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바람과 놀게 해 다오(황동규)
⊙ 서울의 거리엔 여우가 산다. 눈이 빨간 여우가 산다(김남권)
⊙ 서울의 거리엔 여우가 산다. 눈이 빨간 여우가 산다(김남권)
- “사느냐 죽느냐…”로 기억되는 연극 〈햄릿〉의 한 장면.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뒤로 햄릿 아버지인 선왕의 초상화가 보인다.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년)은 말한다.
“우리[인간 사회]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온통 불확실성뿐”이라고.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 인간이 결국 맞게 되는 현실은 죽음”이라고 단언한다. 신(神)이 아닌 이상 누구도 이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년)의 《햄릿》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죽는다는 것, 잠든다는 것, 그뿐이다. 누가 알겠는가.”
다만 죽음 뒤에 다가올 그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 의식을 옥죈다. 나그네 길 같은 삶, 돌아올 수 없었던 ‘미지의 땅’으로 도망치느니 차라리 지금 겪고 있는 불행을 감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죽기 살기로 싸우는 편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 톨스토이(Leo Tolstoy·1828~1910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타오르는 촛불이 초를 녹이듯 우리 영혼의 삶은 육체를 쓰러지게 한다.
육체가 영혼의 불꽃에 완전히 타버리면 죽음이 찾아온다.
(…)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살면서 죽음을 기억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삶은 진지하고 즐거우리라.
-톨스토이의 ‘살면서 죽음을 기억하라’ 중 일부
어디서나 악(惡)이 들끓는다. 악은 용이하고 게다가 무수히 많다. 어떤 종류의 악은 선(善)과 식별하기 어렵다. 곧잘 선을 가장한다. 인간의 분별력이란 그저 등잔 앞의 바람과 같다. 이어령(李御寧·1933~2022년)은 그의 첫 시집 《무신론자의 기도》(2008)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사람들은 지금 시를 쓰기 위해서
발톱처럼 무딘 가슴을 찢고
코피처럼 진한 눈물을 흘리고 있나이다
모래알만 한 별이라도 좋으니
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아닙니다. 하늘의 별이 아니라
깜깜한 가슴속 밤하늘에 떠다닐
반딧불만한 한 빛 한 점이면 족합니다.
좀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것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이어령의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1’ 중에서 일부
백과전서적 지식과 화려한 수사학의 천재성을 자랑했던 이어령도 신(神) 앞에 고백한다. 생(生)의 한순간을 포착해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오직 신만이 그런 분별력과 시혼(詩魂)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이어령의 바람은 너무나 소박했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단 한 줄의 시(詩)였다.
박상륭의 죽음과 릴케의 죽음
박상륭(朴常隆·1940~2017년)의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에 한 사내가 등장한다. 그는 해골을 들고 걸사(乞士)를 자처하며 살인을 포함한 막무가내의 구도 수행을 한다. 중국의 선승인 혜능, 불모의 광야에서 40일을 견뎌낸 예수를 형상화한 인물일지 모른다.
소설 속 사내는 이렇게 절규한다. “나는 어찌하여, 햇볕만 먹고도 토실거리는 과육이 못 되고, 이슬만 먹고도 노래만 잘 뽑는 귀뚜라미는 못 되고, 풀잎만 먹고도 근력만 좋은 당나귀는 못 되느냐”고. 울부짖음은 계속된다.
〈…(나는 어찌하여) 바람만 쐬이고도 혈색이 좋은 꽃송이는 못 되고, 거품만 먹고도 굳어만지는 진주는 못 되고, 조락(凋落)만 먹고도 생성의 젖이 되는 겨울은 못 되고, 눈물만 먹고도 살이 찌는 눈 밑 사마귀는 못 되고, 수풀 그늘만 먹고도 밝기만 밝은 달은 못 되고, 비계 없는 신앙만 먹고도 만년 비대해져 가는 신(神)은 못 되고, 똥만 먹고도 피둥대는 구더기는 못 되고, 세월만 먹고도 성성이는 백송은 못 되고, 각혈만 받아서도 곱기만 한 진달래는 못 되고, 쇠를 먹고도 이만 성한 녹은 못 되고, 가시만 덮고도 후끈해하는 장미꽃은 못 되고, 때에 덮여서야 맑아지는 골동품은 못 되고, 나는 어찌하여 그렇게는 못 되고,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유정 중에서 영장이라고 내 자부했던 사람, 허나 어찌하여 나는 흙 속의 습기 속으로만 파고드는 지렁이도 흘리지 않는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중에서)
1세대 독문학자인 이창복(李昌馥)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쓴 《삶을 위한 죽음의 미학》(2019)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죽음을 지닌다. 현 존재에서 이루어지는 성숙된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 최고의 목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 죽음은 곧 인간이 바라는 ‘친숙한 죽음’이며, 이 죽음은 현 존재의 근원이 되는데 그 이유는 ‘자연’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생성과 회귀를 반복하는 자연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거나 둘을 함께 품고 있다.
릴케(Rainer Maria Rilke·1875~1926년)의 작품들은 ‘친숙한 죽음’에 대한 자연의 ‘신성한 착상’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두이노의 비가》(1922)의 ‘제9비가’에서 릴케는 이렇게 노래한다.
친숙한 죽음이야말로
너의 신성한 착상이다.
보라, 나는 살아 있다. 무엇으로? 나의 어린 시절도 미래도
줄어들지 않는다. (…) 넘치는 지금의 존재가
나의 마음속에서 용솟음친다
-릴케의 ‘제9비가’ 중 일부
‘제9비가’에 나오는 ‘너’는 바로 대지, 즉 자연을 의미한다.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회귀다. 그러나 대도시 이웃을 잃어버린 적막한 삶에서 자연을 찾기는 어렵다. 릴케의 《기도시집》(1903) 제3부 ‘가난과 죽음의 서(書)’에는 릴케가 파리에서 경험한 죽음이 그려져 있다. 릴케는 도시인들의 소외된 죽음을 ‘작은 죽음’ ‘익지 않은 열매’로 묘사한다.
그곳에는 하얀 꽃처럼 창백한 사람들이 살다가
힘겨운 세상에 놀라며 죽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입 벌려 찡그린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들의 부드러운 미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밤에
그 모습으로 일그러집니다.(…)
그들은 괴롭히는 수많은 사람들 손에 넘겨져
시간마다 울리는 종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쓸쓸히 양로원의 주변을 서성이며
입원할 날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 시절에 신비로운 인사를 던지고 간 그 죽음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것은 작은 죽음,
그들 자신의 죽음은 익지 않은 열매처럼
그들의 가슴속에
퍼렇게 단맛도 없이 매달려 있습니다.
-릴케의 ‘가난과 죽음의 서’ 일부
그곳, 즉 삭막한 도시에서 만나는 ‘작은 죽음’은 아무런 맛도 없고 아무렇게나 잘린 배추 밑동처럼 무익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 가치 없는 죽음처럼 비극적인 운명도 없다.
쳇바퀴 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하얀 꽃처럼 창백한’ ‘퍼렇게 단맛도 없는’ 도시의 얼굴은 우리의 초상(肖像)일지 모른다. 낮에는 마지못해 웃을지 몰라도 밤이면 실존적 공허와 불안에 휩싸인다.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어도 반겨주는 곳이 없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간다. 죽음이 성난 얼굴로 돌아보고 있다.
이 교수는 “릴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였다. 삶의 질은 죽음의 질을 결정한다고 보았다”고 했다.
황동규의 죽음, 김동환의 봄, 홍난파의 봄처녀
시인 황동규(黃東奎·1938~)는 ‘풍장(風葬)1’을 통해 죽음이라는 존재의 소멸로 자연과의 일치를 노래했다. 릴케가 말하는 ‘친숙한 죽음’에 가깝다.
풍장은 주검을 매장하지 않고 옷을 입히거나 관에 넣어 공기 중에 놓아두는 장례법을 말한다. 글자 그대로 바람의 장례다. 주검을 나뭇가지나 풀로 살짝 가리는 정도로 숲에 방치하거나 장집[葬屋]을 만들어 덮어 두는 방식이다. 이런 장례는 진도, 완도, 신안 등 서남해안에서 행해지는 장례 풍습이라고 한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퉁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서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황동규의 ‘풍장1’ 전문
이 시의 1연엔 풍장의 준비, 2연엔 풍장의 과정, 3연엔 풍장을 바라는 이유가 그려져 있다. 화자(話者)는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당부한다. 마지막 행 ‘바람과 놀게 해 다오’는 자유로운 저승의 삶을 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찾을 수 없다.
죽음을 종종 가을과 겨울로 묘사하지만 필연적으로 대지는 봄을 맞이하고야 만다. 생명의 탄생은 죽음의 부산물일지 모른다. 4월, 완연한 봄이다. 빈들에 어느덧 새싹이 트고 호랑나비 떼, 종달새의 노래가 들리기 시작한다. 시인 김동환(金東煥·1901~?)의 ‘산 너머 남촌에는’만 한 봄노래가 또 있을까.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南風) 불 제 나는 좋데나.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산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를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 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김동환의 ‘산 너머 남촌에는’ 전문
김동환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인 ‘국경의 밤’을 통해 북방의 춥고 고달픈 겨울을 배경으로 절망적이고 암울한 사회 현실을 노래한 시인이다. ‘산 너머 남촌에는’은 ‘국경의 밤’과는 대조적으로 섬세하고 정겨운 언어 구사와 부드럽고 친근한 어조가 느껴진다. 봄의 생명이 소중하고 아름답게 다가오는 시다. 시를 고친 가사에 김동현이 곡을 붙이고 박재란이 노래해 1965년 무렵 ‘국민 봄노래’가 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가요 ‘산 너머 남촌에는’과 쌍벽을 이루는 가곡 ‘봄처녀’는 이은상(李殷相·1903~1982년)의 시조를 가사로 홍난파(洪蘭坡·1897~1941년)가 작곡한 가곡이다. 홍난파의 가곡 작품집인 《조선가요작곡집》(1933)에 실렸다. 새봄을 처녀에 비유하는 이 노래는 왈츠풍의 빠르기로 4분의 3박자의 아름다운 여운을 주는 곡이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님 찾아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뉘게 물어볼까나
-이은상의 ‘봄처녀’ 전문
화자는 봄이 나에게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오는데, ‘님 찾아가는 길’이라지만 행여 나를 찾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이상한’ 설렘을 느낀다. 정말 ‘내게 오심인지’ 누구에게 묻고 싶지만 행여 물었다가 면박을 당할까 봐 미안하고 어리석은 듯, 혹은 수줍은 듯 묻고 싶다는 속마음을 고백하는 노랫말이다.
김남권의 달노래 ‘달랑달랑, 깡충깡충’
봄이다. 봄에 일부러 동시집을 손에 들어 본다. 봄 같은 아이들의 시선으로 쓴 시를 읽으면 마음이 봄처럼 화사해진다. 김남권 시인은 “봄에 피어나는 제비꽃, 민들레, 냉이꽃처럼 키 작은 들꽃을 보면 이 땅의 순하고 예쁜 아이들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몇 달 전 출간된 그의 3번째 동시집 《엄마는 마법사》에 ‘달이 자꾸 따라와요’가 실려 있다. 이 동시는 2021년 KBS 창작동요대회 노랫말 우수상 수상작이다.
엄마랑 손잡고 외갓집 가는 길
달이 자꾸 따라와요
내가 달랑달랑 걸어가면
달도 달랑달랑 달랑달랑 따라오고
내가 깡충깡충 뛰어가면
달도 깡충깡충 따라오고
외할머니랑 아침 먹고
엄마 손잡고 집에 오는 길
달은 한숨도 안 자고
나만 따라와요
달랑달랑 깡충깡충
달랑달랑 깡충깡충
달은 자꾸자꾸 나만 따라와요
-김남권의 동시 ‘달이 자꾸 따라와요’ 전문
외갓집 가는 아이의 들뜬 시선으로 쓴 동시다. 밤길, 하늘에 걸린 달이 달랑달랑 따라오면 나는 깡충깡충 뛰어간다고 노래한다. 의태어 ‘달랑’과 ‘깡충’으로 화자와 달이 서로 밀당한다.
김 시인의 ‘서울엔 눈이 빨간 여우가 산다’는 왠지 슬프다. 릴케의 ‘작은 죽음’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눈이 빨간 여우’는 누굴까. 충혈된 눈을 지닌 채 삶에 지친 우리 이웃, 엄마 아빠다.
서울의 거리엔 여우가 산다
해가 지면 길 위에 나타나는
눈이 빨간 여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또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간다
엄마 여우는 날씬하고
아빠 여우는 통통하고
아기 여우는 귀욤귀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파트에 모여 사는 사람들
몰래 잡아먹으러 눈 감고 살금살금
엘리베이터를 탄다
-김남권의 ‘서울엔 눈이 빨간 여우가 산다’ 전문
해가 지면 지친 얼굴의 엄마 아빠들이 거리에 등장한다. 눈이 빨갛다. 그래서 여우 같다. 지치고 피곤해 눈이 충혈됐다는 의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저녁 퇴근하는 이들의 모습이 3박자 리듬을 타고 이어진다. 그런데 엄마 아빠 아기 여우가 이웃(아파트 사람들)을 ‘몰래 잡아먹으러’ 엘리베이터를 탈 때 살금살금 탄다는 행이 문제다. 무언가 슬프고 비정하게 느껴진다.⊙
“우리[인간 사회]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온통 불확실성뿐”이라고.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 인간이 결국 맞게 되는 현실은 죽음”이라고 단언한다. 신(神)이 아닌 이상 누구도 이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년)의 《햄릿》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죽는다는 것, 잠든다는 것, 그뿐이다. 누가 알겠는가.”
다만 죽음 뒤에 다가올 그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 의식을 옥죈다. 나그네 길 같은 삶, 돌아올 수 없었던 ‘미지의 땅’으로 도망치느니 차라리 지금 겪고 있는 불행을 감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죽기 살기로 싸우는 편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 톨스토이(Leo Tolstoy·1828~1910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타오르는 촛불이 초를 녹이듯 우리 영혼의 삶은 육체를 쓰러지게 한다.
육체가 영혼의 불꽃에 완전히 타버리면 죽음이 찾아온다.
(…)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살면서 죽음을 기억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삶은 진지하고 즐거우리라.
-톨스토이의 ‘살면서 죽음을 기억하라’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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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
사람들은 지금 시를 쓰기 위해서
발톱처럼 무딘 가슴을 찢고
코피처럼 진한 눈물을 흘리고 있나이다
모래알만 한 별이라도 좋으니
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아닙니다. 하늘의 별이 아니라
깜깜한 가슴속 밤하늘에 떠다닐
반딧불만한 한 빛 한 점이면 족합니다.
좀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것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이어령의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1’ 중에서 일부
백과전서적 지식과 화려한 수사학의 천재성을 자랑했던 이어령도 신(神) 앞에 고백한다. 생(生)의 한순간을 포착해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오직 신만이 그런 분별력과 시혼(詩魂)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이어령의 바람은 너무나 소박했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단 한 줄의 시(詩)였다.
박상륭의 죽음과 릴케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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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 |
소설 속 사내는 이렇게 절규한다. “나는 어찌하여, 햇볕만 먹고도 토실거리는 과육이 못 되고, 이슬만 먹고도 노래만 잘 뽑는 귀뚜라미는 못 되고, 풀잎만 먹고도 근력만 좋은 당나귀는 못 되느냐”고. 울부짖음은 계속된다.
〈…(나는 어찌하여) 바람만 쐬이고도 혈색이 좋은 꽃송이는 못 되고, 거품만 먹고도 굳어만지는 진주는 못 되고, 조락(凋落)만 먹고도 생성의 젖이 되는 겨울은 못 되고, 눈물만 먹고도 살이 찌는 눈 밑 사마귀는 못 되고, 수풀 그늘만 먹고도 밝기만 밝은 달은 못 되고, 비계 없는 신앙만 먹고도 만년 비대해져 가는 신(神)은 못 되고, 똥만 먹고도 피둥대는 구더기는 못 되고, 세월만 먹고도 성성이는 백송은 못 되고, 각혈만 받아서도 곱기만 한 진달래는 못 되고, 쇠를 먹고도 이만 성한 녹은 못 되고, 가시만 덮고도 후끈해하는 장미꽃은 못 되고, 때에 덮여서야 맑아지는 골동품은 못 되고, 나는 어찌하여 그렇게는 못 되고,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유정 중에서 영장이라고 내 자부했던 사람, 허나 어찌하여 나는 흙 속의 습기 속으로만 파고드는 지렁이도 흘리지 않는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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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복 교수의 《삶을 위한 죽음의 미학》 |
그 죽음은 곧 인간이 바라는 ‘친숙한 죽음’이며, 이 죽음은 현 존재의 근원이 되는데 그 이유는 ‘자연’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생성과 회귀를 반복하는 자연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거나 둘을 함께 품고 있다.
릴케(Rainer Maria Rilke·1875~1926년)의 작품들은 ‘친숙한 죽음’에 대한 자연의 ‘신성한 착상’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두이노의 비가》(1922)의 ‘제9비가’에서 릴케는 이렇게 노래한다.
친숙한 죽음이야말로
너의 신성한 착상이다.
보라, 나는 살아 있다. 무엇으로? 나의 어린 시절도 미래도
줄어들지 않는다. (…) 넘치는 지금의 존재가
나의 마음속에서 용솟음친다
-릴케의 ‘제9비가’ 중 일부
‘제9비가’에 나오는 ‘너’는 바로 대지, 즉 자연을 의미한다.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회귀다. 그러나 대도시 이웃을 잃어버린 적막한 삶에서 자연을 찾기는 어렵다. 릴케의 《기도시집》(1903) 제3부 ‘가난과 죽음의 서(書)’에는 릴케가 파리에서 경험한 죽음이 그려져 있다. 릴케는 도시인들의 소외된 죽음을 ‘작은 죽음’ ‘익지 않은 열매’로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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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시집 《두이노의 비가》(손재준 옮김) |
힘겨운 세상에 놀라며 죽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입 벌려 찡그린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들의 부드러운 미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밤에
그 모습으로 일그러집니다.(…)
그들은 괴롭히는 수많은 사람들 손에 넘겨져
시간마다 울리는 종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쓸쓸히 양로원의 주변을 서성이며
입원할 날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 시절에 신비로운 인사를 던지고 간 그 죽음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것은 작은 죽음,
그들 자신의 죽음은 익지 않은 열매처럼
그들의 가슴속에
퍼렇게 단맛도 없이 매달려 있습니다.
-릴케의 ‘가난과 죽음의 서’ 일부
그곳, 즉 삭막한 도시에서 만나는 ‘작은 죽음’은 아무런 맛도 없고 아무렇게나 잘린 배추 밑동처럼 무익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 가치 없는 죽음처럼 비극적인 운명도 없다.
쳇바퀴 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하얀 꽃처럼 창백한’ ‘퍼렇게 단맛도 없는’ 도시의 얼굴은 우리의 초상(肖像)일지 모른다. 낮에는 마지못해 웃을지 몰라도 밤이면 실존적 공허와 불안에 휩싸인다.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어도 반겨주는 곳이 없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간다. 죽음이 성난 얼굴로 돌아보고 있다.
이 교수는 “릴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였다. 삶의 질은 죽음의 질을 결정한다고 보았다”고 했다.
황동규의 죽음, 김동환의 봄, 홍난파의 봄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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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의 시집 《풍장》 |
풍장은 주검을 매장하지 않고 옷을 입히거나 관에 넣어 공기 중에 놓아두는 장례법을 말한다. 글자 그대로 바람의 장례다. 주검을 나뭇가지나 풀로 살짝 가리는 정도로 숲에 방치하거나 장집[葬屋]을 만들어 덮어 두는 방식이다. 이런 장례는 진도, 완도, 신안 등 서남해안에서 행해지는 장례 풍습이라고 한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퉁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서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황동규의 ‘풍장1’ 전문
이 시의 1연엔 풍장의 준비, 2연엔 풍장의 과정, 3연엔 풍장을 바라는 이유가 그려져 있다. 화자(話者)는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당부한다. 마지막 행 ‘바람과 놀게 해 다오’는 자유로운 저승의 삶을 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찾을 수 없다.
죽음을 종종 가을과 겨울로 묘사하지만 필연적으로 대지는 봄을 맞이하고야 만다. 생명의 탄생은 죽음의 부산물일지 모른다. 4월, 완연한 봄이다. 빈들에 어느덧 새싹이 트고 호랑나비 떼, 종달새의 노래가 들리기 시작한다. 시인 김동환(金東煥·1901~?)의 ‘산 너머 남촌에는’만 한 봄노래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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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란의 가요앨범 〈산 너머 남촌에는〉 |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南風) 불 제 나는 좋데나.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산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를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 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김동환의 ‘산 너머 남촌에는’ 전문
김동환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인 ‘국경의 밤’을 통해 북방의 춥고 고달픈 겨울을 배경으로 절망적이고 암울한 사회 현실을 노래한 시인이다. ‘산 너머 남촌에는’은 ‘국경의 밤’과는 대조적으로 섬세하고 정겨운 언어 구사와 부드럽고 친근한 어조가 느껴진다. 봄의 생명이 소중하고 아름답게 다가오는 시다. 시를 고친 가사에 김동현이 곡을 붙이고 박재란이 노래해 1965년 무렵 ‘국민 봄노래’가 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가요 ‘산 너머 남촌에는’과 쌍벽을 이루는 가곡 ‘봄처녀’는 이은상(李殷相·1903~1982년)의 시조를 가사로 홍난파(洪蘭坡·1897~1941년)가 작곡한 가곡이다. 홍난파의 가곡 작품집인 《조선가요작곡집》(1933)에 실렸다. 새봄을 처녀에 비유하는 이 노래는 왈츠풍의 빠르기로 4분의 3박자의 아름다운 여운을 주는 곡이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님 찾아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뉘게 물어볼까나
-이은상의 ‘봄처녀’ 전문
화자는 봄이 나에게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오는데, ‘님 찾아가는 길’이라지만 행여 나를 찾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이상한’ 설렘을 느낀다. 정말 ‘내게 오심인지’ 누구에게 묻고 싶지만 행여 물었다가 면박을 당할까 봐 미안하고 어리석은 듯, 혹은 수줍은 듯 묻고 싶다는 속마음을 고백하는 노랫말이다.
김남권의 달노래 ‘달랑달랑, 깡충깡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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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의 청보리밭 모습. 봄빛이 완연하다. 사진=조선DB |
엄마랑 손잡고 외갓집 가는 길
달이 자꾸 따라와요
내가 달랑달랑 걸어가면
달도 달랑달랑 달랑달랑 따라오고
내가 깡충깡충 뛰어가면
달도 깡충깡충 따라오고
외할머니랑 아침 먹고
엄마 손잡고 집에 오는 길
달은 한숨도 안 자고
나만 따라와요
달랑달랑 깡충깡충
달랑달랑 깡충깡충
달은 자꾸자꾸 나만 따라와요
-김남권의 동시 ‘달이 자꾸 따라와요’ 전문
외갓집 가는 아이의 들뜬 시선으로 쓴 동시다. 밤길, 하늘에 걸린 달이 달랑달랑 따라오면 나는 깡충깡충 뛰어간다고 노래한다. 의태어 ‘달랑’과 ‘깡충’으로 화자와 달이 서로 밀당한다.
김 시인의 ‘서울엔 눈이 빨간 여우가 산다’는 왠지 슬프다. 릴케의 ‘작은 죽음’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눈이 빨간 여우’는 누굴까. 충혈된 눈을 지닌 채 삶에 지친 우리 이웃, 엄마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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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권의 동시집 《엄마는 마법사》 |
해가 지면 길 위에 나타나는
눈이 빨간 여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또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간다
엄마 여우는 날씬하고
아빠 여우는 통통하고
아기 여우는 귀욤귀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파트에 모여 사는 사람들
몰래 잡아먹으러 눈 감고 살금살금
엘리베이터를 탄다
-김남권의 ‘서울엔 눈이 빨간 여우가 산다’ 전문
해가 지면 지친 얼굴의 엄마 아빠들이 거리에 등장한다. 눈이 빨갛다. 그래서 여우 같다. 지치고 피곤해 눈이 충혈됐다는 의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저녁 퇴근하는 이들의 모습이 3박자 리듬을 타고 이어진다. 그런데 엄마 아빠 아기 여우가 이웃(아파트 사람들)을 ‘몰래 잡아먹으러’ 엘리베이터를 탈 때 살금살금 탄다는 행이 문제다. 무언가 슬프고 비정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