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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⑮ 한국인의 문화적 얼굴

인간의 얼굴은 문화의 얼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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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은 생물학적 유전자의 증명서가 아니라 문화… 文身 역시 문화의 산물
⊙ 이름은 내 것이지만 남이 나를 부르기 위해 존재. 얼굴도 마찬가지
⊙ ‘한국적 무표정’이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표정이 많지 않아… ‘化粧’도 문화이자 표정
⊙ 한국인의 생존력은 남하고 싸워서 이기는 생존력 아니라 척박함 견뎌내는 생존력… 소나무와 같아
⊙ 문화인들은 단것보다 쓴 걸 먹어… 씀바귀, 칡 등 한국인은 쓴 음식 좋아하는 가장 문화화된 민족

李御寧(1933~2022)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야구장 관중석에서 만난 한국인의 얼굴. 저마다의 표정이 살아 있다. 사진=조선DB
  얼굴은 생물학적 유전자의 증명서가 아닙니다. 얼굴은 문화입니다. 저는 문화를 알려면 얼굴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태어난 대로 살지 않습니다. 태어난 얼굴대로도 살지 않는 세상이죠. 성형수술이 성행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타고 태어났지만 우리는 교육에 의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태어난 얼굴에 문화라는 옷을 입힙니다.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짐승들이 그렇습니다. 인간이기에 창조적으로 삽니다. 주어진 얼굴을 원하는 대로 고칩니다. 다만 그것을 기계의 힘을 빌려 고치느냐, 영혼과 마음의 교양으로 고치느냐의 문제가 따르지만 말이죠.
 
  링컨은 “사람의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민얼굴은 유전자 탓을 할 수 있지만 마흔이 지나고 나면 타고난 얼굴, 부모님이 주신 얼굴, 유전자의 얼굴이 아니라 문화의 얼굴, 역사의 얼굴이 되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해볼까요? 세상에서 제일 못 생긴 사람은 문헌기록상으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를 모함하는 적들은 소크라테스 제자들에게 이렇게 조롱했다고 하죠.
 
  “얼굴은 인간의 마음이 투영되는데 너희 선생님의 얼굴을 봐라. 그는 분명 범죄자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그들과 싸우고 나서 소크라테스를 찾아가니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그래. 내가 타고 태어난 얼굴은 범죄자의 얼굴이야. 그런데 수없이 많은 노력을 통해 나는 그 얼굴을 극복했다. 그래서 너희에게 교육을 하고 철학을 연구하는 거다. 맞다. 난 범죄자의 얼굴로 태어났지만 지금은 그걸 완전히 극복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더 자랑스러운 것이다.”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피부색은 3가지 색으로 분류되는데, 이 기본의 바탕에 ‘문화’의 문(文)이 결합되게 됩니다. 민낯인 자연에 인간의 다양한 문화를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문자가 그러하듯 문신(文身) 역시 그 문화의 산물입니다. 문화의 ‘문’이라는 말은 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 페이스페인팅처럼 얼굴에 칠하는 것을 뜻해요. 문신에는 고통이 따라요. 문화의 뜻 이전에 아픔이 있었다는 것이죠. 옛날 인디언들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과 몸에 무언가를 붙이고 그리고 칠하고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바로 문화입니다.
 
  〈‘바탕이 외양을 능가하면 야해지고(野), 외양이 바탕을 능가하여 문이 질을 이기면 사(史)해진다. 문질이 잘 조화를 이룬 다음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子曰 質勝文則野,勝質文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공자, 《논어》 옹야편(論語雍也) 제68

 
  자연의 얼굴인 민얼굴은 ‘질’, 화장한 얼굴은 ‘문’, 그래서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이 말은 무늬와 바탕이 빛나다라는 뜻으로 형식과 내용이 잘 어우러져 조화로운 글이나 성품과 몸가짐이 바른 사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질’로 가려는 마음과 ‘문’으로 가려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내 얼굴이 생겼고 한국인의 얼굴이 생기는 것입니다.
 
 
  유전적 얼굴이 아닌 문화의 얼굴
 
한국인의 얼굴, 하회탈. 사진=안동시
  유전자라는 것은 우리에게 새겨진 하나의 도장과도 같습니다. 유전적인 우리의 얼굴에는 DNA라는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유전적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의 얼굴도 있습니다. 그래서 생물학적인 유전자만이 아니라 수십, 수백 년을 거쳐 오면서 생성된 문화의 얼굴을 알아야 해요. 얼굴을 문화적으로 해석한다고 할 때 그 시작은 아마도 아프리카의 가면(假面)이 아닐까 싶어요.
 
  얼굴이라는 것은 내가 보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 남이 보라고 주어진 겁니다. 내 얼굴이지만 내가 볼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가면을 쓴다면 남 역시도 내 얼굴을 볼 수 없어요. 내 표정이 수시로 바뀌지만 가면의 표정은 바뀌지 않습니다.
 
  가면이 등장했던 것은 신(神)을 향한 종교의식에서였어요. 성(聖)스러운 의식에서 인간 본연의 얼굴은 가려집니다. 또 춤을 출 때 가면을 사용했어요.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얼굴을 봅니다. 얼굴에 집중하다 보면 사람의 몸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나 가면을 쓰면 어떤가요? 춤을 출 때 얼굴을 가리면 얼굴이 아닌 몸으로 소통을 하게 되죠. 발레리나들이 춤을 출 때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는 것과 같아요.
 
  가면을 쓰지는 않지만 얼굴의 모든 표정을 지워 중립적인 얼굴을 함으로써 몸으로의 집중을 유인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끝나고, 감성이 끝나고, 표정이 끝났을 때는 가면을 안 써도 가면 쓴 것과 같아지는 것이죠. 몸으로 모든 것을 말하게 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안면몰수’하고 살아간다는 말이 있는 겁니다. 이때 나의 인격(人格)은 사라집니다.
 
  우리나라에 ‘말에 얽어도 장에 가고 굶어도 떡 해 먹는다’는 말이 있어요. 얽어도 상관없이 장에 가는데 평등한 얼굴이라는 게 가면을 쓰면 다 평등해지는 것입니다.
 
 
  이름으로서의 얼굴
 
  이름은 내 것이지만 남이 나를 부르기 위해 존재합니다. 남을 위한 것이죠.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어요. 인간은 거울을 통해 제3자의 시선을 빌려 자아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요? 바로 나 자신의 것이죠. 자신의 것이지만 자신은 못 보는 것, 주인은 나지만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인 것, 그것이 얼굴입니다. 외국으로 여행을 떠날 때 여권 속 이름과 사진이 나를 증명하듯 내가 나를 증명하는 것은 내 얼굴과 내 이름입니다. 이름하고 얼굴은 같은 것이죠.
 
  이름이라는 것이 내가 부르라 붙여진 것이 아니라 남이 나를 부르라 붙여진 것이듯, 얼굴 역시 내가 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나를 보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얼굴이나 이름은 모두 나 자신의 것이지만 남을 위해 존재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항상 남들에게 비친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장 오래된 거울은 수면(水面)입니다.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자기 인식의 첫걸음이었습니다. 이 거울에 의해 처음으로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수단을 얻었어요. 정체성의 형성은 ‘거울효과(Mirror Effect)’와 연관이 있습니다.
 
  거울효과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이 있어요. 사회과학자 아서 비먼의 연구팀이 핼러윈데이에 실시한 실험인데, 한 실험조교가 아이들에게 막대사탕을 하나씩만 가져가라고 말하고 자리를 피합니다.
 
  그 결과, 조교의 말을 어기고 사탕 2개 이상을 가져간 아이의 비율이 33.7%였다고 해요. 다음에는 사탕 바구니 앞에 큰 거울을 설치하고 똑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2개 이상을 가져간 아이들의 비율이 8.9%로 줄었다고 하지요.
 
  휴지를 버릴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46%가 휴지를 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기 이미지를 본 경우 24%만이 버렸다고 해요. 벽에 단순히 눈(目) 그림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어요. 놀랍지 않나요?
 
 
  동서양 문화와 얼굴
 
동서양 아이들의 우는 모습이다. 우리나라 아이가 콧물, 눈물, 침까지 흘리며 가장 화끈하게 운다.
  우는 아이들을 살펴봅시다. 누가 제일 화끈하게 우나요? 누가 봐도 콧물, 눈물, 침까지 흘리며 우는 아이들은 우리나라 아이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황하론’은 황색인종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죠.
 
  그러나 한국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6·25전쟁의 폐허더미 위에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고, 눈부신 근대화의 경제발전과 함께 지금 전 세계 안 퍼진 데가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밟히고 밟히며 가장 치열하게 격렬하게 살아온 민족이 우리 민족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 선조들은 또 누굽니까? 영하 70도의 추위를 알몸으로 격파한 ‘신(新)몽골로이드’입니다.
 
  서양은 대체로 어릴 때부터 대부분 소프트한 유동식을 먹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딱딱한 걸 먹죠. 딱딱한 걸 먹기 때문에 세계에서 이빨이 가장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드라큘라 이야기가 서양의 대표 공포물이 되는 것은 서양인의 이빨의 특징은 뾰족하고 송곳니가 발달했기 때문이죠. 이와 반대로 우리는 어금니가 발달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씹기보다는 갑니다. ‘그라인딩’입니다. 서양의 ‘츄잉’과는 반대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추위를 견뎌온 것 때문만이 아니라 이렇게 맷돌처럼 그라인딩 하는 식(食)문화 때문에 턱이 발달하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하나의 설(說)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경우는 대부분 옆얼굴을 그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옆얼굴을 거의 그리지 않고 정면에서 바라보는 얼굴을 그립니다. 예부터 내려오는 우리 선조들의 초상화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어요.
 
18세기 윤두서의 〈자화상〉(종이담채, 38.5x20.5cm, 개인 소장, 국보 240호)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1503).
  윤두서(尹斗緖·1668~1715년)의 자화상을 보더라도 분명하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얼굴은 대칭적이라 좌우가 같아요. 그런데 〈모나리자〉를 비롯해 서양인의 얼굴은 좌우가 다릅니다.
 
  〈모나리자〉의 얼굴 역시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쪽 눈이 약간 위로 올라가 있어요. 그런데 보통의 경우 우리는 양쪽 눈이 똑같습니다. 우리의 얼굴은 좌우대칭형에 가깝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서양 사람들은 얼굴이 좌우 짝짝이인 경우가 많지만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좌우가 똑같아요. 이것은 유전적 요인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요인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한국 사람들은 한쪽 눈을 찡그리는 윙크에 익숙하지 않지만 서양 문화에서 윙크는 하나의 상징적 문화코드입니다. 또한 서양인들의 얼굴 표정은 그들의 감정표현만큼 다양하죠.
 
  그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국적 무표정’이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표정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희로애락을 겉으로 드러내는 문화가 아니었던 것이죠. 웃어도 박장대소의 웃음보다는 멋쩍어 웃는 웃음이 많아요. ‘오리엔탈 스마일’이라는 것이 그런 웃음입니다.
 
 
  얼굴의 문화적 삭제
 
우리나라 옛 여성들은 바깥 출입을 할 때 쓰개로 얼굴을 가렸다. 이슬람에서는 베일을 쓴다. 또 중국 여성은 결혼 후 전족(纏足)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가면은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영웅적인 탈입니다. 영화 〈배트맨〉에 나오는 가면이 아마 대표적 사례일 겁니다. 둘째, 억압적인 탈입니다. 과거 일본 사람은 결혼을 하면 아내의 눈썹을 깎았다고 해요.
 
  “너는 내 여자이고, 너의 얼굴은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다.”
 
  한마디로 억압의 발현이었어요. 변형 가능한 것,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얼굴에서는 머리칼과 눈썹이며 타인에 의한 강제적, 문화적인 삭제가 일어날 수 있죠.
 
  동양인에게 눈썹은 쉽게 내줄 수 있는 것인 반면 코는 얼굴의 중심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코가 납작해졌다” “코가 삐뚤어져라 마신다” “코 베어 가는 곳”이라는 표현들은 얼굴 중에서 그만큼 코가 중요하다는 해석도 됩니다. 그래서 한자로 ‘자기(自己)’를 표현할 때의 ‘스스로 자’는 원래 ‘코 자’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어린아이가 울며 보챌 때 “호랑이 온다”고 겁을 주었다고 하죠. 또 떼쓰는 아이에게 “에비~”라고 혼을 냈다고 합니다. ‘에비’의 어원을 두고 몇몇 학자는 ‘귀 이(耳)’와 ‘코 비(鼻)’자를 합성한 ‘이비’에서 유래됐다는 겁니다. ‘이비’가 ‘에비’ ‘어비’ ‘에비야’ 등으로 변형됐다고 해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전공을 부풀리려고 우리 백성들의 코와 귀를 잘라 ‘귀무덤’ ‘코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일본 교토 인근에는 지금도 12만여 명의 ‘귀무덤’이 있는데 처음의 이름은 ‘코무덤’이었다고 하죠. 스스로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귀무덤’으로 바꿔 불렀다고 해요.
 
  코뿐만 아니라 이[齒]도 중요한데 일본의 옛 그림 중에 남편이 아내의 얼굴에 도구를 들이대고 이를 뽑는 장면이 있어요. 일본인들은 결혼을 하면 아내의 눈썹을 미는 데 그치지 않고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이를 뽑고 남은 이를 새까맣게 만들었다고 해요.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드는 것이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여자들은 밖에 나갈 때 항상 ‘너울’ ‘장옷’ ‘쓰개치마’ 등을 쓰고 얼굴을 가렸어요. 대비나 대왕대비 역시 남자 신하들을 대할 때 발을 드리워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이슬람권 여성들은 ‘베일’을 씁니다. 이슬람 국가마다 ‘히잡’ ‘차도르’ ‘아바야’ ‘부르카’ 등 그 이름은 다르지만 한마디로 ‘얼굴 가리개’입니다.
 
 
  종교에서의 얼굴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의 모습이다.
  그 나라 문화를 이해하는 데 종교적인 요인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얼굴 역시 서양 문화의 발현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예수님의 머리칼은 금발입니다. 그러나 당대 살았던 사람들의 시체를 발굴해보면 골격 등이 지금의 예수님 모습과 아주 다르다고 해요.
 
  불교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불상(佛像)은 희랍 문화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불상 얼굴에 서구적인 문화가 스며 있어요. ‘십일면관음상’이나 뒤에 서 있는 보살상들을 보면 전부 서구 미(美)의 기준인 팔등신(八等身)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보살은 여자지만 인도에서 보살은 원래 남자였다고 해요. 문화적 틀에 의해 새롭게 탄생된 것이죠. 이 모든 것이 유전적 요인이 아니라 문화적 요인에 의해 변형되었어요.
 
  안정복(安鼎福·1712~1791년)이 쓴 《여용국전(女容國傳)》에 ‘여자가 화장을 할 때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처럼 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자가 화장을 게을리하면 머리는 이로 뒤덮이고, 얼굴에서는 때가 나오고, 이빨은 누렇게 되어 입에선 냄새가 나고 얼굴의 모든 곳이 일그러진다는 겁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다는 일종의 우화(寓話)예요. 왕이 나라 다스리기를 게을리하자 대야장군(얼굴을 씻는 ‘대야’를 의인화시킨 장군) 등 화장품(장군)들이 전부 일어나 물리치니 여용국(여자의 얼굴)이 평화를 찾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화장(化粧)’도 문화입니다. 국가를 다스리는 것처럼 깨끗하게 가꾸고 잘 다스려야 한다는 유교적인 문화 특성이 반영되어 있어요.
 
  동양에서는 아름다운 여자를 자연의 ‘꽃’으로 비유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해요.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은 양귀비(楊貴妃)를 ‘해어화(解語花)’라 불렀습니다. 현종과 양귀비의 행렬이 연꽃을 감상하기 위해 태액지에 이르렀어요. 현종이 주위를 돌아보면서 말합니다.
 
  “여기 있는 연꽃도 해어화보다는 아름답지 않구나.”
 
  연꽃이 아무리 아름다운들 말을 못 하는데 양귀비는 꽃은 꽃이되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입니다. 단지 화장을 해서 나타나는 자연적 미의 기준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인간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문화적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것이죠. 해어화는 ‘말을 알아듣는 꽃’으로 후에는 미인(美人)을 뜻하게 되었어요.
 
  서양의 철학자 볼테르는 “처음에 미인을 꽃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지만, 두 번째로 같은 말을 한 인간은 바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의 얼굴은 역사 속에서, 사회 속에서 역사성, 사회성이 반영됨으로써 변형되고 달라진다는 겁니다.
 
  가령 전쟁이 일었을 때 화장하지 못하게 하는 문화가 있어요. 일본에서는 ‘칠칠금언’이라 해서 7월 7일에는 얼굴에 절대로 화장을 못 하게 하는 문화도 존재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동서양 문화의 차이입니다. 문화를 억압하는 쪽과 인간의 본성을 북돋우는 쪽으로 나뉩니다. 억제하고 금욕함으로써 사회적인 힘을 만들려는 문화와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고 격려하며 발전해온 문화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문화가 다르니 화장하는 방법 역시도 달랐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들의 화장을 좋지 않게 보고 사치로 보는 시선도 있어요. 다만, 옛 문인 정철(鄭澈·1536~1593년) 선생은 여자들의 화장에 부정적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것은 남자들을 위한 것이고, 그것은 여자들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또 다른 표현이라고 이야기했어요.
 
  한국 남자들은 대체로 여자들이 화장을 진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표정이 많지 않다고 했는데 화장도 일종의 표정이라면 그 표정은 희로애락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는 것을 선호한 듯해요. 자신이 보는 것은 괜찮지만 다른 남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싫은 게 대체적인 남자들의 심리인 것 같아요.
 
 
  폼페이 부부의 초상화
 
AD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는 잿더미가 되었다. 훗날 빵가게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한 어느 부부의 초상화다.
  폼페이는 AD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18시간 만에 증발된 도시입니다. 화산으로 인해 순식간에 도시는 잿더미에 파묻히고 산 사람도 그대로 매몰되었어요. 그곳에서 빵가게라고 생각되는 집에서 부부의 초상이 발굴되었습니다. 눈이나 얼굴의 생김새가 동양인에 참 가까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실제 그리스 사람들은 동방 쪽에 가까웠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인들을 서양인이라고 인식하게 된 데에는 르네상스 이후 문명의 중심이라 여겨졌던 그리스·로마인들을 백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식적 작용이 있었다고 보여요.
 
  그림의 표정을 보면 영웅적인 권력자의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활한 장사꾼의 얼굴도 아닙니다. 여자의 오른손에는 펜이 들려 있고, 왼손에는 석판이 있어요. 남자는 종이를 들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사람임이 분명해요. 발굴된 곳이 빵가게여서인지 이들은 빵가게 주인 부부라고 알려졌지만 최근에 다시 논의된 바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당대의 지식인이었을 겁니다. 눈을 보세요. 눈빛 안에 내면에서 우러나는 깊이가 있어요.
 
  한국인의 얼굴들을 보면 이런 비슷한 눈빛들을 볼 수 있습니다. 중국과 한국은 모두 무관(武官)이 아닌 문관(文官)이 지배하던 나라입니다. 칼을 쥐는 무의 지배와 펜과 종이를 쥔 문의 지배하에서의 얼굴은 그 표정부터 달라요. 그 문화가 그 시대 사람의 얼굴과 눈빛에서 드러납니다.
 
  한국인이 갖는 문화적 특성 중의 하나는 평화주의자라는 것입니다. 경쟁력은 약하지만 생존력은 강합니다. 비근한 예로 소나무를 들 수 있어요. 소나무는 떡갈나무, 활엽수하고 싸우면 쫓겨납니다. 죽는 것이죠. 그러나 활엽수가 절대 갈 수 없는 곳, 황토지이고 낭떠러지와 같은 곳에서 소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살아요. 낙락장송(落落長松)이라는 말이 이래서 생긴 겁니다. 활엽수가 살지 못하는 땅에서 소나무가 살 수 있는 것은 그 생명력 덕분입니다.
 
 
  한국인, 경쟁력은 약하나 생존력은 강해
 
  한국 사람들은 사막에 떨어져도 산다고 하죠.
 
  “너희는 좋은 데 가서 살아라. 나는 너희가 못 사는 곳에서 너희가 없는 새로운 터전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나무를 보면 눈물이 납니다. 우리 조상들을 보는 것 같아서요. 독하게 싸우고 버티고 살아남은…. 왜 양보를 해서 남들 못 사는 그 척박한 땅에 가서 사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평화주의자는 좋은 것을 가지고 경쟁하지 않고 스스로 남이 거들떠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만의 삶을 일구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이 그렇습니다. 경쟁력은 약하지만 생존력은 강하죠.
 
  지구상에 가장 오래 살아남은 바퀴벌레를 봐요. 몇 달을 굶어도 끄떡없습니다. 죽는 순간에도 그냥 죽지 않고 알을 퍼뜨립니다. 죽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것이죠. 생긴 것도 납작하게 생겨서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방사능에도 끄떡없다고 하죠. 이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곤충이 바퀴벌레입니다. 먹을 게 없는 우주에서도 살 수 있는 게 바퀴벌레예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2013)에서도 바퀴벌레를 기르더군요.
 

  모든 동물이 추워지면 따뜻한 남쪽을 향해 떠나는데 펭귄은 반대로 가장 추운 북극으로 갑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혹독한 추위를 향해 새끼를 낳으러 가는 것이죠. 아무것도 생존할 수 없는 그곳이, 알을 낳아도 훔쳐 먹는 경쟁자가 없는 그곳이 새끼를 낳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펭귄의 어미는 그 추위를 버텨냅니다.
 
  풍뎅이는 또 어떠한가요? 산불이 나는 것을 10리 밖, 20리 밖에서도 알아차리는 곤충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기계에서도 잡을 수 없는 산불을 감지해냅니다. 가장 먼저 산불을 인지한다고 하죠. 더욱 신기한 것은 모든 동물이 산불이 나면 산불을 피해 도망가는데 풍뎅이는 산불이 난 곳으로 들어가 거기에 알을 낳습니다.
 
  한국인의 생존력은 남하고 싸워서 뺏고 이기는 경쟁에서 오는 생존력이 아닙니다. 싸우지 않고 남이 못 사는 데 척박함 속으로 들어가서 견뎌내는 생존력이죠.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호기심, 싸우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력이 강한 민족. 혹독한 영하 70도의 추위를 이겨내고 이곳까지 내려온 우리 선조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혹독한 땅 시베리아에서 왔지만 일본과 같이 무를 숭상한 무의 나라는 아니었어요. 날카롭고 무서워 보이며 표독한 느낌의 얼굴이 아니라 유순하고 뭔가 깊이 생각하는 내면적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리’자 돌림의 한국, 머리 허리 다리
 
  우리의 얼굴은 조상님이 주신 것이요, 결국 유전자를 통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몸을 이야기할 때 머리, 그다음 허리, 그다음에 다리로 모두 두 음절로 된 ‘리’자 돌림이죠. 영어로 하면 헤드(Head), 웨이스트(Waist), 레그(Leg)로 모두 다릅니다. 머리, 허리, 다리라는 말 속에 이미 내 몸은 상중하 3부분으로 나뉘어 있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상부에 있는 머리, 바로 얼굴입니다. 우리가 왜 하고 많은 신체 부위 중에 얼굴 찾기를 시작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이 얼굴 안에는 우리의 생물학적 DNA가 담겨 있고, 문화와 역사가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인들은 단것보다 쓴 걸 먹죠. 증거를 하나 대볼까요? 어린아이들은 쓴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짐승들도 쓴 거를 못 먹기 때문에 나무 이파리들이 짐승들의 식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은 성장과 함께 문화화되면 쓴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문명인들이 먹는 기호식품들의 대부분은 쓴 것들입니다. 커피, 홍차, 맥주, 초콜릿….
 
  개인적인 기억이 하나 있어요. 옛날 다방에 가보면 시골에서 온 사람들은 커피에 설탕을 넣어 먹습니다. 그것도 설탕이 공짜였던 때라 아예 비벼 먹는다고 할 만큼 막 넣어 마십니다. 하지만 서울 사람들은 쓴 커피를 그냥 마시죠. 설탕을 넣으려고 하면 “노 슈거, 노 밀크(No Sugar, No milk)”라며 손사래를 칩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세련되고 고상하여 부러웠던 기억이 있어요.
 
  이게 문화라는 겁니다. 쓴 것을 좋아하는 민족은 반은 농담 삼아 DNA로부터 영향을 덜 받은 교육받은 민족입니다. 짐승은 DNA의 영향을 100% 받지만 DNA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그 영향으로부터 좀 더 멀어질 수 있는 것이 문화인입니다. 우리의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기 위해 쓰디쓴 쑥과 마늘을 먹는 것은 짐승에서 인간이 되는 문화화의 과정에 대한 상징적 은유일 수 있어요.
 
  한국 사람들은 쓴 걸 참 좋아하는 민족 중 하나입니다. 모든 요리의 기본이 되는 마늘은 물론이고 씀바귀, 칡, 갓김치, 쑥갓, 냉이, 고들빼기, 도라지, 더덕…. 먹는 것으로 보자면 한국인이 가장 문화화된 민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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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jlee020    (2023-04-15) 찬성 : 0   반대 : 0
이어령을 우리나라의 대표적 지성인 중 한 명으로 꼽는 듯한데,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것이 이유일 터인데, 신빙성이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이 되지 않아서 제대로 읽게 되지 않았어요. 일본에 대해서 특별히 비판적인 관찰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내용이에요. 저 자신이 일본을 가보고 느낀 점은 갈 때마다 디자인과 기능을 향상시켜서 더 작고 더 나은 생활용품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저는 이런 축소지향이 실용과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일본인의 부단한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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