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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미술가들

스캔들로 보는 미술사 9 / 야수의 종교 - 마티스와 리디아

글 : 추명희  작가  vino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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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자 장수 하며 마티스 도운 아내 아멜리, 비서 리디아 들어오자 이혼
⊙ “내 그림이 훌륭한 안락의자와 같은 편안함을 주었으면 좋겠다”
⊙ 리디아, 모델들의 스케줄 정리, 작품 판매, 작품 뒷정리와 기록 등 담당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년)
본명은 앙리 에밀 브누아 마티스(Henri Emile Benoit Matisse). 프랑스의 화가로 회화, 조각, 판화, 종이 오리기를 포함한 그래픽아트, 건축설계,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스무 살 무렵인 1889~1890년에 처음으로 회화에 흥미를 가진 후 1895년에야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했다. 야수주의의 창시자로 강렬한 색채와 형태의 작품을 선보여 ‘색채의 마술사’로 불린다. 프랑스 니스에 마티스미술관이 있다.
  16세기부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예술가들의 편지를 관통하는 공통주제는 바로 ‘내 돈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한다. 예술을 고통의 도피처로 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는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현대미술에서는 이런 욕망이 더욱 두드러진다. 거리의 부랑자였던 낙서 화가 바스키아조차도 유명해지고 싶어서 성공의 화신 앤디 워홀과 컬래버 작업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돈도 명예도 현실도피도 아닌 순수한 열정으로 작업하는 화가들도 분명 존재한다.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년). 그에게 있어 그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종교였다.
 
  1913년 뉴욕 아모리 빌딩에서 개최된 전시회에서 입체파(立體派)와 야수파(野獸派)의 그림이 처음 미국인들에게 소개되었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이 전시회는 미국 시민들에게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는 미술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주기 위해 미국의 저명한 화가들이 후원한 것이었다. 평론가들은 이 전시회를 ‘폭탄’ ‘침공’과 같은 단어로 표현하며 비난했다.
 
  전시회가 시카고로 옮겨갔을 때,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학생들과 교수들은 마티스의 반전통적인 색채 사용과 인간 형태의 왜곡된 변형에 분개한 나머지 ‘앙리 마티스 모의재판’을 열고 그의 그림 세 점의 복사본을 불태워버리는 분노의 퍼포먼스까지 벌일 정도였다. 물론 오늘날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는 기존 입장을 철회하고 마티스의 작품을 무려 42점이나 보유하고 있지만.
 
 
  ‘분노의 동물’
 
  앙리 마티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를 두고 ‘분노의 동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의 야성적 색채와 전통에 반하는 형태들 때문에 “사람이 아닌 야수가 그린 것 같다” 하여 야수파라 명명했다. 관객들은 앙리가 야수의 외모를 지닌 광기(狂氣) 어린 인물일 것이라 상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안경을 쓰고 맞춤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지적(知的)인 분위기의 신사가 나타나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마티스를 만나보니 그는 야수가 아니었다!”라며 호들갑을 떨기까지 했다.
 

  사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의 그림은 그다지 야수적이지도 않다. 강렬한 색채 뒤에 어떤 고요한 정적감이 감도는 것이 그의 그림의 진정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마티스는 “창조란 곧 용기다”라는 신념으로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방식으로 그려나갔다. 그의 작품 〈춤〉 속의 대상들도 주변의 환경 따위는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동작에 몰입하고 있다. 딴딴해진 배와 불거진 근육의 나체들은 역동적인 흐름 속에서도 각자의 개성이 살아 움직인다.
 
 
  법원 관리에서 화가로
 
〈루마니아 풍의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La Blouse roumaine, 1940)〉
마티스는 여인의 초상화를 여러 점 남겼고 인물을 그릴 때는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색채 표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작품 속 여인의 흰색 블라우스 위에 그려진 무늬는 아라베스크 문양을 연상시키는데, 젊은 시절 그는 북아프리카 지역을 여행하면서 아라베스크 문양의 옷감과 카펫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마티스는 프랑스 북부의 작은 시골마을 보잉에서 잡화점과 종묘공급사업을 하는 부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했던 그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파리에서 법률 교육을 받은 후 법원 관리로 취직했지만 금방 싫증을 느끼게 된다. 따분함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사무실 창가에서 콩알 총으로 지나가는 행인을 맞히는 장난을 일삼을 정도로 짓궂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티스는 맹장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됐고 옆 침상의 환자가 유화(油畫)로 풍경화를 베껴 그리는 것을 보게 됐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어머니에게 그림 도구를 사다 달라고 졸랐고 그렇게 처음으로 석판화 한 점을 모사한 그는 대단한 성취감에 사로잡혔다. 훗날 그는 “물감 통을 손에 든 그 순간, 나는 그것이 내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미술 공부를 하겠다며 아버지와 한바탕 크게 싸운 후 1891년 가을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의 유명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 두 번이나 낙방한 끝에 겨우 턱걸이로 입학한 그는 미술적 기교를 빠르게 습득해나갔다. 그 무렵 카미유 조블로라는 여자 친구가 생겼고 1894년에는 딸 마르게리트가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고질병인 지루함을 못 참는 성격이 또 발목을 잡게 된다. 다른 화가들처럼 자연을 똑같이 그리는 사실적인 화법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대담한 색채와 강렬한 선, 현대적인 주제로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것을 그만두려 하는 그에게 불안감을 느낀 카미유는 1897년 매정하게 그의 곁을 떠나버린다. 그러고 바로 그해 10월 고향을 방문하는 길에 마티스는 생기 넘치고 매력적인 아멜리 파레르를 만나게 된다. 마티스는 곧 사랑에 빠졌지만 예술가의 삶은 늘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헌신적인 아내 아멜리
 
〈모자를 쓴 여인(Woman with a Hat, 1905)〉
작품의 모델은 마티스의 아내. 아멜리는 이 작품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한껏 꾸민 화사한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푸른색 계열로 거칠게 그려졌기 때문. 부자연스러운 색상과 거친 붓질, 마치 완성 단계가 아닌 것 같은 이 작품은 예술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당시 파리 미술계를 장악했던 수집가 거투르드 스타인의 눈에 들면서 마티스는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아멜리,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나는 언제나 당신보다는 그림 그리는 것을 더 사랑할 거야”라고 선전포고를 했다. 아멜리는 마치 헌신할 대상을 찾고 있었던 사람마냥 기꺼이 그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결혼 후 마티스가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1899년에 첫째 아들 장을 낳았고 바로 다음 해에 둘째 아들 피에르를 낳았는데 아이들이 걷기 시작하자 화실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친정으로 보내버릴 정도였다. 그 시절 아멜리가 캔버스를 준비하느라 집안일을 미처 챙기지 못할 때는 어린 마르게리트가 일을 대신하기도 했다.
 
  아멜리와 딸 마르게리트의 헌신 속에서 마티스는 자기만의 화풍을 만들어내기 위해 집중했다. 색채 사용에서 새로운 종류의 시도를 하던 그는 1905년 아멜리를 모델로 한 〈모자를 쓴 여인〉을 그렸고 당시 파리 미술계를 장악했던 수집가 거투르드 스타인의 눈에 들면서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라이벌이었던 피카소가 이 일로 마티스에게 주체하지 못할 만큼 강한 질투를 느낄 정도였다.
 
〈춤(Dance, 1910)〉
러시아의 상인이자 남작이었던 세르게 슈츄킨의 주문으로 그린 작품. 선과 색채, 형태를 혁명적으로 적용한 이 그림은 20세기 회화의 중요한 운동인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이 작품을 그리면서 마티스는 “세 가지 색이면 충분하다. 하늘을 칠할 파란색, 인물을 칠할 붉은색, 그리고 동산을 칠할 초록색이면 충분하다. 사상과 섬세한 감수성을 단순화시킴으로 우리는 고요를 추구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유일한 이상은 ‘조화’다”라고 말했다.
  그 뒤 마티스는 언젠가 해변에서 보았던 춤추는 카탈로니아인 어부들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 작품 〈춤〉을 그렸다. 밝은 하늘을 배경으로 나체의 다섯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이 그림은 또다시 야만적이라고 폄하를 받게 되는데, 비평가 카미유 모클레르는 “페인트 통이 대중의 얼굴에 내동댕이쳐졌다”며 격하게 비난했다. 물론 지금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극도의 단순함 속에서 원시적인 에너지가 꿈틀대는 작품이라고 칭송을 받고 있지만 말이다.
 
 
  ‘차가운 공주’ 리디아
 
  제1차 세계대전이 힘겹게 지나가고 1920~30년대에 마티스는 해안도시 니스에 주로 머물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1931년 마티스가 새로이 거대한 버전의 〈춤〉 제작을 의뢰받았을 때 아멜리는 병석에 누운 지 3년째 되어가고 있었다. 모자 장사까지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그녀는 젊은 날 고생을 너무 한 탓에 병이 들고 만 것이다. 아멜리는 남편과 함께 살기 위해 힘들게 니스로 찾아갔지만 그의 곁에는 이미 젊고 건강한 여자 리디아 델렉토르스카야가 있었다.
 
  리디아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사였던 부모를 잃고 프랑스에서 피란 생활을 하던 이주민이었다. 의사의 꿈을 품고 소르본대학에 진학고자 했지만 돈이 없어 우선 돈을 벌기 위해 니스에 정착해 마티스의 비서로 일을 시작했다. 아름답고 똑똑한 리디아를 마티스는 ‘차가운 공주’라고 불렀다. 그녀는 처음에는 모델 일을 거부했지만, 모델이 되고 나서는 단지 포즈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어떻게 완성해나가는지 관찰하며 기록으로 남기는 일까지 했다.
 
  마티스는 아내와 딸을 비롯해 수많은 모델을 세워 작업을 했고 작품에 모델 이름을 넣지 않아 기록은 불분명하지만 리디아를 대상으로 무려 90점이 넘는 유화를 남겼다. 드로잉과 스케치까지 더하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리디아는 다른 모델들의 스케줄을 정리하고, 작품을 판매하는 딜러들과의 협상을 중재했으며, 작품의 뒷정리와 기록 등 마티스의 활동의 모든 것을 충실하게 담당했다. 예민하고 꼼꼼한 성격의 마티스에게는 흠잡을 데 없는 최고의 조수였던 셈이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 백설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리디아는 골격도 커서 프랑스 여성들과는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눈부시게 젊은 20대였던 리디아에게 질투를 느낀 아멜리는 결국 마티스에게 최후통첩을 날린다. 리디아를 내보내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마티스는 리디아를 해고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라고 완강히 맞선다. 두 사람은 격렬한 다툼 끝에 결국 1939년 이혼을 한다.
 
  사람들은 마티스와 리디아가 동침(同寢)하는 사이라고 의심했지만 마티스는 끝까지 부인했다. 훗날 공개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마티스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아멜리는 불륜에 대한 진실보다 그림 속에 표현된 자신의 모습이 어둡고 못생긴 데 반해 리디아는 화사하고 예쁘게 그려진 것에서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멜리는 이혼하면서 마티스가 소유한 그림의 절반을 자신에게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마티스의 작품이 자신의 희생으로 창조된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油畫에서 색종이로
 
〈이카루스(icarus, 1946)〉
말년에 지독한 관절염으로 고생했던 마티스는 붓을 쥐기조차 힘들어지자 손에다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렸다. 나중에는 이것마저 어려워지자 색종이를 가위로 오려서 붙이는 콜라주 작업을 고안해냈다. 그는 종이에 과슈를 바르고 색종이를 잘라 붙이는 행위가 마치 조각의 과정과 흡사하다고 여겼고 “가위는 연필보다 더 감각적이다”라는 말을 했다.
  아멜리와의 갈등으로 잠시 떨어졌던 마티스와 리디아는 이혼 후 자연스럽게 재회했다. 리디아의 살뜰한 보살핌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가던 마티스는 십이지장암과 폐색전증으로 몸져눕게 된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사에게 조금이라도 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1941년에는 위험한 수술까지 감행했다. 수술 후 다행히 몸은 회복했지만 의사는 그에게 더 이상 폐에 해가 되는 유화를 그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역시도 더 이상 이젤 앞에 서서 붓을 잡는 것은 무리였다.
 
  이때 마티스는 좌절하지 않고 그 유명한 ‘컷아웃’ 기법을 고안해냈다. 조수들이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 오면 그것을 가위로 오려서 붙이는 콜라주 기법이었다. 이렇게 〈푸른 누드〉 시리즈가 탄생한다. 얼핏 보기엔 쉬워 보이지만 묘한 운동감을 가진 그만이 할 수 있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의 결과물이었다.
 
  위하수증 발병으로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지자 그는 침대나 안락의자에 누워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마티스는 색종이의 밝고 순수한 색채에 흥분했고 추상적이고 소박한 양식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평생 색채의 신비를 탐구한 그는 “색은 단순할수록 우리의 감정에 더 강렬하게 작용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회화나 조각 작품들보다 색종이 오리기를 통해 훨씬 더 높은 완성도를 성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티스의 종이 오리기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카루스〉이다. 태양에 너무 가깝게 다가간 바람에 날개를 고정해 붙인 밀랍이 녹아 추락한 그리스 신화(神話) 속 소년, 이카루스. 마티스의 작품 속에서 이카루스는 추락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기보다는 마치 기쁨의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이 작품이 프랑스 레지스탕스 전사(戰士)들을 상징한다며, 당시 프랑스를 점령 중이던 나치에 대한 마티스의 은근한 비판이라고 해석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해석일 뿐이다.
 
 
  “예술은 상처 어루만지는 역할 해야”
 
〈삶의 기쁨(Le bonheur de vivre, 1906)〉
마티스는 이 작품을 그리면서 “내가 꿈꾸는 미술이란 정신 노동자들이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편안하게 머리를 누일 수 있는 안락의자 같은 것”이라고 했다. 폭발적인 색채와 거친 붓놀림으로 포악한 짐승에 비유돼 야수파라는 명칭을 얻었지만 이 작품은 그의 붓이 한결 부드러워진 후 탄생했다. 1920년경 미국인 컬렉터 앨버트 반즈가 구입한 이래 반즈 재단이 소장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닥쳤을 때 마티스 역시 파시즘의 악랄함을 목격했다. 피카소는 “회화란 집을 장식하기 위해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의 수단”이라고 급진적으로 나섰고 그를 비롯해 몇몇 화가들이 전쟁에 대한 분노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티스는 계속해서 장식적인 작품들을 그렸다. 다른 화가들은 마티스가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마티스는 꿋꿋하게 “예술은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가 꿈꾸는 것은 순수와 고요로 가득한 균형의 예술이다. 내 그림이 훌륭한 안락의자와 같은 편안함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티스는 말년으로 갈수록 유산으로 남길 만한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에게 박물관이나 공공기관 같은 의미 있는 건축물 디자인 요청이 들어오지 않는 것에 상심했다. 그래서 자신을 간호했던 소녀가 수녀가 되어 찾아왔을 때, 로사리오 성당 디자인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자 그는 기쁜 마음으로 작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유리창을 직접 디자인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가득 채워 보석빛의 일광이 실내에 흘러들도록 만들었다.
 
  마티스는 한겨울 오전 11시에 가장 아름다운 빛의 향연을 볼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이 성당 작품이 자신의 일생의 역작(力作)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마티스가 무신론자(無神論者)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피카소는 “마티스, 차라리 사창가(私娼街)를 장식할 그림을 그리지 그래?”라고 비아냥 섞인 농담을 건넸다. 그는 “누가 부탁을 해야 말이지”라고 넉살 좋게 받아쳤다. 마티스의 말은 어쩌면 진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어디에 있든 많은 사람이 볼 수만 있다면, 작품에서 위안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을 테니까.
 
 
  ‘행복한 신사’
 
  계속되는 작업과 긴장감은 결국 마티스의 심장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그는 1954년 11월 3일 8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죽기 전날, 그는 리디아를 앉혀놓고 병상에서 마지막 초상화를 스케치했다. 스물두 살에 그의 집에 들어온 리디아도 어느덧 40대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마티스가 사망하자 아멜리가 그의 유산(遺産)을 처리하기 위해 도착했고 그녀는 즉시 리디아를 내쫓았다. 하지만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수많은 작품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리디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충실한 리디아는 마티스를 위해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 일을 마무리했다. 마티스는 자신에게 젊음을 바친 그녀를 위해 많은 작품을 선물로 주었고 리디아는 작품을 파는 대신 자신의 고국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미술관에 기증했다.
 

  마티스는 평생 온몸이 아팠고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하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 속에서 그는 강한 정신력으로 고행 중인 성직자처럼 날마다 빠지지 않고 일기 또는 편지를 썼다. 그는 “내가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하게 그림 그렸다는 걸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일기에 적었다.
 
  리디아, 그녀는 어쩌면 예술의 신(神)이 그에게 보내준 수호천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가 있었기에 마티스는 자신의 바람대로 사람들에게 안락함을 선사하는 예술품들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분노에 찬 야수’로 시작된 그의 예술 여정은 이렇게 ‘행복한 신사’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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