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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⑲ 한국인의 색채

白衣와 색동옷의 나라…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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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禮)와 효(孝)를 중시했던 ‘색의 영도(零度)’ 문화 1000년 이상 이어져
⊙ “조선의 흰색은 백옥같이 밝은 흰색에서 거칠고 투박한 흰색까지 마치 음색의 향연”
⊙ 어떤 민족이 과연 이렇게 오색현란한 색을 옷소매에 두르고 다니는 것을 보았나
⊙ 고려청자, 이조백자의 청색, 백색 뒤에 무당의 원색, 색동옷이 숨겨져 있어
⊙ “우리 복식의 힘은 달항아리와 색동저고리의 양극단 포용”

李御寧(1933~2022)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편집자 註]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1년이 지났다. 선생은 생전(生前)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문패에다 ‘끝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직접 붙이셨다.
생전 선생은 당신이 남긴 굵직한 저작물과 수많은 강연에서 언급한 ‘한국인 이야기’를 비록 당신이 떠나도 계속 이어가기를 희망하셨고 관련 원고와 저서의 일부를 《월간조선》에 전하셨다. 또 선생이 남긴 바탕 위에 편집자의 생각을 보태도 된다고 허락하셨다.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이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선생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흰옷 입은 노인. 1967년 6월 2일 경남 사천지역에서 열린 공화당 선거 연설회장을 방문한 한 갓 쓴 할아버지의 모습. 사진=조선DB
  색채는 문화적 의미 작용의 은유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색이라면 흰색, 회색의 무채색이었다. 동양 유교권 문화는 붓의 문화, 즉 먹의 문화다. 그 문화의 기조색은 언제나 수묵화와 같은 흑색이었다. 그리고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불렸던 한국인에게는 백색처럼 친숙한 빛깔도 없다.
 
  정확하게 말해 우리는 ‘색(色)의 영도(零度)’라 불리는 흑백(黑白) 문화 속에서 1000년 이상을 살아왔다. 근대화 이후에도 그 색채의 문화적 의미 작용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서도(書道) 같은 활자 문화 역시 ‘색의 영도성’을 상속받았다.
 
  이러한 흑백의 무채색 문화가 지닌 특성은 위엄, 억제, 그리고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지위의 패러다임을 지향한다. 가령 의상 하나를 놓고 보더라도 승려나 신부들, 그리고 모든 식장에서 입는 예복도 ‘채색의 영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예(禮)와 효(孝)를 중시했던 우리 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었을망정 누구보다 흥이 많은 민족이었다. “자연을 닮은 순수한 복색과 고름, 띠, 색동이 어우러진 활기찬 복식”이 있었다.
 
  프랑스인 드 라 네지에르는 “조선의 흰색은 백옥같이 밝은 흰색에서 거칠고 투박한 흰색까지 마치 음색의 향연 같다”고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문헌연구실의 이민주 선임연구원은 이를 두고 “우리 민족이 즐겨 입었던 삼베, 모시, 무명 등 직물에 관한 통찰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해석”이라고 했다.
 
 
  장도칼에 가죽신
 
이어령 선생의 모습이다. 《동아일보》 1983년 12월 28일 자 5면에 실렸다.
  사람들은 공기(空氣)에 대해 말하는 일이 드물다. 우리는 항상 그 공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통치와 분단 그리고 전쟁은 공기와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일본인들은 우리 옷을 ‘조선옷’으로 불렀고 해방 후 한동안 우리 역시 습관처럼 ‘조선옷’과 ‘한복’이라는 명칭을 구별 없이 사용했다.[참조: 《한국인, 어떤 옷을 입고 살았나》(2017)]
 
  해방 당시 여성들의 평상복은 한복이었다. 물론 이른바 ‘몸뻬’라는 일본식 작업복도 있었지만 일반적인 의생활은 한복이 주류를 이루었다. 36년의 식민 통치의 흔적을 지울 틈도 없이 6·25전쟁을 겪으면서 낙하산이든, 구호물자든 닥치는 대로 옷을 해 입어야 할 현실 속에서 우리 옷을 우아하게 갖춰 입고 생활한다는 건 대부분의 서민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대두된 것이 바로 카키색 문화이다.
 
  그 시절, 달팽이의 껍데기처럼 몸의 일부로 느껴지던 옷이자 색이었지만 불과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그것은 낯선 옷, 낯선 색깔이었다. 옛날 민요(民謠) 한 곡조를 들어봐도 알 수 있다.
 
  “어디 군산가. 경상도 군사제.
  몇천 명인가. 삼천 명일세.
  몇백 바퀴 돌았나. 삼백 바퀴 돌았네.
  무슨 칼을 찼나. 장도칼을 찼네.
  ‌무슨 신을 신었나. 가죽신을 신었네….”
 
  전쟁놀이 같은 민요인데, 장도칼에 가죽신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군사 보고 “이겼느냐 졌느냐”가 아니라 기껏 “몇 바퀴 돌았느냐”고 묻는 말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이와 같은 민요 가운데는 “몇 바퀴 돌았냐”가 아니라 “몇천 냥 벌었냐”라고 묻는 것도 있고 또 “무슨 옷 입었나. 베옷 입었네”라는 것도 있다.
 
  민요에 나타난 군대 문화만이 아니라 개화기의 실제 군사들도 대동소이하다 할 수 있다. 구한말 대원군이 만든 군대에는 무부광대(巫夫広大)로 편성된 난원군(欄援軍)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싸움보다는 굿을 장기로 하는 군이었다.
 
 
  전래의 한복 밀어내고 이 땅에 들어온 카키색
 
  우리의 전통문화가 비(非)군사적 문화였다는 것은 흰옷으로 상징되는 한복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복의 옷소매와 바짓가랑이는 전쟁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넓고 헐렁한 것이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년)이 한복을 벗어던지고 옷소매나 바짓가랑이가 좁은 호복(胡服)으로 갈아입자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래야 싸움터에서 말을 타고 활을 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느 일본 작가도 지적한 것처럼 임진왜란의 잘못은 일본이 비무장국가와 다름없는 나라를 침공했다는 데 있다. 걸어 다닐 수 있는 나이만 되면 칼을 차고 다녔던 일본인의 눈으로 볼 때 숭문주의(崇文主義)의 선비들이 지배했던 조선왕조는 거의 비무장국가와 다를 게 없었다. 군대가 있어도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문관(文官)들이 지휘하는 일이 많았다. 싸우기 위해서는 카키색이라야(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군복은 땅과 풀 색깔을 기조로 삼고 있다)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해방 후 가장 큰 변화는 백의에서 카키색 제복으로의 전환이었다. 해방 후 미국 문화의 접촉도 따지고 보면 군정하에서의 경험이므로 이것 역시 카키색 체험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카키색의 의미는 경쟁이 투쟁이 되고 그 투쟁이 전쟁이 되는 이를테면 경쟁의 정점에 있는 색채라는 데 있다. 즉 전쟁의 승부는 죽느냐 사느냐에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것은 극한상황(極限狀況)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고 거기에서 살아남는 길은 오직 힘이라는 사실뿐이다. 이 가열성 속에서 한국인들은 태어나 자라난 것이다. 미국 여성들이 드센 것은 개척민의 전통, 남자와 함께 라이플 총과 곡괭이를 들었던 그 생활에서 온 것이고, 한국 여성들의 바이탈리티와 거센 치맛바람은 피란 시절에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살아남은 그 가열한 전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쓰이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말은, 그리고 극한적 용어의 대부분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이런 카키색 문화의 발로인 것이다. 1970~80년대만 해도 입을 옷이 없던 대학생들은 군복을 입거나 물을 들여 입고 다녔고, 고교생 역시 교련복을 입었다.
 
 
  한국인의 원색적인 생명력
 
  한국인이 아무리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마치 목욕탕에서 나온 사람처럼 전신에서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는 사람들, 얼굴은 조금씩 상기되어 있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다.
 
  옷을 걸치고 있는데도, 어쩐지 알몸을 느끼게 하는 원색적인 생명력(生命力), 조금도 과장이 아닌 것은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것도 바로 이 활력에 찬 모습일 것이다. 거짓말 잘하는 어른들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순진한 아이들이 쓴 작문에 나타나 있는 한국의 모습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1970~80년대 산업화로 몸부림치던 시절, 서울에 있는 일본인 학교 중1 학생(上田洋一)이 쓴 글을 잠시 들여다보자.
 
  〈나는 한국에 와서 아직 2년 8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이 짧은 동안에도 집 가까이에 있는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제1 한강교의 확장, 반포대교의 건설과 한강쇼핑센터의 내부 신축, 그리고 학교 부근에는 개포동아파트와 양재천의 새로운 다리. 처음에는 논밭과 숲뿐이던 데가 이렇게 빨리 변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냥 놀라워할 뿐입니다.〉
 
  물론 이 학생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록 지진이 없고 지반이 견고하다고는 하나, 너무 빨리 짓는 것 같다”는 한마디 걱정을 남기고 있기는 하나, 어찌 되었든 일개미로 소문난 악바리 일본인 아이가 한국인의 활력 앞에서 오히려 기가 죽어 있는 것이다.
 
  세계인들이 한국인들의 무한동력(無限動力) 같은 이 활력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이 달리는 한국인들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높여 자문하고도 있다.
 
 
  주베일 항만 공사
 
  군청(群青)빛 페르시아만에서 반마일쯤 들어간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유전 지대인 주베일항에는 세계 최대의 독이 있다. 당시 ‘20세기 최대의 역사(役事)’라 일컬어지던 역사적인 프로젝트였다. 공사 금액이 무려 9억6000만 달러나 투입되어 단일 회사가 맡은 공사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공사였다고 한다. 또 110만㎥의 콘크리트 작업량은 웬만한 항만 공사의 흙 매립량보다 많은 양이었다.
 
  사막의 가열한 자연조건과 오일달러를 에워싼 치열한 경쟁을 물리치고 이 거대한 독을 완성한 사람들이 대체 누구인가. 바로 한국인들이었다. 이 공사에는 200여 명의 토목, 건축, 기계 및 설비 분야의 상주기술자와 관리자를 비롯하여 100종에 이르는 각 분야의 기능공이 하루 최대 3600명까지 참여하였다. 이를 연 인원으로 보면, 국내에서 구조물 제작과 현장까지의 수송에 동원된 인원을 제외하더라도 총 250만 명에 달했다. 이 공사에 투입된 자재는 약 1000종, 이 중 별도로 자재 공급원을 지정하거나 특수시방을 요구한 자재를 제외하고는 모두 국내 조달을 원칙으로 하였다고 한다.
 
  이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러한 물음 앞에서 한국인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면 무엇인가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힘을 느끼게 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어린이날 기념 대운동회에서 서울 불암초등학교 학생들과 교환학생으로 온 필리핀 초등학생들이 색동저고리를 입고 강강술래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렇다. 우리는 가끔 한국인 자신의 변화에 스스로가 놀란다. 가령 명절날 거리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그렇다. 한국인은 누구나 자신을 백의민족이라 생각해 왔고, 남들도 한국을 모노크롬 문화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색동옷을 보면 어떤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어떤 민족이 과연 이렇게 오색현란한 색을 이발소 간판처럼 옷소매에 두르고 다녔나. 옛 한옥에 칠하던 단청은 또 어떤가. 무당들의 번쩍이는 색채들은 또 무엇인가?
 
  이불이나 베개나 한국인들이 내실에서 쓰는 것들은 예외 없이 색채가 풍부하지 않던가. 밖의 문화는 백의였지만, 내실 문화는 색실 문화였다. 색동옷처럼 한국인의 그 힘은 지금껏 억제되었던 색채의 분출과 같은 것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파랑, 초록, 노랑, 빨강, 자주 등 화사한 빛깔은 흰옷과 어울려 ‘색동의 축제’ 같은 느낌을 준다. 이들 색은 어디에 쓰였을까. 어린아이는 남녀 할 것 없이 색동 소매를 단 저고리와 함께 오방장두루마기며 까치두루마기를 입었다.
 
  이민주 연구원에 따르면 여성은 남색 또는 붉은색 치마를 입고 깃과 고름, 끝동이 자주색이나 남색 단의 저고리를 입었다. 남성도 바지저고리 위에 배자를 입고 그 위에 흰색의 두루마기를 입었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한국의 파란 하늘과 회색 돌, 빛바랜 담장은 순수함을 즐긴 한국인의 복색과 어우러져 순수하면서 활기찬 조화를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복식의 힘이었다.
 
 
  ‘고려자기는 神에 이르는 길’
 
‘강진고려청자’ 국내 순회전이 열린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시민들이 각양각색의 청자들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조선DB
  그래서 “달항아리와 색동저고리, 양극단을 포용하는 게 한국의 미(美)”(디자이너 정구호)라는 말이 나온다. 예부터 스타일의 다양성을 추구해 온 것은 한국 복식의 포인트다.
 
  빛깔, 오호! 빛깔
  살포시 음영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고 깨끗한 비취여
  가을 소나기
  막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물방울 뚝뚝 시리어
  곧 흰 구름장이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호 이것은
  천년 묵은 고려 청자기
 
  - 박종화의 시 ‘청자부(靑磁賦)’ 일부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빛깔을 노래한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1901~ 1981년)의 시 한 구절이다. 한국 사람만이 아니라 외국의 여러 미학자(美學者)들도 고려자기 앞에서는 고개를 수그린다. 단순한 미의 정취를 지나 어떤 숭고한 종교적인 신심(信心)까지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어떤 외국인은 고려자기를 신(神)에 이르는 길이라고까지 하며 감탄한 일이 있다. 자기의 형태도 형태지만, 그 신묘한 빛깔에 대해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감히 창조해내지 못한 이 고려청자의 신비한 색채미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밝고 자극적인 원색을 피했을 뿐이지 색채 그 자체의 심미의식(審美意識)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색채의 성격이 달랐을 뿐이다. 고려청자처럼 보다 복잡하고 음미(陰微)한 푸른 색채, 혹은 이조백자와 같은 백색, 이것이 한국인이 발견한 색채다.
 
 
  색동옷의 생명력
 
3월 23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국제교육원에서 중남미, 아프리카, 중동 등 25개국에서 온 외교관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셀카’를 찍고 있다. 사진=조선DB
  그러면 과연 그 색채의 성격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일까?
 
  독일의 문호 괴테는 푸른빛을 정의하여 ‘자극하는 무(無)’라고 했다. 푸른빛은 정지[無]의 의식이며, 신처럼 멀리, 참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의식이다. 그늘, 어둠, 침묵, 마치 죽음의 심연 속에서 은은히 흐느끼는 영혼과 같은 색채이다. 고려청자의 ‘청색’은 이와 같은 푸른빛의 요소를 최대한으로 승화시켜서 얻은 색채이다. 그 청색은 완전히 도자기의 내면 속에 묻혀 있다. 해맑은 푸른색이지만 쑥빛에 가까울 정도로 깊이가 있다. 결코 어두운 빛깔이 아니다. 푸른 채로 내부로 젖어들어 깊이를 얻는 색채라고 할까. 그야말로 영원과 무한! ‘무’의 빛이라고 할 수 있다. 나타나면서 숨어 있고, 즐거운 듯하면서 슬프디 슬픈 신비한 색채감이다.
 
  현세의 즐거움보다는, 그리고 타오르는 생명의 찬미보다는, 어둠 속에서 빛을, 죽음 속에서 생을 얻어야 했던 사람들이다. 거친 땅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보듯이, 바다를 넘겨다보듯이 고뇌 속에서 발돋움 치며 무엇인가를 희구하려던 이 민족의 눈앞에 어리었던 것은 바로 이 고려청자의 푸르디푸른 빛이었으리라. 이것이 바로 한국인들이 휴식하였던 색채의 고향이다. 여인들이 즐겨 입는 옥색 치마, 옥색 고무신, 그리고 비취로 만든 비녀, 아니 저 한국의 가을 하늘빛도 마찬가지다.
 
  고려의 청색이나 조선조의 백색 뒤에는 무당들에게서 볼 수 있는 원색, 색동옷 같은 것들이 숨겨져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다채색의 열정과 쾌락 그리고 그 활력이 승화되었을 때만이 우리는 청자의 푸른빛과 백자의 백색과 같은 무채색에 가까운 그 빛을 비로소 얻어낼 수 있다. 한국 문화의 밑바탕에 있는 색동옷의 생명력을 어떻게 승화시켜 갔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조각보를 잇는 마음
 
  고려청자, 이조백자, 울긋불긋 색동옷을 생각하니 조각보가 떠오른다. 조각보를 만들던 옛날 우리 할머니네들의 정성도 잊을 수 없다. 그분들은 옷을 만들고 남은 조각난 그 헝겊들을 결코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다. 아무리 쓸모없는 자투리라 할지라도, 마치 바다에서 따온 산호나 산에서 캔 옥돌이나 되는 것처럼 고이 간직했다.
 
  그것들은 일시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느질을 할 때마다 우연히 그리고 조금씩 얻어지는 헝겊 쪼가리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참고 견뎌야 한다. 그렇게 해서 색채와 형태가 제각기 다르고 크기와 결이 다양한 헝겊 쪼가리들이 모인다.
 
  그러면 이제 이 빛깔과 빛깔들을 어울리게 하고 저마다 다른 조각난 형태와 형태를 맞추어가는 배합의 슬기를 필요로 한다. 그분들은 주어진 소재 앞에서 묵묵히 순응한다. 그러나 단지 순응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한된 색채와 형태를 구성의 의지와 혜지로 극복해 간다.
 

  보아라. 예기치 않던 그 빛의 만남과 그 모양들의 교묘한 접합을. 거기에서 아름다운 무늬와 눈부신 색조를 띤 조각보가 완성된다. 옛날 우리 할머니네들은 이렇게 해서 또 다른 생의 면적을 얻어냈다.
 
  버려진 헝겊들을 모아 조각보를 만드는 마음으로 그러한 슬기로 한 해를 보내는 이 순간을 생각해봐야 한다. 쓸모없었던 생활의 쪼가리들. 길바닥에 버려두었던 시간의 무수한 파편, 그리고 이제는 기억 속에서도 멀리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얼굴과 음성, 노동 뒤의 작은 휴식들….
 
  무의미하게 찢겨나간 이 모든 생의 헝겊들을 그냥 버릴 것이 아니다. 모으고 배합해서 다시 구성을 해야 한다.
 
  애초의 빛들을 가려내고 서로 만나게 해야 한다. 세모꼴 네모꼴이 어울리게 하기 위해서는 그 빈칸을 메우는 또 다른 조각들을 찾아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쓸모없는 나날들이 예기치 않던 현란한 한 연대(年代)의 조각보로 완성된다.
 
 
  ‘노 3S’의 의상 시대
 
  이제 인간의 옷은 앞으로 어떤 운명의 길을 걷게 될 것인가. ‘노(No) 3S’의 의생활은 이미 지나갔거나 경험하고 있다. 3S란 옷을 지배해 온 시즌(Season), 섹스(Sex), 스타일(Style)을 말한다. 계절에 따라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는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춘추복이 있고 여름옷과 겨울옷이 다르다.
 
  그런데 도시의 빌딩이나 아파트들은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에서 벗어나 상춘(常春)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길에 나간다 해도 자동차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겨울에 두꺼운 오버코트를 입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점차 겨울옷이 얇아져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이카족(族)들은 두꺼운 오버를 입고 다니지 않는다.
 
  둘째로 옷에는 반드시 남녀 구별이 있다. 구약성서의 〈신명기〉를 보면 남자는 여자 옷을 여자는 남자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계율까지 있다.
 
  그러나 남녀평등의 현대에서 여자가 남자처럼 바지를 입는 일이 예사이다. 이미 히피들은 유니섹스[單性]를 부르짖었다. 티셔츠나 스웨터의 경우 단추가 왼쪽에 붙었느냐, 오른쪽에 붙었느냐로 겨우 그 옷의 성별을 식별할 정도이다. 남자 옷이 여자 복장처럼 울긋불긋해지고 윗저고리가 블라우스형으로 바뀐 지 오래다. 헤어스타일 또한 남녀 구별이 사라졌다.
 
  셋째로 일정한 전통적인 스타일이 사라졌다. ‘옷은 꼭 이렇게 돼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없다. 이른바 언밸런스 스타일이 유행하고 있다. 왼쪽 소매는 긴데 오른쪽 소매가 짧다든지, 오른쪽은 체크 무늬, 왼쪽은 물방울 무늬라든지, 말하자면 짝짝이 옷이 생겨나고 있다. 양말도 짝짝이로 신는 시대다.
 
  한마디로 말해서 계절과 성과 스타일(규격)에 얽매여 있던 인간 의상이 해방되어 노 3S로 나갔다는 것은 곧 인간의 의식과 생활 자체의 자유화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머지않아 닥칠 인간 운명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시켜준 또 하나의 깃발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계절도 성도 스타일도 없는 자유의 벌판으로 인간은 달려가고 있다. 생각할수록 인간의 옷은 인간 문명을 상징하는 원죄의 깃발인 것만 같다.⊙
 
한복의 변신
  봉황문 크롭톱, 두루마기 재킷…

 
2020년 7월 ‘하우 유 라이크 댓(How you like that)’을 발표할 당시의 블랙핑크의 한복 의상. 사진=YG 엔터테인먼트
  분명 한복인데, 익히 알던 그 모습이 아니다. 한국 전통 문양이 그려진 상의는 배꼽 위로 껑충 올라갔고, 길고 까만 도포는 속이 훤히 비친다.
 
  지난 2020년 7월 ‘하우 유 라이크 댓(How you like that)’을 발표한 블랙핑크의 의상이다. 블랙핑크는 컴백 첫 무대였던 미국 방송 NBC의 토크쇼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팰런〉과 신곡 뮤직비디오에서 한복을 입고 등장했다. 블랙핑크 의상을 두고 “한복이다, 아니다”의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제니의 분홍 봉황 무늬 두루마기 재킷은 조선 선비가 입던 도포를 변형한 것이었다. 도포를 잘라서 아랫부분은 치마로, 윗부분은 저고리 재킷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로제 옷의 가슴가리개는 조선 시대 속옷이다. ‘크롭톱’ 같다.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던 ‘궁중 보자기’에 있는 봉황문 패턴을 그렸더니 한국만의 분위기도 살아났단다. 겉옷은 무관이 입던 철릭이었다.(참조: 《어린이조선일보》 2020년 7월 28일 자 기사 〈크롭톱·재킷처럼 보이는 한복, 고정관념 깨니 정말 세련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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