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 지하철에서 무차별 칼부림, 放火 등 빈발… 소외받던 패배자가 악당이 되어가는 과정 그린 영화 〈조커〉 빗대 ‘조커 범죄’라고 칭해
⊙ 계층 갈등에 대한 분노, 경쟁사회에서 도태된 절망감 반영…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의 흥행도 일맥상통
⊙ ‘카·페·인 우울증’,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다 서로 간 격차를 확인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우울증 상태가 지속
⊙ 본질 외면한 채 “이게 다 대중문화 탓”처럼 쉬운 결론으로 발뺌하려다 보면 훨씬 위험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 계층 갈등에 대한 분노, 경쟁사회에서 도태된 절망감 반영…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의 흥행도 일맥상통
⊙ ‘카·페·인 우울증’,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다 서로 간 격차를 확인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우울증 상태가 지속
⊙ 본질 외면한 채 “이게 다 대중문화 탓”처럼 쉬운 결론으로 발뺌하려다 보면 훨씬 위험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 영화 〈조커〉는 2019년 11월 칠레의 反정부 시위에 조커 분장을 한 시위대원이 등장할 정도로 소외와 저항의 상징이 됐다. 사진=AP/뉴시스
2022년 연초의 한국은 3월 9일 시행되는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실 어느 나라든 대선을 앞두고는 대부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 선거가 없는 일본에서는 조금 특이한 이슈에 관심을 쏟고 있다. ‘도쿄대 흉기 난동 사건’이다.
사건 전말(顚末)은 이렇다. 일본의 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하는 대학입학공통테스트가 시행되던 1월 15일, 도쿄도 분쿄구에 위치한 도쿄대학교 야요이 캠퍼스 정문 앞에서 한 소년이 칼을 휘두르며 지나가는 행인들을 무차별 테러했다. 범인은 나고야에 사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 밝혀졌다. 그가 휘두른 흉기에 도쿄대 시험장을 향하던 남녀 고등학생 2명과 72세 남성이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다. 범인은 도쿄대 의학부에 입학하고 싶었으나 1년 전부터 성적이 떨어져 절망감에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그 자체로 충격적인 사건이다. 특히 한국과 유사한 ‘입시지옥(入試地獄)’ 현실을 반영하기에 한국 언론 미디어에서도 관심을 갖고 관련 기사들을 쏟아낸 바 있다. 그런데 정작 일본 측 ‘진짜’ 관심은 조금 다른 곳에 있다. 대중 반응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들을 살펴보면 분위기를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조커 범죄’
일본 대중은 체포된 범인의 소지품 중 칼 2자루와 톱 외에 가연성(可燃性) 액체가 담긴 페트병도 여러 개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경찰은 범인이 범행 직전 도쿄대 인근 지하철역인 도다이마에역에서도 수차례 방화(放火)를 시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 같은 날 작은 화재가 일어나거나 가연성 액체가 뿌려진 흔적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 같은 지하철 테러 시도 행각이 일본 대중에게는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도쿄 게이오선 지하철에서 벌어진 이른바 ‘조커 범죄’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이 ‘조커 범죄’는 지난해 10월 마지막 날, 젊은 층에서 인기인 서양 명절 핼러윈 데이에 일어났다. 이날 저녁 게이오선 전동차 안에서 한 24세 남성이 30cm 길이의 칼을 휘두르며 차량에 방화해 승객 17명이 부상했다. 72세 남성 한 명은 중태에 빠졌다. 테러가 일어나자 놀란 승객들이 출입문 코크를 열어 열차를 정차시키고 차내 창문을 통해 탈출하는 모습이 휴대폰 영상에 담겨 온라인상에 퍼지기도 했다.
체포된 범인은 보라색 양복 등 인기 만화 〈배트맨〉 속 악당 조커와 똑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대중문화 속 캐릭터들로 분장해 즐기는 핼러윈 데이 풍습 탓에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 범인은 경찰 조사에서 조커로 분장한 이유에 대해 “조커는 태연하게 사람을 해치우기에 그를 동경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범인의 면면(面面)은 조커를 주인공 삼은 2019년 작 미국 영화 〈조커〉 속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영화 속에서 훗날 범죄조직 두목 조커로 변신하는 3류 코미디언 아서 플렉은 직장에서 해고당한 뒤 지하철을 타고 가다 자신을 조롱하며 구타하던 양복 입은 여피족 일행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도망친다. 이게 아서 플렉이 조커로 거듭나게 되는 계기였던 셈이다. 조커를 동경하며 조커 의상을 입은 청년이 〈조커〉 속 사건과 같은 공간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모방범죄(模倣犯罪)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조커 범죄’의 심리적 動因
더 심각한 건 이 사건이 곧바로 또 다른 모방범죄를 낳았다는 점이다. 사건으로부터 불과 8일 뒤인 11월 8일, 이번에는 구마모토현(縣) 구간을 달리는 신칸센 열차 안에서 한 60대 남성이 객차 바닥에 모종의 액체를 뿌린 후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체포된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직전의 게이오선 사건에 영향받아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거기서 두 달 남짓 지나 또 다른 지하철 테러 미수 사건, 도쿄대 정문 앞 흉기 난동에 가려진 도다이마에역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현시점 일본 사회의 공포와 위협감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쯤 되면 가히 영화 모방범죄의 표본이자 대중문화 악영향(惡影響)의 전형적인 사례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소위 “이게 다 대중문화 탓”이라는 막무가내 논지(論旨)의 근거 사례 말이다.
실제 상황은 엄밀히 그와는 좀 거리가 있다. 일단 게이오선 사건 범인은 경찰 조사에서 같은 해 8월 일어난 오다큐선 흉기 난동 사건을 모방한 것이라 진술한 바 있다. 오다큐선 신주쿠행 쾌속급행열차 안에서 한 36세 남성이 마구잡이로 흉기를 휘두르고 열차 바닥에 불을 붙이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그러니 게이오선 사건은 애초 영화 모방범죄라 보기에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 대중이 게이오선 사건 중심으로 유사 사건들을 ‘조커 범죄’라 통칭(通稱)하는 이유가 있다. 오다큐선 사건 범인은 체포된 후 범행 이유에 대해 “나는 형편없는 인생을 살고 있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사실 열차 테러 사건 범인들 전반, 아니 어떤 식이건 무차별 테러를 시도한 범죄자 대부분이 이와 유사한 이유들을 댄다. 빈부격차(貧富格差)를 위시로 한 계층 갈등에 대한 분노, 경쟁사회에서 도태(淘汰)되었다는 절망감과 자포자기(自暴自棄) 심정 등이 테러의 심리적 동인(動因)이 된다. 비단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유사한 동인을 지닌 테러 범죄들을 조커라는 만화 캐릭터 이름으로 묶어 ‘조커 범죄’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커는 바로 ‘이런’ 갈등과 일탈(逸脫)심리 등을 한 몸에 담아내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일단 조커란 대체 어떤 캐릭터인지부터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셀(incel)’
1939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만화 〈배트맨〉에서 악당 조커는 완벽한 반(反)사회적 미치광이 캐릭터로 등장한다. 악당 캐릭터들에서 흔히 보이는 특이한 철학 같은 것도 없고, 사고(思考)의 맥락(脈絡)도 없으며, 범죄 패턴조차 일정치 않다. 그저 어떤 식으로건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붙은 별칭이 ‘혼돈(混沌)과 불확정성(不確定性)의 화신(化身)’이다. 이처럼 미스터리한 면면 탓에 조커는 〈배트맨〉은 물론 모든 슈퍼히어로 만화의 악당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인기 캐릭터가 됐다.
이 같은 인기에 힘입어 조커를 중심인물로 내세운 영화 〈조커〉에서는 만화 설정과 조금 다른 얘기를 한다. 처음으로 조커에게 아서 플렉이라는 ‘일반인’ 이름을 붙여놓고 그가 조커가 되기 전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던 시절 모습을 보여준다. 플렉은 사회적 ‘패배자’다. 궁핍(窮乏)한 싱글맘 가정에서 자라나 이벤트 대행업체에서 일하는 3류 코미디언으로서, 전혀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 각종 정신병과 신경질환에 시달려 일상생활도 버겁고, 와중에 병든 어머니까지 모시느라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개인적 삶도 평탄하질 않다. 위축되고 소심한 성격 탓에 친구도 없고, 여자친구도 없다.
아서 플렉은 세칭 ‘인셀(incel)’을 대표하는 캐릭터다. ‘인셀’은 ‘involuntary celibate’, 즉 ‘비자발적(非自發的) 순결주의자/독신주의자’를 가리키는 신조어(新造語)다. 저소득, 저학력, 신체나 성격적 문제 탓에 배우자나 성관계 대상을 찾지 못하는 성소외자(性疏外者)를 말한다. 이 같은 점 탓에 아서 플렉/조커는 그와 비슷한 처지의 남성들, 또는 가정을 꾸렸더라도 온갖 세파(世波)에 시달리는 남성들로부터 큰 공감을 샀다.
“내 모습 같았다”
《조선일보》 2019년 10월 30일 자 기사 ‘분해도 웃어야 하는 광대가 나 같아서…. 남자들이 울었다’는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네이버에서 관람객 평점을 쓴 이들 중 72%가 남자였다. 남성 관객이 매긴 평점(9.12)이 여성 관객 평점(8.76)보다 높았다. 관객 비율도 남성이 더 높았다. (중략) 20대부터 40대까지 남성 관객이 영화 〈조커〉의 주인공 아서(호아킨 피닉스)에게 뜨겁게 몰입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남초 커뮤니티에선 영화 〈조커〉를 보고 나서 자기 고백에 가까운 관람 후기를 올린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회사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내 모습 같아서 남 얘기 같지 않았다.’ ‘남자라서 쉽게 울지도 못하는데 〈조커〉를 혼자 보면서 모처럼 편하게 울었다.’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김경록(38)씨는 ‘〈조커〉를 보면서 짠하고 안타까웠다. 동시에 내가 조커처럼 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아서 플렉은 엄혹한 현실에서 비롯된 분노를 겹겹이 축적(蓄積)하다 마침내 폭발해 범죄자 조커의 길을 걷는다. 자신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비웃던 이들을 살해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TV로 시청하던 비슷한 ‘인셀’들이 그에 자극받아 거리로 나서 폭동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상당히 선동적이다.
공개 즉시 수많은 서구 미디어로부터 우려를 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영국 《텔레그래프》지(紙)는 아예 “이 영화는 금고에 봉인한 뒤 바다에 빠뜨려 개봉을 막아야 한다”고 썼을 정도다. 미국에서는 모방범죄를 우려해 제57회 뉴욕영화제 〈조커〉 상영 행사장에 자동소총을 든 경찰을 배치하고 관객들 소지품 검사까지 실시했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의 〈조커〉 상영관에도 경찰이 추가 배치됐다.
이런 우려에도 〈조커〉는 전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흥행 성공을 거뒀다. 만화 원작 슈퍼히어로 관련 영화가 큰 인기를 얻지 못하는 일본에서마저 그랬다. 극장에서만 50억6000만 엔을 벌어들이며 오히려 원작 주인공 배트맨 영화들을 웃도는 인기를 보였다. 그만큼 일본 대중에게도 〈조커〉와 아서 플렉은 ‘와닿는’ 구석이 많았다는 의미다. 그리고 영화 개봉으로부터 2년 뒤 조커 복장을 한 청년에 의해 게이오선 사건이 일어났다. 왜 수많은 열차 테러 사건 중 게이오선 사건이 유독 주목받으며 하나의 기점처럼 취급받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 노란 조끼 시위
위 설명에서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럴싸하게 이름 붙은 ‘조커 범죄’, 즉 열차 관련 무차별 테러 범죄가 근래 일본에서 너무 자주 일어나는 듯하다는 점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2020년 이후 벌어진 일들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일시적 경제·사회 요인들 탓이라 해석해볼 수 있지만, 사실 그 전부터도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2019년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市) 노보리토역 인근에서 사상자 19명이 발생한 가와사키 흉기 난동 사건, 2018년 도쿄역에서 신오사카역으로 향하던 도카이도 신칸센 열차에서 20대 여성 2명이 중상을 입고 30대 남성 1명이 사망한 도카이도 신칸센 살인 사건 등이 있었다.
열차라는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보면 훨씬 많다. 2021년 11월 토메시 유아원 흉기 난입 사건이 가장 잘 알려졌다. 대부분 사건들 동인은 앞선 ‘조커 범죄’로서 묶일 수 있는 수준으로 비슷비슷했다.
더 특기(特記)할 만한 점은, 이런 상황이 비단 일본에만 그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테러가 아니라 집단적인 시위 또는 폭동의 형태로서 다르긴 하지만, 근 10년래 계층 갈등과 사회적 불평등에 기반한 대중의 분노가 세계 곳곳에서 전에 없이 크게 터져 나오는 분위기다.
2011년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령(占領) 시위를 그 시작으로 볼 수 있다. ‘1% 대 99%’ 구호가 처음 등장한 전형적인 계층 갈등 시위다. 같은 해 영국 런던 폭동 역시 처음엔 흑인 인종차별 문제로 불거졌으나 점차 백인 저소득층으로 옮아 붙어 이내 성격이 달라졌다. 이듬해에는 프랑스 아미엥시에서 유사한 폭동이 발생했고, 유럽 전역에 걸쳐 비슷한 소요사태들이 일어나다 결국 2018년 ‘노란 조끼 운동’으로 일컬어지는 프랑스 파리 시위에까지 이르렀다. 이 역시 본질적으로는 정부의 부유세 인하와 유류세·자동차세 인상 등 조세개혁(租稅改革)에 대한 불만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부자는 더욱 부자로, 빈자(貧者)는 더욱 빈자로 모는 정책이라는 비판 속에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폭력 시위로 변질됐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 인기 이유이기도
이러니 조커라는 이름은 이제 ‘시대(時代)’ 그 자체를 상징하는 대명사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조커〉의 대대적 흥행 성공도 이처럼 전 세계에 걸친 시대정서 덕택이었다고 볼 만하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영상콘텐츠의 세계적 약진(躍進) 역시 이 같은 세계 대중 정서에 힘입었다고 볼 수도 있다. 세계 대중이 계층 갈등과 사회적 불평등에 전에 없이 민감하게 반응하니 그를 다룬 대중문화 콘텐츠도 주목을 받게 되고, 그러다 보니 1970년대부터 꾸준히 계층 갈등 테마에 천착(穿鑿)해 공포나 액션 등 장르 콘텐츠까지 그를 바탕으로 전개해온 한국 콘텐츠가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됐다는 것.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에 대한 해외의 주목과 현상적 인기 원인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 이처럼 위태로운 현실세계 흐름의 ‘진짜’ 원인은 또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절대다수 언론 미디어가 제시하는 것은 세계적 경제 불황과 그로 인한 실업자 증가 추세다. 특히 2010년대 상황에 있어선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여파와 유로화 위기로 인한 유로존 침체(沈滯) 등이 주원인으로 지목된다. 물론 원칙적으로 맞는 얘기다.
그러나 경제 상황에 있어 수차례 굴곡(屈曲)을 겪어온 지난 10여 년 내내 이 같은 부정적 대중 의식이 전 세계적으로 일관되게 심화(深化)되는 추세로만 가고 있다는 점을 온전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주된 갈등을 겪고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소득불균등 정도를 가늠하는 지니계수의 2017~2020년 수치에서 양호한 편에 속하는 프랑스(0.292), 이탈리아(0.330), 일본(0.334), 영국(0.366) 등 선진국들이다. 한국 역시 지니계수로는 ‘소득격차가 적은 편’으로 분류되는 0.345다.
한국은 다행히 관련 테러 범죄나 폭동이 일어나는 분위기까지는 아니지만, 인터넷상에선 이미 ‘전쟁’이 벌어진 지 오래다.
‘카·페·인 우울증’
한마디로, 적어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는, 세계적으로 대중 의식이 액면 현실 상황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걷고 있었다고 볼 만하다. 현실과의 괴리(乖離)라고까지 보기는 힘들어도, 분명 또 다른 외부 요인들이 꾸준히 개입돼 현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점점 부정적인 형태로 만들어가고 있다 볼 여지가 많다.
이에 2008년 미국 대선을 끼고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성장한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SNS)의 영향을 거론하는 의견이 점차 대두(擡頭)되는 상황이다. 사생활 면에서 개인과 개인 간 일정 수준 이상 거리가 있어 서로의 삶을 잘 알 수 없었던 과거와 달리, 2010년대 들어서부터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서로 다른 계층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 그렇게 서로 간 격차가 너무 낱낱이 드러나고, 그만큼 상대적 박탈감(剝奪感)도 점차 극심해지기 시작했다. 견물생심(見物生心) 탓에 부유층이 사들이는 명품 등에 대한 소비욕구도 점점 과도해지고, 그를 부유층만큼 소유하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하는 흐름도 점차 심화됐다.
특히 개인 간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멀었던 서구 개인주의 사회에서 이처럼 급작스런 밀착감(密着感)이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5년 즈음부터는 ‘카·페·인 우울증’이란 말이 돌아 언론 미디어에서도 종종 다뤄진 바 있다.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다 보면 어느새 서로 간 격차를 확인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우울증 상태가 지속된다는 신종 현상을 가리킨다.
이 같은 부작용(副作用)에 대한 연구도 사실 일찌감치 시작됐다. 2012년 미국 미주리과학기술대 연구팀이 소셜미디어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일수록 우울증을 앓을 확률이 높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2015년 뉴질랜드 오클랜드대 연구팀은 페이스북 애착도가 높을수록 상향적(上向的) 사회비교 양상이 높게 나타나 스스로의 생활만족도가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는 점을 밝혔다. 소셜미디어 속 타인들 삶과 현실 속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 불행감과 분노를 키워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프랜시스 하우건 전(前) 페이스북 프로덕트 매니저는 지난해 10월 영국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분노와 증오는 페이스북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가장 쉬운 방법이며 (페이스북 측은) 알고리즘을 갖고 노는 법을 알고 있다”면서 “이는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넣고 증오를 부채질한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게 다 대중문화 탓?
상황이 이런데도 정작 소셜미디어 과열이 오늘날 여러 사회 문제를 야기(惹起)하고 있다는 주장을 언론 미디어에서 찾아보긴 힘들다. 반면 현실적으로나 정황적으로 그럴 성싶지 않은 “이게 다 대중문화 탓”은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등장한다. 어쩌면 뉴미디어 환경은 아직 낯설어 그 실체를 가늠하기 힘든 반면, “이게 다 대중문화 탓”은 지난 반세기 내내 ‘늘 해왔던 것’이기에 나태(懶怠)한 원인 제시로서 반복하는 상황일 수 있다. 또 어쩌면 40대 이상 기성세대 입장에서 젊은 층 중심으로 소비되는 대중문화는 다소 ‘먼 것’이기에 낯선 것에 대한 이질감과 거부감, 위협감을 기반으로 성립되는 편견일 수도 있다.
어찌 됐건 그렇게 편견에 의한 해석이 계속되다 보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조커 범죄’들도 결국 “이게 다 영화 〈조커〉 탓”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 실제 흐름은 다르다. 대중문화가 대중의 의식구조를 지배해 사회를 뒤흔드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문화는 어디까지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실사회 갈등과 딜레마들의 반영(反映)일 뿐이다. 이런저런 당대 대중문화 콘텐츠 방향은 현실 세계 상황의 원인이 아니라 증세(症勢)에 가깝다. 그러니 조커가 지금 상황을 만든 게 아니라 시대의 분노와 욕망들이 조커로 하여금 스크린 안에서 폭동을 일으키게끔 만든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난사 사건
끝으로, 위와 같은 언론 미디어 편견이 낳은 어처구니없는 사례 하나를 소개해보겠다. 사실 ‘조커 범죄’로서 언론 미디어에서 소개된 테러 사건은 일본 게이오선 사건이 최초는 아니다. 경범죄들을 제외하고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 사건으로 2012년 7월 미국 콜로라도주(州) 오로라시에서 벌어진 일명 ‘〈다크 나이트 라이즈〉 난사(亂射) 사건’을 들 수 있다.
오로라시에 위치한 한 극장에서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상영 중이던 상영관 안으로 괴한이 침입, 연막탄을 터트리고 총기를 난사해 극장 관객 12명이 사망하고 58명이 부상당한 대사건이다. 체포된 범인은 콜로라도대 의과대학원 박사과정을 막 자퇴한 24세 백인 청년 제임스 홈스로 밝혀졌다.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크로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 3편으로, 전편 〈다크 나이트〉에서는 예의 배트맨 숙적(宿敵) 조커가 등장해 광란적인 범죄 행각들을 보여주며 어마어마한 대히트를 기록한 바 있었다.
그러자 미국 언론 미디어들은 일제히 범인 홈스와 〈배트맨〉 시리즈와의 연관성,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악당 조커와의 연관성을 찾으려 발버둥 쳤다. 대부분 공식적인 경찰 조사 내용이 아니라 인터넷상에서 유포된 불투명한 정보들 바탕이었지만 그래도 개의치 않고 계속 기사를 쏟아냈다. 홈스가 영화 속 조커처럼 머리를 오렌지색으로 염색하고 있었다는 보도, 상영관 안에서 “나는 조커다!”라고 외치며 총을 난사했다는 보도 등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국내에서도 이를 받아 보도한 언론 미디어들이 적지 않다.
“나는 조커다!”는 가짜 뉴스
그러나 상황이 정리되고 보니 실제 정황은 그와 전혀 달랐다. “나는 조커다”라고 외치며 총기를 난사했다는 보도는 사실무근(事實無根)인 것으로 드러났다. 상영관 안에서 아무도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영화 속 조커처럼 머리를 오렌지색으로 염색했다는 부분은 기본적인 체크조차 미비한 보도였다. 〈다크 나이트〉 속 조커는 오렌지색이 아니라 녹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모습이었다. 결과적으로 범인과 조커와의 연관성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더 흥미로운 사실들도 밝혀졌다. 홈스는 조커에 열광하기는커녕 애초 폭력영화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고,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가벼운 코미디 영화들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폭력적인 게임조차 즐기지 않고 음악연주게임 ‘기타 히어로’ 등에 몰두해 있기도 했다. 대중문화 취향의 모든 면면이 언론 미디어에서 제시하는 스테레오 타입과 정반대였던 셈이다. 그는 그저 밀폐된 공간, 불이 꺼져 어두운 시야, 소지품 조사를 받지 않는 환경, 그리고 그해 최고 기대작 첫 상영이어서 가득 차 있을 것이 분명한 관객석 등 대량 학살에 가장 적합한 장소를 찾은 것뿐이었다. 이런 조건만 갖췄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아니라 〈닥터 지바고〉였어도 무방했으리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 같은 미국 언론 미디어의 무책임한 보도 행태에 대해 영화 전문 블로그 어워즈데일리 운영자 사샤 스톤은 “미국과 그 외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대량 학살의 원인은 모두 우울증과 소외감, 자기혐오(自己嫌惡)가 외부로 표출된 경우였다”며 “우리는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들여다보기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원인을 찾아내기를 원한다. 영화의 폭력성을 규제한다는 식으로 말이다”라고 지적했다.
본질에 직면하려는 태도 필요
돌이켜보면 지금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각종 갈등과 분노, 혐오 등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사실 마찬가지다. 실질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워 무력감(無力感)만 가중시키는 결론은 언론 미디어에서건 공적(公的)개념 차원에서건 가능한 한 피하려는 경향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렇게 본질(本質)을 외면한 채 “이게 다 대중문화 탓”처럼 쉽고 간편한 결론으로 발뺌하려다 보면 오히려 훨씬 위험한 결과로 치닫게 될 따름이다. 빈부격차로 인한 계층 갈등, 젠더 갈등, 세대 갈등, 이념 갈등 등 모든 갈등 지점들에서 그렇다.
본질에 직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조커〉나 그 밖에 모든 ‘문제적 대중문화 콘텐츠’ 뒤로 숨은 흐름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대중문화 현상들은 대부분 본질이 아니라 본질에 대한 ‘힌트’를 제공해주는 역할이라는 점을 혼동(混同)해선 곤란하다. 그때그때 벌어지는 갖가지 대중문화 현상들에 주목하고, 특히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는 콘텐츠의 면면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선으로 모두들 정신없을 시기이지만, ‘3월 9일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반드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사건 전말(顚末)은 이렇다. 일본의 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하는 대학입학공통테스트가 시행되던 1월 15일, 도쿄도 분쿄구에 위치한 도쿄대학교 야요이 캠퍼스 정문 앞에서 한 소년이 칼을 휘두르며 지나가는 행인들을 무차별 테러했다. 범인은 나고야에 사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 밝혀졌다. 그가 휘두른 흉기에 도쿄대 시험장을 향하던 남녀 고등학생 2명과 72세 남성이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다. 범인은 도쿄대 의학부에 입학하고 싶었으나 1년 전부터 성적이 떨어져 절망감에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그 자체로 충격적인 사건이다. 특히 한국과 유사한 ‘입시지옥(入試地獄)’ 현실을 반영하기에 한국 언론 미디어에서도 관심을 갖고 관련 기사들을 쏟아낸 바 있다. 그런데 정작 일본 측 ‘진짜’ 관심은 조금 다른 곳에 있다. 대중 반응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들을 살펴보면 분위기를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조커 범죄’
일본 대중은 체포된 범인의 소지품 중 칼 2자루와 톱 외에 가연성(可燃性) 액체가 담긴 페트병도 여러 개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경찰은 범인이 범행 직전 도쿄대 인근 지하철역인 도다이마에역에서도 수차례 방화(放火)를 시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 같은 날 작은 화재가 일어나거나 가연성 액체가 뿌려진 흔적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 같은 지하철 테러 시도 행각이 일본 대중에게는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도쿄 게이오선 지하철에서 벌어진 이른바 ‘조커 범죄’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이 ‘조커 범죄’는 지난해 10월 마지막 날, 젊은 층에서 인기인 서양 명절 핼러윈 데이에 일어났다. 이날 저녁 게이오선 전동차 안에서 한 24세 남성이 30cm 길이의 칼을 휘두르며 차량에 방화해 승객 17명이 부상했다. 72세 남성 한 명은 중태에 빠졌다. 테러가 일어나자 놀란 승객들이 출입문 코크를 열어 열차를 정차시키고 차내 창문을 통해 탈출하는 모습이 휴대폰 영상에 담겨 온라인상에 퍼지기도 했다.
체포된 범인은 보라색 양복 등 인기 만화 〈배트맨〉 속 악당 조커와 똑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대중문화 속 캐릭터들로 분장해 즐기는 핼러윈 데이 풍습 탓에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 범인은 경찰 조사에서 조커로 분장한 이유에 대해 “조커는 태연하게 사람을 해치우기에 그를 동경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범인의 면면(面面)은 조커를 주인공 삼은 2019년 작 미국 영화 〈조커〉 속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영화 속에서 훗날 범죄조직 두목 조커로 변신하는 3류 코미디언 아서 플렉은 직장에서 해고당한 뒤 지하철을 타고 가다 자신을 조롱하며 구타하던 양복 입은 여피족 일행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도망친다. 이게 아서 플렉이 조커로 거듭나게 되는 계기였던 셈이다. 조커를 동경하며 조커 의상을 입은 청년이 〈조커〉 속 사건과 같은 공간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모방범죄(模倣犯罪)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조커 범죄’의 심리적 動因
더 심각한 건 이 사건이 곧바로 또 다른 모방범죄를 낳았다는 점이다. 사건으로부터 불과 8일 뒤인 11월 8일, 이번에는 구마모토현(縣) 구간을 달리는 신칸센 열차 안에서 한 60대 남성이 객차 바닥에 모종의 액체를 뿌린 후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체포된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직전의 게이오선 사건에 영향받아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거기서 두 달 남짓 지나 또 다른 지하철 테러 미수 사건, 도쿄대 정문 앞 흉기 난동에 가려진 도다이마에역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현시점 일본 사회의 공포와 위협감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쯤 되면 가히 영화 모방범죄의 표본이자 대중문화 악영향(惡影響)의 전형적인 사례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소위 “이게 다 대중문화 탓”이라는 막무가내 논지(論旨)의 근거 사례 말이다.
실제 상황은 엄밀히 그와는 좀 거리가 있다. 일단 게이오선 사건 범인은 경찰 조사에서 같은 해 8월 일어난 오다큐선 흉기 난동 사건을 모방한 것이라 진술한 바 있다. 오다큐선 신주쿠행 쾌속급행열차 안에서 한 36세 남성이 마구잡이로 흉기를 휘두르고 열차 바닥에 불을 붙이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그러니 게이오선 사건은 애초 영화 모방범죄라 보기에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 대중이 게이오선 사건 중심으로 유사 사건들을 ‘조커 범죄’라 통칭(通稱)하는 이유가 있다. 오다큐선 사건 범인은 체포된 후 범행 이유에 대해 “나는 형편없는 인생을 살고 있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사실 열차 테러 사건 범인들 전반, 아니 어떤 식이건 무차별 테러를 시도한 범죄자 대부분이 이와 유사한 이유들을 댄다. 빈부격차(貧富格差)를 위시로 한 계층 갈등에 대한 분노, 경쟁사회에서 도태(淘汰)되었다는 절망감과 자포자기(自暴自棄) 심정 등이 테러의 심리적 동인(動因)이 된다. 비단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유사한 동인을 지닌 테러 범죄들을 조커라는 만화 캐릭터 이름으로 묶어 ‘조커 범죄’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커는 바로 ‘이런’ 갈등과 일탈(逸脫)심리 등을 한 몸에 담아내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일단 조커란 대체 어떤 캐릭터인지부터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셀(incel)’
1939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만화 〈배트맨〉에서 악당 조커는 완벽한 반(反)사회적 미치광이 캐릭터로 등장한다. 악당 캐릭터들에서 흔히 보이는 특이한 철학 같은 것도 없고, 사고(思考)의 맥락(脈絡)도 없으며, 범죄 패턴조차 일정치 않다. 그저 어떤 식으로건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붙은 별칭이 ‘혼돈(混沌)과 불확정성(不確定性)의 화신(化身)’이다. 이처럼 미스터리한 면면 탓에 조커는 〈배트맨〉은 물론 모든 슈퍼히어로 만화의 악당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인기 캐릭터가 됐다.
이 같은 인기에 힘입어 조커를 중심인물로 내세운 영화 〈조커〉에서는 만화 설정과 조금 다른 얘기를 한다. 처음으로 조커에게 아서 플렉이라는 ‘일반인’ 이름을 붙여놓고 그가 조커가 되기 전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던 시절 모습을 보여준다. 플렉은 사회적 ‘패배자’다. 궁핍(窮乏)한 싱글맘 가정에서 자라나 이벤트 대행업체에서 일하는 3류 코미디언으로서, 전혀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 각종 정신병과 신경질환에 시달려 일상생활도 버겁고, 와중에 병든 어머니까지 모시느라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개인적 삶도 평탄하질 않다. 위축되고 소심한 성격 탓에 친구도 없고, 여자친구도 없다.
아서 플렉은 세칭 ‘인셀(incel)’을 대표하는 캐릭터다. ‘인셀’은 ‘involuntary celibate’, 즉 ‘비자발적(非自發的) 순결주의자/독신주의자’를 가리키는 신조어(新造語)다. 저소득, 저학력, 신체나 성격적 문제 탓에 배우자나 성관계 대상을 찾지 못하는 성소외자(性疏外者)를 말한다. 이 같은 점 탓에 아서 플렉/조커는 그와 비슷한 처지의 남성들, 또는 가정을 꾸렸더라도 온갖 세파(世波)에 시달리는 남성들로부터 큰 공감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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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커〉 속의 조커는 많은 현대인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워너브라더스코리아 |
“네이버에서 관람객 평점을 쓴 이들 중 72%가 남자였다. 남성 관객이 매긴 평점(9.12)이 여성 관객 평점(8.76)보다 높았다. 관객 비율도 남성이 더 높았다. (중략) 20대부터 40대까지 남성 관객이 영화 〈조커〉의 주인공 아서(호아킨 피닉스)에게 뜨겁게 몰입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남초 커뮤니티에선 영화 〈조커〉를 보고 나서 자기 고백에 가까운 관람 후기를 올린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회사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내 모습 같아서 남 얘기 같지 않았다.’ ‘남자라서 쉽게 울지도 못하는데 〈조커〉를 혼자 보면서 모처럼 편하게 울었다.’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김경록(38)씨는 ‘〈조커〉를 보면서 짠하고 안타까웠다. 동시에 내가 조커처럼 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아서 플렉은 엄혹한 현실에서 비롯된 분노를 겹겹이 축적(蓄積)하다 마침내 폭발해 범죄자 조커의 길을 걷는다. 자신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비웃던 이들을 살해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TV로 시청하던 비슷한 ‘인셀’들이 그에 자극받아 거리로 나서 폭동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상당히 선동적이다.
공개 즉시 수많은 서구 미디어로부터 우려를 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영국 《텔레그래프》지(紙)는 아예 “이 영화는 금고에 봉인한 뒤 바다에 빠뜨려 개봉을 막아야 한다”고 썼을 정도다. 미국에서는 모방범죄를 우려해 제57회 뉴욕영화제 〈조커〉 상영 행사장에 자동소총을 든 경찰을 배치하고 관객들 소지품 검사까지 실시했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의 〈조커〉 상영관에도 경찰이 추가 배치됐다.
이런 우려에도 〈조커〉는 전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흥행 성공을 거뒀다. 만화 원작 슈퍼히어로 관련 영화가 큰 인기를 얻지 못하는 일본에서마저 그랬다. 극장에서만 50억6000만 엔을 벌어들이며 오히려 원작 주인공 배트맨 영화들을 웃도는 인기를 보였다. 그만큼 일본 대중에게도 〈조커〉와 아서 플렉은 ‘와닿는’ 구석이 많았다는 의미다. 그리고 영화 개봉으로부터 2년 뒤 조커 복장을 한 청년에 의해 게이오선 사건이 일어났다. 왜 수많은 열차 테러 사건 중 게이오선 사건이 유독 주목받으며 하나의 기점처럼 취급받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 노란 조끼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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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에는 ‘1% 대 99%’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사진=신화/뉴시스 |
이미 2019년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市) 노보리토역 인근에서 사상자 19명이 발생한 가와사키 흉기 난동 사건, 2018년 도쿄역에서 신오사카역으로 향하던 도카이도 신칸센 열차에서 20대 여성 2명이 중상을 입고 30대 남성 1명이 사망한 도카이도 신칸센 살인 사건 등이 있었다.
열차라는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보면 훨씬 많다. 2021년 11월 토메시 유아원 흉기 난입 사건이 가장 잘 알려졌다. 대부분 사건들 동인은 앞선 ‘조커 범죄’로서 묶일 수 있는 수준으로 비슷비슷했다.
더 특기(特記)할 만한 점은, 이런 상황이 비단 일본에만 그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테러가 아니라 집단적인 시위 또는 폭동의 형태로서 다르긴 하지만, 근 10년래 계층 갈등과 사회적 불평등에 기반한 대중의 분노가 세계 곳곳에서 전에 없이 크게 터져 나오는 분위기다.
2011년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령(占領) 시위를 그 시작으로 볼 수 있다. ‘1% 대 99%’ 구호가 처음 등장한 전형적인 계층 갈등 시위다. 같은 해 영국 런던 폭동 역시 처음엔 흑인 인종차별 문제로 불거졌으나 점차 백인 저소득층으로 옮아 붙어 이내 성격이 달라졌다. 이듬해에는 프랑스 아미엥시에서 유사한 폭동이 발생했고, 유럽 전역에 걸쳐 비슷한 소요사태들이 일어나다 결국 2018년 ‘노란 조끼 운동’으로 일컬어지는 프랑스 파리 시위에까지 이르렀다. 이 역시 본질적으로는 정부의 부유세 인하와 유류세·자동차세 인상 등 조세개혁(租稅改革)에 대한 불만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부자는 더욱 부자로, 빈자(貧者)는 더욱 빈자로 모는 정책이라는 비판 속에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폭력 시위로 변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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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흥행도 세계 각국에 만연한 사회갈등과 관련이 있다. |
지난 몇 년간 한국 영상콘텐츠의 세계적 약진(躍進) 역시 이 같은 세계 대중 정서에 힘입었다고 볼 수도 있다. 세계 대중이 계층 갈등과 사회적 불평등에 전에 없이 민감하게 반응하니 그를 다룬 대중문화 콘텐츠도 주목을 받게 되고, 그러다 보니 1970년대부터 꾸준히 계층 갈등 테마에 천착(穿鑿)해 공포나 액션 등 장르 콘텐츠까지 그를 바탕으로 전개해온 한국 콘텐츠가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됐다는 것.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에 대한 해외의 주목과 현상적 인기 원인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 이처럼 위태로운 현실세계 흐름의 ‘진짜’ 원인은 또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절대다수 언론 미디어가 제시하는 것은 세계적 경제 불황과 그로 인한 실업자 증가 추세다. 특히 2010년대 상황에 있어선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여파와 유로화 위기로 인한 유로존 침체(沈滯) 등이 주원인으로 지목된다. 물론 원칙적으로 맞는 얘기다.
그러나 경제 상황에 있어 수차례 굴곡(屈曲)을 겪어온 지난 10여 년 내내 이 같은 부정적 대중 의식이 전 세계적으로 일관되게 심화(深化)되는 추세로만 가고 있다는 점을 온전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주된 갈등을 겪고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소득불균등 정도를 가늠하는 지니계수의 2017~2020년 수치에서 양호한 편에 속하는 프랑스(0.292), 이탈리아(0.330), 일본(0.334), 영국(0.366) 등 선진국들이다. 한국 역시 지니계수로는 ‘소득격차가 적은 편’으로 분류되는 0.345다.
한국은 다행히 관련 테러 범죄나 폭동이 일어나는 분위기까지는 아니지만, 인터넷상에선 이미 ‘전쟁’이 벌어진 지 오래다.
‘카·페·인 우울증’
한마디로, 적어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는, 세계적으로 대중 의식이 액면 현실 상황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걷고 있었다고 볼 만하다. 현실과의 괴리(乖離)라고까지 보기는 힘들어도, 분명 또 다른 외부 요인들이 꾸준히 개입돼 현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점점 부정적인 형태로 만들어가고 있다 볼 여지가 많다.
이에 2008년 미국 대선을 끼고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성장한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SNS)의 영향을 거론하는 의견이 점차 대두(擡頭)되는 상황이다. 사생활 면에서 개인과 개인 간 일정 수준 이상 거리가 있어 서로의 삶을 잘 알 수 없었던 과거와 달리, 2010년대 들어서부터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서로 다른 계층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 그렇게 서로 간 격차가 너무 낱낱이 드러나고, 그만큼 상대적 박탈감(剝奪感)도 점차 극심해지기 시작했다. 견물생심(見物生心) 탓에 부유층이 사들이는 명품 등에 대한 소비욕구도 점점 과도해지고, 그를 부유층만큼 소유하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하는 흐름도 점차 심화됐다.
특히 개인 간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멀었던 서구 개인주의 사회에서 이처럼 급작스런 밀착감(密着感)이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5년 즈음부터는 ‘카·페·인 우울증’이란 말이 돌아 언론 미디어에서도 종종 다뤄진 바 있다.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다 보면 어느새 서로 간 격차를 확인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우울증 상태가 지속된다는 신종 현상을 가리킨다.
이 같은 부작용(副作用)에 대한 연구도 사실 일찌감치 시작됐다. 2012년 미국 미주리과학기술대 연구팀이 소셜미디어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일수록 우울증을 앓을 확률이 높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2015년 뉴질랜드 오클랜드대 연구팀은 페이스북 애착도가 높을수록 상향적(上向的) 사회비교 양상이 높게 나타나 스스로의 생활만족도가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는 점을 밝혔다. 소셜미디어 속 타인들 삶과 현실 속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 불행감과 분노를 키워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프랜시스 하우건 전(前) 페이스북 프로덕트 매니저는 지난해 10월 영국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분노와 증오는 페이스북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가장 쉬운 방법이며 (페이스북 측은) 알고리즘을 갖고 노는 법을 알고 있다”면서 “이는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넣고 증오를 부채질한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게 다 대중문화 탓?
상황이 이런데도 정작 소셜미디어 과열이 오늘날 여러 사회 문제를 야기(惹起)하고 있다는 주장을 언론 미디어에서 찾아보긴 힘들다. 반면 현실적으로나 정황적으로 그럴 성싶지 않은 “이게 다 대중문화 탓”은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등장한다. 어쩌면 뉴미디어 환경은 아직 낯설어 그 실체를 가늠하기 힘든 반면, “이게 다 대중문화 탓”은 지난 반세기 내내 ‘늘 해왔던 것’이기에 나태(懶怠)한 원인 제시로서 반복하는 상황일 수 있다. 또 어쩌면 40대 이상 기성세대 입장에서 젊은 층 중심으로 소비되는 대중문화는 다소 ‘먼 것’이기에 낯선 것에 대한 이질감과 거부감, 위협감을 기반으로 성립되는 편견일 수도 있다.
어찌 됐건 그렇게 편견에 의한 해석이 계속되다 보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조커 범죄’들도 결국 “이게 다 영화 〈조커〉 탓”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 실제 흐름은 다르다. 대중문화가 대중의 의식구조를 지배해 사회를 뒤흔드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문화는 어디까지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실사회 갈등과 딜레마들의 반영(反映)일 뿐이다. 이런저런 당대 대중문화 콘텐츠 방향은 현실 세계 상황의 원인이 아니라 증세(症勢)에 가깝다. 그러니 조커가 지금 상황을 만든 게 아니라 시대의 분노와 욕망들이 조커로 하여금 스크린 안에서 폭동을 일으키게끔 만든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 난사 사건
끝으로, 위와 같은 언론 미디어 편견이 낳은 어처구니없는 사례 하나를 소개해보겠다. 사실 ‘조커 범죄’로서 언론 미디어에서 소개된 테러 사건은 일본 게이오선 사건이 최초는 아니다. 경범죄들을 제외하고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 사건으로 2012년 7월 미국 콜로라도주(州) 오로라시에서 벌어진 일명 ‘〈다크 나이트 라이즈〉 난사(亂射) 사건’을 들 수 있다.
오로라시에 위치한 한 극장에서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상영 중이던 상영관 안으로 괴한이 침입, 연막탄을 터트리고 총기를 난사해 극장 관객 12명이 사망하고 58명이 부상당한 대사건이다. 체포된 범인은 콜로라도대 의과대학원 박사과정을 막 자퇴한 24세 백인 청년 제임스 홈스로 밝혀졌다.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크로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 3편으로, 전편 〈다크 나이트〉에서는 예의 배트맨 숙적(宿敵) 조커가 등장해 광란적인 범죄 행각들을 보여주며 어마어마한 대히트를 기록한 바 있었다.
그러자 미국 언론 미디어들은 일제히 범인 홈스와 〈배트맨〉 시리즈와의 연관성,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악당 조커와의 연관성을 찾으려 발버둥 쳤다. 대부분 공식적인 경찰 조사 내용이 아니라 인터넷상에서 유포된 불투명한 정보들 바탕이었지만 그래도 개의치 않고 계속 기사를 쏟아냈다. 홈스가 영화 속 조커처럼 머리를 오렌지색으로 염색하고 있었다는 보도, 상영관 안에서 “나는 조커다!”라고 외치며 총을 난사했다는 보도 등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국내에서도 이를 받아 보도한 언론 미디어들이 적지 않다.
“나는 조커다!”는 가짜 뉴스
그러나 상황이 정리되고 보니 실제 정황은 그와 전혀 달랐다. “나는 조커다”라고 외치며 총기를 난사했다는 보도는 사실무근(事實無根)인 것으로 드러났다. 상영관 안에서 아무도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영화 속 조커처럼 머리를 오렌지색으로 염색했다는 부분은 기본적인 체크조차 미비한 보도였다. 〈다크 나이트〉 속 조커는 오렌지색이 아니라 녹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모습이었다. 결과적으로 범인과 조커와의 연관성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더 흥미로운 사실들도 밝혀졌다. 홈스는 조커에 열광하기는커녕 애초 폭력영화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고,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가벼운 코미디 영화들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폭력적인 게임조차 즐기지 않고 음악연주게임 ‘기타 히어로’ 등에 몰두해 있기도 했다. 대중문화 취향의 모든 면면이 언론 미디어에서 제시하는 스테레오 타입과 정반대였던 셈이다. 그는 그저 밀폐된 공간, 불이 꺼져 어두운 시야, 소지품 조사를 받지 않는 환경, 그리고 그해 최고 기대작 첫 상영이어서 가득 차 있을 것이 분명한 관객석 등 대량 학살에 가장 적합한 장소를 찾은 것뿐이었다. 이런 조건만 갖췄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아니라 〈닥터 지바고〉였어도 무방했으리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 같은 미국 언론 미디어의 무책임한 보도 행태에 대해 영화 전문 블로그 어워즈데일리 운영자 사샤 스톤은 “미국과 그 외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대량 학살의 원인은 모두 우울증과 소외감, 자기혐오(自己嫌惡)가 외부로 표출된 경우였다”며 “우리는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들여다보기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원인을 찾아내기를 원한다. 영화의 폭력성을 규제한다는 식으로 말이다”라고 지적했다.
본질에 직면하려는 태도 필요
돌이켜보면 지금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각종 갈등과 분노, 혐오 등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사실 마찬가지다. 실질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워 무력감(無力感)만 가중시키는 결론은 언론 미디어에서건 공적(公的)개념 차원에서건 가능한 한 피하려는 경향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렇게 본질(本質)을 외면한 채 “이게 다 대중문화 탓”처럼 쉽고 간편한 결론으로 발뺌하려다 보면 오히려 훨씬 위험한 결과로 치닫게 될 따름이다. 빈부격차로 인한 계층 갈등, 젠더 갈등, 세대 갈등, 이념 갈등 등 모든 갈등 지점들에서 그렇다.
본질에 직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조커〉나 그 밖에 모든 ‘문제적 대중문화 콘텐츠’ 뒤로 숨은 흐름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대중문화 현상들은 대부분 본질이 아니라 본질에 대한 ‘힌트’를 제공해주는 역할이라는 점을 혼동(混同)해선 곤란하다. 그때그때 벌어지는 갖가지 대중문화 현상들에 주목하고, 특히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는 콘텐츠의 면면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선으로 모두들 정신없을 시기이지만, ‘3월 9일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반드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임을 부정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