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 南人 집권 9개월 만에 “한 사람도 나랏일을 담당하여 그 이룩한 보람을 드러내는 이가 없다”고 南人에게 경고
⊙ 南人의 ‘행동대장’ 민암, 조카를 賜暇讀書 수석으로 합격시켜 구설에 올라
⊙ 老論 김춘택, 南人 실세 장희재의 처와 정을 통하는 등 정치 공작 전개
⊙ 남구만을 영수로 하는 少論 정권 수립
⊙ 숙종, “私黨에 관계되면 임금의 명령도 따르지 않고, 官政도 거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南人의 ‘행동대장’ 민암, 조카를 賜暇讀書 수석으로 합격시켜 구설에 올라
⊙ 老論 김춘택, 南人 실세 장희재의 처와 정을 통하는 등 정치 공작 전개
⊙ 남구만을 영수로 하는 少論 정권 수립
⊙ 숙종, “私黨에 관계되면 임금의 명령도 따르지 않고, 官政도 거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남구만
서인(西人)-노론(老論)의 종주(宗主) 송시열(宋時烈)이 사사(賜死)되고 정권은 자연스럽게 남인(南人)에게 넘어갔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그러나 남인은 무능(無能)함으로 인해 숙종으로부터 정권을 맡을 만하다는 인정을 받지 못했고 결론적으로 5년 만에 다시 서인, 그중에서도 소론(少論)에 정권을 넘겨주게 된다. 이후 정조 때 채제공(蔡濟恭·1720~1799년)이 잠깐 기용된 것을 제외하면 남인은 더 이상 정권을 담당하지 못하는 영원한 야당(野黨)으로 남게 된다.
도대체 기사환국 이후 남인들은 어떤 행태를 보였기에 왕당파(王黨派)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왕권을 추구했던 숙종으로부터 버림받게 된 것일까? 이는 당시 남인 정권이 이끌었던 면면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기사환국 이후 외형적으로 보면 권대운·목래선·김덕원 3정승이 이끄는 체제였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별도의 실력자들이 있다.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1651~1701년)를 제외하더라도 눈여겨봐야 할 인물들이 있었다. 이현일(李玄逸·1627~1704년)과 민암(閔黯·1636~1694년)이었다.
南人의 ‘리틀 송시열’ 이현일
이현일은 외조부 장흥효의 문하에서 퇴계학파 성리학을 전수하였다. 효종 3년(1652년) 친형 이휘일(李徽逸)과 함께 《홍범연의(洪範衍義)》를 편찬하였고, 현종 7년(1666년)에는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비판한 영남 유생들의 연명상소에 참여하였다. 남인들이 정권을 잡은 숙종 즉위년(1674년)부터 허목(許穆) 등의 추천으로 누차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상 등을 이유로 나오지 않다가 1678년 공조정랑, 사헌부 지평 등에 임명되어 비로소 출사(出仕)하였다. 그러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향리에 은거하였다가,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자 성균관 좨주(祭酒)를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이현일의 역할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학술적인 데 있었다. 어쩌면 숙종 집권 초 윤휴와 허목이 했던 역할을 그가 했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남인판 ‘산림(山林)’이라고 할까? 물론 송시열이나 송준길(宋浚吉) 등에 비하면 무게감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숙종의 인현왕후 처리에 반대해 한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그는 1692년 다시 대사헌, 병조참판, 우참찬, 이조판서 등을 두루 거치게 된다. 물론 그 비중이나 역량 면에서 비교가 안 되지만, 그나마 남인 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리틀 송시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현일 중용이 갖는 의미는 상당히 컸다. 그의 중용은 무엇보다 제1차 남인 집권기의 실패에는 기호(畿湖) 남인들이 영남 남인들을 배제해 스스로 세력 기반 확보에 실패했다는 자성(自省)에 따른 것이었다. 기사환국 직후 기호 남인들이 이현일을 적극적으로 불러올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송시열에 버금갈 수야 없지만 그래도 이황-김성일-장흥효로 이어지는 영남의 학맥을 잇고 있던 이현일은 남인 입장에서는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이현일도 영남 남인들의 중앙 정계 진출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기도 했다. 그러나 이현일이 미처 포부도 펴보기 전에 갑술환국이 일어나 그의 꿈은 미완(未完)으로 남게 된다.
‘행동대장’ 민암
그에 반해 민암은 숙종에게는 일종의 행동대장이었다. 서인에게 김석주(金錫胄)가 있었다면 남인에게는 민암이 있었다. 인현왕후 민씨를 내쫓고 송시열을 사사시키는 데도 민암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숙종 15년 12월 19일 숙종은 당시 홍문관 대제학 민암의 건의를 받아들여 인조 때 이후 유명무실해졌던 사가독서(賜暇讀書)제를 부활시킨다. 사가독서제란 유망한 신진 인사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를 하게 하던 제도로 세종이 만든 인재 양성 제도이다. 그 자체만으로 민암이 올린 건의는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사가독서를 하는 요원으로 유세명·민창도·이현조·김문하·채팽윤·홍돈·권중경 7명이 선발되었다. 문제는 그중 민창도가 민암의 조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수석 합격이었다. 민암의 형이자 민창도의 아버지인 민희는 허적과 같은 탁남(濁南)계로 숙종 초에 좌의정까지 지냈고 경신환국 때 서인들에 의해 유배를 당해 유배지 순천에서 죽었다. 원래 합격자 명단에 민창도 이름은 없었다. 그런데 우의정 김덕원까지 나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해 결국 민창도는 사가독서를 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실록 사관의 평이다.
“이때 민암이 조정의 정권을 잡고서 재상을 압박하고 임금을 지휘함이 이에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흘겨보았다.”
물론 두 사람이 실력자로 부상했다고는 하나 숙종의 권위에는 전혀 도전하지 못했다. 그저 숙종의 비위에 맞춰가면서 적당히 정적(政敵)인 서인 세력을 숙청하는 데 힘을 쏟는 정도였다. 이 무렵 숙종의 왕권(王權)은 조선 500년을 통틀어, 즉 태종이나 세조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막강했다.
‘숙종 때의 윤원형’ 장희재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는 숙종보다는 열 살, 장희빈보다는 여덟 살 위였다. 명종 때의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에게 첩 정난정이 있었다면, 장희재에게는 기생 숙정이 있었다. 숙정은 원래 동평군 이항의 계집종이었다. 동평군 이항은 이 무렵 거의 독보적으로 숙종에게 총애를 받던 종친(宗親)이었다. 장희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편으로는 여동생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동평군을 통해 숙종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원래 장희재는 시전에서 입신출세한 인물로 종실에서는 동평군과, 관리들 중에서는 민암의 세력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1683년(숙종 9년) 3월 13일에 인조반정 60주년을 맞아 정명(貞明)공주의 집에 조정대신들이 대거 모여 잔치가 벌어졌다. 정명공주는 선조와 인목대비 사이에서 난 딸로 이때 80세로 아직 살아 있었다. 이때는 서인들의 세상이었다.
숙정은 노래를 잘한다는 소문이 있어 잔치에 불려 갔다. 술이 몇 순배 돌고 한 손님이 숙정의 손을 잡고 희롱하자 당시 포도부장으로 문 앞에 와 있던 장희재가 숙정을 몰래 빼내어 달아나 버렸다. 이 소식이 좌의정 민정중의 귀에 들어갔다. 민정중은 당장 장희재를 불러들일 것을 명했고 장희재는 장형(杖刑)을 당해야 했다. 민씨 집안에 대한 장희재의 원한은 여기서 비롯됐다고 실록은 풀이한다.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주도해 사림에 치명타를 안겼다면, 장희재는 동평군, 민암 등과 함께 숙종을 움직여 서인들을 일거에 축출하는 기사환국을 이끌어냈다. 하나 윤원형의 경우 문과 급제 출신의 문신이었던 데 반해 장희재는 중인(中人) 신분에 불과했다.
환국 이후 1년여가 지난 숙종 16년 8월 장희재는 내금위장(內禁衛將)에 특채된다. 당시 병조판서가 민암이었다. 이듬해에는 병조판서 민종도의 후원으로 장희재는 금군(禁軍) 별장에 오른다. 민종도도 민암처럼 여흥 민씨이면서 남인 계통 집안이었고, 민암 못지않게 장희재의 후원자 역할을 맡았다. 그러고 숙종 18년 3월 6일 장희재는 다시 총융사(摠戎使)로 발탁된다. 특채, 특진, 발탁의 연속이었다. 김익훈이 역임한 바 있는 총융사는 수도 외곽의 남양·수원·장단의 군사 요충지를 관장하는 총융청의 최고 지휘관으로 종2품에 해당하는 고위직이었다.
그러고 이듬해 2월에는 한성부 우윤(右尹)에 임명된다. 오늘날 서울시 부시장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사간원 등의 비판이 이어지자 숙종은 곧바로 장희재를 포도대장으로 임명한다. 이 또한 종2품직이었다. 그러나 장희재의 벼락출세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이미 희빈 장씨에 대해 숙종은 싫증 내지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남인과 함께하는 국정 운영에 대해서도 부정적 의견이 커갔기 때문이다.
숙종의 경고
숙종에게 서인은 다루긴 어렵지만 신뢰할 수 있었고 반대로 남인은 다루긴 쉽지만 믿음이 가지 않았다. 기사환국 이후 9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11월 21일 숙종은 의미심장한 비망기를 내린다.
“경화(更化·기사환국)한 뒤에 여러 어진이가 더불어 같이 나아와 조정이 깨끗하고 밝으며, 임금이 신하에게, 신하가 임금에게 정과 뜻이 흐르고 통하여 일호(一毫)도 시기하거나 의심하는 마음이 다시없으니, 이는 바로 좋은 정치를 할 만한 기회이다. 어찌하여 백관이 직무에 태만하고 포기함이 날마다 더욱 심해져, 침상에서 쉬고 누워 있으면서 오직 몸이 편한 것만 도모하는가? 묘시(卯時)에 출근하여 유시(酉時)에 파하거나 진시(辰時)에 출사하여 신시(申時)에 파하는 것이 법전(法典)에 있는데, 태만함이 버릇이 되어 개좌(開坐·출근하여 정상적으로 사무를 보는 것)가 드물다. ‘형(刑)은 형벌이 없기를 기약하여야 백성이 중(中)에 합한다’는 것이 성인(聖人)의 밝은 가르침인데, 옥송(獄訟)이 쌓이고 밀리는 것이 근래에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세월을 끌면서 마땅히 결단할 것을 결단하지 아니하고 있다.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는 이목(耳目)을 맡은 곳이고, 옥당(玉堂·홍문관)은 논사(論思)하는 곳인데, 잠깐 들어왔다가 잠깐만에 나가니 무슨 일이 제대로 되겠는가? 혹시 큰 의논이나 큰 시비(是非)에 관계되는 데가 있으면, 문득 병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승정원은 후설(喉舌)의 중함을 맡았는데도 임명받은 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문득 곧 체직(遞職·보직이동)을 도모한다.
요즈음 대신이 건의하여 엄명을 내렸음에도 폐단의 고질(痼疾)이 이미 심하여 전과 같으니, 다시 무엇으로 퇴폐한 기강을 떨쳐 엄숙하게 하여 모든 정무가 함께 밝아지기를 바라겠는가? 오직 이와 같으므로 각사(各司)의 관원이 하는 일 없이 한가로이 세월만 보내면서 관청에 나와 직무 보는 것을 전사(傳舍·여관)에 들르는 것처럼 하며, 한 사람도 나랏일을 담당하여 그 이룩한 보람을 드러내는 이가 없으니, 이는 진실로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지도하고 통솔하지 못한 소치이다. 돌이켜 자신을 반성하여 부끄러워함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만약 옛 버릇을 통렬히 고쳐서 함께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아니하면, 국가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음이 있을 것이다.”
검소한 국왕 숙종
남인들의 무능에 대한 1차 경고였다. 숙종은 적어도 국정에 관한 한 철저하고 부지런했으며 유능했다. 그의 성격상 무능한 사람은 두고 보질 못했다. 그러나 남인들은 워낙 세력이 소수(少數)였기 때문에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재풀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남인들은 숙종의 이 같은 경고를 의례적인 것으로 들었을 뿐 경고로 이해하지 못했다. 남인 집권이 영속(永續)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 숙종은 검약했고 늘 국가 자원을 절약하고 세금을 줄여주는 데 깊은 관심이 있었다. 이런 그의 태도는 당쟁(黨爭)과는 무관하게 일관성을 보였다. 그리고 이런 주제로 관리들에게 책문(策問)을 요구하는 일도 잦았다. 이 또한 숙종이 어떤 당파의 국정 운영 능력과 태도를 재는 중요한 잣대였다.
숙종 17년(1691년) 1월 3일 일어난 우의정 김덕원 파직 사건은 당시 군권(君權)과 신권(臣權)의 과도한 비대칭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날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래선, 우의정 김덕원과 삼남 지방의 가뭄과 전세 감면 등 국정 현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덕원이 이렇게 말한다.
“신이 듣건대, 선묘(宣廟·선조)께서 편찮으실 때에 신하들이 입시(入侍)하였더니 무명에 물들인 포장을 치고 무명 바지를 입으시기까지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신하들의 조복(朝服)이 감히 오늘날처럼 고울 수 없었고, 환시(宦侍)들은 감히 비단옷을 입지 못하였다 합니다.
계묘년(1663년·현종 4년) 신이 가주서(假注書)로 있을 때 내관(內官·내시)과 함께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강의충이라는 내관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이 그에게 내탕(內帑)의 다과(多寡)를 물었더니, 강의충이 말하기를 ‘인조대왕께서는 여염에서 사셔서 백성의 일의 어려움을 환히 아시므로, 몸소 검소하여 절약해서 쓰셨으므로 내사(內司)의 저축이 계속 풍부했었습니다. 효종대왕께서는 변방 밖의 풍상(風霜)의 괴로움을 고루 겪으셨으므로, 모든 일에 힘써 간약(簡約)하게 하셔서 저축이 모자라지는 않았습니다. 금상(今上·현종)의 조정에 이르러서는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자라셨으므로, 절약하여 쓰는 방도가 두 조정만 못하여 지금은 내장(內藏)이 자못 비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참으로 절실하니, 더욱 검약(儉約)하여 절약해서 쓰는 방도에 힘쓰소서.”
無能하고 無力한 南人
숙종이 처음에는 ‘자못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다가’ 강의충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얼굴에 분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숙종이 화가 난 이유는 첫째, 신하가 내시와 함께 선대(先代) 국왕들을 논평했다는 것, 둘째 자신의 아버지인 현종이 마치 방탕했던 것처럼 말한 것, 셋째 궁궐에서 자라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이므로 간접적으로 자신을 겨냥한 것 등이었다.
이때 강의충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숙종은 더욱 화를 내며 강의충을 내시 명단에서 즉시 삭제하고 그 아들·사위·아우·조카의 이름까지도 모두 삭제할 것을 명하며 “차후 이런 일이 한 번 더 생기면 효시(梟示)하겠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김덕원은 죽을죄를 저지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그 자리에서 김덕원을 파직했다.
권대운과 목래선이 나서봤지만 숙종은 단호했다. 선조에 대해 내시가 평을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대신이 내시의 평을 그대로 어전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권대운과 목래선이 “대신의 말실수로 그 자리에서 파직시키는 것은 대신을 예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고 재차 설득을 시도했으나 숙종의 분노는 더욱 커질 뿐이었다. 이 일은 숙종과 김덕원의 역학 관계뿐만 아니라 숙종과 3정승의 역학 관계도 큰 차이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남인은 무능하기도 했지만 무력(無力)하기도 했다. 그 결과 숙종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남인 세력을 무시하고 있었다.
김춘택의 정치 공작
이 무렵 서인 세력의 재기를 위해 가장 부지런하게 움직인 인물은 김춘택(金春澤·1670~1717년)이었다. 이때 20대 초반의 열혈 청년이었던 김춘택은 숙종의 장인 김만기(金萬基)의 손자로 이미 뛰어난 문재(文才)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사환국과 함께 서인 노론 핵심 집안의 후손으로서 앞길이 막히자 그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정철·윤선도·김만중 등과 같이 문학적 자질이 뛰어난 인물들의 정치는 상당히 과격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김춘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에 따르면 김춘택은 김석주의 사람됨을 흠모했다고 한다. 김석주가 김만기와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김석주의 음모와 공작 정치를 멋지게 생각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춘택은 위험할 정도로 대담했다. 먼저 궁인(宮人)의 동생을 첩으로 맞아들여 궁중의 정보 입수에 나선다. 이를 위해 은화 1000금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심지어 당대 최고의 실력자인 장희재의 부인과 정(情)을 통하며 남인들 동태에 대한 깊은 정보를 빼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온몸을 던졌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작은할아버지 김만중이 유배지 남해에서 쓴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해 은밀하게 궁녀들을 통해 숙종에게 전달토록 했다고 한다. 비록 중국을 무대로 했지만 《사씨남정기》에 나오는 사씨부인은 인현왕후, 유한림은 숙종, 요첩 교씨는 희빈 장씨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숙종의 마음을 바꿔보려는 김춘택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일화다.
김춘택은 왕실의 숙안공주와 숙명공주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두 공주는 효종의 딸로 숙종에게는 고모들이었다. 그중 특히 숙안공주는 남인에 대해 뿌리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숙안공주와 익평군 홍득기 사이에서 난 아들 홍치상이 기사환국 때 남인들에 의해 사사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무능한 남인이었지만 김춘택을 비롯해 신진 인사들이 중심이 된 서인 세력의 움직임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남인은 적어도 실권을 갖고 있었다. 남인 쪽의 사령탑은 우의정 민암이었다. 양측의 정보전은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러나 결국 민암 쪽이 패했다.
하룻밤 사이에 ‘少論’ 세상으로 바뀌다
숙종 20년 4월 1일 밤은 짧고도 길었다. 비망기가 내려지자마자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래선, 대사헌 이봉징 등 남인 정권을 이끌었던 대소 신료들이 순식간에 삭탈관작 당하고 우의정 민암, 의금부 판사 유명현, 의금부 지사 이의징·정유악, 의금부 동지사 목임일 등 국문(鞫問)을 주도했던 남인 인사들은 절도로 유배를 떠나야 하는 죄인이 됐다. 심지어 집에 머물고 있던 승정원과 삼사의 관리들도 모두 파직당했다.
오죽했으면 당장 영의정을 제수해야 하는데 명을 받들 승지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숙직을 위해 대궐에 나와 있던 오위장 황재명을 ‘가승지(假承旨·임시 승지)’로 임명하고 곧바로 서인 소론의 영수이던 남구만(南九萬·1629~1711년)을 영의정으로 임명한다. 또다시 백지상태에서의 조각(組閣)이 시작된 것이다.
숙종은 권력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곧바로 훈련대장에 기사환국으로 쫓겨났던 신여철을 다시 임명했고 병조판서에는 강릉부사로 나가 있던 서문중을 임명했다. 그리고 남인 이현일이 맡았던 이조판서에는 유상운을 서용했다. 최소한의 인선을 마친 숙종은 세 가지 중대 사안에 관한 입장을 밝힌다.
첫째, 국본(國本)을 동요시키는 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서인 세상이 되었다고 해서 세자를 흔들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폐인(廢人·폐서인 된 인현왕후 민씨)을 비롯해 홍치상과 이사명을 신원(伸冤)하려는 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서인이 다시 집권했다고 해서 기사환국이나 자신의 폐비(廢妃) 결정에 시비를 걸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셋째, 이상(李翔)을 신원하려는 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이를 어길 경우,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고 못 박았다.
‘少論의 영수’ 남구만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숙종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서인 중에서도 이런 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소론과 함께 정권을 이끌어가겠다는 뜻이었다. 특히 세 번째 말한 이상을 신원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송시열의 죽음을 신원하려 들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상은 철저하게 송시열을 따르던 인물로 송시열이 사사된 직후 모함을 당해 1690년 1월 19일 옥중에서 사망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소론 중심의 정권을 세우겠다는 숙종의 이런 의중은 이미 남구만을 영의정으로 정한 데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남구만은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으로 어려서는 송준길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효종 7년(1656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사간원·홍문관·사헌부의 요직을 거쳐 전라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고 이때 북방의 방어를 튼튼히 했다.
숙종 즉위 후에는 남인 정권하에서 서인임에도 불구하고 대사성·형조판서·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지만, 이때 남인의 핵심 인물인 윤휴·허견 등을 탄핵하다가 남해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숙종 6년(1680년) 경신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실각하자 조정에 복귀해 도승지·대사간 등을 지냈다. 특히 1683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어 북방에 무창과 자성 등 두 군(郡)을 설치해 영토 보전에 기여했다. 아마도 이것은 함경도 관찰사 때의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러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자 소론의 영수로 추앙을 받았다.
이듬해인 1684년 우의정, 1685년 좌의정을 거쳐 2년 후인 1687년 영의정에 오르지만 2년 후 기사환국이 일어나 강릉으로 유배를 갔다가 이때 다시 영의정을 맡게 된 것이다. 능력이나 포용력 면에서 숙종의 말할 수 없는 큰 신뢰를 받았던 인물이다. 실제로 7년 후인 1701년 장희빈의 사사 여부를 둘러싸고 노론의 김춘택 등이 사실상의 사형을 주장하자 이에 맞서 가벼운 형을 주장했다. 결국 숙종이 사사를 결정하자 중추부 영사를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 때문에 삭탈관작 되고 유배까지 가야 했지만 6년 후에 다시 숙종의 부름을 받아 봉조하(奉朝賀)에 오른다. 우리에게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되는 시조로 친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少論의 山林’ 박세채
그러고 다음 날인 4월 2일에는 숙종도 급했던지 이조의 절차를 생략하고 일단 기사환국 때 물러난 사람 중 죽지 않고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물러날 때의 자리에 모두 그대로 임명할 것을 명한다. 더불어 죄를 얻었던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령이 떨어졌다. 벌써 세 번째 환국이라 숙종은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4월 3일에는 박세채(朴世采· 1631~1695년)를 우찬성으로 명해 불러들일 것을 명한다. 허목·윤휴·송시열·이현일 등이 했던 일종의 정신적 지주(支柱)로서의 ‘산림’ 역할을 박세채에게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남구만이 소론의 실천적 지도자였다면 박세채는 이론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남구만보다 두 살 아래였던 박세채는 신흠(申欽)의 외손자다. 홍문관 교리를 지낸 아버지 박의가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기 때문에 박세채도 이이(李珥)의 《격몽요결》로 학문을 시작했다.
그는 김상헌과 김집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고 송시열·송준길 등과도 학문적 교유 관계를 유지했다. 현종 초 예송 때는 송시열의 기년설을 지지했고 이 때문에 숙종 즉위와 함께 시작된 남인 정권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본격적으로 정치에 나섰고 노론과 소론으로 나뉠 무렵 그는 남구만과 함께 소론의 영수로 떠올랐다. 당시 그는 송시열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학문적 영향력 면에서 빼어났다.
이 무렵 박세채는 자신이 소론이기는 했지만 노론과 소론을 중재하는 데 정치인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이 점에서도 박세채는 자신이 사표(師表)로 삼았던 이이를 닮았다. 그래서 당시에도 최석정(崔錫鼎) 같은 사람은 박세채를 이이에 비견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이가 진정한 당쟁 중재자였는지는 오늘날에 와서는 의문스럽다.
박세채의 ‘황극탕평론’
이후 박세채는 당쟁 해결을 위한 논리화 작업에 들어가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정립하게 된다. 황극탕평이란 4서3경 중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로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진정(進呈)했다고 하는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나온다.
‘황극’이란 ‘황건기유극(皇建其有極)’의 준말로 풀어쓰면 황제 혹은 군주가 지극한 표준(極)을 세운다는 뜻이다. 탕평이란 말도 《홍범구주》의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탕탕(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 편과 당을 짓지 않으면 왕도가 크게 이뤄진다는 뜻이다. 이는 당파 위주의 주희(朱熹·주자)식 붕당론(朋黨論)을 받드는 노론에 대한 정면 비판이었다. 동시에 왕권 강화의 의지가 누구보다 강력했던 숙종으로서는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정국운영론이었다.
이런 박세채를 숙종은 4월 27일 좌의정에 임명한다. 같은 날 윤지완은 우의정에 제수된다. 이건창은 《당의통략》에서 “윤지완이 우의정이 되었는데 무릇 의견을 올릴 때 다 남구만과 함께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의 형 윤지선은 이미 좌의정을 지낸 바 있고 동생 윤지인도 훗날 병조판서에 오른다. 이렇게 해서 남구만·박세채·윤지완의 소론 3정승 체제가 갖춰진 것이다.
그러나 박세채의 입궐은 두 달 가까이 지연되었다. 20차례에 가까운 사직소를 올린 끝에 마침내 윤 5월 29일 박세채는 명을 받아들였다. 그러고 6월 4일 박세채는 ‘사본차(四本箚)’로 불리는 4통의 차자(箚子·약식 상소)를 올린다.
첫째는 ‘임금의 청납(聽納)을 넓히는 것’인데, 숙종이 지난날의 일을 징표 삼아 앞으로의 도모를 신중하게 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둘째는 ‘국체(國體)를 높이는 것’인데, 이는 무엇보다 숙종이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백관들도 역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특히 숙종에게 중요했다. 박세채는 숙종의 성정을 ‘희로(喜怒)의 폭발’이라고 부르며 감정을 잘 다스릴 것을 간곡하게 청했다.
셋째는 ‘인심(人心)을 따르는 것인데, 어떤 일을 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옳은지 그른지를 깊이 살펴보아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넷째는 ‘붕당을 소멸시키는 것’인데, 역시 성명에게 사람의 쓰고 버림과 진퇴(進退)를 당색(黨色)으로 하지 말고 한결같이 개개인의 현명(賢明) 여부를 중시할 것을 바란 것이었다.
숙종의 黨爭 비판
박세채의 이 같은 상소에 따라 숙종은 7월 20일 자신을 돌아보고 그동안의 정국에 대해 반성하는 교서를 반포한다. 여기에 당쟁의 폐해와 원인 등에 대한 숙종의 생생한 인식이 들어 있다.
“당시 일을 맡아 다스리던 사람들로 하여금 피차를 논할 것 없이 각각 편당하는 풍습에 주력하기를 그만두지 않게 만들었으니, 청남(淸南)과 탁남(濁南),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에서 대개(大槪)를 미루어 볼 수 있다.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칠 적마다 마음이 에이는 듯하다.
그 연유를 따져보면 진실로 허물이 나에게 있는 것이니, 어찌 감히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마는, 미루어 논한다면 또한 편당하는 풍습이 빌미가 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대저 임금의 명령을 거행하는 것보다 큰일은 없다. 그런데 사당(私黨)에 관계되면 임금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관정(官政)을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당에 관계가 되면 관정도 거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사람 쓰기를 옳게 하느냐 잘못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당에 관계되면 출척(黜陟)에 공정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일에 대한 의논을 옳게 하느냐 그르게 하느냐보다 간절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당에 관계되면 가부(可否)를 올바르게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무릇 이는 모두가 강령(綱領)을 세우고 기율(紀律)을 펴며 현명한 사람을 얻어 일을 처리하는 바이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편당하는 풍습 때문에 해치지 않는 것이 없어, 차라리 군부(君父)를 저버릴지언정 차마 그 당을 저버리지는 않으니, 다시 어떻게 국가의 급무(急務)를 먼저 하고 사사로운 원수를 뒤로 돌리겠는가? 국사(國事)의 계획과 민중의 근심거리는 서로 까마득하게 잊고 거침없이 모두가 이러고만 있으니, 내가 장차 누구의 힘에 의지하겠는가? 또 서로 처신하는 것을 살펴보건대, 비록 한때 함께 벼슬하고 있으면서도 정의(情誼)가 통하지 못하고 마치 연월(燕越)처럼 지내 전혀 충성하고 공경하며 자신을 반성하는 도리는 없고 매양 원망과 한탄으로 불안해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있다.
대소(大小)와 신구(新舊)가 갈수록 서로 사모하며 본받기만 하여, 천 갈래 만 갈래의 짓이 대개 공정함을 배반하고 사사로움만 따르는 것이 많다. 중외(中外)의 학교(學校) 선비들에 있어서도 시속(時俗)을 따르며 기세를 타서 제멋대로 배척하되 더욱 끝없이 싸움질만 하는 곳이 되었으니, 그 끼쳐질 폐해는 장차 나라가 나라 꼴을 못 갖추어 완전히 뒤집혀 멸망하게 되어도 구원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다. 그러니 또한 어찌 감히 임금과 신하가 같은 덕과 같은 마음으로 다스려진 세상을 이루게 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아! 심한 일이로다. 또한 알 수 없지만, 조정의 신하나 초야의 선비로서 능히 이런 풍습을 깊이 싫어하며 개연히 분발하고 쭈뼛하게 마음으로 놀라, 나와 함께 이런 생각을 같이할 사람이 있는가? 지나간 해에 내가 일찍이 시(詩) 한 수를 가지고 조정 신하들을 깨우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로 인해 마음을 고치고 풍습을 바꾼 사람을 들어보지 못했으니, 개탄스러운 일이다. 대저 어찌 조정 신하들만의 잘못이겠느냐? 내가 더러는 희로(喜怒)에 있어서 잘못하고, 더러는 시비(是非)에 어두워 진퇴와 출척을 모두 합당하게 하지 못했기에, 성의(誠意)가 뭇 아랫사람들에게 미덥지 못하고 교화하는 도리가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소치인 것이다.”
박세채의 시대 진단은 무엇보다 숙종의 인간적 성숙(成熟)을 요구한 것이고 숙종도 신하들의 책임을 함께 묻기는 했지만 자신을 돌아보는 데 크게 인색하지는 않았다. 4월 6일에는 송시열을 복관하고 제사를 지낼 것을 명한다. 소론 정권이긴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서인의 복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숙종 중반기 정치는 비교적 안정적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도대체 기사환국 이후 남인들은 어떤 행태를 보였기에 왕당파(王黨派)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왕권을 추구했던 숙종으로부터 버림받게 된 것일까? 이는 당시 남인 정권이 이끌었던 면면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기사환국 이후 외형적으로 보면 권대운·목래선·김덕원 3정승이 이끄는 체제였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별도의 실력자들이 있다.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1651~1701년)를 제외하더라도 눈여겨봐야 할 인물들이 있었다. 이현일(李玄逸·1627~1704년)과 민암(閔黯·1636~1694년)이었다.
南人의 ‘리틀 송시열’ 이현일
이현일은 외조부 장흥효의 문하에서 퇴계학파 성리학을 전수하였다. 효종 3년(1652년) 친형 이휘일(李徽逸)과 함께 《홍범연의(洪範衍義)》를 편찬하였고, 현종 7년(1666년)에는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비판한 영남 유생들의 연명상소에 참여하였다. 남인들이 정권을 잡은 숙종 즉위년(1674년)부터 허목(許穆) 등의 추천으로 누차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상 등을 이유로 나오지 않다가 1678년 공조정랑, 사헌부 지평 등에 임명되어 비로소 출사(出仕)하였다. 그러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향리에 은거하였다가,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자 성균관 좨주(祭酒)를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이현일의 역할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학술적인 데 있었다. 어쩌면 숙종 집권 초 윤휴와 허목이 했던 역할을 그가 했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남인판 ‘산림(山林)’이라고 할까? 물론 송시열이나 송준길(宋浚吉) 등에 비하면 무게감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숙종의 인현왕후 처리에 반대해 한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그는 1692년 다시 대사헌, 병조참판, 우참찬, 이조판서 등을 두루 거치게 된다. 물론 그 비중이나 역량 면에서 비교가 안 되지만, 그나마 남인 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리틀 송시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현일 중용이 갖는 의미는 상당히 컸다. 그의 중용은 무엇보다 제1차 남인 집권기의 실패에는 기호(畿湖) 남인들이 영남 남인들을 배제해 스스로 세력 기반 확보에 실패했다는 자성(自省)에 따른 것이었다. 기사환국 직후 기호 남인들이 이현일을 적극적으로 불러올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송시열에 버금갈 수야 없지만 그래도 이황-김성일-장흥효로 이어지는 영남의 학맥을 잇고 있던 이현일은 남인 입장에서는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이현일도 영남 남인들의 중앙 정계 진출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기도 했다. 그러나 이현일이 미처 포부도 펴보기 전에 갑술환국이 일어나 그의 꿈은 미완(未完)으로 남게 된다.
‘행동대장’ 민암
그에 반해 민암은 숙종에게는 일종의 행동대장이었다. 서인에게 김석주(金錫胄)가 있었다면 남인에게는 민암이 있었다. 인현왕후 민씨를 내쫓고 송시열을 사사시키는 데도 민암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숙종 15년 12월 19일 숙종은 당시 홍문관 대제학 민암의 건의를 받아들여 인조 때 이후 유명무실해졌던 사가독서(賜暇讀書)제를 부활시킨다. 사가독서제란 유망한 신진 인사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를 하게 하던 제도로 세종이 만든 인재 양성 제도이다. 그 자체만으로 민암이 올린 건의는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사가독서를 하는 요원으로 유세명·민창도·이현조·김문하·채팽윤·홍돈·권중경 7명이 선발되었다. 문제는 그중 민창도가 민암의 조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수석 합격이었다. 민암의 형이자 민창도의 아버지인 민희는 허적과 같은 탁남(濁南)계로 숙종 초에 좌의정까지 지냈고 경신환국 때 서인들에 의해 유배를 당해 유배지 순천에서 죽었다. 원래 합격자 명단에 민창도 이름은 없었다. 그런데 우의정 김덕원까지 나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해 결국 민창도는 사가독서를 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실록 사관의 평이다.
“이때 민암이 조정의 정권을 잡고서 재상을 압박하고 임금을 지휘함이 이에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흘겨보았다.”
물론 두 사람이 실력자로 부상했다고는 하나 숙종의 권위에는 전혀 도전하지 못했다. 그저 숙종의 비위에 맞춰가면서 적당히 정적(政敵)인 서인 세력을 숙청하는 데 힘을 쏟는 정도였다. 이 무렵 숙종의 왕권(王權)은 조선 500년을 통틀어, 즉 태종이나 세조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막강했다.
‘숙종 때의 윤원형’ 장희재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는 숙종보다는 열 살, 장희빈보다는 여덟 살 위였다. 명종 때의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에게 첩 정난정이 있었다면, 장희재에게는 기생 숙정이 있었다. 숙정은 원래 동평군 이항의 계집종이었다. 동평군 이항은 이 무렵 거의 독보적으로 숙종에게 총애를 받던 종친(宗親)이었다. 장희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편으로는 여동생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동평군을 통해 숙종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원래 장희재는 시전에서 입신출세한 인물로 종실에서는 동평군과, 관리들 중에서는 민암의 세력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1683년(숙종 9년) 3월 13일에 인조반정 60주년을 맞아 정명(貞明)공주의 집에 조정대신들이 대거 모여 잔치가 벌어졌다. 정명공주는 선조와 인목대비 사이에서 난 딸로 이때 80세로 아직 살아 있었다. 이때는 서인들의 세상이었다.
숙정은 노래를 잘한다는 소문이 있어 잔치에 불려 갔다. 술이 몇 순배 돌고 한 손님이 숙정의 손을 잡고 희롱하자 당시 포도부장으로 문 앞에 와 있던 장희재가 숙정을 몰래 빼내어 달아나 버렸다. 이 소식이 좌의정 민정중의 귀에 들어갔다. 민정중은 당장 장희재를 불러들일 것을 명했고 장희재는 장형(杖刑)을 당해야 했다. 민씨 집안에 대한 장희재의 원한은 여기서 비롯됐다고 실록은 풀이한다.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주도해 사림에 치명타를 안겼다면, 장희재는 동평군, 민암 등과 함께 숙종을 움직여 서인들을 일거에 축출하는 기사환국을 이끌어냈다. 하나 윤원형의 경우 문과 급제 출신의 문신이었던 데 반해 장희재는 중인(中人) 신분에 불과했다.
환국 이후 1년여가 지난 숙종 16년 8월 장희재는 내금위장(內禁衛將)에 특채된다. 당시 병조판서가 민암이었다. 이듬해에는 병조판서 민종도의 후원으로 장희재는 금군(禁軍) 별장에 오른다. 민종도도 민암처럼 여흥 민씨이면서 남인 계통 집안이었고, 민암 못지않게 장희재의 후원자 역할을 맡았다. 그러고 숙종 18년 3월 6일 장희재는 다시 총융사(摠戎使)로 발탁된다. 특채, 특진, 발탁의 연속이었다. 김익훈이 역임한 바 있는 총융사는 수도 외곽의 남양·수원·장단의 군사 요충지를 관장하는 총융청의 최고 지휘관으로 종2품에 해당하는 고위직이었다.
그러고 이듬해 2월에는 한성부 우윤(右尹)에 임명된다. 오늘날 서울시 부시장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사간원 등의 비판이 이어지자 숙종은 곧바로 장희재를 포도대장으로 임명한다. 이 또한 종2품직이었다. 그러나 장희재의 벼락출세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이미 희빈 장씨에 대해 숙종은 싫증 내지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남인과 함께하는 국정 운영에 대해서도 부정적 의견이 커갔기 때문이다.
숙종에게 서인은 다루긴 어렵지만 신뢰할 수 있었고 반대로 남인은 다루긴 쉽지만 믿음이 가지 않았다. 기사환국 이후 9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11월 21일 숙종은 의미심장한 비망기를 내린다.
“경화(更化·기사환국)한 뒤에 여러 어진이가 더불어 같이 나아와 조정이 깨끗하고 밝으며, 임금이 신하에게, 신하가 임금에게 정과 뜻이 흐르고 통하여 일호(一毫)도 시기하거나 의심하는 마음이 다시없으니, 이는 바로 좋은 정치를 할 만한 기회이다. 어찌하여 백관이 직무에 태만하고 포기함이 날마다 더욱 심해져, 침상에서 쉬고 누워 있으면서 오직 몸이 편한 것만 도모하는가? 묘시(卯時)에 출근하여 유시(酉時)에 파하거나 진시(辰時)에 출사하여 신시(申時)에 파하는 것이 법전(法典)에 있는데, 태만함이 버릇이 되어 개좌(開坐·출근하여 정상적으로 사무를 보는 것)가 드물다. ‘형(刑)은 형벌이 없기를 기약하여야 백성이 중(中)에 합한다’는 것이 성인(聖人)의 밝은 가르침인데, 옥송(獄訟)이 쌓이고 밀리는 것이 근래에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세월을 끌면서 마땅히 결단할 것을 결단하지 아니하고 있다.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는 이목(耳目)을 맡은 곳이고, 옥당(玉堂·홍문관)은 논사(論思)하는 곳인데, 잠깐 들어왔다가 잠깐만에 나가니 무슨 일이 제대로 되겠는가? 혹시 큰 의논이나 큰 시비(是非)에 관계되는 데가 있으면, 문득 병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승정원은 후설(喉舌)의 중함을 맡았는데도 임명받은 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문득 곧 체직(遞職·보직이동)을 도모한다.
요즈음 대신이 건의하여 엄명을 내렸음에도 폐단의 고질(痼疾)이 이미 심하여 전과 같으니, 다시 무엇으로 퇴폐한 기강을 떨쳐 엄숙하게 하여 모든 정무가 함께 밝아지기를 바라겠는가? 오직 이와 같으므로 각사(各司)의 관원이 하는 일 없이 한가로이 세월만 보내면서 관청에 나와 직무 보는 것을 전사(傳舍·여관)에 들르는 것처럼 하며, 한 사람도 나랏일을 담당하여 그 이룩한 보람을 드러내는 이가 없으니, 이는 진실로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지도하고 통솔하지 못한 소치이다. 돌이켜 자신을 반성하여 부끄러워함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만약 옛 버릇을 통렬히 고쳐서 함께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아니하면, 국가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음이 있을 것이다.”
검소한 국왕 숙종
남인들의 무능에 대한 1차 경고였다. 숙종은 적어도 국정에 관한 한 철저하고 부지런했으며 유능했다. 그의 성격상 무능한 사람은 두고 보질 못했다. 그러나 남인들은 워낙 세력이 소수(少數)였기 때문에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재풀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남인들은 숙종의 이 같은 경고를 의례적인 것으로 들었을 뿐 경고로 이해하지 못했다. 남인 집권이 영속(永續)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 숙종은 검약했고 늘 국가 자원을 절약하고 세금을 줄여주는 데 깊은 관심이 있었다. 이런 그의 태도는 당쟁(黨爭)과는 무관하게 일관성을 보였다. 그리고 이런 주제로 관리들에게 책문(策問)을 요구하는 일도 잦았다. 이 또한 숙종이 어떤 당파의 국정 운영 능력과 태도를 재는 중요한 잣대였다.
숙종 17년(1691년) 1월 3일 일어난 우의정 김덕원 파직 사건은 당시 군권(君權)과 신권(臣權)의 과도한 비대칭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날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래선, 우의정 김덕원과 삼남 지방의 가뭄과 전세 감면 등 국정 현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덕원이 이렇게 말한다.
“신이 듣건대, 선묘(宣廟·선조)께서 편찮으실 때에 신하들이 입시(入侍)하였더니 무명에 물들인 포장을 치고 무명 바지를 입으시기까지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신하들의 조복(朝服)이 감히 오늘날처럼 고울 수 없었고, 환시(宦侍)들은 감히 비단옷을 입지 못하였다 합니다.
계묘년(1663년·현종 4년) 신이 가주서(假注書)로 있을 때 내관(內官·내시)과 함께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강의충이라는 내관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이 그에게 내탕(內帑)의 다과(多寡)를 물었더니, 강의충이 말하기를 ‘인조대왕께서는 여염에서 사셔서 백성의 일의 어려움을 환히 아시므로, 몸소 검소하여 절약해서 쓰셨으므로 내사(內司)의 저축이 계속 풍부했었습니다. 효종대왕께서는 변방 밖의 풍상(風霜)의 괴로움을 고루 겪으셨으므로, 모든 일에 힘써 간약(簡約)하게 하셔서 저축이 모자라지는 않았습니다. 금상(今上·현종)의 조정에 이르러서는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자라셨으므로, 절약하여 쓰는 방도가 두 조정만 못하여 지금은 내장(內藏)이 자못 비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참으로 절실하니, 더욱 검약(儉約)하여 절약해서 쓰는 방도에 힘쓰소서.”
숙종이 처음에는 ‘자못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다가’ 강의충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얼굴에 분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숙종이 화가 난 이유는 첫째, 신하가 내시와 함께 선대(先代) 국왕들을 논평했다는 것, 둘째 자신의 아버지인 현종이 마치 방탕했던 것처럼 말한 것, 셋째 궁궐에서 자라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이므로 간접적으로 자신을 겨냥한 것 등이었다.
이때 강의충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숙종은 더욱 화를 내며 강의충을 내시 명단에서 즉시 삭제하고 그 아들·사위·아우·조카의 이름까지도 모두 삭제할 것을 명하며 “차후 이런 일이 한 번 더 생기면 효시(梟示)하겠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김덕원은 죽을죄를 저지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그 자리에서 김덕원을 파직했다.
권대운과 목래선이 나서봤지만 숙종은 단호했다. 선조에 대해 내시가 평을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대신이 내시의 평을 그대로 어전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권대운과 목래선이 “대신의 말실수로 그 자리에서 파직시키는 것은 대신을 예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고 재차 설득을 시도했으나 숙종의 분노는 더욱 커질 뿐이었다. 이 일은 숙종과 김덕원의 역학 관계뿐만 아니라 숙종과 3정승의 역학 관계도 큰 차이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남인은 무능하기도 했지만 무력(無力)하기도 했다. 그 결과 숙종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남인 세력을 무시하고 있었다.
김춘택의 정치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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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택 |
정철·윤선도·김만중 등과 같이 문학적 자질이 뛰어난 인물들의 정치는 상당히 과격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김춘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에 따르면 김춘택은 김석주의 사람됨을 흠모했다고 한다. 김석주가 김만기와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김석주의 음모와 공작 정치를 멋지게 생각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춘택은 위험할 정도로 대담했다. 먼저 궁인(宮人)의 동생을 첩으로 맞아들여 궁중의 정보 입수에 나선다. 이를 위해 은화 1000금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심지어 당대 최고의 실력자인 장희재의 부인과 정(情)을 통하며 남인들 동태에 대한 깊은 정보를 빼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온몸을 던졌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작은할아버지 김만중이 유배지 남해에서 쓴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해 은밀하게 궁녀들을 통해 숙종에게 전달토록 했다고 한다. 비록 중국을 무대로 했지만 《사씨남정기》에 나오는 사씨부인은 인현왕후, 유한림은 숙종, 요첩 교씨는 희빈 장씨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숙종의 마음을 바꿔보려는 김춘택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일화다.
김춘택은 왕실의 숙안공주와 숙명공주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두 공주는 효종의 딸로 숙종에게는 고모들이었다. 그중 특히 숙안공주는 남인에 대해 뿌리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숙안공주와 익평군 홍득기 사이에서 난 아들 홍치상이 기사환국 때 남인들에 의해 사사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무능한 남인이었지만 김춘택을 비롯해 신진 인사들이 중심이 된 서인 세력의 움직임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남인은 적어도 실권을 갖고 있었다. 남인 쪽의 사령탑은 우의정 민암이었다. 양측의 정보전은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러나 결국 민암 쪽이 패했다.
하룻밤 사이에 ‘少論’ 세상으로 바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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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 |
오죽했으면 당장 영의정을 제수해야 하는데 명을 받들 승지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숙직을 위해 대궐에 나와 있던 오위장 황재명을 ‘가승지(假承旨·임시 승지)’로 임명하고 곧바로 서인 소론의 영수이던 남구만(南九萬·1629~1711년)을 영의정으로 임명한다. 또다시 백지상태에서의 조각(組閣)이 시작된 것이다.
숙종은 권력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곧바로 훈련대장에 기사환국으로 쫓겨났던 신여철을 다시 임명했고 병조판서에는 강릉부사로 나가 있던 서문중을 임명했다. 그리고 남인 이현일이 맡았던 이조판서에는 유상운을 서용했다. 최소한의 인선을 마친 숙종은 세 가지 중대 사안에 관한 입장을 밝힌다.
첫째, 국본(國本)을 동요시키는 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서인 세상이 되었다고 해서 세자를 흔들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폐인(廢人·폐서인 된 인현왕후 민씨)을 비롯해 홍치상과 이사명을 신원(伸冤)하려는 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서인이 다시 집권했다고 해서 기사환국이나 자신의 폐비(廢妃) 결정에 시비를 걸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셋째, 이상(李翔)을 신원하려는 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이를 어길 경우,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고 못 박았다.
‘少論의 영수’ 남구만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숙종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서인 중에서도 이런 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소론과 함께 정권을 이끌어가겠다는 뜻이었다. 특히 세 번째 말한 이상을 신원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송시열의 죽음을 신원하려 들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상은 철저하게 송시열을 따르던 인물로 송시열이 사사된 직후 모함을 당해 1690년 1월 19일 옥중에서 사망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소론 중심의 정권을 세우겠다는 숙종의 이런 의중은 이미 남구만을 영의정으로 정한 데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남구만은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으로 어려서는 송준길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효종 7년(1656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사간원·홍문관·사헌부의 요직을 거쳐 전라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고 이때 북방의 방어를 튼튼히 했다.
숙종 즉위 후에는 남인 정권하에서 서인임에도 불구하고 대사성·형조판서·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지만, 이때 남인의 핵심 인물인 윤휴·허견 등을 탄핵하다가 남해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숙종 6년(1680년) 경신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실각하자 조정에 복귀해 도승지·대사간 등을 지냈다. 특히 1683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어 북방에 무창과 자성 등 두 군(郡)을 설치해 영토 보전에 기여했다. 아마도 이것은 함경도 관찰사 때의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러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자 소론의 영수로 추앙을 받았다.
이듬해인 1684년 우의정, 1685년 좌의정을 거쳐 2년 후인 1687년 영의정에 오르지만 2년 후 기사환국이 일어나 강릉으로 유배를 갔다가 이때 다시 영의정을 맡게 된 것이다. 능력이나 포용력 면에서 숙종의 말할 수 없는 큰 신뢰를 받았던 인물이다. 실제로 7년 후인 1701년 장희빈의 사사 여부를 둘러싸고 노론의 김춘택 등이 사실상의 사형을 주장하자 이에 맞서 가벼운 형을 주장했다. 결국 숙종이 사사를 결정하자 중추부 영사를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 때문에 삭탈관작 되고 유배까지 가야 했지만 6년 후에 다시 숙종의 부름을 받아 봉조하(奉朝賀)에 오른다. 우리에게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되는 시조로 친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少論의 山林’ 박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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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채 |
4월 3일에는 박세채(朴世采· 1631~1695년)를 우찬성으로 명해 불러들일 것을 명한다. 허목·윤휴·송시열·이현일 등이 했던 일종의 정신적 지주(支柱)로서의 ‘산림’ 역할을 박세채에게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남구만이 소론의 실천적 지도자였다면 박세채는 이론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남구만보다 두 살 아래였던 박세채는 신흠(申欽)의 외손자다. 홍문관 교리를 지낸 아버지 박의가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기 때문에 박세채도 이이(李珥)의 《격몽요결》로 학문을 시작했다.
그는 김상헌과 김집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고 송시열·송준길 등과도 학문적 교유 관계를 유지했다. 현종 초 예송 때는 송시열의 기년설을 지지했고 이 때문에 숙종 즉위와 함께 시작된 남인 정권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본격적으로 정치에 나섰고 노론과 소론으로 나뉠 무렵 그는 남구만과 함께 소론의 영수로 떠올랐다. 당시 그는 송시열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학문적 영향력 면에서 빼어났다.
이 무렵 박세채는 자신이 소론이기는 했지만 노론과 소론을 중재하는 데 정치인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이 점에서도 박세채는 자신이 사표(師表)로 삼았던 이이를 닮았다. 그래서 당시에도 최석정(崔錫鼎) 같은 사람은 박세채를 이이에 비견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이가 진정한 당쟁 중재자였는지는 오늘날에 와서는 의문스럽다.
박세채의 ‘황극탕평론’
이후 박세채는 당쟁 해결을 위한 논리화 작업에 들어가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정립하게 된다. 황극탕평이란 4서3경 중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로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진정(進呈)했다고 하는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나온다.
‘황극’이란 ‘황건기유극(皇建其有極)’의 준말로 풀어쓰면 황제 혹은 군주가 지극한 표준(極)을 세운다는 뜻이다. 탕평이란 말도 《홍범구주》의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탕탕(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 편과 당을 짓지 않으면 왕도가 크게 이뤄진다는 뜻이다. 이는 당파 위주의 주희(朱熹·주자)식 붕당론(朋黨論)을 받드는 노론에 대한 정면 비판이었다. 동시에 왕권 강화의 의지가 누구보다 강력했던 숙종으로서는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정국운영론이었다.
이런 박세채를 숙종은 4월 27일 좌의정에 임명한다. 같은 날 윤지완은 우의정에 제수된다. 이건창은 《당의통략》에서 “윤지완이 우의정이 되었는데 무릇 의견을 올릴 때 다 남구만과 함께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의 형 윤지선은 이미 좌의정을 지낸 바 있고 동생 윤지인도 훗날 병조판서에 오른다. 이렇게 해서 남구만·박세채·윤지완의 소론 3정승 체제가 갖춰진 것이다.
그러나 박세채의 입궐은 두 달 가까이 지연되었다. 20차례에 가까운 사직소를 올린 끝에 마침내 윤 5월 29일 박세채는 명을 받아들였다. 그러고 6월 4일 박세채는 ‘사본차(四本箚)’로 불리는 4통의 차자(箚子·약식 상소)를 올린다.
첫째는 ‘임금의 청납(聽納)을 넓히는 것’인데, 숙종이 지난날의 일을 징표 삼아 앞으로의 도모를 신중하게 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둘째는 ‘국체(國體)를 높이는 것’인데, 이는 무엇보다 숙종이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백관들도 역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특히 숙종에게 중요했다. 박세채는 숙종의 성정을 ‘희로(喜怒)의 폭발’이라고 부르며 감정을 잘 다스릴 것을 간곡하게 청했다.
셋째는 ‘인심(人心)을 따르는 것인데, 어떤 일을 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옳은지 그른지를 깊이 살펴보아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넷째는 ‘붕당을 소멸시키는 것’인데, 역시 성명에게 사람의 쓰고 버림과 진퇴(進退)를 당색(黨色)으로 하지 말고 한결같이 개개인의 현명(賢明) 여부를 중시할 것을 바란 것이었다.
숙종의 黨爭 비판
박세채의 이 같은 상소에 따라 숙종은 7월 20일 자신을 돌아보고 그동안의 정국에 대해 반성하는 교서를 반포한다. 여기에 당쟁의 폐해와 원인 등에 대한 숙종의 생생한 인식이 들어 있다.
“당시 일을 맡아 다스리던 사람들로 하여금 피차를 논할 것 없이 각각 편당하는 풍습에 주력하기를 그만두지 않게 만들었으니, 청남(淸南)과 탁남(濁南),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에서 대개(大槪)를 미루어 볼 수 있다.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칠 적마다 마음이 에이는 듯하다.
그 연유를 따져보면 진실로 허물이 나에게 있는 것이니, 어찌 감히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마는, 미루어 논한다면 또한 편당하는 풍습이 빌미가 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대저 임금의 명령을 거행하는 것보다 큰일은 없다. 그런데 사당(私黨)에 관계되면 임금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관정(官政)을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당에 관계가 되면 관정도 거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사람 쓰기를 옳게 하느냐 잘못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당에 관계되면 출척(黜陟)에 공정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일에 대한 의논을 옳게 하느냐 그르게 하느냐보다 간절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당에 관계되면 가부(可否)를 올바르게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무릇 이는 모두가 강령(綱領)을 세우고 기율(紀律)을 펴며 현명한 사람을 얻어 일을 처리하는 바이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편당하는 풍습 때문에 해치지 않는 것이 없어, 차라리 군부(君父)를 저버릴지언정 차마 그 당을 저버리지는 않으니, 다시 어떻게 국가의 급무(急務)를 먼저 하고 사사로운 원수를 뒤로 돌리겠는가? 국사(國事)의 계획과 민중의 근심거리는 서로 까마득하게 잊고 거침없이 모두가 이러고만 있으니, 내가 장차 누구의 힘에 의지하겠는가? 또 서로 처신하는 것을 살펴보건대, 비록 한때 함께 벼슬하고 있으면서도 정의(情誼)가 통하지 못하고 마치 연월(燕越)처럼 지내 전혀 충성하고 공경하며 자신을 반성하는 도리는 없고 매양 원망과 한탄으로 불안해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있다.
대소(大小)와 신구(新舊)가 갈수록 서로 사모하며 본받기만 하여, 천 갈래 만 갈래의 짓이 대개 공정함을 배반하고 사사로움만 따르는 것이 많다. 중외(中外)의 학교(學校) 선비들에 있어서도 시속(時俗)을 따르며 기세를 타서 제멋대로 배척하되 더욱 끝없이 싸움질만 하는 곳이 되었으니, 그 끼쳐질 폐해는 장차 나라가 나라 꼴을 못 갖추어 완전히 뒤집혀 멸망하게 되어도 구원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다. 그러니 또한 어찌 감히 임금과 신하가 같은 덕과 같은 마음으로 다스려진 세상을 이루게 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아! 심한 일이로다. 또한 알 수 없지만, 조정의 신하나 초야의 선비로서 능히 이런 풍습을 깊이 싫어하며 개연히 분발하고 쭈뼛하게 마음으로 놀라, 나와 함께 이런 생각을 같이할 사람이 있는가? 지나간 해에 내가 일찍이 시(詩) 한 수를 가지고 조정 신하들을 깨우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로 인해 마음을 고치고 풍습을 바꾼 사람을 들어보지 못했으니, 개탄스러운 일이다. 대저 어찌 조정 신하들만의 잘못이겠느냐? 내가 더러는 희로(喜怒)에 있어서 잘못하고, 더러는 시비(是非)에 어두워 진퇴와 출척을 모두 합당하게 하지 못했기에, 성의(誠意)가 뭇 아랫사람들에게 미덥지 못하고 교화하는 도리가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소치인 것이다.”
박세채의 시대 진단은 무엇보다 숙종의 인간적 성숙(成熟)을 요구한 것이고 숙종도 신하들의 책임을 함께 묻기는 했지만 자신을 돌아보는 데 크게 인색하지는 않았다. 4월 6일에는 송시열을 복관하고 제사를 지낼 것을 명한다. 소론 정권이긴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서인의 복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숙종 중반기 정치는 비교적 안정적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