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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논객 임명묵의 ‘역사로 세계 읽기’ ③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분쟁

‘밀림의 귀환’ 시대, 친구 많이 만드는 쪽이 승리

글 :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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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퇴조로 국가 간의 충돌 잦아지면서 세계 제국 미국 대신 인접한 지역 강대국들의 영향력 강해져
⊙ 제1차 카라바흐 전쟁(1988~94년), 서구 지원 받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에 승리
⊙ 가이다르 알리예프, 서구·튀르키예·이스라엘·러시아와 우호 관계 다지며 아제르바이잔 재건
⊙ 아르메니아, 친러 정부 붕괴와 러시아-튀르키예 접근 등으로 고립
⊙ 아제르바이잔, 제2·3차 카라바흐 전쟁(2020년, 2023년)에서 완승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은 지난 2월 19일 튀르키예를 방문,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회견을 가졌다. 사진=AP/뉴니스
  2월 14일 오전 11시. 두바이 공항에서 3시간을 비행하여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인 바쿠의 헤이다르 알리예프 공항에 도착했다. 필자는 현재 대학원에서 서아시아 역사, 그중에서도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현대사를 공부하고 있기에, 현장의 공기를 느끼고 논문을 쓰기 위한 자료도 찾고자 시간을 내어 아제르바이잔을 찾은 것이다.
 
  입국 심사대에 도착하여 여권과 함께 사전에 받은 비자를 제출했다. 입국 심사관은 필자의 여권을 한 장씩 유심히 넘겨보더니, 의미심장한 질문을 했다.
 
  “아르메니아는 왜 방문했나?”
 
  단순히 여행 목적이라고 답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직원이 한 명 더 다가와서 필자의 여권 사진을 촬영하고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여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아르메니아에서 어느 지역을 방문했는가. 필자는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과 조지아 근처를 들렀고, 카라바흐는 방문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즐거운 여행 되시라’며 입국 허가를 내줬다.
 
바쿠 시내 곳곳에서는 ‘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의 것이다’라는 구호가 적힌 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 튀르키예 국기와 병사 모습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사진=임명묵
  카라바흐는 1988년부터 2023년까지 35년에 걸쳐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 분쟁의 중심에 있던 땅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가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시기’에 카라바흐를 방문했던 이들의 아제르바이잔 입국을 불허한다. ‘카라바흐’라는 네 글자는 바쿠 시내에 들어선 뒤에도 계속해서 볼 수 있었다. ‘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의 것이다!’라는 구호가 적힌 벽보가 어디를 가도 이곳저곳에 붙어 있었다. 이는 1992년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아르메니아의 실효(實效) 지배를 받았던 카라바흐가 2023년에 완전히 아제르바이잔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승전과 영토 수복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교역의 요충지 코카서스 삼국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카라바흐…. 한국인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바깥 세계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이 이름들을 둘러싼 역사는 생각보다 현대 세계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지리적으로 코카서스 지역에 속한다. 튀르키예, 러시아, 이란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에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나라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을 일컬어 ‘코카서스 삼국’이라고도 한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는 예부터 이어온 기독교 왕국이 있던 땅이다. 이후 이 지역은 강성해진 이슬람 세력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 중에서도 아제르바이잔은 종교적으로 이슬람화, 민족적으로 튀르크화를 거치며 튀르크-무슬림 지역으로 변모했다. 교역의 요충지인 이 지역은 오늘날 튀르키예와 이란 영토에서 발흥한 세력들이 장악하고자 노력하는 제국들의 교차로서, 16세기 이후부터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의 정치적·문화적 영향에 강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부터 여기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니, 북쪽의 러시아 제국이었다. 서구화 개혁을 통해 일신한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과 이란 세력을 압도했고, 일련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코카서스 지역을 온전히 장악했다. 러시아의 정복이 코카서스에 준 가장 큰 충격은 종교적인 것이었다. 이슬람 제국들의 패권(覇權) 아래에서 기독교도들이 신속(臣屬)되어 있던 상황이 완전히 반전(反轉)되었다. 코카서스의 무슬림들이 이제는 기독교를 믿는 러시아에 복속된 것이다.
 
  산악 지역이 많아 분권화된 정치체들이 난립하기 좋고, 또 이를 활용해 종교적으로 이질적인 제국들이 충돌하는 코카서스의 지리적 상황은 여러 민족이 뒤섞이고 흩어져 사는 특유의 경관을 연출했다.
 
 
  노벨 형제가 개발한 바쿠 유전
 
  러시아 제국 말기에 아제르바이잔, 나아가 코카서스 전역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해 해안에서 대규모 유전(油田)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1879년 스웨덴의 노벨 형제(노벨상의 그 노벨이다!)가 석유 개발 사업에 뛰어들면서 이 지역은 말 그대로 석유 대호황을 맞이했다. 유전 지대에 위치한 바쿠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경제적 중심지가 되었고, 화려한 러시아식 건축물들이 도시에 우후죽순 세워졌다.
 
  하지만 돈이 넘치는 도시인 바쿠에는 민족적 위계(位階)가 발생했다. 정치 권력을 가진 러시아인과 자본을 가진 서유럽인들이 가장 위에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자 상업 민족으로서 러시아 제국 내에서 더 유리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상인과 석유 산업의 숙련 노동자로 바쿠에 진출했다. 원래 이 지역의 원주민인 아제르바이잔인들은 대체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비숙련 노동자를 형성했다.
 
  종교·민족적 차이와 연계된 경제적 차이는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사이의 불화로 이어졌다. 러시아 총독부는 두 민족이 서로 싸우는 게 두 민족이 러시아 지배에 맞서 힘을 합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러시아 제국의 치안 유지 능력이 흔들릴 때마다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은 계속 충돌하며 민족 감정은 악화되었다.
 
  그 절정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제국의 변경 지대의 소수(少數)민족끼리 충돌한 것을 넘어서 이제는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격돌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변경 지대에서 누적된 상호 불신과 악감정이 훨씬 더 거대한 규모의 증오와 폭력으로 분출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를 앞세워 자국(自國)에서 막대한 상업 이권을 행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배신을 할 것이라 우려했고, 오스만령(領)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에게 시리아로의 강제 이주를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제국 정부가 조장한 학살, 강제 이주 과정에서의 굶주림과 고통으로 엄청난 수의 아르메니아인이 죽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
 
  오스만 측의 상황은 러시아 측의 사태 전개에도 영향을 미쳤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이 전쟁 수행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전제정(專制政)이 사라지면서 선거가 곳곳에서 치러졌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선거 결과는 심상치 않았다. 산업 도시로서 노동자가 많았던 바쿠에서는 레닌을 따르는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했다. 이들 중 다수(多數)는 아르메니아인이었다.
 
  반면 바쿠를 둘러싼 나머지 아제르바이잔 전체에서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정당인 무사바트당이 승기를 잡았다. 무사바트는 러시아를 통해 근대적 교육을 받은 아제르바이잔의 무슬림 지식인들이 이끌었고, 튀르키예와의 민족적 연대(連帶)를 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쿠는 민족 갈등의 도가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무장집단 다슈낙은 볼셰비키와 협력했는데, 바쿠의 무슬림들은 이들에게 위협을 느껴 역시 자체적인 무장을 통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무너지면서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오스만군이 바쿠까지 쳐들어올 거라는 공포가 아르메니아인들을 압도했다. 1918년 3월에 바쿠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제르바이잔인의 무장 해제를 집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아제르바이잔인이 죽었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아제르바이잔 내 아르메니아인 거주지역인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양국간 분쟁의 중심지였다. 사진=조선DB
  바쿠의 사회주의 정부는 결국에 오스만군이 정말로 도달하면서 무너졌다. 오스만군은 ‘3월 학살’을 복수했고, 바쿠는 아제르바이잔 최초의 독립 정부인 ‘아제르바이잔민주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서도 ‘아르메니아공화국’이 건국되었다. 제국의 소수민족이던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각각 아제르바이잔민주공화국과 아르메니아공화국을 세우게 되자, 두 민족이 함께 살던 수많은 지역의 귀속을 둘러싼 전쟁이 시작되었다.
 
  상황을 정리한 것은 러시아의 붉은 군대였다. 소련 정부는 1920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를 모두 정복했고, 강압을 통해 두 민족의 끝이 없는 갈등을 진정시켰다.
 
  그래도 영토의 문제는 계속 남았다. 소련은 자신이 러시아 제국과는 다르다고 선전했다. 공산당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이 소수민족을 지배하는 러시아 제국과 달리, 소련 체제에서는 각 민족이 ‘공화국’을 이룰 것이고 모든 민족은 각자의 문화적 자치(自治)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러시아인의 지배력은 유지되었고, 민족주의자들은 탄압을 받았지만, 어쨌든 소련 체제하에서 행정 구역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소련 체제 안에서라도 자신들이 주장하는 ‘민족 고유의 영토’를 보장받기를 원했다. 여기서 가장 쟁점이 된 문제가 카라바흐, 그중에서도 나고르노 카라바흐(산악 카라바흐)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영토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거주 민족은 대부분 아르메니아인이었다. 아르메니아 측은 이곳 주민들이 아르메니아인이니 아르메니아 영토가 되어야 맞다고 주장했다. 아제르바이잔 측은 이 영토는 역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땅이라고 맞섰다.
 
‘거대한 체스판’에서 체스를 두는 아제르바이잔 시민들. 바쿠는 인공지능에 패배하여 유명해진 체스 마스터 가리 카스파로프의 고향이기도 하다. 카스파로프는 아르메니아인 어머니를 두었다. 사진=임명묵
  모스크바가 제시한 것은 타협책이었다.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 귀속시키되, 아르메니아인들의 ‘자치주(自治州)’로 만들어 문화적 자치를 누릴 수 있게끔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권위가 강력할 때는 어쨌든 작동을 할 수 있었던 타협안이었다. 두 민족은 다시 소련 국경 안에서 뒤섞여 살며 공존했다.
 
  이에 관해서는 인공지능에 패배하여 역설적으로 유명해진 세계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가 상징적인 인물이다. 아르메니아인 어머니를 둔 카스파로프는 바쿠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소련을 대표하는 체스 챔피언이 되었다.
 
 
  다시 등장한 민족 갈등의 유령
 
  하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소련 체제가 흔들리며, 공산당이 억눌러온 두 민족의 구원(舊怨)이 되살아났다.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으로 사람들은 공산당이 저지른 범죄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성토 대상은 공산당뿐만이 아니었다. 소련 체제에서는 이야기할 수 없었던 민족적 원한의 기억들도 자유롭게 논해지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각 공화국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준비했다.
 
  문제는 카라바흐였다. 1988년, 이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이 부당하게 아제르바이잔에 편입되었다고 불만을 표하며 아르메니아로의 귀속(歸屬)을 선언했다. 마침내 아르메니아공화국이 카라바흐의 선언을 수용한다고 결의하자,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아르메니아와 모스크바 중앙에 항의했다. 통제할 수 없는 대중적 항의가 바쿠를 휩쓸게 되었다. 1990년 1월, 소련 계엄군이 바쿠를 통제하려 시도하며 시민에게 발포하자 사태는 더욱 최악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이 해체될 때 등장했던 민족 갈등의 유령이 소련이 해체되며 다시 나타났다.
 
  결국에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며 러시아인들은 코카서스에서 모든 통제력을 상실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이제 모두 주권(主權) 국가가 되었다. 이제 두 국가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1988년, 소련이 해체되기도 전에 시작된 ‘제1차 카라바흐 전쟁’은 1994년 비슈케크 휴전 협정까지 지속되었다. 이 전쟁의 승자(勝者)는 아르메니아였다. 그들은 카라바흐는 물론이고 아르메니아 본토와 카라바흐를 잇는 아제르바이잔 영토까지 점령하며 이 지역에 ‘아르차흐공화국’이라는 미(未)승인국을 세웠다. 대신에 바쿠를 비롯한 아제르바이잔 각지에 살던 모든 아르메니아인은 더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살 수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소련 제국의 권력이 만들어준 민족 공존의 시대는 끝났다.
 
 
  헤이다르 알리예프
 
헤이다르 알리예프. 사진=퍼블릭 도메인
  소련 해체와 패전(敗戰)의 혼란 속에서 등장한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는 헤이다르 알리예프(1923~ 2003년)였다. 헤이다르는 아제르바이잔 본토에서도 멀리 떨어진 나히체반 출신으로, 구(舊)소련 정보기관인 KGB(국가보안위원회)에서 복무하며 권력에 다가갔다. 소련 서기장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와 친밀했던 그는 1969년부터 1982년까지 13년 동안 아제르바이잔을 다스렸다. 이 시기 헤이다르는 브레즈네프와의 친분을 활용해 산업을 유치하고 민족 문화 보전에 힘을 써 인기를 얻었다. 고르바초프 시기 권력에서 밀려났던 헤이다르는 1993년에 권좌에 복귀했다. 그는 아르메니아와 휴전하고 2003년에 사망할 때까지 집권하며 국가 복구에 몰두했다.
 
  헤이다르는 아제르바이잔이 보유한 막대한 자원과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했다. 제1차 카라바흐 전쟁에서 아르메니아는 미국과 프랑스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계 이민자를 활용해 서구 국가들을 우군으로 삼을 수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에 필요한 것도 그런 우군이었다. 가장 중요한 혈맹은 튀르키예였다. 언어가 사실상 같은 두 민족은 같은 정체성(正體性)을 공유(共有)했고, 튀르키예는 소련이라는 제한이 사라지자 아제르바이잔을 전폭 지원하며 영향력을 확보했다. 카스피해 건너편의 중앙아시아 국가들과도 튀르크와 이슬람 유산(遺産)의 연결을 강조하며 아제르바이잔을 ‘신(新)실크로드’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스라엘에도 손 내밀어
 
  아제르바이잔의 신실크로드에서 움직일 상품은 이제 비단과 향신료가 아니라 석유와 천연가스였다. 소련 시절에 부족한 기술력으로 개발하지 못한 천연가스전에 영국의 BP와 같은 서구 에너지 회사가 들어와 투자를 시작했다. 서유럽 국가들은 고(高)유가에 대비하고, 장차 러시아가 시작할 자원 공급망의 무기화로부터 자율적인 대체 공급원을 찾고 있었다.
 
  헤이다르는 바쿠(B)에서 출발하여 조지아의 트빌리시(T)를 거쳐 지중해에 위치한 튀르키예의 제이한(Ceyhan)으로 향하는 BTC 원유 파이프라인의 건설을 추진했다. 이를 통해 아제르바이잔의 석유는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 바로 튀르키예로, 나아가 서유럽으로 향할 수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를 통해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돈독히 할 수 있었다. 헤이다르는 아제르바이잔은 역사적으로 유대인과 공존하던 땅이었다고 주장하며 이스라엘에 다가갔고, 제이한으로 향하는 석유는 곧바로 이스라엘로도 운송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자국의 에너지 안보에 기여하는 아제르바이잔에 경제적으로 투자함과 동시에 방위산업과 군수(軍需) 면에서 도움을 주었다.
 

  헤이다르가 신경 써야 할 또 다른 우군으로는 러시아도 있었다. 헤이다르는 서구와의 협조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하며 새로 정권을 잡은 푸틴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국가의 혼란을 수습하고 지리적 위치와 부존(賦存) 자원을 활용해 가능한 한 우군을 많이 확보한 헤이다르 알리예프의 국정 기조는 그의 아들이자 후임자인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 시기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튀르키예와의 관계는 갈수록 돈독해졌고,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으로 끊긴 철도 교통을 복원하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노선의 이름은 아르메니아를 완벽히 우회하여 아제르바이잔의 바쿠(B), 조지아의 트빌리시(T), 튀르키예의 카르스(K)까지 이어지는 BTK가 되었다. 일함 집권 초기에는 고유가가 지속되어 에너지 수출국인 아제르바이잔의 호황기도 이어졌다. 아버지가 닦아놓은 서구, 러시아, 이스라엘과의 우호 관계도 큰 문제 없이 유지되었다.
 
 
  아르메니아의 고립
 
  반면에 아르메니아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코카서스 삼국 중 바다로 향하는 출로가 없는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과 그 혈맹국인 튀르키예와 국경이 차단되면서 무역에서 커다란 곤경을 겪었다. 국경이 닫히며 소련과 튀르키예, 이란을 중개하던 과거의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상은 사라졌고, 튀르키예와 아제르바이잔은 모든 주요 인프라를 아르메니아를 우회하며 연결해나갔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인구 300만을 밑도는 아르메니아가 1000만 인구의 아제르바이잔과 1대1로 경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제적 난관 속에서 아르메니아는 자국에 주둔한 러시아군과 또 다른 우호국인 이란에 의지하며 안보를 지켜야만 했다. 튀르키예, 러시아, 이란이 지켜보는 가운데 26년 동안 불안한 평화가 이어졌다.
 
  하지만 물밑에서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2016년부터 튀르키예는 반(反)에르도안 쿠데타 사건을 계기로 서구와 갈등을 빚게 되며 러시아와 급격히 가까워졌다. 반면 2018년 아르메니아에서는 장기 집권한 친(親)러시아 성향의 세르지 사르키샨 정부가 시민 항쟁으로 무너지고, 친서방 성향의 니콜 파시냔 정부가 들어섰다. 구(舊)소비에트 권역에서 친서방 정부의 수립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푸틴 입장에서는 아르메니아의 상황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 모든 신호는 아제르바이잔 입장에서는 호재나 다름없었다. 20년 동안 아르메니아와의 국력 차이를 크게 벌린 아제르바이잔은 실지를 회복할 군사행동을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아르메니아를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러시아와의 관계였다. 그런데 아제르바이잔의 혈맹인 튀르키예와 러시아는 가까워지고, 반대로 아르메니아와 러시아는 멀어지고 있었다.
 
 
  아제르바이잔, 카라바흐 탈환
 
2023년 9월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탈환하자 그곳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은 고향을 떠나 아르메니아로 탈출했다. 사진=AP/뉴시스
  이 결과 2020년의 ‘제2차 카라바흐 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완승(完勝)으로 끝났다. 튀르키예의 지원과 러시아의 무관심 속에서 아르메니아군이 아제르바이잔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아르메니아는 1차 전쟁에서 있었던 서구 국가들의 지원은 이제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러시아 에너지의 대체 공급원으로서 아제르바이잔의 위상이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높아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국제법적인 명분도 ‘탈(脫)소련 국가들의 경계는 소련 시기의 행정 구역을 따른다’는 알마아타 조약에 입각하여 아제르바이잔에 있었다. 승리를 거둔 아제르바이잔은 카라바흐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확보했다.
 
  하지만 이것이 갈등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아제르바이잔은 월경지(越境地)인 나히체반과 아제르바이잔 본토 사이의 아르메니아 영토에 아제르바이잔의 통로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며 아르메니아와 다시 마찰을 빚었다. 2023년에 또다시 격해진 갈등은 이번에도 아제르바이잔의 승리로 끝났고, ‘아르차흐공화국’은 최종적으로 ‘멸망’했다. 이제 일함 알리예프는 아버지의 치적을 넘겨받아 그가 못다 한 위업을 완수한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럼에도 양국의 긴장은 계속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여세를 몰아 나히체반과 본토를 연결하는, 아르메니아 잔게주르 지역의 통로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보장받기를 원한다. 잔게주르 또한 1920년 당시 분쟁 지역 중 하나였다가 아르메니아에 귀속된 곳이기도 했다. 이 통로를 확보하면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키예와 확고히 연결된다. 아제르바이잔에 두 번이나 패배하고 카라바흐를 상실한 아르메니아의 파시냔 정권은 위기에 몰렸고, 카라바흐 실향민(失鄕民)이 주축이 된 강경파의 압력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제르바이잔의 추가 요구를 수용하기는 정치적으로 무척 어렵다.
 
 
  후원자 러시아에 등 돌린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간자시의 한 거리에서 만난 전몰 병사의 사진. 필자보다 어린 1998년생의 젊은이가 꽃다운 나이에 죽은 것을 보니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사진=임명묵
  지난 2월 13일에 아르메니아는 국경에서 4명의 병사가 아제르바이잔군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발표했다. 2월 23일에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안보 협력체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활동을 철회하겠다는 입장이 흘러나왔다. 아르메니아 안보에 있어서 러시아를 신뢰할 수 없다는 불만의 표시이다.
 
  그러나 현재 세계의 지정학적 환경을 고려할 때 아르메니아의 선택은 갈등을 더욱 격화시킬 소지가 있다. 시민 혁명정부가 집권하고 있는 현재, 아르메니아가 러시아에 등을 돌린다면 믿을 세력은 결국에 서구와 이란밖에 없다. 실제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계 이민자들 덕택에 미국과 프랑스에 친아르메니아 여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 있다. 하지만 내륙국인 아르메니아는 해상 세력인 서구로부터 지원을 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서구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부담도 버거워하고 있다. 이란도 전통적인 우호국이긴 하지만, 이란 정권 내부의 곤경도 만만치 않은데 인접 우호국을 어디까지 지원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결국 좋으나 싫으나 러시아라는 무게추를 빼버리면 힘의 균형이 더욱 급격하게 아제르바이잔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어쨌든 향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분쟁이 더욱 격화된다면, 튀르키예, 이란, 러시아, 서구 사이에서 정신없이 복잡한 수싸움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를 통해 변모하는 각국의 관계는 다른 지역들의 관계망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밀림의 귀환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전쟁 중이던 2023년 10월 1일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아제르바이잔과 튀르키예를 비난하는 시위가 벌어졌지만 메아리는 없었다. 사진=AP/뉴시스
  물론 이 지역의 변화하는 세력 균형이 한국이나 동아시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하니, 다소 실감 나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 자국에 우호적인 환경을 창출한 헤이다르 알리예프의 대전략은 마찬가지로 여러 제국이 교차하는 땅인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동시에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분쟁의 격화는 가장 큰 틀에서 국제 정치의 변화를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세계 제국인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이 퇴조하면서, 국가와 민족 간의 옛 원한 관계가 되살아나고 그것이 군사적 충돌로도 비화하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국가 간의 충돌이 잦아질수록, 미국이라는 세계 제국 대신에 인접한 지역 강대국들이 갖는 영향력은 강해진다. 혹자의 말대로, 미국이 관리하는 ‘정원’이 방치되며 초목이 어지러이 자라는 ‘밀림’이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가 사라지며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갈등이 터져 나온 역사가 전 세계적인 규모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이럴수록 필요한 것은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힌 실타래에서 한국의 길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지리·역사·문화에 대한 안목일 것이다. 한국이 속한 동아시아와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는 동남아시아 각국의 얽히고설킨 역사와 외교 관계에 대한 지식은 국민 교양 수준에서 널리 확산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적(敵)은 줄이고 친구는 늘리는 데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토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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