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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미술가들

스캔들로 보는 미술사 7 / 죽음이 낳은 탄생 - 뭉크와 아이들

글 : 추명희  작가  vino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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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누나, 남동생 모두 결핵으로 세상 떠나
⊙ 스토킹 하던 연인 툴라 라르센이 쏜 총에 뭉크 왼손 중지 잃어
⊙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추명희
《월간조선》 《톱클래스》 《더 트래블러》 기자로 일했다. 미술 작품 애호가로, 꾸준히 컬렉션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사와 정치학사,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쳤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1863~1944년)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노르웨이에서는 국민적인 화가로 그의 초상이 1000크로네 지폐에 그려져 있을 정도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천착했으며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고독과 불안을 주로 인물화를 통해 표현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나는 슬픔의 숨결을 느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다리 난간에 기대 섰다.… 죽도록 피로감이 몰려왔다. 피오르 위의 구름은 뚝뚝 떨어져 내리는 핏물처럼 붉은빛이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지만 나는 가슴 속의 아물지 않은 상처로 덜덜 떨며 멈춰 섰다. 그때 세상을 관통하는 거대하고 심상치 않은 비명이 들려왔다.”
 
  죽음을 그린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1863~1944년). 그가 언젠가 노르웨이 오슬로 북쪽에 있는 시골 마을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산책을 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일기장에 적어둔 내용이다. 뭉크는 몇 년 후인 1893년, 이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절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당시 여동생 라우라가 입원한 정신병원뿐만 아니라 도살장까지 있었다. 실제로 미친 사람들과 살육당하는 동물들의 비명 소리가 섞여 때때로 들려오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절규〉를 보면 공포로 가득 차 미라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의 비명이 캔버스를 뚫고 나올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난간 옆으로 불안하게 넘실대는 바닷물과 핏빛으로 물든 하늘은 그의 불안한 내면을 드러내는 예술적인 표현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실제로 그가 경험한 공포를 그린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의 공포
 
〈절규(The Scream, 1893)〉
작가가 생전에 붙인 제목은 〈자연의 절규〉. 총 4점의 연작이 있으며 유화 작품은 오슬로 국립미술관, 템페라 작품과 판화 작품은 오슬로 뭉크미술관, 그리고 또 하나의 작품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은 오슬로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화 작품이다.
  1883년 8월 인도네시아 크라카토아 화산이 폭발하면서 뿜어져 나온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어 몇 달 동안이나 유럽 전역에 새빨간 노을빛을 만들었다. 일기를 보면 이때 그가 직접 보고 드로잉을 해둔 것이 아닐까 싶다. 〈절규〉는 〈생명의 프리즈〉로 알려진 연작(連作)의 일부가 되었다. 이 연작의 원래 의도는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묘사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본인의 자서전이 되고 만 것이다.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 남동생의 죽음을 비롯해 자신이 거의 죽을 뻔했던 경험 등 온통 죽음과 그 언저리의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자연을 보는 시각이 인생을 보는 시각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대로라면 그에게 인생은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다. 타는 듯한 노을을 보고 보통 사람들이 황혼의 아름다움에 빠져들 때조차 그는 혼자 공포 속에 침몰했으니까. 뭉크는 자연은 물론 사랑에 대해서도 다가가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선을 그었고 81세로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았다.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살았던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장수(長壽)의 아이콘이 된 비결은 바로 이런 깨달음 덕분이었을까?
 
  뭉크는 고작 다섯 살에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어머니가 기침을 할 때마다 손수건에 피가 묻어 나오는 것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의 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결핵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의 병을 물려받았는지 그는 매년 겨울마다 열과 기관지염으로 앓아누웠고 열세 살이 되면서 피가 섞인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는 이겨냈지만 가까이에 있던 죽음은 누나 소피에와 남동생 안드레아스까지 앗아갔다. 이때부터 뭉크는 늘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는 한밤중에 자다가도 자기가 이미 죽었을까 봐 두려워하며 깨어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가 지금 지옥에 있는 건가?’ 하고 헷갈려했다. 뭉크는 지독한 가난과 불행한 가정사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방황하던 그는 어느 곳에서도 위안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고 여동생 라우라는 어린 나이에 정신분열증 초기 증세인 공상과 망상에 시달리며 죽음에 다가가고 있었다.
 
 
  사랑은 ‘惡의 꽃’
 
〈흡혈귀(Vampire, 1895)〉
포옹하는 남자와 여자를 묘사하고 있으며, 여자는 남자의 목에 키스를 하거나 아니면 물어서 흡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뭉크는 애초에 작품 제목을 〈사랑과 고통〉이라고 지었으나 평론가들이 작품의 기괴한 분위기 때문에 흡혈귀라고 별칭을 붙인 것이 후일 작품 제목으로 굳어졌다. 〈절규〉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작으로 절규보다 몇 달 전에 완성됐다.
  뭉크는 예술학교에 입학했지만 그곳에서 가장 과격한 화가 집단에 합류했고 니체의 저서를 탐독하고 자살을 옹호하는 보헤미안 집단에 가입했다. 간밤의 숙취를 달래기 위해 대낮부터 해장술을 마실 정도로 술독에 빠져 살았던 그는 유부녀를 만나 불륜까지 저지르게 된다. 스무 살의 뭉크는 연상의 여인 헤이베르그 부인에게 걷잡을 수 없이 푹 빠져들었다. 하지만 당시 소문난 팜파탈(femme fatale)이었던 그녀에게는 뭉크 외에도 수많은 남자가 있었다. 터질 듯한 분노와 질투심에 사로잡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혼자만의 전쟁 같은 사랑은 6년간이나 지속되었고 심장이 갈기갈기 찢긴 뭉크는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을 갖게 되었다.
 
  뭉크가 좋아했던 니체가 말했다. ‘망각은 신(神)이 인간에게 준 축복’이라고. 뭉크 역시 인간이기에 그 축복을 받아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1893년 서른 살의 뭉크는 베를린으로 건너가 활동을 시작했고, 우연히 베를린으로 유학 온 어릴 적 친구 다그니 유을과 재회하면서 마음속에 다시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를 동료 예술가에게 뺏기고 만다.
 
  1895년 작 〈흡혈귀〉를 보면 그가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드러나 있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목덜미를 무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 흡혈귀라니. 이제 그에게 있어 여자란 영혼의 피를 빨아먹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의 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절대로 가까이 가지 않고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계속해서 실연(失戀)을 겪은 것을 보면 그가 남자로서 매력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싶다. 어쩌면 그의 그림처럼 해골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실제로 그는 늘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친구들은 그를 “노르웨이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라고 불렀다. 그의 문제는 외모가 아니라 늘 죽음에 쫓기는 불안한 내면이었다.
 
 
  ‘흡혈귀 같은 여자’ 툴라
 
  1898년 그는 정말로 흡혈귀 같은 여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스물아홉의 상속녀 툴라 라르센. 당시 기준으로 노처녀이긴 했지만 부유한 와인 도매상의 딸로 해박한 예술적 지식과 아름다운 외모까지 갖춘 그녀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뭉크는 그녀를 통해 상류사회에 진입하게 되었고 예술적으로 황금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뭉크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툴라의 집착은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그녀의 소유욕에 지친 뭉크가 관계를 정리하기에 이른다.
 
  뭉크는 어려서부터 병들고 신경쇠약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란 탓에 결혼을 혐오했는데 툴라는 이런 그의 어둡고 불안정한 내면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기를 졸랐다. 툴라는 그를 스토킹 하며 쫓아다녔다. 뭉크는 간신히 툴라를 따돌리고 2년 가까이 벗어나 있었지만 그녀는 결국 해변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내 그 근처로 이사를 감행했다.
 
  1902년 여름 어느 날 밤, 툴라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연락을 받고 뭉크는 곧장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뭉크가 방 안에 들어서자 툴라는 갑자기 권총을 꺼내 들고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자살하겠노라고 협박을 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녀와 함께할 수 없는지를 한참 동안 설명했지만 도통 말이 먹히지 않았다. 격한 감정 속에서 둘의 실랑이가 이어진 끝에 방아쇠가 당겨졌고 발사된 총알은 뭉크의 왼손 중지를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툴라는 이 일이 있은 지 3주 후 새 연인을 만나 파리로 떠나버렸다. 이 사고로 뭉크는 평생 왼손에 장갑을 끼고 다녔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그 손을 숨기며 살았다. 망가진 것은 그의 손가락만이 아니었다. 뭉크는 영원히 사랑과는 작별을 고하게 된다. 그동안 사랑은 그저 고통일 뿐이었는데 이제 목숨을 위협하는 죽음의 얼굴로까지 변해버린 것이었다.
 
 
  ‘사랑의 죽음’
 
〈병든 아이(The Sick Child, 1886)〉
뭉크가 스물세 살 되던 해에 일찍이 먼저 세상을 떠난 누나 소피에를 떠올리며 그렸다. 소피에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여인이 아닌 창가에 드리워진 검은 커튼. 창백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얼굴에서 죽음에 대한 무력감이 느껴진다. 커튼은 검게 칠한 후 그 색을 조금씩 벗겨낸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그림 전체에 색을 벗겨낸 흔적이 드러나 있다. 이는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일 수도 있으나 삶 전체에 드리워진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본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을 그리는 화가. 뭉크는 누나가 죽은 지 9년이 흐른 후에 그 기억을 더듬어 〈병든 아이〉를 그렸듯이 이 사건으로부터 5년이 지난 후인 1907년에 〈마라의 죽음〉을 그린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1793년 작 〈마라의 죽음〉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툴라와의 일에서 상처받은 자신을 애도하기 위해서 그린 것이다. 피 흘리며 침대에 누워 있는 나체의 남자와 귀신처럼 서 있는 나체의 여자. 어쩌면 작품 제목을 〈사랑의 죽음〉으로 바꾸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
 
〈마라의 죽음(The Death of Marat, 1907)〉
근대 회화의 아버지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1793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실제 사건을 그린 작품 〈마라의 죽음〉에서 영감을 받았다. 자코뱅당의 지도자인 ‘마라’가 반대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한 소녀에게 자기 집 욕실에서 살해당한 사건을 묘사한 것. 뭉크가 그린 〈마라의 죽음〉은 한때 연인이었으나 결별 후 자신을 스토킹 했던 툴라에게서 받은 상처를 빗대어 표현했다. 그림 속에서 피를 흘리며 죽은 듯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의 남자는 마라인 동시에 뭉크 자신이며, 침대 옆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여인은 살인녀인 동시에 툴라이다. 그가 여성혐오증을 넘어 심각한 피해망상증에 시달렸음을 잘 보여준다.
  뭉크는 점차 유명세를 탔고 그림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그의 정신 상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알코올 중독에 더해 누군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피해망상에까지 시달리게 된 것. 여동생 라우라를 괴롭히던 정신병이 그에게도 마수를 뻗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팔다리의 마비증세를 겪었는데 친구들이 그를 코펜하겐 외곽의 병원으로 싣고 갔을 때 의사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신경계 손상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이때부터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휴양지를 다니며 몸과 마음의 치유를 시작하게 된다. 1908년에는 술까지 끊는 정신력을 발휘했고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된 시기를 맞이했다.
 
 
  스페인 독감도 이겨내
 
〈스페인 독감을 앓은 후의 자화상(Self-portrait after the Spanish Flu, 1919)〉
뭉크는 오십대 중반에 이르렀을 때 또 한 번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했다. 당시 전 세계를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에 걸린 것. 혹독하게 병을 앓은 뒤 수척한 모습이지만 살아남은 자의 자부심과 결의가 느껴진다. 가족들이 병약해 늘 죽음과 질병 속에서 살아온 뭉크는 자신만의 행동수칙을 잘 지킨 덕에 독감을 이겨냈는데 그중에는 발에 물 적시지 않기, 화초 가꾸지 않기, 장례식장 가지 않기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유명세에 부(富)까지 얻은 뭉크는 이제 자기에게는 오로지 그림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1909년 마흔여섯의 그는 오슬로 연안의 작은 마을 크라게뢰에 집과 작업실을 마련한다. 그리고 여기서 드디어 그가 원하는 대로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하며 평화로운 여생을 보냈다.
 
  그는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의 말미인 1918년 전 세계를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에도 감염되었지만 살아남았다. 희생자가 무려 50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는 회복 후 자축하는 마음으로 〈스페인 독감을 앓은 후의 자화상〉이라는 작품까지 그렸다.
 
  평화로이 살아가던 그는 1926년 여동생 라우라가 죽었을 때 잠시 흔들렸다. 라우라의 장례식에 도저히 참석할 용기가 없었던 그는 나무 뒤에 숨어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가족의 죽음을 직접 대면하기는 여전히 어려웠던 것. 그래도 그 전에 아버지가 죽었을 때처럼 심각하게 자살을 고려할 정도의 절망에 빠지진 않았다.
 
 
  히틀러에게 ‘타락한 미술가’로 낙인찍혀
 
  1930년대 후반 독일에서는 나치가 강제로 미술개혁을 시도했다. 실패한 미술학도였던 히틀러가 인상파 이후의 현대미술들을 부패의 근원이라고 낙인을 찍었기 때문. 1937년 히틀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미술관에 공문을 보내 아주 약간이라도 현대적인 작품이면 모두 없애버리라고 주문했다. 그러고 6월에 소위 타락한 미술로 찍힌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타락 미술 전시회를 열고 공개 비판을 했다.
 
  뭉크와 빈센트 반 고흐,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가 포함된 이 전시는 현대미술 역사상 가장 놀라운 전시회로 손꼽히고 있다. 전시회는 어마어마한 관심을 끌어모았다. 뮌헨 전시에만 2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 정도였다. 뭉크는 타락한 화가로 매도당하며 1940년 독일군이 노르웨이를 침공했을 때는 목숨의 위협까지 느끼기도 했지만 계속 그림을 그렸다. 어차피 그의 삶에는 늘 죽음이 가까이 있었으니까. 그는 주로 자화상(自畵像)과 풍경화에 전념했다.
 

  1944년 1월, 뭉크는 죽은 후 다시 한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여러 해 동안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그의 집 2층이 개방되자 지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곳에는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그림 1008점, 드로잉 4443점, 석판화 378점, 에칭화 188점, 목판화 148점 외에도 셀 수 없을 만큼의 사진과 일기 등의 자료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는 이 모든 작품을 아무런 조건 없이 오슬로시에 양도했고 1963년에 뭉크미술관이 개관했다.
 
  뭉크는 현재 명실공히 노르웨이 최고의 화가로 추앙받고 있다. 평생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다니던 병약한 예술가치고는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작품 활동을 했다. 뭉크는 평소에 자신의 그림들을 가리켜 ‘아이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애착이 심했다. 그래서인지 그림을 팔더라도 원본(原本)만큼은 자기가 보유하겠다는 집념으로 사본(寫本) 제작에 착수하곤 했다. 어쩌면 그는 사랑 대신 죽음과 결혼한 것이 아닐까. 그사이에서 태어난 수만 점의 작품을 그래서 그는 아이들이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낳은 탄생, 죽음의 아이들.
 
 
  “예술은 한 인간의 心血이다”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Self Portrait : Between Clock and Bed, 1940)〉
죽기 4년 전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그린 자화상. 평론가들은 왼쪽의 시계는 현재를 의미하고, 오른쪽의 침대는 죽어 눕는 공간으로 해석한다. 자신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음을 표현한 것. 평생토록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장수하였음은 물론이고 살아생전 작품의 예술성을 인정받아 부유한 삶을 살았다.
  그는 “나의 모든 작품은 질병에 대한 사색에서 비롯됐다”며 “두려움과 고통이 없었다면 나의 삶에는 방향키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자신의 운명의 나약함에 대한 고통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해낸 작가 뭉크. 이것이 바로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이 그의 작품에 공감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心血)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에 그린 마지막 그림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에는 텅 빈 눈에 어깨는 축 늘어진 늙은 남자, 뭉크가 서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그림에 늘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이나 공포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죽음과의 긴 전투에서 승리한 노장(老將)이 그저 담담하게 세상을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맥아더 장군이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했던가. 〈절규〉에서와 같은 공포의 비명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됐어, 이젠 사라져도 좋아”라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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