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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역사 ② 길과 문명

길이 문명을 만든다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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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로마는 ‘20만 리의 도로’ 만들어
⊙ “城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하고, 길을 닦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는 반드시 흥한다”(돈 유쿠크)
⊙ “(고속도로 만들면) 少數의 부자가 그들의 젊은 처첩들을 옆자리에 태우고 전국을 놀러 다니는 유람로가 되지 않겠는가”(변형윤 교수)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로마 문명의 상징 아피아 가도.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서울 근교에 있는 산, 해안선, 무역항 그리고 주요 도로의 황폐함은 조선에 대한 매우 좋지 못한 생각을 갖게 한다.” “도로는 매우 열악하며 심지어 도심지의 대로도 승마장의 트랙보다 좋은 것이 없다.” “비틀어진 소로의 대부분은 짐 실은 두 마리 소가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으며 한 사람이 짐을 실은 황소를 겨우 끌고 갈 수 있을 정도로 더욱 좁아진다.”
 
  지금은 아니다. 옛이야기다. 1894년 조선을 방문한 영국인 이사벨라 비숍(1831~1904년)이 1898년 출간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그런데 조선의 실상은 비숍이 관찰한 것보다 더했다. 도로(道路·Road)라는 용어를 쓸 수준이 아니었다. 그럴 만했다. 조선에서는 수레가 사용되지 않았다. 바퀴 달린 수레를 사용하지 않으니 그게 다닐 도로도 없었다.
 
 
  도로가 없는 나라 조선
 
  조선이 수레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듯, 아득한 옛날인 삼국 시대에도 수레는 활발하게 사용됐다. 그런데 1000년이 지난 조선 시대가 되자 수레가 자취를 감추었다. ‘설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비숍이 조선에 대해 말하기 1세기 전인 18세기 실학자들의 얘기에 그 실상이 적나라하다. 박제가(朴齊家)는 《북학의내편》에서 “조선이란 나라는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지를 못해 온갖 물화(物貨)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진다”고 개탄했다.
 
  물론 개탄만 한 것은 아니다. 여러 실학자가 수레 사용을 주장하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그들의 지적과 주장은 묻혀버리고 잊혔다. 왜 그랬을까? 조선의 지배층이 길을 닦으면 오히려 오랑캐가 침략하기 쉬워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여긴 때문이라고도 한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의 트라우마 탓이라는 얘기겠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상업을 억누르는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 탓이 결정적이었다.
 

  조선이 도로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양을 중심으로 각 지역을 연결하는 대로(大路)라는 틀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도로에 대한 관점이었다. 대로의 기준은 중국 사신의 행차가 가능한 너비였다. 상업유통망으로서의 도로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그 같은 대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길은 방치 상태였다. 너비가 좁아 수레가 다니기 어려웠다.
 
  조선 시대 상인이란 존재의 대표 격이었던 보부상(褓負商)이 그 실상을 설명해준다. 보부상은 지방의 5일장 등에 봇짐과 등짐을 메고 지고 다니며 행상(行商)을 했다. 걸어서였다. 수레를 사용하여 많은 짐을 운반하는 게 없었다는 얘기다.
 
 
  서울상대 교수 전원이 경부고속도로 반대
 
변형윤 전 서울대 교수. 사진=조선DB
  하지만 역사가 거기서 멈추지는 않았다. 어떻든 한반도에도 서서히 근대적 교통망이 만들어져 갔다. 일제(日帝) 시대로 들어설 무렵인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보름이 걸렸던 서울-부산 간 이동이 17시간으로 단축됐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곧바로 6·25전쟁의 참화를 겪고 여러 혼란도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도 철도와 도로가 곳곳을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비숍의 때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시점 한국의 교통망 발전의 역사에 획을 긋는 일이 이루어졌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서울과 동쪽 끝의 항구인 부산이 고속도로로 연결되었다. 서울-부산 간 이동이 4시간30분으로 단축되고 통행과 물류(物類)의 획기적 증대를 가져왔다. 거대한 경제적 파급효과를 낳았다. 경부고속도로는 이후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게 되는 한국의 폭발적 경제발전을 이끈 방아쇠였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결코 박수갈채를 받으며 시작되지 않았다. 1967년 4월 27일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제6대 대통령 선거 공약(公約)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했다. 그러자 당시 야당 정치인들은 일제히 격하게 반대를 외쳤다.
 
  “고속도로 만들어봐야 달릴 차가 없다. 부유층을 위한 호화시설이 될 뿐”이라고 했다. 직접적인 반대 행동에도 돌입했다. 건설 현장에 드러누웠다. “우량농지 훼손이 웬 말이냐, 쌀도 모자라는데 웬 고속도로냐, 부유층 전유물 고속도로 건설 끝까지 결사반대”라고 외쳤다.
 
  그런데 야당만이 아니었다. 당시 경제학자들도 일제히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대 상대 교수 전원이 반대성명을 냈다. 그 대표적 인사인 변형윤(邊衡尹)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가용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농토를 가로질러 길을 낸단 말인가. 기어이 길을 닦아놓으면 소수(少數)의 부자가 그들의 젊은 처첩(妻妾)들을 옆자리에 태우고 전국을 놀러 다니는 유람로가 되지 않겠는가.”
 
  정치인을 능가하는 언사였다.
 
 
  “무명베옷을 입고 산천지를 걸어 다녔지만…”
 
  경부고속도로 개통 다음 해인 1971년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신민당 후보로 나선 김대중(金大中)은 “세종대왕 시대가 성군(聖君)의 시대라는 것은 그 당시에는 고속도로도 없었고 (…) 무명베옷을 입고 산천지를 걸어 다녔지만, 국가의 혜택이 고르게 분배되었던 것”이라고 연설했다.
 
  여전한 몰이해이기도 했지만 틀린 얘기였다. 세종이 성군이었다 해도 그때가 국가의 혜택이 고르게 분배된 때는 전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퇴행(退行)의 언사였다. “무명베옷을 입고 산천지를 걸어” 운운은 보부상 수준의 얘기였다. 그런데 따지자면 당시 반대성명을 냈었던 변형윤 등 경제학자라는 이들의 식견도 그 수준 이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는 그 모든 비난이 그릇된 것임을 증명했다. 경부고속도로는 경제성장만이 아니라 국민의 삶의 양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고속도로를 누비는 마이카가 성취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관광단지가 개발되고 관광버스를 통한 단체관광이 등장했다. 명절에는 대규모 귀성·귀경이 이루어졌다. 경부고속도로는 ‘일부 부유층이 처첩을 끼고 놀러 다니는 유람로’가 아니었다. ‘국민의 도로’였다.
 
  문명(文明)은 다양한 각도에서 고찰될 수 있겠지만 절대 빠뜨릴 수 없는 핵심적 요소의 하나가 길, 즉 도로다. 문명의 핵심은 도시다. 그런데 도시가 도시일 수 있는 것은 길이 있음으로 해서다. 길을 통해 연결됨으로써 도시는 거점(據點)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도시는 길과 함께다. 문명은 도시이며 또 길이다.
 
  근대문명만이 아니다. 길은 고대(古代)에도 문명세계의 중추적 기반의 하나였다. 안으로는 통일성과 활력을 유지하는 혈맥(血脈)이었다. 밖으로는 관계의 촉매이며 자양(滋養)의 공급망이었다. 물론 그것이 문명의 영원성을 약속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길의 힘이 강할수록 문명은 번영하고 장수했다. 그리고 그런 문명은 무너져도 역사적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후대의 또 다른 문명을 낳는 유산과 씨앗을 남긴다. 대표적으로 고대 로마가 그러했다.
 
  고대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는 동안 보여준 정치적·군사적 위세는 대단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인물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역사에서 영웅적 인물들의 기록이 빠질 수는 없다. 그래서 영웅전이 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절반은 로마의 영웅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영웅만 쳐다보면 로마의 진면목을 놓친다. 고대 로마의 영향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영웅쟁패의 무용담 때문이 아니다. 현대에도 의의를 갖는 문명적 성취가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의 하나가 바로 ‘길’이다. 로마는 ‘길의 나라’이며, 로마제국은 ‘길의 제국’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다.
 
  이 말 자체는 고대 로마 때의 것은 아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시인이자 우화 작가였던 라퐁텐(1621~1695년)의 표현이다. 정치적인 의미를 담은 비유적 언급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지만, 우리의 적대자들은 우리가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이전에도 비슷한 말이 있었다. 12세기경 프랑스 신학자 알랭 드릴(1128?~1203?)은 “사람들을 로마로 이끄는 천 개의 길”이라는 표현을 남겼다. 14세기 《캔터베리 이야기》의 저자 초서(1343?~1400?)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이런 식의 ‘로마로 향하는 길’이라는 비유적 표현은 이후에도 종종 보이곤 했다. ‘로마의 길’의 존재감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미국의 도로 길이와 맞먹어
 
  실제로 로마의 도로는 대단했다. 당시의 도로 규모를 보여주는, 남아 있는 사료(史料)는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년) 시대의 것인데, 그에 따르면 로마제국의 공공 포장도로는 372개로 길이를 합하면 약 8만5000km에 이른다. 현재의 미국과 비교해보면 실감이 더하다.
 
  로마제국은 오현제(五賢帝) 시대의 두 번째 황제인 트라야누스 시절(AD 98~117년) 최대 판도를 이룩했다. 약 500만㎢로 추정한다. 오늘날 미국의 면적은 936만㎢인데 도로망의 총연장은 8만8000km에 달한다고 한다. 로마제국의 면적은 미국의 절반 정도인데 도로 연장은 거의 비슷하다. 인구 대비로도 대단하다. 미국의 인구는 현재 3억이 넘어간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인구는 117년 무렵 8000만~1억 남짓으로 추정한다. 미국의 3분의 1이 안 된다. 그런데도 로마제국의 길은 방대한 규모로 촘촘히 연결돼 있었다.
 
  그런데 로마의 길의 대단함은 규모만이 아니다. 로마는 그 교통망을 통해 그 판도 전역을 ‘하나의 세계’로 만들었다. 로마와 그에 복속된 도처의 지역은 처음에는 일단은 지배-피지배의 관계였다. 하지만 거대한 도로망이 그 전역을 하나의 교역권으로 연결하면서 새로운 발전이 진행되었다. 종족적·문화적 구분을 넘어 로마법적 보편성을 기준으로 한 로마인이라는 관념이 자리 잡아갔다. 지리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명적 함의(含意)에서의 ‘지중해 세계’가 자리 잡고 보편세계로서의 로마문명세계가 형성됐다. 그러면서 로마 시민권의 부여도 확대돼갔다. 212년에는 로마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그런 과정을 보여주는 한 사례가 기독교의 사도 바울이다. 바울은 유대인임과 동시에 로마 시민이었다. 바울은 로마의 도로망을 따라 이동하며 전도여행을 했다. 바울의 전도여행은 제국의 수도 로마까지 이어졌다. 로마 최초의 국도 아피아 가도(Via Appia)를 통해서였다.
 
 
  로마와 동맹을 연결시킨 도로
 
  로마는 기원전 312년 아피아 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 동기는 군사적 목적이었다. 이탈리아반도 남부 지역의 통합을 위해 군대의 이동과 보급품 수송을 원활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피아 가도는 직접적인 군사적 용도 이상의 상승효과를 가져왔다.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정복해나가는 과정에서 피정복지와 피정복민을 단지 힘으로 제압하고 거기에 주둔해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치를 허용하고 동맹으로 삼는 것을 방침으로 했다. 그들과 경제적·외교적·군사적 관계를 맺고 공동의 목표를 추구해가는 식이었다.
 
  이 같은 관계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아피아 가도에서 시작된 로마의 도로였다. 로마는 이탈리아반도의 복속시킨 곳곳을 도로를 통하여 로마와 연결시켰다. 유사시에는 신속히 군대를 파견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군사적 지배를 하지 않고 도로로 연결한 덕분에 그들은 폴리스 로마와 하나가 되어갔다. 이것은 카르타고와의 쟁패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다.
 
  기원전 264~146년 사이 로마와 카르타고는 지중해 세계의 패권(覇權)을 둘러싸고 거의 120년간의 격돌을 벌였다. 포에니 전쟁이다. 승부를 결정지은 것은 한니발(기원전 247~183년)과의 싸움인 제2차 포에니 전쟁이었다. 한니발은 기원전 216년 알프스를 넘어 로마의 본토 이탈리아반도까지 쳐들어가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로마는 칸나 전투에서 8만 명의 병력 가운데 7만 명이 전사하고 1만 명이 포로가 되는 괴멸적 참패를 겪었다. 원로원 의원도 80여 명이 전사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로마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로마는 이미 단순한 도시국가가 아니었다. 이탈리아반도 전역에 동맹도시들이 있었다.
 
  한니발은 16년간 이탈리아반도에 머물면서 로마의 그 같은 동맹 체제를 깨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 결속을 깨지 못했다. 결국 한니발은 로마 제압에 실패하고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한니발을 패배시킨 로마는 드디어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지중해 일대 전역을 아우르는 패권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런데 로마가 아피아 가도에서 시작하여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며 구축한 도로 정책은 이후 지중해 지역 일대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만이 아니라 지중해 일대의 여타 피정복지도 도로로 연결하여 하나로 묶어갔다.
 
 
  “로마는 호수와 같다”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바오로)은 로마세계의 서쪽 끝인 이베리아반도까지 전도를 하려는 소망을 품었었다. 하지만 이루지 못하고 로마에서 순교(殉敎)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최대 판도를 이룩한 트라야누스가 바로 그 이베리아반도 태생이었다. 트라야누스가 그 토착민 출신인 것은 아니다. 로마 전통 가문 출신이고 당연히 로마 시민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과들은 로마가 보편문명의 특성을 강화시켜간 면모를 보여준다.
 
  그렇게 로마를 하나의 문명세계로 만든 인프라가 바로 로마의 방대한 도로망이었다. 그 도로망을 오가며 교역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오가고 또 정신적 교류도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로마는 하나의 세계가 되고 그 역사는 후대로도 이어졌다.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1795~1886년)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로마는 호수와 같다. 로마 이전의 모든 역사는 로마로 흘러들어 갔고, 또 모든 근대사는 로마라는 호수로부터 흘러나왔다.”
 
  랑케의 말대로 로마제국은 유럽의 근대문명에까지 이르는 줄기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등장한 근대문명은 유럽이라는 지역을 넘어 오늘날에는 세계를 아우르는 보편문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예링(1818~1892년)은 “로마는 세계를 세 번 통일했다. 로마는 처음에는 무력으로, 다음에는 기독교로 그리고 세 번째는 로마법에 의하여 세계를 통일했다”고 했다. 그의 저서 《로마법의 정신》의 서문에서 한 말의 요약이다.
 
  그런데 비중은 다르지만 그에 빗대자면 또 하나의 ‘세계 통일’ 예화도 있다. 로마의 도로문화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직접적인 유산도 하나 남겼다. 바퀴의 좌우 폭이다. 근대에 들어와 영국이 증기기관차를 만들고 철로를 놓을 때 바퀴와 철로의 폭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과거 로마 시대 마차 바퀴의 간격이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는 당시 영국의 증기기관차와 철도의 폭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고대 로마의 마차 바퀴의 폭이 오늘날의 세계의 기차와 철도의 폭의 표준이 된 것이다. 상징적이다.
 
 
  토지문명과 교역문명
 
  문명은 결코 교역과 분리돼 존재할 수 없다. 근대 이전 농업이 중요했던 오랜 기간 동안에도 문명은 토지문명과 교역문명의 성격을 동시에 가져야 했다. 하지만 속성상으로 상대적인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
 
  토지문명은 농업과 정착이 중심이다. 영토(領土), 공간, 성(城)이 중요하다. 내륙을 주 무대로 한다. 지중해 일대 고대 문명의 경우 이집트가 전형이다. 반면 교역문명은 상업과 이동이 처음부터 중요했다. 경계선을 가진 영토적 공간보다는 활동 영역과 네트워크, 길이 중요했다. 메소포타미아문명도 그러했다. 농업 못지않게 길과 교역을 중시했다. 고대 수메르문명은 인더스문명과도 오랜 기간 교역을 이어갔다.
 
  후대의 동서 세계는 더욱 대비된다. 황하 일대에서 일어난 고대 중국의 문명은 내륙 농업 정착 문명의 특성이 강화돼갔다. 주(周)나라 이전 은상(殷商)의 경우는 교역문화의 비중이 상당했다. 하지만 주나라는 농업을 위한 토지제도와 그 상속제도가 핵심이 됐다. 나중에 공자(孔子)가 이상화(理想化)했던 정전제(井田制)와 종법제(宗法制)가 바로 그 주나라의 것이었다.
 
  반면 지중해 세계는 달랐다. 농업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교역은 항상 필수였다. 수메르도 그러했지만 후대의 바빌로니아도 그랬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눈에는 눈”만 있는 게 아니다. 절반 이상이 거래의 계약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의 페르시아제국에 대해선 “모든 길은 페르세폴리스로 통한다”고 일컫기도 한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교역이 더욱이 중요했다. 에게해를 무대로 한 활발한 해상교역이 상시적이었다. 알렉산더의 제국도 당연히 그 전통을 바탕으로 했다.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의 패권은 지중해 세계의 교역 장악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로마가 맞서야 했던 카르타고부터가 지중해를 누비던 페니키아 상인들이 만든 도시국가였다.
 
 
  열린 제국, 닫힌 제국
 
만리장성은 한 번도 외침으로부터 중국을 구원해주지 못했다. 사진=조선DB
  로마가 그 카르타고와 쟁패를 거듭하던 비슷한 때인 기원전 221년 먼 동쪽에서는 진(秦)이 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천하통일을 했다. 진은 곧 무너졌지만(기원전 206년) 한(漢)이 기원전 202년 통일왕조를 수립했다. 그런데 동서 두 세계의 고대 국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곧바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기 시작했다. 흉노를 막기 위함이었다. 기원전 214년 완성했다. 그런데 그 시기 로마는 장성이 아니라 도로를 만들고 있었다. 아피아 가도로 시작된 로마의 도로 구축은 지중해 세계 전역을 장악한 뒤에도 수백 년간 계속 확대되었다. 그렇게 닦은 도로가 8만km가 넘었다. 중국식으로 환산하면 20만 리에 이른다.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로마는 ‘20만 리의 도로’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로마가 길을 닦을 때 중국은 장성을 쌓았지만 그것이 중국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중국을 정벌한 유목 세력 가운데 만리장성 때문에 중국에 쳐들어가지 못한 경우는 없었다. 몽골의 원(元), 여진의 청(淸) 모두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해선 다음의 언명이 통렬하다.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하고, 길을 닦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는 반드시 흥한다.”
 
  몽골의 칭기즈칸의 말이 아니다. 돌궐의 장군 돈 유쿠크의 말이다. 그는 7세기 말 당(唐)에 의해 무너졌던 돌궐제국을 부흥시켰는데, 수장(首長)이었던 빌게 카간이 방어를 위하여 중국처럼 성곽을 쌓고자 했을 때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돌궐의 강점은 초원을 이동하는 기동성에 바탕한 선제 기습공격에 있는데 이를 잊고 성채에 갇혀 방어에 몰두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돈 유쿠크의 말처럼 만리장성은 중국의 땅을 지키는 데 무력(無力)했다. 구분과 폐쇄의 DNA를 굳히는 담벼락 이상이 아니었다. 이와 관련해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중화(中華)사상을 견지했습니다.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란 거죠. 일종의 ‘대국병(病)’입니다. DNA에 각인된 민족주의에 가깝지요. 하지만 과거를 돌아봅시다. 기원전 2~3세기, 로마와 중국은 기술 수준이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한 일은 서로 달랐습니다. 로마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며 속주(屬州)국가에 도로를 닦고 수도(水道)를 공급하며 교류를 활성화한 반면 중국은 이민족(異民族)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한쪽은 ‘열린 제국’이었고 한쪽은 ‘닫힌 제국’이었던 거죠. 그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고 봅니다.”
 
 
  隋-唐은 달랐다
 
  중국이 다른 면모를 보였던 적도 있었다. 수(隋)-당(唐) 시기다. 수나라는 고구려 침공에 실패하면서 얼마 못 가 무너졌지만 뒤를 이은 당나라는 달랐다. 시오노 나나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열린 제국’이었다.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다. 수나라 양제는 황하에서 장강까지를 잇는 대운하(大運河)를 건설했다. 장대했다. 당은 그것을 이어받았다.
 
  대운하는 중국의 남북방을 경제적으로도 하나로 연결시켰다. 당의 번영은 이와 무관치 않다. 종족적 특성도 지적된다. 중국 역사가 진인각(陳寅恪·1890~1960년)은 《수당제도연원략논고(隨唐制度淵源略論稿)》라는 저서에서 수당제국을 건설한 세력은 순수 한족(漢族)이 아니라 선비족이 중심이 된 호한융합(胡漢融合) 세력인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고 했다.
 

  확실히 당은 전형적인 한족문화와는 달리 매우 개방적이었다. 그 개방성의 활력이 번영에 힘을 더했다. 통일신라의 번영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이 같은 번영은 이후의 정치적 격변과 상관없이 후대의 송(宋)-원(元) 시대에도 이어졌다. 고려도 그 번영의 일원이었다. 개경에는 회회(回回)아비로 불리는 이슬람 상인이 와 있었다. 신라 때부터 이미 왔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몽골에 의한 원의 지배가 끝나고 명(明)나라가 등장하면서 중국은 다시 ‘닫힌 제국’ 장성의 나라로 복귀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재구축한 것이다. 상징적이다. 바다도 닫았다. 명나라 초기 정화(鄭和)의 함대가 멀리 아프리카 인근의 마다가스카르 섬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교역과는 상관없는 과시성이었다. 명은 결국 원정을 중단하고 함대도 파괴했다. 자료도 불살랐다. 섬에서 사람들을 내쫓는 공도정책(空島政策) 단행까지 했다. 장성과 중화주의라는 자폐적 이데올로기를 전형으로 한 중국의 토지문명적 특성은 그렇게 귀결되고 굳어졌다. 명을 상국(上國)으로 모셨던 조선도 그것을 그대로 따라갔다.
 
 
  로마의 ‘길 문명’의 DNA
 
1968년 12월 21일 경부고속도로 1단계 구간인 경수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 개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샴페인을 고속도로 바닥에 뿌리며 자축했다. 사진=국가기록원
  반면 지중해를 내해로 만들고 육지에는 거대한 도로망을 구축한 고대 로마의 전통은 이후의 서구 세계에 길과 교역을 중시하는 특성을 문명적 DNA가 되게 했다. 중세 시기 지중해 해양 교역의 선두주자였던 베네치아는 교황청과 이슬람권과의 무역 문제로 갈등을 빚었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장사밖에 없습니다”라는 호소의 서한을 보낸 바 있었다. 대항해 시대가 열린 이후 근대로 접어들어 가면서는 네덜란드 영국이 그 뒤를 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인도회사라는 상사(商社)를 만들어 세계 도처로 나아갔다. 그 DNA는 미국으로도 이어졌다.
 
  해양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 길은 더 이상 육지의 도로만이 아니다. 이제 세계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길은 해양로다. 하늘을 누비는 항공로도 뺄 수 없다. 하지만 ‘길’이라는 본질에서는 마찬가지다. 만리장성이 아니라 20만 리의 도로를 닦은 고대 로마문명의 DNA는 이제 세계를 연결하는 연결망으로 작동하고 있다. 길의 문명은 그렇게 현대를 지배하고 있다.
 
  로마의 최초 도로인 아피아 가도는 2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이탈리아의 중요한 관광자원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곳곳에서는 사람과 자동차가 오가는 도로로 여전히 사용되고도 있다. 그 아피아 가도는 로마에서 시작하여 이탈리아반도 장화의 뒷굽에 해당하는 남부의 종점인 브린디시(Brindisi) 항구까지 이어진다. 약 540km다.
 
  경부고속도로의 길이가 416km이니 아피아 가도가 좀 더 길다. 하지만 지리적 양상은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경부고속도로 연결과 비슷하다. 브린디시 항구는 지금은 큰 의의를 갖지는 않지만 고대 로마 시기에는 로마의 가장 중요한 항구였다. 그리스, 이집트 등 당시 선진 지역과 오리엔트의 관문인 유대 지역이 연결되는 관문의 항구였다. 부산도 일본 및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관문의 항구다. 먼 훗날에 한국의 경부고속도로가 로마의 아피아 가도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여겨지길 바라는 것은 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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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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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려라하니    (2023-02-11) 찬성 : 4   반대 : 0
유익하면서도 재미있는 글이네요. 경부고속도로가 한강의 기적을 불러온 원천이라고 견해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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