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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20〉

‘黨人 송시열’을 이해하는 다섯 장면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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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 “朱子가 있은 후에 孔子가 있고, 율곡이 있은 후에 주자가 있다”
⊙ 조선 禮學의 학맥, 송익필-김장생-김집-송시열
⊙ 삼전도의 굴욕 이후 벼슬 거부하면서도 정치적 영향력 강화하는 山林의 길 걸어
⊙ 임술고변 당시 스승 김장생의 손자라는 이유로 김익훈 옹호… 西人, 老論과 少論으로 분열
⊙ 죽는 순간까지 ‘直’을 강조… ‘誠’을 강조했던 이이가 아니라 송익필의 후계자임을 표명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송시열
  300년 조선 당쟁(黨爭)의 정점(頂點)은 숙종(肅宗)과 송시열(宋時烈), 두 사람의 정면충돌이다. 송시열은 한순간도 자신이 조선 국왕의 신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는 오직 주희(朱熹·주자)만을 존중하는 당인(黨人)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송시열 생애의 주요 매듭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송시열은 1607년(선조 40년) 충청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그의 외가였다. 그때만 해도 외가에서 출산하는 것이 사대부 집안에서 하나의 관례였다. 그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1574~1628년)는 명종비 인순왕후의 능 강릉(康陵) 참봉을 지낸 것이 전부다.
 
  송갑조는 기개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광해군 때 송갑조는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했다. 당시 급제자들은 광해군과 서궁(西宮)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관계가 좋지 않은 점을 감안해 서궁에는 인사를 가지 않겠다는 상소를 준비했다. 일찍부터 실권(實權)을 가진 광해군과 대북(大北) 세력에게 점수를 따놓겠다는 발상이었다. 그러자 송갑조는 홀로 분연히 반대했다. 그러고 혼자 서궁에 가서 인목대비를 찾아뵙고 절을 올렸다.
 
  그 바람에 송갑조는 유적(儒籍)에서 삭제당하는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西人)들은 그에게 강릉 참봉 자리를 주었다. 참봉이란 종9품의 말 그대로 미관말직이었지만 송갑조가 해본 거의 유일한 벼슬자리였다.
 
 
  學序
 
  벼슬은 낮았지만 그의 학문은 탄탄했다. 어린 송시열의 공부도 그가 직접 가르쳤다. 송갑조는 송시열에게 공부를 가르치면서 늘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고 한다.
 
  “주자(朱子)가 있은 후에 공자(孔子)가 있고, 율곡(栗谷)이 있은 후에 주자가 있으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당시 서인이라면 대부분 공유하고 있던 학서(學序), 즉 학문하는 순서였다. 서인-노론(老論)-벽파(辟派)가 잇게 되는 학서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공부를 배우기 시작한 송시열은 아버지로부터 12세 때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웠다. ‘몽매를 깨뜨리는 간략한 요령’이라는 뜻으로 일종의 어린이용 성리학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소학(小學)》은 읽었을 것이기 때문에 송시열의 주자학적 세계관은 점점 더 강화되어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송갑조는 송시열에게 김정국의 《기묘록》과 허봉의 《해동야언》 등을 읽도록 했다. 둘 다 중종 때 조광조 일파가 훈구파로부터 화(禍)를 당한 기묘사화(己卯士禍) 등을 다루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송갑조의 작은할아버지 송인수 이후 송시열 집안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가학(家學)이자 가풍(家風)이었을 것이다. 송갑조의 아버지, 즉 송시열의 할아버지 송응기는 도사(都事·종5품)를 지냈고 송갑조의 할아버지, 즉 송시열의 증조할아버지 송구수(宋龜壽·1497~1538년)는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 참봉을 지낸 것이 전부일 정도로 중앙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山林의 元祖’ 金長生
 
김장생
  열여덟 살 무렵인 1625년(인조 3년) 도사 이덕사의 딸과 혼인한 송시열은 본격적인 학문 수련을 위해 성리학과 예학을 가르치며 명성을 얻고 있던 김장생(金長生·1548~1631년)을 찾아간다. 김장생을 알면 ‘양송(兩宋)’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이 보인다. 또 훗날 그의 증손자인 김만기(金萬基)의 딸이 숙종과 결혼해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김장생은 선조 때 이이(李珥)의 지우(知友)이자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金繼輝·1526~1582년)의 아들로 문과를 거치지 않고 선조 11년(1578년) 31세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예종의 능인 창릉(昌陵) 참봉이 되고, 1581년 이성계에 관한 명나라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기 위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 참봉이 되었다. 중간급 관리를 두루 거치다가 광해군 즉위와 함께 북인(北人) 세력이 득세하자 충청도 연산으로 낙향하여 제자 양성과 예학(禮學) 연마에 몰두했다.
 
  어려서 김장생은 송익필(宋翼弼· 1534~1599년)에게서 사서(四書)와 주희의 《근사록(近思錄)》을 배웠다. 김계휘는 학문에 뜻을 두고 정진하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며 “우리 아이가 이러하니 나는 근심이 없다”며 흡족해했다고 한다. 김장생이 송익필에게서 ‘예학’을 익혔다면 이이의 문하에서는 ‘성리학’을 배웠다. 예학과 성리학은 김장생 학문의 양대 축이며 이후 서인들의 세계관을 지배하는 중요한 지적 근간(根幹)으로 자리 잡게 되며 이런 전통은 송시열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차이가 있다면 송시열은 양자의 뿌리를 주희로 보고 주자학 근본주의로 나아간 정도이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주목받아
 
  1613년(광해군 5년) 광해군 정권을 대표하는 권간(權奸)이었던 이이첨이 선조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나아가 인목대비까지 모살하려 했던 계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김장생의 이복동생인 김경손·김평손 등이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 이이첨 일당의 ‘살생부(殺生簿)’에는 김장생의 이름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이첨의 협박과 회유로 영창대군 옥사의 주범 역할을 했던 박응서가 “김장생은 뛰어난 사람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처음 모의할 때 그가 알까 봐 두려워했습니다”고 적극 옹호하는 바람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이 사건이 김장생에게 준 충격은 컸다. 이후 그는 연산으로 내려가 문을 닫아걸고 외부 사람들을 일절 만나지 않고 오직 경서 읽기와 사색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세간의 주목을 다시 받게 된 것은 인조반정이 일어난 이후였다. 서인 세력의 도움을 받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1623년(인조 1년) “김장생은 내가 잠저(潛邸·임금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에 있을 때부터 익히 그 이름을 들었노라”며 사헌부 장령을 제수(除授)하고 한양으로 올라올 것을 명했다. 이때 김장생의 나이 76세 때였다. 김장생은 정중히 사양했다.
 
  이듬해 2월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는 남쪽으로 파천(播遷)해야 했는데 이때 김장생이 공주에서 인조를 맞이했다. 난이 끝나고 환도(還都)하던 인조는 김장생에게 원자(소현세자)의 교도(敎導)를 맡아줄 것을 명했다. 이후 김장생은 강학관에 임명돼 원자의 교육을 맡았고 인조 3년(1625년) 8월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자 김장생은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에 올라 중추부 동지사에 제수되었다. 그의 세자 교육에 대한 인조의 만족감이 그만큼 컸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시금 김장생은 연산으로 물러나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쓴다. 열여덟 청년 송시열이 연산으로 김장생을 찾아간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이미 ‘세자를 가르친 스승’이라는 명성이 자자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후 송시열도 송준길과 더불어 ‘세자를 가르친 스승’으로 이름을 얻게 된다. 김장생 문하와 조선 왕실의 인연은 이렇게 세자 교육을 중심으로 계속 이어졌다.
 
  당시 김장생은 연산에서 둘째 아들 김집(金集·1574~1656년)의 도움을 받으며 전국에서 몰려온 전도유망한 청년 제자들을 길러냈다. 제자들은 김장생을 ‘노(老)선생’, 김집을 ‘선생’으로 불렀다. 이렇게 해서 조선 예학의 학맥은 송익필-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연산에서 송시열과 함께 김장생에게 학문을 익힌 인물로는 송준길, 이유태, 이상형, 송시영, 송국택, 이덕수, 이경직, 임의백, 유계, 김경여, 윤선거, 윤문거, 김익희 등이 있었고 최명길(崔鳴吉·1586~1647년)도 젊어서 김장생에게 배운 바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훗날 서인 기호(畿湖)학파의 중핵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당색(黨色)은 그리 완고하지 않아 호남 남인(南人) 계열의 인물들도 제자군(弟子群)에 포함돼 있었다.
 
 
 
남한산성의 송시열

 
  김장생 문하에서 학문 연마에 몰두하던 송시열은 1631년(인조 9년) 김장생이 세상을 떠나자 김집 아래에서 계속 성리학과 예학의 세계관을 갈고닦았다. 스물일곱 살 되던 인조 11년(1633년) 송시열은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그해 10월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훗날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의 능인 경릉(敬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했다. 이미 조정에서는 송시열의 학문적 깊이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2년 후인 1635년 송시열은 대군(大君) 사부로 임명되어 봉림대군의 학문 연마를 책임지게 된다. 물론 세자의 사부가 정1품이고 세손의 사부가 종1품인 데 비하면 그의 관직은 종9품이었으니 여전히 참봉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일국의 대군을 가르친다는 것은 여간 명예가 아니었다. 송시열을 대군 사부로 추천한 인물은 다름 아닌 김장생의 제자이자 그런 점에서 송시열의 선배이기도 했던 최명길이었다.
 
  당시 송시열은 스물아홉, 봉림대군은 열일곱이었다. 봉림대군은 훗날 효종으로 숙종의 할아버지다. 사실 그때만 해도 소현세자가 건재할 때이므로 누구도 봉림대군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때였다.
 
  6개월 정도밖에 안 되지만 송시열이 대군 사부를 맡았던 일은 그가 봉림대군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 이외에도 그 관직으로 인해 송시열이 인조의 삼전도 굴욕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훗날 소현세자가 아닌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6개월 ‘대군 사부’의 파장은 끝 모르게 확장된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송시열은 봉림대군 사부였다. 당시 봉림대군은 인조 비빈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을 하지만 송시열은 인조의 파천 행렬을 따라 남한산성에 함께 들어갔다. 그래서 45일 동안 남한산성에 머물면서 청년 송시열은 인조의 모든 것을 가까이에서 살필 수 있었다. 산성으로 피해 들어간 지 열흘째 되던 12월 24일 겨울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가운데 인조는 세자와 함께 너른 마당 한가운데에 섰다. 하늘에 죄를 빌기 위함이었다.
 
  “오늘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저희 부자가 죄를 지은 때문입니다. 성안의 군사나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늘이 재앙을 내리시려거든 저희 부자에게 내리시고, 모든 백성을 살려주시옵소서!”
 
 
  삼전도의 충격
 
  이 광경을 송시열은 어떤 마음으로 지켜보았을까?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인조가 청(淸)나라 태종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의 예를 올리는 것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해야 했다. 송시열의 남한산성 및 삼전도 체험은 인조에 대한 측은과 충성보다는 국가적 치욕에 따른 분노를 자아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송시열의 솔직한 심정은 병자호란 직후 속리산 복천사에서 윤휴(尹鑴)를 만나 통곡을 하면서 나눈 대화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훗날 자신과 최고의 정적(政敵)이 되는 바로 그 윤휴다.
 
  “혹시 우리가 정치를 하게 될 경우 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
 
  청년 송시열에게 조선의 패배와 인조의 굴욕이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이 무슨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송시열은 정신적으로는 망명(亡命)을 해버렸는지 모른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인조는 허물어진 체통, 즉 정당성 확보를 위해 송시열이나 송준길과 같은 산림(山林)의 인사들을 조정에 끌어들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송시열의 경우에도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여 조정에 출사할 것을 요청받았다. 인조 22년과 23년에는 인조가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정5품직인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며 조정 참여를 권했으나 두 사람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 점에서 ‘양송’은 스승 김장생과 비슷한 경로를 걷는다. 조정의 관직 권유와 단호한 거부가 반복되면서 두 사람의 관직은 계속 높아만 갔고 더불어 산림에서의 명성 또한 하늘을 찌르고 남을 정도였다.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는 송시열·송준길과 같은 인물을 끌어안기에는 구조적으로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양송은 정치와 ‘절연(絶緣)’하는 입장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뜻은 오로지 현실정치를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는 관점을 한순간도 버리지 않았다.
 
 
 
主流와 非주류

 
김석주
  숙종 집권 후 남인을 내쫓는 경신환국(庚申換局) 때까지만 해도 숙종의 마음은 남인의 복선군에게 7, 서인의 김석주(金錫胄)에게 3 정도의 비중을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숙종 5년 중반부터 남인들의 과도한 당파성과 무능에 숙종이 조금씩 넌더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점을 간파한 김석주는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핵심 인사들과 비밀리에 의견을 교환하며 새로운 정권 준비에 들어갔다.
 
  경신환국으로 남인은 배척됐고 서인은 복귀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서인이라고 다 서인은 아니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 주류(主流), 김석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 비주류가 있었다. 문제는 힘이 비주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숙종의 의중이기도 했다.
 
  이때 숙종의 마음은 김석주에게 90% 이상 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인의 시대가 열리고 2년이 지난 숙종 8년 5월 김석주는 우의정에 오른다. 이제 김석주는 더 이상 배후의 권력도 아니고 숨은 군부(軍部) 실세도 아니었다.
 
  즉위 초 다른 권한은 남인에게 줘도 병권(兵權)만은 김석주에게 남겨야 했기에 줄곧 병조판서를 지냈던 김석주는 숙종 6년 10월 12일 이조판서로 자리를 옮긴 다음 의금부 판사를 거쳐 숙종 8년 5월 18일 우의정에 제수된다. 마침내 정승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告變
 
  그가 정승에 오른 지 다섯 달 열흘 만인 10월 21일 전 병사 김환과 출신 이회 및 기패관 한수만 등이 남인 허새·허영 등이 역모를 꾸며 ‘삼복’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복평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고변(告變)했다. 이런 일은 늘 그렇지만, 소론(少論)의 입장을 대변하는 《숙종실록 보궐정오》는 이를 어영대장 김익훈(金益勳·1619~1689년)이 공을 세우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김익훈이 김석주의 지휘하에 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랬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김장생의 손자이자 인경왕후 김씨의 작은할아버지이기도 한 김익훈이 김석주의 사주를 받아 연이어 고변을 했다. 김익훈은 원래 자신이 고변했던 허새·허영 등의 ‘역모 사건’이 뜻대로 되지 않자 별도의 사건을 꾸며 남인들을 다시 고변한 것이다.
 
  김익훈은 인경왕후 아버지 김만기의 작은아버지로 1678년 광주부윤을 거쳐 경신환국 이후 남인 축출에 앞장섰으며 그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2등에 올랐다. 이후 형조참판·어영대장 등 핵심 요직을 거쳤으나 김석주가 주도한 남인 축출 음모는 오히려 서인 내의 반발을 불러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애당초 너무나도 무리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이후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공신의 지위를 빼앗기고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고문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권문세가의 나라
 
김수항
  숙종 6년 4월 남인을 몰아낸 숙종은 5월에 보사공신을 책봉한다. 1등공신은 김석주와 김만기였다. 그리고 2등공신은 이입신 1명이었다. 그런데 그해 9월 5일 김석주가 상소를 올려 정원로를 이중간첩으로 활용할 때 공을 세운 인물들에게도 공신책봉을 해야 한다고 주청해 그해 11월 22일 이사명·김익훈·조태상·신범화 등 4명이 2등공신에, 이광한·이원성이 3등공신에 추가로 책록됐다.
 
  당시 공신책봉이 얼마나 무리했는지는 그날 실록을 보면 알 수 있다. 통상 공신을 정하려면 빈청(賓廳)에 전·현직 정승들이 모두 모여 공적을 정확히 가린 다음에 1, 2, 3등을 정하고 국왕의 재가(裁可)를 받는 것이 순서이다. 그런데 이날 실록은 공신 추가 작업이 졸속에 의한 것임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빈청에서 공신의 훈공을 등록하는 데 다만 영의정 김수항이 원훈(元勳)인 이조판서 김석주와 더불어 상의해서 감정하였고, 그 밖에 시임(時任·현직) 대신과 원임(原任·전직) 대신은 모두 불참하였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김수항(金壽恒·1629~1689년)·김석주·김익훈의 밀접한 커넥션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수항은 김상헌의 손자, 김석주는 김육의 손자, 김익훈은 김장생의 손자라는 사실이다. 당시 조선은 이처럼 한 줌도 안 되는 권문세가(權門勢家) 사람들이 대대손손 권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숙종 8년 2월 20일 김익훈은 영의정 김수항의 추천으로 총융사(摠戎使)에 임명된다. 총융사란 수도 방어를 위해 경기도 외곽의 수원·남양 등지에 설치된 군부대를 총괄하는 사령관직이다. 실은 그 전날 숙종의 장인 김만기가 육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훈련대장에서 물러나자 김수항은 후임으로 어영대장으로 있던 김석주를 추천했고, 다시 비게 되는 어영대장에는 신여철과 김익훈을 추천했는데 숙종이 신여철을 선택하자 이날 김익훈을 총융사로 추천해 임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5월 18일 병조판서 겸 훈련대장으로 있던 김석주가 우의정으로 정승에 오르자 후임 훈련대장에 신여철, 후임 어영대장에 김익훈이 임명된다. 당시 이들에 대한 숙종의 신임이 얼마나 컸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꼬여버린 告變
 
  이 어영대장 김익훈이 그해 10월 밀계(密啓)를 올려 김환 등의 일을 고변했던 것이다. 이건창이 《당의통략》에서 기록한 전후 맥락은 이렇다. 여전히 남인들의 동향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숙종이 김석주에게 감시를 철저히 할 것을 명했다. 이에 김석주는 무인(武人) 김환에게 남인 감시의 책무를 맡겼다. 김환은 원래 서인이었지만 벼슬은 남인에게서 받아 남인들과도 두루 친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김환은 처음에는 ‘간첩’ 노릇은 할 수 없다고 버텼으나 김석주가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일에 말려들게 된다. 밑그림은 이미 김석주가 그리고 있었다.
 
  “허새와 허영은 한강 위에 산다. 너는 그 이웃으로 이사해 함께 어울려 장기를 두다가 네가 상대편 왕을 잡으면 ‘나라를 취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면서 그들의 의중을 떠봐라. 허새 등이 호응하는 것 같으면 너는 허새에게 함께 모반을 하자고 말하라!”
 
  아무리 실세(實勢) 우의정이 내린 명이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김환은 “만일 그랬다가 허새 등이 역심(逆心)이 없으면 내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석주는 자신만 믿으라며 김환을 안심시킨 뒤 거액의 은화(銀貨)까지 제공했다. 거사자금이었다.
 
  더불어 김석주는 김환으로 하여금 유명견도 주의 깊게 감시할 것을 명했다. 유명견은 이름난 선비였기 때문에 김환이 갑자기 얽어 넣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그의 문객(門客)인 전익대라는 인물과 사귀면서 그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 이후 김환이 김석주의 지시대로 하자 허새와 허영이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한편 이런 공작이 한창 진행 중인 가운데 그해 11월 김석주가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가게 된다. 사실 숙종으로서는 정국이 불안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석주를 청나라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청나라에 김석주 이름이 통보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달리 바꿀 수 있는 방도도 없었다.
 
  결국 청나라 연경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된 김석주는 자신의 행동대장 김익훈에게 뒤를 부탁했다. 자신이 그동안 추진해온 음모의 골격을 전달해주었음은 물론이다. 뒤늦게 음모에 뛰어든 김익훈은 서둘렀다. 그래서 김석주가 없는 사이 김환을 몰아세웠다. 내몰린 김환은 전익대를 만나 유명견에게서 알아낸 것이 없느냐고 다그쳤다. 이에 전익대가 “유명견이 활을 만드는 것을 보았는데 의심할 만한 일입니다”고 답했다.
 
  그런데 이미 세상의 눈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시중에 “김환이 겉으로는 정탐하는 척하면서 실은 모반하려는 것이다”는 유언비어가 파다하게 퍼졌다. 이에 놀란 김환이 전익대를 찾아가 “너는 나를 따라 고변하라. 거절하면 반드시 너를 먼저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전익대는 “유명견이 모반한다는 증거가 없는데 어찌 차마 무고할 수 있는가”라고 맞섰다. 한마디로 일이 꼬여버린 것이다.
 
 
  公敵이 된 김익훈
 
  사태가 급박해진 김환은 일단 전익대를 가둔 다음 김익훈을 통해 허새와 허영이 모반을 계획 중이라고 고변했다. 이것이 1차 고변이었다. 사흘 후에는 이와 전혀 무관하게 별도의 고변이 있었다. 문제는 김환이 고변 후 벼슬을 받게 되자 전익대 문제가 골칫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일단 김환은 전익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 김석주가 연경에서 돌아왔다. 김익훈으로부터 전말을 전해 들은 김석주는 아방(兒房)에서 직접 주상께 밀계를 올리면 될 것이라는 처방을 내놓았다. 아방이란 대궐 안 장군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었다. 이에 김익훈은 “나는 글을 쓸 줄 모르는데 어떻게 하지요”라고 걱정하자 김석주가 밀계의 주요 내용을 써주었다. 밀계의 핵심 중 하나는 전익대를 함께 엮어 넣는 것이었다.
 
  국청에 잡혀온 전익대는 김환이 승진해 있는 것을 부러워하며 유명견이 반역을 꾀했다고 고변했다. 물론 근거 없는 거짓말이었다. 즉각 국청에서는 유명견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대질 결과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드러났다.
 
  다시 정리하면 첫째로 김환의 고변이 있었고 이어 김중하가 민암을 지목하는 고변이 있었고 셋째로 김익훈의 아방 밀계가 있었다. 흔히 이 셋을 합쳐 임술고변이라고 한다. 최종 조사 결과 유명견과 민암은 무고임이 드러났고 김중하와 전익대는 귀양을 가야 했다. 특히 전익대는 참수형을 당한다. 사실 김중하의 고변도 김익훈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결국은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없는 전익대만 죽고 나머지는 다 살아서 관직에도 오르고 생명을 부지했다.
 
  모든 게 어설펐기 때문에 삼척동자도 전후 사정을 다 알게 됐다. 점차 김익훈은 ‘공적(公敵)’으로 떠올랐다. 당시 상황에서 김석주를 직접 탄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망은 모두 김익훈을 향했다.
 
 
  송시열의 變心
 
박세채
  특히 젊은 사림을 중심으로 김익훈을 비난하는 논의가 거세져갔다. 일단 김익훈을 내쳤으나 얼마 후 다시 불러들였다. 이에 대간 유득일과 박태유가 김익훈을 강도 높게 탄핵하자 숙종은 대로하여 두 사람을 지방관으로 내쫓는다. 숙종의 생각은 이러했지만 좌의정 민정중의 생각은 달랐다. 민정중은 이미 영의정 김수항과 호포법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은 바 있었기 때문에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하여 숙종에게 산림의 의견을 구할 것을 청한다. 그래서 송시열·박세채·윤증 등 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는 자리를 만들려 한다.
 
  한편 대사성으로 있을 때 김익훈을 앞장서서 탄핵한 바 있는 승지 조지겸은 당시 경기도 여주에 머물고 있던 송시열을 찾아가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한 다음 의견을 구했다. 소장파 편을 들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에는 송시열도 조지겸의 이야기를 들은 후 “사태가 진실로 그와 같다면 김익훈을 죽여도 족히 부족할 것이 없겠소이다”고 말했다. 이에 힘을 얻은 조지겸은 한양으로 돌아와 “대로(大老)의 소견도 우리와 마찬가지일세”라고 말했다.
 
  숙종 9년 1월 송시열이 한양 도성에 들어왔다. 그때 김석주가 송시열을 찾아가 자신의 입장에서 본 이번 사건의 전말을 전해주었다. 김석주가 김익훈의 무죄(無罪)를 강변하자 송시열도 입장이 난처해졌다. 김수항과 민정중도 만났을 것이다. 송시열의 생각은 바뀌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숙종은 “대로의 결정을 따르겠다”며 송시열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여러 차례 요청이 있었지만 송시열은 쉽게 단안을 내리지 못했다. 서인의 지도자이고자 했던 그는 자칫 이번 일로 서인이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老論과 少論의 분열
 
윤휴
  1월 19일 주강에서 송시열은 마침내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신(臣)이 죄를 기다리는 일이 있습니다. 문순공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이었던 조목(趙穆)은 이황이 죽은 뒤에 그의 자손을 보기를 마치 동기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가 관직에 있을 적에 지성으로 경계하여 과실을 면하게 하여 주었으므로, 당시나 후세에서 모두 조목이 그의 스승을 위하여 도리를 다하였다고 일컬었습니다. 신은 문원공 김장생에게서 수학하였으므로, 그의 손자 김익훈과 신이 서로 친한 것은 다른 사람과 자연히 다릅니다. 근일(近日)에 김익훈이 죄를 얻을 것이 매우 중한데, 신이 평소에 경계하지 못하여서 그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신은 실지로 조목의 죄인입니다.”
 
  자기 몸을 던져서라도 김익훈을 옹호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숙종으로서도 원하던 바였다. 조지겸·오도일·유득일 등 젊은 사류들의 실망은 컸다. 이제 원망은 김익훈에서 송시열로 향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서인은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과 그를 비판하는 소론으로 갈리게 된다.
 
  숙종 15년(1689년) 초 정권은 다시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뀌었다. 기사환국이다. 3월 5일에는 윤휴의 문인이었던 우의정 김덕원의 청을 받아들여 윤휴의 복권(復權)을 명한다.
 
  “윤휴는 경학(經學)을 깊이 연구한 선비로서 대대로 국은(國恩)을 입어 지위가 경재(卿宰)에 올랐으나, 오직 시무(時務)에 익숙하지 못하여 논의가 다소 거칠기는 하였지만, 국가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단성(丹誠)은 진실로 내가 아는 바이다. 불행하게도 경신년에 간사한 무리가 송시열을 위하여 보복하려고 그 죄를 나열하며 터무니없이 무함하지 않음이 없었다.… 세월이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아직도 신원(伸寃)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의 본뜻이 아니다.”
 
 
  ‘임금을 잊고 黨을 위해 죽는 무리’
 
  윤휴를 재평가했다는 것은 곧 송시열의 죽음을 의미했다. 송시열은 2월 4일 숙종의 명에 따라 제주도로 유배를 가 있었다. 2월과 3월 두 달 동안은 주로 현직에 있던 서인 세력들을 제거하는 작업이 진행됐고 이어 3월과 윤 3월 두 달 동안은 이미 세상을 떠난 서인과 남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이이와 성혼의 문묘(文廟) 배향(配享)도 남인들의 요구에 따라 없던 일로 하게 됐다. 남인들로서는 서인의 뿌리인 이이와 성혼이 문묘에 배향되는 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인 숙청과 남인 복권은 대략 100여 일에 걸쳐 진행됐다. 이때 이뤄진 피의 숙청으로 20명 가까이가 각종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유배를 떠나야 했던 사람은 60여 명, 파직과 삭탈관작 등을 당한 사람은 20여 명이었다. 경신환국 이후 서인이 남인에게 가했던 복수의 규모와 비슷했다. 말 그대로 당동벌이(黨同伐異)였다.
 
  이 무렵 숙종은 송시열을 ‘큰 우두머리[巨魁]’라고 부르고 있었다. 함께할 때는 대로라 불렀으나 이제 최소한의 경칭도 생략해버린 것이다. 인현왕후 민씨의 폐서인(廢庶人) 문제가 한풀 꺾여가던 5월 30일 전(前) 별검 이기주와 유생 이탁이 송시열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두 사람은 이 상소가 오히려 송시열의 명을 재촉하는 화근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두 사람의 상소를 읽어본 숙종의 반응이다.
 
  “아! 송시열의 더할 수 없는 흉악함을 모두 다 언급할 수 없으나, 우선 그 가장 중대한 것에 대하여 말하자면, 효묘(孝廟·효종)를 폄하하고 낮춰 속임이 선조(先朝·현종)에 미쳤고, 국본(國本)을 동요시켰으니, 진실로 이는 역사에 죄를 짓는 큰 잘못이다. 이기주 등도 사람이니, 어찌 송시열의 죄가 쌓이고 악함이 차서 천토(天討)를 면하기가 어려움을 알지 못하리오? 그런데 이에 감히 국문(鞠問)하기를 명한 뒤에 잇따라 상소하여 지어낸 뜻이 교묘하고 참혹하며 그 말이 위험하니, 오늘날 국가에서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무엄(無嚴)할 수 있겠는가? 임금을 잊고 당(黨)을 위해 죽는 무리를 중한 율(律)로 다스려서 악함을 징계하는 법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소두(疏頭·상소의 주동자) 이기주와 이탁을 아울러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 보내라.”
 
 
  鞠問 없이 賜死
 
  4월 21일 인현왕후 민씨의 문제가 처음 거론되던 날 송시열에게는 한양으로 올라와 국문을 받으라는 명이 내려가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의 상소가 아니었어도 이미 83세의 송시열은 국문을 받는 도중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상소는 분명 숙종을 자극했다.
 
  6월 2일 대신과 비변사(備邊司) 관리들을 불러 국사를 논의하던 중 의금부 판사 민암은 엉뚱한 제안을 한다.
 
  “송시열의 지극히 흉하고 악함은 국문을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종(祖宗)께서 나라를 세움이 인후(仁厚)하여 일찍이 대신을 국문하지 아니하였으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남인의 모사꾼인 민암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굳이 국문을 하지 않고 죽여버리자는 뜻이었다. 이에 숙종이 권대운에게 묻자 권대운도 “성상께서 참작해서 처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한다. 숙종의 결정으로 국문 없이 사사(賜死)시키자는 말이었다. 사실 국문 과정에서 서인들이 동요하고 결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남인들은 당시 숙종의 마음이 서인에 대해 극단적으로 적대적임을 알고 이 점을 활용하려 했다. 이번에도 역시 숙종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의금부 도사가 내려가다가 만나는 그곳에서 사사(賜死)시키라.”
 
  이때 송시열은 제주의 바다를 건너 한양을 향해 붙잡혀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최후임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국문 통지를 받자마자 그것이 사형 통보임을 예감한 송시열은 유서(遺書)나 마찬가지인 상소를 썼다. 짧게나마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송시열은 6월 7일 전라도 정읍에 도착했다. 수많은 제자들이 함께하는 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의금부 도사 권처경이 사약(賜藥)을 들고 정읍을 찾았다.
 
 
  죽는 순간까지 ‘直’을 강조
 
  사약을 마시기 전 송시열은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위주로 할 것이며, 사업은 마땅히 효종이 하고자 했던 뜻을 위주로 해야 한다.”
 
  ‘효종이 하고자 했던 뜻’이란 명나라를 받들기 위한 북벌(北伐)대의였다. 숙종의 말처럼 자신은 효종을 속인 바 없다는 항변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관은 “덧붙인 판자[付板]”를 사용하라고 했다. 이는 효종 때 장례를 치르며 관의 크기를 잘못 예상해 관에 판자를 덧붙여야 했던 일을 상기시킨 것으로 효종에 대한 자신의 단심(丹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러고 송시열은 조용히 사약을 마셨다.
 
  그의 졸기(卒記)는 《숙종실록》 15년 6월 3일 자에 실려 있다. 여기에는 제자 권상하(權尙夏·1641~1721년)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나온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아주는 이치와 빼어난 이가 만물 만사에 응하는 이치는 곧음[直]뿐이다. 공자·맹자 이래로 서로 전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직(直)자뿐이다. 주자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한 것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말은 곧 자신은 성(誠)을 강조한 이이의 학통이 아니라 직(直)을 강조한 송익필의 학통을 이었다는 내밀한 선언이었다.
 
  송시열은 생전에 송준길의 권유를 받아들여 송익필 묘갈명(墓碣銘)을 지은 바 있었다. 이 또한 송익필 학통 계승에 대한 자부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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