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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미술가들

스캔들로 보는 미술사 〈마지막 회〉 살아남은 자의 고독 - 호크니와 피터 그리고 헨리

글 : 추명희  작가  vino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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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존하는 작가 중 가장 비싼 작가
⊙ “나는 심장과 눈, 그리고 손을 믿는다”면서도 아이패드 등 첨단 장비 즐겨 활용
⊙ 동성애 등 경계인의 삶 그리다가 자연으로 회귀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1937~)
‘살아 있는 현대미술의 전설’ 또는 ‘세계에서 가장 작품값이 비싼 생존 작가’로 불리는 영국의 팝아트 화가. 2017년 작가 탄생 80주년을 기념해 영국 런던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프랑스 파리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을 순회한 회고전은 그야말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의 작품은 수많은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꾸준히 전시되고 있으며 이제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장르인 이 시대의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고집이 세다’ ‘귀가 어둡다’ ‘지나치게 관대하다’ ‘이성의 탈을 쓰고 감성적이다’ ‘가끔 너무 대담하다’ ‘본의 아니게 무례하다’. 세계 미술계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1937~)를 두고 그의 친구들이 묘사한 표현이다. 물론 젊었을 때의 일이다.
 
  2018년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호크니의 〈예술가의 자화상〉이 903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한화로 1000억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 현존하는 작가 중 가장 비싼 작가가 된 그는 올해로 86세의 노장이 되었다. 동성애(同性愛)를 포함해 인물, 풍경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그의 실험정신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하나의 장르로 만들었다.
 
 
  무대 디자이너로도 명성
 
  “우리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떠한가요?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대형 스크린에 펼쳐질 나의 작품과 마주할 모든 이들이 이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2021년 5월, 호크니는 새로운 영상 작품 〈태양 혹은 죽음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를 선보였다. 그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아이패드로 제작한 이 작품은 ‘해돋이’를 주제로 한 2분30초 분량의 애니메이션 디지털 아트 프로젝트. 서울뿐만 아니라 런던, 뉴욕, 도쿄의 최첨단 옥외 스크린 네트워크를 통해 한 달 동안 동시 공개되었다.
 
  이 작품엔 자연의 웅장함과 위대함이 담겨 있다. 못난이 유충(幼蟲)이 하룻밤 사이에 황제 잠자리로 변신하는 그 찰나의 신비로움 같은 것이랄까. 한순간에 양 날개가 쫘악 하고 펴지면서 공기역학적으로 완벽한 네 개의 날개를 가진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완벽한 비행체로 변신하는데, 바로 그 순간의 에너지를 세상에 퍼트리는 듯한 황홀함이 그의 작품에서 뿜어져 나온다.
 

  태어날 때부터 평범한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예술가들은 분명 무언가 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피의 온도’부터가 다를지도 모른다. 호크니는 1960년대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피터 블레이크 같은 미술가들과 함께 영국 팝아트 운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동성애 주제를 공공연히 다룸으로써 유명해졌고 사진작가, 판화가, 삽화가 등 여러 분야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오페라나 발레를 위한 무대 디자이너로서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75년에는 모차르트의 〈마적〉과 스트라빈스키의 〈방탕아의 추이〉를 위한 무대를 디자인했다. 물론 무엇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로스앤젤레스의 수영장’과 ‘아파트’ 그림이었다.
 
 
  ‘남들이 뭐라 생각할지 걱정하지 마라’
 
  호크니는 1937년 7월 9일 영국의 요크셔주 브래드퍼드에서 출생했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밖에서 폭탄이 떨어지면 계단 밑 찬장에 숨어 엄마와 함께 소리를 질러댔던 것이다. 그는 “그 기억이 늘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고 고백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시작된 배급은 그가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주일 치 용돈으로 겨우 사탕 하나밖에 못 사 먹을 만큼 궁핍하게 살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때가 사는 게 재미있었다”고 회고한다.
 
  호크니는 1959년에 런던에 있는 왕립예술대학에 들어갔다. 그의 아버지는 늘 그에게 “남들이 뭐라 생각할지 걱정하지 말고 누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마라”고 충고했고 그는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당시 뉴욕에서는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이 아주 잘나가고 있었다. 그는 달랑 두 달 치 생활비에 불과한 350파운드를 들고 뉴욕으로 날아갔다.
 
  당시 뉴욕은 24시간 깨어 있는 곳이었고 뉴욕이야말로 그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그는 롱아일랜드의 친구 집에서 TV 염색약 광고를 보던 중 바로 뛰쳐나가서 염색약을 사다가 금발로 물을 들였다. “금발은 더 즐거우니까 금발로 염색하세요”라는 카피에 ‘그거 정말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평생 금발로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금발에 두껍고 검은 뿔테 안경은 호크니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호크니는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그의 작품 세계도 선명한 색과 밝은 패턴 그리고 평온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이런 문화적 불모지에 왜 왔냐”고 물었지만 그에겐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그곳엔 바로 할리우드가 있었기 때문. 전후 세대인 그는 영화를 보며 자랐고 그때 본 영화들은 다 할리우드 영화였다.
 
  그는 극장에 자주 갔고 집에 돌아올 때면 늘 버스에 앉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했다. 차창 프레임에 스치는 세상을 각기 다른 그림으로 본 것이다. 그는 더 많은 풍경을 보기 위해 2층 맨 앞자리에 앉곤 했다.
 
 
  ‘물이 흩어지는 찰나’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 1967)〉
호크니의 출세작이자 20세기의 가장 상징적인 팝아트 이미지 중 하나.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날, 수영장 다이빙대에서 누군가 시원한 물속으로 막 뛰어든 순간 튀어 오른 물보라를 묘사했다. 그가 LA에서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아크릴 본연의 얇고 산뜻하고 가벼운 특성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 덧바를 수 있는 유화와 달리 바르자마자 말라버리는 아크릴의 특성상 수정하기가 쉽지 않아 물줄기를 그리는 데만 일주일 가까이 공을 들였다고 한다.
  LA에서 그는 보통 아침에 작업을 했다. 오후가 되면 덥고 햇살이 비춰서 산타모니카 해변에 나가 눕곤 했다. 호크니는 젊고 섹시한 서퍼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느꼈고 〈샤워하는 소년〉 〈풀장의 두 소년〉 같은 작품들을 그렸다. 그는 저녁이 되면 다시 작업을 시작했고 밤 11시쯤 되면 술 한 잔 하러 나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당시 캘리포니아 술집들은 새벽 2시까지 영업을 했다.
 
  “어떻게 보면 나한텐 딱 좋은 시간이에요. 문을 닫는 새벽 2시쯤에는 뭔가를 결심할 수도 있잖아요. 4시는 좀 늦죠.”
 
  LA의 술집에선 브루클린에서 온 배관공 같은 사람이 옆자리에 앉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같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런던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호크니의 대표작이자 LA의 첫 수영장 그림인 〈더 큰 첨벙〉은 물이 흩어지는 찰나를 표현하기 위해 2주간이나 공을 들여 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영장 물이 튀는 순간은 1초 정도인데 튀는 물을 그리는 데만 7일이나 걸렸다. 자세히 보면 가느다란 선들로 아주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클라크 부부와 퍼시(Mr and Mrs Clark and Percy, 1971)〉
이 작품은 호크니가 1968년부터 작업한 2인 초상화 시리즈의 일부이다. 호크니와 클라크는 1961년 맨체스터에서 만난 뒤로 친구가 되었으며 1969년 클라크가 버트웰과 결혼할 때 그가 들러리를 섰다. 호크니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 전 런던에서 그린 것으로 확인된 소수의 그림 중 하나. 방 안에 있는 부부의 형식적 자세와 관계는 이 그림이 18~19세기 초상화를 참조하여 그가 자신만의 새로운 구성 방식을 실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클라크 부부와 퍼시〉는 미니멀 스타일로 세련되게 꾸민 1970년대 아파트 실내를 배경으로, 패션 디자이너인 오시 클라크와 셀리아 버트웰 부부, 그리고 그들의 고양이인 퍼시를 그린 작품이다. 정지된 듯 고요한 장면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의 삶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
 
 
  경계를 그리다
 
아이패드 그림
2010년 1월 아이패드가 출시된 후 석 달도 채 안 된 같은 해 4월 6일, 일흔셋의 호크니는 자신의 첫 아이패드 드로잉을 완성했다. 그는 “아이패드를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어요. 이걸로 원하는 것을 그대로 할 수 있다고요!”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를 빠르게 읽어내는 대가의 녹슬지 않은 감각에 놀라워했다.
  그는 몇몇 주제를 반복해 그렸다. 특히 그의 뮤즈로 알려진 버트웰을 많이 그렸다. 당시 추상화가 주류를 이룬 미술계에서 호크니는 유일한 구상화가였다. 하지만 그도 추상미술의 영향을 받긴 했다. 그는 여러 작품을 컬러필드 페인팅처럼 칠했다.
 
  호크니는 예술을 향한 새로운 접근법과 게이의 삶을 솔직히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성 정체성(正體性) 때문인지 그는 늘 경계에 관심이 많았고 〈더 큰 첨벙〉에도 테두리에 경계를 그려 관객이 그림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다. 경계가 있다는 건 넘어야 할 선이 있다는 것. 호크니는 “나는 그림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호크니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은 피카소였다. 피카소는 여러 시기를 거치며 다양한 접근법과 스타일을 시도했는데, 그는 피카소처럼 늘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1980년대 그는 할리우드 힐스 몬트캄 거리의 작업실을 대체하는 공간으로 말리부 가옥을 구입했다. 그는 불과 몇 미터 밖에 태평양이 자리한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큰 수영장의 가장자리’라고 표현했다. 신기술을 그림에 적용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그는 복사기, 폴라로이드, 레이저프린터, 팩스 등으로도 실험을 했다. 그는 “사실 나는 로테크, 즉 저차원 기술의 신봉자다. 나는 심장과 눈, 그리고 손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항상 첨단 장비를 즐겨 활용했다. 이제 그는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린다.
 
 
  피터와의 만남과 이별
 
  1964년 그는 LA에 사는 영국인 동성애자 중 제일 유명한 크리스 어셔우드와 돈 버카디 커플을 찾아갔다. 30년 이상 나이 차가 나는 남자 둘이서, 둘 중 하나가 상대를 총으로 쏴 죽이거나 헤어지지도 않고 15년이나 살다니, 그것은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그는 두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나도 애인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1967년 여름, UCLA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호크니는 피터 슐레진저를 만난다. 피터는 호크니가 찾던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젊고 매력적인 남자였는데 잘생겼다기보다는 예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호크니는 그야말로 피터에게 홀딱 빠졌다.
 
  “만약 내일 아침에 나라가 무너진다 해도, 바로 그날 마침 당신이 진정한 사랑을 만난다면 나라가 망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죠? 세상이 멀쩡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샌드위치와 맥주만 있으면 아무 상관없죠.”
 
  두 사람이 함께하는 단란함은 호크니에게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였다. 호크니는 그와 같이 살기 위해 나란히 연결된 집 두 채를 구입한 뒤 그사이의 벽을 부쉈다. 양 끝에 큰 방을 만들고 그 방을 연결하는 긴 복도에는 갤러리를 만들었다. 피터는 커튼과 타일 작업을 맡았고 가구도 배치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취향은 너무도 달랐다. 피터는 아늑한 분위기의 집을 원했고 호크니는 세련된 집을 갖고 싶어 했다. 둘 사이에는 점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녀관계도 유지가 어려운데 남자끼리 게다가 둘 다 그런 관계를 맺는 게 처음이었으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피터와의 이별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호크니는 하염없이 울었고 진정제까지 먹어야 했다. 그는 기분이 극도로 좋아졌다가 우울해지기를 반복했는데 다행히도 그의 옆에는 오랜 친구 헨리가 있었다. 침대에 엎드려 고개를 파묻고 우는 호크니의 등을 헨리는 엄마처럼 자상하게 문지르며 위로해주었다.
 
  헨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큐레이터였다. 어쩌면 호크니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둘은 매일같이 30분 정도 전화로 대화를 했고 삶의 모든 부분을 공유하고 있었다. 예술, 책, 우정, 연인, 가십 모든 부분을.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는 우정이었다. 헨리는 호크니의 성격이나 예술에 대해 말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에겐 특유의 다정함으로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기술이 있었다. 호크니는 6개월에 한 번씩 자기가 그린 그림을 헨리에게 골라달라고 부탁했고 일부는 헨리의 손에 찢기거나 쓰레기통에 던져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헨리의 얼굴엔 자랑스러움과 오만함이 스쳐 지나갔다.
 
 
  ‘에이즈’로 친구의 2/3 잃어
 
  “친구는 내 삶을 관통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헨리 외에도 그의 곁엔 친구들이 많았다. 호크니는 파티를 좋아했다. 그는 잠자리에 들 때면 침대 한가운데 1.5m짜리 청록색 테디베어를 올려놓고 이성애자와 게이를 분리하곤 했다. 1970년대에 미국 문화계에서 게이라는 것은 곧 멋지고 패셔너블하다는 뜻이었고 세상 모든 것이 마치 그들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에이즈’가 나타나면서 순식간에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한 명씩 에이즈로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고 일련의 죽음들이 호크니를 뼛속까지 흔들어댔다.
 

  “그들을 생각하다가도 관두게 돼요. 떠난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요. 그들을 떠올리면 미쳐버릴 것만 같죠. 그 이별이 내 삶의 일부라는 걸 천천히 받아들여야만 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죠. 당시엔 그들의 이름을 다 나열할 수가 없을 만큼 많이 죽었어요. 제 생각엔 그 일이 뉴욕을 바꿔버렸죠. 그들이 만약 지금도 살아 있었다면 오늘날 뉴욕은 다른 모습이었을 거예요. 보헤미아도 남아 있었을 거고. 보헤미아야말로 제가 도달했고 제가 살았던 세계죠.”
 
  그때 호크니의 지인 중 3분의 2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헨리마저 지병으로 죽었을 때 그는 세상을 다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남겨진 자의 슬픔
 
  그의 영혼의 주유소는 친구들이었다. 열렬히 사랑했던 피터가 그의 삶에서 나간 이후에도 그는 친구들과 함께 다시 삶을 이어나갔다. 그중에서도 특히 헨리는 그에게 삶의 중심축이었다. 많은 친구에 이어 솔메이트였던 헨리까지 떠나보낸 후 그의 눈에서는 호기심으로 빛나던 반짝임이 거의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의 눈에는 이제 남겨진 자의 슬픔이 일렁이고 있다. 그의 그림 속 수영장은 비어 있거나 애인이 나가고 있거나 아니면 물속과 밖에 각자 따로 있거나 등등으로 늘 고독감이 감돌고 있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친구들과 함께 물놀이하는 그림을 그렸더라면 현재의 상황도 달라졌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그는 각광받는 미술가가 아닌 그저 그런 게이 미술가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호크니는 이제 친구 대신 자연에 깊이 파고들며 스스로 위안을 찾은 듯하다.
 
  “자연은 끝없는 무한대잖아요? 우린 늘 자연으로 되돌아가게 돼요.”
 
  그렇다. 이제 그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영원한 친구는 자연이다. 자연은 결코 그를 두고 먼저 떠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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