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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음악

음악인이었던 정치가들 ② 콘돌리자 라이스와 비타우타스 란즈베르기스

글 : 정은주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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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돌리자 라이스, 능력의 한계 깨닫고 국제정치학으로 방향 전환했다가 실내악 협연자로 피아니스트 꿈 이뤄
⊙ 란즈베르기스,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심판하는 소련의 행태’에 거부감 느껴 리투아니아 독립 운동에 투신

정은주
서양 음악가들의 음악 외적 이야기를 발굴해 소개하는 음악칼럼니스트. 카카오페이지가 주최한 신인작가 프로젝트 ‘넥스트페이지’ 2기 지적 즐거움 부문 선정작가(2020)로, 네이버 및 각종 매체와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월간지 등에 칼럼을 기고 중이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클래식 잡학사전》 《발칙한 예술가들》(추명희·정은주 공저), 《나를 위한 예술가의 인생 수업》을 썼다. 온라인 클래스 플랫폼 ‘클래스101’에서 〈知테크도 재테크다〉를 발표했고, 부산MBC 〈안희성의 가정 음악실〉에 출연 중이다.
콘돌리자 라이스와 첼리스트 요요마가 지난 2002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브람스의 작품을 함께 연주한 후 청중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피아니스트의 꿈 다시 찾은 콘돌리자 라이스 前 美 국무장관
  -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이탈리아어(語)로 ‘달콤하게, 부드럽게 연주할 것’을 뜻하는 음악 용어 콘 돌체짜(Con dolcezza)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지은 이름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1954~). 그의 부모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는지, 또 그의 삶이 음악과 함께 성장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이름이다.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어 세계를 무대로 연주 여행을 다니는 꿈을 키웠던 그는 그 바람을 실제로 이뤘다. 정치가로 활동한 덕분에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설 기회가 더 많아진 경우다.
 
  음악을 전공하고 음악가로 활동하다가 정치에 입문한 정치가들의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그의 음악 활동이 공개적인 정치의 자리에서 발현되는 경우는 드물다. 미국을 대표하는 외교 사절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콘돌리자 라이스는 종종 피아노 앞에 앉는다. 몇 해 전 그는 영국 왕립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앞에서 브람스의 실내악 작품의 피아노를 맡아 연주했다. 이밖에도 그는 다양한 행사에서 실내악단의 피아니스트로 연주한다. 하지만 그는 연주비를 받지 않는다. 프로 연주자와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라 불리길 좋아한다.
 
  라이스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자 여성이어서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는 인종차별의 굴레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자신의 꿈을 펼치며 살아가는 여성 정치가이자 실내악과 피아노를 사랑하는 피아니스트로 살고 있다. 마치 이름의 달콤한 의미처럼 그의 정치와 음악 인생은 부드럽게 각자의 존재를 감싸 안은 채 순항 중이다.
 
 
  장난감 피아노에서 발현된 음악 재능
 
  라이스는 미국 남부의 앨라배마주(州) 버밍햄에서 목사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이 온 가족 중에서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방송에서 고백한 적이 있다. 그가 성장했던 시절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결코 쉬운 날들이 아니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해 박사 과정까지 공부할 수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많을 수 없었던 시절의 산증인이다. 인종차별이 특별히 심했던 미국 남부에서 자리 잡고 살던 그의 가족은 콜로라도주 덴버로 이주해 살았다.
 
  라이스는 바쁜 그의 부모를 대신해그의 외할머니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이때 그의 외할머니는 그의 음악적인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는 자신이 악보의 음표와 음악 기호들을 배운 적은 없지만 공백과 선이 전부인 악보가 어린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장난감 피아노를 가지고 놀면서 발견된 그의 음악적 재능은 그의 어머니가 선물해준 베르디의 ‘아이다’ 음반을 통해 구체적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이 음반 속 아리아를 들으면서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느꼈다.
 

  덴버로 이주한 이후 라이스는 더 열심히 피아노를 배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전문 피아니스트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실력은 15세 때 처음 인정받았다. 덴버 학생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그는 덴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D단조’를 협연(協演)했다.
 
  17세 때 라이스는 콜로라도 아스펜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자신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이 크지 않다고 느꼈다. 이전까지 음악 신동(神童)으로 칭찬받으며 성장했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무엇, 잡을 수 없는 하나의 탁월한 재능이 자신에게 없음을 인정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국제 관계를 배우는 학문을 공부하기로 방향을 바꿨다.
 
 
  실내악 협연자로 이룬 피아니스트의 꿈
 
  길고 가느다란 그의 손가락은 매우 날렵하다. 특히 연습할 시간이 많지 않은 피아니스트에게 이 점은 무척 특별한 장점이다. 그의 피아노 음색은 선명하고 맑다는 평을 듣는다. 지난 2003년 그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그의 부모가 피아니스트가 되길 꿈꾸던 10대의 그에게 선물해준 치커링사(社)의 그랜드피아노앞에 앉아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다. 그가 몸담고 있는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인사들도 그의 거실에 모였다.
 
  정치학을 공부하던 그는 덴버대학교,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1993년 스탠퍼드대 역사상 최연소(最年少) 총장이 되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감춰두었던 피아니스트의 삶을 꿈꿨다. 이런 마음은 같은 대학에서 근무하던 교수, 피아니스트 조지 바르트에게 정식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으며 점점 커졌다. 조지 바르트 교수는 라이스가 다시 피아노 연주를 시작할 수 있게 격려하고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10대에 꿈꾸던 콘서트 피아니스트, 솔리스트의 길이 아니라, 실내악단의 피아니스트로 다른 악기 연주자와 함께 연주하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후 라이스는 프로 음악가뿐만 아니라 자신처럼 음악가의 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아마추어 음악가들과 실내악을 시작했다. 공개적인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각자 시간에 맞춰서 연습하는 과정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연주하는 실내악 단원들도 이 과정에 큰 흥미를 느꼈다. ‘콘돌리자 라이스’라는 유명인과 함께 한 팀이 되어 연습하는 일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함께 만드는 음악을 통해 서로를 음악가로 받아들였다. 별다른 문제 없이 그들은 쇼스타코비치와 브람스,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실내악곡을 연습했다.
 
 
  요요마와 協演하기도
 
바이올리니스트 제니 베이커와 콘돌리자 라이스는 두 장의 음반을 함께 제작했다.
  이렇게 실내악단 연습을 통해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 앞에 앉아 누군가와 연주하는 일에 빠져버린 ‘콘디’는 현재 실내악에 대한 만족감이 무척 크다. 때문에 솔로 피아노 작품을 하고 싶은 마음이 거의 없는 상태이며, 죽기 전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배워보는 것이 목표다. 그는 이 작품을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또 바이올리니스트 제니 베이커의 제안으로 그는 두 장의 음반을 발매했다. 이 두 장의 음반은 그가 실내악 피아니스트로서 가진 역량을 마음껏 발휘한 작품이다.
 
  라이스는 지난 2002년 첼리스트 요요마와 함께 미국의 한 문화포럼에서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D단조’를 연주했다. 바이올린 곡을 첼로 곡으로 편곡한 버전이다. 이날 요요마와의 공개 연주를 통해 그는 본격적으로 피아노도 잘 치는 ‘콘디’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가 초청받는 강연이나 정치 행사를 포함한 여러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는 실내악단의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스스로 피아노에 재능이 없다 여겨 포기했던 피아니스트의 꿈을 인생 후반부에서 적절하게 다시 이루어낸 것이다.
 
 
 
리투아니아 初代 의회 의장 비타우타스 란즈베르기스
  - 소련에 맞서 승리한 독립투사

 
리투아니아 대통령 선거 결과를 기다리면서 란즈베르기스가 자신의 집무실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사진=리투아니아 국가중앙기록원
  1991년 봄, 리투아니아는 소련에 강탈당했던 주권과 자유를 50여 년 만에 되찾았다. 수많은 리투아니아 사람의 눈물과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특히 리투아니아의 독립에 인생을 걸었던 한 남자, 비타우타스 란즈베르기스(Vytautas Landsbergis·1932~)가 없었다면 당시 리투아니아의 독립은 조금 더 미뤄졌을지도 모르겠다. 콘서트 피아니스트이자 음대 교수였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했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제2도시 카우나스에서 건축가인 아버지, 안과 의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며 어린 시절 일찍이 음악적 재능을 발견했다. 이후 리투아니아 음악원에 진학해 박사 과정까지 마쳤고, 1978년 모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후 콘서트 피아니스트, 교수, 다양한 분야를 다루며 20여 권의 책을 쓴 작가로 활동했다.
 
  란즈베르기스의 가족은 예술적·정치적 DNA가 풍부한 편이다. 그의 아내는 명(名)피아니스트이자 리투아니아 음악원 부교수였다. 그들의 딸과 아들도 음악가로 활동 중이다. 또 그와 이름이 같은 아들 비타우타스는 작가 겸 영화감독으로 유명하다. 손자 중 한 명은 리투아니아 보수당 의원, 외무장관으로 활동 중이다. 평생 음악을 사랑했던 그가 인생 후반부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살았으니, 자연스레 그의 가족들에게도 이런 영향이 전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음악가였던 그는 1988년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열망하는 정치모임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후일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심판하는 소련의 행태에 큰 거부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조국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많은 일을 시작했다. 성공한 음악가로 쌓아온 그의 명성이 초보 정치가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지만 그는 피아노 연주도 계속 이어갔다.
 
 
  “자유는 매일 생각해야 한다”
 
1989년 리투아니아의 주권 독립을 위한 연설 중인 란즈베르기스. 사진=리투아니아 국가중앙기록원
  란즈베르기스는 1989년 소비에트연방 인민대표대회(국회) 선거에서 리투아니아 인민대표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그는 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이 되었다.
 
  그를 기록한 사진 중에 최고회의 의장 출마 연설을 마친 후 결과를 기다리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이 있다. 사무실에 작은 피아노를 가져다 둔 것을 보면, 틈이 날 때마다 피아노 연주를 했던 모양이다. 또 그는 1990년 3월부터 리투아니아의 의회 초대(初代) 의장을 맡아 약 2년간 일했다. 이 기간은 리투아니아 독립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기간이었는데, 그는 이 험난했던 시기를 주도적으로 맡아 이끌었다.
 
  란즈베르기스는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리투아니아의 주권과 자유를 요구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리투아니아는 발트 3국 중 최초로 소련으로부터 독립했다. 세계 각국 중에서 아이슬란드가 최초로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승인해주었다.
 

  란즈베르기스는 독립 후 초대 대통령 직에 도전했지만 고배(苦杯)를 마셨다. 하지만 이후에도 백의종군의 자세로 계속해서 정치가로 국가를 위해 일하는 한편 유럽 의회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란즈베르기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유는 공휴일뿐만 아니라 매일 생각해야 한다. 휴일에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이기고, 죽었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폭력과 침략으로부터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
 
  그는 89세의 나이에도 국민들에게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음악가에서 정치가로 인생 항로를 변경하면서까지 그가 진심으로 지키고 싶어 했던 것, 지금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정치와 음악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란즈베르기스는 리투아니아의 초대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사진=리투아니아 국가중앙기록원
  ‘가장 완벽한 전설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야사 하이페츠(Jascha Heifetz·1901~1987년)도 리투아니아 출신의 천재 음악가다. 그는 수도 빌뉴스에서 태어났고, 란즈베르기스처럼 조국의 어려운 시기를 살아냈다. 하지만 하이페츠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정치적인 행동을 따로 하지는 않았다. 대신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다.
 
  란즈베르기스의 삶은 마치 한 편의 영화 같다. 실제로 그의 정치 인생을 그린 세르히 조즈니차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터 란즈베르기스〉가 지난 4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란즈베르기스는 음악적 능력에 대해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술적인 영역과 그 이상의 영역을 염두에 둔다. 하지만 머릿속의 음표들은 매 순간 손끝에서 시작되는 음악을 따라간다. 부지런히 매일 연습하지 않고도 연주회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은 머릿속의 예술적 흐름 덕분이다. 연주는 기계적인 반복 연습으로 채운 공간이 아닌, 그 이상의 자리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가들이 창조와 표현의 조건에 대한 후원을 요청하는 것을 간섭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면서 “소련의 지배를 받는 동안 예술성에 대해 당의 결정을 통보받곤 했는데, 모든 것은 시간 낭비였다. 정치가들이 예술에 이런저런 잔소리와 규제를 늘어놓는 순간 그 예술은 길을 잃을 수 있다”고 밝혔다.
 
  1989년 8월 23일은 발트 3국에서 ‘자유의 사슬’로 불리는 날이다.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던 발트 3국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이 참석했던 평화 시위가 열린 날이기 때문이다. 이 시위 때에 600km에 달하는 역사상 가장 긴 인간사슬이 만들어졌다. 지금도 발트 3국에서는 매년 당시를 기억한다.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 중 평화와 자유는 어떤 것보다 더 강력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가를 꿈꾸다 실제로 그 꿈을 이루었으면서도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어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란즈베르기스의 이야기는 예술과 사람, 그리고 자유와 평화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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