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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 물들다 〈12〉 손에 잡히는 것들을 찾고, 발견하라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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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기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아”
⊙ “그런 놈의 법이 어딨단 말인가? 그래, 누가 그렇게 마련을 했는구?” “나라에서 그랬을 테죠.” “나라?” “우리 조선 나라요”
⊙ “나는 네 기저귀가 얼마나 구수하던지 코에 대고 킁킁 맡기까지 했단다”
⊙ “타인의 진실과 삶에 맞서 우리 자신을 다양하게 시험해야 한다”
‘인간이란 참으로 걸작품이 아닌가!’ 2021년 3월 국립극단의 연극 〈햄릿〉의 공연 장면이다.
  
찰스 다윈
〈진화론을 제기한 찰스 다윈은 “모든 생명체는 각자가 하나의 작은 우주다. 이 우주들은 자가 번식하는 유기체들로 이뤄졌다. 이 유기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고 했다. 우주생물학의 창시자인 칼 세이건의 아내이자 동료였던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이런 다윈의 말에서 따와 1970년대에 “모든 생물체는 공생하는 세균들이 연합해 만든 작은 우주”라고 주장했다.〉(이정모의 《공생 멸종 진화》 중에서)
 
  〈인간이란 참으로 걸작품이 아닌가! 이성은 얼마나 고귀하고, 능력은 얼마나 무한하며, 생김새와 움직임은 얼마나 깔끔하고 놀라우며, 행동은 얼마나 천사 같고, 이해력은 얼마나 신 같은가! 이 지상의 아름다움이요 동물들의 귀감이지! 〉(《햄릿》 제2막 제2장 중에서)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통해 인간의 이성을 과시한다. 인간은 나약하고 비겁하며 모순 덩어리지만 그래도 냉철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불의에 항거하며 아름다움 앞에 겸손해질 수 있는 존재다. 죄인이라는 무거운 중세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불완전함을 삶에 반영할 수 있는 르네상스적 인간관을 셰익스피어는 받아들였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포악한 미덕과 착한 악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존재! 인간은 그런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성장할 수 있다. 성장이 멈춘 인간은 퇴보할 수밖에 없다. 짐승으로, 원죄의 모습으로 회귀할 뿐이다.
 

  인류학자들은 자연사를 멸종의 역사라고 말한다. 수억 년이나 바다를 지배했던 삼엽충(멸종한 해양 절지동물. 크기는 1~2mm에서 72cm까지 다양하며 대개는 3~10cm 정도였다)도 사라졌고, 커다란 몸집과 신비로운 몸 설계로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인간이 다른 인간, 주변의 이웃과 공생(共生)하는 방법은 하나다. “같이 살자”이다. 외계에서 새로운 지구를 찾기보다, 인간의 수정란 천 개를 가지고 인류가 살 수 있는 새로운 행성을 찾기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 환경과 어울려 살 궁리를 하는 게 인류의 멸종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이 저마다 우주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간수님, 마누라 얼굴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1925)에서 닉은 서부(웨스트 에그)로 이사 가 개츠비를 만난다. 개츠비는 돈 앞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심가다. 그러나 누구도 개츠비의 과거를 아는 이가 없다.
 
  개츠비는 자신의 7촌인 데이지를 사랑한다. 돈을 벌어 성공해 데이지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데이지가 점점 개츠비와 가까워지자 데이지의 남편 톰이 개츠비의 과거를 폭로한다. 주류 밀매로 악마처럼 치부(致富)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데이지는 개츠비와 멀어진다.
 
  그리고 톰의 교묘한 사주로 개츠비는 억울한 죽임을 당한다. 개츠비의 장례식날, 톰과 데이지는 여행을 떠난다. 누구도 장례식에 가지 않는다. 닉만이 장례식에 참석한다.
 
  닉이 개츠비와의 우정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에게 받은 교훈 때문이었다.
 
  〈내가 더 어리고 약점 많던 시절에 아버지가 내게 조언을 해주셨는데 나는 이후 내내 그걸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해왔다. 아버지는 “누구든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네가 가진 만큼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만 명심하라”고 내게 말씀하셨다.〉(《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처음부터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은 없다. 배우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했거나, 때로 강요에 의해, 혹은 충동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의 쏠림으로 잘못된 행동을 했을 수는 있다. 누구나! 인간은 소심하고 언제든 이성보다 감성에 지배당할 수 있는 존재니까.
 
‘간수님, 마누라와는 41년도에 헤어졌는데,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솔제니첸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1962) 영문판 커버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1962)에는 스탈린 치하의 혹독한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살아가는 나약한 군상(群像)이 등장한다. 주인공 슈호프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하며 가혹한 운명에 지배당한 인물이다.
 
  먹는 것, 작업 배당, 잔머리를 굴리며 편하게 지내보려는 몇몇 인물의 생활태도도 비극적 생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잔꾀, 뇌물, 눈가림, 속임수 등 저열함에 연민이 느껴진다. 오히려 억울한 약자들을 통해 무자비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아이러니와 모순이 드러날 뿐이다.
 
  〈“간수님, 마누라와는 41년도에 헤어졌는데,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고 슈호프가 대답한다.
 
  “어쨌든, 너희들이 마루를 닦는 꼴이란 항상 이 모양이야. 마루 하나 제대로 못 닦는 이런 등신들한테는 정말, 빵이 아깝다니까! 너희 같은 놈들은 쓰레기나 처먹어야 돼.”
 
  “도대체 어떻게 닦기에 날마다 닦는데도 이렇게 더러운 거야. 내 말 듣고 있어? 물을 너무 칠하지 말고, 깨끗하게 닦고, 얼른 꺼져버리란 말이야.”(중략)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 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체자리 마르코비치·전직 영화감독-편집자)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중에서)

 
  스탈린의 허상을 벗겨내기 위해 총칼을 들고 무장봉기를 할 필요가 없다. 정치적인 지배 권력에 대한 죄상을 예리하게 폭로하는 피지배층의 각성조차 때로 무의미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나약한 인간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주면 충분하다. 공포시대, 강제수용소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죄수의 모습이면 된다.
 
 
  인간은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아
 

  채만식의 소설 《논 이야기》(1946)는 비극적인 한 인물의 속물적 근성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한 생원은 한때 부지런한 농부였다. 푼푼이 모은 돈으로 열세 마지기와 일곱 마지기의 논을 샀다. 그러나 동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땅을 빼앗기고 겨우 일곱 마지기만 지킬 수 있었다.
 
  수다한 권솔에 현상 유지가 어려웠다. 허황하고 헤픈 값을 하느라고 술과 노름을 좋아했다. 빚을 이리 틀어막고 저리 틀어막고, 오늘로 미루고 내일로 미루던 끝에 일곱 마지기 논조차 일본인에게 팔아버린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8·15 광복을 맞았지만 한 생원은 별로 기쁘지 않다.
 
  〈독립? 신통할 것이 없었다.
 
  독립이 되기로서니 가난뱅이 농투산이(농투성이-편집자)가 별안간 나으리 주사될 리 만무하였다. 가난뱅이 농투산이가 남의 세토(소작을 뜻함) 물고 나머지로 굶으며 먹으며 연명이나 하여 가기는 독립이 되거나 말거나 매양 일반일 터이었다.(중략)
 
  일본이 항복을 하던 바로 전의 3~4년이 공출이야 징용이야 하여서 별안간 군색함과 불안이 생겼던 것이지 그 밖에는 나라가 망하여 없어지고서 일본의 속국 백성으로 사는 것이, 경술년 이전 나라가 있어가지고 조선 백성으로 살 적보다 별양 못 할 것이 한 생원에게는 없었다.〉(《논 이야기》 중에서)

 
  그러나 한 생원은 일제가 떠나간 뒤 자신의 농토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오산임을 깨닫는다. 광복 후의 혼란한 틈을 타 일본인의 재산을 부당 처분하여 이미 다른 자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그런 놈의 법이 어딨단 말인가? 그래, 누가 그렇게 마련을 했는구?”
 
  “나라에서 그랬을 테죠.”
 
  “나라?”
 
  “우리 조선 나라요.”
 
  “나라가 다 무어 말라비틀어진 거야? 나라 명색이 내게 무얼 해준 게 있길래, 이번엔 일인이 내놓구 가는 내 땅을 저이가 팔아먹으려구 들어? 그게 나라야?”〉(《논 이야기》 중에서)

 

  소설을 읽는 독자가 한 생원의 비극에 주목하는 이유는 솔제니친이 슈호프에 주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무자비한 현실, 비극적 생으로 몰아가는 가혹한 현실에 대한 직시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첫 번째 인식(認識)이다.
 
  나라를 되찾은 후에도 달라지지 않은 한 생원의 고약한 불행. 권리라고는 가져본 적이 없는 수용소의 약삭빠른 죄수들…. 절망적인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통해 죄 없이 고통당하는 약자에 대한 숭고한 애정을 갖게 된다.
 
  인간은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비극적이지도 위대하지도 않다. 위대한 인간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칠 수도, 비극적인 인물이 역경을 딛고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게 우리 삶이다. 그래서 잘 늙어야 한다.
 
 
  일곱 가지 병과 함께 살아가는 나는
 
이근후 교수의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2013, 2023)
  80대 후반인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쓴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2013, 개정판 2023)를 펴 본다. 이 교수는 지금 일곱 가지 병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왼쪽 눈의 실명, 당뇨, 고혈압, 관상동맥 협착, 담석, 통풍, 허리 디스크를 앓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열심히 살아온 증거이기도 하다.
 
  노화로 생긴 허리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장기간 복용한 약이 당뇨와 고혈압을 유발시켰다. 왼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된 것은 2003년 떠난 네팔 의료봉사가 계기다. 왼쪽 눈 시력이 부쩍 떨어지고 답답해 고산병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귀국 후 병원을 찾았더니 눈 혈관에 이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검사 도중 심장에 더 큰 문제가 발견되었다. 당장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왼쪽 눈의 시력은 잃고 말았다. 하지만 눈 때문에 더 큰 병을 발견하고 목숨을 구했으니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것쯤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억울하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더 돌려 시야를 확보하면 될 일이었다.
 
  〈죽을 때까지 아프지 않고 살면 좋겠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기에 열심히 산 결과로 생기는 병은 어쩌겠는가! 나이 들어 몸에 찾아드는 신체적 고통은 좀 고약한 친구라고 생각해야 한다. 병에 걸렸더라도 내 몸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면 된다.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명의보다 낫다. 병에 대한 고정관념도 바꾸자. 병은 훈장도 아니요,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증거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같이 가야 할 삶의 조건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아파도 하루하루 긍정적인 자세로 생활한다면,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면에서 가족을 덜 고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영화배우 이대근씨가 아파 누운 늙은 어머니의 소변을 받아내다가 냄새가 역해 얼굴을 찡그렸단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네 기저귀가 얼마나 구수하던지 코에 대고 킁킁 맡기까지 했단다.” 그제야 이대근씨는 자신이 그동안 겉으로만 효도를 운운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어머니가 껄껄 웃었다는 대목에 주목했다. 아들 앞에서 살을 보이는 일이 민망했을 텐데도 아랑곳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노모, 그 어머니의 당당한 자세에서 병을 받아들이는 씩씩하고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나이 들어 아프고 병을 앓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일곱 가지 병과 함께 살아가는 나는 삶이 다할 때까지 즐겁게 살고 싶다. 아내와 아이들, 손자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내 친구들과 더불어 말이다.〉(《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중에서)
 
  〈매일 밥을 먹는다. 그리고 매일 사람들을 만난다. 입맛이 있든 없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만날 사람들을 만나는 것.(중략) 그런데 문득 돌아보니 그토록 평범한 일상이 여간 비범한 게 아니었다. 인생의 쓴맛 단맛이 그 속에 늘 다 있었다.〉(함영의 《곰탕에 꽃 한 송이》 중에서)
 
  〈좋은 기억이란 무엇인가. 기쁜 일이나 행운, 성공, 잘된 일을 말하는 걸까? 아니다. 좋은 기억은 내가 순간순간 만나는 어떤 상황에서 좋은 쪽, 긍정적인 쪽으로 선택하려는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중에서)

 
 
  아무리 초라해 보일지라도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으로 날아간 작가》(한국판 2017)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해답은 없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기자는 20세기 SF 문학의 입지를 주류 문학의 위상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그의 문장에 늘 열광했다. 브래드버리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시대와 문화에는 보물만큼이나 쓰레기도 엄청나게 많다. 때로는 둘을 가려내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길 두려워하며 머뭇거린다.
 
  그러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기질을 확인하고, 다양한 관점의 진실을 모으고, 만화책과 텔레비전 쇼, 책, 잡지, 신문, 연극, 영화에 드러난 타인의 진실과 삶에 맞서 우리 자신을 다양하게 시험해야 한다고 브래드버리는 말한다.
 
  〈어떤 시기에 마주하는 모든 것에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일단, 그건 불가능하다. 나는 열 살 때, 쥘 베른은 받아들였지만 헉슬리는 거부했다. 열여덟 살 때, 울프는 받아들이고 벅 로저스는 넘겨버렸다. 서른 살 때, 허먼 멜빌을 발견했고 울프를 잃었다.
 
  그래도 한결같은 점이 있었다. 손에 잡히는 것들을 찾고, 발견하고, 감탄하고, 사랑하고, 솔직하게 대하는 것이다. 뒤돌아봤을 때 어느 날 그것이 아무리 초라해 보일지라도 말이다.(중략)
 
  자신을 남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그럼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주는 내면을 외면하지 말자.〉(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으로 날아간 작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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