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17〉

효종 때 본격 산림 정치 시대가 열리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인조 말 西人이 原黨(원두표), 洛黨(김자점), 山黨(김집), 漢黨(김육)으로 나뉘어
⊙ 漢黨의 김육, 大同法 도입 앞장서
⊙ 송시열·송준길 등 山林, 인조가 정통성 회복 위해 出仕 요청해도 거절하면서 벼슬과 명성 높아져
⊙ 南人의 이념가 윤선도, 王權 강화 주장하면서 西人과 충돌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김육
  이건창은 《당의통략》에서 인조 말기 당쟁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인조 말년에 이르러 또 원당(原黨), 낙당(洛黨), 산당(山黨), 한당(漢黨)으로 나누어졌다. 원당 영수는 원평부원군 원두표(元斗杓·1593~1664년)였고 낙당은 상락부원군 김자점(金自點·1588~1651년)이었는데 다 공신이었다. 산당은 김집(金集·1574~1656년)이 영수였는데 송준길(宋浚吉· 1606~1672년)과 송시열(宋時烈·1607~1689년)이 보좌했으며 다 충청도 연산(連山) 회덕(懷德)의 산림(山林) 속 사람이어서 산당이라고 불렸다. 한당은 김육(金堉·1580~1658년)과 신면(申冕·1607~1652년)이 영수였는데 한강 변에 살고 있어 한당이라고 이름하였다.”
 
  원두표는 인조반정 2등 공신으로 공서(功西)에 속해 김상헌이 이끄는 청서(淸西)를 탄압했고 그 후에 공서가 정권을 장악하자 같은 공서의 김자점과 권력을 다퉈 원당과 낙당이 분립하게 되었다.
 
  김자점은 인조반정에 참여 후 정치적 부침(浮沈)을 겪기는 했지만 인조 말 좌의정에 올랐다. 인조를 부추겨 소현세자를 죽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세자빈 강씨를 죽이는 데도 일조했다. 하지만 후원자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홍천으로 유배됐고 이에 청나라를 끌어들여 역모를 꾸미다가 아들 김익과 함께 복주(伏誅)당했다. 전형적인 권간(權奸)이었다.
 

  김집은 서인의 대부 김장생(金長生)의 아들로 인조 때에는 관직 임명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나아가지 않았고 효종이 즉위하자 김상헌의 특청에 따라 이조판서에 임명됐다. 문과를 거치지 않은 산림이 조정에 중용되기 시작한 시발점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앙정치에서는 얼마 머물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서인의 핵심으로서 송익필-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송시열에 잇는 역할을 했다.
 
  김육은 서인이면서도 학자형보다는 관료형이었고 이념형보다는 실무형이었다. 그는 화폐 유통, 수레 보급 및 시헌력(時憲曆) 제정 등에 관심을 쏟았다. 효종 때 우의정에 올라 대동법 확장 시행 등에 적극 노력했다. 이로 인해 대동법에 반대하는 김집과 충돌했다. 이는 산당과 한당의 오랜 대립으로 이어져 이 갈등은 현종을 거쳐 숙종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효종 즉위
 
  효종(孝宗·1619~1659년)은 인조와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 사이 소현세자에 이어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당초 왕위에 오를 수 없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듬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 동안 머물렀다. 이로 인해 청나라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1645년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임을 당하자 세자로 책봉됐고 1649년 인조가 죽자 왕위를 뒤이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낙당 김자점 세력을 제거하고 청서파를 중용했으며 신하들과 함께 비밀리에 북벌(北伐)계획을 추구했다. 실제로 그는 북벌을 지지하는 원두표를 병조판서에 임명하고 이완(李浣)을 훈련대장으로 임명해 군사력 증강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때는 청나라가 국위를 떨치던 때라 북벌은 엄두도 못 냈다. 오히려 1654년 청나라가 러시아와 충돌하자 청나라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른바 나선정벌(羅禪征伐)이다. 두 차례 정벌에 조선군은 각각 150명, 260명이 참전했다.
 
 
  김육의 大同法 건의
 
  대동법이란 한마디로 화폐제도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결과였다. 조선은 나라 재용(財用)의 기반을 전세(田稅) 이외에 공물(貢物)과 진상(進上) 그리고 잡역(雜役)에 두고 있었다. 문제는 공물과 진상이었는데 이를 곡물로 대신하자는 것이 대동법의 골자다.
 
  선조 때 일시적으로나마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 실시되어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남인 이원익(李元翼)의 주장으로 광해군 초에 선혜(宣惠)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기도 했으며, 그 후 강원도에서도 시행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효종이 즉위하고 김육을 우의정에 기용하자 김집을 비롯한 산당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효종이 집권 초 산당보다 한당을 가까이한 이유는 바로 소현세자의 죽음 때문이었다. 이들은 특히 세자빈 강씨의 죽음에 대해 원한을 갖고 있었고 나아가 강빈 신원(伸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니 효종으로서는 김집이 이끄는 산당에 대해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김육을 우의정에 임명했다. 즉위년(1649년) 11월 5일 김육은 호서와 호남 지방으로까지 대동법을 확대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당시 김육이 올린 소(疏)의 일부다.
 
  〈대동법(大同法)은 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비록 여러 도(道)에 두루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기전(畿甸)과 관동(關東)에서 이미 시행하여 힘을 얻었으니 만약 또 양호(兩湖) 지방에서 시행하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도로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졸곡(卒哭) 후에 바로 의논했어야 했는데 객사(客使)가 마침 이르러 와서 아직까지 미루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객사가 이미 갔는데도 묘당(廟堂)의 논의가 조용해 들리지 않으니, 신은 못내 괴이하게 여깁니다. 만약 신이 나오기를 기다려 회의하려고 했다면 신은 불행하게도 병으로 누워 있으니 역시 일을 그르친 죽을죄입니다. 신이 이 일에 급급한 것은 이 일은 즉위하신 초기에 시행하여야지 흉년이 들면 또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세운(歲運)이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이는 하늘이 편리함을 빌려준 것입니다. 명년의 역사를 겨울 전에 의논해 정하여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신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신으로 하여금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에 불과하니, 말이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 만일 채택할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 그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大戶와 小民
 
  김육은 직을 걸고 대동법을 건의하고 있다. 효종도 이 사안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여러 신하를 불러 의견을 물어보니 편리와 불편으로 의견이 갈렸다. 이에 효종이 말했다.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가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이 원망한다고 하는데, 원망하는 대소가 어떠한가?”
 
  이에 모두 “소민의 원망이 큽니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대동법은 바로 시행되지 않았다. 김육은 대동법을 실시하지 않으려면 자신을 파직하라고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나 효종은 김육을 파직하지 않으면서 대동법 시행의 결단을 미뤘다. 이유는 김집·송준길·송시열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효종실록》 1년(1650년) 1월 13일 기록이다. 여기서 김육은 유명한 ‘삼불가퇴론(三不可退論)’과 ‘삼불가불퇴론(三不可不退論)’을 제시한다.
 
 
 
물러날 때와 나아갈 때

 
  〈우의정 김육이 조상들의 묘를 성묘하기 위하여 양주(楊州)로 물러갔다. 이보다 앞서 김육이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조판서 김집에게 물으니, 김집은 시행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고, 또 건의하여 원로 대신에게 인재를 물어 차례에 구애받지 말고 등용하기를 청하였는데 이에 김육이 소를 올렸다.
 
  “인재를 등용하는 권한은 인주(人主·임금)의 대병(大柄)이므로 아래에서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이로 인해서 두 사람이 화합하지 못했는데, 그 뒤로 김육은 여러 번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면서 아뢰어 말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진퇴가 분명하고 그 마음에 변함이 없어야 할 뿐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에 물러나는 것은 잘못이며, 물러가야 할 때 나아가는 것도 잘못입니다. 미관말직에 있는 자도 오히려 그러해야 하는데, 더구나 대신의 반열에 있는 자야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대체로 물러가서는 안 되는 경우가 셋이며, 물러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셋입니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국가의 안위가 걸려 있어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 자가 첫째요, 산림(山林)에서 와서 덕망이 세상을 덮는 자가 둘째요, 나이가 젊고 근력이 있어 국사를 담당할 만한 자가 셋째이니 이상은 물러가서는 안 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분명히 알 만큼 재덕(才德)이 부족한 경우가 첫째요, 나이가 이미 많고 노쇠하여 치료하기 어려운 병을 지닌 자가 둘째며, 남의 비웃음이나 당하며 쓰이기에는 부적합한 말을 하는 자가 셋째이니, 이는 물러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입니다.
 
  이제 신은 분에 넘치는 은총으로 치사(致仕)할 나이가 넘었으니 물러가야 하겠습니까, 물러가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옛사람을 들어 말하건대 자신에게 국가의 존망이 걸린 한(漢)의 제갈량(諸葛亮)이나 백성들의 인망이 간절했던 진(晋)의 사안석(謝安石)이나 나이가 노쇠하지 않았던 송(宋)의 문천상(文天祥)의 경우와, 참람되지만 비교해 본다면, 하늘을 나는 붕새와 땅속 벌레의 차이 정도일 뿐만이 아니며, 시세의 어려움도 한(漢)이나 진(晋)·송(宋)의 경우와도 다릅니다. 조금이라도 그대로 나아가야 할 도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치사를 허락하여 주소서.”〉
 
 
  김육과 원두표
 
  사실상 김집과 자기 중에서 한 사람을 고르라는 압박이었다. 결국 1월 21일 김집은 김육과의 마찰로 인해 판서직을 버리고 고향 연산으로 돌아갔다. 이에 김장생의 문인 영의정 이경석(李景奭·1595~1671년)이 나섰다. 병자호란 직후 삼전도 비문을 지은 그 이경석이다. 28일에 올린 그의 소 일부다.
 
  〈대동법은 본래 백성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널리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하는 것은 상세하고 신중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당초 고의로 모나게 반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이 돌고 도는 과정에서 동료 재상이 인피(引避)하는 말이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결국 이조판서가 낭패스러워 돌아가기에 이르렀는데, 신도 동료 재상(김육)에게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압니다만, 이조판서로서야 어찌 떠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대동법에 대해서는 원두표도 반대했다. 효종 2년(1651년) 8월 3일 영의정에 오른 김육이 원두표를 겨냥해 효종 앞에서 직격했다.
 
  “호조판서 원두표는 본래 남을 이기기 좋아하는 병통이 있어 자기 마음에 싫은 것은 반드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찌 다른 사람이 없기에 이 사람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재리(財利)의 권한을 전담하게 하십니까? 대동법에 대한 의논이 있으면서부터 한 번도 신을 직접 찾아와 의논한 적이 없었습니다. 체통이 이처럼 무너지고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3년 후인 1654년 김육·조익(趙翼) 등 대동법 실시론자들이 승리를 거둬 충청도에서도 대동법이 실시되었고 각 도로 점차 확대되어나갔다. 효종 9년(1658년) 9월 5일 그가 세상을 떠나자 실록은 이런 졸기(卒記)를 남겼다.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품행이 단정 정확하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일을 당하면 할 말을 다하여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았다. 병자년에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우리나라가 외국 군사의 침입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니 중국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평소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 양호(兩湖)의 대동법은 그가 건의한 것이다. 다만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 대동법을 의논할 때 김집과 의견이 맞지 않자 김육이 불평을 품고 여러 번 상소하여 김집을 공격하니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
 
  그가 죽자 상이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이는 79세였다. 그의 차자 김우명(金佑明)이 세자(훗날의 현종)의 국구(國舅)로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졌다.〉
 
 
  ‘山林’ 송시열의 등장
 
송시열
  인조·효종 때 서인과 남인에서는 각기 당론을 주도할 큰 인물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서인에서는 송시열이, 남인에서는 윤선도(尹善道·1587~1671년)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송시열은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 《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김장생 문하에서 학문 연마에 몰두하던 송시열은 1631년(인조 9년) 스승 김장생이 세상을 떠나자 김집에게서 계속 성리학과 예학의 세계관을 갈고닦았다. 그러고 스물일곱 살 되던 인조 11년(1633년) 송시열은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그해 10월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훗날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의 능인 경릉(敬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했다. 이미 조정에서는 송시열의 학문적 깊이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2년 후인 1635년 송시열은 대군(大君)사부로 임명되어 봉림대군의 학문 연마를 책임지게 된다. 물론 세자의 사부가 정1품, 세손의 사부가 종1품인 것과 비교해 그의 관직은 종9품이었으니 여전히 참봉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일국의 대군을 가르친다는 것은 여간 명예가 아니었다. 송시열을 대군 사부로 추천한 인물은 다름 아닌 김장생의 제자이자, 그런 점에서 송시열의 선배이기도 했던 최명길이었다.
 
  당시 송시열은 스물아홉, 봉림대군은 열일곱이었다. 봉림대군은 훗날 효종으로 숙종의 할아버지다. 사실 그때만 해도 소현세자가 건재할 때이므로 누구도 봉림대군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때였다. 6개월 정도밖에 안 되지만 송시열이 대군사부를 맡았던 일은 그가 봉림대군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 이외에도 그 관직으로 인해 송시열이 인조의 삼전도 굴욕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가 있었다. 게다가 훗날 소현세자가 아닌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6개월 ‘대군사부’의 파장은 끝 모르게 확장된다.
 
 
  남한산성의 송시열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송시열은 봉림대군의 사부였다. 당시 봉림대군은 인조의 비빈(妃嬪)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을 하지만 송시열은 인조의 파천(播遷) 행렬을 따라 남한산성에 함께 들어갔다. 그리하여 45일 동안 남한산성에 머물면서 청년 송시열은 인조의 모든 것을 가까이에서 살필 수 있었다. 산성으로 피해 들어간 지 열흘째 되던 12월 24일 겨울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가운데 인조는 세자와 함께 너른 마당 한가운데에 섰다. 하늘에 죄를 빌기 위함이었다.
 
  “오늘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저희 부자가 죄를 지은 때문입니다. 성안의 군사나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늘이 재앙을 내리시려거든 저희 부자에게 내리시고, 모든 백성을 살려주시옵소서!”
 
  이 광경을 송시열은 어떤 마음으로 지켜보았을까?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인조가 청나라 태종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의 예(禮)를 올리는 것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해야 했다. 송시열의 남한산성 및 삼전도 체험은 인조에 대한 측은과 충성보다는 국가적 치욕에 따른 분노를 자아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송시열의 솔직한 심정은 병자호란 직후 속리산 복천사에서 윤휴를 만나 통곡을 하면서 나눈 대화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훗날 자신과 최고의 정적(政敵)이 되는 바로 그 윤휴다.
 
  “혹시 우리가 정치를 하게 될 경우 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
 
  청년 송시열에게 조선의 패배와 인조의 굴욕이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송시열은 정신적으로는 망명(亡命)을 해버렸는지 모른다.
 
 
  山林, 현실정치와 절연하지 않아
 
윤선도
  병자호란이 끝난 후 인조는 허물어진 체통, 즉 정당성 확보를 위해 송시열이나 송준길과 같은 산림의 인사들을 조정에 끌어들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송시열의 경우에도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여 조정에 출사(出仕)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인조 22년과 23년에는 인조가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정5품직인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며 조정 참여를 권했으나 두 사람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 점에서 ‘양송’은 스승 김장생과 비슷한 경로를 걷는다. 조정의 관직 권유와 단호한 거부가 반복되면서 두 사람의 관직은 계속 높아만 갔고 더불어 산림에서의 명성 또한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는 송시열·송준길과 같은 인물을 끌어안기에는 구조적으로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양송은 정치와 ‘절연(絶緣)’하는 입장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뜻은 오로지 현실정치를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는 관점을 한순간도 버리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송시열은 이황과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우리에게는 전라도 해남 보길도를 배경으로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유명한 윤선도는 그 흔한 졸기(卒記) 하나 없다.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에 “윤선도가 죽었다[尹善道死]”가 전부다.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자 판교(判校) 정감(鄭勘)의 건의로 실록개수청(實錄改修廳)을 설치하고 개수에 착수하였다. 즉 3년 전에 편찬된 《현종실록》이 숙종의 독촉으로 불과 서너 달 만에 급급히 편찬되어 기사에 착란(錯亂)·소략(疎略)한 부분이 많고, 또 남인 주도로 편찬했기 때문에 서인에 대해 편파적으로 기술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인이 편찬했다는 《현종실록》에도 그의 졸기는 없다. 아마도 관직에 있어 판서에 오르지 못해서였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현종개수실록》에 “윤선도가 죽었다”라고 기록한 것은 훗날 윤선도가 제시한 예론(禮論)이 서인으로서는 너무 아팠기 때문인지 모른다.
 
  윤선도는 성균관 유생이던 광해군 8년(1616년) 당시 권력자인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을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 이로 인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됐다.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등이 처형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석 달 만에 사직하고 고향 해남으로 내려갔다.
 
  윤선도는 1628년(인조 6년)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인평대군(麟坪大君)의 스승이 됐다. 그 당시 법률로 대군의 사부(師傅)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工曹佐郞)·형조정랑(刑曹正郞)·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등을 5년간 역임했다. 1633년(인조 1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정랑(禮曹正郞)·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지냈다. 그러나 이듬해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경상도 성산(星山) 현감(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됐다. 그 뒤 해남에서 병자호란으로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보길도(甫吉島)로 가 은거했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한가로운 은거 생활을 했다. ‘어부사시사’를 지은 것도 이때였다.
 
 
  윤선도, 왕권 강화 주장
 
  윤선도는 1657년(효종 8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송시열과 맞서다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禮論問題)로 서인과 맞서다가 삼수에 유배됐다. 1667년(현종 8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윤선도는 성품이 직선적이고 과격했지만, 재주가 많고 특히 예학과 풍수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다. 또한 남인으로서 당성도 강해 정면으로 왕권 강화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서인으로서는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효종 9년(1658년) 7월 25일 도승지 김좌명(金佐明·1616~1671년)이 효종에게 아뢰었다. 김좌명은 김육의 아들로 앞서 언급한 김우명의 형이다. 훗날 숙종의 정치적 대부 역할을 하는 김석주(金錫胄)가 바로 김좌명의 아들이다.
 
  “엊그제 윤선도가 소를 올리려고 정원에 왔었는데 말이 매우 많았습니다. 대체로 정개청(鄭介淸)을 신원하려는 것으로서 정철(鄭澈)·김장생·박순(朴淳)의 이름을 두루 들추어내고 또 정개청이 지은 〈배절의론(排節義論)〉과 국청에서 공초한 말을 베껴 넣고 또 송준길·이단상(李端相)의 일을 거론하면서 이단상의 아버지까지 욕하였습니다. 이같이 괴상하고 망령된 소는 평시라 하더라도 입계(入啓)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전하께서 편찮으시기 때문에 누차 물리쳤습니다.”
 
 
 
정개청

 
  정개청(1529~1590년)은 동인 계통의 인물로 예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호남 지방을 대표하는 명유(名儒)로 알려져 있었다. 벼슬은 곡성현감을 지내는 데 그쳤다.
 
  그는 1589년 정여립의 난 때 연루자 색출이 지방 선비들까지 확대되는 와중에 1590년 5월 정여립과 동모(同謀)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같은 해 6월 함경도 경원 아산보(阿山堡)로 이배되고, 7월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기축옥사 피화(被禍) 뒤 400여 명에 이르는 그의 제자들이 신원운동을 치열히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1616년(광해군 8년) 그를 봉사(奉祀)하는 자산서원(紫山書院)이 전라도 무안 엄담에 건립된 뒤 1694년(숙종 20년)까지 집권 세력의 당색(黨色)에 따라 몇 차례 치폐(置廢)를 반복해 서원과 당쟁의 연계라는 드문 예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산서원은 남인 집권 시에는 건립, 복설되고, 서인 집권 시에는 훼철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윤선도가 소를 올리려 했던 이유도 이런 맥락 속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종 시대에 들어 윤선도는 예학, 그중에서도 복제(服制)에 관한 탁견으로 왕실을 옹호하며 송시열이 이끄는 서인에 맞서는 탁월한 이론가로 우뚝 서게 된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