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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 물들다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살아간다’는 것은…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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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보다는 40이/ 40보다는 50이 더 빠르다/ 이 황홀한 시간을 타고, 우리는/ 내려가고 있다’
⊙ 생물학적 나이는 ‘허상’… 지금 나이에서 17살을 빼라
서울 탑골공원의 노인들. ‘이 황홀한 시간을 타고, 우리는 내려가고 있다. 저 과거에서 온 외계인처럼.’ 사진=조선DB
  《한국힐링문학》 2023년 12월호에 시인 이인선이 쓴 〈박남수 시를 통한 상담심리치료와 정서치유 효과〉를 읽다가 이 문장에 잠깐 정신줄을 놓는다. 인상적이다. ‘내려놓음은 사특함이 없다. 내려놓음의 시는 사치를 극복한 순응이 있다’는 것이다. 내려놓음이라….
 
《한국힐링문학》 2023년 12월호
  〈솔직하면 죄를 덜 짓는다. 제2, 제3의 거짓을 만드는 횟수를 줄인다. 기회주의자의 목소리는 늘 가늘고 작다. 몸집도 가늘고 작다. 자기 힘으로 성취할 능력이 없으면, 기회주의자는 큰 사람 뒤에 숨어서 큰 사람을 조종한다. 내려놓음은 사특함이 없다. 내려놓음의 시는 사치를 극복한 순응이 있다. 스스로 도달한 경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시 치유 효과가 배가된다. 투쟁의 대상을 자의적으로 버리는 것은, 타의적으로 포기한 것과 다르다. 선택적으로 버렸으므로 스스로 갈등 요소를 삭제해버린 것이다.〉 (《한국힐링문학》 2023년 12월호 중에서)
 

  박남수 시인의 시 ‘떨어지는 시간’을 읽어본다.
 
  떨어진다. 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시간을, 이제까지
  옆으로 흐르는 줄만 알았다. (중략)
 
  떨어지는 시간은
  내려올수록 속도가 빨라진다.
  30보다는 40이
  40보다는 50이 더 빠르다.
  이 황홀한 시간을 타고, 우리는
  내려가고 있다.
  저 과거에서 온
  외계인처럼.
 
  -박남수의 ‘떨어지는 시간’ 중에서

 
 
  ‘내려온 생애’ ‘낮춘 인생’ ‘강 수심으로 내려가는 돌처럼’
 
박남수 시인
  ‘아래로 떨어지는 시간’을 박남수 시인은 ‘황홀한 시간’이라 말한다. 그런 인식이 놀라울 뿐이다. 나이 듦은 아무리 생각해도 황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도처에 ‘화내는 늙은 남자’가 수두룩하다.
 
  젊은 시절의 열정과 수고의 열매가 그저 그리울 뿐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일쑤다. 뻔뻔해지고 곧잘 분노에 빠진다. 그러나 이 분노가 잘못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럴수록 더 화가 난다. 얼마나 더 순례의 여정을 떠나야 할까. 늙을수록 더 배우고 단련할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내려온 생애’ ‘낮춘 인생’을 더욱 낮추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다. 얼마나 더 낮아져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스스로를 낮추어, 여기까지
  내려온 생애를 더 얼마나 낮추어야
  낮춘 인생이 보일까. 이제
  나는 할 일을 잃었다.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할 수가 없이 되었다.
  척추가 구부러지고
  팔다리의 근육도 묽어져
  흔들린 지도 오래다. 그보다도
  정신력이 어지럼증을 일으켜, 어질
  어질 헛도는 치차(齒車)처럼 헐렁인다.
  이제 더는 쓸모가 없어져
  시나 쓰며, 살았다는 증거를 삼고 있다.
  스스로를 낮추어, 여기까지
  내려온 생애를 주섬주섬 담아서
  갈 길을 챙기고 있다. 바닥까지
  낮추어 욕심을 버리고 나면, 이렇게
  개운한 것을 개운한
  것을 미처 모르고 살아온
  헛살은 생애가 앙상한 뼈처럼 서 있다.
  - 박남수의 시 ‘거의 끝머리에서’ 중에서
  하루종일 TV 앞에서
  오른팔이 아프면 왼팔로 머리를 받치고
  길게 모로 누워 있는 일요일; 이 내용물은
  서서히 금이 가면서 점점
  진흙에 가까워지고 있다.
  아시아나기 잔해에서 실신한 여자를 헬기가
  끌어올릴 때 바람이 걷어올리는 붉은 팬티;
  죽음은 그렇게 부끄러움을 모른다.
  강 수심으로 내려가는 돌처럼
  어디까지 내려가나 보자, 아예 작정을 하고
  맨 밑바닥까지 내려온 덩어리 (중략)
  이것도 삶이라며, 삶은 욕설이리라.
 
  -황지우의 시 ‘점점 진흙에 가까워지는 존재’ 중에서

 
《김형석의 인생문답》(2022)
  100세 스승 김형석 교수의 글을 읽다 보니 ‘정신은 언제부터 늙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을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 노(老)스승이 얻은 결론은 ‘사람의 정신력은 좀처럼 늙는 게 아니다’는 것이다. 물론 50대쯤 되면 기억력이 약화된다.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일이 잦다. 왜냐하면 그 나이쯤 되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노스승은 ‘기억력이 멎으니까 그 대신 사고력이 올라간다’고 설명한다.
 
  〈사고력은 기억력보다 소중해요. 그래서 사람은 60세가 넘으면서 큰일을 하게 되는 거예요. 나이가 들어서 리더가 되는 것은 기억력은 멈춰지더라도 사고력, 창조력이 확장되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김형석의 인생문답》(2022) 중에서]
 
  사고는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계속 진화한다. 지능을 예로 든다면 심리학에서 두 가지 종류로 설명한다. 유동성 지능(fluid intelligence)은 신경발달, 영양, 질병, 노쇠, 건강과 연령 등 주로 신체적인 요인의 영향을 받는 지능이다. 개념 형성, 귀납적 추리, 기계적 암기, 도형지각 능력 등 정보 처리의 속도와 정확성에 관여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이 유동성 지능은 10대 후반이 되면 완전히 발달하며, 절정기를 이룬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점점 낮아지기 시작한다. 신체적 능력과 비슷하다.
 
  반면 결정성 지능(crystallized intelligence)은 경험과 교육, 그리고 훈련을 통하여 얻은 지식과 능력을 말한다. 이 결정성 지능은 풍부한 상식, 적절한 어휘를 동원해 상황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 독해력, 문제해결 능력,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관련이 있다. 결정성 지능은 의도적 학습 과정을 통해 발달하는 것이므로 연령과 비례해 계속 상승한다. 김형석 교수의 “60이 넘어 사고력, 창조력이 확장된다”는 말은 결정성 지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계속된 그의 주장이다.
 
  〈내가 경험했으니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 노력해서 잘 준비하면 신체가 늙는다고 해서 정신력까지 늙는 것은 아니에요. 나의 정신력은 내가 더 많이 키울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의사나 과학자들 가운데 인생을 길게 보는 사람들에 의하면, 뇌의 기능은 좀처럼 늙지 않는다고 해요. 과학적 실험도 그런 걸 증명하고 있다고 보죠.〉(《김형석의 인생문답》 중에서)
 
 
  “마흔이 되면 마음에 지진이 일어난다”(융)
 
김혜남의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2022)
  30년 동안 정신분석 전문의로 일해온 저자(김혜남)가 마흔이 된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담은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2022)을 읽는다. 이 책은 올해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중 한 권이다.
 
  저자는 정신분석 전문의로, 두 아이의 엄마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마흔 살까지만 해도 ‘내가 잘했으니까 지금의 내가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집이고 병원이고 환자들이고 자신이 없으면 큰일이 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2001년 마흔세 살에 몸이 점점 굳어가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병마와 싸우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역할을 다 잘해 내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를 닦달하며 인생을 숙제처럼 살아오다 보니 정작 누려야 할 삶의 즐거움들을 너무 많이 놓쳐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신이 없는데도 세상이 너무나 멀쩡하게 잘 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정신분석가인 융은 “마흔이 되면 마음에 지진이 일어난다”고 했다. 삶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혼란을 겪는 것이다. 제임스 홀리스에 따르면 우리는 1차 성인기인 12~40세까지 누구의 아들딸, 누구의 엄마 아빠, 어느 회사의 팀장으로서 가족과 사회 안에서 사회화된다. 그것은 진정한 본성에 따르기보다는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하고 선택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키워진 결과로서의 삶에 가깝다. 즉 진정한 자신에게서 멀어진 채 살아온 것이다.〉(김혜남의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중에서)
 
  낮아짐, 내려놓음, 비움의 변곡점을 김혜남 의사는 마흔이라 규정한다. 마흔이 되면 우리가 보낸 시간들이 오롯이 기록된 과거의 책장을 넘기며, 이제껏 열심히 일궈온 삶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해도, 내가 누구이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내가 성취한 게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몰려온다. 김혜남은 “아직도 원하는 것이 많은데,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시간은 계속 흐르고 우리에게 남은 선택의 폭은 점점 줄어만 간다”고 말한다.
 
점점 나이가 들며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출근 길의 만원 버스 안, 두 승객이 하나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다. 사진=조선DB
  나이가 들면서, 마흔에서 쉰으로, 쉰에서 예순으로 갈수록 선택할 게 점점 줄어듦을 알게 된다. 그전부터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물론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인생의 주인공이자 공동체의 일원이며 전체의 일부다. 하지만 ‘나’는 세계의 중심은 아니다. 자기 자신밖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본인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타인이란 ‘나를 위해 뭔가를 해줄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기대가 번번이 깨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잘못된 관념을 고집하면 점점 인색해진다.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가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받을 용기》(2022)
  〈철학자 : 우리는 모두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갖기를 원해. 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소속감이 가만히 있어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네.
 
  청년 : 적극적으로 공헌한다? 그게 무슨 뜻이죠?
 
  철학자 : ‘인생의 과제’에 직면하는 걸세. 즉 일, 교우, 사랑이라는 인간관계의 과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지. 만약 자네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공동체에 공헌하겠다는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을 걸세. 모든 타인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사람’이니 굳이 내가 나서서 행동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자네도 나도 세계의 중심이 아니야. 내 발로 인간관계의 과제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되네.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해줄까?’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그것이 공동체에 공헌(commit)하는 길일세.〉[가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받을 용기》(2022) 중에서]

 
  정년퇴직을 하자마자 생기를 잃는 사람이 있다. 회사라는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지위도 명함도 이름도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 즉 ‘보통’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식간에 늙는 것이다. 하지만 정년퇴직이란 단순히 회사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에 불과하다. 보다 큰 공동체에는 여전히 속해 있다. 지구라는, 우주라는 공동체에.
 
  심리학자 아들러가 말하는 공동체란 가정이나 회사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까지 다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그가 빵 한 조각을 사고 그 대가로 동전 한 닢을 지불했다고 하지. 그 지불한 동전은 빵가게 주인에게만 가는 게 아니네. 밀과 버터의 생산자들, 그리고 밀과 버터를 운반하는 유통업자들, 연료를 판매하는 업자들, 나아가서는 산유국 국민들까지 여러 사람에게 돌아갈 걸세. 줄줄이 엮여 있지.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서 ‘홀로’ 될 수도 없거니와 ‘홀로’ 살 수도 없어.〉(《미움받을 용기》 중에서)
 
김미경의 에세이 《김미경의 마흔 수업》(2023)
  김미경의 에세이 《김미경의 마흔 수업》(2023)도 나이 듦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마흔에다 밑줄을 그었다. “마흔은 계산법을 바꿔야 하는 대변혁의 시기”라는 것이다. 마흔은 좋아하는 일을 시작해도 충분한 나이다. 10년 안에 뭔가 이루지 못하면 안 된다는 조급함과 성급함이 오히려 독이 된다. 좋아하는 것을 시작해도 넉넉한 나이가 마흔이다. 마흔이란 나이에 짓눌려 좋아하는 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고 권한다.
 
  〈우리나라는 유독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하다. 세상은 너무 빨리 바뀌었는데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은 30년 전에 멈춰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내 나이에서 17살을 빼라고 말한다. 덕담처럼 말하는 나이,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수명이 갑자기 늘어난 지금은 오히려 지금의 생물학적 나이가 ‘허상’일 수 있다. 지금 나이에서 17살을 뺀 나이. 그것이 실제 100세까지 살아갈 ‘현실나이’이자 ‘라이프스타일 나이’다. 지금의 나이가 49세라면 라이프스타일 나이는 32세다. 실제로 32세처럼 살아야 100세 시대의 생애주기에 맞게 살아갈 수 있다.〉(《김미경의 마흔 수업》 중에서)
 
 
  당신에게 남은 ‘남아 있는 나날’
 
영화 〈남아 있는 나날〉(1994)의 한 장면. 영국 가문에서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 역할을 맡은 스티븐슨(앤서니 홉킨스)과 켄턴(엠마 톰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장편소설 《남아 있는 나날》(2009, 국내출간)은 영국의 귀족인 달링턴 홀의 노(老)집사 스티븐슨의 이야기다. 스티븐슨은 진정한 집사가 존재하는 곳은 영국밖에 없고 그 외의 나라들에는 오직 하인들만 있을 뿐이라 굳게 믿는 전근대적 인물이다. 그는 ‘품위’라는 말을 가장 중시한다. 그런 그도 이제 늙었다. 1956년 7월, 평생을 주인으로 모신 달링턴 경의 죽음 이후 화려하고 웅장한 저택이 경매로 넘어가고 미국인 부호(富豪)를 새 주인으로 맞이한다.
 
  어느 여름날 저녁 무렵 스티븐슨은 같은 집사 일을 했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일흔이 넘은 ‘스티븐슨 시니어’는 어느 날 다과를 나르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훌륭한 집사라는 자부심이 무너지고 이후 거실 바닥 청소와 같은 허드렛일을 맡게 된다. 그 과정을 아들 스티븐슨은 묵묵히 지켜봐야 했다.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되짚어 걷는 아버지의 늙은 모습은 노쇠함을 거부하는 분노의 표현처럼 느껴졌다. 가정부 켄턴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치 땅에 떨어뜨린 귀중한 보석을 찾으려는 듯하다”고 말한다. 어느덧 그 아들이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된 것이다.
 
  새 주인의 호의로 스티븐슨은 6일간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스티븐슨은 한때 사모했던, 그러나 집사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떠나보내야 했던 가정부 켄턴을 찾아간다. 스티븐슨은 1930년대 초 달링턴 경의 친구에게서 물려받은 신사복을 여행 가방에 담고 1930년대에 작성된 여행 안내서를 들고 길을 떠난다. 때는 1956년이었지만 1930년대 여행서를 들고 떠나는 스티븐슨. 20여 년의 세월과 변화를 건너뛸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다. 세월의 변화를 거부하려는 듯이.
 

  스티븐슨은 냉혹하고 충실한 집사로 평생을 살았다. 집사 일에 충실하고자 아버지 집사의 임종을 지키는 일을 포기했고 켄턴에 대한 사랑의 감정도 억누르다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다. 집사의 최고 덕목이 ‘절제’라고 믿었다.
 
  그러나 여행이 중반에 이르렀을 때 스티븐슨은 자신의 집사로서의 삶이 잘못된 삶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두 명의 유대인 하녀를 해고했을 때, 켄턴이 부당함을 호소해도 스티븐슨은 주인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복종했던 때가 떠올랐다. 켄턴이 청혼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청혼을 수락했음을 고백해도 스티븐슨은 속마음을 숨긴 채 사무적으로 축하를 건넸던 기억이 떠오른다.
 
  스티븐슨은 어둑한 복도를 지나다 켄턴이 북받치는 울음을 삼키고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히지만 그녀의 방문 앞을 지나치고 말았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장편소설 《남아 있는 나날》(2009, 국내출간)
  〈기억의 파편 혹은 그 오랜 세월 무연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 한순간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옛 모습이 하나 있다. 뒤편 복도, 켄턴 양의 집무실, 닫힌 문 앞에 홀로 서 있는 내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 나는 그녀의 집무실 문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문 쪽으로 몸을 반쯤 튼 채, 노크를 할까 말까 망설이며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그때 나는, 켄턴 양이 바로 저 문 뒤에서, 내게서 불과 몇 미터 거리에서 엉엉 울고 있으리라 확신한 나머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좀 전에도 말했듯, 그 순간이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을 뿐 아니라 그렇게 서 있는 동안 내 마음에 일었던 독특한 감정의 기억까지 함께 각인되었다. (중략)
 
  켄턴 양의 집무실이 가까워지자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고 그녀가 아직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야 확실하게 기억나는데, 내 기억에 그렇게 끈질기게 남아 있었던 장면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쟁반을 받쳐 든 채 어두컴컴한 복도에 잠시 멈춰 섰는데, 저 문 안쪽 바로 몇 미터 앞에서 켄턴 양이 울고 있을 것 같은 확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실제로 울음소리 같은 것은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 같은 확신을 설명해줄 증거는 사실 전무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보면 눈물 젖은 그녀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확신했던 것 같다. 내가 얼마 동안이나 거기에 그렇게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 중에서)

 
  드디어 여행의 종착지에서 자신처럼 늙어버린 켄턴, 이제는 ‘벤 부인’으로 변한 늙은 그녀와 만난다. 벤 부인은 스티븐슨에게 그때 하지 못했던 고백을 한다. 옛날 달링턴 홀을 떠난 것이 “당신을 약 올리기 위한 책략쯤으로만 생각했”고 “인생에서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이제 와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방법은 없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지금 남편 곁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자 스티븐슨도 처음으로 내면을 드러낸다. 그때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고.
 
  〈그때 내가 곧바로 무슨 대꾸를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켄턴 양의 말을 제대로 소화하는 데 1~2분 정도 걸렸으니까. 게다가 그녀의 말에는, 여러분도 짐작하겠지만 내 마음에 적지 않은 슬픔을 불러일으킬 만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 뭘 숨기겠는가? 실제로 그 순간,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남아 있는 나날》 중에서)
 
  스티븐슨은 6일간의 여행을 통해 집사로서 자신의 절제와 복종이 틀렸음을, 평생 복종했던 달링턴 경이 나치의 추종자에 불과하고, 자신 역시 그 추종자와 같은 공범임을 인정한다.
 
  이 소설의 제목은 ‘남아 있는 나날’이다. 늙은 집사 스티븐슨에게 ‘남아 있는 나날’은 어떤 날들일까. 분명 맹목적 복종과 절제와는 다른 길일 것이다. 스스로 삶을 선택하며, 그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 것이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반문한다. ‘당신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무엇이냐’고.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합니다’
 
한동일의 《라틴어 인생문장》(2023)
  국내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교황청 대법원 로타 로마나(Rota Romana) 변호사인 한동일이 펴낸 《라틴어 인생문장》(2023)을 읽는다. 그는 서강대에서 라틴어 수업을 맡아 진행했고 연세대 법무대학원에서 ‘유럽법의 기원’과 ‘로마법 수업’을 강의했다. 서강대에서 진행한 라틴어 수업은 타교생 및 외부인까지 청강하러 찾아오는 최고의 명강의로 평가받았다.
 
  책을 쓰며 방황하던 10대 소년 한동일, 진리를 목마르게 찾아 헤매던 20대와 30대 청년 한동일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 시절, 소년과 청년이 불안과 열망으로 들끓던 시절, 마음을 어루만져주었고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북극성이 되어주던 라틴어 문장을 책에 담았다.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Sic habeas somnium, ut vivas in sempiternum. Sic enim vivas, ut cras moriaris!)
 
  정확히 똑같은 걸음걸이가 없듯 똑같은 발자국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 발엔 죽음, 한 발엔 삶을 얹고, 때론 휘청거리며 때론 우직하게 힘을 주며 인생을 걸어갑니다.
 
  이것이 ‘산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연히 내던져진 존재인 나는 내 육신에 올라타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때론 아무 감정 없이 그냥 멍하니 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선물처럼 다가온 사랑 때문에 아파하며 그리워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합니다.(Verumtamen oportet me hodie et cras et sequenti die ambulare.)〉(한동일의 《라틴어 인생문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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