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희빈 賜死, 숙종의 병환을 계기로 少論 퇴조… 老論 복귀
⊙ 윤증, 부친 윤선거의 묘갈명 문제로 송시열과 대립
⊙ 숙종, ‘《가례원류》 저작권 분쟁’에 대한 丙申處分 내리면서 老論 지지
⊙ 김장생의 문묘 배향, 송시열의 문집 간행 거치면서 송시열 복권 분위기 조성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윤증, 부친 윤선거의 묘갈명 문제로 송시열과 대립
⊙ 숙종, ‘《가례원류》 저작권 분쟁’에 대한 丙申處分 내리면서 老論 지지
⊙ 김장생의 문묘 배향, 송시열의 문집 간행 거치면서 송시열 복권 분위기 조성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윤증
숙종 20년(1694년) 4월 1일 숙종은 세 번째 환국(換局), 즉 갑술(甲戌)환국을 단행해 정권 세력을 남인(南人)에서 서인(西人)으로 바꾸었다. 이후 정국은 서인 중에서 소론(少論)을 중심으로 운영이 되었다. 이때, 노론(老論)과 소론은 정책을 둘러싼 큰 이견은 없었고 단지 장희빈이 낳은 세자를 보는 시각을 두고서 극명하게 갈렸다. 노론은 세자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소론은 긍정적이었다.
숙종 28년(1702년)에 접어들자 숙종은 눈에 띄게 노론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장희빈에 대한 사사(賜死)에 반대했던 남구만(南九萬)은 유배를 보냈고 반면 사사를 역설했던 노론의 김춘택(金春澤)은 석방했다. 마지막까지 장희빈의 사사에 반대했던 당시의 영의정 최석정(崔錫鼎·1646~1715년)도 내침을 당했다.
당시 조정은 영의정 서문중, 좌의정 이세백, 우의정 신완의 삼정승이 이끌고 있었다. 서문중은 박세채 계열 소론으로 두 번째 영의정을 맡은 인물이었다. 좌의정 이세백은 노론계 인사였다. 그는 장희빈이 사사당할 당시 세자가 찾아와 옷자락을 잡으며 눈물로 호소했으나 외면해버렸다. 이처럼 세자에 대한 태도에서 소론과 노론은 입장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신완의 경우에는 당초에는 소론이었다가 노론으로 당론을 바꾼 경우에 속한다. 그는 갑술환국 때 대사간으로 복직해 목래선을 비롯한 남인 세력 축출에 앞장섰다. 이후 남인 및 장희빈 처리를 둘러싸고 강온파가 갈리자 뜻밖에도 점차 노론 편에 섰다. 그만큼 숙종의 노선이 노론 쪽으로 기울어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반청(反淸)의식이 강한 노론의 입장을 반영해 북한산성 축조를 시도했으나 당시에는 소론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 같은 삼정승의 구성으로 볼 때 숙종의 마음은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소론에서 노론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40대 중반에 이른 나이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숙종의 保守化
숙종 30년 1월 10일의 기록은 숙종의 세계관 자체가 소론에서 노론으로 확실하게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는 벌써 신완이 영의정으로 승진해 있었다. 이날 숙종은 대신과 비변사 신하들을 인견하는 가운데 이런 말을 한다.
“올해는 갑신년으로 명(明)나라가 망한 지 주갑(周甲·60년)을 맞았다. 돌이켜보건대 조선이라는 이름도 명나라로부터 받았고 임진왜란 때 신종 황제가 직접 군사를 보내어 다시 나라를 재건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을 당했지만 삼학사(三學士)가 있어 절의(節義)와 강상(綱常)이 실추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세월이 흘렀다고 하여 신하들이 올리는 글에도 강개스러운 말이 다 사라졌다. 세월이 흐르면 점차 잊는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사정은 너무나도 개탄스럽다. 주갑의 해를 맞이하니 감회가 창연하다.”
숙종의 이 말은 노론을 배려해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40대 중반 나이에서 온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인식이 보수화(保守化)된 결과로 봐야 한다. 게다가 숙종은, 특히 우리 역사에도 밝은 군주였다. 이에 영의정 신완은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연경(燕京·베이징)에 가보니 중국의 한족(漢族)들도 모두 오랑캐의 머리를 하고 있었고 옛 명나라의 의복을 따르는 우리를 보고서도 전혀 흠모하는 뜻은 없고 도리어 조소(嘲笑)하는 기색이 완연하였습니다. 대체로 인정이란 오래되면 잊기가 쉽고 후생(後生)들은 지난 일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고 답한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이 그저 주고받는 환담 수준이었다. 그런데 숙종은 신완의 말을 받아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들의 물든 풍속은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객사(客使·청나라 사신)가 나올 적에 길 양쪽에 서서 구경하는 것을 화사(華使·옛 명나라 사신)와 똑같게 하고 있으니, 원통함을 품고 아픔을 참는다는 뜻이 없음을 알 수 있으며,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러 진실로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백성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여기서 논쟁이 촉발된다. “백성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신완은 두리뭉실하게 숙종 스스로 각오를 다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답한다. 좌의정 이여도 효종 때의 북벌(北伐)계획을 거론한 다음 “전하께서 진실로 분발하시어 대지(大志)를 확립하신다면 병기를 수선하고 변방을 공고히 하는 등의 계책은 단번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라며 결국은 신완의 의견을 따랐다. 결국 숙종은 “서서히 뒷날을 기다려 의논을 정하자”며 물러섰다. 그러나 이때의 토론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후 숙종의 세계관 변화를 살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禪位 파동
숙종 31년(1705년) 10월 29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숙종이 자신의 화증(火症)이 지난 5~6년 동안 심해져 더 이상 국정(國政)을 감당할 수 없으니 세자에게 선위(禪位)하겠다는 의사를 전격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재위 31년 동안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때 세자의 나이 18세였다. 조선 임금들이 흔히 해오던 선위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 임금들의 선위 파동을 일으키는 목적은 다양했다. 태종의 경우 정적(政敵) 제거 수단으로 활용했고 세종은 정말로 병 때문에 넘겨주려 했다. 세조는 충성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선조는 정치적 수세(守勢)에서 탈피하기 위해 선위 파동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숙종은 과연 어떤 생각에서 선위 의사를 밝힌 것일까?
그가 선위 의사를 밝히면서 했던 말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나를 아는 자는 내가 깊이 근심하는 것으로 여기고, 나를 모르는 자는 내가 정사(政事)에 싫증난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사소하게 문서를 줄여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구구하게 묵은 뿌리나 썩은 풀로 효험을 바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가롭게 조양(調養)하지 않으면,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근심이 있게 될 것이다.”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병을 얻었으니 선위하지 않으면 죽을병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숙종이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 달여 전인 9월 25일 오른쪽 엉덩이에 종기가 나서 약방에서 진료를 한다. 당시 질병과 관련된 첫 번째 기록이다. 9월 29일에는 종기가 심해져 약방제조들이 의원들을 거느리고 숙직에 들어간다. 그러다 10월 5일이 되어 종기는 약간 수그러든다. 이때의 종기는 12월 중순경에야 다 낫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숙종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신하는 하나도 없었다. 우의정 이유를 비롯해 승정원과 홍문관 관리들이 직접 아뢰겠다고 했으나 글로써 대신할 것을 명한 다음 숙종은 선위 절차를 세우라고 예조에 명했다. 평소의 숙종 성격대로라면 정말로 선위가 이뤄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김춘택의 재등장
승정원에서는 선위 의사를 밝힌 비망기를 봉행할 수 없다며 숙종에게 도로 가져왔고 이러기를 열두 번이나 반복했다. 승정원에서는 선위 절차도 봉행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다음 날에도 대신 백관들이 선위의 명을 거두기를 청했다. 당연히 이날은 세자도 글을 올려 선위의 명을 거두어줄 것을 강청했으나 숙종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다음 날에도 세자를 비롯해 지방 유생들까지 선위를 거두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11월 2일 세자의 세 번째 상소가 올라오자 그에 답하는 형식으로 숙종은 선위의 명을 거둔다.
“너의 정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신하들이 정성을 다해 아뢰어 청하는 것을 끝내 저버릴 수 없었으므로, 이제 막 애써 따랐다.”
숙종의 선위 파동은 불과 4일 만에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를 통해 숙종은 세자를 비롯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숙종 31년 10월의 선위 파동은 불과 4일 만에 끝났지만 노론에 준 공포와 충격은 컸다. 정말로 숙종이 전위(傳位)라도 하는 날이면 노론은 발붙일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분위기에 대해 이건창은 《당의통략》에서 굳이 김춘택의 이름을 거명하며 “선위 파동 직후부터 김춘택 등이 더욱 불안해하고 사람들의 말들이 다 흉흉하였다”고 적고 있다. 갑술환국의 1등 공신이자 모주(謀主)인 김춘택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술환국 때의 적이 남인이었다면 이제는 소론이었다.
그런데 도발은 의외로 노론이 아닌 쪽에서 시작됐다. 숙종 32년(1706년) 5월 29일 소론 유생 임부가, 9월 17일에는 남인 유생 이잠이 김춘택을 겨냥한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점차 노론이 소론을 제압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는 정국 상황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상소는 목숨을 거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임부는 이 상소 건으로 유배를 갔고 이잠은 목숨을 잃게 된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이잠의 상소가 더 직설적이고 심각했다.
이잠의 상소
〈춘궁(春宮·세자)을 보호하는 자는 귀양 보내어 내치고 김춘택에게 편드는 자는 벼슬로 상 주니, 어찌 전하께서 춘궁을 사랑하는 것이 난적(亂賊)을 사랑하는 것만 못 하시어 그렇겠습니까? 권세 있는 척신(戚臣)이 일을 농간한 것입니다.… 그 기틀을 잡은 자가 있고 그 성세(聲勢)를 돕는 자가 있으며 그 모략을 맡은 자가 있어 위란(危亂)을 꾸미고 선동하는 계책이 아님이 없었는데, 그 귀결처를 요약하면 좌우전후가 모두 춘궁에게 칼날을 들이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십니까? 뭇 신하가 전하의 허물을 말하여 걸핏하면 연장(連章)을 올리기까지 하였으나, 감히 김춘택의 죄를 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전하의 위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김춘택의 위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일이 혹 김춘택에 관계되는 것이면 그 무리가 또한 따라서 중상하니, 신은 아마도 화를 면하고 복을 찾는 길이 전하에게 있지 않고 김춘택에게 있는 듯합니다.… 접때 임부의 상소는 참으로 종사(宗社)의 대계(大計)에서 나와 말이 매우 명백하고 정당하였는데, 조태채처럼 고락을 같이할 의리가 있는 자가 앞에서 거슬러 공격하고 민진후처럼 인척(姻戚)으로 왕실에 가까운 자가 뒤를 이어 죄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다 사의(私意)에 가리어져 스스로 제 몸을 버린 자입니다.… 김춘택은 이미 능히 일세(一世)를 위세로 제압했고 이이명(李頤命)은 실로 좌지우지하였으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김춘택을 죽이지 않고 이이명을 귀양 보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지 않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강단(剛斷)을 몸 받고 아울러 가엾게 여기는 마음도 지키시어 그 우두머리는 죽이고 나머지에게는 다 죄를 묻지 마시며 옛 허물을 씻어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게 하소서. 그러면 종사가 다행하겠습니다.〉
少論 정권의 중추 최석정
뒷날 역사의 경로를 돌이켜보면 한마디 한마디가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사태를 직시하지 못했다. 당사자이기도 하지만 세자에 대한 사랑이 완연하게 식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숙종은 사안의 민감성을 감안해 친국(親鞫)을 하겠다고 밝힌다. 배후를 캐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9월 20일 이잠은 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다. 그런데 그의 상소 중에는 숙종도 몰랐던 옛날 일이 포함돼 있었다. 장희재가 귀양지에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김춘택과 간통했다는 말을 듣고는 집안사람들에게 언서로 된 편지를 보내 “김춘택이 나를 죽이려 하는데 이는 동궁(東宮·세자)에게도 이롭지 못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갑술옥사 당시 관련된 장씨들이 다 이를 진술했는데 당시 옥사를 맡았던 김창집이 이런 내용은 숨기고 숙종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김창집을 파면시키고 김춘택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는 선에서 일단 임보와 이잠의 상소 파문을 마무리짓는다.
이런 가운데도 정국을 이끄는 중심세력은 노론이 아니라 소론이었다. 소론의 중심인물은 영의정 최석정이었다. 이것은 중화(中和)를 잃지 않으려는 숙종의 정국 운영 구상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최석정은 스승 남구만이 이끌어 정승에까지 올렸고 여러 차례 파면되기를 거듭하며 영의정을 9번이나 배수받은 인물이었다. 갑술환국 이후 줄곧 이어져온 소론 정권의 후반부 주역이 바로 최석정이었다.
최석정은 최명길의 손자로 남구만과 박세채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현종 12년(1671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에서 주로 경력을 쌓았다. 숙종 11년(1685년) 부제학으로 있을 때는 소론 윤증을 옹호하고 영의정 김수항을 배척하다가 한때 파직되었으나 오히려 김수항의 요청으로 부제학으로 복귀한 일도 있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환국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숙종의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학행이 뛰어난 데다가 합리적인 일처리 등이 인정을 받은 때문이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정제두와 함께 양명학(陽明學)을 발전시켜 각종 저술을 짓기도 했다.
이후 장희빈을 죽이려는 숙종의 처사에 반대하다가 충청도 진천으로 유배되었지만 이듬해 풀려났고 얼마 후 영의정에 오르기를 아홉 차례 반복하면서 소론 정권의 중추 역할을 한다.
노론 정권 복귀
그런 그도 정승을 예대(禮待)하지 않는 숙종의 폐단에서 예외가 되지 못했다. 숙종 36년(1710년) 1월 10일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약방제조들을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시키라고 전격 명했다. 약방제조란 영의정 최석정, 좌의정 서종태 등 삼정승을 말한다. 이유는 자신의 병이 위중한데도 최석정은 그저 형식적으로만 병을 보살폈고 서종태는 몇 달째 집무를 보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숙종은 석 달가량 중병을 앓다가 1월 5일쯤 조금씩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 《춘추》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약을 맛보지 않았다 하여 임금을 시해한 것으로 썼는데, 더구나 스스로 임금을 보호하는 직임(職任)을 띠고 바야흐로 약방에 직숙하면서 군부(君父)의 질환을 가볍게 보고 오직 대충 하기만을 일삼으니, 어찌 이와 같은 분의(分義)와 도리가 있겠는가?”
최석정은 변명 한마디 못 하고 영의정에서 내쫓겼다. 그 자리는 노론의 이이명이 맡았다. 노론 정권의 탄생이었다. 순간적이었지만 최석정에 대한 숙종의 서운함은 컸다. 최석정에 대한 삭출은 너무 심하다는 건의를 했던 승정원과 삼사(三司)의 관리들도 모두 삭출하고 자리가 생길 때마다 노론 인물로 채워 넣었다.
이건창은 당시의 상황 급변에 대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 추론은 해볼 수 있다. 숙종이 그동안 소론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해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세자를 지켜줄 수 있는 세력이 소론이라고 본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병을 앓으면서 그 자신이 약해졌다. 마음이 약해진 숙종은 세자를 위한 원대한 구상에 앞서 자신을 향한 충성심을 더 강조해서 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투병 중이던 숙종의 마음을 얻은 이이명
한편 노론의 핵심 이이명은 1월 5일 숙종의 쾌유를 바라는 절절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필자가 볼 때는 바로 이 상소 한 장으로 인해 숙종의 마음속에서 최석정이 차지했던 자리를 이이명이 대신 차지할 수 있었고 이후 경종 때까지 이이명은 당대 최고의 실력자로 떠오를 수 있었다. 숙종을 생각하는 절절함이 듬뿍 묻어나는 상소의 일부다.
〈옛말에 인정(人情)이 험난한 때를 당하면 쉽게 경계하게 되나, 평강(平康)한 때를 만나면 반드시 방자해진다고 했습니다. 환후(患候)가 시종 80일 동안 줄곧 증세가 여러 번 바뀌었으니, 이러한 때에는 성심(聖心)의 두려워하심이 어찌 자주 돌아보는 데에 비교할 뿐이겠습니까? 비록 위험한 때를 넘긴 후이나, 바로 마땅히 늘 두려워하고 삼가시는 마음을 가지셔야 할 것인데, 요사이에 국사를 처분하시는 것이 조금 경쾌하신 듯하다고 수백 가지의 주독(奏牘·결재서류)을 일시에 모두 들이도록 하셨고, 약원(藥院)의 직숙(直宿)도 또한 파출(罷黜)하도록 명하셨으니, 이를 미루어 본다면 의복, 음식과 기거(起居)의 절차도 더러 그 마땅함을 잃을 것이니, 그 해로움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약원의 직숙 파출’은 대단히 중요하다. 숙종은 여기서 일단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다. 숙직을 그만하라고 했다고 해서 아무 말 없이 그만둔 최석정이 서운했을 것이고 바로 그 점을 콕 집어서 이야기하는 이이명에게 한없는 총애가 솟아났을 것이다. 이이명의 상소는 이어진다.
〈신이 일찍이 성교(聖敎)를 받든즉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문서를 모두 본 후에 수라(水刺)를 들겠다’ 하셨으니, 이 때문에 끼니때를 잃은 적이 많았습니다. 무리(無理)하심이 이와 같으니, 이미 평일의 절선(節宣·계절에 따라 몸을 조섭함)하는 도리가 아닌데, 더구나 지금은 옥체가 손상된 후이니 더욱 절실히 경계하시어야 합니다. 천하의 일이 만 가지로 다르나 이치는 오직 하나뿐이니, 병을 치료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무릇 학문을 하는 요체는 본래 두 가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이 든 후에 조섭하는 것은 바로 난리와 흉년에 시달린 백성들을 보호하듯 하여야 하는 것이니,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면 또한 천덕(天德)에 상달(上達)될 수 있습니다.〉
오랜 투병 생활로 마음이 약해지고 다시 화증이 도진 숙종에게 이 말은 ‘세자를 위한 원대한 구상’ 따위는 잊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는 쉽게 자기 정당화를 할 수도 있다. 나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자가 세자도 잘 보필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나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자가 누구인가? 분명 이 순간부터는 이이명이었다. 게다가 이듬해인 1711년(숙종 37년) 3월에는 남구만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본격적인 노론의 세상이 열리게 된다.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
숙종 2년 송시열은 경상도 장기에 유배 중이었다. 어느 날 그의 제자였던 윤증(尹拯·1629~1714년)이 그곳을 찾아왔다. 윤증은 숙종 즉위년 12월 사헌부 집의(종3품)에 제수되었으나 자신이 송시열을 스승으로 섬긴 적이 있다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윤증은 서인이기는 했어도 아버지 윤선거(尹宣擧) 때부터 남인과도 교류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관직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벼슬을 사양한 그는 충청도 이성(尼城·충청남도 논산)에 은거한 채 학문 연마에만 전념하다가 송시열이 얼마 전에 썼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을 고쳐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이미 살아 있을 때 송시열과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인 바 있는 윤선거는 현종 10년(1669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죽자 윤증은 박세채에게 행장(行狀)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고 현종 14년에는 송시열에게 비문을 지어줄 것을 청해서 받았다.
6개월 만에 아버지의 비문을 받아온 윤증은 놀라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다. 송시열은 새롭게 비문을 지은 것이 아니라 박세채의 행장을 그대로 옮겨 적다시피 한 것이었다. 사실 생전에 송시열은 윤선거와 윤휴(尹鑴)의 사상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는 했어도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자인 윤증이 자신의 정적인 윤휴로부터 윤선거의 제문(祭文)을 받는 것을 보고 기분이 상해 윤선거에 대한 비문도 대충 써준 것이었다. 윤증은 자식 된 입장에서 당파를 뛰어넘어 당대 최고 석학인 송시열·박세채·윤휴 등으로부터 두루 비문·행장·제문 등을 받아 아버지를 선양하고 싶었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격언은 변함없이 유효했다. 특히 송시열 비문에는 “내가 비록 공을 따른 지 오래되었지만 그 깊은 학문은 엿보지 못했다”는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이 일로 윤증은 송시열과 화해할 수 없는 길로 접어든다.
少論의 山林 윤증
윤증은 유계(兪棨)·권시(權諰)·김집(金集)·송시열 등에게 두루 학문을 익혔다. 현종 4년(1663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된 이래 사헌부 지평(持平)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숙종 8년(1682년)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찬성, 1701년 우찬성·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돈녕부 판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는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 문제로 송시열과 갈라선 후에는 소론의 영수로 올라서 산림에서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노론의 배후에 송시열이 있었다면 소론의 배후에는 윤증이 있다고 할 정도였다. 특히 갑술환국 이후 20년 가까이 소론 정권이 지배했기 때문에 윤증에 대한 숙종의 태도는 각별했다. 1714년 1월 24일 윤증이 죽자 숙종은 어제시(御製詩)까지 지어 그를 추모했다.
“유림에서는 그의 도덕을 존경했고/ 나도 또한 그를 흠모했도다.
평생 동안 얼굴 한번 보지 못했으니/ 죽은 날 한스러움이 더욱 깊구나.”
‘《가례원류》 저작권 분쟁’
사달은 숙종 39년(1713년) 5월 20일 용담현령 유상기가 좌의정 이이명에게 자신의 할아버지 유계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국가에서 발간해 달라고 청하면서 발생한다. 유계는 다름 아닌 윤증의 스승이면서 윤선거와는 학문적 동지였다. 그리고 유상기는 윤증으로부터 배운 바 있었다. 이중 삼중의 학문적 사제(師弟) 관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원래 《가례원류》는 윤선거와 유계의 공동 작품이었다. 중심은 유계가 잡았고 윤선거는 보조 역할이었다. 두 사람이 미완성으로 끝낸 것을 이후 윤증이 유계의 부탁으로 나머지를 완성하여 홀로 집에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고 있는 유상기가 국가에 요청해 자기 할아버지의 단독 저작물로 해서 출간을 요청한 것이다.
이이명의 허락이 있자 유상기는 윤증을 찾아와 《가례원류》 원본을 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윤증의 입장에서는 유상기가 자신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간행을 요청한 것이 의심스러운 데다가 이이명과는 입장이 맞지 않아 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나 원저작권은 분명 유계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집안 간에는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심지어 유상기는 윤증에게 “이미 한 스승(송시열)을 배반하더니 또 한 스승(유계)을 배반하는구나”라고 극언까지 퍼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쓴 《가례원류》의 초본만 가지고 독자적인 간행을 강행했다. 여기에는 정호가 서문을 지었고 권상하가 발문을 썼는데 두 사람 모두 윤증을 모질게 비판했다. 이후 유상기는 비록 국가에서 간행한 것은 아니지만 당초 국가에서 간행하라는 명이 있었던 책이라며 한 권을 숙종에게 올렸다. 이게 숙종 41년(1715년) 11월의 일이니 이미 윤증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가까이 되어가던 시점이었다.
숙종은 아버지 비문 문제로 송시열과 단절한 윤증을 높이 평가했다.
“윤증은 아버지를 위하여 스승을 끊었으니 아버지가 중하고 스승은 가벼운 것이다.”
스승보다 군부가 중하다는 자신의 세계관과 그대로 합치했기 때문이다. 윤증이 죽었을 때는 이런 말을 했다.
“살아서는 군사부(君師父)의 세 가지를 한결같이 섬긴다 하나 그중에도 가볍고 무거움의 다름이 있는 것이다.”
즉 숙종에게는 군(君)-부(父)-사(師)가 확고부동한 중요도 순서였다. 그랬기 때문에 윤증을 흠모했던 것이다. 당연히 유상기가 간행한 《가례원류》를 읽어본 숙종은 정호가 어진 선비(윤증)를 헐뜯었다며 즉각 파면시켜버렸다. 그러나 ‘《가례원류》 저작권 분쟁’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었다.
丙申處分
숙종 41년(1715년) 11월 10일 호서 유생 유규 등이 소(疏)를 올려 윤증을 변호했다. 더불어 “권상하(權尙夏·1641~1721년)가 송시열을 위한 비문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문인 윤증이 그 아비가 일찍이 스승에게 배척당했다 하여 방자한 뜻으로 틈을 만들더니 마침내 윤휴의 당이 다시 일어나 기사년의 화(禍)를 만들었다’고 써놓았다”고 말했다.
권상하는 송시열 제자이며 당시 대사헌으로 있었다. 후에 숙종의 명으로 대보단(大報壇)도 세웠다. 1703년 호조참판에 이어 13년 동안 해마다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후에도 우의정·좌의정 등에 임명됐으나 취임은 하지 않았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송시열 수제자로 현실정치보다는 학문적 탐구에 보다 많은 열정을 쏟은 인물이다.
노론 쪽에서도 뒤질세라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유규를 비판하며 정호를 옹호했고 이어 이 논쟁은 조정 내의 노론과 소론 세력의 싸움으로 비화되기 시작했다. 숙종은 송시열과 윤선거의 처신에 대해서는 논란을 허용하면서도 《가례원류》에 대해서는 상소 자체를 금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측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상소전을 전개했고 급기야 숙종은 1716년 7월 6일 직접 송시열과 윤증의 관련 문건들을 가져오도록 하여 판단을 내린다.
“당시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를 읽어보니 과연 단단히 잡아 단속한 말이 많다. 송시열이 쓴 묘갈명에는 원래 윤선거에 대한 욕이 없다.”
윤증이 지나치게 아버지 윤선거를 선양하려다가 자기 마음에 차지 않자 스승을 매몰차게 몰아세웠다는 뜻이다. 윤증에 대한 숙종의 판단이 바뀌었다. 일단 이 문제로 송시열을 옹호하다가 벌을 받은 선비들을 다 풀어줄 것을 명한다. 더불어 윤증을 배사(背師), 즉 스승을 배신한 죄인이라고 판정한다. 이것이 소위 ‘병신처분(丙申處分)’이다. 병신처분과 함께 정국은 노론의 일방적 우세로 넘어간다.
金長生의 文廟配享
‘병신처분’은 숙종의 오랜 번민 속에서 내려진 결단이다. 이때 숙종의 나이 벌써 57세였고 무엇보다 질병이 깊어지고 있었다. 보통 때의 숙종이라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노론을 선택한 그였고 결국 본의와 다르게 노론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숙종은 세자도 지키고 연잉군(영조)·연령군 등도 모두 살릴 수 있는 길이 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을 노론 손에 맡기기로 결심한 것이 병신처분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숙종 스타일과는 달랐다. 그만큼 그의 힘도 빠지고 있었다.
노론은 숙종 42년 12월 29일 윤선거와 윤증에 대한 선정(先正·국가가 공인하는 성현)이란 호칭을 박탈했다. 그리고 숙종 43년(1717년) 2월 29일에는 자신들의 정신적 뿌리인 김장생(金長生)의 문묘배향(文廟配享)을 얻어낸다. 율곡 이이도 수십 년이 걸린 문묘배향이었다.
물론 김장생의 문묘종사 주청(奏請)도 예전부터 있었다. 이미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국을 장악한 숙종 8년부터 유생들은 수시로 상소를 올려 김장생의 문묘종사를 청했고 이후 송준길·송시열이 추가되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35년 만인 숙종 43년 2월 29일 숙종은 노론에 큰 선물을 내린다.
“선정의 도덕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래도 이렇게 망설인 것은 대개 신중히 하려는 데에서 나왔으나, 중외(中外)의 선비들이 합사하여 같은 목소리로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한 것이 수십 년이 되었고 매우 간절하니, 공의(公議)가 있음을 대개 알 수 있다.”
죽은 송시열을 불러들이다
그리고 이틀 후인 3월 2일 숙종은 질병 치료를 위해 온양행궁으로 출발한다. 이때 숙종은 3월 한 달을 꼬박 온양에 머물렀다. 특기할 만한 일은 그곳에 있으면서 찬성 벼슬을 제수한 바 있는 권상하를 초치(招致)했다. 이때 권상하는 노론에 있어 송시열이 했던 역할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뒷날 밝혀지지만 숙종은 온양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며 ‘포스트 숙종’ 체제를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구상을 은밀하게 권상하에게 일러둠으로써 혹시라도 자신에게 변이 생기더라도 국가와 왕실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권상하는 온양으로 오던 도중 괴산에서 병이 심해져 도중에 상소를 올려 유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온양에서 돌아온 지 100여 일이 지난 7월 19일 좌의정 이이명과의 유명한 ‘정유독대(丁酉獨對)’가 있게 된다.
이에 앞서 5월에는 윤선거와 윤증 부자의 관작 추탈(追奪)이 있었고 7월에는 송시열의 문집을 교서관에서 간행토록 명한다. 또 그해 말에는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묘종사가 논의되기 시작한다. 숙종 시대는 송시열을 내치는 것으로 본격 시작했지만 결국 죽은 송시열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마감을 준비하고 있었다.⊙
숙종 28년(1702년)에 접어들자 숙종은 눈에 띄게 노론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장희빈에 대한 사사(賜死)에 반대했던 남구만(南九萬)은 유배를 보냈고 반면 사사를 역설했던 노론의 김춘택(金春澤)은 석방했다. 마지막까지 장희빈의 사사에 반대했던 당시의 영의정 최석정(崔錫鼎·1646~1715년)도 내침을 당했다.
당시 조정은 영의정 서문중, 좌의정 이세백, 우의정 신완의 삼정승이 이끌고 있었다. 서문중은 박세채 계열 소론으로 두 번째 영의정을 맡은 인물이었다. 좌의정 이세백은 노론계 인사였다. 그는 장희빈이 사사당할 당시 세자가 찾아와 옷자락을 잡으며 눈물로 호소했으나 외면해버렸다. 이처럼 세자에 대한 태도에서 소론과 노론은 입장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신완의 경우에는 당초에는 소론이었다가 노론으로 당론을 바꾼 경우에 속한다. 그는 갑술환국 때 대사간으로 복직해 목래선을 비롯한 남인 세력 축출에 앞장섰다. 이후 남인 및 장희빈 처리를 둘러싸고 강온파가 갈리자 뜻밖에도 점차 노론 편에 섰다. 그만큼 숙종의 노선이 노론 쪽으로 기울어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반청(反淸)의식이 강한 노론의 입장을 반영해 북한산성 축조를 시도했으나 당시에는 소론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 같은 삼정승의 구성으로 볼 때 숙종의 마음은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소론에서 노론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40대 중반에 이른 나이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숙종의 保守化
숙종 30년 1월 10일의 기록은 숙종의 세계관 자체가 소론에서 노론으로 확실하게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는 벌써 신완이 영의정으로 승진해 있었다. 이날 숙종은 대신과 비변사 신하들을 인견하는 가운데 이런 말을 한다.
“올해는 갑신년으로 명(明)나라가 망한 지 주갑(周甲·60년)을 맞았다. 돌이켜보건대 조선이라는 이름도 명나라로부터 받았고 임진왜란 때 신종 황제가 직접 군사를 보내어 다시 나라를 재건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을 당했지만 삼학사(三學士)가 있어 절의(節義)와 강상(綱常)이 실추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세월이 흘렀다고 하여 신하들이 올리는 글에도 강개스러운 말이 다 사라졌다. 세월이 흐르면 점차 잊는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사정은 너무나도 개탄스럽다. 주갑의 해를 맞이하니 감회가 창연하다.”
숙종의 이 말은 노론을 배려해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40대 중반 나이에서 온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인식이 보수화(保守化)된 결과로 봐야 한다. 게다가 숙종은, 특히 우리 역사에도 밝은 군주였다. 이에 영의정 신완은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연경(燕京·베이징)에 가보니 중국의 한족(漢族)들도 모두 오랑캐의 머리를 하고 있었고 옛 명나라의 의복을 따르는 우리를 보고서도 전혀 흠모하는 뜻은 없고 도리어 조소(嘲笑)하는 기색이 완연하였습니다. 대체로 인정이란 오래되면 잊기가 쉽고 후생(後生)들은 지난 일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고 답한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이 그저 주고받는 환담 수준이었다. 그런데 숙종은 신완의 말을 받아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들의 물든 풍속은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객사(客使·청나라 사신)가 나올 적에 길 양쪽에 서서 구경하는 것을 화사(華使·옛 명나라 사신)와 똑같게 하고 있으니, 원통함을 품고 아픔을 참는다는 뜻이 없음을 알 수 있으며,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러 진실로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백성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여기서 논쟁이 촉발된다. “백성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신완은 두리뭉실하게 숙종 스스로 각오를 다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답한다. 좌의정 이여도 효종 때의 북벌(北伐)계획을 거론한 다음 “전하께서 진실로 분발하시어 대지(大志)를 확립하신다면 병기를 수선하고 변방을 공고히 하는 등의 계책은 단번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라며 결국은 신완의 의견을 따랐다. 결국 숙종은 “서서히 뒷날을 기다려 의논을 정하자”며 물러섰다. 그러나 이때의 토론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후 숙종의 세계관 변화를 살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禪位 파동
숙종 31년(1705년) 10월 29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숙종이 자신의 화증(火症)이 지난 5~6년 동안 심해져 더 이상 국정(國政)을 감당할 수 없으니 세자에게 선위(禪位)하겠다는 의사를 전격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재위 31년 동안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때 세자의 나이 18세였다. 조선 임금들이 흔히 해오던 선위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 임금들의 선위 파동을 일으키는 목적은 다양했다. 태종의 경우 정적(政敵) 제거 수단으로 활용했고 세종은 정말로 병 때문에 넘겨주려 했다. 세조는 충성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선조는 정치적 수세(守勢)에서 탈피하기 위해 선위 파동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숙종은 과연 어떤 생각에서 선위 의사를 밝힌 것일까?
그가 선위 의사를 밝히면서 했던 말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나를 아는 자는 내가 깊이 근심하는 것으로 여기고, 나를 모르는 자는 내가 정사(政事)에 싫증난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사소하게 문서를 줄여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구구하게 묵은 뿌리나 썩은 풀로 효험을 바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가롭게 조양(調養)하지 않으면,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근심이 있게 될 것이다.”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병을 얻었으니 선위하지 않으면 죽을병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숙종이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 달여 전인 9월 25일 오른쪽 엉덩이에 종기가 나서 약방에서 진료를 한다. 당시 질병과 관련된 첫 번째 기록이다. 9월 29일에는 종기가 심해져 약방제조들이 의원들을 거느리고 숙직에 들어간다. 그러다 10월 5일이 되어 종기는 약간 수그러든다. 이때의 종기는 12월 중순경에야 다 낫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숙종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신하는 하나도 없었다. 우의정 이유를 비롯해 승정원과 홍문관 관리들이 직접 아뢰겠다고 했으나 글로써 대신할 것을 명한 다음 숙종은 선위 절차를 세우라고 예조에 명했다. 평소의 숙종 성격대로라면 정말로 선위가 이뤄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김춘택의 재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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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택 |
“너의 정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신하들이 정성을 다해 아뢰어 청하는 것을 끝내 저버릴 수 없었으므로, 이제 막 애써 따랐다.”
숙종의 선위 파동은 불과 4일 만에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를 통해 숙종은 세자를 비롯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숙종 31년 10월의 선위 파동은 불과 4일 만에 끝났지만 노론에 준 공포와 충격은 컸다. 정말로 숙종이 전위(傳位)라도 하는 날이면 노론은 발붙일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분위기에 대해 이건창은 《당의통략》에서 굳이 김춘택의 이름을 거명하며 “선위 파동 직후부터 김춘택 등이 더욱 불안해하고 사람들의 말들이 다 흉흉하였다”고 적고 있다. 갑술환국의 1등 공신이자 모주(謀主)인 김춘택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술환국 때의 적이 남인이었다면 이제는 소론이었다.
그런데 도발은 의외로 노론이 아닌 쪽에서 시작됐다. 숙종 32년(1706년) 5월 29일 소론 유생 임부가, 9월 17일에는 남인 유생 이잠이 김춘택을 겨냥한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점차 노론이 소론을 제압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는 정국 상황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상소는 목숨을 거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임부는 이 상소 건으로 유배를 갔고 이잠은 목숨을 잃게 된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이잠의 상소가 더 직설적이고 심각했다.
〈춘궁(春宮·세자)을 보호하는 자는 귀양 보내어 내치고 김춘택에게 편드는 자는 벼슬로 상 주니, 어찌 전하께서 춘궁을 사랑하는 것이 난적(亂賊)을 사랑하는 것만 못 하시어 그렇겠습니까? 권세 있는 척신(戚臣)이 일을 농간한 것입니다.… 그 기틀을 잡은 자가 있고 그 성세(聲勢)를 돕는 자가 있으며 그 모략을 맡은 자가 있어 위란(危亂)을 꾸미고 선동하는 계책이 아님이 없었는데, 그 귀결처를 요약하면 좌우전후가 모두 춘궁에게 칼날을 들이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십니까? 뭇 신하가 전하의 허물을 말하여 걸핏하면 연장(連章)을 올리기까지 하였으나, 감히 김춘택의 죄를 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전하의 위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김춘택의 위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일이 혹 김춘택에 관계되는 것이면 그 무리가 또한 따라서 중상하니, 신은 아마도 화를 면하고 복을 찾는 길이 전하에게 있지 않고 김춘택에게 있는 듯합니다.… 접때 임부의 상소는 참으로 종사(宗社)의 대계(大計)에서 나와 말이 매우 명백하고 정당하였는데, 조태채처럼 고락을 같이할 의리가 있는 자가 앞에서 거슬러 공격하고 민진후처럼 인척(姻戚)으로 왕실에 가까운 자가 뒤를 이어 죄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다 사의(私意)에 가리어져 스스로 제 몸을 버린 자입니다.… 김춘택은 이미 능히 일세(一世)를 위세로 제압했고 이이명(李頤命)은 실로 좌지우지하였으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김춘택을 죽이지 않고 이이명을 귀양 보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지 않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강단(剛斷)을 몸 받고 아울러 가엾게 여기는 마음도 지키시어 그 우두머리는 죽이고 나머지에게는 다 죄를 묻지 마시며 옛 허물을 씻어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게 하소서. 그러면 종사가 다행하겠습니다.〉
少論 정권의 중추 최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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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정 |
이에 숙종은 사안의 민감성을 감안해 친국(親鞫)을 하겠다고 밝힌다. 배후를 캐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9월 20일 이잠은 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다. 그런데 그의 상소 중에는 숙종도 몰랐던 옛날 일이 포함돼 있었다. 장희재가 귀양지에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김춘택과 간통했다는 말을 듣고는 집안사람들에게 언서로 된 편지를 보내 “김춘택이 나를 죽이려 하는데 이는 동궁(東宮·세자)에게도 이롭지 못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갑술옥사 당시 관련된 장씨들이 다 이를 진술했는데 당시 옥사를 맡았던 김창집이 이런 내용은 숨기고 숙종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김창집을 파면시키고 김춘택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는 선에서 일단 임보와 이잠의 상소 파문을 마무리짓는다.
이런 가운데도 정국을 이끄는 중심세력은 노론이 아니라 소론이었다. 소론의 중심인물은 영의정 최석정이었다. 이것은 중화(中和)를 잃지 않으려는 숙종의 정국 운영 구상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최석정은 스승 남구만이 이끌어 정승에까지 올렸고 여러 차례 파면되기를 거듭하며 영의정을 9번이나 배수받은 인물이었다. 갑술환국 이후 줄곧 이어져온 소론 정권의 후반부 주역이 바로 최석정이었다.
최석정은 최명길의 손자로 남구만과 박세채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현종 12년(1671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에서 주로 경력을 쌓았다. 숙종 11년(1685년) 부제학으로 있을 때는 소론 윤증을 옹호하고 영의정 김수항을 배척하다가 한때 파직되었으나 오히려 김수항의 요청으로 부제학으로 복귀한 일도 있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환국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숙종의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학행이 뛰어난 데다가 합리적인 일처리 등이 인정을 받은 때문이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정제두와 함께 양명학(陽明學)을 발전시켜 각종 저술을 짓기도 했다.
이후 장희빈을 죽이려는 숙종의 처사에 반대하다가 충청도 진천으로 유배되었지만 이듬해 풀려났고 얼마 후 영의정에 오르기를 아홉 차례 반복하면서 소론 정권의 중추 역할을 한다.
그런 그도 정승을 예대(禮待)하지 않는 숙종의 폐단에서 예외가 되지 못했다. 숙종 36년(1710년) 1월 10일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약방제조들을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시키라고 전격 명했다. 약방제조란 영의정 최석정, 좌의정 서종태 등 삼정승을 말한다. 이유는 자신의 병이 위중한데도 최석정은 그저 형식적으로만 병을 보살폈고 서종태는 몇 달째 집무를 보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숙종은 석 달가량 중병을 앓다가 1월 5일쯤 조금씩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 《춘추》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약을 맛보지 않았다 하여 임금을 시해한 것으로 썼는데, 더구나 스스로 임금을 보호하는 직임(職任)을 띠고 바야흐로 약방에 직숙하면서 군부(君父)의 질환을 가볍게 보고 오직 대충 하기만을 일삼으니, 어찌 이와 같은 분의(分義)와 도리가 있겠는가?”
최석정은 변명 한마디 못 하고 영의정에서 내쫓겼다. 그 자리는 노론의 이이명이 맡았다. 노론 정권의 탄생이었다. 순간적이었지만 최석정에 대한 숙종의 서운함은 컸다. 최석정에 대한 삭출은 너무 심하다는 건의를 했던 승정원과 삼사(三司)의 관리들도 모두 삭출하고 자리가 생길 때마다 노론 인물로 채워 넣었다.
이건창은 당시의 상황 급변에 대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 추론은 해볼 수 있다. 숙종이 그동안 소론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해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세자를 지켜줄 수 있는 세력이 소론이라고 본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병을 앓으면서 그 자신이 약해졌다. 마음이 약해진 숙종은 세자를 위한 원대한 구상에 앞서 자신을 향한 충성심을 더 강조해서 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투병 중이던 숙종의 마음을 얻은 이이명
한편 노론의 핵심 이이명은 1월 5일 숙종의 쾌유를 바라는 절절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필자가 볼 때는 바로 이 상소 한 장으로 인해 숙종의 마음속에서 최석정이 차지했던 자리를 이이명이 대신 차지할 수 있었고 이후 경종 때까지 이이명은 당대 최고의 실력자로 떠오를 수 있었다. 숙종을 생각하는 절절함이 듬뿍 묻어나는 상소의 일부다.
〈옛말에 인정(人情)이 험난한 때를 당하면 쉽게 경계하게 되나, 평강(平康)한 때를 만나면 반드시 방자해진다고 했습니다. 환후(患候)가 시종 80일 동안 줄곧 증세가 여러 번 바뀌었으니, 이러한 때에는 성심(聖心)의 두려워하심이 어찌 자주 돌아보는 데에 비교할 뿐이겠습니까? 비록 위험한 때를 넘긴 후이나, 바로 마땅히 늘 두려워하고 삼가시는 마음을 가지셔야 할 것인데, 요사이에 국사를 처분하시는 것이 조금 경쾌하신 듯하다고 수백 가지의 주독(奏牘·결재서류)을 일시에 모두 들이도록 하셨고, 약원(藥院)의 직숙(直宿)도 또한 파출(罷黜)하도록 명하셨으니, 이를 미루어 본다면 의복, 음식과 기거(起居)의 절차도 더러 그 마땅함을 잃을 것이니, 그 해로움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약원의 직숙 파출’은 대단히 중요하다. 숙종은 여기서 일단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다. 숙직을 그만하라고 했다고 해서 아무 말 없이 그만둔 최석정이 서운했을 것이고 바로 그 점을 콕 집어서 이야기하는 이이명에게 한없는 총애가 솟아났을 것이다. 이이명의 상소는 이어진다.
〈신이 일찍이 성교(聖敎)를 받든즉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문서를 모두 본 후에 수라(水刺)를 들겠다’ 하셨으니, 이 때문에 끼니때를 잃은 적이 많았습니다. 무리(無理)하심이 이와 같으니, 이미 평일의 절선(節宣·계절에 따라 몸을 조섭함)하는 도리가 아닌데, 더구나 지금은 옥체가 손상된 후이니 더욱 절실히 경계하시어야 합니다. 천하의 일이 만 가지로 다르나 이치는 오직 하나뿐이니, 병을 치료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무릇 학문을 하는 요체는 본래 두 가지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이 든 후에 조섭하는 것은 바로 난리와 흉년에 시달린 백성들을 보호하듯 하여야 하는 것이니,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면 또한 천덕(天德)에 상달(上達)될 수 있습니다.〉
오랜 투병 생활로 마음이 약해지고 다시 화증이 도진 숙종에게 이 말은 ‘세자를 위한 원대한 구상’ 따위는 잊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는 쉽게 자기 정당화를 할 수도 있다. 나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자가 세자도 잘 보필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나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자가 누구인가? 분명 이 순간부터는 이이명이었다. 게다가 이듬해인 1711년(숙종 37년) 3월에는 남구만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본격적인 노론의 세상이 열리게 된다.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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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
이미 살아 있을 때 송시열과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인 바 있는 윤선거는 현종 10년(1669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죽자 윤증은 박세채에게 행장(行狀)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고 현종 14년에는 송시열에게 비문을 지어줄 것을 청해서 받았다.
6개월 만에 아버지의 비문을 받아온 윤증은 놀라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다. 송시열은 새롭게 비문을 지은 것이 아니라 박세채의 행장을 그대로 옮겨 적다시피 한 것이었다. 사실 생전에 송시열은 윤선거와 윤휴(尹鑴)의 사상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는 했어도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자인 윤증이 자신의 정적인 윤휴로부터 윤선거의 제문(祭文)을 받는 것을 보고 기분이 상해 윤선거에 대한 비문도 대충 써준 것이었다. 윤증은 자식 된 입장에서 당파를 뛰어넘어 당대 최고 석학인 송시열·박세채·윤휴 등으로부터 두루 비문·행장·제문 등을 받아 아버지를 선양하고 싶었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격언은 변함없이 유효했다. 특히 송시열 비문에는 “내가 비록 공을 따른 지 오래되었지만 그 깊은 학문은 엿보지 못했다”는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이 일로 윤증은 송시열과 화해할 수 없는 길로 접어든다.
少論의 山林 윤증
윤증은 유계(兪棨)·권시(權諰)·김집(金集)·송시열 등에게 두루 학문을 익혔다. 현종 4년(1663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된 이래 사헌부 지평(持平)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숙종 8년(1682년)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찬성, 1701년 우찬성·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돈녕부 판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는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 문제로 송시열과 갈라선 후에는 소론의 영수로 올라서 산림에서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노론의 배후에 송시열이 있었다면 소론의 배후에는 윤증이 있다고 할 정도였다. 특히 갑술환국 이후 20년 가까이 소론 정권이 지배했기 때문에 윤증에 대한 숙종의 태도는 각별했다. 1714년 1월 24일 윤증이 죽자 숙종은 어제시(御製詩)까지 지어 그를 추모했다.
“유림에서는 그의 도덕을 존경했고/ 나도 또한 그를 흠모했도다.
평생 동안 얼굴 한번 보지 못했으니/ 죽은 날 한스러움이 더욱 깊구나.”
‘《가례원류》 저작권 분쟁’
사달은 숙종 39년(1713년) 5월 20일 용담현령 유상기가 좌의정 이이명에게 자신의 할아버지 유계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국가에서 발간해 달라고 청하면서 발생한다. 유계는 다름 아닌 윤증의 스승이면서 윤선거와는 학문적 동지였다. 그리고 유상기는 윤증으로부터 배운 바 있었다. 이중 삼중의 학문적 사제(師弟) 관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원래 《가례원류》는 윤선거와 유계의 공동 작품이었다. 중심은 유계가 잡았고 윤선거는 보조 역할이었다. 두 사람이 미완성으로 끝낸 것을 이후 윤증이 유계의 부탁으로 나머지를 완성하여 홀로 집에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고 있는 유상기가 국가에 요청해 자기 할아버지의 단독 저작물로 해서 출간을 요청한 것이다.
이이명의 허락이 있자 유상기는 윤증을 찾아와 《가례원류》 원본을 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윤증의 입장에서는 유상기가 자신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간행을 요청한 것이 의심스러운 데다가 이이명과는 입장이 맞지 않아 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나 원저작권은 분명 유계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집안 간에는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심지어 유상기는 윤증에게 “이미 한 스승(송시열)을 배반하더니 또 한 스승(유계)을 배반하는구나”라고 극언까지 퍼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쓴 《가례원류》의 초본만 가지고 독자적인 간행을 강행했다. 여기에는 정호가 서문을 지었고 권상하가 발문을 썼는데 두 사람 모두 윤증을 모질게 비판했다. 이후 유상기는 비록 국가에서 간행한 것은 아니지만 당초 국가에서 간행하라는 명이 있었던 책이라며 한 권을 숙종에게 올렸다. 이게 숙종 41년(1715년) 11월의 일이니 이미 윤증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가까이 되어가던 시점이었다.
숙종은 아버지 비문 문제로 송시열과 단절한 윤증을 높이 평가했다.
“윤증은 아버지를 위하여 스승을 끊었으니 아버지가 중하고 스승은 가벼운 것이다.”
스승보다 군부가 중하다는 자신의 세계관과 그대로 합치했기 때문이다. 윤증이 죽었을 때는 이런 말을 했다.
“살아서는 군사부(君師父)의 세 가지를 한결같이 섬긴다 하나 그중에도 가볍고 무거움의 다름이 있는 것이다.”
즉 숙종에게는 군(君)-부(父)-사(師)가 확고부동한 중요도 순서였다. 그랬기 때문에 윤증을 흠모했던 것이다. 당연히 유상기가 간행한 《가례원류》를 읽어본 숙종은 정호가 어진 선비(윤증)를 헐뜯었다며 즉각 파면시켜버렸다. 그러나 ‘《가례원류》 저작권 분쟁’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었다.
丙申處分
숙종 41년(1715년) 11월 10일 호서 유생 유규 등이 소(疏)를 올려 윤증을 변호했다. 더불어 “권상하(權尙夏·1641~1721년)가 송시열을 위한 비문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문인 윤증이 그 아비가 일찍이 스승에게 배척당했다 하여 방자한 뜻으로 틈을 만들더니 마침내 윤휴의 당이 다시 일어나 기사년의 화(禍)를 만들었다’고 써놓았다”고 말했다.
권상하는 송시열 제자이며 당시 대사헌으로 있었다. 후에 숙종의 명으로 대보단(大報壇)도 세웠다. 1703년 호조참판에 이어 13년 동안 해마다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후에도 우의정·좌의정 등에 임명됐으나 취임은 하지 않았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송시열 수제자로 현실정치보다는 학문적 탐구에 보다 많은 열정을 쏟은 인물이다.
노론 쪽에서도 뒤질세라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유규를 비판하며 정호를 옹호했고 이어 이 논쟁은 조정 내의 노론과 소론 세력의 싸움으로 비화되기 시작했다. 숙종은 송시열과 윤선거의 처신에 대해서는 논란을 허용하면서도 《가례원류》에 대해서는 상소 자체를 금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측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상소전을 전개했고 급기야 숙종은 1716년 7월 6일 직접 송시열과 윤증의 관련 문건들을 가져오도록 하여 판단을 내린다.
“당시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를 읽어보니 과연 단단히 잡아 단속한 말이 많다. 송시열이 쓴 묘갈명에는 원래 윤선거에 대한 욕이 없다.”
윤증이 지나치게 아버지 윤선거를 선양하려다가 자기 마음에 차지 않자 스승을 매몰차게 몰아세웠다는 뜻이다. 윤증에 대한 숙종의 판단이 바뀌었다. 일단 이 문제로 송시열을 옹호하다가 벌을 받은 선비들을 다 풀어줄 것을 명한다. 더불어 윤증을 배사(背師), 즉 스승을 배신한 죄인이라고 판정한다. 이것이 소위 ‘병신처분(丙申處分)’이다. 병신처분과 함께 정국은 노론의 일방적 우세로 넘어간다.
金長生의 文廟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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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 |
결국 모든 것을 노론 손에 맡기기로 결심한 것이 병신처분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숙종 스타일과는 달랐다. 그만큼 그의 힘도 빠지고 있었다.
노론은 숙종 42년 12월 29일 윤선거와 윤증에 대한 선정(先正·국가가 공인하는 성현)이란 호칭을 박탈했다. 그리고 숙종 43년(1717년) 2월 29일에는 자신들의 정신적 뿌리인 김장생(金長生)의 문묘배향(文廟配享)을 얻어낸다. 율곡 이이도 수십 년이 걸린 문묘배향이었다.
물론 김장생의 문묘종사 주청(奏請)도 예전부터 있었다. 이미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국을 장악한 숙종 8년부터 유생들은 수시로 상소를 올려 김장생의 문묘종사를 청했고 이후 송준길·송시열이 추가되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35년 만인 숙종 43년 2월 29일 숙종은 노론에 큰 선물을 내린다.
“선정의 도덕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래도 이렇게 망설인 것은 대개 신중히 하려는 데에서 나왔으나, 중외(中外)의 선비들이 합사하여 같은 목소리로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한 것이 수십 년이 되었고 매우 간절하니, 공의(公議)가 있음을 대개 알 수 있다.”
죽은 송시열을 불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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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하 |
뒷날 밝혀지지만 숙종은 온양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며 ‘포스트 숙종’ 체제를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구상을 은밀하게 권상하에게 일러둠으로써 혹시라도 자신에게 변이 생기더라도 국가와 왕실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권상하는 온양으로 오던 도중 괴산에서 병이 심해져 도중에 상소를 올려 유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온양에서 돌아온 지 100여 일이 지난 7월 19일 좌의정 이이명과의 유명한 ‘정유독대(丁酉獨對)’가 있게 된다.
이에 앞서 5월에는 윤선거와 윤증 부자의 관작 추탈(追奪)이 있었고 7월에는 송시열의 문집을 교서관에서 간행토록 명한다. 또 그해 말에는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묘종사가 논의되기 시작한다. 숙종 시대는 송시열을 내치는 것으로 본격 시작했지만 결국 죽은 송시열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마감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