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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⑱ 지구가 한복을 입는다면

다양하고 아름다운 보자기 ‘조각보’ 문화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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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은 문화이고 문명… 인간이 입는 옷과 사회의 체제는 동일
⊙ 인간의 문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두 동사(動詞) ‘싸다’와 ‘넣다’
⊙ 보자기는 싸는 문화, 가방은 넣는 문화에서 파생… 보자기 문화의 특성은 혼합, 융합, 포용
⊙ 가방을 든 사람과 보따리를 든 사람은 서양과 동양, 도시와 시골, 외래문화와 재래문화, 전근대성과 근대성이라는 이항(二項)대립
⊙ 후기 산업 사회의 문명과 그 문화적 특성은 이 ‘싸기’로의 회귀

李御寧(1933~2022)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편집자 註]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1년이 지났다. 선생은 생전(生前)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문패에다 ‘끝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직접 붙이셨다.
생전 선생은 당신이 남긴 굵직한 저작물과 수많은 강연에서 언급한 ‘한국인 이야기’를 비록 당신이 떠나도 계속 이어가기를 희망하셨고 관련 원고와 저서의 일부를 《월간조선》에 전하셨다. 또 선생이 남긴 바탕 위에 편집자의 생각을 보태도 된다고 허락하셨다.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이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선생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서울 365-광화문광장 한복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전통한복을 재해석해 만든 한복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조선DB
  근대화 시기 한국의 문화는 한복을 양복으로 갈아입는 시기였다. 문화가 달라지고 도시가 달라지고 모든 가치관이 변했다. 또한 문명이 바뀌어 산업 시대가 후기 산업 시대, 정보문화 시대로,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로, 소프트 시대가 스마트웨어(라이브웨어)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후기 산업 사회에서의 한복의 의미를 다시 찾는다. 옷은 문화이고 문명이다. 인간이 입는 옷과 사회의 체제는 동일하다. 프랑스혁명 당시 퀼로트(Culotte)와 상퀼로트(Sans Culotte)로 불린 옷에 따라 혁명의 두 개 파(派)가 자연스레 나뉘었듯 오늘의 문명도 양복과 한복에 의해 산업 시대와 후기 산업 시대로 분리된다.
 
  기술과 예술의 분리 과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데 가장 유효한 모델이 바로 옷이다. 옷이야말로 실용적 기술과 예술적 기술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복합물이다. 옷은 동물의 털과는 다르게 추위나 바람을 막기 위해서만 입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신화에서도 최초의 의상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였지 춥기 때문은 아니었다. 부끄러운 마음이 옷을 짓는 기술을 만들어낸 것이다.
 
  ‘남부끄럽다’는 말이 있듯이 부끄러움은 근본적으로 타인의 시선에서부터 비롯된다. 아담과 이브가 나무 잎사귀로 앞을 가리는 순간 진정한 두 사람의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게 됐다. 의상은 타인의 시선으로 비롯됐고 이 타인의 시선이 의상의 기술을 낳는다. 입는다는 것은 곧 남에게 말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나의 몸과 타인의 시선 사이에서 하나의 매체로 존재하고 있는 의상은 언어요 하나의 글인 것이다.
 
  여자들이 치마를 입는 것은 “나는 여자요”라고 말을 하는 것이고, 남자가 바지를 입는 것은 “나는 남자요”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설빔은 오늘이 보통날과 다른 명절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즐거운 카드의 메시지와 같은 것이고, 반대로 소복(素服)은 상을 당한 슬픔을 표현하는 부고(訃告)의 검은 테와 같은 것이다.
 
  심지어 실용적 목적으로 옷을 껴입은 사람이 아무렇게나 털목도리를 두르고 다닐 때에도 그 옷차림은 하나의 기호(記號) 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지금은 겨울이오” 또는 “오늘은 매우 춥소”라는 언표(言表)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옷이 타자에게 보내는 일종의 발신(發信)이라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나는 남의 시선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는 소탈한 사람이오”라는 자기 성격의 또 다른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낳은 他人의 시선
 
공장제 공업이 지향하는 가장 이상적인 옷의 형태란 바로 군복(軍服)과 같은 제복이다. 사진은 충남 계룡대 대강당에서 열린 ‘장교 임관식’ 모습이다. 사진=조선DB
  더구나 실용적 기능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것이 우리가 매고 다니는 넥타이이며 그 옷색깔이며 양복 디자인이다. 양복저고리에 달린 단추는 보통 채우지 않는데도 단추가 떨어지면 누구나 당혹감을 느낀다. 불편해서가 아니다. 마치 자기 글에 오자가 생겼을 때와 같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입고 있는 옷에는 옷감을 만드는 제조 기술, 그것을 재단하고 꿰매는 재봉 기술, 그리고 옷을 미학적으로 꾸미는 디자인 기술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각기 다른 기술 체계가 한데 어우러질 때 비로소 옷 입기가 시작된다. 옷만은 기능과 장식 예술과 기술이 분리될 수가 없다.
 
  산업혁명은 옷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목화와 무명에서 비롯된 기술혁명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해 간 이는 두말할 것 없이 공상인(工商人)들이었다. 산업혁명의 옷 만들기는 장식보다 기능이었고 옷을 만드는 디자인보다는 옷감의 재료를 만들어내는 직조술이 우선이었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말해서 대규모의 기계시설을 사용하는 공장제 공업이 지향하는 가장 이상적인 옷의 형태란 바로 군복(軍服)과 같은 제복(制服)이었다.
 
  동일 규격의 상품을 다량으로 만들어내고 동일한 동작으로 조립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이 기계이다. 단위당 생산 단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대형화, 다량화, 규격화의 방향으로 기술의 진보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 몸이 제각기라거나 입는 사람마다 옷 색깔이나 모양을 고르는 취향이 다 다르다는 것은 기계를 통한 생산에서는 가장 골치 아픈 장애요소이다.
 
  옷감은 직조공장에서 대량, 다량 생산이 가능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입는 그 옷만은 양산 체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산업 사회의 생산 방식에 브레이크 역할을 한 것이 의상문화이며 다량 생산의 공산품 체제에 의해서 점령되지 않았던 시장이 의류시장이었다.
 
  정보화 사회, 탈공업화 사회의 징조를 가장 빨리 보여준 것도 의상이다. 의상 값의 분포를 보면 처음엔 옷감이 제일 비쌌지만 다음엔 재봉삯, 그리고 요즘에는 디자인값이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옷과 신발의 상징
 
  식(食)과 주(住)는 가족 단위에서 집단으로 함께하지만 의(衣)는 개인화되어 있다. 박목월(朴木月·1916~1978년)의 시집 《경상도의 가랑잎》(1968)에 실린 시 ‘가정(家庭)’이 떠오른다.
 
  지상(地上)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박목월의 시 ‘가정’ 전문

 
  이 시의 저마다 다른 ‘아홉 켤레 신발’은 9명의 가족을 뜻한다. 치수와 모양, 색깔이 서로 다른 신발을 통해 ‘연민한 삶의 길’ ‘아홉 마리 강아지’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다 헤어졌을망정 ‘아홉 켤레’가 소중한 공동체를 이뤄 시인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
 
  옷에는 사회성도 들어 있다. 음식과 집은 남에게 보이지 않고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옷만은 금세 자신의 신분을 드러낸다.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고승(高僧)의 이야기다. 존경받는 법사가 남루한 옷을 입고 다회에 갔다가 문전에서 거절당했다. 자신이 누구라고 밝혀도 넣어주지 않았다. 결국 새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가자 이번에는 두말없이 넣어줬다. 다회에 들어간 법사는 음식이 나오자 자기 옷에 가져다 부었다. 사람들이 놀라 왜 그러냐 묻자 법사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들은 나를 초대한 것이 아니라 옷을 초대한 것이니 음식도 옷이 먹어야지.”
 
  이번에는 《흥부전》 이야기다. 흥부는 가난해서 아이들 옷을 각각 한 벌씩 입힐 수 없었다. 멍석에 아이들 수만큼 구멍을 뚫어 단체로 입혀야만 했다. 그래서 한 녀석이 뒷간에 가면 모두가 함께 움직여야 했다. 옷이 지닌 개인과 집단의 특성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우리의 고전이다.
 
 
  인간 문화의 두 動詞
 
수 조각보. 사진=초전섬유퀼트박물관
  인간의 문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두 동사(動詞)가 있다. ‘싸다’와 ‘넣다’이다.
 
  ‘나무 이파리로 물건을 싸고, 나무 등걸 파진 구멍에 물건을 넣었다.’
 
  이 ‘싸다’에서 보자기 문화가 생겼고, 이 ‘넣다’에서 상자의 문화가 생겼다.
 
  ‘싸는’ 행위야말로 한국의 ‘깁는’ 문화를 상징한다. 이 깁는 문화는 ‘조각보’와 ‘버려둬’의 문화와 연결된다.
 
  조각보는 우리 할머니, 어머니, 누나들의 바느질에서 재탄생했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자투리 천을 모았다가 색깔과 모양이 잘 어우러진 조각보로 변신한 것이다. 놀랍게도 지금 보아도 현대적인 구성미가 강하게 느껴진다. 헝겊 조각을 이어 만든 조각보는 서양에도 중국에도 없다고 한다.
 
지난 2013년 9월에 설치된 청주 국제 공예 비엔날레의 상징 작품인 대형 조각보 모습이다. 사진=조선DB
  조각이란 원래 작고 짧은 것을 뜻한다. 조각조각 잇는 건 연장한다는 장수(長壽)의 개념과 상통한다. 보자기는 명칭에서부터 ‘복(福)을 싼다’는 뜻이 강하다.
 
  백남준(白南準·1932~2006년)은 완전히 버린 것으로 세계를 제패한 사람이다. 백남준이 설치한 비디오 아트를 보면 전부 넝마(낡고 해어져서 입지 못하게 된 따위)를 주워다가, 혹은 버린 것을 가져다가 만들었다.
 
  이처럼 버릴 걸 그냥 둠으로써 새로운 자원으로 재탄생시키는 놀라운 재능이 우리 민족에게 있다.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버려둬’ 문화는 음식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버려두는 ‘5G’, 예컨대 누룽지-묵은지-우거지-콩비지-짠지다. 여기서 욕 문화, 막사발, 막춤 등 막 문화로까지 이어졌다. 싸이, BTS, 블랙핑크의 성공은 막 문화와 관련이 깊다.
 
 
  싸는 문화, 포대기 문화, 어부바 문화
 
한국의 전통 포대기. 포대기는 싸서 업어주는 도구로 한국인만이 쓴다.
  한국인은 태어나자마자 싸는 옷을 입는다. 포대기다. 포대기는 어부바 문화와 관련이 깊다. 어부바는 일종의 감탄사로 어린아이에게 등에 업히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집안이 떠나갈 듯 울며 보채던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엄마 등에 업히면 금세 잠이 든다. 신기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포대기는 싸서 업어주는 도구로 한국인 엄마의 필수품이다. 요즘 K-한류 바람을 타고 포대기가 해외로 수출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안을 때 포대기로 안아주고, 업을 때도 포대기로 업을 수 있다. 안겨도 업혀도 품는 문화고, 포대기를 둘러 등으로 업으면 어부바가 된다.
 
  포대기 하나로 깔고 덮고 안고 업는다. 포대기는 끈까지 달린 그야말로 ‘원 소스 멀티 유스’의 융통성 있는 디자인으로 되어 있다. 도둑이 들어올 때에는 ‘쓰고’ 와서, 나갈 때에는 ‘싸’ 가지고 나가는 보자기 문화의 연장이다.
 
  한국의 옛날 어머니들은 포대기 하나로 아기를 가슴에 품고 등에 업었다. 아기들은 낯선 세상 밖으로 나와도 이 포대기의, 한국 특유의 ‘품는’ 문화와 ‘업는’ 문화, 즉 양수와 다름없는 따스한 환경 속에서 지낸다. “안아줘도 깽깽, 업어줘도 깽깽, 어쩌라고 깽깽”이라고 애 업고 꾸짖듯이 부르던 동요가 생각난다.
 
  아이들은 철이 없다. 말이 통하지도, 힘이 통하지도 않는다. 우는 아이 앞에 장사 없다. 이 노래를 뒤집어 해석하면 아무리 깽깽 대던 아이라 해도 가슴에 안고 등에 업으면 금세 잠잠해지고 거짓말처럼 잠이 든다. 본래의 천사로 돌아간다. 우는 아이를 그치게 하는 방법은 딱 하나, 안아주고 업어주는 수밖에 없다.
 
  ‘업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업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약자가 강자를 업는 것은 어부바 문화가 아니다. 가마꾼이 가마 탄 사람을 메는 관계도 아니다. 이것은 이해관계에 불과하다. 업혀서 미안하고, 업어서 힘겨운 관계가 아니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어부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부바 문화의 원형은 모자(母子) 관계에서 생겨났다. 그것은 어른이 아이를 업어주는 관계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어주는 거다. 엄마가 아이를 업고, 장성한 자녀가 연로한 부모님을 업는다. 이는 생명에 대한 배려이자 상대에 대한 사랑이다.
 
  업어서 좋고 업혀서 좋다. 아이를 업는 건 보릿자루를 메고 다니는 것과 다르다. 보릿자루는 그저 무거운 짐일 뿐이다. 어부바 문화에는 사랑과 정(情)이 서로 오간다. 지배와 의존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 속에 업고 업히는 관계, 이것이 상생(相生)이다. 수렵·채집 시절부터 우리의 어부바 문화는 상생 관계였다.
 
한국인의 복식(服飾)과 수난사
 
  한국인의 옷자락도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밖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外勢]에 나부껴야만 했다.
 
  백제나 신라에서는 긴 내리닫이 옷을 입었으나, 당나라의 세력이 이 땅을 휩쓸고부터는 당풍(唐風)을 따라 상의(저고리)와 하의(치마)로 구별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또 원나라의 압박 밑에 있었던 고려 때의 의상은 ‘몽고 옷과 중국 옷을 본떠 남자의 바지 너비와 여자의 웃옷 소매가 각기 줄어들어 갔다’고 한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서면 이번엔 또 명나라의 복장이 지배한다. 중종 31년에는 조정에서 직접 명나라 옷을 그대로 모방하여 입으라고 하였고, 이미 세조 10년에는 광주 목사 김수(金修)가 ‘우리나라의 제도는 모두 중국 것을 모방하였으나 오직 부녀자의 수식(首飾)과 복색(服色)만이 고습을 따르고 있으므로… 집찬비(執饌婢)와 통사(通事)를 불러 궁중의 의녀(醫女)나 기생들에게 그(명나라) 복색과 장식을 가르쳐주어 보급토록 하자’고 상소문을 올렸었다.
 
  그런가 하면 중국 대륙의 바람이 서풍(西風)에 몰리기 시작하는 조선조 말기에 이르면, 조관(朝官)의 복색이 양복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으로 망명할 때는 벌써 일반인으로서도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한국인의 의복과 장신구는 한국인의 수난사(受難史)와 다를 것이 없다. 일제 시대의 ‘국민복’ ‘몸뻬’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86, 3판) 참조]
 
  보자기 이야기
 
  보자기와 가방은 동서양 문화의 상징이다. 보자기는 싸는 문화, 가방은 넣는 문화에서 파생되었다. 보자기 문화의 특성은 융통성이다. 혼합, 융합, 포용이다. 용도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가방에 붙어 다니는 동사는 ‘넣다’와 ‘메다’뿐이지만 보자기에는 이렇게 ‘싸다’ ‘메다’ ‘가리다’ ‘덮다’ ‘깔다’ ‘들다’ ‘매다’ ‘이다’ ‘차다’와 같이 가변적이고 복합적인 무수한 동사들이 따라다닌다.
 
  무엇보다도 예기치 않던 일이 일어날 때 이를테면 손이 부러지거나 풀숲의 독사에게 발을 물리게 되면 보자기는 금세 응급치료의 삼각대로 변신한다. 보자기는 가방처럼 어깨에만 메는 것이 아니라 옆구리에 끼기도 하고 등에 매기도 하며 허리에 차기도 하고 심지어 머리에 일 수도 있다. 어머니가 큰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장에 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보자기는 풀밭에 앉을 때에는 깔개가 되고, 햇살이 눈부실 때에는 유리창을 가리는 가리개가 되며, 지저분하게 어질러놓은 물건을 금세 덮어버리는 덮개가 되기도 한다. 보자기는 어떤 형태, 어떤 시스템이라도 거기에 적응하며 받아들인다. 둥근 것, 네모난 것, 긴 것, 짧은 것, 딱딱한 것, 부드러운 것, 상황에 따라 싼 보따리의 형태는 달라진다.
 
  우리가 어린 시절 그처럼 부끄러움을 느끼며 버리고 싶어 했던 그 보자기의 기호성(記號性)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 암호부터 서둘러 해독해보자.
 
  일본의 문헌들을 뒤져보면 보자기는 일본민의 독창적인 생활용기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보자기가 일본 고유의 문화는 아니다.
 
  고려 말기의 자주 무늬의 보자기가 지금도 전주 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궁전문헌인 《상방정례(尙方定例)》(1752)에 235 종류의 보자기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인이 보자기의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손꼽는 것은 오사카 사천왕사(四天王寺) 소장의 선면(扇面) 고사경의 밑그림이다.
 
  여성이 옷가지를 싼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 그러져 있다. 지금 재일동포들이 “사천왕사 왔소”의 행사를 벌이는 그 의미를 덮어두더라도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풍습은 일본의 경우 교토(京都) 근처의 오하라(大原)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보자기 문화의 원류(源流)는 한국이라는 뜻이다.
 
  원류라는 역사성만이 아니라 그 기능미나 형태에 있어서도 한국 보자기는 일본 것을 훨씬 앞서 있다. 한국의 보자기는 양끝에 끈이 달려 있어서 보자기의 생명인 신축성이 한결 높다. 큰 것을 쌀 때 그 끈이 있어 포용의 폭이 아주 넓다.
 
 
  가방과 가죽 책가방, 란도셀
 
일본에서 건너온 란도셀 가방. 사진=조선DB
  반면 가방은 문명의 상징이다. 서구의 근대문명을 상징하는 기차나 비행기 같은 것도 가방에 비하면 먼 지평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란도셀’이라 불리던 그 책가방에서 현대문명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옆에 할아버지의 상투처럼 남아 있는 책보가 있었던 덕이다.
 
  정말 책보를 옆에 끼고 다니는 아이들은 전근대에서 살고 있는 시골뜨기였고 멋진 가죽 란도셀을 메고 다니는 아이들은 대명천지의 도회지 아이였다. 국민학교 교실에서 배운 서구의 개화문명은 교과서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란도셀 자체 속에 있었다. 하루빨리 부끄러운 무명 보자기에서 벗어나는 것, 며칠을 굶더라도 란도셀을 사서 등에 메는 것, 그것이 학교에 다니는 의미였다. 가방이 이른바 근대화요, 개화요, 서구화요, 그리고 ‘모던’이라는 그 신비한 단어를 해독하는 사전이었고 꿈이었다. 주문 같은 구구단을 외우고 낯선 나라의 이름들이 적힌 세계지리부도를 넘길 때에도 란도셀의 그 신비한 가죽 냄새가 났다.
 
  정말 교실에서는 김칫국물이 흘러내린 얼룩진 무명 보자기가 하나둘 사라져 갔고 그만큼 빨갛고 까만 가죽 책가방이 늘어갔다. 아침과 함께 새 가방을 메고 온 아이들의 어깨는 떡 벌어져 있었고 그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미소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빛바랜 보자기를 들고 다니는 아이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뒤얽힌 눈물이 고여 있었다. 책가방 너머에는 서울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현해탄 건너 동경(東京)이, 그리고 간절한 그리움의 동경(憧憬)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도시 뒤에는 멀고 먼 서양나라 동화책 표지 같은 파리와 런던과 뉴욕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가방 체험과 좌절의 꿈
 
  란도셀을 멘 아이들은 정말 행복했을까.
 
  과연 책보와 함께 버리려고 했던 그 부끄러움이란 무엇이었던가. 이제 어른이 되고 허리가 구부러지는 나이가 되니, 그리고 초등학교 교실이 넓은 도시로 변하고 그 도시가 세계로 확산되고 나니 이러한 새 질문들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다. 사실 란도셀을 메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 자랑과 편리성을 얻은 대신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지금까지 숨겨왔거나 자기 자신을 속여 왔던 것이다.
 
  다시 책보를 가방으로 바꾸던 날을 회상해보자.
 
  우선 교실에 들어가 책보를 풀면 그것은 한 장의 보자기로 바뀐다. 책을 쌌던 보자기들은 알라딘의 램프에서 나온 거인처럼 필요로 하기 전까지는 공책과 책 밑에 깔려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란도셀은 보자기와는 아주 달랐다. 책을 꺼내도 넣을 때와 다름없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부피나 모양 모두 그대로였다. 책을 다 꺼냈는데도 텅 빈 란도셀은 눈치도 없이 가뜩이나 좁은 책상이나 의자를 점령하고는 자기의 주인을 구석으로 밀어냈다. 책가방은 주인만이 아니라 좁은 책상 사이를 다녀야 하는 아이들에게도 방해물이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밭에서 일하던 동네 아저씨가 뜻하지 않게 개구리참외 하나를 따주셔도 란도셀은 넣을 구석이 없었다. 책보 같으면 어떤 모양의 것이라도 금세 싸버릴 수가 있는데 말이다. 그것은 서구문명이, 근대문명이 우리에게 준 판도라의 상자였던 것이다.
 
  사실 가방과 보자기는 용기라는 물질이 아니라 문명의 의미 작용인 하나의 기호(記號)로 보는 게 맞다. 국민학교 교실에서는 시골뜨기와 ‘모던 보이’를 식별하는 기호로서 작용했던 가방과 보자기에 높은음자리표가 붙게 되면 전근대(프레 모던)에서 근대(모던)로, 근대에서 후기 근대(포스트 모던)로 굴절해 가는 시대적 차이를 나타내는 문화적 기호로 확대된다. 동시에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텍스트를 읽는 코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사로운 나의 경험만이 아니다. 라프카디오 헌(1850~1904년, 《신시내티 커머셜》 특파원. 훗날 《낯선 일본과의 만남》을 펴내 명성을 얻었다)이 일본에 처음 왔을 때 그의 손에는 커다란 두 개의 가방이 들려 있었다고 한다. 훗날 고이즈미 야쿠모라는 이름으로 귀화하고 사무라이 집안의 딸과도 결혼했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1867~ 1907년)가 최초로 서구여행을 하였을 때 세상 사람들의 눈을 끌었던 것도 바로 그 가방이었다고 전한다.
 
  일본은 물론 한국의 개화기 때 가방이라고 하는 것은 물건을 담는 도구라기보다는 서구문명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종의 매체였다. 가방을 든 사람과 보따리를 든 사람은 서양과 동양, 도시와 시골, 외래문화와 재래문화, 전근대성과 근대성이라는 이항(二項)대립의 기호 체계를 만들어냈다.
 
 
  보자기와 가방, 한복과 양복의 차이
 
  유럽에서 가방이 사용되고 있을 때 어째서 아시아에서는 보자기가 애용되었는가. 그것은 증기기관이나 면직기를 만들어내는 기술문명이라기보다는 사고 체계에 속하는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해야 좋을 것이다.
 
  동서양 문화의 차이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도구로서 보자기는 싸고 가방은 넣는다. 그러므로 가방과 보자기를 근본적으로 구별 짓는 차이점은 동사의 이항대립에 의해 밝힐 수 있다. 즉 넣다와 싸다의 두 행위의 차이이다. 인간은 무엇을 간수하고 운반하려고 할 때 두 가지 방법을 택한다. 무엇으로 싸든지 혹은 무엇에다 넣든지이다. 이 선택의 차이에서 문화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자면 서양의 근대 산업주의는 ‘넣기’ 패러다임의 산물이며 동양의 전통문화는 ‘싸기’ 패러다임으로 구축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리고 앞으로 오게 될 후기 산업 사회의 문명과 그 문화적 특성은 이 ‘싸기’로의 회귀선상 위에서 전개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측 불허의 포스트 모던 세계에서는 보자기형 문화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싸기’로의 회귀선상
 
양복과 한복. 꽃그림 병풍 뒤에 드리운 화문석으로 미뤄 볼 때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 온 지운영이 1884년 3월 서울 묘동에 낸 사진관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 속 인물은 서광범(왼쪽)과 김옥균.
  같은 옷이라 해도 서양 옷(양복)은 넣기 체계로 되어 있고 동양 옷(한복)은 싸기 체계로 되어 있다. 양복은 인간의 몸을 싸는 것이 아니다. 마치 가방처럼 인간의 몸을 그 안에 넣도록 되어 있다. 쉽게 말해서 서양 옷은 입체적인 자기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극단화하면 중세의 기사들이 입었던 갑옷과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우리 옷은 몸을 감싼다. 그래서 사람이 입을 때에만 입체성을 지닐 뿐 벗어버리면 보자기처럼 2차원의 평면으로 돌아가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양복은 걸어두고 한복은 개켜둔다.
 
  신발 역시 그렇다. 서양 구두는 발을 넣는 작은 상자와 같다. 안 들어가면 구둣주걱으로 발을 집어넣어야 한다. 서양 옷이나 구두의 치수가 정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짚신은 보자기처럼 발을 감싼다.
 
  근대에는 양복이 이겼다. 그러나 미래에는 한복 유형의 싸는 문화가 넣는 문화를 앞설 것이다. 단언컨대 보자기, 한복은 트랜스포머의 원조다. 현대 행정에서 일반적인 관료제 구조와는 달리, 융통적·적응적·혁신적 구조를 지닌 임시 조직을 애드호크라시(adhocracy)라고 칭한다. 애드호크라시의 21세기적 시스템이 바로 임시 조직, 태스크포스의 유용성이다. 보자기의 특성과 흡사하다.
 
  한국의 도시는 싸는 도시다. 서양의 도시는 넣는 도시다. 신(新)문명도시는 보자기형 도시여야 한다. 주상복합형 도시를 떠올려보라. 상상력을 발휘해 건축물의 소재를 다양화하고, 벽과 벽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신축성 있게 시대의 변화와 스피디한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구조다.
 
 
  21세기의 문익점 神話
 
고려 말기 학자이자 문신으로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씨를 가지고 돌아온 문익점. 사진=태서출판사
  컴퓨터의 출현으로 산업 시대의 획일적인 기성복과 달리 주문품과 같은 수준의 기계 제작이 가능한 옷의 패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예술과 기술의 분리가 산업 시대의 특성이었다면 탈산업 사회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시대를 이끌고 나가는 것은 예술이 기술과 다시 융합하고 기술생산을 예술창조의 방식으로 돌려놓는 새로운 힘인 것이다. 자동차는 달리기만 해서는 팔리지 않는 시대, 카메라가 찍히기만 하면 사랑을 받던 시대가 아닌 것이다.
 
  처음부터 옷의 가치는 옷감을 어떻게 의상으로 짓느냐 하는 패션 감각에 의해 주도되어 왔던 것이다. 문익점(文益漸·1329~1398년)의 신화(神話), 21세기의 문익점의 붓이 지닌 그 패러다임은 공상(工商)의 텍스트에 다시 사농(士農)의 창조적인 예술성과 재생산의 텍스트를 접목시키는 역할이다.
 
  글과 옷의 패러다임을 절묘하게 맞붙여놓은 것이 바로 문익점의 붓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맨 먼저 붓대를 잡아야 한다. ‘파악(把握)한다’는 말처럼 우리는 생각을 잡고 시상(詩想)을 잡는다. 창조의 원천은 이 붓대를 잡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이 선비문화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문익점의 붓대는 잡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목화씨를 넣는 장치로써,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씨를 감추는 비장의 공간으로 존재했다. 그러므로 붓대를 잡고 글을 쓰는 행위가 문익점의 붓대에서는 씨앗을 땅에 심는 행위로 나타난다.
 
  글씨는 문자 그대로 글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씨를 쓰는 흰 종이는 밭이 되고 글을 쓰는 행위는 밭갈이로 변한다. 그것이 필경(筆耕)이라는 말이다. 목화꽃이나 목화송이는 하나하나의 창조적인 어휘이다. 그리고 글 전체의 문장은 무명 짜기의 직조술이다. 영어로 ‘텍스트’라고 하면 ‘옷감’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문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처럼 글씨가 글이 되는 과정처럼 목화섬유는 무명이라는 직조물과 병렬 관계에 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옷감은 새로운 레토릭을 기다린다. 즉 옷 만들기이다. ‘문채(文彩)’라는 말이 있듯이 옷에는 무늬가 있으며 탁월한 문장력을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고 하듯이 옷감을 마르고 깁는 솜씨가 수사학의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재봉과 디자인 기술은 예술로서의 기술과 더욱 상생성을 지니며 하나의 옷을 만들어낸다.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다니는 벌거벗은 왕들의 행렬
 
  옷을 만들면 마지막 단계는 옷 입기다. 그것은 바로 글 읽기에 해당한다. 쓰기에서 읽기로 변환되는 것은 생산에서 소비로 전환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창조된 옷은 입기에 의해 완성된다. 문익점의 붓은 선비적 텍스트인 글쓰기와 글 읽기를 옷 만들기와 옷 입기로 대체함으로써 그 생산 기술이 지금까지 지배해 온 공업 기술의 다량 생산, 다량 소비의 패턴을 횡단하는 방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의 목화와 무명을 산출한 것은 공과 상이 아니라 선비의 붓이었다. 정보 사회와 탈산업 사회의 생산 양식은 선비의 붓에서 나왔다. 그것이 생산의 소프트화라는 것이다. 공산품을 글 쓰듯이 만드는 것, 옷 입듯이 소비하는 것, 이 창조의 원리, 글을 쓰는 원리의 밑바닥에는 정보가 정서로 이행하는 감동의 가치가 있다.
 
  기능에서 감동으로 옮겨가야 하는 새로운 생산과 소비 사회에서는 효율이 있느냐보다 그것이 나에게 감동을 주느냐 하는 마음의 가치를 더 요구하게 된다. 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감동을 나누는 것이며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깊은 교감을 창출하는 데 있다.
 
  예술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감동을 교환하는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드니까 산다.
 
  좋은 그림, 아름다운 음악은 일정한 수요의 지수가 없다. 베스트셀러가 나오면 갑자기 독서시장이 넓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1000권의 책을 공급해도 한 권의 책보다도 수요가 없을 수가 있다. 시장 자체가 소프트 시스템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프트 시스템과 정보 시스템 속에서 가장 위험한 옷은 다름 아닌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이 입은, 그 보이지 않는 옷이다. 옷이 완전히 옷감에서 소프트로 정보화하면 보이지 않는 실로 짠, 보이지 않는 옷감으로 만든,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다니는 벌거벗은 왕들의 행렬이 시작된다.
 
  정보의 조작과 패션화는 옷을 입는 주체를 소외시켜버리고 타인의 시선과 풍문을 낳게 할 우려가 있다. 그림값을 결정하고 그것이 시장에서 매매되는 유통은 실용성이나 기능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왕의 옷처럼 남들이 다 입었다고 하니 입은 것으로 보이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도 한다.
 
  매스미디어에서 나온 옷, 정보 시스템에서 만들어낸 가상현실의 실, 이런 것이 지배하는 그 위험성은 상업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선비의 붓이 공상을 지배하는 것, 공상의 텍스트를 선비의 텍스트로 탈구축시키는 것, 그래서 예술이 기술과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이 21세기의 문익점의 붓이 할 일이다.
 
 
  한국의 의상과 한국적 美
 
한 대형마트에서 아이들이 전통 물레를 통해 선조들의 실 뽑는 과정을 체험하고 있다. 사진=조선DB
  한국의 의상에는 분명히 한국적인 미가 있는 것 같다.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나라 옷은 북방적(北方的)인 폐쇄성과 남방적(南方的)인 개방성이 한데 어울려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옷이란 몸을 감추면서도 드러내놓는 데에 그 아름다움이 있다. 특히 여성의 옷이 그런 것이다. 중세의 서양 의상 ‘로브’나 일본의 ‘기모노’는 한국의 옷에 비하여 지나치게 복잡하고 부자연스러운 감을 준다. 옷이 인체의 선(線)을 죽이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옷으로 먼저 눈이 간다.
 
  그리하여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들에 있어서는 하얗게 드러낸 목덜미가 특이한 매력으로 되어 있고, ‘로브’를 입은 서양의 여인들에 있어서는 앞가슴을 내놓는 것이 또한 아름다움이다.
 
  즉 살결을 드러내놓은 육체미와 그것을 감싼 의상미는 서로 대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미를 강조시키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비키니 스타일’처럼 의상은 한낱 수영복 같은 것이 되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육체미를 살리려면 의상미를 죽여야 하고, 의상미를 살리려면 육체미를 죽여야 했던 것이 서양 의상의 비극성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 있어서는 의상미와 육체미가 각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융합되어 비로소 하나의 미를 꾸민다. 그 증거로서 서양 옷은 벗어 놓아도 의상 자체의 독립된 입체성(立體性)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치마는 벗으면 하나의 보자기와 다를 것이 없다. 몸에 감아야 비로소 입체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서양 옷은 ‘걸어두고’ 한국 옷은 ‘개어두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국의 의상은 자연스러움에 그 특징이 있다. 또 몸을 완전히 드러내놓는 것도 아니며 또한 완전히 감추어버린 것도 아니다. 얇은 모시 적삼으로 얼비치는 싱싱한 육체의 탄력이 바로 그런 것이다. 허리를 감고 흐르는 치마의 선이 그런 것이다.
 
  모시야 적삼 앞섶 안에
  연적 같은 저 젖 보라
  많이야 보고 가면 되나니
  손톱만치 보고 가소

 
  모를 심으며 부르는 농부들의 민요 가락을 보더라도 한국 옷의 육감성은 비키니족의 그것처럼 노골적인 것이 아니라 안타깝고 은근한 데에 있다. 한층 더 기막힌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저고리가 짧아 치마와 적삼 사이로 겨드랑이의 하얀 살결이 약간 드러나 보이는 수도 있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의 풍속도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열녀문(烈女門)이 마을 어귀마다 서 있던 조선 영조 시절 당대의 선비 이익(李瀷·1681~1763년)은 이렇게 말하며 긴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풍속이 변천해 감에 따라 여자의 의복이 많이 변했다. 소매는 꼭 끼도록 좁아졌고 저고리 뒷자락은 대단히 짧아졌다. 어떤 요태(妖態)를 꾸미기 위한 옷과 비슷하다. 나는 이것을 매우 좋지 않은 풍속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온 세상이 모두 따르고 있는 풍속인즉 또한 어쩔 도리가 없구나….”
 
  이 말은 흰 수염이 근엄하기 짝이 없는 톨스토이(1828~1910년)의 한숨과도 일맥상통한다. 그의 한숨을 들어보자.
 
  “여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남자의 육감(肉感)을 자극시키는 무서운 무기로 바꾸고 말았다. 육감을 도발시키는 행위, 오늘날의 여성들이 자신의 육체를 나타내 보이려는 그런 행위, 그것을 어째서 이 사회가 용서하고 있었는지, 세상 사람들이 깨닫고 놀랄 시대가 언젠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이것은 공원이나 길에 올가미를 놓아두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백방사 속곳 가랑이가 동남풍에 펄럭펄럭”
 
  옷을 입으면서도 육체를 드러내 보이려는 여성의 의지(意志)는 열녀 춘향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춘향이 밖에서 그네를 타지 않았다면, 이도령과 어떻게 사랑의 손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인가? 열두 폭 치마를 입는다 해도 그네는 여인들에게 거의 오늘날의 미니스커트와 다름없는 효과를 낸다.
 
  여인이 그네를 탄다는 것은 자신의 노출증을 합법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붉은 옷자락 펄럭펄럭, 백방사 속곳 가랑이가 동남풍에 펄럭펄럭, 박속같은 네 살결이 구름 속에 희끗희끗.”
 
  이렇게 그네를 타는 춘향을 야유하는 방자의 말을 음미해보더라도 그것은 명백한 일이다. 마치 100여 년 전 서구의 여자들이 비 오는 날이면 신바람이 났던 것과 같은 이치다.
 
  비가 오면 여인들은 장화를 신고 거리를 쏘다녔다. 비가 온다는 핑계로 그녀들은 수치심을 다치지 않고도 스커트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옷을 입고도 나체로 보이게 하라’는 이 옷의 제2 본능은 이익이나 톨스토이 같은 단순한 도학자(道學者)의 한숨만으로는 둑을 쌓아둘 수 없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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