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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장박사의 아트&스포츠

이효석은 커피와 클래식 즐겼던 서구 지향 지식인

글 : 장원재  배나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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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밀꽃 필 무렵〉, 토속적 정취를 보여주는 名作이지만, 소설 직조한 방법론은 수입품
⊙ 일제하 유치진 등 식민지 아일랜드에서 벌어졌던 ‘애란극운동’에 영향받아
⊙ “개척되지 않은 이 原野에서 소박한 농민과 밀접히 접촉함으로써 시인은 그의 예술의 풍부한 영감을 발견하였던 것”(이효석의 〈존 밀링턴 싱그의 극 연구〉 중에서)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과 학사, 런던대 로열할로웨이 컬리지 박사(비교연극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MBC 라디오 앵커, 現 배나TV 대표 / 저서 《북한요지경;배나TV 장원재입니다》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 《논어를 축구로 풀다》 《장원재의 배우열전》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시절의 이효석.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국민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첫 문장이다.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 1907~1942년)의 단편으로, 1936년 10월 《조선일보》가 발행하던 잡지 《조광(朝光)》에 실렸다. 토속적 정서를 바탕에 깔고, 정교한 서사(敍事)를 배치한 걸작 단편이다. 작품의 배경은 작가의 고향인 강원도 평창군 봉평이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와 소설이라는 외래적·근대적 양식의 완벽한 결합. 그래서 이 작품을 두고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라고 평가하는 학자들이 많다. 주인공 허 생원과 동이 부자(父子)가 우연히 만나 알 듯 모를 듯 가까워지는 설정은 훗날 많은 작가의 전범(典範)처럼 쓰이기도 했다. 지금도 봉평엔 이효석 생가와 문학관이 있고, 주변이 온통 메밀밭인 물레방앗간엔 처녀상이 외로이 서서 독자들의 향수(鄕愁)를 자극한다. 그런데 〈메밀꽃 필 무렵〉 창작의 출발점이 ‘우리 것’이 아니라 수입품이라면?
 
 
  아일랜드에 주목한 日帝하 지식인들
 
극작가 유치진. 사진=유민영 제공
  일제 시대를 살아간 지식 청년들에겐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공화제 독립국가 수립, 사회적으로는 근대 문명국가 건설이다. 중세적 조선 사회가 근대 사회로 탈바꿈하려면, 해외에서 제도 자체를 수입해야 했다. 그렇다면 근대 문명국인 구라파(歐羅巴)나 미국에 있는 주요 사회 제도 가운데 조선에 없는 것이 무엇이냐?
 
  그들의 선택은 연극, 영화, 문학, 클래식 음악, 체육 등이었다. 이것은 ‘백성(百姓)’을 ‘근대적 시민(市民)’으로 계몽(啓蒙)하는 교육 방법론이자 사회운동의 실천 수단이었다. 연극과 문학에 국한해 말하자면, 신학문을 제도적으로 학습한 최초의 세대, 그중에서도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근대극 운동의 지도자 그룹은 서양 근대극을 수입해 한국 근대극의 기반을 구축하려 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일랜드 연극 운동이었다. 1920~1930년대를 통틀어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번역된 영어 희곡은, 셰익스피어의 고전(古典)까지를 포함해 모두 16편. 이 가운데 12편이 근대 아일랜드 희곡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아일랜드 근대극 운동은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정치적·사회적 문화운동이었다. 영국의 식민지배(植民支配) 아래서도 애란(愛蘭·아일랜드)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이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정인섭(鄭寅燮·1905~1983년)은 1936년 덴마크 국제언어학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아일랜드에 들러 예이츠를 만났고, ‘종가집 화원의 향기에 취하는 한 마리 나비같이 정신이 아찔한 것을 느꼈다’.(‘애란문단방문기’, 《삼천리》 1938년 1월)
 
  한국 근대극 운동의 지도자 유치진(柳致眞·1905~1974년)은 1975년 간행한 자서전에서 “애란도 매우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민족적 수치와 고통을 그 어느 민족보다도 많이 겪은 바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애란의 문학은 우리나라 서민 문학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애란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까지 마음 가득히 차올랐던 것이다”라고 썼다. 1935년 7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평문 ‘숀 오케이시와 나: 내가 사숙(私塾)하는 내외작가’에선 자기 작품에 등장하는 특정 캐릭터가 아일랜드 극작가 누구의 어떤 인물을 창조적으로 모방한 것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클래식 음악에 빠졌던 이효석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의 지도자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이효석도 아일랜드 문학과 연극에 큰 영향을 받았다. 경성제대 예과 시절, 예과 생도회 간행 《청량(淸凉)》 제2호에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의 지도자 예이츠(W. B. Yeats)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 게재했다. 졸업 논문도 아일랜드와 관련한 주제였다. 예이츠로부터 조언과 영향을 받은 극작가 존 밀링턴 싱(John Millington Synge)이 남긴 7편의 희곡을 분석한 〈The Plays of John Millington Synge〉이다. 이효석은 이 논문을 축약, 《대중공론》 1930년 3월호에 〈존 밀링턴 싱그의 극 연구〉라는 평문(評文)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효석은 근대를 지향했을 뿐 아니라, 근대 문물 자체에 흠뻑 빠졌던 사람이다. 부친 이시후(李始厚)는 한성사범학교 출신 교직자였고, 모친 강홍경(康洪卿)은 성결교단 집사였으니 어려서부터 서양 문물을 접했을 터이다. 태생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 출신으로 토속적이지만, 이효석은 경성제1고보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나온 엘리트였다. 그의 취향이 드러난 시기는 1934년 평양 숭실전문(崇實專門) 교수로 부임하면서다. 1938년까지 숭실에서 봉직했고, 1939년 한 해는 숭실이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당한 후 그 자리에 있었던 대동공전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평양에서 가산(可山)을 매혹한 것은 ‘클래식’ 음악이다. 《조광》 1937년 3월호에는 문화예술인을 상대로 일상의 기쁨을 묻는 설문 조사가 실려 있다. 이효석은 ‘음악을 들을 때’ ‘헨델의 교향악을 듣고 음악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더욱 느꼈다’라고 답했다. 평양 대동공전 시절 제자들의 증언도 있다. “선생님께서는 클래식 음악에 능통하고 계셨다. 그런데 우리가 평양에서 명곡을 접할 수 있는 곳은 ‘세르팡’이라는 명곡 다방뿐이었다.… 나는 클래식 명곡을 좋아해서 이 다방에 자주 들르고 싶었지만 용돈이 궁하여 자유롭게 들르지 못하였었다.”(정창희, 《새롭게 완성한 이효석전집》 8, 21쪽)
 
 
  茶店 ‘동’
 
  ‘세르팡’이라면, 당시 평양에서 ‘날리던’ 카페 가운데 하나다. 이효석의 글에 의하면, 1930년대 당시 평양에서 원두커피를 맛볼 수 있고 고전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카페는 일곱 군데였다. 이효석이 가장 자주 걸음 한 카페는 ‘동’이었다.
 
  〈차점(茶店) ‘동’. 이것이 또한 나에게는 중하고 귀한 곳이었다. 그곳을 바라고 나는 거의 일요일마다 10리의 길을 걸었다. 공원 옆 모퉁이에 서 있는 조촐한 한 채의 집, 그것이 고요한 ‘동’. 마차와 함께 거리의 그윽한 것의 하나였다. 붉은 칠이 벗겨진 ‘DON’의 글자가 밤에는 푸른 등불 밑에 길게 묻혀버린다.… ‘동’은 그때의 나에게 이 향기를 준 곳이었다. 고요한 곳에서 그 향기(커피향-필자 주)를 찾으려고 나는 10리의 발길을 앞두고 눈 오는 밤을 그 속에서 지새우는 것이다. 간간이 레코드 회사 출장원이 내려와 레코드 연주회를 열 때가 있었으니 그것은 늘 귀한 진미가 되었다. 꿈은 한결 풍성하였다.〉(1938. 12. 《조광》, 고요한 ‘동’의 밤)
 
  이효석은 평양에 다방이 더 많이 생겨나 학생 눈에 띄지 않고 드나들 날을 고대한다고 했다. 그는 고전 음악뿐 아니라 재즈에도 심취했다.
 
  〈“적적들 하신 것 같으니 레코드나 한 장 걸까요.” 여주인은 친절하게도 축음기 앞으로 나아갔다. 단골인 터이라 두 사람의 은근한 사이도 벌써 대강 짐작하고 동정하는 눈치여서 간간이 그 정도의 친절을 베푸는 것이었다. 이윽고 ‘제 두 아무울’의 노래가 흘렀다. 두 사람의 애인을 가진 여자의 노래가 낭랑하게 흘렀으나 그것은 미례의 현재의 정서와 심경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미례는 꽃같이 잠자코만 앉아서 서글픈 표정으로 노래를 듣고 있다.〉(‘인간산문’, 《조광》 1936년 7월호)
 
  ‘제 두 아무울’은 1930년 미국 흑인 가수 조세핀 베이커가 부른 ‘나의 두 사랑(J’ai Deux Amour)’이다. ‘클래식’을 즐겨 들었지만, 이효석도 ‘고전보다 차라리 재즈가 좋을 때도 있다’고 할 만큼 재즈도 즐겼다.
 
 
  커피와 버터, 치즈를 즐겼던 이효석
 
  평양의 카페는 1938년 무렵엔 두 곳이 늘어 아홉 군데가 되었는데, 새로 문 연 카페를 순례(巡禮)하며 커피 맛을 비교하는 즐거움을 기록한 글도 있다. ‘낙랑다방기’(《박문(博文)》 1938년 12월)다.
 
  〈차 한잔을 분부하고 3, 40분 동안 앉아 있노라면 웬만한 교향악 한 편쯤은 완전히 들을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 ‘파세틱’도 좋고, 베토벤의 트리오 ‘대공’(大公) 같은 것도 알맞은 시간에 끝난다. 대곡이 너무 세찰 때에는 하와이안 멜로디도 좋은 것이며 재즈 음악도 반드시 경멸할 것은 못된다.〉
 

  그의 커피 사랑은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조선문학독본》 1938)에서 절정을 이룬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개암은 헤이즐넛이다. 커피 말고도 이효석을 매혹(魅惑)한 식재료가 더 있다. 버터와 치즈다. 이효석은 마가린이 아니라 버터를, 그것도 미국 선교사 집에서 얻은 ‘진짜 버터’를 맛볼 수 있다는 황홀경에 겨울밤 10리 길 왕복을 마다하지 않았던 식도락가다. 마가린과 버터의 차이뿐만 아니라, 일제(日製)와 미제(美製) 버터의 품질 차이까지 섬세하게 지각했다는 뜻이다.
 
 
  이효석에게 영향을 준 애란극운동
 
《조광》 1936년 10월호에 실린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사진=조선DB
  다시 이효석의 〈존 밀링턴 싱그의 극 연구〉로 가보자.
 
  〈최근 영국 극계의 가장 위대하고 의미심장한 업적은 애란극운동(愛蘭劇運動)이었다.… 1898년 5월 예이츠의 충고와 격려로 싱그가 파리를 떠나 ‘그들의 한 사람과 같이 그곳에 살고 아직 표현되지 못한 그들의 생활을 표현하기 위하여’ 아란도르[Aran Islands·아일랜드 서부의 낙도(落島)-필자주]로 건너갔을 때에 비로소 이 천재는 그의 바른 도정(道程)의 첫걸음을 떼놓은 것이었다.… 개척되지 않은 이 원야(原野)에서 소박한 농민과 밀접히 접촉함으로써 시인은 그의 예술의 풍부한 영감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싱그는 매년의 대부분을 농민의 주방에서 살고 그들의 노화(爐火)와 포턴주(酒)로 그의 피를 녹이고 그들의 가지가지의 전설에 귀가 울렸다.… 이렇게 하여 마침 농민적 열정이 그의 혈조 속에 굵게 맥치게 되었다.… 이 농민 생활에서 그는 진실성과 희열에 넘치는 희곡상(戱曲象)을 잡으려 노력하였고, 따라서 이 생활 속에 자연주의와 비도덕주의의 그 예술 신조가 깊이 뿌리박혔다.〉
 
  그렇다. 〈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적 정서와 토속적 정취를 간결하고 깔끔하게 보여주는 명작(名作)이지만, 소설을 직조(織造)한 문제의식과 방법론은 수입품이다. 아일랜드제(製)다. 그렇다고 이효석의 문학적 성취가 빛 바래는 건 아니다. 외국의 방법론을 들여다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걸작(傑作) 창작의 자양분으로 삼아 또렷한 결과물을 보여줬다는 건 그 자체로 놀랍고 고마운 성취이기 때문이다. 평창 봉평의 메밀밭은 오늘도 여전히 흐뭇하고 푸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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