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조선 재상 열전 10 | 노사신(盧思愼)전

말년에 임금을 잘못 만난 ‘학자형’ 정승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學才와 吏才, 文才 겸비…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편찬 참여
⊙ 연산군 때 영의정 지내면서 臣權 앞세우는 士林과 王權 강화하려는 연산군 사이에서 어려움 겪어
⊙ “사옥(史獄)이 일어나자, 사신은 홀로 강력히 구원… 선비들이 힘입어 온전히 삶을 얻은 자가 많았다”(실록)
⊙ 명문가의 후예로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사치·거드름 멀리해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노사신이 최항과 더불어 편찬을 총괄한 《경국대전》
  노사신(盧思愼·1427~1498년)은 고려 때부터 명문가로 유명했던 교하 노씨 출신이다. 할아버지 노한(盧閈·1376~1443년)은 태종의 아랫동서로 태종 때인 1408년 한성부윤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처남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처형될 때 이에 연좌되어 파직당하고 14년간 양주별장에서 은거해야 했다. 상왕(上王) 태종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세종 4년(1422년) 노한을 불러 뜻을 전한다.
 
  “경은 본래 의심 나는 일로 인해 죄를 얻었으니 내가 지금 용서하겠다. 서울이든 지방이든 편한 대로 거주하라.”
 
  그 후 세종은 세종 7년에 직첩을 돌려주었다. 벼슬에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고 2년 후에는 파직당할 때의 직책인 한성부윤으로 복직했다. 이후 노한은 순조롭게 승진해 우의정에까지 이르게 된다. 노한의 졸기(卒記) 일부다.
 
  〈한(閈)의 아내 민씨(閔氏)는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이다. 기축년에 민씨가 패(敗)하게 되자 한의 관직을 삭탈(削奪)하고 밖으로 쫓아내어 양주(楊州) 전장(田莊)에 살고 있었는데, 임인년에 태종이 세종에게 일러 말했다.
 
  “한이 비록 민씨와 연루(連累)되었으나, 실상은 죄가 없다.”
 
  이에 서울로 소환(召還)하게 명하였으니, 뒤에 드디어 조정에 돌아오게 되었다. 정미년에 세종이 다시 한성부윤을 제수하고, 조금 있다가 형조판서로 승직되었고, 여러 번 옮겨서 의정부 참찬·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으며, 임자년에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으로 승직되었다. 그때에 중국에서 환관(宦官)을 보내 매와 개를 구함이 거의 해마다로, 그들의 주구(誅求)가 한이 없었는데, 한(閈)이 빈객(賓客)을 잘 대접함으로 인해 매번 접반(接伴)이 되었다. 마침 한의 어머니가 병이 있어서, 한이 접반을 사면하니, 상이 말했다.
 
  “사신(使臣)을 맞아 대접하는 데에 한이 아니면 안 된다.”
 
  드디어 명했다.
 
  “낮에는 사신을 접대하고 밤에는 돌아가 시탕(侍湯)하라.”
 
  갑인년에 찬성으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겸하였고, 을묘년에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이 되었다. 아내 민씨(閔氏)가 궁내에 들어가 사은(謝恩)하니 상이 말했다.
 
  “이것은 나의 은혜가 아니요, 태종(太宗)의 유교(遺敎)이다.”
 
  정사년 가을에 어떤 일로 파면되어 한가하게 있은 지 7년, 이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68세였다.〉

 
 
  “노가의 아이는 참으로 원대한 그릇”
 
노사신의 할아버지 노한이 한강변에 지은 정자 효사정. 현판 글씨는 노사신의 후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썼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아버지 노물재(盧物載·?~1446년)는 심온의 사위로 부인은 소헌왕후 심씨(沈氏)의 동생이다. 딱히 재능은 없었는지 실록은 “척리(戚里)인 이유로 관위가 2품에까지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노사신은 1427년(세종 9년)에 태어났으니 그의 인생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노사신은 배우기를 좋아했고 사치나 거드름을 멀리했다.
 
  어려서 홍응(洪應·1428~1492년)과 더불어 홍응의 외숙인 참찬(參贊) 윤형(尹炯·1388~1453년)에게 배웠는데 사람을 볼 줄 알았던 윤형은 처음 노사신을 보자마자 홍응에게 이렇게 말했다.
 
  “노가(盧家)의 아이는 참으로 원대(遠大)한 그릇이다. 마침내는 그 명성과 지위가 아마도 너와 비등할 것이다.”
 
  실제로 홍응도 훗날 정승에 올랐다. 1453년(단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한 것을 보면 다행히도 당시의 격변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사촌이기도 했던 세조는 노사신을 중용하려고 1462년(세조 8년) 세자 좌문학으로 있던 그를 5자급(資級·품계)이나 뛰어넘어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했다. 특히 같은 해 4월 11일 노사신은 우부승지로 옮기는데 이때 도승지가 홍응이었다.
 
  1463년 세조는 노사신을 도승지에 임명했다. 세조는 그의 학식과 부지런함을 높이 평가했다. 같은 해 8월 28일 세조는 신하들과 정사를 토의한 다음 몇몇 신하에 대한 인물평을 한다. 특히 우부승지 최선복(崔善復·?~?)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신하를 아는 데 임금만 한 이가 없으니, 경(卿) 등의 재주를 내가 이미 알고 있다. 경도 또한 재주가 있어서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지만 그러나 노사신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노사신은 재주가 탁월(卓越)하고 그 지기(志氣)가 남보다 빼어난데, 내가 척속(戚屬)이라는 사정(私情)을 두어서가 아니라 곧 공론(公論)이 그러한 것이니 경도 또한 그리 알라.”
 
 
  세조, 《주역》 주석서 증보 작업 맡겨
 
  홍귀달(洪貴達·1438~1504년)이 지은 그의 비명 중 한 대목이다.
 
  〈자문(諮問)하기 위해 늘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였고 경(經)과 사(史)를 강론함에 있어 공이 분변하여 대답하는 것이 소리의 울림과 같았다. 임금이 늘 밤중에도 권태를 모르고 책을 봄으로 인해 금중(禁中)에서 유숙하는 날이 많았고, 때론 휴가(休暇)로 나갔다가도 곧 부름을 받고 들어와 하루도 집 안에서 쉬는 일이 없었다.〉
 
  도승지를 맡고 있던 노사신에게 세조는 홍문관 직제학을 겸하게 하고서 자신이 주석한 《역학계몽(易學啓蒙)》 주석서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의 증보 작업을 맡긴다. 누구보다 《주역(周易)》에 관한 조예가 깊었던 세조가 이 작업을 노사신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의 학문을 전적으로 신뢰했다는 뜻이다. 이 밖에도 각종 불경(佛經) 작업을 맡기기도 했다.
 

  1465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어 최항(崔恒)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을 총괄했다. 그중에서도 호전(戶典)의 집필은 그가 도맡았다. 노사신은 아주 드물게 학재(學才)와 이재(吏才)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같은 해에 호조판서로서 충청도 가관찰사(假觀察使)를 겸하여 지방 행정의 부정을 낱낱이 조사했고 이듬해 실시된 발영(拔英)·등준(登俊) 양시에 응시하여 각각 1등과 2등으로 합격하는 영예를 얻었다. 관리를 대상으로 한 과거에서 선두를 달렸다는 말이다.
 
  그의 관리로서의 능력은 특히 예종을 거쳐 성종 때에 큰 빛을 발하게 된다.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으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겸했다. 이는 사람을 보는 데 눈 밝지 않고서는 맡을 수 없는 자리다.
 
  1482년(성종 13년) 평안도에 기근(饑饉)이 들었고 다음 해 경기에 또 기근이 들었는데 노사신은 두 곳 모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양 도의 백성들이 그에 힘입어 생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황해도는 지역은 넓으나 인구가 적어 조정에서 백성을 이주시켜 채우려 하였는데 이때도 그가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선발에 타당성을 잃지 않으니 이주된 자에게 원망이 없었다.
 
 
  르네상스적 지식인
 
  그에게는 학재에 문재(文才)까지 있었다. 1476년 12월에는 서거정(徐居正)·이파(李坡)와 함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찬진하고, 1481년에는 서거정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 수찬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강희맹(姜希孟)·서거정·성임(成任)·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을 총괄했으며, 이를 위해 1476년부터 동국문사시문(東國文士詩文)을 수집했다. 한편 1482년에는 이극돈(李克墩)과 함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신증(新增)하고, 이듬해에는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서거정·어세겸(魚世謙) 등과 같이 한글로 번역하는 등의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홍귀달이 지은 비명 중 한 대목이다.
 
  〈공은 독서하길 좋아하여 평소에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는데, 무릇 경서(經書)·사서(史書)·백가서(百家書)와 석전(釋典·불가서)·도질(道帙·도가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널리 통하였고, 성리학(性理學)의 연원(淵源)에 있어서는 그 심오한 뜻에 밝아 당시 넓고 정미(精微)한 이로는 대체로 일인(一人)이었다. 성종(成宗)이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보려는데, 강관(講官)이 구두(句讀)를 제대로 띄지 못하는 경우가 있자 공에게 명하여 구결(口訣)을 붙이게 하였고, 《율려신서(律呂新書)》 《황극경세(皇極經世)》와 같은 책 및 사람이 풀이하기 어려운 책 등을 명하여 모두 나아가 질정(質正)하게 하거나 혹 번역하여 그 뜻을 나타내게 하니, 사람들은 세남비서(世南秘書·우세남)에 견주었다. 그리고 비록 문사(文詞)를 좋아하진 않았으나 굳이 지을 일이 있을 경우 그 수단은 문장가(文章家)가 미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라에 큰 논의가 있을 때에 공은 고사(古事)를 인용하고 금세(今世)를 증거로 하여 붓을 날려 그 편의(便宜)를 주석(注釋)하여서 모두 시행할 만한 것이었으니, 일시의 논자(論者)들이 그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말 그대로 르네상스적인 지식인이자 청렴한 관리였다. 아마도 그가 세종 시대에 중견 관리로 살았다면 얼마나 더 많은 업적을 쌓았을지 모를 정도다.
 
  성종 말기인 성종 18년 9월 28일에 노사신은 우의정에 오른다. 이때 좌의정이 홍응이었다. 그러고 성종 23년(1492년) 5월 19일 노사신은 드디어 좌의정에 오른다. 우의정은 허종(許琮)이었다.
 
 
  托孤之臣
 
  연산군이 즉위했을 때 나이 18세였다. 아직 홀로서기에는 애매한 나이였다. 성종은 당연히 죽음을 앞두고서 세자를 좌의정 노사신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이를 탁고지신(托孤之臣), 즉 고아나 마찬가지인 어린 임금을 부탁받은 신하라고 한다. 우리 역사에는 태조 이성계의 비 강씨가 정도전과 남은에게 세자 방석을 부탁했고, 문종이 김종서에게 단종을 부탁했으며, 선조가 유영경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했다.
 
  이제 노사신은 좌의정으로서 정치의 전면에 나선다. 무결점(無缺點) 노사신의 인생에 오점(汚點)이 생겨나는 기간이기도 하다.
 
  연산군 1년 성종 장례 때 대비들의 청을 받들어 연산군이 불교식 재(齋)를 설치한 것을 두고 공격의 화살이 노사신을 향했다. 1월 2일 성균관 생원들이 글을 올렸다. 그중 일부다.
 
  〈신들이 또 듣기로는 ‘임금의 허물을 조장(助長)하는 것은 그 죄가 작고, 임금의 허물을 자진하여 유발하는 것은 그 죄가 크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노사신이 정승 자리에 있어 선왕의 탁고(托孤)의 명을 받았으니, 전하가 정시(正始)하는 처음을 당하여 이야말로 마땅히 시청(視聽)을 넓혀 임금을 인도하되 도리에 맞게 할 시기인데도, 총애를 굳힐 꾀만 힘써, 안으로는 궁중의 뜻을 맞추고 밖으로는 충성스러운 간언(諫言)의 길을 막고서, 흥망에 관계되지 않는 일로 여깁니다. 사신 이 불교의 화(禍)가 흥망에 관계되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전하를 의롭지 않은 데 빠지게 하였으므로, 이것은 임금의 허물이 싹트기 전에 먼저 인도한 것이니, 임금의 허물을 유발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사신이 불경을 해독하여 거의 세조(世祖)를 그르칠 뻔하였는데, 지금 또 그 술책으로 전하를 농락하려 합니다. 신 등은 엎드려 바라건대, 특히 재(齋)를 베풀라는 명을 거두시고 노사신이 탁고의 명을 저버린 죄를 빈전(殯殿) 앞에 고하고 중형에 처하시어, 일국의 이목을 쾌히 씻어주소서.〉
 
  이런 식의 공격은 노사신이 연산군의 조정에 있는 내내 받아야 했던 것이다. 연산군 1년 3월 20일 노사신은 영의정이 되고 좌의정에는 신승선(愼承善·1436~1502년), 우의정에는 정괄(鄭佸·1435~1495년)을 제배했다. 신승선은 세종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사위로 아들 신수근(愼守勤), 신수겸(愼守謙), 신수영(愼守英)을 두었는데 딸은 연산군과 혼인했다. 정괄은 정창손의 아들이다.
 
 
  ‘이사·이임보를 합친 큰 간신’
 
  당시 연산군은 아버지의 정치 방식을 뜯어고치려 했다. 무엇보다 홍문관을 비롯한 언관(言官)들의 권한을 제어하려 했다. 이에 대간(臺諫)은 결사적으로 맞섰다. 노사신은 유감스럽게도 이 사이에 끼이게 됐다. 조금만 임금 편을 들면 젊은 사대부들로부터 권력에 아첨한다는 맹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연산군 1년 7월 11일 홍문관에서 올린 소(疏)의 일부다.
 
  〈진(秦)나라 임금 이세(二世)에 독단할 것을 권하여 권세가 신하에게 있지 않게 한 것은 이사(李斯)가 나라를 망친 말이요, 대간에게 장마(仗馬)로서 위협하여 감히 말을 못 하게 한 것은 이임보(李林甫)가 당(唐)나라를 어지럽힌 술책인데, 이제 노사신이 이사·이임보를 합친 한 사람이 되었으니, 성명하신 전하께서 처음으로 즉위하셨는데, 이와 같은 큰 간신(奸臣)이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뜻밖이고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역사를 끌어들인 인신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서 연산군과 면대할 것을 청하니 19세 연산군이 대간과 홍문관을 향해 말한다.
 
  “만약 반란을 꾀하는 대역(大逆) 사건이 있다면 면대를 청함직하지만, 대신(大臣)이 언어(言語)의 조그마한 실수가 있었다 해서 면대까지 청한다는 것은 불가(不可)하며, 만약 이로 인해 국문(鞫問)한다면 권력이 대각(臺閣)으로 돌아가고, 대신은 수족을 놀리지 못할 것이니, 나는 이것이 바로 나라를 그르칠 조짐이라 여긴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미 세조 때를 지나 성종 때 들어서면서 신권(臣權) 이론으로서의 주자학은 무서운 속도로 신하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성종은 이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서 심지어 홍문관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신권 강화 기관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반면에 연산군이 주자학의 위험성을 어느 정도까지 감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은 세조를 모델로 삼아 강한 왕권을 추구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그럴수록 홍문관과 대간의 노사신을 향한 공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아예 노사신을 나라를 망칠 신하라고 부르면서 당장 내칠 것을 요구하고 급기야 국문을 할 것을 청했다.
 
  이때 노사신과 더불어 홍문관과 대간의 표적이 된 인물은 윤탕로(尹湯老)이다. 사실 노사신은 윤탕로를 두둔하다가 이런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윤탕로는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오빠로 행실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 또한 연산군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7월 18일 대간 등이 글을 올리자 이렇게 말한다.
 
 
  臺諫의 거듭되는 도전
 
  “때로는 특은(特恩)을 쓸 수도 있다. 윤탕로의 마음을 살펴보면 정말 더럽거니와, 형적이 뚜렷하지 않고 또 국가에 관계되는 것도 아니며, 이미 사면(赦免)를 거쳤으므로 나는 듣지 않은 것이다. 대간이 사무를 폐하고 여러 달을 논쟁하며 고집만 부리므로 사신(思愼)은 이것을 큰 과오로 여기어 이와 같이 말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나라를 망칠 말이며, 또 어찌 나에게 아첨한 것이겠느냐. 탕로의 일은 경들이 말을 하기 때문에 이미 파직을 시켰는데, 이제 만약 다시 국문한다면 사면을 내린 의의가 어디 있겠느냐.”
 
  같은 날 홍문관에서는 비수(匕首)와도 같은 글을 올린다. 아버지 성종을 끌어들인 것이다. 신하들 천하였던 성종 시대 말이다.
 
  〈신들이 성종의 어서(御書)를 보니, 이르기를 ‘대간의 소임을 내가 어찌 가벼이 여기겠느냐. 임금의 이목이 되어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임금의 과실을 논하고 재상의 시비를 공박하므로, 이른바 말이 임금에 미치면 천자도 얼굴빛을 고치고, 일이 조정에 관계되면 재상이 대죄(待罪)한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그 예기(銳氣)를 기르고 그 중권(重權)을 부여해주어야 간사한 싹이 끊어지고 정치가 맑아진다’라고 하셨습니다.
 
  신들은 우리 성종께서 26년 동안 태평을 누리신 근본이 다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오며, 이는 사신이 직접 면전에서 받든 하교이니, 성종의 이 하교를 가지고 전하를 돕고 인도해서 억만년 끝없는 복의 터전을 마련해야 할 것인데, 지금 사신의 간사하고 교활한 말이 낱낱이 성종의 하교와 서로 반대되어 대간이 강력히 논쟁을 벌일 경우에는 사신이 그 폐단을 고칠 방법이 없다 하고, 대간이 옥에 갇히게 되어서는 사신이 기뻐서 치하하기에 겨를이 없다 하였으니, 임금의 이목을 가리고 조정의 기강을 무너뜨리며, 대간의 예기를 꺾어 임금의 과실을 논하고, 재상의 시비를 공박할 수 없게 하며, 간사한 술책은 날로 싹이 트고 정치는 날로 문란하여져서 억만년 끝없는 화근이 되게 하니, 그렇다면 사신은 실로 성종의 죄인이옵니다. 전하께서 성종의 자리를 이어받으시고서 성종의 죄인을 두둔하신다면 되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성종의 영혼이 달갑게 여기어 ‘나는 후계자가 있으니 옛 업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더욱더 성념하시어 쾌히 결단하시고 머물러두지 마소서.〉

 

  이처럼 성종은 연산군의 친모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임금을 업신여기는[無君] 신하들을 대거 길러서 연산군에게 넘겨준 것이다.
 
  결국 두 달여 만인 9월에 노사신은 정승에서 물러난다. 명예직으로 부원군(府院君)을 받았다. 일단 정치 한복판에서 물러서자 노사신을 향한 공격은 점점 잦아들었다.
 
 
  戊午史禍의 시작
 
  연산군 4년 7월 1일 윤필상(尹弼商·1427~1504년), 노사신, 우의정 한치형(韓致亨·1434~1502년), 무령군 유자광(柳子光)이 차비문(差備門)에 나아가 비사(秘事)를 아뢸 것을 청한다. 그러고 그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등을 경상도로 급파했는데 외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고 한다. 경상도 청도에 내려가 있던 김일손(金馹孫)을 압송해오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史禍)가 터진 것이다.
 
  윤필상은 노사신과 마찬가지로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아 도승지를 지냈으며 이재(吏才)가 뛰어나 예종·성종·연산군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성종 때 영의정에 올랐다. 연산군 2년(1496년)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이때 원로로서 무오사화에 관여했다. 그러나 1504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 생모 윤비의 폐위를 막지 않았다고 추죄(追罪)되어 사사(賜死)의 명을 받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예종과 성종 때는 군공(軍功)도 세웠으나 조정 대신으로 임금의 뜻에만 영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치형은 무관(武官)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아와 세조 때 승지를 지냈고 성종 때 호조·병조 판서를 지낸 뒤에 연산군 때 우의정·좌의정을 지내고 1500년에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윤필상과 마찬가지로 연산군 생모 윤비의 폐위를 막지 않았다고 추죄되어 한명회 등과 함께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연산군은 즉위 초 《성종실록》 편찬을 명했다. 이때 《성종실록》 편찬의 책임자로 실록청 당상관에 임명된 이극돈(李克墩)은 미리 사초(史草)를 열람할 기회가 있었는데, 사초에 훈구파(勳舊派) 대신들의 각종 부정과 비리가 상세히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중 사림파의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에는 이극돈 자신과 관련한 비리가 들어 있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내용 삭제를 부탁했으나 사관이 쓴 사초를 함부로 폐기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러자 이극돈은 실록 편찬에 기초가 되는 사초는 실록 편집이 끝나면 파기하여 비밀에 부쳐야 하는 것이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사초를 유출하여 훈구파였던 유자광과 의논하였다. 이에 유자광이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과 논의하여 이 비사를 연산군에게 고한 것이다. 그 후 7월 한 달 동안 조정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실록, 비난하면서도 칭찬
 
  그러나 세조의 총애를 받은 노사신으로서 윤필상·유자광이 주도하는 사림파 제거에 미온적으로나마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동시에 그는 억울한 피해를 줄이려고 온 힘을 다했다. 아직 사건의 여진이 끝나지 않은 1498년(연산군 4년) 9월 6일 노사신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졸기를 보면 그의 흠결을 억지로 찾아내려 한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성종조에 정승이 되었으나 건명(建明·건의)한 바는 없었고 금상(연산군)이 즉위한 처음에 수상(首相)이 되었는데 왕이 대간(臺諫)에게 노여움을 가져 잡아다가 국문하려 하니, 사신이 아뢰기를 ‘신은 희하(喜賀)하여 마지않는다’라고 하였고, 태학생(太學生)이 부처에 대해서 간(諫)하자 귀양 보내려고 하니, 사신이 또한 찬성했으므로 사림(士林)들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 성품이 남을 기해(害)하는 일은 없었다.
 
  사옥(史獄)이 일어나자, 윤필상·유자광·성준(成俊) 등이 본시 청의(淸議)하는 선비를 미워하여, 일망타진(一網打盡)하려고 붕당이라 지목하니, 사신은 홀로 강력히 구원하면서 ‘동한(東漢)에서 명사(名士)들을 금고(禁錮)하다가 나라조차 따라서 망했으니 청의(淸議)가 아래에 있지 못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선비들이 힘입어 온전히 삶을 얻은 자가 많았다.〉

 
  반정(反正) 공신들이 편찬한 실록이 이 정도로 기록했다는 것은 오히려 극찬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연산군 대에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삶의 후반부가 옥에 티로 남게 된 것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재상은 어떤 임금을 만나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