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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청년 논객 임명묵의 ‘역사로 세계 읽기’ ① 일본의 아시아주의

‘인도-태평양 구상’으로 이어진 ‘서구에 대한 첫 반란’

글 :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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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유신 후 일본에서 등장한 동양의 고유 문화와 서구 근대성을 창조적으로 융합해야 한다는 사상
⊙ 도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 오카쿠라 덴신, 오카와 슈메이 등, 일본 중심의 아시아 連帶論 주장
⊙ 일본, 서구 열강으로부터 ‘2류 강국’ 취급받고 좌절한 후 ‘아시아주의’를 ‘대동아공영권’으로 변질시켜 침략 전쟁 개시
⊙ 인도·인도네시아·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 영향
⊙ 일본, 아시아주의의 유산 활용해 ‘인도-태평양’이라는 새로운 전략적 구상 창안
⊙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중국·러시아·인도·튀르키예 등이 서구 중심의 ‘규칙 기반 국제 질서’ 거부하고 있는 상황과 흡사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일본의 대표적 아시아주의자 오카쿠라 덴신.
  2024년이 시작되면서 21세기도 벌써 사반세기의 전환점을 목전에 앞두게 되었다. 하지만 21세기의 여명을 지배했던 새천년의 환희는, 전쟁이 귀환하고 세계 전역에서 정치적 분열이 극심해지며 눈 녹듯이 사라졌다.
 
  돌아온 혼란의 근원에는 지난 200년 동안 세계의 질서를 써온 서구(西歐) 문명, 그리고 지난 100년 동안 세계의 규칙을 주도해온 미국의 상대적 약화가 자리하고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유라시아 제국을 부흥시키겠다는 야심을 드러내며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대만해협에는 중화제국의 귀환을 완수하겠다는 중국의 열망과 함께 전운(戰雲)이 드리우고 있다. 튀르키예(터키)의 에르도안은 건국 100주년을 맞아 대통령에 재선되며,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여정을 이어갔다. 이 밖에 인도,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서구 바깥의 지역 강국들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 정체성(正體性)을 내세우며 ‘규칙 기반 국제 질서’를 온전히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모양새다. 21세기의 다음 사반세기는 점점 영향력을 키워가는 비(非)서구의 지역 강국들과 서구 세력에 속한 전통적 강대국들의 긴장, 갈등, 협력이 교차하는 복잡한 이합집산(離合集散)과 수싸움의 시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아시아주의’
 
  그러나 비서구 지역 강국이 서구 문명의 보편성에 반기(反旗)를 들며 제기하는 도전은 오늘날에 갑작스럽게, 처음 등장한 일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도, 흡사 지금의 러시아나 인도에서 쓰일 법한 구호를 내걸던 나라가 있었다. 바로 지금은 서구 진영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동맹국으로 신뢰하는 일본이다. 한국인이라면 역사 교육을 통해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일본은 서구 열강의 아시아 침탈을 비판하는 명목으로 전쟁을 개시했고, 일본군의 군홧발이 닿는 영역을 모든 아시아 민족이 함께 번영하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고 칭하며 제국주의적 팽창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런 일본 제국의 ‘침략 야욕’은 장제스(蔣介石)의 중화민국, 루스벨트의 미국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이후 일본이 제국주의와 군국주의(軍國主義)라는 과거의 오욕을 청산하고 아시아 자유민주 진영의 기둥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서사(敍事)이다.
 

  하지만 서구 문명의 충실한 ‘학생’이었던 일본이 잠시 군국주의로 ‘일탈(逸脫)’하고, 소위 ‘아시아 해방’이라는 미명을 내걸며 전쟁에 나섰다가 패배하고, 전후에는 미국이 재편한 자유 진영의 일원으로 돌아왔다는 서사는 실제 일본과 아시아가 겪었던 기나긴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축약하는 것이기도 하다. 메이지(明治)유신 시기에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미국의 지식과 제도, 문화까지 철저히 학습하고 연구했던,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너무나 잘 알았던 일본의 엘리트들은 어째서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전쟁에 나섰을까?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나 인도의 찬드라 보스같이,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은 일본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일본의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협력했던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 짚어 보아야만 하는 사상이 있다. 바로 20세기 전반을 뒤흔들었던 일본의 아시아주의이다. 아시아주의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흥미로운 과거의 사실로 그치지 않는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서구에 대한 반란’이 번지고 있는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메이지유신
 
  서구에 맞서는 아시아 민족의 지도국으로서 일본이라는 자기 상상은 사실은 서구화 개혁으로 이해되는 메이지유신 때부터 내재된 것이었다. 에도(江戶) 시대부터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세계 정세를 이해하고 있었던 일본은 서구 열강의 막강한 힘이 청(淸)나라를 무릎 꿇린 것(아편전쟁)을 인지하고 있었다.
 
  마침내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흑선(黑船)을 이끌고 일본에 개항을 강요하자, 서구의 ‘오랑캐’로부터 일본을 지켜야 한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막부에 대해 누적된 반발을 반외세 정서와 결합시킨 막부 말엽의 지사(志士)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 ‘천황을 높이고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치며 메이지유신 신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유신 신정부는 서구로부터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동양’보다 발전한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메이지 시기의 서구화 개혁은 일본이 곧 서양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메이지 개혁가들은 ‘문명(文明)’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서구가 보편적 문명의 척도로 보았을 때 일본보다 발전해 있음을 인정하고, 서구화는 일본의 전통 문명의 가치와도 합치되는 것임을 각종 동양 고전의 문구를 인용하며 정당화했다. 달리 말해, 메이지 시기 서구화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고유의 정체성을 가장 잘 지켜낼 수 있는 효과적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아시아연대론, 脫亞論
 
‘탈아론’을 주장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일본의 엘리트들의 시선은 일본 바깥에 있는 중국과 조선으로 향했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유럽 제국주의의 침탈이 이어지고 있었고, 조선에서는 러시아의 세력이 확대일로를 걷고 있었다.
 
  당시 일군(一群)의 일본 지식인은 서구의 동아시아 점거를 막기 위해서 중국과 조선에서도 일본과 같은 전면적인 근대화 개혁이 필요하고, 일본이 그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서구에 대한 위협감의 발로임과 동시에, 같은 한자 문화권에 속한 공동체가 하나로 연합해야 한다는 사명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는 1893년 이와 같은 생각을 담은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을 발표했고, 이는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와 같은 지식인의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과 중국에서 근대화 개혁이 보수파들에 의하여 좌절되면서 아시아 연대(連帶)를 향한 일본 지식인들의 주장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를 보며 일본의 지식인들은 조선에서 일본과 같은 개혁은 당분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우쳤다. 이 무렵에 나온 그 유명한 논설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론(脫亞論)’이다. 탈아론이 단순히 일본이 ‘후진적(後進的) 아시아’를 뛰쳐나가서 ‘선진적(先進的) 유럽’으로 향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당대의 절박한 시대 인식의 발현이었음을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웃 국가처럼 전통의 구습(舊習)에 얽매여 잠을 자고 있으면 유럽 열강에 침탈당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탈아론의 무의식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현양사와 흑룡회
 

  이와 같은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탈아론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민간의 다른 인사들은 일본이 더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아시아 이웃을 이끌어야 한다는 ‘흥아론(興亞論)’을 내세웠다. 일본과 조선, 중국이 수평적인 연대를 이루며 아시아 부흥에 함께해야 한다는 메이지 초기의 인식은 ‘더 개명(開明)된’ 일본이 ‘아직 잠을 자고 있는’ 조선과 중국을 일깨운다는 더 수직적인 아시아관으로 변모했다.
 
  1881년에는 도야마 미쓰루(頭山滿)가 주도하는 현양사(玄洋社)가 세워졌다. 1901년에는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현양사의 해외 공작 분파인 흑룡회(黑龍會)를 설립하면서, 흥아론자들은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구한말 한일합방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한국에서도 그 악명(惡名)을 떨친다. 현양사와 흑룡회는 각종 아시아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일본 유학과 망명을 배후에서 지원하면서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범(汎)아시아 네트워크를 만들기도 하였다.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하며 열강의 일원으로 나아가고 있던 일본 정부 입장에서 이런 민간의 아시아주의자들은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메이지유신의 열기가 세이난(西南) 전쟁(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를 수장으로 하는 사쓰마 사무라이들이 메이지 신정부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편집자 주)을 끝으로 안정되고, 일본은 구미(歐美) 제국주의 열강과 국가 대 국가로 외교를 펼쳐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식민지 해방 운동’을 전개하는 현양사나 흑룡회의 존재는 외교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일본은 남하(南下)하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던 영국과 동맹을 맺고,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러일 전쟁을 벌였는데, 이는 영국의 아시아 지배를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시아는 하나다”
 
  그러나 러일 전쟁의 승리는 일본으로서도 상상하지 못한 효과를 일본, 나아가 아시아 전역에 퍼트렸다. ‘황인종(黃人種)의 일본이 백인종(白人種)의 러시아를 무찔렀다’는 소식은 제국주의 열강이 설치한 전신선과 교통망을 타고 순식간에 전파되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부터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 페르시아의 테헤란과 인도의 콜카타까지 수많은 사람이 일본의 승리에 환호했다. 조선의 청년 안중근(安重根)도 러시아를 이긴 일본의 승리에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 방침은 여전히 대영제국 및 미국과의 협력이었지만, 일본이 아시아 전역에서 받게 된 놀라운 관심은 민간의 흥아론자들과 지식인들을 고무시켰다. 아시아의 대부분이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게 된 20세기 여명의 상황에서 흥아론자들은 아시아를 일깨워 서구에 맞서야 한다는 사명감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러일 전쟁을 전후로 흥아론은 ‘아시아주의’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주의자들이 인식하는 ‘아시아’의 범위도 중국, 조선, 일본을 넘어서 동남아시아와 인도로까지 확장되었고, 자연스레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는 유럽 제국주의의 존재를 더 자주 의식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사상적 변화를 주도한 인물은 일본의 미술사 연구자인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이었다. 오카쿠라는 메이지 시기 일본의 정체성을 미술을 통해 모색하면서, 일본 미술의 뿌리인 중국과 인도의 미술도 연구하였다. 불교를 매개로 중국과 인도의 미술이 일본에서 하나로 융합되는 것을 포착한 오카쿠라는 서세동점 이전 전통 아시아의 연결망을 강조하며 “아시아는 하나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오카쿠라는 불교에 주목하면서 불교의 고향인 인도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인도에 방문하면서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타고르(1861~1941년)를 비롯한 인도의 유명 예술가,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는 영국 식민지 인도의 처지에 공감하고, 공동체를 해체하는 서구 근대성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인도 지식인의 고민을 흡수하면서 아시아주의의 기틀을 놓았다. 이후 아시아주의는 그 시야를 전체 아시아로 확대하고, 미래의 지향을 서구 근대성과 계몽주의를 넘어서는 ‘아시아적 정신’의 회복을 기치로 내걸게 되었다.
 
 
  일본의 좌절
 
오카와 슈메이
  그래도 아시아주의는 여전히 일본 정부와는 무관한 민간의 움직임이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편에 참전하여 독일의 아시아-태평양 식민지를 공격했고, 승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이 ‘동방 인민의 봉기’를 촉구하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면서 아시아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쪽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하여 튀르키예 독립전쟁을 개시했다. 인도에서는 영국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이 더욱 거세졌다.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물질적 근대화에만 매진한 유럽 문명이 자멸(自滅)의 길을 걷고 있다고 진단하고, 아시아의 해방을 지원하며 일본이 동서 문명을 융합한 새로운 표준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믿음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인물은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였다. 일본에 온 인도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교류하고, 오카쿠라 덴신의 강의를 들으며 아시아주의자가 된 오카와 슈메이는 영어로 출간된 오카쿠라의 글을 일본에 번역하여 전파하는 데 주력했고, 인도의 식민화 역사와 독립운동의 현황을 일본 조야에 알리며 반영(反英) 사상을 퍼트리고자 했다.
 
  이제 오카와를 비롯한 아시아주의자들의 활동은 1920년대 일본이 처했던 국제적 상황과 맞물려 대중 여론 차원에서도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 처리를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담에서 일본은 ‘인종 차별 철폐’를 국제연맹 규약에 삽입하고자 노력했으나, 식민지 문제를 우려한 영국과 흑인 노예 문제에 민감한 미국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는 일본의 서구주의자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일본이 아무리 서구화에 매진하여도 서구 열강이 일본을 동등한 강대국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증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본이 보기에 서구 열강은 ‘문명국 클럽’이 아니라 ‘백인 클럽’이라는 분노가 야기된 것이다. 이후 1921년과 1922년에 진행된 워싱턴 군축(軍縮) 조약에서 일본의 전함(戰艦) 보유가 영국, 미국에 비하여 현격히 적은 숫자로 제한되자 일본을 ‘2류 강대국’으로 여기는 영미 세력에 대한 반발심은 더욱 커졌다.
 
 
  만주국
 
이시와라 간지
  한편으로는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은 아시아의 민족 지도자들이 일본에 대한 저항을 더욱 거세게 시작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조선에서 3·1운동을 촉발시켰고, 이는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를 비판하지만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는 긍정하는 일본 아시아주의자들의 이중성과 위선(僞善)에 대한 증거로 여겨졌다.
 
  동시에 일본식 근대화 모델에 감명을 받았던 중국의 민족주의 지도자들도 점차 거세지는 일본의 중국 진출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일본은 승전을 통해 독일로부터 독일령 칭다오(靑島)를 인수받았고, 만주와 화베이(華北)에서 더욱 많은 이권(利權)을 얻어내려 했다. 중화민국의 국부(國父) 쑨원(孫文)은 1924년 고베에서 행한 ‘대아시아주의’ 연설에서 아시아의 자립과 자강을 위한 일본의 노력을 칭찬하면서도, 일본의 정책이 동양왕도(東洋王道)가 아닌 서양패도(西洋覇道)로 흘러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1920년대가 끝나갈 즈음에, 일본 조야(朝野)는 제국이 안과 밖 모두에서 도전을 받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상태였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충실한 협력에도 불구하고 동등한 협력 대상으로서 일본을 바라보지 않는 듯했다. 민족자결주의의 확산은 조선과 중국에서 일본의 통치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양 민족의 지도국’이자 ‘아시아 해방의 기수(旗手)’로서 일본을 바라보는 국내외의 인식은 일본의 엘리트와 대중 모두에게 특별한 사명감과 의무감을 부여했다. 이런 사명감에 공감하는 이들 중에서, 일군의 장교 집단이 지정학적(地政學的) 대지진을 일으켰으니 바로 1931년의 만주사변이었다. 육군 중좌(중령)에 불과한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는 만주사변을 통해 중국 동북부의 드넓은 영역에 만주국을 수립했다. 만주에 거주하는 다섯 민족이 왕도(王道)에 입각하여 협력하고 화합한다는 오족협화(五族協和)의 기반에도 흥아론과 아시아주의가 깔려 있었다.
 
  만주국 건국자들은 일본이 주도하여 만주에 서구 문명보다 더 진보한 아시아의 신문명을 건설할 수 있다 믿었고, 아시아 각 민족의 엘리트를 길러내는 요람으로써 ‘아시아대학’의 설립까지도 추진했다. 아시아대학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대신에 건국대학(建國大學)이 세워져 아시아주의에 입각한 교육을 시도했다. 만주국의 존재는 일본이 영국, 미국, 소련과 동등한 광역권(廣域圈)을 확보한 국가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었고, 아시아주의와 협화라는 새로운 이상(理想)은 대내적으로 일본 제국에 제기되는 민족자결의 도전을 무마할 대안(代案) 이데올로기로서 수용되기 시작했다.
 
 
  아시아夢의 폭주
 
수바스 찬드라 보스
  만주국 건국을 계기로 만개한 일본의 아시아몽(亞細亞夢)은 제동장치 없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만주의 성공에 자극받은 일본군 장교들은 화베이에서 군사 활동을 늘리며 중화민국 장제스 정부를 자극했고, 이는 파괴적인 중일 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아시아주의 지식인들은 동아협동체(東亞協同體)를 내세우며 전쟁을 정당화했지만, 중일 전쟁은 오히려 항일(抗日)을 중심으로 중국 민족주의를 결집시켰다. 일본의 팽창이 국제 질서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한 영국과 미국도 일본을 압박해 들어갔다.
 
  결국 일본은 대외적 압박을 타개하고자 유럽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공격하고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하며 태평양 전쟁을 개시했다. 일본은 이를 아시아 해방을 위한 대동아성전(大東亞聖戰)으로 선전했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지역에서 이 선전이 꽤 효과적으로 작동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아시아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일본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 했든, 혹은 일본 아시아주의에 진심으로 공감했든 간에 일본이 막강한 영국군과 미군을 무찌르는 것을 보고 환호했다. 인도의 찬드라 보스는 일본과 협력하여 인도국민군을 결성해 영국령 인도로 진공하고자 했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도 일본의 동인도제도 점령을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한 준비로써 활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아시아주의의 사상적 지도자가 된 오카와 슈메이는 이슬람권도 반서구 전쟁의 대오에 합류시켜야 한다며 이슬람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주의의 유산
 
라다비노드 팔
  하지만 일본의 ‘대동아성전’은 파멸적 결과를 남기기에 이르렀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일본이 궁지에 몰리면서, 점령지에서의 가혹한 수탈이 시작되었고 일부 아시아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일본 점령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반공(反共)을 외치며 시작된 중일 전쟁은 중국공산당의 부활이라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미국의 막강한 힘은 일본이 당해낼 수 없는 것이었고, 1945년에 일본은 항복하면서 제국은 모조리 해체되었다. 일본 내부에서는 반세기에 걸쳐 일본과 아시아를 휩쓸었던 ‘아시아 해방의 대의(大義)’를 비판하고, 무엇이 일본 군국주의의 폭주를 만들었는지 밝혀내 반성하자는 목소리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럼에도 아시아주의는 무척이나 많은 유산을 남겼다. 일본군이 떠나간 동남아시아에 다시 진주한 유럽 제국은 이전보다 훨씬 거센 식민지 민족 해방운동과 마주해야 했다. 도쿄 전범(戰犯) 재판에서 인도 출신의 라다비노드 팔 판사는 동남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서구 제국주의가 무슨 차이가 있었는지 물으며 서구의 위선에 대해 고발하며 충격을 안겨주었다.
 
  동양의 고유 문화와 서구의 근대성을 창조적으로 융합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의 비전은 전후 아시아의 제도와 문화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일본의 국체론(國體論)과 네덜란드·독일 법철학을 결합한 판차실라(Pancasila)가 국가 이념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기 한국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열암(冽巖) 박종홍(朴鍾鴻)도 아시아주의와 연관된 전시(戰時) 교토학파의 영향 속에서 ‘근대성의 위기’를 고민한 인물이었다. 아시아주의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받았던 인물들은 탈(脫)식민화와 냉전(冷戰)의 시대인 20세기 후반에 신생 독립국의 민족 상징으로 추앙받거나, 살아남아서 국가 건설의 주역을 계속 맡았다.
 
 
  ‘인도-태평양’ 구상으로 이어진 아시아주의
 
  다시 2024년으로 돌아와서, 100년 전 아시아주의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아시아주의는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거짓 수사(修辭)에 불과했을까. 아시아주의는 19세기 서구화의 기수이자 현재는 서구 진영의 대표 국가인 일본이 주창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 크다.
 
  아시아주의는 ‘서구에 대한 반발심’이 흔히 생각되곤 하는 ‘비이성적 광기(狂氣)’를 넘어서,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였다. 서구 근대성과 자국의 전통을 조화시키고자 고민한 당시 일본의 사유(思惟) 또한 여전히 많은 비서구 국가들이 공유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튀르키예, 러시아, 인도, 이란, 중국 등의 국가가 전통의 현대적 부활을 외치며 서구와는 다른 독자적 노선을 천명하는 오늘날의 아시아에는 100년 전 아시아주의의 메아리가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와중에 서구 진영의 일원으로서 일본이 아시아주의의 유산을 활용해 ‘인도-태평양’이라는 새로운 전략적 구상을 창안(創案)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단순히 미국의 안보 구상에 발을 맞추겠다는 수동적 움직임이 아니라, 인도양과 태평양을 통합하는 드넓은 공간적 시야를 보여주며 일본이 아시아 안보의 상황을 주도하겠다는 능동적인 활약이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핵심 파트너인 인도를 껴안으며, ‘아시아주의 동지’였던 찬드라 보스, 라다비노드 팔 등과의 역사적인 우애를 다시 소환한 것도 인상적인 일이다. 비록 끔찍한 침략 전쟁으로 끝나긴 했지만, 아시아 전체를 아우르고자 했던 과거 일본의 유산은 일본이 서방 동맹국이 된 오늘날에도 면면히 계승되어 미국, 중국, 러시아 등과는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아시아 전략 구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대한민국은 ‘아시아觀’이 있는가?
 
  물론 이러한 일본의 전략적 구상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이전에, 세계의 주요 국가 중 하나로 부상(浮上)한 대한민국은 과연 일본에 견줄 만한 아시아관(觀)이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전히 한국의 정치인과 지식인은 구미 선진국과 일본, 중국 등 인접국의 사례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한다. 하지만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한국은 아시아에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아시아 제(諸)국가의 움직임은 한국에 무엇을 시사(示唆)하는가? 100년 전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이 치열하게 고민했던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떤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중국·러시아 협력체와 미국 중심 자유 진영 간 대립의 그림자가 한반도에도 짙게 드리우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생존은 인접한 아시아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구축(構築)하고 어떤 공통의 목표를 발굴해내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후 아시아의 대표적 지식인인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가 이야기한 ‘방법으로서 아시아’를 모색하는 것이 대한민국에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되고 있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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