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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미술가들

스캔들로 보는 미술사 12 / 슈퍼 솔메이트 - 달리와 갈라

글 : 추명희  작가  vino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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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였던 갈라, 달리 그림 보고 돈이 될 것임을 알고 달리 청혼 받아들여
⊙ 애정 결핍에 시달리던 달리 “갈라 통해 공포와 불능으로부터 해방된 듯한 기분 느꼈다”
⊙ 갈라, 작품 마감일이 다가오면 달리를 스튜디오에 가둬버려
⊙ 츄파춥스 사탕의 데이지 꽃무늬 로고도 달리의 작품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1904~1989년)
무의식을 탐구한 초현실주의 화가로 20세기 미술에 피카소만큼이나 큰 족적을 남겼다. 스페인 태생으로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입체주의를 실험하고 마드리드의 아방가르드 모임에 참가했으며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과 함께 큰 논란을 일으킨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를 공동 제작하기도 했다. 작품과 더불어 기벽으로도 유명했으며 꿈속 세계를 통한 무의식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것에 천착했다. 익숙한 물건이나 풍경을 비논리적이고 기괴한 모습으로 비틀기를 좋아했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최고의 즐거움을 체험한다. 바로 살바도르 달리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주는 기쁨이다. 나는 깜짝 놀라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 살바도르 달리는 오늘 또 어떤 경이로운 일을 벌일 것인가?”
 
  이름부터 몽환적인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1904~1989년). 그는 자신의 삶 자체를 예술로 만든 사람이었다. 세상이라는 런웨이에 단 한 명의 모델을 세워야 한다면 신(神)은 아마도 그를 선택하지 않을까.
 
  1936년 런던에서 열린 국제 초현실주의 전람회. ‘편집증, 라파엘 전파, 하포 마스, 그리고 유령들’이라는 괴상한 타이틀의 강연회에서 그는 구식 잠수복에 방열 모자가 달린 헬멧을 쓰고 한 손에는 당구채를 들고 한 손에는 러시아 사냥개 두 마리의 목줄을 쥔 채로 등장했다. 잠시 후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그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숨을 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숨을 쉬기 위해 낑낑대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도 관중은 그저 연기인 줄 알고 웃어댔다. 마침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챈 친구들이 망치로 헬멧의 볼트를 깨부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그때 무대 담당자가 멍키스패너를 가지고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그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 퍼포먼스가 될 뻔했다.
 
  달리는 파격적인 등장으로 유명했다. 프랑스 파리에 방문했을 때는 개미핥기 두 마리를 개처럼 줄에 묶어 거리를 산책했고 1960년대에는 거의 모든 공식 석상에 자신의 오셀롯(표범과 비슷한 고양잇과 동물)과 동행해서 “이것은 살아 있는 옵아트”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벨벳 소재 위에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무대의상 같은 옷을 즐겨 입었다. 달리의 모든 행동은 언제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이것은 모두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위대한 화가가 되려면 발기부전은 필수”
 
  초현실주의 거장(巨匠)으로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성적(性的) 욕망을 비틀고 해방시켰던 달리. 하지만 그가 보여준 이미지와는 다르게 정작 그는 정력(精力)하고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밖에서는 충동적이고 광적(狂的)인 행동으로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섰던 그이지만 안에서는 독재적인 아내에게 평생 의지하고 집착하며 순결(?)을 지켰다.
 
  그는 BBC에 출연해서 “나는 발기부전 환자입니다. 위대한 화가가 되려면 발기부전은 필수입니다”라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그의 콤플렉스는 뿌리가 매우 깊었다. 엄격한 가톨릭 신자였던 달리의 부모는 어린 아들이 육체적 쾌락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해 일부러 그의 주변에 성병(性病)으로 고통받는 남녀에 관한 책이나 끔찍한 사진들을 놓아두었다. 덕분에 성병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을 가지게 된 그는 성적 욕구가 일 때마다 자위행위로 대체했고 그 방법 외에는 오르가슴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달리의 부모가 만들어준 비극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살바도르 달리 이 쿠시는 변호사이자 공증인으로 지역에서 성공한 인물이었다. 살바도르 부부는 1901년에 첫아들을 낳고 살바도르라는 이름을 물려주었는데 안타깝게도 21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부부는 아홉 달 후 또 아들을 낳았고 이번에도 살바도르라는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두 번째 살바도르인 그는 다행히 건강하게 자랐지만 부부는 첫아이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달리에게 “너는 죽은 형의 환생(還生)”이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여섯 살 때부터 그림 그려
 
〈창가에 서 있는 소녀〉(1925)
달리가 스물한 살에 그린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작품. 여동생 안나 마리아를 모델로 그렸으며 이즈음 피카소의 작품과 달리의 작품은 매우 닮아 있다. 달리가 피카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1925년 전시회에서 이 작품을 본 전문가들은 모두 입을 모아 ‘달리는 장래가 매우 기대되는 화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엔 그 누구도 이후 달리의 작품 경향이 그처럼 현격하게 달라질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만성적인 애정 결핍에 시달렸던 달리는 후일 “나는 결코 죽은 형이 아니며 살아 있는 동생이라는 것을 항상 증명하고 싶었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괴상한 아이로 자라났고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계단에서 일부러 구르는가 하면 여동생의 머리를 장난으로 발로 차는 등 거친 행동을 일삼았다. 그리고 괴이하게도 화장실이 아닌 복도에다 배설물을 남기는 것을 좋아했고 학교에서도 지독한 문제아였다.
 
  어린 달리의 유일한 안식처는 그림이었다. 그가 여섯 살에 엽서에 유화물감으로 카탈루냐 지방의 풍경을 그린 것을 보면 재능이 넘쳐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열다섯 살 때 동네 극장에서 첫 번째 공식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1922년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마드리드로 떠났다. 그는 여동생 안나 마리아를 그린 〈창가에 서 있는 소녀〉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기괴한 행동과 눈에 띄는 의상으로도 유명했던 그는 졸업을 코앞에 두고 ‘선생을 비판하고 교내에서 학생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고 만다. 결정적인 행동은 “내가 면접장에 앉은 세 명의 교수보다 더 뛰어난데 왜 내가 그들에게 면접을 당해야 하느냐”며 졸업면접시험을 거부한 것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학교 체제에 염증을 느꼈고 교수들이 자신의 그림을 평가할 자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퇴학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퇴한 것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피카소·프로이트와 만나다
 
  1926년 달리는 자신의 실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넓은 세계를 찾아 파리로 떠났다. 그곳에서 우상(偶像)이었던 피카소를 만나 그의 화풍과 큐비즘의 영향을 받아들였고, 또 이 시기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탐독했다. 이때부터 그는 꿈과 정신의 세계에 대해 표현하게 된다. 당시 파리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지식인들이 기존 전통에 대한 분노와 부정, 허무주의를 표출한 다다이즘을 계승한 초현실주의는 그야말로 달리가 바라던 그 세계였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장면, 무의식의 세계를 기괴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의 전문 분야였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그룹은 리더였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을 필두로 대부분이 공산주의자였고 전체주의와 독재에 반대하고 있었다. 히틀러에게 사로잡혀 파시스트를 지지했던 그는 절대로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달리는 깊은 절망 속에서 스페인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그는 파리에서 유일하게 교우했던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를 해안가 마을 카다케스에 자리한 가족별장에 초대했고 엘뤼아르는 이에 흔쾌히 응했다. 아내와 딸 세실 그리고 초현실주의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와 그의 아내,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도 함께했다. 이렇게 1929년의 어느 날, 달리는 그의 운명적인 뮤즈, 갈라를 만나게 된다. 그녀가 바로 엘뤼아르의 아내였으니까.
 
 
  관음증 환자와 노출증 환자의 만남
 
밖에서는 충동적이고 광적인 행동으로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섰던 달리. 하지만 안에서는 독재적인 아내에게 평생 의지하고 집착하며 순결(?)을 지켰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갈라가 1982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5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달리는 “갈라를 통해 나는 내가 남자임을, 그동안의 공포와 불능으로부터 해방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며 갈라가 자신의 영혼을 치유했다고 고백했다.
  러시아 태생의 갈라는 열정적이고 탐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당시 그녀는 다다 운동의 리더 엘뤼아르의 뮤즈이자 아내로서의 역할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부부는 무절제한 생활로 점점 재정이 파탄 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달리보다 열 살가량 위였던 갈라는 처음엔 달리가 탱고 댄서 같다며 무시했다. 그러다가 달리의 그림을 본 순간 그녀는 돌변했다. 그녀는 달리의 놀라운 재능이 곧 어마어마한 부(富)를 창출할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빨리 간파했다.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음에도 특유의 화술과 색다른 매력으로 팜므파탈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갈라. 그녀는 그 명성에 걸맞게 달리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갈라에게 홀딱 빠진 달리는 거름에서 추출한 이상한 향수를 제조하는가 하면 피가 날 때까지 겨드랑이의 털을 미는 행동 등 괴상한 방법으로 그녀에게 구애를 했다. 가까운 사람들은 두 사람이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달리는 살갗이 닿는 것을 혐오하고 동성애적(同性愛的) 경향까지 있었던 반면, 갈라는 색정증(色情症) 환자에 가까울 정도로 성욕(性慾)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자석처럼 철썩 달라붙었고 이내 사람들은 “달리는 관음증(觀淫症) 환자이고 갈라는 노출증 환자라서 궁합이 잘 맞는다”고 말을 바꿨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두 사람은 정말이지 영혼의 단짝처럼 잘 맞았다.
 
 
  초현실주의적 사생활
 
  엘뤼아르는 갈라의 배신을 큰 타격 없이 받아들였다. 갈라가 여전히 그와 성관계를 즐겼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아무래도 엘뤼아르 역시 애정 관계가 복잡했기 때문이었을 게다. 엘뤼아르는 갈라와 결혼 생활 중에도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와 동거하며 동성애를 즐겼고 갈라와 이혼 후엔 바로 유명 모델이자 초현실주의 예술가, 마리아 벤츠와 재혼했다. 작품 세계를 넘어 사생활까지도 가히 초현실주의적인 셈이다.
 
  이러한 상황을 알 리 없는 달리의 아버지는 달리와 갈라의 결합이 불륜 관계라며 매우 반대했다. 이 와중에 달리가 프랑스 전시회 인터뷰에서 “나는 가끔 재미로 어머니의 초상화에 침을 뱉곤 한다”라는 충격적인 얘기를 밝히자 달리의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달리는 거절했고 분노한 아버지는 그의 상속권을 박탈함과 더불어 카다케스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달리와 갈라는 카다케스 인근의 포르트리가트 해변에 작은 오두막을 사들이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주변의 땅을 매입해 궁전 같은 빌라를 건축했다. 바로 이곳이 현재의 달리 미술관이다.
 
 
  일생의 작품, 〈기억의 지속〉
 
〈기억의 지속〉(1931)
살바도르 달리 하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작품. 〈기억의 지속〉은 달리의 대표작을 넘어 초현실주의 예술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익숙한 것들을 이해할 수 없는 문맥 속에 놓은 기묘하고 몽환적인 작품으로 평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1934년 이후로 현재까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하고 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갈라가 1982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5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달리는 “갈라를 통해 나는 내가 남자임을, 그동안의 공포와 불능으로부터 해방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며 갈라가 자신의 영혼을 치유했다고 고백했다. 부부는 여름마다 포르트리가트의 오두막에 머물렀다.
 
  1931년 여름, 이곳에서 달리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기억의 지속〉을 그리게 된다. 저녁 식사 후 물렁해진 카망베르 치즈를 보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른 그는 바로 스케치를 했다. 으스스하고 어두운 평원, 발가벗은 나무가 자라나는 식탁과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한 덩어리의 살 위에는 흐물거리는 회중시계들이 축축 걸쳐져 있는 기괴한 장면. 그는 작품을 그린 후 갈라에게 기억할 수 있는 이미지인지 아닌지를 물었고 갈라는 “아무도 이 이미지를 잊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달리는 〈기억의 지속〉이라는 제목을 달았고 이 작품을 메인으로 한 그해의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달리의 명성은 치솟았고 유행의 첨단을 걷는 상류층 사이에서 달리 부부는 가장 핫한 커플로 떠오르게 된다. 사교계의 여성들은 심지어 달리의 괴상한 말투까지 따라 했다.
 
 
  “달리는 갈라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거울을 보면서 등을 돌리고 있는 갈라〉 (1960)
이 작품에서 달리는 그가 젊은 시절에 그린 여동생 안나의 초상화에서 보여준 서정성과 순수함을 회복하고 있다. 같은 주제로 15년 전에 그린 〈나체인 나의 아내가 계단과 하늘을 받치는 기둥의 세 척추와 건물로 변해가는 자기의 육신을 관조하고 있다〉라는 작품의 황폐함과 비교하면 온화함은 물론 어떤 신비함마저 감돌고 있다.
  갈라는 달리의 매니저로서 그의 작품 전시와 일정 조정을 총괄했다. 전시 장소부터 작품 판매까지 모든 계약은 그녀의 손을 거쳐야만 성사되었다. 달리는 갈라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는데 주변인들이 “달리는 갈라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갈라에 대한 달리의 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고 그는 오직 그녀만을 위해 발레 공연을 기획하기도 했다. 달리는 갈라를 뮤즈로 많은 작품을 그렸고 누드화를 그릴 때는 아름답게 미화(美化)하곤 했다. 심지어 순결하고 성스러운 여신의 모습으로까지 둔갑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독일군이 파리로 진군하자 부부는 엄청난 양의 짐을 싸들고 뉴욕으로 건너갔다. 달리는 “그 독재자만큼 초현실주의적인 것은 없다”며 히틀러를 지지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통제 아래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달리 부부는 뉴욕과 캘리포니아를 오가며 살았고 기자들은 부부의 뒤를 마치 할리우드 유명인사를 쫓듯이 따라다녔다.
 
  부부는 저녁 파티 주최를 유난히 좋아했다. 이 만찬에 초대되는 사람들은 주제에 따라 의상을 맞춰 입어야 했고 특이하게도 만찬장에는 희귀 야생동물들이 돌아다녔다. 달리 부부의 사교 파티는 당시 가장 뛰어난 족보를 가진 귀족들까지 참석하는 수준으로 확장되었다. 그가 주최한 ‘마법의 숲에서 보내는 초현실주의자의 밤’ 파티에는 2000그루의 소나무, 할리우드에서 가장 큰 침대, 호랑이 새끼와 기린을 포함한 10마리의 동물, 첫 번째 코스를 서빙할 때 신을 1200켤레의 신발 등이 목록에 들어 있었다니 가히 그 규모와 분위기가 짐작된다.
 
  달리와 갈라는 물질적 풍요를 매우 즐겼다. 그들은 최고급 레스토랑에서만 식사를 했고 갈라는 샤넬 같은 명품 드레스만 입었다. 갈라는 그가 고액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작업에만 몰두하기를 원했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기이한 행동을 계속하길 바랐다.
 
  갈라는 의뢰받은 작품의 마감일이 다가오면 주저하지 않고 달리를 스튜디오에 가둬버렸고 돈을 벌기 위한 갖은 아이디어를 고안해냈다. 달리 역시 갈라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고 자신의 모든 활동이 돈과 직결되는 것에 대해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달러에 걸신들린’이란 뜻의 ‘아비다 달러스(Avida Dollars)’란 별명을 붙이는 등 풍자하며 즐겼다.
 
  그러다 1949년 스페인으로 돌아온 달리는 자신의 작품 스타일을 바꾸기 시작했다. 잉태한 성모, 예수의 십자가 처형, 최후의 만찬 등 종교적 주제들을 그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런 그의 모습에 당황했다. 특히나 갈라는 그가 잘 팔리는 기이한 작품이 아닌 다른 주제를 그리기 시작한 것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불행했던 말년
 
〈구운 베이컨 조각과 함께 있는 부드러운 자화상〉 (1941)
미국에 있는 동안 그린 작품. 구운 베이컨 조각은 당시 달리의 아침 식사 주메뉴였다. 자신의 천재성을 자기 조롱적인 희화화를 통해 비틀어서 드러내기를 즐겼던 그의 세계관이 드러나 있다. 이 시절 미국에서 달리의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갈라는 지칠 줄 모르는 남성 편력으로 달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달리는 갈라가 자신을 떠날까 봐 늘 두려움에 시달렸다. 1968년 달리는 갈라에게 지로나의 성(城)을 사주었고 갈라의 요구대로 그녀의 허락 없이는 성에 접근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갈라는 이 성에서 젊은 남자들과 마음껏 바람을 피웠고 자신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거의 실험에 가까운 성형수술을 수차례 감행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예수 역을 맡은 제프 팬홀트는 그녀가 가장 아끼는 연인이었는데, 갈라는 그에게 100만 달러짜리 저택을 사주었고 당시 둘의 나이 차이는 무려 43세에 달했다.
 
  달리는 자신의 영원한 뮤즈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작품 활동은 계속됐고 그 모습은 마치 고통을 지우려 발버둥 치는 모습과 다름없었다. 피게라스에 달리 미술관을 세우기 위한 재단을 창설하고 뉴욕에서 최초의 입체 작품을 전시하는 등 활동을 이어나갔다.
 
  1980년 76세가 된 달리는 중풍의 영향으로 붓을 잡기가 힘들 만큼 수전증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그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이 무렵 두 사람은 격한 부부싸움을 자주 했다. ‘달리가 갈라를 폭행하여 갈비뼈 두 개를 부러트렸다’ ‘골반을 두 조각 냈다’ 등등 설이 난무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갈라는 극도로 흥분하는 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신경안정제 바리움과 암페타민이라는 중추신경 자극제까지 투여했다. 하지만 이러한 약물 칵테일은 달리의 신경계에 나쁜 영향을 끼쳤고 그의 정신병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내 시계가 어디 있지?”
 
〈구체의 갈라테이아〉(1952)
한때 달리는 원자 이론에 심취했다. 아내이자 뮤즈인 갈라를 연속 배열된 일련의 구체를 통해 강력한 원근감을 형성하며 입체적으로 묘사했다.
  1982년 달리는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후작(侯爵) 작위를 받는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10일 갈라가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달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다. 그는 먹기를 거부하고 끝없이 흐느껴 울었다. 그 후 한동안 엄마 잃은 아이처럼 갈라만을 찾았다. 그러다 화재 사고로 전신의 20%가 넘는 화상(火傷)을 입었고 사람들은 모두 그가 죽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살아남았다. 그렇게 3년을 더 버티다가 1989년 1월 23일, 8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교회에서 치러졌으며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까지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의 시신은 자신의 미술관인 피게라스 미술관 지하에 안치되었다.
 
  달리의 유언은 “내 시계가 어디 있지?”였다. 시계는 그의 예술세계이자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오브제였다. 그가 마지막에 찾은 시계는 어쩌면 잃어버린 갈라였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낯설고 기괴한 그의 그림을 처음 접하고 약물중독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는 “난 마약 따위는 안 해, 내가 마약인걸”이라며 폭발하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고는 담뱃갑에 수염을 넣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수염 하실래요?”라고 장난을 치는 이 아티스트를 사람들이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초콜릿 광고모델로도 출연
 
세계적으로 유명한 막대사탕 츄파춥스의 데이지 꽃 그림 로고는 달리가 디자인한 것이다. 1969년 제과업자인 베르나트가 달리와 식사를 하면서 로고 제작을 부탁했고, 달리는 즉석에서 냅킨에 로고를 스케치해 주었다. 그가 “로고가 꼭 포장지 상단에 위치해야 한다”고 섬세하게 코치한 덕분에 스페인 지방의 평범한 막대사탕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탕이 되었다.
  달리의 직업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는 연극과 오페라 무대장치를 디자인하고 〈안달루시아의 개〉라는 초현실주의 영화도 공동 제작했다. 디즈니사와 컬래버로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고 보석과 가구 제품을 디자인했으며 청바지 브랜드 갭 광고 디자인에, 초콜릿 광고모델로 출연한 적도 있다. 1950년에는 크리스찬 디올과 함께 미래지향적인 패션을 소개했고 타로카드도 제작했으며 《갈라의 만찬들(Les Diners de Gala)》이라는 요리책을 집필한 적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츄파춥스 사탕의 데이지 꽃무늬 로고도 그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다. 달리가 “로고가 꼭 포장지 상단에 위치해야 한다”고 섬세하게 코치한 덕분에 스페인 지방의 평범한 막대사탕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탕이 되었다.
 
  갑자기 그보다 450년 전에 먼저 활약했던 만능 엔터테이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떠오른다. 달리의 부모는 그가 먼저 태어난 형의 환생이라고 믿었다지만 아마도 그는 다빈치의 환생이 아니었을까. 천재적인 아이디어와 감각 그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취향까지. 물론 사기꾼 기질은 달리가 한 수 위이지만.
 
 
  오노 요코에게 가짜 수염 팔아
 
  평생 장난꾸러기였던 그가 오노 요코에게 사기를 친 일화가 재미있다. 달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존 레넌의 부인이자 기괴한 행동을 하는 화가로 잘나가던 요코가 그의 콧수염 한쪽을 당시 돈 1000만원에 사겠다고 제안을 했다. 달리는 평소 요코가 마녀(魔女) 같다고 여겼기에 그녀가 자신의 수염을 가져가면 분명히 마법을 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소중한 수염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금(巨金)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일. 그는 마당에서 마른 잔디 한 줄기를 잘라다 물감으로 색칠을 한 후 멋진 상자에 담아서 요코에게 보냈고 요코는 감쪽같이 속아 돈을 보냈다고 한다. 후에 사기당한 사실을 알게 된 요코가 그 비싼 수염을 어떻게 처리했을지 무척 궁금해진다.
 

  다빈치는 사기꾼 같은 양아들 살라이 때문에 평생 골치를 썩었고 달리도 갈라의 사치와 불륜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가 달리에게 영원한 솔메이트였다는 사실이다. 달리는 그녀에게서 마치 포대기에 싸여 등에 업힌 듯한 근원적 편안함을 느낀 것 같다. 서양 사람인 그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은 없겠지만 동물적 감각으로 전해지는 태곳적의 편안함 같은 안식이랄까. 업어준다는 것은 존재의 무게를 다 받아주는 행동이다. 어쩌면 달리에게 있어 갈라의 존재는 그가 그토록 찾았던 영혼의 엄마였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갈라를 욕해도 상관없어. 그녀는 나의 유일한 사람이고, 나의 고독을 없애줄 유일한 인간이야. 그녀가 있는 한 나는 고독하지 않아.”
 
  이런 그의 독백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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