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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23〉

영조의 탕평책, 그 빛과 그림자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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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 말기 소론은 경종, 노론은 영조 지지
⊙ 영조, 즉위 초기 정미환국으로 탕평 시도했으나 ‘이인좌의 난’ 이후 노론으로 기울어
⊙ 1761년 前 영의정 이천보, 現 우의정 민백상, 좌의정 이후 등 자살로 영조와 세자에게 忠諫
⊙ 사도세자의 ‘西路行役’과 ‘北城유람’은 쿠데타 음모를 위한 행보?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영조
  1720년, 숙종이 재위 4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장희빈이 낳은 세자가 왕위를 이으니 그가 경종(景宗)이다. 이때 경종의 나이 33세였으니 대권(大權)을 지키기에는 충분한 나이였다. 그러나 경종은 병약(病弱)했고 아들이 없었으며 정치적 지지 세력 또한 없었다.
 
  이런 문제들은 이미 숙종 말기에 여러 형태로 부각되었다. 실은 그의 탄생 자체가 숙종과 노론(老論)의 극한투쟁을 유발했다. 그가 3세 때인 1690년(숙종 16년) 폐비(廢妃) 장희빈 소생으로 남인(南人)에 가깝다는 이유로 송시열(宋時烈) 등이 극렬 반대했지만 숙종은 그를 세자에 책봉했다. 이로 인해 송시열은 사약(賜藥)을 받아야 했다.
 
  한편 남인이 정계에서 축출되자 서인(西人)은 노론과 소론(老論)으로 갈렸다. 노론은 숙빈 최씨가 낳은 세자의 이복동생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영조)을 지지했고 소론은 세자(경종)를 지지했다. 노론은 약점 많은 연잉군을 왕위로 올려야 자기들이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었고 소론은 정통성을 가진 세자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남인과 유대를 가져온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때 노론과 소론은 이념, 가치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고 오직 권력 다툼이 전부였다.
 
 
  ‘소론의 정인홍’ 김일경
 
연잉군 시절의 영조 초상
  1717년 숙종의 주도하에 세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해 숙종이 몰래 노론 거두 이이명(李頤命)을 불러 세자의 무자다병(無子多病)함을 이유로 세자를 교체하여 연잉군으로 정할 것을 부탁하였다. 유명한 ‘정유독대(丁酉獨對)’가 이것이다. 사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것은 실정(失政)을 유도해 세자를 연잉군으로 교체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러나 세자는 숙종과 노론에 세자 교체 빌미를 주지 않고 3년을 잘 견뎌냈다.
 
  이런 모호한 상황에서 경종은 왕위에 올랐다. 조정은 여전히 노론이 다수였고 소론은 소수파였다. 이에 즉위 이듬해인 1721년 8월 노론은 임금이 후사(後嗣)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장래가 불안한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제 대리청정을 밀어붙인다. 30대 임금을 버젓이 두고서 정권을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노골적인 공세였다. 이때 소론 분위기를 이건창의 《당의통략》은 이렇게 전한다.
 
  〈소론 수십 명이 모였으나 소두(疏頭·소 맨 위에 이름을 올리는 주동자)가 없어 난감해하다가 참판 김일경(金一鏡)이 관직이 가장 높았으며 또 자신도 소두가 되기를 요구했다.〉
 
  마치 선조 말 광해군 초 정인홍(鄭仁弘)을 연상시키는 김일경(金一鏡·1662~1724년)은 어떤 사람인가?
 
  김일경은 1702년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그 뒤 정언(正言)·감찰(監察)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지평(持平)을 지냈다. 1707년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해 판결사(判決事)에 특진되었고, 1710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곧 집권층인 노론에 의해 한직인 부사과(副司果)로 전직되었다.
 
  1720년 소론이 추대한 경종이 즉위하자 김일경은 다시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노론 정권은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한 뒤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 대리청정을 실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일경은 이조참판으로서 소론 영수인 조태구(趙泰耉)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해 대리청정을 취소하게 하였다.
 
  이해에 그는 이진유(李眞儒)·윤성시(尹聖時) 등과 함께 경종이 병이 없어 손수 국사를 처리할 수 있는데도 노론 사대신(四大臣)이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하는 일은 나라를 망칠 죄목이라고 탄핵해, 사대신 김창집(金昌集)·이이명·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 등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하게 하였다.
 
 
  三急手 변
 
  이어 노론을 축출하고 소론 정권을 수립한 뒤 김일경은 노론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고, 1722년(경종 2년) 노론의 목호룡(睦虎龍)을 매수해 목호룡 자신이 백망(白望)·정인중(鄭麟重) 등과 모의해 경종의 시해와 이이명의 추대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변(告變)하게 하였다. 이를 ‘삼급수(三急手) 변’이라고 한다. 삼급수란 칼로써 임금을 죽이는 대급수, 궁녀가 음식물에 독을 타는 소급수, 환관을 매수해 임금을 죄에 옭아넣어 폐출시키는 평지수(平地手)를 말한다.
 
  이에 옥사가 일어나 유배 중이던 노론 사대신이 모두 사사되었고, 노론 수백 명이 살해 또는 추방되었다. 2년에 걸쳐 주도한 노론 숙청을 신임사화[辛壬士禍·1721년의 신축옥사(辛丑獄事)와 1722년의 임인옥사(壬寅獄事)를 아울러 이르는 말. ‘신임옥사’라고도 함]라고 한다.
 

  이 뒤에 김일경은 우참찬·이조참판·이조판서를 지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의 재집권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다 청주 유생 송재후(宋載厚)의 상소를 발단으로 신임사화가 무고(誣告)였다는 노론의 집중적인 탄핵을 받고 목호룡과 함께 투옥되어 친국(親鞫)을 받았다. 그러나 공모자들의 이름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참형을 당하였다. 당시 연잉군도 고변서에 이름이 나왔으나 경종은 끝내 연잉군을 보호했다.
 
  한편 이를 계기로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자 소론은 급진파 급소(急少)와 온건파 완소(緩少)로 분열되는데 김일경은 급소, 조태구는 완소를 대표했다. 급소는 노론을 일망타진하려 했고 완소는 이에 반대했다. 이는 선조 때 서인 처벌을 두고 강경한 북인과 온건한 남인으로 분열된 모습과도 비슷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종은 재위 4년 만인 1724년 8월 25일 병으로 누운 지 며칠 만에 급서했다. 세간에서는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노론의 선봉장 민진원
 
  영조(원래 묘호는 ‘영종’이었으나 1889년 ‘영조’로 고침)는 1724년 8월 30일 즉위했다. 이어 12월에 김일경이 처단됐으니 소론을 몰아내는 데 걸린 기간은 4개월 정도였다. 이후 노론이 집권했다. 영조 집권 초 노론을 대표한 인물은 민진원(閔鎭遠·1664~1736년)이었다.
 
  민진원은 민유중(閔維重)의 아들이자 송준길(宋浚吉)의 외손자이며 숙종 비 인현왕후의 오빠로 송시열의 제자였다.
 
  민진원은 1721년(경종 1년)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숙종실록(肅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한 왕세제(후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건의해 실현하게 하는 등 정계의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이듬해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성주(星州)로 유배되었다가, 1724년 영조 즉위와 더불어 노론이 집권하자 풀려나 우의정에 올랐다. 이어 실록청 총재관으로 《경종실록(景宗實錄)》 편찬을 주관하였다.
 
  1725년(영조 1년) 민진원은 소론 영수인 좌의정 유봉휘(柳鳳輝)를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로 탄핵, 유배시켰으며, 송시열의 증직(贈職)을 상소하고 그해에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으나, 1727년 당색(黨色)이 강한 자를 제거해 탕평하려는 영조의 정책으로 정미환국(丁未換局)이 일어나자 파직되어 순안(順安)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그 뒤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영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진원은 끝까지 소론과 타협하지 않고 소론을 배격하는 노론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丁未換局으로 소생한 少論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정리한 정미환국 전말이다.
 
  〈사건은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 측에서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을 묻기 시작하면서 발단하였다. 먼저 이의연(李義淵)이 지난날 세제(世弟) 건저(建儲)를 주장하다가 처벌된 신하들을 신원(伸寃)하자고 성급하게 청했다가 소론의 반대에 부딪혀 오히려 귀양을 가고 말았다.
 
  또한 송재후(宋載厚)는 김일경이 대찬(代撰)한 임인옥사에 대한 교문(敎文)의 초고(草稿) 중 3건의 문구를 들어 “세제 시절의 영조를 모욕한 것이니 단죄할 것”을 상소하였다. 3건의 문구란 종무[鍾巫·노환공자(魯桓公子) 휘(翬)가 형을 죽인 것]·사구[沙丘·진시황의 맏아들 부소(扶蘇)를 죽이고 작은아들 호해(胡亥)를 세운 것]·접혈(蝶血·당태종이 형과 아우를 죽인 것)로 모두 영조와 관련된 것으로서 소론 김동필(金東弼)도 그의 불온함을 지적한 일이 있었다.
 
  이 김일경의 교문 문제에 대한 상소는 각처에서 연달아 들어왔다. 영조는 김일경을 잡아들여 친국했고, 김일경은 끝내 불복해 처단되었다. 또한 임인고변으로 공신이 된 목호룡의 고변 문구 중에도 영조와 관련한 사실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그 또한 국청(鞫廳)에서 심문을 받다가 불복하고 죽었다.
 
  영조는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인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단한 뒤, 경종 1년 김일경이 노론 사대신(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한 신축소(辛丑疏)에 연명한 이진유(李眞儒) 등 6인을 귀양 보냈다. 그리고 노론 측의 잇따른 소론 대신들에 대한 논핵으로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우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의 소론 대신들이 쫓겨나고 대신 민진원·정호(鄭澔) 등 노론이 소환되어 조정에 들어섰다.
 
  노론이 정권을 잡자, 신임사화 때에 처단된 노론 사대신과 그 밖의 관련자들에 대한 신원 문제가 다시 논의되어 사대신이 복관되어 시호를 받았다. 정호·민진원 등 노론 측은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번안(飜案)해 당시에 자복한 사람들까지 신원했음에도 소론에 대한 보복을 계속 고집하였다.
 
  영조는 당습(黨習)을 꺼려 무욕(誣辱)을 밝히고 원통한 것을 풀어주면 그만이지 보복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1727년 영부사(領府事) 민진원, 우의정 정호 이하 여러 노론을 파면하고, 영조 1년에 파면했던 이광좌·조태억을 기용해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참여시켰다. 이해가 정미년이기 때문에 ‘정미환국’이라 한다.〉
 
 
  이인좌의 난
 
  이때만 해도 영조는 탕평책을 통해 노론과 소론을 섞어 쓰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이에 탕평파인 지평 조현명(趙顯命)은 신임사화 때 남형(濫刑)을 많이 저지른 것은 소론의 잘못이고, 영조 즉위 초에 보복에만 급급했던 것은 노론의 잘못이므로, 노론과 소론을 공정하게 등용해야 한다 주장하기도 하였다. 훗날 좌의정에까지 오르게 되는 조현명은 실제로 당색을 초월해 두루 사람과 교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조의 이런 탕평 노력은 경종을 위한 보복과 왕권 교체를 내걸고 일어난 이인좌(李麟佐· 1695~1728년)의 난으로 인해 큰 시련을 겪게 된다.
 
  1728년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급소(急少·소론 강경파)와 남인이 손을 잡은 결과였다.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박필현(朴弼顯)·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 등의 과격 소론 측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했다.
 
  그 명분으로 경종의 사인(死因)에 대한 의혹과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워,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密豊君 坦·소현세자(昭顯世子) 증손(曾孫)]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당인(黨人)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의 모반을 정당화하였으며, 또한 민심을 규합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1725년(영조 1년)부터 박필현 등은 당론을 토대로 자파(自派) 세력으로 간주되는 각 지방의 인물을 선별해나갔다. 그중 청주를 대표하는 인물이 이인좌였다.
 
  주동자는 박필현 등인데 왜 난의 명칭은 ‘이인좌의 난’일까? 거사는 정미환국 이듬해인 1728년 3월 15일이었다. 난은 이날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반군은 병영을 급습해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을 살해하고 청주를 장악한 뒤 권서봉(權瑞鳳)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삼고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나누어주었다. 또 경종을 위한 복수의 기(旗)를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해 조석으로 곡배(哭拜)하였다.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청주에서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북상하던 반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었고,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倡義使) 박민웅(朴敏雄) 등에 의해 상당성(上黨城)에서 궤멸되었다. 한편, 이인좌의 반란은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도 호응하였다. 그러나 결국 3월 24일 이인좌와 권서봉 등이 생포되고 반군들은 소탕되었다.
 
 
 
영조의 탕평책

 
  묘하게도 난을 일으킨 것도 소론이었고 소탕에 앞장선 사람들도 소론이었다. 이에 따라 영조 시대는 점점 노론 일색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소론은 줄곧 열세를 면치 못했다. 한편 이 사건은 영조에게는 큰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영조는 더 강하게 탕평책을 밀어붙이게 되는데, 이인좌의 난 이듬해인 1729년(영조 5년) 기유처분(己酉處分)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로써 한동안 탕평파가 조정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대해 《당의통략》은 이렇게 썼다.
 
  〈영종(영조)이 바야흐로 탕평의 법에 마음을 쏟아 사람을 쓸 때는 반드시 노론 한 사람을 쓰면 소론도 한 사람을 쓰고 남인과 북인(소북)도 간혹 등용하여 썼다.〉
 
  가톨릭대 박광용 교수는 《영조와 정조의 나라》에서 탕평 시대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탕평정치가 실시된 영·정조년간에는 노론·소론·남인·북인이라는 4색 붕당의 호칭을 군주 앞에서 먼저 말하거나 상소문에서 언급하는 것 자체가 법으로 금지되었다. 군주가 붕당을 타파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4색 붕당의 명칭 대신에 각 붕당 안에서의 견해차를 의미하는 완론(緩論)이니 준론(峻論)이니 탁론(濁論)이니 청론(淸論)이니 시파(時派)니 벽파(辟派)니 하는 호칭들이 사용되었다.〉
 
  기유처분 이후 소론 온건파 조문명·정석삼 계열과 노론 온건파 홍치중·김재로가 중심이 되어 탕평파를 이루면서 영조를 지원했고 향후 정권은 오랜 기간 안정기에 들었다.
 
 
  나경언의 투서
 
영의정 홍봉한
  영조는 왕권이 충분히 안정된 영조 25년(1749년) 15세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그사이 탕평당은 점차 외척당(外戚黨)으로 바뀌어 정우량(鄭羽良)·홍봉한(洪鳳漢) 같은 인물들이 정국을 주도했고 이천보·유척기·이종성 등은 새롭게 청류당(淸流黨)을 형성해 외척당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정우량은 영조가 아꼈던 화완옹주와 결혼한 정치달의 아버지이다. 옹주의 남편은 일찍 죽었고, 이에 정우량은 집안에 양자를 들이는데 그가 바로 정후겸(鄭厚謙)이다.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많지만 박광용 교수는 이들 외척당과의 갈등이 가장 큰 이유라고 본다. 반면에 이천보·유척기 등은 세자 보호에 힘을 썼다.
 
  영조 38년(1762년) 5월 22일 나경언이라는 자가 올린 투서 한 장이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전하의 곁에서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 모두 불충한 생각을 품고 있어 변란이 눈앞에 닥쳐왔다.”
 
  춘궁(春宮), 즉 세자가 환시(宦侍·환관 내시)들을 거느리고 불궤(不軌·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세자는 연로한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터였다. 영조는 69세, 세자는 28세였다.
 
  나경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액정서(掖庭署) 별감 나상언의 형이라는 사실과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으며 가산을 탕진하여 자립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두 가지가 실록에 기록돼 있다. 액정서란 이조(吏曹) 소속의 관아로 궁궐 내의 잔심부름을 담당했다. 궁궐 출입이 자유로웠던 중인(中人)이라고 보면 된다. 나경언은 형조를 찾아가 밀고를 했고 이를 접수한 형조참의 이해중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곧바로 영의정 홍봉한에게 보고했다. 이해중은 홍봉한의 처조카이기도 했다.
 
 
  영조의 친국
 
  홍봉한은 이해중으로 하여금 직접 국왕을 청대(請對)할 것을 명했고 영조는 이해중의 청대를 받아들여 이해중을 불렀다. 내용을 보고받은 영조는 크게 놀라며 옆에 있던 내시에게 “경언은 대궐 하인 상언의 피붙이인가?”라고 묻는다. 영조는 나상언을 알고 있었다.
 
  마침 경기도관찰사 홍계희가 입시(入侍)해 있었다. 영조는 홍계희에게 “궁성을 호위해야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만큼 실체가 있는 중대한 사안이냐고 물은 것이다. 홍계희는 궁성 호위를 서둘러야 한다고 답했다. 이어 사복시(司僕寺·궁궐의 가마나 말을 관리하던 기구)에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나경언에 대한 친국(親鞫)에 들어갔다. 친국이란 역모와 같은 중대사안에 대해 국왕이 직접 국문하는 것이다.
 
  이날 친국 현장에는 영의정 홍봉한과 우의정 윤동도(尹東度), 좌의정을 지낸 신만(申晩) 등이 입시했고 직접 심문을 담당할 의금부 지사에 남태제, 의금부 판사에 한익모, 의금부 동지사에 윤득량, 의금부 문랑에 홍낙순 등이 지명됐다.
 
  영조는 먼저 조정 신하들을 비판했다.
 
  “오늘날 조정에서 사모(紗帽)를 쓰고, 띠를 맨 자(벼슬하고 있는 사람)는 모두 죄인 중의 죄인이다. 나경언이 이런 글을 올려서 나로 하여금 원량(元良·세자)의 과실을 알게 하였는데, 여러 신하 가운데는 이런 일을 나에게 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나경언에 비해 부끄러움이 없는가?”
 
  왜 세자에게 이처럼 심각한 허물이 있었는데도 미리 고하지 않았느냐는 호통이었다.
 
  이제 세자의 차례였다. 세자는 영조가 머물고 있는 편전으로 찾아와 면대를 청했다. 그러나 이미 나경언의 밀고 내용을 100% 사실이라고 확신한 영조는 만나려 하지 않았다. 승지의 청이 계속되자 영조는 창문을 통해 세자를 내려다보며 크게 책망했다.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이 말을 들은 세자는 억울하다며 그때까지 처형되지 않고 문초를 당하고 있던 나경언과의 대질신문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영조의 화를 더 돋울 뿐이었다.
 
  “이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다. 어찌 대리청정하는 세자가 죄인과 면질을 하는가?”
 
  이에 세자는 울면서 “모든 게 저의 화증(火症)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자책을 하자 영조는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게 더 낫겠다”며 물러갈 것을 명했다. 창덕궁으로 물러나온 세자는 궁내 금천교 위에서 대죄(待罪)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행역’과 ‘북성유람’에 대해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영조는 이 둘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너무나 중요해서 언급은 했으나 실록 편찬 과정에서 누락된 것일까? 필자는 후자(後者)라고 생각한다.
 
  당시 영조는 국망(國亡)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첫째와 둘째는 자질 면에서 자신의 왕위를 잇기에 부족하고, 셋째와 넷째는 자신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보았다. 말이 좋아서 서로행역이고 북성유람이지 그것은 일종의 쿠데타 준비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농후했다.
 
 
  영의정 이천보의 자살
 
영의정 이천보
  나경언의 밀고가 있기 1년여 전인 영조 37년(1761년) 1월 5일 영의정을 지낸 중추부영사 이천보(李天輔·1698~1761년)가 음독자살을 했다. 그러나 실록에는 〈이천보가 물러나 육화정에서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64세였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이는 거짓이다. 그는 병으로 죽은 게 아니라 자결했다.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 유언 상소인 유소(遺疏)를 영조에게 올렸다. 꼼꼼하게 읽어보면 자살을 위한 약을 먹은 직후 써 내려갔다는 사실과 행간에 담긴 영조에 대한 원망을 읽어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삼가 신(臣)이 외람되이 임금께 넘치는 은덕을 입고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이르렀으나 조금도 보답하지 못했나이다. 실낱같은 목숨이 끊어지려 하여 용안(龍顔)을 영영 이별하고자 합니다. 밝고 곧으신 성정을 우러러 뵈오니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칠순 보령에도 강건하시어 신하와 백성들이 전하의 만수무강을 우러러 기원하고 있습니다. 하오나 저는 구구하게 한 말씀 아뢰고자 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전하께서는 하셔야 하는 많고 많은 일들 중에 옥체를 보전하고 아끼시는 일만 한 것이 없습니다. 간혹 기쁨과 노여움이 폭발하게 되면 평정을 잃을 뿐만 아니라 기혈이 상할 염려가 있습니다. 간혹 시행과 조치가 격노에 이르게 되면 정책과 법령을 시행함에 해가 미칠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정신이 소모되고 허물어지는 근심이 따르게 됩니다. 삼가 아룁니다. 전하께서는 중화(中和)의 도리에 더욱 힘쓰시어 강녕하시는 아름다움을 누리십시오.
 
  신은 전하를 보필할 임무를 받들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죄를 물으신다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오나, 평소에도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느라 안으로 맺힌 바가 있습니다.
 
  장차 죽음에 임하여 숨이 가빠지고 말이 짧아져 하나하나 다 아뢰지는 못합니다. 다만 옥체 보전하시고 아끼시라는 두 마디로 전하께 저의 충정을 바칩니다. 베개에 엎드려 눈물만 흘리느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방황하시고 근심하신 것은 신이 전하의 뜻을 살펴 제대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임유경 옮김, 《대장부의 삶》 [역사의 아침 간])
 
  ‘기쁨과 노여움이 폭발하게 되면…’ 이는 숙종의 성품 ‘희로폭발(喜怒暴發)’이 아들 영조에게 그대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화증’으로 나타났고 정조에게도 비슷한 기질이 유전됐다.
 
  의문의 자결을 한 이천보는 옥천군수를 지낸 이주신(李舟臣)의 아들로 1739년(영조 15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교리,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1749년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후 이조와 병조판서를 지냈고 1752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754년 영의정에 오른다. 이후 돈녕부영사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가 이때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의 평양 원유사건(遠遊事件)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음독자결을 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관대하고 생각이 깊다는 평을 들었다. 노론의 성향을 갖고 있었지만, 온건 중도파로 세자 보필에 각별했다.
 
  그런데도 실록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자살을 암시할 만한 아무런 단서도 싣고 있지 않다. 그런데 정확히 40일 뒤인 2월 15일 자 실록에 다시 배경 설명 하나 없이 우의정 민백상(閔百祥·1711~1761년)의 졸기(卒記)가 실린다. 졸기란 판서급 이상의 인물이 죽었을 때 실록에 기록되는 그 사람의 생애에 관한 간략한 기록이다.
 
 
  우의정 민백상의 자결
 
우의정 민백상
  〈우의정 민백상이 졸(卒)하였다. 문충공 민진원(閔鎭遠)의 손자이다. 젊어서부터 영특하고 준수하며 풍채와 거동이 시원스럽게 뛰어났으므로, 문충공이 일찍이 빈객(賓客)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나의 가장 훌륭한 손자이다’라고 하였다. 영종(영조) 경신년(1740년·영조 16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홍봉한·김상복과 서로 친하게 지냈으며 서로 잇달아 정승의 지위에 들어가, 세상에서 세 정승의 친구(삼태지우·三台之友)라고 말하였다. 민백상이 우의정으로 발탁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졸하였는데, 나이 51세였다. 그 뒤에 홍봉한이 수상(首相·영의정)에 임명되자 마침내 김상복을 추천하여 우의정으로 삼도록 하였다. 민백상이 영남·호남·관서 3도(道)를 관할하였지만 청렴하다는 명성은 없었고 부유하기가 한양에서 으뜸이었으므로 사대부들이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의 동생 민백흥(閔百興)의 아들 민홍섭(閔弘燮)을 데려다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훗날 민홍섭이 적신(賊臣) 홍계능(洪啓能)과 서로 결탁을 했다가 민홍섭이 죽은 후 홍계능의 역모가 발각되어 민씨(閔氏) 집안이 마침내 망하였다.〉
 
  민백상 집안은 뿌리 깊은 노론 골수로, 특히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외척 집안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민백상의 증조할아버지 민유중은 숙종의 장인, 즉 국구(國舅)였다. 장희빈으로 인해 폐서인 되었다가 다시 왕비로 복귀하는 등의 파란을 겪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바로 그의 딸이었다. 민유중에게는 진후, 진원, 진영, 진창, 진오 등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민진후의 고손자 민치록이 바로 명성황후 민씨의 아버지이다. 민백상의 증손자 민태호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첫째 부인인 순명효황후 민씨의 아버지이다. 민진영의 고손자 민치구는 흥선대원군의 장인이다.
 
  민백상도 자결했다. 우의정 민백상의 자결은 엄청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록은 역시 이상하리만치 침묵을 지킨다. 다만 다음 날 영조는 위로의 하교를 내렸다.
 
  〈우의정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과 신하 된 자로서 외경(畏敬)하는 마음은 저 하늘을 찌를 만하다. 이와 같은 뛰어난 정승을 얻어 뒷날을 믿을 만하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이런 비보(悲報)를 들을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18일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좌의정 이후의 죽음
 
좌의정 이후
  다음 날인 19일에는 이천보와 민백상 두 사람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좌의정 이후에게 명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였다. 도대체 무슨 일로 두 사람이 자결을 했는지에 관해 실록은 단 한 자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전·현직 두 정승의 자결로 조정 안팎이 뒤숭숭한 가운데 보름 후인 3월 4일에는 좌의정 이후(1694~1761년)가 자결했다. 먼저 이후의 졸기부터 보자.
 
  〈좌의정 이후가 졸하였다. 음관(蔭官)으로 진출하여 목사(牧使)가 되었으며 태학사(太學士) 조관빈(趙觀彬)을 추종하였었는데, 조관빈이 큰 그릇으로 여겼으며 조관빈이 과거를 볼 것을 권하자 문과에 합격하였다. 고(故) 신만과는 친하게 지냈는데, 신만이 이조판서가 되자 이후를 경연 동지사로 추천하였고, 이후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지위와 명망을 굳히게 되었다. 병조판서에서 다시 이조판서로 옮겼는데, 역신(逆臣) 김상로(金尙魯)가 그를 극력 추천한 때문이었다. 외직(外職)으로 나가서는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 우의정이 되었으나 이후가 평소 홍봉한의 미움을 받았다. 이에 수찬 이형규가 이후를 탄핵하며 개정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이형규를 바다 가운데로 귀양 보냈다. 이때 이후가 병으로 졸하니, 나이 68세였다.〉
 
  ‘병으로 졸하니’라고 했지만 실은 이후도 역시 자결이었다. 영조는 3월 11일에야 승지를 보내 이후를 조문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다만 이천보에게는 문간공, 이후에게는 정익공, 민백상에게는 정헌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20년 만에 드러난 죽음의 진실
 
  의문의 자결로 생을 마감한 이들 3정승에 관한 언급은 120여 년이 지난 고종 때에 와서야 조금이라도 이뤄질 수 있었다.
 
  〈이들 3인은 영묘(英廟·영조) 때의 재상으로 의리를 바로잡고 당시의 난국을 크게 구제하였다.〉(《고종실록》 18년 3월 29일)
 
  〈고(故) 상신(相臣·정승) 문간공(文簡公) 이천보, 정익공(貞翼公) 이후, 정헌공(正獻公) 민백상은 영조 때 남다른 우대를 받으면서 정사가 잘되도록 도운 결과 온 나라의 백성들이 영원히 덕을 입게 되었습니다. 뭇 소인들이 나라의 근본을 흔들던 때에 정성을 다하여 세자를 보호하는 데에 있는 힘을 다하였다가, 신사년(1761년)에 이르러서는 당시의 사태가 더욱더 어쩔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눈물을 흘려 통곡하며 맹세코 살기를 바라지 않고 서로 손잡고 영결하면서 연달아 죽었으니 그 뛰어난 충성과 뛰어난 절개는 천지를 지탱할 수 있고 해와 달처럼 빛났습니다.〉(《고종실록》 36년 11월 19일, 특진관 심상황이 올린 상소 중에서)
 

  이쯤에서 3정승의 죽음과 관련된 의문은 잠정적으로나마 풀고 넘어가야 한다. 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세자의 평양원유는 영조 36년(1760년) 가을부터 겨울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와 세자, 부자(父子) 간의 충돌은 극에 달했다. 당시는 세자 대리청정이 이뤄지고 있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조(大朝·영조)와 소조(小朝)의 충돌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나라의 근간이 통째 흔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성미가 급하고 직선적이었다. 숙종부터 시작된 화증은 영조, 사도세자를 거쳐 정조까지 이어진다.
 
  3정승은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끼일 수밖에 없었다. 세자의 평양원유 사실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 듣게 된 영조는 진노했다. 어쩌면 이때 이미 세자의 자결이나 적어도 폐세자 추진을 영조가 정승들에게 밝혔을 것이다. 이에 3정승은 대략 한 달 간격으로 자결함으로써 영조에게는 세자를 용서해줄 것을, 세자에게는 정신 차릴 것을 충격적 방식으로 전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계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사도세자의 쿠데타 준비설, 즉 평양에서 쿠데타를 준비했다는 설도 충분히 검토해볼 만한 가설이다. 그러나 실록은 그것을 검증할 만한 자료들을 원천적으로 삭제해버렸다.
 
 
  경주 김씨의 등장
 
  사도세자가 죽자 더 이상 당파 구도는 바뀌지 않은 채 외척들 간 갈등만 깊어갔다. 그 갈등의 깊이만큼 훗날 정조가 감당해야 할 정치적 부담은 커졌다고 할 것이다.
 
  영조는 영조 35년(1759년) 경주 김씨 집안에서 계비(繼妃)를 맞아들였다. 이 사람이 바로 훗날 정조와 대립하게 되는 정순왕후 김씨(1745~1805년)이다. 혼인 당시 김씨 나이 14세였다. 이후 정순왕후의 친족들은 국혼 후 김귀주(金龜柱)를 필두로 정계 진출이 활발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노론 벽파였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남당(南黨)을 이루어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의 북당(北黨)과 대립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처럼 집권 초중반에는 탕평을 기치로 내걸었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척신에게 의존하게 되는 영조의 인사 방식은 그대로 정조에게서도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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