청감사 김육이 치계(馳啟)했다.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법(大同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서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에 무슨 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도내(道內) 결부(結負)의 수를 모두 계산해 보건대, 매결(每結) 각각 면포(綿布) 1필과 쌀 2말씩 내면 진상하는 공물(貢物)의 값과 본도의 잡역(雜役)인 전선(戰船), 쇄마(刷馬) 및 관청에 바치는 물건이 모두 그 속에 포함되어도 오히려 남는 것이 수만입니다. 지난날 권반(權盼·1564~1631년)이 감사가 되었을 때에 도내의 수령들과 더불어 이 법을 시행하려다가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만약 시행하면 백성 한 사람도 괴롭히지 않고 번거롭게 호령도 하지 않으며 면포 1필과 쌀 2말 이외에 다시 징수하는 명목도 없을 것이니,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은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비국(備局·비변사)이 회계(回啓)했다.
 
  “이 상정(詳定·그 지방 특성에 따라 알맞게 조정한 세금 규정)은 바로 고(故) 신 권반이 일찍이 상세하게 만든 것인데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식자들이 지금까지 한스럽게 여깁니다. 만약 지금 시행한다면 공사(公私) 양편 모두가 이로울 것이고 서울과 지방이 모두 편리할 것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낱낱이 상고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청렴 근신하고 바르고 곧아”
 
  인조 17년(1639년) 12월 11일 김육은 관찰사 임기를 마치고 동부승지로 중앙에 복귀한다. 2년 정도 승정원 승지 직을 순환하던 김육은 인조 19년 홍문관 부제학이 되고 이어 대사간으로 옮긴다. 인조 21년(1643년) 5월 21일 김육은 한성부 우윤(右尹·부시장)에 제수된다. 이때 사관의 평이다.
 
  〈김육은 청렴 근신하며 바르고 곧아 승정원에 오래 있는 동안 상의 총애가 융숭하였는데 마침내 초탁(超擢)하였다.〉
 
  당시 인조가 김육을 얼마나 총애했는지는 두 달 후인 7월 13일 김육을 도승지로 삼은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김육은 심양(瀋陽)에 원손(元孫) 보양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원손이란 소현세자의 아들이다. 또 김육은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그의 애책문(哀冊文)을 짓기도 했다.
 
  이러다 인조 24년(1646년) 2월 인조는 세자빈 강씨가 음식에 독을 넣었다며 억지를 부리는데, 이때 약방제조 도제조 김류(金瑬· 1571~1648년)와 부제조 김육이 자기에게 그 음식을 들었는지 여부를 물어보지 않았다며 내친다. 당시 김육은 예조판서이기도 했는데 인조는 김육이 일찍이 강씨에게 후하게 했고 또 원손 보양관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비호(庇護)한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이듬해 송도유수(松都留守)가 되어 다시 관직으로 돌아온다. 비명은 송도유수 김육의 활약상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부임하여 먼저 교도(敎導)의 정사를 펴고 선비들을 교육하고 학궁(學宮)의 양쪽 곁채를 새로 단장하고 대성전(大成殿)의 제전(祭奠)을 반드시 몸소 드리었다. 그리고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이 순절(殉節)한 곳에다 성인비(成仁碑)를 세우고 《논어(論語)》의 정문(正文)과 《효충전경(孝忠全經)》을 간행하여 배포하고 노인을 우대하고 선행을 표창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고 돌아올 때 수레를 붙잡고 사모하였다.〉
 
  인조 27년(1649년), 김육은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간다. 나이가 이미 70세로 남들 같았으면 벼슬에서 물러나야 할 때였다. 그해 5월 인조가 승하하자 김육은 임시 예조판서로 불려와 장례를 흠결 없이 치러낸다.
 
 
  우의정 되자마자 대동법 확대 실시 주장
 
  효종(孝宗)은 즉위하자마자 8월 28일 김육을 대사헌으로 삼았다가 곧바로 9월 1일 우의정에 제수한다. 좌의정은 조익(趙翼·1579~1655년)이었다.
 
  우의정 김육은 재상으로서 제일 먼저 대동법 확대를 실시했다. 또 그는 역법(曆法)에도 조예가 깊었다. 모두 잠곡 시절 공부해두었던 정책들이었다. 효종 즉위년(1649년) 12월 3일 실록이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조익이 나아가 아뢰었다.
 
  “왕정(王政) 가운데서 큰 것으로는 대동법보다 큰 것이 없는데 어찌 한두 가지 일이 불편하다 하여 행하지 않겠습니까.”
 
  우의정 김육이 아뢰었다.
 
  “대동법은 지금 모든 조례(條例)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김육이 또 아뢰었다.
 
  “신이 일찍이 관상감 제조를 지내어서 역법(曆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함을 압니다. 역법은 반드시 100년 혹은 50년에 한 번씩 바꾸어야 하는데 지금 쓰고 있는 역은 바로 허형(許衡) 등이 만든 법으로 이미 400년이 되었으니 어찌 변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 서양(西洋)의 새 법에는 견해가 없지 않으니 그 법을 참고해서 고쳐야 합니다.”
 
  상이 말했다.
 
  “그 가운데서도 역시 옳지 않은 것이 있다. 우선 추산(推算)하여 고쳐 어떠한지 보아야 한다.”〉

 
 
  당파보다 인물 중시
 
송시열
  효종이 머뭇거린 이유는 이조판서 김집 때문이었다. 효종 1년(1650년) 1월 13일 자에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이는 훗날 한당(漢黨)과 산당(山黨)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된다. 김육은 애초 인물의 능력이 중요하지 당파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우의정 김육이 선조의 묘를 성묘하기 위하여 양주(楊州)로 물러갔다. 이보다 앞서 김육이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조판서 김집에게 물으니 김집은 시행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고, 또 건의하여 원로 대신에게 인재를 물어 차례에 구애받지 말고 등용하기를 청하였는데, 이에 김육이 소를 올려 말했다.
 
  “인재를 등용하는 권한은 인주(人主)의 대병(大柄)이므로 아래에서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은 화협하지 못했다. 그 뒤로 김육은 여러 번 소를 올려 치사(致仕·사퇴)를 청하면서 아뢰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진퇴가 분명하고 그 마음에 변함이 없어야 할 뿐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에 물러나는 것은 잘못이며, 물러가야 할 때 나아가는 것도 잘못입니다.
 
  대체로 물러가서는 안 되는 경우가 셋이며, 물러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셋입니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국가의 안위가 걸려 있어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 자가 첫째요, 산림(山林)에서 와서 덕망이 세상을 덮는 자가 둘째요, 나이가 젊고 근력이 있어 국사를 담당할 만한 자가 셋째이니, 이상은 물러가서는 안 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분명히 알 만큼 재덕(才德)이 부족한 경우가 첫째요, 나이가 이미 많고 노쇠하여 치료하기 어려운 병을 지닌 자가 둘째며, 남의 비웃음이나 당하며 쓰이기에는 부적합한 말을 하는 자가 셋째이니, 이는 물러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입니다.
 
  이제 신은 분에 넘치는 은총으로 치사할 나이가 넘었으니 물러가야 하겠습니까, 물러가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옛사람을 들어 말하건대 자신에게 국가의 존망이 걸린 한(漢)의 제갈량(諸葛亮)이나 백성들의 인망이 간절했던 진(晋)의 사안석(謝安石)이나 나이가 노쇠하지 않았던 송(宋)의 문천상(文天祥)의 경우와, 참람되지만 비교해 본다면, 하늘을 나는 붕새와 땅속 벌레의 차이 정도일 뿐만이 아니며, 시세의 어려움도 한(漢)이나 진(晋)·송(宋)의 경우와도 다릅니다. 조금이라도 그대로 나아가야 할 도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치사를 허락하여주소서.〉

 
  김집이 “원로 대신에게 인재를 물어” 운운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특정 당파의 인재를 쓰자는 것이다. 김육은 이 점을 꿰뚫어 보았기에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다.
 
  김집과의 충돌은 곧 김상헌(金尙憲·1570~1652년)·송시열(宋時烈·1607~1689년) 등 청의파(淸議派)와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김육으로서도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왕권(王權)에 손상을 입히고 인재를 능력에 맞게 쓴다는 원칙에 어긋났기에 김육으로서도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명분보다 실상을 중시했던 김육은 여기서 제갈량, 사안석, 문천상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흔히 사공(事功)을 중시했던 인물이며 그 뿌리는 관중(管仲)의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닿아 있었다.
 
  김집은 대동법 시행에 반대해 김육이 소를 올린 얼마 후인 1월 21일 고향 연산(連山)으로 돌아간다. 다음 날, 김육도 김집의 사직에 맞서 사직의 뜻을 올린다.
 
  〈이제 들으니 이조판서 김집이 상소를 남겨두고 떠났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도 일찍이 봄이 되면 왕래하도록 허락하셨는데, 혹시라도 그가 나가고 신이 들어가면 남들은 필시 신의 말로 인하여 그가 갔다고 할 것입니다. 어진 벗을 내쫓고 자신이 들어가는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세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미 위험한 기관(機關)을 범하였으니 참으로 스스로를 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어진 이를 업신여기고 변법(變法)을 한 것으로 왕안석(王安石)에 견주어 공격한다면, 전하께서 아무리 신을 구원하고자 하여도 안 될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게을리하여 책임을 회피한 죄를 받을지언정 진퇴(進退)에 기준이 없는 사람이 되어 탄핵의 아래 욕을 당하는 그런 사람은 차마 될 수 없습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속히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효종과 사돈이 되다
 
김우명
  효종은 김집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흘 후인 1월 25일 김육을 우의정에서 면직시키고 영중추부사로 삼았다. 실권(實權)이 없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이러다 효종은 1년 후인 효종 2년 1월 11일 김육을 영의정으로 임명한다. 좌의정을 거치지 않은 채 영의정으로 삼은 것이다.
 
  영의정으로서 김육이 새롭게 제기한 문제는 화폐 유통이었다. 이 또한 실은 대동법과도 연계된 것으로 백성들의 삶을 편안케 할 수 있는 핵심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는 훗날 숙종 때에 가서 빛을 보게 된다.
 
  효종 2년 11월 21일 김육의 아들인 세마(洗馬) 김우명(金佑明·1619~1675년)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된다. 훗날 현종(顯宗)비이며 숙종(肅宗)의 어머니이다.
 
  효종 2년 12월 7일 마침내 김육은 좌의정이 된다. 71세 때였다. 김육은 2년 반 정도 좌의정으로 있다가 다시 영의정을 맡았고 얼마 후에 돈녕부영사로 일선에서 물러난다. 돈녕부란 왕실 인척들을 관리하는 관아다.
 
  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김육은 백성을 위한 정책을 건의하는 데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효종 6년(1655년) 7월 9일 돈녕부영사 김육이 차자(箚子·약식 상소)를 올려 병조판서 원두표(元斗杓·1593~1664년), 호조판서 허적(許積·1610~1680년)과 화폐를 통행시키는 법을 함께 의논하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원두표는 대동법 시행 때도 보조를 같이했던 인물이다.
 
  대개는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이렇다 할 건의를 올리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는 사람들이 많은데, 김육은 이와 달리 어느 자리에 있건 백성을 편안케 할 방책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말을 해 종종 임금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이경석의 말이다.
 
  〈조정에 나간 뒤로 회포가 있을 때마다 임금에게 아뢰었는데, 혹은 항의의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혹은 무릎 밑에 나아가 쌓인 바를 남김없이 털어놓되, 비록 엄중한 견책을 받아도 굽힌 바가 없었다. 예를 들면 안흥(安興)의 축성(築城)이나 속오군(束伍軍)의 급보(給保)나 어영군(御營軍)이 돌아가며 번서는 것이나 영장(營將)을 별도로 설치하는 것 등이 백성을 동요할까 염려하여 모두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흠경각(欽敬閣) 옛터에다 만수전(萬壽殿)을 지으려고 하자 불가(不可)한 이유를 극구 개진하였는데, 그 뜻이 비록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임금이 그 굳은 충심을 가상히 여기었다.〉
 
  또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돈의 유통과 수레의 사용은 모두 공이 건의한 것이었는데, 시행되지 않자 항상 개연(慨然)하게 여기었다. 옛날의 활 쏘는 법이 변할까 염려하여 등대(登對)할 때 극력 건의하고, 호남의 균역(均役)에 뜻을 두었다가 죽은 뒤에 비로소 시행되었다. 주상이 공의 충심을 추념하고 경연(經筵)에서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김 영돈녕(領敦寧)처럼 소신이 확고한 사람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유언 상소에서 政敵을 임금에게 추천
 
  김육은 죽음을 앞두고 효종에게 다음과 같은 유차(遺箚·유언 상소)를 올렸다.
 
  〈신의 병이 날로 더욱 깊어지기만 하니 실날같은 목숨이 얼마나 버티다가 끊어질는지요? 아마도 다시는 전하의 얼굴을 뵙지 못할까 생각되므로 궁궐을 바라보며 비 오듯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왕의 학문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마음을 간직하고 정신을 하나로 모아 밖으로 치달리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하께서는 종전부터 학문을 강마(講磨)하시면서 과연 이 도리를 잃지 않으셨는지요? 악정자 춘(樂正子春)은 한낱 필부였습니다만, 한 발자국을 뗄 때에도 부모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오늘날 다치신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악정자 춘에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송 효종(宋孝宗)에게 철장(鐵杖)과 목마(木馬)가 뜻을 가다듬어 원수를 갚는 데 무슨 도움이 되었습니까. 주희(朱熹)와 같은 때에 살면서도 주희로 하여금 수십 일도 조정에 있게 하지 못하였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심학(心學)에 힘을 써야 하실 것은 다만 위 무공(衛武公)의 억계시[抑戒詩·시경에 나오는 시 억(抑)]를 완미하고 탐색하시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백성을 보호하면서 왕 노릇을 하면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편안하여 삶을 즐겁게 누리면 어찌 군사가 없는 것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가려 하는데 승호(陞戶)하는 일이 또 이때에 생겨 대신들이 다투어 간했지만 되지 않았으니 이 무슨 일입니까. 전하께서 후회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록 열 번 명령을 바꾼다 하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나라의 근본을 기르는 일은 오늘의 급선무인데, 찬선(贊善·세자시강원에 속하여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정3품 벼슬)을 맡길 사람은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1606~1672년)보다 나은 자가 없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시종 공경스러운 예로 맞아 지성으로 대우하여 멀리하려는 마음이 없게 하소서.
 
  호남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서필원(徐必遠·1614~1671년)을 추천하여 맡겼는데, 이는 신이 만일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 일이 중도에서 폐지되고 말까 염려되어서입니다. 그가 사은하고 떠날 때 전하께서는 힘쓰도록 격려하여 보내시어 신이 뜻한 대로 마치도록 하소서. 신이 아뢰고 싶은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만, 병이 위급하고 정신이 어지러워 대략 만분의 일만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황송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백성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이 선조에게 올렸던 유차를 떠올리게 하는 충심의 글이다.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송시열과 송준길을 천거한 것 또한 그의 개방적 태도를 잘 보여주며 후임자 추천까지 빠트리지 않았다. 서필원은 전라도 관찰사 때 김육처럼 전남도 대동사목을 반포했고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로 있다가 죽었다. 민생을 구휼하고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사업을 많이 했으며 왕에게 직언을 잘해 그 시절 이상진(李尙眞·1614~1690년) 등과 함께 오직(五直)으로 불렸다.
 
  김육 졸기의 일부다.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품행이 단정 정확하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일을 당하면 할 말을 다하여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았다. 병자년에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우리나라가 외국 군사의 침입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니 중국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평소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 양호(兩湖)의 대동법은 그가 건의한 것이다. 다만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 대동법을 의논할 때 김집과 의견이 맞지 않자 불평을 품고 여러 번 상소하여 김집을 공격하니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 그가 죽자 상이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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