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선조 옹립
⊙ “권간(權奸)이 권세를 부리던 당시 지조를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
⊙ “신진들의 논의가 과격하고 예리한 것을 보고는 항상 억제하여 조정하려 하였다”
⊙ “사사로운 붕당 깨뜨리지 않으면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될 것”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권간(權奸)이 권세를 부리던 당시 지조를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
⊙ “신진들의 논의가 과격하고 예리한 것을 보고는 항상 억제하여 조정하려 하였다”
⊙ “사사로운 붕당 깨뜨리지 않으면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될 것”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은 조선 초 때 크게 번성했던 최고 명문가 광주(廣州) 이씨의 후손으로, 조선 중기 문신 성현(成俔·1439~1504년)은 저서 《용재총화(慵齋叢話)》 제2권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문벌(門閥)이 번성하기로는 광주 이씨가 으뜸이고, 그다음으로는 우리 성씨(成氏)만 한 집안도 없다. 광주 이씨는 둔촌(遁村) 이후로 점점 커졌으니 둔촌의 아들 지직(之直)은 참의(參議)였고, 참의는 아들이 셋인데 장손(長孫)은 사인(舍人)이었고, 인손(仁孫)은 우의정(右議政)이었고, 예손(禮孫)은 관찰사(觀察使)였으며, 사인의 아들인 극규(克圭)는 지금 판결사(判決事)로 있다. 우의정에게도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극배(克培)는 영의정(領議政)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극감(克堪)은 형조판서(刑曹判書) 광성군(廣城君), 극증(克增)은 광천군(廣川君), 극돈(克墩)은 이조판서(吏曹判書) 광원군, 극균(克均)은 지중추(知中樞)였으니, 모두 일품(一品)에 올랐는데, 이 네 아들은 공이 있어 군(君)으로 봉한 것이다. 광성군은 비록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세좌(世佐)는 지금 광양군(廣陽君)이며, 문자(文字)·문손(文孫)도 높은 반열에 서서 서로 잇따라 끊이지 않았다.”
둔촌은 지금의 서울 강동구 둔촌동 일대로 이집(李集)의 호다. 이지직의 호는 탄천(炭川)이다. 세조부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정 회의에 광주 이씨 집안 ‘극’자 돌림만 8명이 참석해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 중 이준경의 증조할아버지 이극감은 형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이세좌(李世佐·1445~1504년)도 중추부 판사를 역임했다. 아버지 이수정은 홍문관 부수찬을 지냈다. 아마도 연산군 시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광주 이씨의 흥성은 계속 이어졌을지 모른다.
갑자사화
이세좌는 형조판서를 지낸 이극감의 아들로 성종 8년(1477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초고속 승진을 계속했다. 연산군 때에도 이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러나 연산군 9년(1503년)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에서 어의(御衣)에 술을 엎질러 유배를 가야 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듬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연산군은 생모 윤씨가 폐위(廢位)당할 때 이세좌가 극간(極諫)하지 않았고 이어 형방승지로서 윤씨에게 사약(賜藥)을 전달했다 하여 자살을 명했다. 이세좌는 명을 받고 목매어 자결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세좌에게는 수원(守元)·수형(守亨)·수의(守義)·수정(守貞) 네 아들이 있었는데 연산군 10년(1504년) 5월 13일 같은 날 모두 아버지의 죄에 연좌(連坐)되어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형(斬刑)을 당했다. 당시 실록의 평이다.
“수원·수형·수의·수정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세상에 이름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죄 아닌 일로 함께 참형을 당하니 통탄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 형제의 이름에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는 《주역》의 원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럼에도 때를 잘못 만나 모두 비명횡사한 것이다.
4형제 중 막내 이수정(1477~1504년)이 준경의 아버지이다.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형 윤경(李潤慶)은 7세, 준경은 6세로 한 살 터울이었다. 아버지는 참형을 당했고 어머니 신씨(申氏)는 종이 되었다. 한성부 내자시 노비가 된 신씨는 다시 장녹수 집 노비로 쫓겨났다.
신씨는 일찍부터 두 아들에게 직접 《소학》을 가르쳤다. 특히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은 늘 신씨에게 “이 아이들은 세상에 이름을 떨칠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니 조심해서 보호하라”고 당부하곤 했다.
어린 나이에 유배 생활
윤경과 준경은 이때부터 충청도 괴산에서 ‘유배살이’를 했다. 이때 일화 하나가 《동고유고(東皐遺稿)》 연보에 실려 있다. 동고(東皐)는 이준경의 호다.
준경이 7세 때 일이다. 하루는 집주인의 실화(失火)로 준경 형제의 낡은 솜옷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이웃사람들이 찾아와 위로의 말을 했고, 유모도 준경의 손을 잡고 울었다.
“이제 낡은 솜옷마저 불에 타 없어졌으니 도련님, 추워서 어떻게 밤을 나겠습니까?”
준경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이 옷은 이와 벼룩이 득시글거려 항상 괴로웠는데 불에 다 타버렸으니 이제 밤잠을 편히 잘 수 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하는 모습이 태연하여 듣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준경은 8세 때인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남과 동시에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 종 생활을 하던 어머니와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 신씨는 ‘과부가 키운 자식’이라는 삿대질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윤경·준경 형제를 대단히 엄하게 가르쳤고 바깥출입도 금지시켰다. 또 학문을 익힌 바 있던 어머니 신씨는 형제에게 직접 《효경(孝經)》과 《대학(大學)》을 가르쳤다. 윤경·준경 형제에게는 사촌형님인 이연경(李延慶·1484~1548년)이 있었다. 이연경도 같은 시기에 유배를 갔다가 이때 풀려났다.
이연경은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당시의 신진 사림(士林)들과 가깝게 지냈다.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해 사헌부와 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같은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중종이 이연경은 연산군 때 화(禍)를 입은 집안의 자손이라 하여 특별히 그의 이름을 삭제해준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이연경은 공주에서 은거하면서 성리학과 양명학 등을 두루 공부했고 그의 학문적 명망을 듣고 찾아온 노수신(盧守愼)과 강유선을 사위로 삼기도 했다. 이준경이 훗날 성리학이 기본임에도 다른 학문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이연경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
33세에 뒤늦게 급제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이준경은 스물두 살이었다. 이미 사화를 겪은 바 있는 집안인데다가 학문적 방황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준경은 문과 급제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 대신 각 분야의 많은 사람과 교유를 하며 20대를 보냈다. 조식(曺植·1501~1572년)과의 깊은 교감도 이때 이루어졌다. 조식에게는 《심경(心經)》을 선물하기도 했다. 훗날 이준경은 술학(術學)에도 깊은 조예를 보이는데 이 또한 이 시기의 공부에 따른 것이다.
이에 반해 이황(李滉·1501~ 1570년)은 일찍부터 성리학으로 방향을 잡았다. 스무 살 무렵 하루는 집에 있는데 누가 와서 “이 서방!” 하고 불러서 자신을 찾는 줄 알고 나가보니 늙은 종을 부르는 소리였다. 이에 이황은 “내가 이뤄놓은 것이 없다 보니 이런 욕을 당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과거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낙방하는 등 제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준경은 33세 때인 중종 26년(1531년) 마침내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선다. 이때 이황은 진사시에만 합격해놓고 고향 주변 산사(山寺)를 돌며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33세 때인 중종 29년(1534년) 문과에 2등으로 합격했다. 두 사람 모두 문과 급제는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이준경과 이황이 관리의 길에 첫발을 디딘 이 무렵은 권간(權奸) 김안로(金安老·1481~1537년)의 세상이었다. 남곤(南袞·1471~1527년)의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갔다가 1527년 조정으로 복귀한 김안로는 특히 이황이 문과에 급제한 그 무렵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전횡을 부리고 있었다. 이황이 처음으로 맡은 보직은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이었다. 한데 김안로는 이황이 급제 후에 자신에게 인사를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내쫓아버렸다. 이황은 한직인 승문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김안로는 더 나아가 이황을 추천했던 예문관 관원들까지 모두 파직시켜버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문안 인사’는 패거리 형성에서 대단히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었는데 이황이 이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신사무옥
그런데 이황이 관리의 길에 설 무렵 이준경은 조정에 없었다. 1531년 문과 급제 후 이듬해 홍문관 정자를 거쳐 1533년 부수찬으로 승진한 이준경은 동료인 구수담(具壽聃·1500~1549년)과 함께 안처겸(安處謙·1486~1521년)을 비롯한 신사무옥(辛巳誣獄) 연루자들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다가 파직을 당했다.
신사무옥이란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지지하다가 실각한 정승 안당(安瑭·1461~1521년)의 아들 안처겸이 이정숙(李正淑), 권전(權磌)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득세한 남곤·심정(沈貞·1471~1531년)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한 사건을 말한다. 이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안당의 집안사람 송사련(宋祀連·1496~1575년)은 처형뻘이 되는 정상(鄭鏛)과 이러한 사실을 고변할 것을 모의한 후, 안처겸의 모상(母喪)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증거로 삼아 고변하였다. 이로써 사건이 벌어져 안처겸·안당·안처근(安處謹)·권전·이충건(李忠楗)·조광좌(趙光佐)·이약수(李若水)·김필(金珌) 등 10여 명이 관련되어 처형되었고, 송사련은 이 공으로 당상관이 되어 이후 30여 년간 득세하였다. 송사련의 아들이 바로 후일 서인(西人)의 모주(謀主)가 되는 송익필(宋翼弼·1534~1599년)이다.
이후 중종 32년 김안로를 비롯한 ‘3간(奸)’이 제거될 때까지 5년 동안 이준경은 세상을 떠돌며 책과 사람 만나기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황의 좌천과 이준경의 파직은 실은 연결되어 있었다. 김안로가 이황을 좌천시키면서 들었던 공식적인 이유는 그의 장인 권질(權礩·1483~1545년)이 바로 안처겸 사건과 연루되어 경상도 예안(현 경북 안동)에 유배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권질의 동생 권전은 신사무옥 때 고문을 당해 죽었다. 이황은 인척 관계로 인해 좌천을 당했고 이준경은 이 사건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김안로에게 당한 것이었다.
이황과 함께 근무
김안로의 조정에서 이황의 앞길은 순탄치 못했다. 1535년(중종 31년) 이황은 6품 직인 선무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황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고향 근처의 수령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조정의 권력투쟁에도 염증이 났다. 그러나 김안로의 저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중종 32년 김안로 등이 실각하자마자 이준경은 호조좌랑으로 복직한 뒤 홍문관으로 자리를 옮겨 그해 말에는 응교(應敎)에까지 올랐다. 응교면 정4품 직이었다. 이후 이준경은 중종 36년 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으로 특진한다.
한편 이준경이 응교로 있던 중종 34년 말 이황은 홍문관 수찬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이때 두 사람은 같은 기관에서 근무하게 된다. 아마도 두 사람은 이전부터 친교를 맺었을 것이다. 또 이 무렵 두 사람은 홍문관과 사헌부 등을 함께 옮겨 다니며 돈독한 선후배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중종 35년 12월에는 김안로에게 당해 귀양 간 사람들을 풀어주는 문제로 이준경과 함께 잠시나마 파직되기도 했다. 이때는 두 사람 모두 사헌부에 있을 때였다.
이준경은 자존심이 유난히 강했다. 이 무렵 시를 지어 정사룡(鄭士龍·1491~1570년)이라는 문인에게 보여주며 “옛사람의 시와 비교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정사룡이 “비록 옛사람 것만은 못하나 친구를 위하여 이별의 정을 나타내는 시문을 짓는 데는 넉넉하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이준경은 다시는 시를 읊지 않았다.
一綱九目疎
이준경이 홍문관 직제학이던 중종 36년 4월 이황은 교리로 있었다. 직제학은 정3품 당하관, 교리는 정5품이었다. 이준경이 이황의 직장 상사였다. 이때 부제학이 바로 이언적(李彦迪·1491~1553년)이었다.
당시 홍문관 관리들은 의기투합해서 중종에게 학문과 정치, 민생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는 유명한 상소를 올린다. ‘일강구목소(一綱九目疎)’가 그것이다. 일강, 즉 가장 중요한 원칙은 ‘치중화(致中和)’로 올바른 화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침이 바로 구목이다.
첫째, 궁궐 내의 기강은 엄격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宮禁不可不嚴), 둘째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고(紀綱不可不正), 셋째 인재를 잘 가려서 쓰지 않으면 안 되고(人才不可不辨), 넷째 제사를 격식에 맞도록 제대로 거행하지 않으면 안 되고(祭祀不可不謹), 다섯째 백성의 곤궁함을 구제해주지 않으면 안 되고(民隱不可不恤), 여섯째 백성을 일깨우는 일을 밝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敎化不可不明), 일곱째 형벌을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刑獄不可不愼), 여덟째 사치는 금하지 않으면 안 되고(奢侈不可不禁), 아홉째 신하들이 간하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諫諍不可不納).
이준경이나 이황은 이런 지도자와 정치를 바랐다는 점에서는 확실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황의 은퇴
중종이 죽고 인종이 뒤를 이었으나 병약했던 인종은 즉위 8개월 만인 1545년(을사년) 7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인종은 세자 때부터 사림들로부터 큰 기대를 받은 임금이다. 인종의 죽음이 사림들에게 준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이런 가운데 12세 명종이 뒤를 이었고 문정왕후가 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에 나섰다.
당시 홍문관 응교로 있던 이황은 다른 동료 직원들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부당하다”고 말하자 “대비인 문정왕후 외에 누가 섭정을 할 수 있는가?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반박했다. 형식 논리로 보자면 이황의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특히 이황의 성품상 그가 문정왕후나 윤원형(尹元衡)에게 아부하려고 이런 말을 했을 리 또한 만무했다.
이에 옆에서 듣고 있던 동료 두 명이 이황을 불러 나무랐다. 그러나 이황은 “떳떳하다”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밝혔다. 이후 두 사람은 고신(告身)을 빼앗기고 결국 윤원형에 의해 죽음에 이르고 만다. 사실 이황과 윤원형은 사마시 동년(同年), 즉 사마시 동기 합격자였다. 그러나 이황은 평소에 윤원형을 제대로 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황은 윤원형과의 인연을 떠나 사리(事理)를 말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황의 마음은 관직에서 떠나 있었다. 홍문관 전한,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등을 맡고 있던 그는 여러 차례 사직서를 제출했고 경연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애당초 대윤(大尹·중종의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의 일족인 윤임, 윤여필 등)이나 소윤(小尹·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일족인 윤지임, 윤원형, 윤원로 등)과 멀리했던 그이기에 사화가 그에게 직접 닥쳐오지는 않았지만 9월 들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병도 심해지고 정치에 대한 환멸도 깊어만 갔다. 사직서를 제출하면 위에서는 반려하는 일이 반복되는 가운데 한 해가 지나갔다. 이듬해 어렵사리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기한을 넘겨 그해 5월 해직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황은 을사사화의 피바람을 비켜갈 수 있었다. 이후 이황은 고향마을에 암자를 짓고 본격적인 학문 수양과 제자 양성에 들어간다.
을묘왜변 진압
한편 이준경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때 중종이 승하하자 이를 명(明)나라에 알리는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 차출되어 북경을 다녀온다. 한양으로 돌아와서는 형조참판에 오른다.
이때 대윤이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조정에서는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윤원로(尹元老)를 죽여야 한다는 논의를 하고 있었다. 특히 조정 신하들은 먼저 윤원로를 제거한 후에 대비에게 보고하자고 의견을 모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성우윤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던 이준경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대비가 위에 계신데 품의도 않고 지친(至親)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덕분에 윤원로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이황과 마찬가지로 형식 논리로 봤을 때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발언 하나가 이준경의 생사를 결정짓는다. 곧바로 대윤을 제거하려는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이준경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윤원형 세력의 핵심을 이루던 이기(李芑·1476~1552년)와 임백령 등은 이준경이 조정에 있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그는 좌천되어 평안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명종 3년 평안도관찰사에서 병조판서로 특진되어 중앙조정으로 돌아온 이준경은 다시 이기의 모함으로 인해 충청도 보은으로 유배를 가기도 하지만 얼마 후 복귀해 형조·이조·병조·공조 등의 판서를 두루 거쳤다. 1555년(명종 10년) 전라도 일대에서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나자 이준경은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성공적으로 변을 진압했다.
사직지신
그 공으로 이준경은 우찬성에 올라 병조판서를 겸하면서 실권을 장악했고 이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으로 승진했다. 윤원형의 견제가 만만치 않았지만 점점 자라가는 명종의 총애가 컸고 워낙 능력이 출중한데다 청렴했기 때문이었다.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 세력의 제거를 주도하는 것도 좌의정 이준경의 몫이었다.
명종 시대 22년을 참여의 입장에서 보낸 이준경의 길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권간(權奸)이 권세를 부리던 당시 준경은 지조를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 자주 배격을 당하였으나, 그들이 끝내 감히 가해하지 못한 것은 절조와 행검에 하자가 없고 논의가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정한 논의에 대하여 그것을 바로잡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나, 그의 본심은 사림을 보호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청론(淸論·사림의 의논)이 믿고 의지하는 바가 있어 여망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윤원형이 무너진 뒤에 비로소 국사를 담당하고 금상(今上·명종)을 보좌하여 급한 상태를 안정 국면으로 돌아서게 하였는데, 주상도 국사를 위임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준경은 성심과 공도로 문무 관원을 재목에 따라 써서 계책이 행해지고 공이 이루어졌으며 인심을 진정시키고 국맥을 배양하였으니, 참으로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 할 만하다.〉
정승의 체모를 지키다
그렇다고 이준경이 사림에 대해 무조건 동조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경륜가였다. 그래서 그는 “사화(士禍)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신진들의 논의가 과격하고 예리한 것을 보면 항상 억제하여 조정하려 하였고, 또 혁신하여 일거리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사림이 흔히 그 점을 부족하게 여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에 이준경은 웃으면서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낫지 내가 남을 저버리지는 않겠다”고 답했다 한다.
이준경은 비판자의 눈에는 ‘오만하다’는 평을 받을 만큼 당당했고 행동 하나하나에 위엄이 가득했다.
“이준경은 정승으로 있으면서 체모를 잘 지켜 비록 선인(善人)을 좋아하고 선비를 위하긴 하였으나, 자신을 낮추어 굽힌 적은 없었다.”
한번은 어릴 적부터 친구인 남명 조식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들어왔다. 이에 이준경은 옛 친구의 입장에서 서신은 보냈으나 끝내 조식을 만나지는 않았다. 이에 서운함을 느낀 조식이 귀향하기 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공은 어찌 정승 자리를 가지고 스스로 높이려 하는가?”
정승이 되었다고 잘난 척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에 이준경은 “조정의 체모를 내가 감히 폄하할 수 없어서이다”고 답했다.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은 이런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중망(重望)을 얻을 수 있었고 그가 선택한 ‘하성군 이균(李鈞·훗날의 선조)’에 대해 더 이상의 왈가왈부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런 강직한 인물이 어떻게 윤원형의 공세를 피할 수 있었을까? 을사년(1545년) 인종이 사망한 직후 시점의 일화에 답이 있다. 이때 신하들은 문정왕후에게 알리지도 않고 윤원형의 형 윤원로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당시 한성부 우윤이던 이준경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비가 위에 계시는데 어찌 품의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그 동기를 주살할 수 있는가?”라며 반대했다.
이 일이 아니었으면 그도 을사사화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일을 윤원형이 고맙게 생각해 평안감사로 좌천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고 이후 정승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물론 윤원형에게 아부를 하지도 않았다. 실록은 “준경은 조정에서 꼿꼿하게 집정(執政)하며 끝내 굽히는 일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윤원형으로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대단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순회세자의 죽음
명종 18년(1563년) 10월 23일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세자를 국본(國本)이라 부를 정도로 중히 여겼기 때문에 순회세자의 죽음은 왕실뿐만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장래 또한 뒤흔들 수 있는 중대 사안이었다. 이때 순회세자의 나이 13세였다. 게다가 명종에게는 아들이 순회세자 하나뿐이었고 명종 자신의 건강도 좋지 못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명종 앞 인종에게도 자손이 없었다. 거슬러 올라가 중종이 3명의 왕후를 들이면서 낳은 아들 또한 인종과 명종이 전부였다. 첫 번째 왕비였던 단경왕후 신씨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다. 따라서 순회세자의 죽음은 조선 왕실의 후계 문제를 오리무중(五里霧中) 상태로 몰아넣었다. 자칫 또다시 왕실 후계 문제로 피바람이 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명종의 나이가 이제 서른이었기에 세자를 다시 생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암초는 그의 건강이었다. 그는 심열증을 앓고 있었다. 심열증의 전형적인 증상은 화를 잘 내고 행동이 산만한 것인데 실록을 보면 명종이 화를 내는 장면이 수시로 나온다.
명종 20년 4월 6일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가 사망하자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열흘 후인 4월 16일 약방제조를 맡고 있던 좌의정 심통원(沈通源·1499~?)에게 명종이 자신의 증세를 이야기한다.
“내가 약한 체질로 평소에 위는 열이 나고 아래는 냉한 증세가 있었다. 근년에 들어와서 심기(心氣)가 허약하여져 계해년(1563년) 가을에 놀라고 슬픈 일을 당한 이후로 작은 병이 자주 있어 간신히 보전하여 날을 보내고 있었더니 올봄에 기운이 조금 돌아오는 듯하였는데 갑자기 망극한 변을 당하였다. 바야흐로 애통한 중에 있으면서 비위(脾胃)가 편치 못하고 기운도 혹 피곤하기도 하며 가슴과 명치가 막힌 듯하여 음식이 잘 내려가지 않아 지금 환약을 먹고 있다.”
윤원형의 실각
5월 19일에도 갑작스러운 복통과 설사로 약방제조 심통원이 찾아와 맥을 짚었다. 명종의 병환이 이렇다 할 차도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8월부터는 사간원(대사간 박순)과 사헌부(대사헌 이탁)가 나서 명종의 외삼촌이자 20년간 문정왕후 윤씨와 함께 권력을 휘둘러온 영의정 윤원형에 대한 탄핵 상소가 본격화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문정왕후 사후(死後)부터 승려 보우(普雨)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연일 올라오고 있었다. 윤원형도 동조할 정도였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과거사 청산 문제였다. 이후 홍문관과 성균관의 유생들까지 나서 연일 윤원형과 보우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렸다.
결국 8월 21일 신하들에게 밀린 명종은 윤원형을 파직했다. 다음 날 윤원형에 이어 영의정에 오른 이준경은 첫날부터 윤원형을 귀양 보내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다. 마침내 8월 27일 윤원형은 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당시 식자들의 분위기에 관해 실록의 사관은 이렇게 적고 있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수십 년간을 전제(專制)하였는데도 조정의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고 그 죄를 대놓고 지적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며, 흉악한 짓을 제멋대로 하게 하여 나라가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권세가 제거된 뒤에서야 비로소 논하였으니 너무 늦었다. 이 또한 을사년 이후 사기가 꺾이고 인심에 휩쓸려서 화복(禍福)을 생각하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윤원형이 쫓겨난 뒤에 지방의 한 백성 중 한쪽 팔만 들고서 노래하고 춤추는 자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윤원형은 국가에 해를 끼친 놈인데 지금 쫓아내어 백성의 해를 제거했으니 그래서 기뻐서 춤추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어 한쪽 팔만 들고 추는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지금 윤원형은 쫓겨났으나 또 다른 윤원형이 남아 있으니, 만약 모두 제거된다면 양팔을 들고 춤을 출 것이다’고 하였으니, 바로 심통원을 가리킨 말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양팔 모두 들어 춤을 추었을 것이다. 중종 32년(1537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후 윤원형에게 밀착해 좌의정에까지 오른 심통원은 결국 윤원형이 쫓겨나면서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3사의 탄핵을 받아 곧바로 사직했다. 심통원은 선조가 즉위한 1567년에는 김안로에게 아부한 죄로 관직마저 삭탈당한다. 심통원은 명종 비인 인순왕후 심씨의 할아버지인 심연원의 동생으로 말하자면 왕비의 작은할아버지였다.
9월 들어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고 윤원형의 첩 정난정이 독살한 그의 본처 김씨의 어머니가 고소를 하면서 윤원형은 점점 더 곤란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을축년의 하서
이런 가운데 명종의 병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9월 15일 대궐 분위기는 거의 임종을 앞둔 듯했다. 이날 밤 명종은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심통원, 영평부원군 윤개를 불렀다. 사실상의 유언을 남기는 자리였다. 여기서 이준경 등은 아주 조심스럽게 비어 있는 세자 자리를 정해줄 것을 간접적으로 요청했다. 명종은 안 좋은 내색을 하면서 거부했다. 그러자 이준경 등은 다시 송(宋)나라의 인종, 고려의 성종과 목종 등도 뛰어난 인품이 아니면서도 종묘사직을 생각해 30세 무렵에 ‘단안’을 내린 적이 있음을 들어 누군가를 지목해줄 것을 은근히 청했다. 이에 명종은 “내전(內殿)에서 생각하여 처리할 것”이라고 답한다. 명종 본인은 자신의 건강이 반드시 회복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실록의 사관은 “주상께서 하답(下答)하기 어려워 이렇게 답한 것이었고 실은 후사(後嗣)를 정할 뜻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명종의 건강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는 했지만 회복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틀 후 영평부원군 윤개,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심통원, 우의정 이명, 좌찬성 홍섬, 좌참찬 송기수, 우참찬 조언수, 병조판서 권철, 이조판서 오겸, 공조판서 채세영, 예조판서 박영준, 형조판서 박충원, 대사헌 이탁, 홍문관 부제학 김귀영, 대사간 박순 등이 언서로 중전에게 국본을 정해줄 것을 청했다. 완강하게 거부하던 중전, 즉 인순왕후 심씨는 언문 친필로 “국가의 일이 망극하니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이균을 입시시켜 시약(施藥)하게 하라”고 답한다. 소위 ‘을축년의 하서’였다.
번복된 하서
애매했다. 명종의 재가 또한 없었다. 신하들은 다시 중전을 압박했다. 자칫하면 자신들의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중전이 명종을 뵙고 돌아와 답한다.
“방금 국본에 대한 일을 잠시 계품하였더니 성심(聖心)이 몹시 동요하셨다.”
명종은 여전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다음 날에도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이 중전을 찾아와 다시 한 번 재촉했지만 중전은 아무런 답을 줄 수 없었다. 9월 19일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은 중전에게 굳이 이균의 이름을 거명한 사실을 환기시키며 그 마음 변치 말 것을 당부한다. 뭔가 최고 권력을 둘러싼 정치가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17일 자 실록도 “부정 윤건이 중전과 수상(이준경)의 처소를 7~8차례나 왔다 갔다 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이준경이 윤건을 통해 중전에게 은밀하게 아뢰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으니 윤건은 바로 심강의 매부였기 때문이다”고 단서를 기록해두고 있다. 심강은 중전의 아버지다.
마침내 10월 4일 명종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일주일 정도 몸을 추스른 명종은 10월 10일 윤개와 이준경, 심통원, 이명 등을 불러 국본의 문제에 관한 본인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당시 내 병세가 심해 인심이 불안해하자 대신들이 누차 내전에 계(啓)를 올려 결정을 보고자 하였기 때문에 내전이 어쩔 수 없이 이름을 써서 내렸었다. 이제 내가 소생했고 국본의 탄생을 진실로 기다리고 바라야 하니 앞으로 다시는 다른 의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대신들도 자신들이 황망 중에 한 일이라며 간곡하게 용서를 빌었다. 이로써 ‘을축년의 하서’는 원인 무효, 없었던 일이 되었다. 잠깐 이름이 언급되고 해프닝으로 끝난 하성군 이균의 그때 나이는 14세였다.
선조의 즉위
1567년(명종 22년) 6월 28일 새벽 2시경 경복궁 내 작은 침소인 양심당(養心堂)에서 명종이 승하했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로 재위 22년째였다. 그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위세에 눌려 단 한순간도 왕권을 제대로 행사해보지 못한 불운한 군주였다. 묘호는 명종(明宗)이지만 실은 암군(暗君)이었다.
사태는 명종이 위독한 상태를 보이던 6월 27일 심야부터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밤 11시경 중전이 두 정승과 약방제조를 불렀다. 당시 우의정 권철(權轍·1503~1578년)은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 영의정은 이준경, 좌의정은 이명(李蓂·1496~1572년)이었다. 이명은 이준경과 궤를 같이했고 호(號)도 같은 동고(東皐)였다. 그러나 영의정과 좌의정 두 사람은 궐내에 없었고 약방제조 심통원만이 머물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우선 심통원과 병조판서 원혼, 도승지 이양원 등만이 양심당에 들어 입시했다. 얼마 후 영의정 이준경을 비롯해 좌승지 박응남, 동부승지 박소립 등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나마 이준경은 의정부에서 유숙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종의 임종(臨終)을 지킬 수 있었다.
당시 상황의 미묘함에 대해 사관은 아주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만일 이준경의 입시가 늦었다면 중전과 약방제조이자 작은할아버지인 심통원만이 유명(遺命)을 받게 되어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소인(小人·심통원)이 그사이에 미처 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이준경이 들었을 때 아직 명종은 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말은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준경은 중전에게 하교를 내려주기를 청했고 중전은 다음과 같이 전교한다.
“지난 을축년에 하서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경들 역시 알고 있다. 지금 그 일을 정하고자 한다.”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덕흥군의 셋째 아들 이균을 후사로 삼겠다는 뜻을 넌지시 전한 것이다. 결국 영의정 이준경이 을축년의 하서를 근거로 중전의 승인을 받아 하성군 이균을 다음 국왕으로 결정했다. 명종은 결국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선조 정권을 안정시키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생생하게 전한다.
“이준경은 평소 중망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였다. 모두 하는 말이 ‘이때에 이 사람이 있으니 나라가 반드시 그의 힘을 입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왕위를 계승할 자가 정해지자마자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던 것은 다 이준경이 사람들을 진정시킨 덕분이다.”
우리가 이준경을 기억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명종이 급서(急逝)하는 바람에 왕위에 공백이 생길 뻔했으나 영의정으로서 공평무사하게 새 임금을 뽑아 등극시킨 점이다. 이런 경우 흔히 신하들은 자신들이 즉위 과정에서 세운 공로를 내세워 출세하려 하지만 이준경은 당연한 일처리라 여겨 조금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리 하여 명종의 뒤를 이은 인물이 문제의 선조(宣祖)다.
이후 선조의 집권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준경은 원상(院相)이 되어 미숙한 선조가 국왕으로서 자리 잡는 데 도움을 준다. 그는 선조 1년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의 관작(官爵)을 늦게나마 추증(追贈)하고 노수신, 유희춘 등 을사사화의 피해자들을 유배에서 풀어줌과 동시에 관작도 회복시켜주었다.
선조를 왕으로 추대한 것, 그리고 훈구(勳舊) 세력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사림 세력을 세운 것이 과연 조선 역사를 더 빛나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 논란이 있겠지만 이것은 당시로서는 누구나 바라던 일이었고 이준경은 강한 의지와 노련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사림의 패거리 짓기 경고
이제 선조 정권을 안정시키는 임무는 전적으로 영의정 이준경의 손에 놓이게 되었다. 이준경은 가장 먼저 이황을 선조의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전수하려 하였다. 선조는 이황을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했다. 그러나 이황은 한사코 사양했다. 자신은 병약하고 현실정치에 대해 모른다는 이유였다. 계속되는 강청에 결국 이황은 한양으로 올라온다.
이때의 일화가 있다.
이황이 한양에 들어왔을 때 사대부가 아침저녁으로 그의 문전을 찾아가니, 이황은 한결같이 모두 예로 접대하였다. 최후에 이준경을 찾아가 인사하자 이준경이 말하기를 “도성에 들어오신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이제야 찾아오십니까?” 하니, 이황이 사대부들을 응접하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고 하자, 이준경이 언짢아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기묘년에도 선비의 풍조가 이러하였으나 그 가운데도 염소 몸에 호랑이 껍질을 뒤집어쓴 자가 있었으므로, 사화가 이로 인하여 일어났습니다. 조정암(趙靜庵·조광조) 이외에 그 누구도 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림의 패거리 짓기에 대한 경고의 말이었다. 그 의미를 이황이 모를 리 없었다.
선조 5년(1572년) 7월 영의정에서 물러나 있던 이준경도 눈을 감는다. 이때 “이 늙은이 흙 속으로 돌아가며 전하께 4건을 당부드립니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유언을 남긴다. 이를 유차(遺箚)라고 하는데 약식 유언 상소를 말한다. 거기에는 자신이 국왕으로 만든 선조에 대한 이준경의 솔직한 인식과 앞으로 예상되는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선조에게 “잘난 체하지 말아야”
“땅으로 들어가는 신 준경은 삼가 네 가지 조목으로 죽은 뒤에도 들어줄 것을 청합니다.
첫째, 제왕에게 있어 가장 큰 일은 무엇보다도 학문하는 일입니다. 정자(程子)가 ‘함양 공부는 경(敬)으로 해야 하고 학문을 진취시키려면 치지(致知)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전하의 학문은 치지의 공력 면에서는 보통 이상의 수준이라고 하겠지만 함양의 힘은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을 하는 것이 매우 준엄하시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 포용하고 공순한 기상이 적으시니, 전하께서는 이 점에 더 노력하소서.
둘째,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위의(威儀)가 있어야 합니다. 신이 듣건대, ‘천자는 목목(穆穆·단정하고 엄숙한 모습)하고 제후는 황황(皇皇·활달하고 생기가 넘치는 모습)하다’고 하였으니, 위의를 차리시는 일을 삼가서는 안 됩니다. 신하가 진언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너그러이 포용하여 예우해주셔야 합니다. 아무리 뜻에 거슬리는 말이 있더라도 때로 영기(英氣)를 드러내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은 있으실지언정, 사사건건 직설적으로 드러내면서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을 아랫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계속 지금처럼 하신다면 백관이 맥이 풀려 수없이 터지는 잘못을 이루 다 바로잡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간하는 일입니다. 신이 듣건대 군자와 소인은 본디 정해진 명분이 있어 숨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당 문종(唐文宗)이나 송 인종(宋仁宗)은 애당초 군자와 소인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사당(私黨)에 이끌려 그들을 분간하여 쓰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시비에 어두워져 조정이 불안정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참으로 군자라면 아무리 소인이 공격하는 일이 있더라도 뽑아 써 의심하지 마시고, 참으로 소인이라면 비록 사정(私情)이 있으시더라도 단호히 물리쳐 멀리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하북조정(河北朝廷·당파싸움이 심했던 중국의 북송)과 같은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넷째, 사사로운 붕당(朋黨)을 깨뜨려야 합니다. 신이 보건대, 오늘날 사람들은 간혹 잘못된 행실이나 법에 어긋난 일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말 한마디가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으며, 행검을 유의하지 않고 독서에 힘쓰지 않더라도 고담대언(高談大言)으로 붕당을 맺는 자에 대해서는 고상한 풍치로 여겨 마침내 허위 풍조를 빚어내고 말았습니다. 군자는 모두 조정에서 집정하게 하여 의심하지 말고 소인은 방치하여 자기들끼리 어울리게 해야 하니, 지금은 곧 전하께서 공정하게 듣고 두루 살펴 힘써 이 폐단을 없앨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내는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임금을 아끼고 세상을 염려하다”
하나하나가 다 인간 선조를 꿰뚫어 본 조언(助言)이었다. 어쩌면 이미 선조가 5년여의 집권 기간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병폐였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 이런 글을 올렸더라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실록 사관의 평이다.
“공은 임금을 아끼고 세상을 염려하여 죽는 날에도 이러한 유차를 남겼으니 참으로 옛날의 곧은 신하[直臣]와 같다. 당시에 심의겸(沈義謙) 당이 이 차자를 배척하여 건조무미한 말이라 하며 소를 올려 배척하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군자의 말은 소인이 싫어하는 것이다.”⊙
“지금 문벌(門閥)이 번성하기로는 광주 이씨가 으뜸이고, 그다음으로는 우리 성씨(成氏)만 한 집안도 없다. 광주 이씨는 둔촌(遁村) 이후로 점점 커졌으니 둔촌의 아들 지직(之直)은 참의(參議)였고, 참의는 아들이 셋인데 장손(長孫)은 사인(舍人)이었고, 인손(仁孫)은 우의정(右議政)이었고, 예손(禮孫)은 관찰사(觀察使)였으며, 사인의 아들인 극규(克圭)는 지금 판결사(判決事)로 있다. 우의정에게도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극배(克培)는 영의정(領議政)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극감(克堪)은 형조판서(刑曹判書) 광성군(廣城君), 극증(克增)은 광천군(廣川君), 극돈(克墩)은 이조판서(吏曹判書) 광원군, 극균(克均)은 지중추(知中樞)였으니, 모두 일품(一品)에 올랐는데, 이 네 아들은 공이 있어 군(君)으로 봉한 것이다. 광성군은 비록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세좌(世佐)는 지금 광양군(廣陽君)이며, 문자(文字)·문손(文孫)도 높은 반열에 서서 서로 잇따라 끊이지 않았다.”
둔촌은 지금의 서울 강동구 둔촌동 일대로 이집(李集)의 호다. 이지직의 호는 탄천(炭川)이다. 세조부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정 회의에 광주 이씨 집안 ‘극’자 돌림만 8명이 참석해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 중 이준경의 증조할아버지 이극감은 형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이세좌(李世佐·1445~1504년)도 중추부 판사를 역임했다. 아버지 이수정은 홍문관 부수찬을 지냈다. 아마도 연산군 시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광주 이씨의 흥성은 계속 이어졌을지 모른다.
갑자사화
이세좌는 형조판서를 지낸 이극감의 아들로 성종 8년(1477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초고속 승진을 계속했다. 연산군 때에도 이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러나 연산군 9년(1503년)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에서 어의(御衣)에 술을 엎질러 유배를 가야 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듬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연산군은 생모 윤씨가 폐위(廢位)당할 때 이세좌가 극간(極諫)하지 않았고 이어 형방승지로서 윤씨에게 사약(賜藥)을 전달했다 하여 자살을 명했다. 이세좌는 명을 받고 목매어 자결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세좌에게는 수원(守元)·수형(守亨)·수의(守義)·수정(守貞) 네 아들이 있었는데 연산군 10년(1504년) 5월 13일 같은 날 모두 아버지의 죄에 연좌(連坐)되어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형(斬刑)을 당했다. 당시 실록의 평이다.
“수원·수형·수의·수정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세상에 이름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죄 아닌 일로 함께 참형을 당하니 통탄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 형제의 이름에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는 《주역》의 원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럼에도 때를 잘못 만나 모두 비명횡사한 것이다.
4형제 중 막내 이수정(1477~1504년)이 준경의 아버지이다.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형 윤경(李潤慶)은 7세, 준경은 6세로 한 살 터울이었다. 아버지는 참형을 당했고 어머니 신씨(申氏)는 종이 되었다. 한성부 내자시 노비가 된 신씨는 다시 장녹수 집 노비로 쫓겨났다.
신씨는 일찍부터 두 아들에게 직접 《소학》을 가르쳤다. 특히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은 늘 신씨에게 “이 아이들은 세상에 이름을 떨칠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니 조심해서 보호하라”고 당부하곤 했다.
어린 나이에 유배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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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
준경이 7세 때 일이다. 하루는 집주인의 실화(失火)로 준경 형제의 낡은 솜옷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이웃사람들이 찾아와 위로의 말을 했고, 유모도 준경의 손을 잡고 울었다.
“이제 낡은 솜옷마저 불에 타 없어졌으니 도련님, 추워서 어떻게 밤을 나겠습니까?”
준경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이 옷은 이와 벼룩이 득시글거려 항상 괴로웠는데 불에 다 타버렸으니 이제 밤잠을 편히 잘 수 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하는 모습이 태연하여 듣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준경은 8세 때인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남과 동시에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 종 생활을 하던 어머니와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 신씨는 ‘과부가 키운 자식’이라는 삿대질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윤경·준경 형제를 대단히 엄하게 가르쳤고 바깥출입도 금지시켰다. 또 학문을 익힌 바 있던 어머니 신씨는 형제에게 직접 《효경(孝經)》과 《대학(大學)》을 가르쳤다. 윤경·준경 형제에게는 사촌형님인 이연경(李延慶·1484~1548년)이 있었다. 이연경도 같은 시기에 유배를 갔다가 이때 풀려났다.
이연경은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당시의 신진 사림(士林)들과 가깝게 지냈다.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해 사헌부와 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같은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중종이 이연경은 연산군 때 화(禍)를 입은 집안의 자손이라 하여 특별히 그의 이름을 삭제해준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이연경은 공주에서 은거하면서 성리학과 양명학 등을 두루 공부했고 그의 학문적 명망을 듣고 찾아온 노수신(盧守愼)과 강유선을 사위로 삼기도 했다. 이준경이 훗날 성리학이 기본임에도 다른 학문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이연경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
33세에 뒤늦게 급제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이준경은 스물두 살이었다. 이미 사화를 겪은 바 있는 집안인데다가 학문적 방황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준경은 문과 급제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 대신 각 분야의 많은 사람과 교유를 하며 20대를 보냈다. 조식(曺植·1501~1572년)과의 깊은 교감도 이때 이루어졌다. 조식에게는 《심경(心經)》을 선물하기도 했다. 훗날 이준경은 술학(術學)에도 깊은 조예를 보이는데 이 또한 이 시기의 공부에 따른 것이다.
이에 반해 이황(李滉·1501~ 1570년)은 일찍부터 성리학으로 방향을 잡았다. 스무 살 무렵 하루는 집에 있는데 누가 와서 “이 서방!” 하고 불러서 자신을 찾는 줄 알고 나가보니 늙은 종을 부르는 소리였다. 이에 이황은 “내가 이뤄놓은 것이 없다 보니 이런 욕을 당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과거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낙방하는 등 제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준경은 33세 때인 중종 26년(1531년) 마침내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선다. 이때 이황은 진사시에만 합격해놓고 고향 주변 산사(山寺)를 돌며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33세 때인 중종 29년(1534년) 문과에 2등으로 합격했다. 두 사람 모두 문과 급제는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이준경과 이황이 관리의 길에 첫발을 디딘 이 무렵은 권간(權奸) 김안로(金安老·1481~1537년)의 세상이었다. 남곤(南袞·1471~1527년)의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갔다가 1527년 조정으로 복귀한 김안로는 특히 이황이 문과에 급제한 그 무렵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전횡을 부리고 있었다. 이황이 처음으로 맡은 보직은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이었다. 한데 김안로는 이황이 급제 후에 자신에게 인사를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내쫓아버렸다. 이황은 한직인 승문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김안로는 더 나아가 이황을 추천했던 예문관 관원들까지 모두 파직시켜버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문안 인사’는 패거리 형성에서 대단히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었는데 이황이 이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황이 관리의 길에 설 무렵 이준경은 조정에 없었다. 1531년 문과 급제 후 이듬해 홍문관 정자를 거쳐 1533년 부수찬으로 승진한 이준경은 동료인 구수담(具壽聃·1500~1549년)과 함께 안처겸(安處謙·1486~1521년)을 비롯한 신사무옥(辛巳誣獄) 연루자들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다가 파직을 당했다.
신사무옥이란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지지하다가 실각한 정승 안당(安瑭·1461~1521년)의 아들 안처겸이 이정숙(李正淑), 권전(權磌)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득세한 남곤·심정(沈貞·1471~1531년)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한 사건을 말한다. 이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안당의 집안사람 송사련(宋祀連·1496~1575년)은 처형뻘이 되는 정상(鄭鏛)과 이러한 사실을 고변할 것을 모의한 후, 안처겸의 모상(母喪)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증거로 삼아 고변하였다. 이로써 사건이 벌어져 안처겸·안당·안처근(安處謹)·권전·이충건(李忠楗)·조광좌(趙光佐)·이약수(李若水)·김필(金珌) 등 10여 명이 관련되어 처형되었고, 송사련은 이 공으로 당상관이 되어 이후 30여 년간 득세하였다. 송사련의 아들이 바로 후일 서인(西人)의 모주(謀主)가 되는 송익필(宋翼弼·1534~1599년)이다.
이후 중종 32년 김안로를 비롯한 ‘3간(奸)’이 제거될 때까지 5년 동안 이준경은 세상을 떠돌며 책과 사람 만나기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황의 좌천과 이준경의 파직은 실은 연결되어 있었다. 김안로가 이황을 좌천시키면서 들었던 공식적인 이유는 그의 장인 권질(權礩·1483~1545년)이 바로 안처겸 사건과 연루되어 경상도 예안(현 경북 안동)에 유배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권질의 동생 권전은 신사무옥 때 고문을 당해 죽었다. 이황은 인척 관계로 인해 좌천을 당했고 이준경은 이 사건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김안로에게 당한 것이었다.
이황과 함께 근무
김안로의 조정에서 이황의 앞길은 순탄치 못했다. 1535년(중종 31년) 이황은 6품 직인 선무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황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고향 근처의 수령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조정의 권력투쟁에도 염증이 났다. 그러나 김안로의 저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중종 32년 김안로 등이 실각하자마자 이준경은 호조좌랑으로 복직한 뒤 홍문관으로 자리를 옮겨 그해 말에는 응교(應敎)에까지 올랐다. 응교면 정4품 직이었다. 이후 이준경은 중종 36년 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으로 특진한다.
한편 이준경이 응교로 있던 중종 34년 말 이황은 홍문관 수찬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이때 두 사람은 같은 기관에서 근무하게 된다. 아마도 두 사람은 이전부터 친교를 맺었을 것이다. 또 이 무렵 두 사람은 홍문관과 사헌부 등을 함께 옮겨 다니며 돈독한 선후배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중종 35년 12월에는 김안로에게 당해 귀양 간 사람들을 풀어주는 문제로 이준경과 함께 잠시나마 파직되기도 했다. 이때는 두 사람 모두 사헌부에 있을 때였다.
이준경은 자존심이 유난히 강했다. 이 무렵 시를 지어 정사룡(鄭士龍·1491~1570년)이라는 문인에게 보여주며 “옛사람의 시와 비교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정사룡이 “비록 옛사람 것만은 못하나 친구를 위하여 이별의 정을 나타내는 시문을 짓는 데는 넉넉하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이준경은 다시는 시를 읊지 않았다.
이준경이 홍문관 직제학이던 중종 36년 4월 이황은 교리로 있었다. 직제학은 정3품 당하관, 교리는 정5품이었다. 이준경이 이황의 직장 상사였다. 이때 부제학이 바로 이언적(李彦迪·1491~1553년)이었다.
당시 홍문관 관리들은 의기투합해서 중종에게 학문과 정치, 민생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는 유명한 상소를 올린다. ‘일강구목소(一綱九目疎)’가 그것이다. 일강, 즉 가장 중요한 원칙은 ‘치중화(致中和)’로 올바른 화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침이 바로 구목이다.
첫째, 궁궐 내의 기강은 엄격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宮禁不可不嚴), 둘째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고(紀綱不可不正), 셋째 인재를 잘 가려서 쓰지 않으면 안 되고(人才不可不辨), 넷째 제사를 격식에 맞도록 제대로 거행하지 않으면 안 되고(祭祀不可不謹), 다섯째 백성의 곤궁함을 구제해주지 않으면 안 되고(民隱不可不恤), 여섯째 백성을 일깨우는 일을 밝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敎化不可不明), 일곱째 형벌을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刑獄不可不愼), 여덟째 사치는 금하지 않으면 안 되고(奢侈不可不禁), 아홉째 신하들이 간하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諫諍不可不納).
이준경이나 이황은 이런 지도자와 정치를 바랐다는 점에서는 확실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황의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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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
당시 홍문관 응교로 있던 이황은 다른 동료 직원들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부당하다”고 말하자 “대비인 문정왕후 외에 누가 섭정을 할 수 있는가?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반박했다. 형식 논리로 보자면 이황의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특히 이황의 성품상 그가 문정왕후나 윤원형(尹元衡)에게 아부하려고 이런 말을 했을 리 또한 만무했다.
이에 옆에서 듣고 있던 동료 두 명이 이황을 불러 나무랐다. 그러나 이황은 “떳떳하다”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밝혔다. 이후 두 사람은 고신(告身)을 빼앗기고 결국 윤원형에 의해 죽음에 이르고 만다. 사실 이황과 윤원형은 사마시 동년(同年), 즉 사마시 동기 합격자였다. 그러나 이황은 평소에 윤원형을 제대로 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황은 윤원형과의 인연을 떠나 사리(事理)를 말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황의 마음은 관직에서 떠나 있었다. 홍문관 전한,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등을 맡고 있던 그는 여러 차례 사직서를 제출했고 경연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애당초 대윤(大尹·중종의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의 일족인 윤임, 윤여필 등)이나 소윤(小尹·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일족인 윤지임, 윤원형, 윤원로 등)과 멀리했던 그이기에 사화가 그에게 직접 닥쳐오지는 않았지만 9월 들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병도 심해지고 정치에 대한 환멸도 깊어만 갔다. 사직서를 제출하면 위에서는 반려하는 일이 반복되는 가운데 한 해가 지나갔다. 이듬해 어렵사리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기한을 넘겨 그해 5월 해직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황은 을사사화의 피바람을 비켜갈 수 있었다. 이후 이황은 고향마을에 암자를 짓고 본격적인 학문 수양과 제자 양성에 들어간다.
을묘왜변 진압
한편 이준경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때 중종이 승하하자 이를 명(明)나라에 알리는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 차출되어 북경을 다녀온다. 한양으로 돌아와서는 형조참판에 오른다.
이때 대윤이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조정에서는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윤원로(尹元老)를 죽여야 한다는 논의를 하고 있었다. 특히 조정 신하들은 먼저 윤원로를 제거한 후에 대비에게 보고하자고 의견을 모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성우윤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던 이준경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대비가 위에 계신데 품의도 않고 지친(至親)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덕분에 윤원로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이황과 마찬가지로 형식 논리로 봤을 때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발언 하나가 이준경의 생사를 결정짓는다. 곧바로 대윤을 제거하려는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이준경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윤원형 세력의 핵심을 이루던 이기(李芑·1476~1552년)와 임백령 등은 이준경이 조정에 있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그는 좌천되어 평안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명종 3년 평안도관찰사에서 병조판서로 특진되어 중앙조정으로 돌아온 이준경은 다시 이기의 모함으로 인해 충청도 보은으로 유배를 가기도 하지만 얼마 후 복귀해 형조·이조·병조·공조 등의 판서를 두루 거쳤다. 1555년(명종 10년) 전라도 일대에서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나자 이준경은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성공적으로 변을 진압했다.
사직지신
그 공으로 이준경은 우찬성에 올라 병조판서를 겸하면서 실권을 장악했고 이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으로 승진했다. 윤원형의 견제가 만만치 않았지만 점점 자라가는 명종의 총애가 컸고 워낙 능력이 출중한데다 청렴했기 때문이었다.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 세력의 제거를 주도하는 것도 좌의정 이준경의 몫이었다.
명종 시대 22년을 참여의 입장에서 보낸 이준경의 길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권간(權奸)이 권세를 부리던 당시 준경은 지조를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 자주 배격을 당하였으나, 그들이 끝내 감히 가해하지 못한 것은 절조와 행검에 하자가 없고 논의가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정한 논의에 대하여 그것을 바로잡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나, 그의 본심은 사림을 보호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청론(淸論·사림의 의논)이 믿고 의지하는 바가 있어 여망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윤원형이 무너진 뒤에 비로소 국사를 담당하고 금상(今上·명종)을 보좌하여 급한 상태를 안정 국면으로 돌아서게 하였는데, 주상도 국사를 위임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준경은 성심과 공도로 문무 관원을 재목에 따라 써서 계책이 행해지고 공이 이루어졌으며 인심을 진정시키고 국맥을 배양하였으니, 참으로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 할 만하다.〉
정승의 체모를 지키다
그렇다고 이준경이 사림에 대해 무조건 동조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경륜가였다. 그래서 그는 “사화(士禍)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신진들의 논의가 과격하고 예리한 것을 보면 항상 억제하여 조정하려 하였고, 또 혁신하여 일거리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사림이 흔히 그 점을 부족하게 여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에 이준경은 웃으면서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낫지 내가 남을 저버리지는 않겠다”고 답했다 한다.
이준경은 비판자의 눈에는 ‘오만하다’는 평을 받을 만큼 당당했고 행동 하나하나에 위엄이 가득했다.
“이준경은 정승으로 있으면서 체모를 잘 지켜 비록 선인(善人)을 좋아하고 선비를 위하긴 하였으나, 자신을 낮추어 굽힌 적은 없었다.”
한번은 어릴 적부터 친구인 남명 조식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들어왔다. 이에 이준경은 옛 친구의 입장에서 서신은 보냈으나 끝내 조식을 만나지는 않았다. 이에 서운함을 느낀 조식이 귀향하기 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공은 어찌 정승 자리를 가지고 스스로 높이려 하는가?”
정승이 되었다고 잘난 척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에 이준경은 “조정의 체모를 내가 감히 폄하할 수 없어서이다”고 답했다.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은 이런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중망(重望)을 얻을 수 있었고 그가 선택한 ‘하성군 이균(李鈞·훗날의 선조)’에 대해 더 이상의 왈가왈부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런 강직한 인물이 어떻게 윤원형의 공세를 피할 수 있었을까? 을사년(1545년) 인종이 사망한 직후 시점의 일화에 답이 있다. 이때 신하들은 문정왕후에게 알리지도 않고 윤원형의 형 윤원로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당시 한성부 우윤이던 이준경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비가 위에 계시는데 어찌 품의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그 동기를 주살할 수 있는가?”라며 반대했다.
이 일이 아니었으면 그도 을사사화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일을 윤원형이 고맙게 생각해 평안감사로 좌천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고 이후 정승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물론 윤원형에게 아부를 하지도 않았다. 실록은 “준경은 조정에서 꼿꼿하게 집정(執政)하며 끝내 굽히는 일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윤원형으로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대단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순회세자의 죽음
명종 18년(1563년) 10월 23일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세자를 국본(國本)이라 부를 정도로 중히 여겼기 때문에 순회세자의 죽음은 왕실뿐만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장래 또한 뒤흔들 수 있는 중대 사안이었다. 이때 순회세자의 나이 13세였다. 게다가 명종에게는 아들이 순회세자 하나뿐이었고 명종 자신의 건강도 좋지 못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명종 앞 인종에게도 자손이 없었다. 거슬러 올라가 중종이 3명의 왕후를 들이면서 낳은 아들 또한 인종과 명종이 전부였다. 첫 번째 왕비였던 단경왕후 신씨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다. 따라서 순회세자의 죽음은 조선 왕실의 후계 문제를 오리무중(五里霧中) 상태로 몰아넣었다. 자칫 또다시 왕실 후계 문제로 피바람이 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명종의 나이가 이제 서른이었기에 세자를 다시 생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암초는 그의 건강이었다. 그는 심열증을 앓고 있었다. 심열증의 전형적인 증상은 화를 잘 내고 행동이 산만한 것인데 실록을 보면 명종이 화를 내는 장면이 수시로 나온다.
명종 20년 4월 6일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가 사망하자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열흘 후인 4월 16일 약방제조를 맡고 있던 좌의정 심통원(沈通源·1499~?)에게 명종이 자신의 증세를 이야기한다.
“내가 약한 체질로 평소에 위는 열이 나고 아래는 냉한 증세가 있었다. 근년에 들어와서 심기(心氣)가 허약하여져 계해년(1563년) 가을에 놀라고 슬픈 일을 당한 이후로 작은 병이 자주 있어 간신히 보전하여 날을 보내고 있었더니 올봄에 기운이 조금 돌아오는 듯하였는데 갑자기 망극한 변을 당하였다. 바야흐로 애통한 중에 있으면서 비위(脾胃)가 편치 못하고 기운도 혹 피곤하기도 하며 가슴과 명치가 막힌 듯하여 음식이 잘 내려가지 않아 지금 환약을 먹고 있다.”
윤원형의 실각
5월 19일에도 갑작스러운 복통과 설사로 약방제조 심통원이 찾아와 맥을 짚었다. 명종의 병환이 이렇다 할 차도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8월부터는 사간원(대사간 박순)과 사헌부(대사헌 이탁)가 나서 명종의 외삼촌이자 20년간 문정왕후 윤씨와 함께 권력을 휘둘러온 영의정 윤원형에 대한 탄핵 상소가 본격화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문정왕후 사후(死後)부터 승려 보우(普雨)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연일 올라오고 있었다. 윤원형도 동조할 정도였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과거사 청산 문제였다. 이후 홍문관과 성균관의 유생들까지 나서 연일 윤원형과 보우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렸다.
결국 8월 21일 신하들에게 밀린 명종은 윤원형을 파직했다. 다음 날 윤원형에 이어 영의정에 오른 이준경은 첫날부터 윤원형을 귀양 보내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다. 마침내 8월 27일 윤원형은 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당시 식자들의 분위기에 관해 실록의 사관은 이렇게 적고 있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수십 년간을 전제(專制)하였는데도 조정의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고 그 죄를 대놓고 지적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며, 흉악한 짓을 제멋대로 하게 하여 나라가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권세가 제거된 뒤에서야 비로소 논하였으니 너무 늦었다. 이 또한 을사년 이후 사기가 꺾이고 인심에 휩쓸려서 화복(禍福)을 생각하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윤원형이 쫓겨난 뒤에 지방의 한 백성 중 한쪽 팔만 들고서 노래하고 춤추는 자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윤원형은 국가에 해를 끼친 놈인데 지금 쫓아내어 백성의 해를 제거했으니 그래서 기뻐서 춤추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어 한쪽 팔만 들고 추는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지금 윤원형은 쫓겨났으나 또 다른 윤원형이 남아 있으니, 만약 모두 제거된다면 양팔을 들고 춤을 출 것이다’고 하였으니, 바로 심통원을 가리킨 말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양팔 모두 들어 춤을 추었을 것이다. 중종 32년(1537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후 윤원형에게 밀착해 좌의정에까지 오른 심통원은 결국 윤원형이 쫓겨나면서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3사의 탄핵을 받아 곧바로 사직했다. 심통원은 선조가 즉위한 1567년에는 김안로에게 아부한 죄로 관직마저 삭탈당한다. 심통원은 명종 비인 인순왕후 심씨의 할아버지인 심연원의 동생으로 말하자면 왕비의 작은할아버지였다.
9월 들어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고 윤원형의 첩 정난정이 독살한 그의 본처 김씨의 어머니가 고소를 하면서 윤원형은 점점 더 곤란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을축년의 하서
이런 가운데 명종의 병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9월 15일 대궐 분위기는 거의 임종을 앞둔 듯했다. 이날 밤 명종은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심통원, 영평부원군 윤개를 불렀다. 사실상의 유언을 남기는 자리였다. 여기서 이준경 등은 아주 조심스럽게 비어 있는 세자 자리를 정해줄 것을 간접적으로 요청했다. 명종은 안 좋은 내색을 하면서 거부했다. 그러자 이준경 등은 다시 송(宋)나라의 인종, 고려의 성종과 목종 등도 뛰어난 인품이 아니면서도 종묘사직을 생각해 30세 무렵에 ‘단안’을 내린 적이 있음을 들어 누군가를 지목해줄 것을 은근히 청했다. 이에 명종은 “내전(內殿)에서 생각하여 처리할 것”이라고 답한다. 명종 본인은 자신의 건강이 반드시 회복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실록의 사관은 “주상께서 하답(下答)하기 어려워 이렇게 답한 것이었고 실은 후사(後嗣)를 정할 뜻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명종의 건강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는 했지만 회복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틀 후 영평부원군 윤개,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심통원, 우의정 이명, 좌찬성 홍섬, 좌참찬 송기수, 우참찬 조언수, 병조판서 권철, 이조판서 오겸, 공조판서 채세영, 예조판서 박영준, 형조판서 박충원, 대사헌 이탁, 홍문관 부제학 김귀영, 대사간 박순 등이 언서로 중전에게 국본을 정해줄 것을 청했다. 완강하게 거부하던 중전, 즉 인순왕후 심씨는 언문 친필로 “국가의 일이 망극하니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이균을 입시시켜 시약(施藥)하게 하라”고 답한다. 소위 ‘을축년의 하서’였다.
번복된 하서
애매했다. 명종의 재가 또한 없었다. 신하들은 다시 중전을 압박했다. 자칫하면 자신들의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중전이 명종을 뵙고 돌아와 답한다.
“방금 국본에 대한 일을 잠시 계품하였더니 성심(聖心)이 몹시 동요하셨다.”
명종은 여전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다음 날에도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이 중전을 찾아와 다시 한 번 재촉했지만 중전은 아무런 답을 줄 수 없었다. 9월 19일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은 중전에게 굳이 이균의 이름을 거명한 사실을 환기시키며 그 마음 변치 말 것을 당부한다. 뭔가 최고 권력을 둘러싼 정치가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17일 자 실록도 “부정 윤건이 중전과 수상(이준경)의 처소를 7~8차례나 왔다 갔다 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이준경이 윤건을 통해 중전에게 은밀하게 아뢰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으니 윤건은 바로 심강의 매부였기 때문이다”고 단서를 기록해두고 있다. 심강은 중전의 아버지다.
마침내 10월 4일 명종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일주일 정도 몸을 추스른 명종은 10월 10일 윤개와 이준경, 심통원, 이명 등을 불러 국본의 문제에 관한 본인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당시 내 병세가 심해 인심이 불안해하자 대신들이 누차 내전에 계(啓)를 올려 결정을 보고자 하였기 때문에 내전이 어쩔 수 없이 이름을 써서 내렸었다. 이제 내가 소생했고 국본의 탄생을 진실로 기다리고 바라야 하니 앞으로 다시는 다른 의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대신들도 자신들이 황망 중에 한 일이라며 간곡하게 용서를 빌었다. 이로써 ‘을축년의 하서’는 원인 무효, 없었던 일이 되었다. 잠깐 이름이 언급되고 해프닝으로 끝난 하성군 이균의 그때 나이는 14세였다.
선조의 즉위
1567년(명종 22년) 6월 28일 새벽 2시경 경복궁 내 작은 침소인 양심당(養心堂)에서 명종이 승하했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로 재위 22년째였다. 그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위세에 눌려 단 한순간도 왕권을 제대로 행사해보지 못한 불운한 군주였다. 묘호는 명종(明宗)이지만 실은 암군(暗君)이었다.
사태는 명종이 위독한 상태를 보이던 6월 27일 심야부터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밤 11시경 중전이 두 정승과 약방제조를 불렀다. 당시 우의정 권철(權轍·1503~1578년)은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 영의정은 이준경, 좌의정은 이명(李蓂·1496~1572년)이었다. 이명은 이준경과 궤를 같이했고 호(號)도 같은 동고(東皐)였다. 그러나 영의정과 좌의정 두 사람은 궐내에 없었고 약방제조 심통원만이 머물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우선 심통원과 병조판서 원혼, 도승지 이양원 등만이 양심당에 들어 입시했다. 얼마 후 영의정 이준경을 비롯해 좌승지 박응남, 동부승지 박소립 등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나마 이준경은 의정부에서 유숙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종의 임종(臨終)을 지킬 수 있었다.
당시 상황의 미묘함에 대해 사관은 아주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만일 이준경의 입시가 늦었다면 중전과 약방제조이자 작은할아버지인 심통원만이 유명(遺命)을 받게 되어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소인(小人·심통원)이 그사이에 미처 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이준경이 들었을 때 아직 명종은 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말은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준경은 중전에게 하교를 내려주기를 청했고 중전은 다음과 같이 전교한다.
“지난 을축년에 하서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경들 역시 알고 있다. 지금 그 일을 정하고자 한다.”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덕흥군의 셋째 아들 이균을 후사로 삼겠다는 뜻을 넌지시 전한 것이다. 결국 영의정 이준경이 을축년의 하서를 근거로 중전의 승인을 받아 하성군 이균을 다음 국왕으로 결정했다. 명종은 결국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선조 정권을 안정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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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의 초상으로 알려진 그림. |
“이준경은 평소 중망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였다. 모두 하는 말이 ‘이때에 이 사람이 있으니 나라가 반드시 그의 힘을 입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왕위를 계승할 자가 정해지자마자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던 것은 다 이준경이 사람들을 진정시킨 덕분이다.”
우리가 이준경을 기억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명종이 급서(急逝)하는 바람에 왕위에 공백이 생길 뻔했으나 영의정으로서 공평무사하게 새 임금을 뽑아 등극시킨 점이다. 이런 경우 흔히 신하들은 자신들이 즉위 과정에서 세운 공로를 내세워 출세하려 하지만 이준경은 당연한 일처리라 여겨 조금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리 하여 명종의 뒤를 이은 인물이 문제의 선조(宣祖)다.
이후 선조의 집권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준경은 원상(院相)이 되어 미숙한 선조가 국왕으로서 자리 잡는 데 도움을 준다. 그는 선조 1년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의 관작(官爵)을 늦게나마 추증(追贈)하고 노수신, 유희춘 등 을사사화의 피해자들을 유배에서 풀어줌과 동시에 관작도 회복시켜주었다.
선조를 왕으로 추대한 것, 그리고 훈구(勳舊) 세력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사림 세력을 세운 것이 과연 조선 역사를 더 빛나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 논란이 있겠지만 이것은 당시로서는 누구나 바라던 일이었고 이준경은 강한 의지와 노련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사림의 패거리 짓기 경고
이제 선조 정권을 안정시키는 임무는 전적으로 영의정 이준경의 손에 놓이게 되었다. 이준경은 가장 먼저 이황을 선조의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전수하려 하였다. 선조는 이황을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했다. 그러나 이황은 한사코 사양했다. 자신은 병약하고 현실정치에 대해 모른다는 이유였다. 계속되는 강청에 결국 이황은 한양으로 올라온다.
이때의 일화가 있다.
이황이 한양에 들어왔을 때 사대부가 아침저녁으로 그의 문전을 찾아가니, 이황은 한결같이 모두 예로 접대하였다. 최후에 이준경을 찾아가 인사하자 이준경이 말하기를 “도성에 들어오신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이제야 찾아오십니까?” 하니, 이황이 사대부들을 응접하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고 하자, 이준경이 언짢아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기묘년에도 선비의 풍조가 이러하였으나 그 가운데도 염소 몸에 호랑이 껍질을 뒤집어쓴 자가 있었으므로, 사화가 이로 인하여 일어났습니다. 조정암(趙靜庵·조광조) 이외에 그 누구도 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림의 패거리 짓기에 대한 경고의 말이었다. 그 의미를 이황이 모를 리 없었다.
선조 5년(1572년) 7월 영의정에서 물러나 있던 이준경도 눈을 감는다. 이때 “이 늙은이 흙 속으로 돌아가며 전하께 4건을 당부드립니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유언을 남긴다. 이를 유차(遺箚)라고 하는데 약식 유언 상소를 말한다. 거기에는 자신이 국왕으로 만든 선조에 대한 이준경의 솔직한 인식과 앞으로 예상되는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선조에게 “잘난 체하지 말아야”
“땅으로 들어가는 신 준경은 삼가 네 가지 조목으로 죽은 뒤에도 들어줄 것을 청합니다.
첫째, 제왕에게 있어 가장 큰 일은 무엇보다도 학문하는 일입니다. 정자(程子)가 ‘함양 공부는 경(敬)으로 해야 하고 학문을 진취시키려면 치지(致知)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전하의 학문은 치지의 공력 면에서는 보통 이상의 수준이라고 하겠지만 함양의 힘은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을 하는 것이 매우 준엄하시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 포용하고 공순한 기상이 적으시니, 전하께서는 이 점에 더 노력하소서.
둘째,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위의(威儀)가 있어야 합니다. 신이 듣건대, ‘천자는 목목(穆穆·단정하고 엄숙한 모습)하고 제후는 황황(皇皇·활달하고 생기가 넘치는 모습)하다’고 하였으니, 위의를 차리시는 일을 삼가서는 안 됩니다. 신하가 진언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너그러이 포용하여 예우해주셔야 합니다. 아무리 뜻에 거슬리는 말이 있더라도 때로 영기(英氣)를 드러내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은 있으실지언정, 사사건건 직설적으로 드러내면서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을 아랫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계속 지금처럼 하신다면 백관이 맥이 풀려 수없이 터지는 잘못을 이루 다 바로잡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간하는 일입니다. 신이 듣건대 군자와 소인은 본디 정해진 명분이 있어 숨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당 문종(唐文宗)이나 송 인종(宋仁宗)은 애당초 군자와 소인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사당(私黨)에 이끌려 그들을 분간하여 쓰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시비에 어두워져 조정이 불안정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참으로 군자라면 아무리 소인이 공격하는 일이 있더라도 뽑아 써 의심하지 마시고, 참으로 소인이라면 비록 사정(私情)이 있으시더라도 단호히 물리쳐 멀리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하북조정(河北朝廷·당파싸움이 심했던 중국의 북송)과 같은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넷째, 사사로운 붕당(朋黨)을 깨뜨려야 합니다. 신이 보건대, 오늘날 사람들은 간혹 잘못된 행실이나 법에 어긋난 일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말 한마디가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으며, 행검을 유의하지 않고 독서에 힘쓰지 않더라도 고담대언(高談大言)으로 붕당을 맺는 자에 대해서는 고상한 풍치로 여겨 마침내 허위 풍조를 빚어내고 말았습니다. 군자는 모두 조정에서 집정하게 하여 의심하지 말고 소인은 방치하여 자기들끼리 어울리게 해야 하니, 지금은 곧 전하께서 공정하게 듣고 두루 살펴 힘써 이 폐단을 없앨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내는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임금을 아끼고 세상을 염려하다”
하나하나가 다 인간 선조를 꿰뚫어 본 조언(助言)이었다. 어쩌면 이미 선조가 5년여의 집권 기간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병폐였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 이런 글을 올렸더라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실록 사관의 평이다.
“공은 임금을 아끼고 세상을 염려하여 죽는 날에도 이러한 유차를 남겼으니 참으로 옛날의 곧은 신하[直臣]와 같다. 당시에 심의겸(沈義謙) 당이 이 차자를 배척하여 건조무미한 말이라 하며 소를 올려 배척하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군자의 말은 소인이 싫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