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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역사 ⑥ 문자, 문해력 그리고 문명

‘우리말’ 집착하는 원리주의가 문해력 저하 가져와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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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틀랜드·네덜란드·영국·스웨덴·독일 등 종교개혁 한 나라들이 문맹률 낮아
⊙ ‘종교개혁 → 문해력 상승 → 경제발전’
⊙ “인쇄는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은총의 선물이다”(마르틴 루터)
⊙ 《성경》을 인쇄한 기독교 세계, 《코란》 인쇄를 거부한 이슬람 세계
⊙ 일본, 19세기 중반 서민층 남성의 식자율도 54%에 달해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는 종교개혁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우리는 문명에 관한 모든 사고(思考)를 스코틀랜드에서 찾는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가 한 말이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Scottish Enlightenment)에 대한 찬사였다. 그럴 만했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는 18세기 중엽 무렵 유럽 지성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선 데이비드 흄(David Hume·1711~1776년)과 애덤 스미스(Adam Smith·1723~1790년)를 비롯해 계몽주의 학자들이 줄을 이어 배출되고 있었다.
 
 
  변두리 스코틀랜드의 知的 성과
 
  스코틀랜드의 지역적·정치적 조건으로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우선 독립된 나라가 아니었다. 그레이트브리튼섬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국의 일부였다. 스코틀랜드도 본래는 독립 왕국이었지만 1707년 잉글랜드 왕국에 통합되어 영국의 일원이 됐다. 대등한 통합이라고 하지만 통합 이후 영국 역사는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덩치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잉글랜드의 인구가 훨씬 많았다. 스코틀랜드는 변방이었다. 영국 차원에서도 그랬지만 전체 유럽 차원에선 더더욱 그랬다.
 
  이 같은 변두리의 스코틀랜드가 유럽 지성계(知性界) 전체에 영향을 발하는 지적(知的) 성과를 보여준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교육의 힘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인구는 잉글랜드보다 훨씬 적었지만 대학은 더 많았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대학이 2개밖에 없었지만 스코틀랜드에는 5개의 대학이 있었다. 교육열도 대단했다. 귀족과 지주 등 상류층은 자제들을 필수적으로 대학을 다니게 했으며 수학, 경제학, 과학 등의 교육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스코틀랜드의 이 같은 교육열은 당시만의 분위기가 아니라 상당 기간의 연원이 있었다. 1633년 스코틀랜드는 세계 최초로 ‘지방교육세’를 만들었다. 1646년에는 이것을 더욱 강화했다. 대학 교육 이전에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보편적 교육’도 강력히 진행한 것이다. 덕분에 스코틀랜드는 문해력(文解力)이 폭발적으로 높아졌다. 1750년경 유럽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지역은 스코틀랜드였다. 문자해득률(文字解得率)이 75%에 달했다. 볼테르가 감탄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융성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있었다.
 
 
  종교개혁 한 나라가 문맹률 낮아
 
루터의 ‘95개조의 반박문’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됐다.
  그런데 이 같은 양상을 보인 나라는 스코틀랜드만이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에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같은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750년경 네덜란드·영국·스웨덴·독일은 여타 유럽 국가에 비해 문해력이 현저히 높았다. 이들 나라들은 대도시가 있었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수준을 능가했다. 이 나라들에서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출판업자들은 신속하게 책과 소책자를 만들어냈다.
 
  왜 하필 이 시기 그 나라들에서 읽고 쓰는 문자 능력의 비약적 도약이 이루어졌을까? 모두 동일하게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문자의 쉽고 어려운 탓이 아니다. 산업혁명에 의한 경제성장의 결과일까? 아니다. 문자 능력의 상승은 그 이전부터다. 그 배경에는 종교개혁이 있었다. 스코틀랜드·네덜란드·영국·스웨덴·독일 등 다른 유럽 국가보다 문해력이 현저히 높았던 나라들의 공통점은 모두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나라라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은 1517년 비텐베르크라는 독일의 작은 자치도시에서 시작됐다.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의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대해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써 붙이면서였다. 이 사건으로 루터는 파문되었지만 그의 반박문은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렇게 시작된 종교개혁의 파도는 독일 땅을 넘어 네덜란드·영국에 뿌리를 내리고 스코틀랜드로도 전파되었다. 이 종교개혁의 흐름이 문자 교육을 강화시키게 했다.
 
  스코틀랜드는 1560년 종교개혁을 시작하면서 상류층만이 아니라 중류층 이하 가난한 하층민들도 대상으로 하여 무상(無償) 대중교육을 추진했다. 덕분에 문자 능력은 대중적으로도 크게 확산되고 높아졌다. 여타 개신교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적 원칙과 관련이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신(神)과 나’라는 일대일의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개인 자신이 신과의 직접적인 신앙의 관계를 고양시켜야 하는 게 중요한 원칙이었다. 이를 위해선 사제(司祭)가 성경을 읽어주는 데 의존하는 게 아니라 성경을 혼자 힘으로 읽고 해석할 수 있어야 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고 하는 이 원리는 누구나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이를 보급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당시 독일어 사용 인구 중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들은 1%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상태로는 ‘오직 성경’의 원칙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 루터는 문해력과 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루터는 작센공국을 시작으로 독일 전역의 통치자들에게 학교 교육 추진을 촉구했다. 1524년 그는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고 유지하기 위해 독일 모든 도시의 시의원들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소책자를 썼다. 프로테스탄티즘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대공과 제후들은 작센을 본보기로 도처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강화했다. 그 결과 16~17세기 무렵 개신교 지역 독일어권은 전 유럽에서도 문해율이 가장 높게 되었다.
 
  1740년 프리드리히 대왕은 “모든 개인이 자기 나름대로 구원을 찾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사실상 종교의 자유를 선언한 것이다. 이제 프로이센 사람들은 정치지도자의 지시와 상관없이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개신교도만으로 이루어진 지방은 가톨릭교도로 이루어진 지방보다 문해율이 거의 20%나 높았다.
 
  독일이 산업혁명을 이루어내던 막바지 무렵인 1871년 프로이센 인구 조사도 그랬지만 산업화 전인 1816년 무렵도 마찬가지였다. 문해력 상승은 산업화와 경제성장 결과가 아니라 반대로 그에 힘을 더해준 동력의 하나였다. ‘종교개혁 → 문해력 상승 → 경제발전’이었다.
 
 
  공교육의 탄생
 
  영국과 네덜란드는 독일처럼 정부에 의한 공적 교육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글을 배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여타의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1900년 무렵 영국·스웨덴·네덜란드에서 성인 문해율은 100%에 육박했다. 반면 스페인·이탈리아 같은 가톨릭 국가에서는 그 비율이 50%에 불과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교육 원리는 결국 가톨릭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 지역들도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문자 교육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종교개혁은 공교육을 자리 잡게 하는 성과도 낳았다. 루터가 지방 제후와 대공(大公)들은 학교 설립을 의무로 삼아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독일에서는 정규 학교 교육이 세속 통치자와 정부의 신성한 책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렇게 종교적으로 고무된 공립학교 설립운동 덕분에 프로이센은 국가의 예산으로 지원하는 공교육의 본보기가 되었다. 후에 많은 나라가 그 본보기를 따랐다.
 
  한편 프로테스탄트적 교육 원칙은 여성 문해력의 확대도 가져왔다. 성경을 직접 읽어내야 하는 원칙에는 남녀의 차이가 있을 수 없었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도 어머니가 될 여성의 교육은 중요했다. 16세기 브란덴부르크에서 남학교의 수는 55개에서 100개로 두 배가량 증가했다. 그런데 같은 기간 여학교는 4개에서 45개로 10배 넘게 증가했다. 1816년에는 어떤 지방이나 도시든 개신교인의 비율이 높을수록 남학생 대비 여학생 비율도 높았다.
 
  이 같은 양상은 독일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개신교 국가들을 필두로 하여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리되어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여성 권리 신장의 토대도 강화돼갔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여성에 대한 보편적 교육과 여성의 권리도 거슬러 올라가면 이처럼 종교적으로 시작되었다.
 
 
  면죄부도, 《성경》도 인쇄한 구텐베르크
 
구텐베르크
  그런데 이 같은 발전사에서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구텐베르크(Gutenberg·1398?~1468년)의 인쇄술이다. 1448년 독일 마인츠에 인쇄소를 개업한 구텐베르크가 새로운 인쇄법으로 처음 인쇄한 것은 라틴어 〈문법학〉이었다. 얼마 후 마인츠의 수도원장이 그에게 면죄부 2000장 인쇄를 주문했다.
 
  면죄부는 고급스러워야 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발행돼야 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그에 부합했다. 주문이 계속 들어왔다. 구텐베르크는 면죄부 인쇄로 꽤 돈을 벌었다. 이어 구텐베르크는 1452년 성경 출판에 착수하여 1455년 《구텐베르크 성서》라고 불리는 최초의 라틴어(불가타) 성서를 찍어냈다.
 
  구텐베르크의 새로운 인쇄술은 단기간에 전 유럽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1470년에는 인쇄기를 가동한 지역이 17개에 지나지 않았지만 1490년에 이르면 그 수는 204개로 늘어난다. 1500년에는 252개 지역에서 인쇄를 할 수 있었다. 이 중 62개 지역이 독일어권에 있었다.
 
  면죄부를 찍어내고 가톨릭의 라틴어 성서를 인쇄했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세기 뒤에는 루터의 종교개혁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1517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곧바로 독일 전역으로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인쇄 배포 덕분이었다. 루터는 얼마 뒤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보급했다. 이 보급에도 인쇄술이 날개를 달아줬다.
 
  “인쇄는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은총(恩寵)의 선물이다.”
 
  마르틴 루터의 말이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인쇄술이 없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처럼 급속히 전파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을 계기로 진행된 교육의 확산과 문해율 상승도 어려웠을 것이다. 교육을 확대하고 지식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선 책을 대량으로 인쇄해 공급하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계몽주의의 성장과 확산도 당연히 인쇄술에 힘입은 것이었다.
 
  14세기 잉글랜드의 위클리프도 루터와 거의 비슷하게 면죄부를 비판했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스스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1382년 영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그러나 당시는 종교개혁이 촉발되지 않았으며 위클리프의 영어 성경도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아직 시대가 무르익지 않았으며 다른 여러 요인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영어 성경이 널리 보급되지 못했던 큰 이유는 대량 공급을 위한 인쇄술이 없었던 때문임은 분명하다.
 
 
  이슬람 세계, 인쇄술 거부
 
  인쇄술은 이처럼 유럽의 근대적 발전에 크나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인쇄술은 이슬람 세계에서는 전혀 역할을 하지 못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등장하던 당시 이슬람 세계는 결코 문명적으로 낮은 수준이 아니었으며 그 이전에 이미 고도의 성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인쇄술은 이후 400여 년 동안 이슬람 문화권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슬람 세계가 인쇄술의 존재를 몰라서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슬람 세계는 일찍이 중국으로부터 제지술·나침반·화약과 함께 인쇄술도 받아들여 유럽에 전한 바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도 알고 있었다.
 
  리콘퀘스타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고 스페인 왕국을 수립한 이사벨라 여왕이 1492년 유대인 추방 칙령을 내렸다. 당시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쳐온 유대인들은 인쇄술 지식이 있었다. 1493년 콘스탄티노플에 온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책을 인쇄했다. 1530년 독일·이탈리아의 유대인 출판 가문이 이스탄불에 인쇄소를 세웠고 나중에 카이로로 옮겼다.
 
  그러나 무슬림 학자들은 인쇄술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729년에 이스탄불에 다시 인쇄소가 들어섰으나 겨우 10여 종의 책을 인쇄하고 1742년 문을 닫았다. 격렬한 종교적 반발에 부딪힌 때문이었다.
 
 
  《코란》 인쇄를 거부한 이슬람 세계
 
‘신의 말씀’인 《코란》의 필사를 고집하다가 이슬람 세계는 인쇄 분야에서 낙후되었다.
  이슬람은 왜 인쇄술을 거부했을까? 종교지도자들이 막았다. 사람들이 직접 지식을 취득하게 놔두면 이슬람 사회의 지도자나 학자 계층에 속한 이맘(Imam)의 위상이 흔들리게 되고, 이단(異端) 발생의 위험이 커진다는 우려도 있었다. 더욱이 《코란》은 감히 인쇄 따위로 찍어내서는 안 되는 신성한 것이었다. 《코란》의 전승은 필사(筆寫)로 해야 했다.
 
  이슬람권에선 ‘쓴다’라는 행위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었다. 《코란》을 필사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고귀한 행위였다. 중국 문화의 서예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한 분야였다. 이 신성한 작업을 인쇄 기계에 맡긴다는 것은 이슬람인들에게는 타락이자 신의 가르침에 대한 모독이었다. 《코란》을 전하는 것은 오직 필사만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인쇄를 본격화하게 되면 필사를 직업으로 하는 이들이 일을 잃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슬람 문명은 결코 후진적이지 않았다. 이슬람 세계는 그리스 고전도 본존하고 있었다. 그 고전이 11~13세기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유럽으로 전해져 유럽의 지적 수준 고양에 큰 역할을 했다고도 한다. 종교 외의 다른 학문적 전통도 상당했다. 13세기 무렵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였다. 유럽은 르네상스를 계기로 이슬람 세계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이슬람 세계는 유럽의 근대가 진행되는 동안 크게 뒤처지고 말았다. 많은 요인이 있었겠지만 이슬람 세계가 인쇄술 도입을 거부한 결과 지식 보급이 저해되게 된 게 큰 원인의 하나였다.
 
  문명은 문자를 빼고 말할 수는 없다. 선사시대와 역사사대 구분의 기준 자체가 문자다. 문자로 기록을 남기게 된 시대부터를 역사시대라 한다. 그리고 문자를 사용하고 기록을 남긴 것을 기준으로 문명이라 칭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 같은 문자 체계의 시작은 5000년 이상 전인 최초의 고대문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메르 문명을 비롯한 모든 고대 문명은 문자를 갖고 있었다. 이후 역사에 자취를 남긴 성공적인 여러 문명 모두 마찬가지다.
 

  문자의 사용 수준은 문명의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하나의 문명의 영역은 단지 동일한 구어(口語)의 사용 범위가 아니다. 문자는 직접적 대면 접촉으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넘어서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문자는 익명적(匿名的) 차원에서도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문명의 영역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문명의 활성화 정도는 공통의 문자를 얼마나 활발하게 사용하느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 만큼 문자 체계의 존재와 그것의 ‘쉽고 어려움’은 중요하다. 문자 체계가 쉬울수록 배우기 용이하고 활용도 활발히 할 수 있음은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문자 체계가 쉽다고 하여 읽고 쓰는 능력이 높아지고 확산되는 것은 아니다.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78%(혹자에 따라선 90%)에 달했다. 일제(日帝) 치하에서 우리말과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지만 한글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이다. 그런데 그렇게 문맹률이 높았다. 일본은 한자와 가나를 함께 쓰고 있지만 문맹률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대만은 여전히 한자(漢字) 번체자를 사용함에도 문맹률은 2%가 조금 넘을 뿐이지만 중국은 간체자를 쓰면서도 공식적으로도 문맹률이 20% 선이다.
 
 
  부르주아지의 탄생
 
  서양도 마찬가지다. 알파벳은 결코 배우기 힘든 문자가 아니다. 하지만 근대 이전까지는 서양도 대부분 문맹이었다. 미국 컬럼비아대 윌리엄 해리스 교수에 따르면 근대 이전 문맹률이 가장 낮았던 시기와 장소는 그리스 고전문학이 꽃피우던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다. 그러나 당시 아테네도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10~15%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은 고대 로마와 중세 유럽 내내 큰 변화가 없었으며 문맹률은 오히려 더 높아지기까지 했다. 중세 유럽의 문자 생활은 거의 성직자 계급의 전유물이었다. 귀족과 기사 계급은 문자를 모르는 것을 전혀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농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예외적이라면 상인 계층 정도였다. 상인은 근대 자본주의 이전에도 농민과 달리 계산 능력과 장부 작성 능력이 중요했다. 부르크(brug, bourg, 城) 내에 거주하며 때로 원격지 거래도 담당했던 이들 계층이 나중에 근대 부르주아지(bourgeoisie)로 성장했다. 부르주아지 계층은 프로테스탄티즘과 결합하면서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설명한 대로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책은 사고파는 게 아니다”
 
에도 시대에는 서민들도 문해력이 높아 가와라반(瓦版)을 통해 각종 뉴스를 접했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 있었다. 일본의 막부 시대 도시에 거주한 ‘상인 수공업자 계층’인 조닌(町人)들은 문자 능력이 필수였다. 이들은 당시 일본의 상업 활동을 이끌면서 다른 한편으로 도서 출판의 문화도 크게 융성케 했다.
 
  18세기 에도(지금의 도쿄)는 인구가 100만이 넘었다. 이런 상황에 성인 남성 인구의 대다수가 독서광이라고 할 만큼 책에 열중했다. 이런 만큼 서점·출판사 수도 대단했다. 19세기 일본에는 ‘e-book’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도서·출판과 관련한 모든 게 다 있었다.
 
  당연히 문자해득률도 높았다. 19세기 중반, 사무라이들은 모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서민층 남성의 식자율(識字率)도 54%에 달했다. 여성도 20%였다. 에도만 놓고 보면 계층과 남녀를 불문하고 식자율이 90% 이상이었다. 에도 시대 일본은 식자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였다. 그 바탕에는 상업의 융성과 문자 능력을 필수로 한 조닌 계층의 역할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1443년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한 세종의 바람이나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한 사대부(士大夫)들의 우려와 상관없이 조선은 내내 백성 대부분이 문맹이었다. 농업 위주 경제였고 대다수 백성이 농민이었다. 이들에게 문자는 한자든 훈민정음이든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서점도 없었다. 인쇄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고려 시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나라다. 하나 책을 인쇄하고 널리 판매하는 문화는 없었다. 문자도 학문도 책도 과거(科擧) 외에는 필요가 없었다. 과거시험 자격은 양반층으로 제한돼 있었다. 양반 외에 문자를 활발히 사용할 계층이 제대로 형성되지가 않았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했으며 호학(好學)의 군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세종은 서점 설치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책은 사고파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코란》은 인쇄하는 게 아니다”라고 여긴 이슬람 세계의 원리주의와 유사한 느낌이 있다. 인쇄출판 문화는 서양과 이슬람 세계의 운명을 엇갈리게 했다. 조선과 일본의 경우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보인다.
 
 
  문명의 힘은 잡종강세에 있다
 
  물론 현대의 대한민국은 전혀 그런 나라가 아니다. 교육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자교육 약화 탓에 신세대가 문해력에 취약점을 보이는 문제점은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든 공적 차원에서든 약간의 노력만 더하면 극복에 큰 어려움은 없다.
 
  이보다는 언어 문화에서의 순수주의에 대한 집착이 더 문제다. 외래어 추방, 순수 우리말 등등은 오히려 언어 능력을 약화시킨다.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언어 능력은 어휘가 풍요로워질수록 강력해진다. 외래어도 당연히 그런 어휘에 해당한다. 따지고 보면 한자어에 대한 문해력이 취약해진 것도 순수 우리말 집착이라는 원리주의적 태도 탓이 크다.
 
  언어만 그런 게 아니다. 모든 문제가 다 마찬가지다. 문명 자체가 그렇다. 문명의 힘은 순수함에 있는 게 아니다. 잡종강세(雜種强勢)다. 문명은 처음부터 그랬고 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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