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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15〉

黨人 李貴의 정치적 삶을 추적하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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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원 시절부터 西人의 입장 적극 대변… ‘독기 부리는 정신병자’ ‘강개하다’는 엇갈린 평가받아
⊙ 47세 때 文科 급제하면서 벼슬살이 시작… 인조반정 주도
⊙ 정묘호란 때 “싸우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며 강화도 하지 못한다면 나라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라며 강화 주장
⊙ 태종 때 이숙번과 비슷한 狂直한 성격으로 ‘雜君子’라고 비난받아… 元宗 追崇에 앞장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이귀
  이귀(李貴·1557~1633년)는 당쟁(黨爭)이 시작돼 요동을 치다가 결국 주자학 세력이 정권을 잡게 되는 선조·광해군·인조 세 임금 시대에 정치 활동을 했던 핵심 인물 중 하나다.
 
  《인조실록》 11년(1633년) 2월 15일 그의 졸기(卒記)에는 젊은 시절 모습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강개한 성품에다 큰 뜻을 품어 벼슬에 오르기 전부터 자주 글을 올려 국사(國事)를 말했는데 그 말이 수천 마디나 되었다.〉
 
  이귀가 문과에 급제한 것은 두 차례 왜란(倭亂)이 끝난 1603년(선조 36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훨씬 이전부터다. 선조 17년(1584년) 8월 18일 생원(生員) 신분으로 글을 올린 때문이다. 당시 서인(西人)이 궁지에 몰리고 있었는데 사헌부·사간원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그리고 심의겸(沈義謙)이 서로 결탁을 맺었다고 비판하니 아마도 그것은 억울하다는 논리를 담은 글로 보인다. 그러나 이이와 성혼이 파주 3걸로 불린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28세 생원 이귀는 이미 서인 당파에 깊이 몸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국조인물고》에는 그의 집안 배경과 어린 시절 그의 모습이 약간 등장한다. 그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안동 권씨를 따라 남쪽 어딘가에서 살다가 15세 때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무렵 이이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하면서 선조 15년(1582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이 무렵은 동서 간 당쟁이 격화되면서 이이·성혼·송익필(宋翼弼)이 중심이 된 서인이 동인(東人)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글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성품 또한 나서기를 좋아하고 괄괄해 거침이 없었다.
 
 
  東人과 西人, 王權과 臣權
 
  선조 17년(1584년) 이이는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9월 2일 이귀는 또 대사헌 이식(李拭)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는데 당시 이식은 피혐(避嫌)하면서 사직을 청한 다음에 이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이가 심의겸 문하에서 몸을 일으켰다는 것은 온 나라가 다 아는 것이어서 그가 의겸과 깊고 밀접하게 결탁한 실상은 절대로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생원 이귀가 사우(師友)를 비호해야 한다는 것만을 알고 군부(君父)를 기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서 교묘하게 말을 날조하고 부당하게 그를 구원하기 위해 도리어 신(臣)들이 기망(欺罔)한다고 하면서 드러나게 비방하고 배척했습니다.”
 

  이귀의 논리는 그 후 서인들이 초지일관 견지한 입장이다. 동인은 왕권(王權), 서인은 신권(臣權) 세력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군부를 기만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은 분명 동인 입장이다.
 
  선조 20년(1587년) 3월 7일에는 이귀가 올린 소(疏)를 보고서 직접 승정원에 불러 물어보기도 하는데 내용은 이런 것이다. 이귀는 소를 올리면서 심의겸 문하에 왕래한 사람은 이이 등만이 아니라 동인들도 많았다고 했다. 바로 이 때문에 선조는 다시 그 동인들이 누구인지를 캐물었다. 이에 이귀는 당시 동인을 이끌던 이산해(李山海)를 비롯해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등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이렇게 되면 선조 입장에서 문제가 조금 달라지는 것이다. 동인이 왕당파인 줄 알았는데 몰래 외척 실세 심의겸과도 연을 맺고 있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독기를 부리는 정신병자’
 
  임진왜란 당시 이귀는 지방 하급관리를 전전했다. 《국조인물고》에 나오는 일화다.
 
  〈체찰사 이덕형(李德馨) 공이 공을 소모관(召募官·모병책)으로 삼아 영남을 다닐 때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자신의 명성을 믿고 교만 방자하게 위세를 부리며 다녔는데, 방백(方伯) 및 사명(使命)을 받들고 간 자들이 모두 두려워 피하면서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다. 공은 합천(陜川)으로 공문을 보내어 그의 죄상을 열거하고 그의 종을 가두었다. 정인홍이 크게 노하여 공이 우계(牛溪) 성혼의 문인(門人)이라 하여 그의 무리 문경호(文景虎)를 사주(使嗾)하여 상소해서 우계를 배척하게 하였는데 간당(奸黨)으로 지목하였다. 정인홍이 대사헌이 되기에 미쳐서 공이 상소하여 그가 향리(鄕里)에 있을 때 저지른 죄 열 가지를 거론하여 이에 좌죄(坐罪)되어 파직되었고, 정인홍에 대한 임금의 권우(眷遇) 역시 쇠퇴하여 뜻을 펴지 못하고 돌아갔다.〉
 
  일종의 ‘자살공격대’였던 셈이고 당시 북인(北人)을 중시하던 선조가 정인홍을 시골로 되돌려보낼 정도였다면 이귀의 기세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일은 선조 35년(1602년) 3월의 일이다. 정인홍이 대사헌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자 경상도 의령 진사 오여온(吳汝穩)이라는 사람이 이귀를 맹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그중 일부다.
 
  〈간사한 무리가 올바른 사람을 모함하기 위해 반드시 불측(不測)한 이름을 첨가하는 것은 곧 일반적인 형태입니다. 사마광(司馬光)의 충성스러움과 어짊에 대해 장돈(章惇)은 간사하다고 지목했으며, 주희(朱熹)의 정도(正道)에 대해 호굉(胡紘)은 위학(僞學)이라고 배척했으니 예부터 소인이 올바른 사람을 공함(攻陷)하는 데는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이귀와 같이 은밀히 독기를 부리는 정신병자는 또 어떻겠습니까.
 
  본성이 거짓되고 종적이 무상하여 계미년(癸未年·1583년) 이후 이이가 당국(當國)할 때는 이이에게 의탁하고, 성혼·정철(鄭澈)이 조정을 독점할 때는 성혼과 정철에게 의탁하여 냄새를 찾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평생 사업이 오직 남을 공격하는 일에만 전력하였는데 전후에 올린 황탄(荒誕)한 소도 모두 남의 손을 빌린 것으로 출세하고 벼슬을 매개하는 자료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사람들은 상소하는 악마로, 사류(士類)들은 도깨비로 지목하여 성명을 눈으로 보기만 해도 구토를 하려고 하였으니 실로 다시는 입에 거론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지나친 염려로는, 어지러이 늘어놓은 이귀의 말을 성명(聖明) 아래서 그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이귀가 출몰하는 것으로 세태의 변천을 볼 수 있습니다. 너그러이 용납하여 덮어주다가 그것이 효시(嚆矢)가 되어 혹 군부에게 시험을 하거나 올바른 사람에게 시험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귀의 몸이야 출몰하다가 말더라도 이귀의 말이 뒷날 뜻을 펼 날이 있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신은 사슴을 말이라고 한 진(秦)나라 조고(趙高) 같은 간신이 또 그 사이에서 틈을 엿볼까 두렵습니다.〉
 
 
  47세에 문과 급제
 
  선조 36년(1603년) 47세 나이에 이귀는 문과에 급제했다. 남들보다 20년 이상 늦은 나이였다. 이로써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제수되고, 안산군수(安山郡守)·양재찰방(良才察訪)·배천군수(白川郡守)·함흥판관(咸興判官)을 역임하였다. 안산군수는 조선 초 1차 왕자의 난 때 이숙번(李叔蕃)이 맡았던 관직이기도 하다.
 
  마침 실록에는 그가 양재찰방을 맡았을 때 그에 대한 평판이 실려 있다.
 
  〈본디 경망한 사람으로 말재주가 약간 있었다. 일찍부터 권력과 이익의 길에 들어 자신을 부지하려고 꾀하였으므로 비록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지만 한마디 말도 볼 만한 것이 없었다. 또 시대의 의논을 경망하게 평론함에 아무런 꺼림이 없었기 때문에 번번이 남들에게 타기(唾棄)되어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였다.〉
 
  이런 이귀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다. 광해군 집권과 함께 그가 그렇게도 배척했던 정인홍이 이끄는 북인, 그중에서도 강경한 대북(大北)파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광해군 초부터 정인홍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이를 통해 이귀는 ‘강직하다’는 세평을 얻게 된다. 《광해군일기》 2년(1610년) 4월 20일 자는 파격적으로 이귀에 대한 논평만 싣고 있다.
 
  〈이귀는 이이와 성혼을 사사하였다. 강개(慷慨)하여 의논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자주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말하였다. 일찍이 정인홍을 꾸짖는 장문의 소를 올려 그의 죄를 논핵(論劾)하였는데, 그로 인해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숙천부사가 되어 전임 부사 윤삼빙(尹三聘)이 뇌물을 받고 공물을 훔친 죄를 논핵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세력이 있던 삼빙이 마침내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논박하게 한 것이다.〉
 
  광해군 치하에서 이귀가 살아낸 모습을 《국조인물고》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그 후 숙천부사(肅川府使)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당상)로 승진하였다. 임자년(壬子年·1612년·광해군 4년)에 상(喪)을 당해 여묘(廬墓) 3년을 살았다. 이때 적신(賊臣)이 용사(用事·전횡)하여 연달아 역옥(逆獄)을 일으켜 자신의 총애를 굳히고 위엄을 떨쳐 죽거나 귀양 간 사대부가 서로 이어졌다. 장차 국구(國舅·임금 장인) 김제남(金悌男)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하니, 공은 당시 재상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과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두 공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만약 국구를 죽이게 되면 반드시 모비(母妃)를 폐(廢)할 것이다. 지금 구하지 않으면 비록 폐모(廢母) 하는 일을 막으려고 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두 재상은 탄식만 하고 그 말을 따르지 못하였다. 김제남을 죽이고 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 다음 대비(大妃)를 유폐(幽閉)하고 존호(尊號)를 제거하여 서궁(西宮)이라고 부르는 등 흉도들의 폐욕(廢辱)이 이르지 않은 바가 없었다. 공은 한교(韓嶠)를 보내어 이이첨(李爾瞻)에게 화복(禍福)으로 깨닫게 하였더니, 이이첨이 조금 멈칫해서 대비의 화가 다소 저지되었으니, 이는 모두 공의 힘이었다. 해주목사(海州牧使) 최기(崔沂)가 모함을 받아 체포되자 친구들이 감히 찾아가 보지 못했는데 공만이 유독 가서 만나다가 죄를 입어 이천(伊川)으로 귀양 갔다.〉
 
 
 
두 아들도 反正에 끌어들여

 
이귀의 아들 이시백(왼쪽)과 이시방. 인조반정에 참여해 정사공신 2등에 올랐다.
  이천에 유배를 간 것은 광해군 8년(1616년)의 일이다. 3년 후인 1619년에 유배가 풀렸지만 이미 이귀는 광해군에 대해 다른 마음을 품었다.
 
  여기서는 인조반정과 관련해 이귀의 모의 상황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자. 그는 거사를 꿈꾸며 특이하게도 아들 이시백(李時伯·1581~1660년)·이시방(李時昉·1594~ 1660년)을 모두 끌어들였다. 그만큼 그의 뜻은 단호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2년 전인 광해군 13년(1621년) 4월 어느 날 신경진(申景禛)이 이귀에게 거사를 타진했다. 이 당시 줄곧 지방 한직으로만 돌다가 평산부사로 있을 때로 마침 부인상을 당해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귀는 두 아들과 사돈 김자점(金自點)까지 끌어들였다. 최명길(崔鳴吉)과 장유(張維)도 아들 이시백을 매개로 거사에 참여했다. 이처럼 이귀는 거사 과정에서 결정적 기여를 했다.
 
  1623년 거사 당일에도 이귀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대문 밖 홍제원에서 군사들이 모일 때 대장 김유(金瑬)가 늦도록 도착하지 않았다. 이에 이귀는 이괄(李适)에게 지휘를 부탁했고 이괄이 지휘를 막 시작할 때 김유가 나타났다. 그 바람에 둘 사이에는 지휘권을 둘러싼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 이를 나서 중재한 인물이 이귀다.
 
  거사 성공 후 정사공신(靖社功臣)을 책봉할 때 1등공신은 김유·이귀·김자점·심기원·신경진·이서·최명길·이흥립·구굉·심명세 10명이었다. 이 중 여러 명이 이귀가 끌어들이거나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아들 이시백과 이시방은 2등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이귀의 위세는 불문가지(不問可知)다.
 
 
  태종 때 이숙번과 비슷
 
김유
  이제 이귀의 출세가도를 따라가 보자. 거사에 성공한 당일 이귀는 이조참판에 제수(除授)됐다. 1623년 실록 3월 14일 자가 전하는 이귀의 인물평이다.
 
  〈이귀는 사람됨이 호방하였다. 소시부터 강개했고 큰 뜻이 있어 항상 사공(事功)을 자임하였다. 계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당시 정승에게 편지를 보내 국구 김제남의 사형을 완화하고 자전을 보호할 것을 청하였으나 당시 정승이 따르지 못하였다. 급기야 폐모론이 일어나자 한교를 이이첨에게 보내 화복으로 설득시켰는데 그 말이 몹시 준엄하여 이첨의 기가 꺾였다. 광해의 무도함에 늘 분개했으며 종사를 부지하고자 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은밀히 광복(匡復)을 모의하다가 드디어 김유 등과 함께 중흥의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이조참판은 요직이긴 해도 높은 벼슬은 아니다. 그러나 고속승진은 시간문제였다. 김유는 병조판서로 한 등급 위였다. 7월, 이귀는 사헌부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런데 우찬성을 겸한다. 대사헌은 종2품, 우찬성은 종1품 자리다. 이를 겸직한 것이다. 그러면서 우찬성으로서 군사에 관한 일에 많은 의견을 냈다.
 
  당시 상황을 굳이 태종 시대를 끌어와 비유하자면 김유는 하륜(河崙), 이귀는 이숙번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김유는 꾀가 많은 인물이었고 이귀는 다소 광직(狂直)한 사람이었다. 인조 2년에는 좌찬성으로 옮긴다. 이제 남은 것은 정승뿐이었다. 그러나 이귀는 살아서는 끝내 정승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인조가 볼 때 정승 감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태종이 이숙번을 정승에 올리지 않은 것과 일맥상통한다 할 것이다.
 
  인조 3년(1625년) 3월 25일 인조가 경연(經筵)에서 《맹자(孟子)》를 읽었는데 이때 이귀가 특진관(特進官) 자격으로 참여해 당시 인물들에 대한 평을 했다. 여기서 서인 훈구파(勳舊派)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맹자 이후에는 주자가 나와 지나간 성인들을 계승하고 다가오는 후학들을 개도(開導)하여 사문(斯文)에 큰 공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조광조(趙光祖)가 도학으로 세상에 이름났었는데 이어 사림의 화가 있었고, 이 이후부터는 선비들의 풍습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그 뒤에는 이황(李滉)이 유자(儒者)의 공부에 독실하였고, 이황이 죽은 뒤에는 이이와 성혼이 도학에 고명하였으며, 폐조(廢朝·광해군) 10년 동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반정 뒤에 이르러서는 정엽(鄭曄)이 사유(師儒)의 장관이 되어 선비들을 모아놓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나, 모두가 과거 공부하는 선비들이었습니다. 김장생(金長生)은 일을 맡기기에는 우활한 듯해도 서울 안에 머물러 있으면 후학들이 모범으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인데, 뜻을 결단하고서 시골로 돌아갔습니다. 장현광(張顯光)도 벼슬살이에 뜻이 없어서 물러가 버리고 오지 않습니다. 이는 진실로 국가의 큰 손실입니다. 박지계(朴知誡)는 경학을 궁리한 선비로서 조금도 조정에 죄를 지은 일이 없는데도 한 번 배척하고는 다시 부르지 않으니, 유자를 대하는 도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대개 초야의 선비들이 처음에 반열에 들어오면 으레 기롱과 모욕을 자초하고, 세속의 선비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명사가 되는 수가 많습니다. 폐조가 기강을 어지럽힌 나머지 전하께서 즉위하셨으니, 이는 곧 한 번 크게 다스려지는 시기입니다. 학문하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흥기하는 터전이 되게 하소서.”
 
 
 
유림들에게 ‘雜君子’ 소리 들어

 
  한마디로 숭용산림(崇用山林), 즉 재야에서 학문을 닦는 서인 사람들을 두루 써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날 실록 사관의 평이 신랄하다.
 
  “이귀는 지조가 단정하지 못하고 언어가 법도가 없어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젊어서 (이이나 성혼에게) 사숙(私淑)한 기초가 있어서 그의 뜻이 이러한 것이다. 또 임금을 친애하고 국사를 근심하여 뭇사람의 비방도 피하지 않고,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였는바, 충분(忠憤) 한 가지만은 그와 비교될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다시 사람들이 잡군자(雜君子)라고 하였다. 경연에 입시했을 적에 저촉되거나 거슬리는 말이 많아도 상(上)이 죄주지 않았고, 진신(搢紳)들에게 욕설하기를 거리낌 없이 해도 사람들이 성내지 않았다. 매일같이 차자(箚子·약식 상소)를 올리고 상소하였으나 말을 써주지 않았고, 국가 일을 도모하고자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나 한갓 수고로울 뿐 도움이 없었다. 평생의 행사가 대부분 이와 같았다.”
 
 
  정원군 追崇 문제
 
  이귀는 인조 3년 말 김유와의 충돌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지방에 가서 지내야 했다. 사실상 유배였다. 그런데 해가 바뀌어 인조 4년 1월 22일 김유가 이조판서, 이귀가 병조판서를 맡는다.
 
  이틀 후 이귀는 당시 조정에서 매우 민감하게 여기던 문제와 관련해 차자를 올리는데 정국에 큰 파란을 몰고 온다. 2년 후 본모습을 드러내는 인조 친아버지 ‘정원군(定遠君) 추숭(追崇) 문제’였다.
 
  실은 이 문제는 이미 반정에 성공한 직후 인조가 반정 사실을 정원군 사당에 고할 때부터 생겨났다. 즉 인조나 공신들은 마땅히 정원군을 아버지, 인조를 아들로 불러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반해 주자학을 존중하는 조정 신하들은 인조가 할아버지인 선조의 대통(大統)을 이었으니 선조를 아버지로 부르고 정원군을 백숙부로 불러야 한다고 맞섰다. 박지계는 전자(前者)를 지지했고 김장생은 후자(後者)를 지지했다. 이는 왕실을 특별존재로 볼 것이냐 일반 사대부와 같은 수준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로 훗날 예송(禮訟)논쟁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사림을 비롯한 조정 신하들은 대체로 김장생의 주장이 옳고 박지계의 주장은 임금에게 아첨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때는 인조도 한 걸음 물러서 정원군을 대원군으로 올리는 선에서 타협했다.
 
  이귀가 병조판서가 되기 8일 전인 1월 14일 인조 어머니 계운궁 구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인조는 국장(國葬)을 준비토록 하고 자신이 상주(喪主)가 되어 삼년상을 행하려 했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은 대원군 부인에 준하는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맞섰다. 또 삼년상은 안 되고 일년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또한 김장생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이런 와중에 인조 의견에 동조하는 이귀를 병조판서에 임명한 것은 이귀를 앞세워 이 문제를 풀어내려는 인조의 구상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이귀는 인조를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차자를 1월 24일에 올린다.
 
  곧바로 온 조정이 들고일어났다. 이에 홍문관 부제학 최명길은 중재를 명분으로 하면서도 이귀 의견에 동조했다. 최명길에 대한 탄핵 요구도 거세졌다. 이에 이귀는 병조판서에서 물러나 연평부원군으로 돌아간다.
 
 
  정묘호란 때 강화 주장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이귀는 앞장서 인조가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대간을 비롯한 조정 신하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당한다. 훗날 병자호란 때 최명길이 당하게 될 처지의 전조라 하겠다. 《국조인물고》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정묘년(丁卯年·1627년·인조 5년)에 금(金·후금)나라 군사가 침략해 3성(城)을 함락시키니, 제진(諸鎭)이 모두 궤멸하여 거가(車駕)가 강도(江都)로 행하였다. 대간이 서울을 떠나야 한다는 논의를 낸 것을 공의 죄로 삼아 찬출(竄黜)하기를 청하였다. 금나라 군사가 평양(平壤)에 이르러 강화(講和)를 요구하니, 묘당의 의논이 마땅히 허락하는 답서를 보내야 한다고 하였다. 대간이 또 강화하자고 한 것을 공의 죄로 삼아 힘껏 공격하였다. 화의(和議)가 정해지고 양사의 논의가 더욱 준열(峻烈)해지자 여러 재상이 처음에 했던 말을 차츰 바꾸었다. 공은 대간과 임금 앞에서 쟁론하기를 ‘싸우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며 강화도 하지 못한다면 나라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오늘날 조정 신하 중 그 누가 강화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겉으로만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심지어 눈물을 흘리고 분해하며 꾸짖었다. 금나라 군사가 물러간 후 공은 여러 차례 대평(臺評·사헌부의 비판)을 입어 연달아 네 번이나 차자를 올려 물러가기를 빌면서 대신으로 하여금 죄의 정상을 변명하기를 청하였다. 대신이 말하기를 ‘서울을 떠나자는 의논이 처음 이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귀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여 난리에 임하여 자신을 잊어 우리 조선이 이처럼 있게 되었습니다. 어찌 죄를 주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귀의 충성은 해와 달을 꿰뚫을 정도이니, 연소배들이 짓밟을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조판서 自薦
 
元宗으로 추존된 인조의 아버지가 묻힌 김포 章陵. 최근 그 앞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논란이 됐다. 사진=조선DB
  재위 6년을 맞은 인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싶었다. 문제는 반정을 함께한 서인은 철저한 신권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나마 이귀·최명길 정도가 인조 편에 서주었다.
 
  1630년(인조 8년) 8월 음성(陰城) 현감 정대붕(鄭大鵬)이 정원군 추숭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그는 ‘계운궁의 상례를 국상으로 치르고도 정원군을 추숭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주장했다. 인조는 그의 의견이 고마웠지만 대다수 조정 신하는 격하게 반발했다. 정대붕의 상소를 계기로 이귀는 정원군을 추숭하고, 그를 모시는 묘(廟)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이귀는 무리를 동원하여 추숭을 요청하는 소를 연달아 올리게 하는 등 여론 조성에 나섰다.
 
  이듬해 4월 인조는 대신들을 모아놓고 정원군 추숭의 뜻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때문이었다. 물론 조정 대신들과 삼사(三司), 예조 관원들, 그리고 교조적인 유생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쳤다. 이에 인조는 반대하는 신하들을 시정잡배, 성균관 유생들을 괴물이라고 부르면서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이때 보여준 이귀의 모습은 단순히 충신이라고 보기에는 민망할 정도다. 추숭 논란이 한창이던 인조 9년 11월 25일 이귀는 이조판서에 임명된다. 이날 실록이다.
 
  〈이귀를 이조판서로 삼았다. 이귀가 일찍이 경연에서 상에게 아뢰었다.
 
  “지금 추숭(追崇)하는 의논을 막는 자들을 전관(銓官·이조)이 모두 거두어 쓰기 때문에, 추숭하는 의논이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신 같은 자는 도저히 전장(銓長·이조판서)이 될 수 없는 것입니까?”
 
  이어 홍서봉(洪瑞鳳)이 뇌물을 받았다고 극력 비난하니, 마침내 상이 홍서봉을 파직시키도록 명하였다. 이귀는 아뢸 일이 있을 때마다 오랫동안 앉아서 얘기하면서 손으로 임금의 옷과 띠를 잡아당기기까지 하였는데, 상이 일러 말했다.
 
  “경은 그만하라. 다른 사람도 일을 아뢰고 싶어 한다.”
 
  계해년(癸亥年·1623년·인조 1년) 이후로 이귀가 일찍이 이조판서에 의망되었으나 임명받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임명되었다.〉
 
  대신이 자리를 자천(自薦)하는 것은 선비로서 체모를 잃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이귀는 자천했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야 했다.
 
  드디어 인조 10년(1632년) 추숭도감이 설치됐고 정원군 묘를 장릉(章陵)으로 고치고 인조 13년에 원종 내외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모심으로써 13년에 걸친 추숭 문제는 일단락됐다. 그 일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이귀가 없었다면 인조는 결코 이 일을 완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이귀는 조정 대신은 물론 성균관 유생, 재야 산림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후 최명길 또한 같은 길을 걷는다.
 
  이듬해 이귀는 세상을 떠났다. 이에 인조는 애통해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귀는 자기가 알고 있는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보필한 충직(忠直)한 신하였다. 이제 갑자기 세상을 버려 내가 매우 슬피 애도한다.”
 
  “그가 정승에 이르지 못한 것을 내가 매우 후회한다. 그에게 영의정을 추증(追贈)하고, 특별히 상지인(相地人)을 보내 땅을 가려 장례를 지내주도록 하라.”
 
  그의 아들 이시백은 일곱 번이나 판서를 역임했고 마침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시방은 현종 때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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