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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책으로 세상 읽기

헨리 애슈비 터너2세의 《히틀러의 30일》

“국가 다스리는 사람 선택할 때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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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자신의 목적에 도움이 되면 관습·전통을 존중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그 狂的인 극단성을 감출 줄 알아

⊙ 당대 독일 정치인들, 개인적인 이해관계, 黨利黨略, 전체주의 정당 나치에 대한 無知 때문에 히틀러 집권 용인
⊙ 前 총리 파펜, 권력 탈환 위해 붕괴 직전에 있던 히틀러에게 접근… 힌덴부르크 대통령 설득
⊙ 파펜·후겐베르크 등 보수정치인들, 히틀러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
⊙ 히틀러, “일단 권력을 잡으면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을 것”
⊙ “개인적인 친근감과 혐오감, 상처받은 마음, 우정이 깨지면서 느끼는 실망감, 복수심이 정치에 지대한 영향”
  “히틀러는 극악한 독재자이지만,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선출된 합법적 지도자였다.”
 
  히틀러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나오는 얘기다. 오해다. 히틀러는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선출되지 않았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한 번도 집권할 수 있을 정도로 선거에서 승리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할 무렵, 나치당은 곧 독일 정치 무대에서 퇴출(退出)되기 직전의 상황으로 몰려 있었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어떻게 해서 정권을 잡을 수 있었을까? 제3제국 연구의 1인자로 널리 알려진 헨리 애슈비 터너2세의 《히틀러의 30일》(원제: Hitler's thirty days to power; January 1933)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30일간에 대한 탐색을 통해 히틀러가 어떻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마침내 공화국을 구했다”
 
  이 책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1933년 새해 첫날, 그동안 온갖 포위 공격에 시달린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옹호자들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탄생한 지 얼마 안 된 이 새로운 국가 체제는 지난 3년 동안 갈수록 목청을 높이는 반민주 세력의 공격에 시달렸고,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인 세력은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당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조류가 바뀐 것 같았다. 권위 있는 《프랑크푸르트 차이퉁》은 새해 사설을 통해 “마침내 민주국가에 대한 나치의 공격을 물리쳤다”고 선포했다. 유서 깊은 《포시셰 차이퉁》의 논설위원은 “마침내 공화국을 구했다”고 선언했다. 14년 전, 공화국이 탄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정당인 사회민주당의 기관지 《전진》은 ‘히틀러의 부상과 침몰’이라는 사설을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쾰른의 주요 신문인 《쾰른인민일보》는, 1년 전만 해도 히틀러가 절대 집권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야말로 무모할 정도로 대담해 보였는데, 이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도했다. 《베를린일보》의 기자는 미래의 후손들에게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 해줄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다가 “전 세계에서, 가만있자 그의 이름이 뭐였더라? 아, 그렇지!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 얘기했지.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냐고? 사라졌어!”라고 말하면 되겠다고 했다.>
 
  1933년 새해 첫날 민주국가, 공화국이 구원되었다고 환성을 지르면서 먼 훗날 히틀러는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환호했던 언론들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것이었다. 정권을 잡지 못할 것이라던 히틀러는 그달이 가기 전에 총리가 됐다. 민주국가 바이마르공화국은 구원되지 못했고, 히틀러는 이후 12년간 정권을 잡고 그 악명(惡名)을 역사에 남겼다. 도대체 그 30일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었을까?
 
 
  ‘역사의 사생아’ 바이마르공화국
 
  패전(敗戰)과 반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1919년에 탄생한 바이마르공화국은 축복받지 못한 역사의 사생아(私生兒)였다. 독일에 천문학적인 배상금과 군(軍) 해체에 가까운 군비축소를 강요한 베르사유조약은 독일인들에게 깊은 굴욕감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그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한 사회민주당 정치인들은 국적(國賊)이었고, 그들이 만들고 주도한 바이마르공화국은 ‘태어나서는 안 되는 나라’였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1847~1934년)는 바이마르공화국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총사령관으로 국민적 영웅(다분히 ‘만들어진 영웅’이었지만)이었던 그는 그 이력과 당당한 체구, 위엄 덕분에 ‘황제의 대체재(代替財)’가 될 수 있었다. 공공연히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주장하는 옛 독일제국의 원수(元帥)가 공화국의 원수(元首)가 된 것은 역사의 코미디였다. 그는 공화국에 대해 일말의 애정도 없었고, 민주공화국의 정치에 대한 이해력도, 난마(亂麻)처럼 얽힌 상황을 헤쳐나갈 정치력도 없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시스템은 순수한 내각책임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흔히 말하는 ‘2원집정제(二元執政制)’에 가까웠다.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총리 임면권(任免權), 비상조치권 등의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1930년부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파당(派黨)정치로부터의 탈피’라는 명분으로 의회 다수당의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가 간택한 사람을 총리로 임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임명된 총리는 의회가 아니라 대통령의 비상조치권에 의지해 통치했다. 이렇게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고 대통령에게 의존해서 통치하는 총리를 ‘대통령 총리’라고 했다. 반면에 의회 다수당의 지지에 의해 선출되는 총리를 ‘의회 총리’라고 했다.
 
  힌덴부르크가 임명한 첫 번째 ‘대통령 총리’는 그래도 무난한 사람이었다. 보수정당인 가톨릭중앙당(현 독일 기독교민주당의 전신) 출신인 하인리히 브뤼닝(1885~1970년)은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 사회민주당은 브뤼닝 내각이 더 반동적(反動的)인 우파 내각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 ‘대통령 총리’ 브뤼닝을 묵인(默認)했다. 이것이 바이마르공화국이 정상적인 의회민주주의에서 일탈(逸脫)하는 시작이었다.
 
 
  파펜과 슐라이허
 
쿠르트 폰 슐라이허
  브뤼닝 내각은 세계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하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그 주변의 보수적 참모·정치인들은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좌파들에게 타협적인 브뤼닝이 못마땅했다. 결국 힌덴부르크는 1932년 5월 브뤼닝을 해임하고 프란츠 폰 파펜(1879~1969년)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그가 총리가 되자 독일 정계는 경악했다. 육군 중령 출신인 파펜은 프로이센주(州) 의회 의원이 정치 경력의 전부인 무명(無名)인사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으로 따진다면 경기도 의회 의원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총리가 된 셈이라고 할까? 프로이센이 바이마르공화국의 5분의 3에 달하는 큰 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주독(駐獨) 프랑스 대사였던 앙드레 프랑수아-퐁세는 “파펜이 총리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아무도 믿지 않았고, 나중에 사실로 확인되자 다들 웃거나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회고했다. 게다가 파펜은 소속당인 가톨릭중앙당의 허락을 받지 않고 총리직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쫓겨나듯 탈당(脫黨)을 해야 했다.
 
  파펜을 총리로 추천한 사람은 힌덴부르크의 측근이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1882~1934년) 장군이었다. ‘제복을 입은 스핑크스’ ‘장군의 견장을 찬 물음표’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음습한 모사(謀士)꾼 슐라이허는 당초 자기의 오랜 친구인 파펜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국방장관으로 실권(實權)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총리가 된 파펜은 늙은 대통령에게 열심히 아부했고, 대통령은 여기에 완전히 넘어갔다. 이제 힌덴부르크의 제일가는 총신(寵臣)은 국방장관 슐라이허가 아니라 총리 파펜이었다. 슐라이허로서는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힌덴부르크, 파펜, 슐라이허… 이 세 사람이 히틀러가 정권을 잡는 데 있어 크게 도움이 된 1등 공신들이었다.
 
 
 
나치의 등장

 
  1920년 창당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은 한동안 정당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극우(極右)분자들의 서클에 불과했다. 1923년 11월 8일 히틀러는 나치 무장돌격대원 600명을 이끌고 바이에른주 정부를 전복(顚覆)하려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히틀러는 이 사건으로 1년간 수감(收監)생활을 했지만, ‘재판투쟁’을 통해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浮上)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저술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감옥에서 나온 히틀러는 합법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공화국을 파괴하기 위해 바로 그 공화국의 민주헌법이 보장하는 광범한 시민권과 정치적 자유를 이용해 권력을 추구’하기로 한 것이다.
 
  1928년 총선에서 나치당은 2.6%를 득표, 연방의회 전체 의석 491석 가운데 12석을 차지했다. 이마저도 지역구가 아니라 비례대표제 덕분에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1929년 10월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자 나치의 선동이 먹혀들기 시작했다. 저자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부 정책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었던 나치당은 이 나라의 불행을 모두 공화주의자들 탓으로 돌리며 온갖 번드레한 해결책으로 인기를 얻었다. 이들은 약속한 것을 당장 이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맘껏 말 잔치를 벌였고, 얼마 안 되는 유대인 집단에 대한 중상모략을 일삼아 반유대주의자들의 지지도 얻었다.”
 
  그 결과 1930년 총선에서 나치당은 전보다 8배나 많은 표를 얻어, 전체 577석 가운데 107석을 차지했다. 히틀러는 1932년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그는 현직인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다. 2차 투표에서 히틀러는 36.1%나 득표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개 상병(上兵)이었던 히틀러가 전쟁 당시에는 쳐다볼 수도 없었던 원수(元帥)에 버금가는 정치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히틀러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정말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은, 자신의 목적에 도움이 되면 언제든지 틀에 박힌 관습이나 전통을 존중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그 광적인 극단성을 감출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것이 이익이 된다 싶으면 아주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심지어는 아주 겸손한 듯이 꾸밀 수 있었다. 자신의 극단적인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해야 할 때에는 본심을 숨겼다. 그래서 히틀러는 한 번도 정부 요직에 선출되지 못했으면서도 1932년에는 독일 정치에서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대공황이 최고조에 달했던 1932년 7월 말에 실시된 총선에서 나치당은 37.4%를 득표, 230석을 차지하면서 원내(院內) 제1당이 되었다. 기고만장해진 히틀러는 총리직을 요구했다.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원내 1당인 나치당 지도자인 자신이 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공연히 민주주의 폐기를 주장해오던 자가 민주주의자로 돌변한 것이다. 파펜은 부총리 자리를 제안하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직접 히틀러를 만나 설득했지만, 히틀러는 총리 자리만을 요구했다. 일개 ‘상병’이 몽니를 부리자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라는 카드를 포기했다.
 
 
  마지막 자유선거
 
  그러자 당의 2인자인 헤르만 괴링(1893~1946년)을 국회의장 자리에 앉힌 나치당은 숙적(宿敵)인 공산당과 손잡고 파펜 내각을 불신임(不信任)해버렸다. 1932년 11월 새로운 총선이 실시됐다. 나치당은 더 큰 승리를 꿈꾸었지만, 오산(誤算)이었다. 나치당은 4개월 전에 비해 200만 표를 잃었다. 의석은 34석이 줄어든 196석에 그쳤다. 유권자들이 넉 달 만에 나치당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은 나치당이 7월 총선에서 1당이 되었지만 집권에 실패했고, 범(汎)우파연합을 형성하기를 바라는 우파 유권자들의 뜻에 반해 전통적인 우파 세력을 대변하는 독일국민당 등과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었다.
 
  이 총선은 바이마르공화국 체제하에서 치러진 마지막 자유선거였는데, 이 선거에서 독일인의 3분의 2는 나치즘을 거부했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티머시 스나이더는 이렇게 경고한다.
 
  “모든 선거는 마지막 선거가 될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표를 던진 사람의 생애에서 마지막 선거일 수 있다.”
 

  11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여전히 원내 1당이었지만, 사회민주당은 121석으로 원내 2당, 공산당은 50석으로 원내 3당이 되었다. 만일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쳤다면 나치당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은 같은 좌파 정당이면서도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다. 이후 정국의 전개 과정에서 두 당은 히틀러의 집권을 두 눈 뜨고 지켜보았고, 그 결과 처절한 대가(代價)를 치러야 했다.
 
  파펜은 정통 보수 세력을 자처하는 독일국민당에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독일국민당은 52석을 얻는 데 그쳤다. 결국 파펜은 사의(辭意)를 표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히틀러에게 다른 정당들의 지지를 확보해 조각(組閣)을 해보라고 제안했다. 히틀러에게 ‘의회 총리’가 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함께 내각에 참여하는 다른 정당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의회 총리’가 되기보다는, 대통령의 비상조치권에 의지해 멋대로 통치할 수 있는 ‘대통령 총리’가 되기를 원했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가 이끄는 대통령 내각이 결국은 독일 국민들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증폭시킬 뿐인 당 독재가 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를 거부했다. 이 우려는 훗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현실이 되고 만다.
 
 
  슐라이허, 총리가 되다
 
  11월 총선에서 파펜이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자 나선 인물이 있었다. 바로 국방장관 슐라이허였다. 그는 6개월 전 자신이 총리 자리에 올려놓았던 파펜을 음해(陰害)하면서, 나치당과 공산당이 조성한 내란(內亂)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자기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2년 12월 2일 슐라이허를 총리로 임명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마음은 여전히 쫓겨난 파펜에게 있었다. 파펜 역시 대통령의 이런 마음을 이용해 권좌로 복귀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슐라이허는 어떻게든 나치당을 내각에 참여시키려 애썼다. 그는 과거에 혁명정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이 국정(國政)에 참여하게 되면서 책임 있는 의회주의 정당이 된 것처럼, 나치당도 정권에 참여하면 순치(馴致)될 것으로 판단했다. 저자 터너2세의 지적처럼 이러한 기대는 공화제를 지지하는 사회민주당과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나치즘의 큰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슐라이허는 히틀러에게 부총리 자리를 주어 입각시키려 했으나, 히틀러는 여전히 자신이 총리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자 슐라이허는 나치당 내에서 히틀러 다음으로 대중적 인기가 있던 그레고르 슈트라서(1892~1934년)에게 접근했다. 슈트라서는 이에 화답해 11월 총선 이후 나치당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 슐라이허 내각과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권 가능성이 점점 멀어지면서 춥고 배고파진 나치당원들 가운데서는 슈트라서에게 호응하는 자들이 많았다. 히틀러는 자신의 카리스마로 슈트라서의 반란을 진압하고 당권(黨權)을 공고히 했지만, 그로 인한 파장은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은 1933년 새해를 맞았다. 앞에서 소개한 ‘나치즘의 종언(終焉)’에 대한 언론의 기대가 쏟아져 나온 것은 이러한 배경 아래서였다.
 
 
  파펜과 히틀러의 제휴
 
히틀러와 파펜.
  나치의 발상지인 뮌헨에서 나치당을 사찰(査察)하고 있던 정치경찰도 1932년 12월 말 나치당의 사기에 대해 “이미 최고점을 지나 이제는 전망이 밝지 않다는 견해가 국가사회주의 당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고 진단했다. 나치당 역시 1932년 11월 총선 이후 자기들이 모을 수 있는 표의 한계치에 도달했다는 내부 분석을 내놓았다.
 
  재정적 어려움이 계속되면서 나치당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SA) 대원들이 갈색 제복을 입은 채로 깡통을 들고 행인들에게 구걸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괴링은 미국 은행에서 돈을 빌려오는 방안을 궁리했다. 일부 지방에서는 히틀러에게 반대하는 돌격대원들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이 시기를 연구한 한 역사가는 “히틀러의 정권 장악으로 하루아침에 운명이 달라지기 직전에 돌격대는 거의 붕괴 직전에 있었다”고 했다. 돌격대뿐 아니라 나치당 자체가 거의 붕괴 직전에 있었다.
 
  이때 히틀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바로 전 총리 파펜이었다. 파펜은 자신을 권력의 자리에 올려놓았다가 끌어내린 슐라이허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혀 있었다. 파펜과 히틀러는 1933년 1월 4일 쾰른에 있는 친(親)나치 은행가 쿠르트 폰 슈뢰더 남작의 저택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두 사람은 슐라이허 내각을 무너뜨리고 나치를 중심으로 범(汎)보수정당 연합정권을 수립해야 한다는 데에는 쉽게 합의했다. 하지만 누가 총리가 되어야 하느냐를 놓고는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파펜은 자신이 ‘꽉 잡고 있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여전히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는 데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가 총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하지만 곤궁에 처해서도 히틀러는 자기가 총리를 맡아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히틀러의 강철 같은 권력의지 앞에 결국 파펜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히틀러를 총리로 앉히는 대신 자신은 그 밑에서 실세(實勢) 부총리가 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문고리 권력’, 히틀러에게 넘어가다

 
오토 마이스너 대통령비서실장
  총리 슐라이허는 자기와 의회가 충돌할 경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전임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비상조치권을 발동하거나 의회를 해산해서 자신의 내각을 지지해줄 것으로 믿었다. 착각이었다. 힌덴부르크는 자기가 총애하는 파펜을 밀어낸 슐라이허를 미워하고 있었다. 힌덴부르크에게 영향력이 큰 그의 아들 오스카르는 한때 슐라이허의 친구였으나, 입이 가벼운 슐라이허에게 개인적인 모욕을 당한 이후 그의 적으로 돌아서 있었다. ‘영혼 없는 관료’인 대통령비서실장 오토 마이스너(1880~1953년)도 한때 슐라이허와 가까웠으나 슐라이허의 실각(失脚)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차기 권력’에 빌붙기로 결심했다.
 
  ‘문고리 권력’인 오스카르 폰 힌덴부르크와 오토 마이스너는 1월 22일 저녁 비밀리에 히틀러 및 괴링과 회동했다. 괴링은 마이스너에게 “히틀러가 총리가 되기만 하면, 나치는 내각에서 한 자리만 줘도 만족할 것”이라면서 다른 각료직은 전문가나 다른 정당 출신 정치인들에게 할당할 것이며, 외무장관과 국방장관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선택에 맡기겠다고 다짐했다. 괴링은 또 “히틀러 내각이 궁극적으로는 왕정을 복고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속삭였다. 확고한 왕정주의자인 힌덴부르크를 유혹하기 위한 발언이었음은 물론이다.
 
  다음 날인 1월 23일 힌덴부르크를 찾아온 파펜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자고 졸랐다. 하지만 히틀러를 체신장관감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고 있던 힌덴부르크는 여전히 망설였다. 대통령비서실장 마이스너는 히틀러가 내각을 이끌고 파펜이 부총리가 되는 것이 정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며, 나치에 정부를 책임지게 하면 혁명을 부르짖는 선동을 그만두고 점진적인 발전의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속삭였다.
 
  이 무렵 의회는 슐라이허 총리에 대한 불신임 표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슐라이허는 1월 23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찾아와 의회 해산을 비롯해 자신의 내각을 연장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면서 지지를 요청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이를 거절했고, 슐라이허는 1월 28일 사임했다.
 
  주독 프랑스 대사 프랑수아-퐁세는 슐라이허의 몰락에 대해 “슐라이허는 독일에 감돌고 있는 여러 가지 흐름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그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우세할지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가 자기 길을 선택한 것 같다”면서 “지금 독일에 필요한 것은 흐름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흐름을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이 책의 저자인 터너2세는 “이 사람(슐라이허)에게는 이렇게 큰 도박에서 이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가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바로 권력욕이었다”고 말했다.
 
 
  히틀러 내각 출범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내각. (앉은 사람) 괴링 항공장관, 히틀러 총리, 파펜 부총리. (서 있는 사람, 왼쪽부터) 노이라트 외무장관, 게레케 일자리 특임장관, 크로지크 재무장관, 프리크 내무장관, 블롬베르크 국방장관, 후겐베르크 경제장관.
  힌덴부르크는 여전히 ‘파펜 총리’에 미련을 두었지만, 파펜 본인과 아들 오스카르, 비서실장 마이스너 등이 ‘히틀러 총리’를 강권하자 결국 거기에 넘어가고 말았다. 괴링은 나치는 대통령의 권한을 존중할 것이며 헌법을 어기거나 군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엄숙히 다짐, 대통령을 안심시켰다. 물론 이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다.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히틀러 내각은 범보수연합을 지향하는 듯했다. 파펜은 총리대리(부총리) 겸 프로이센주 경찰청장이 됐다. 독일국민당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1865~1951년)는 연방정부 및 프로이센주 정부의 경제장관과 농무장관, 즉 4개의 장관 자리를 꿰찼다. 오랫동안 권력을 추구했지만 대중적 인기가 없어 꿈을 이루지 못했던 그는 이렇게 히틀러 정권으로 가는 양탄자를 깔아줌으로써 권력의 한 자락을 잡았다. 극우단체인 철모단 공동대표 프란츠 젤테는 노동장관이 됐다.
 
  당색(黨色)이 없는 전문 관료들인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외무장관, 루츠 슈베린 폰 크로지크 재무장관, 파울 폰 엘츠-귀베나흐 체신장관 겸 교통장관, 귄터 게레케 일자리 담당 특임장관 등은 유임됐다. 슐라이허가 겸직했던 국방장관 자리는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장군에게 돌아갔다. 그는 충실한 직업군인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은 친나치 인사였다.
 
  나치당은 총리 히틀러 외에 두 사람이 입각했다. 빌헬름 프리크가 연방내무장관을, 헤르만 괴링이 연방무임소장관 겸 항공장관, 프로이센주 내무장관이 되었다. 괴링은 프로이센주 내무장관을 맡은 덕분에 수도 베를린을 비롯해 독일의 5분의 3에 해당하는 프로이센주의 경찰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괴링은 2월 27일의 국회 방화사건 이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반대파를 탄압하며 3월 5일의 선거에서 나치가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데 자신의 권력을 십분 활용했다. 경찰력의 편파적 운용 역시 오늘날 한국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법무부 장관은 가톨릭중앙당 정치인을 입각시키기 위해 비워둔 것으로 발표했지만, 대통령과 국민들을 속이기 위한 정치적인 쇼일 뿐이었다.
 
 
  “나치 정부도, 혁명 정부도 아니다”
 
사회민주당 기관지 《전진》에 실린 만평. 후겐베르크가 파펜에게 “저 앞에 있는 신참은 자기가 바라는 대로, 자기가 운전대를 잡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잘됐어. 우리는 힘 안 들이고 갈 수 있으니까!”라고 말하고 있다.
  히틀러 총리 임명을 전후해서 슐라이허 전 총리 겸 국방장관이 쿠데타를 획책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군부 쿠데타설은 사회민주당 등이 히틀러 내각 출범에 반대할 마지막 가능성을 차단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사회민주당 등은 군사정권보다는 범보수 연합정권이 나으며, 어찌 됐건 원내 1당인 나치당과 여러 보수정치 세력의 지지에 기반을 둔 히틀러 내각의 출범으로 비정상적인 ‘대통령 총리’ 시스템이 종식되고 ‘의회 총리’ 시스템이 회복되었다고 판단했다.
 
  베를린의 한 신문사에서 일하던 한 젊은 유대인은 훗날 “거의 아무런 느낌도 없었고, 그것이 내게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베를린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외교관은 일기에 “히틀러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나치 정부도 아니고 혁명 정부도 아니다. 제3제국은커녕 2와 2분의 1 제국도 안 된다”고 적었다. 이 책의 저자 터너2세는 “민주주의의 주적이 정부의 수반이 되었는데도 공화국의 옹호자들은 히틀러의 총리 취임에 대해 저항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것에 반대하는 시위조차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1933년 1월 30일 11시 반쯤 총리로 임명된 히틀러는 ‘어떤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아도 새빨간 거짓말임이 틀림없는 말’로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없애버리겠다고 맹세한 공화국의 헌법과 법률을 지키고 수호하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보다 앞선 1932년 10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연설하면서 또 다른 맹세를 했었다. “일단 권력을 잡으면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빼앗아가도록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맹세였다. 히틀러는 앞의 맹세는 지키지 않았지만 뒤의 맹세는 지켰다.
 
  사회민주당 기관지 《전진》도 1933년 2월 1일 자에 ‘후겐베르크의 운전학원’이라는 만평을 내보냈다. 이 만평을 보면 히틀러가 운전대를 잡기는 했지만 후겐베르크가 뒷좌석에서 또 다른 핸들을 쥐고 있는 것이 보인다. 파펜과 후겐베르크도 그렇게 생각했다. 파펜은 후겐베르크에게 “두 달 안에 우리가 히틀러를 궁지에 몰아넣어 숨도 못 쉬게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착각이고 오판(誤判)이었다.
 
 
  1년 만에 전체주의 국가로 둔갑
 
  1933년 2월 27일 국회의사당에서 의문의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 날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 비상명령’을 받아냈다.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공산주의자의 폭력행위에 대한 방위조치’라는 설명이 붙은 이 비상명령에 따라 개인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통신의 자유가 제한됐고, 영장 없이 체포·수색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해서 히틀러는 ‘의회 총리’라는 가면을 벗고 원하던 ‘대통령 총리’가 될 수 있었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3월 5일의 총선에서 나치는 1722만여 표를 획득, 유권자의 44%의 지지를 얻었다. 나치는 286석을 차지, 후겐베르크의 국민당 52석과 합쳐 원내 과반수를 확보했다. 새 의회에서 히틀러는 내각에 4년간 국회의 입법권을 위임하는 ‘수권법(授權法)’을 요구, 통과시켰다. 그해 7월에는 사회민주당이 해산됐다. 가톨릭중앙당·가톨릭인민당 등은 자진 해산했다. 7월 14일 나치당을 독일의 유일 정당으로 선언하는 법률이 공포됐다. 히틀러가 집권한 지 꼭 1년이 되는 1934년 1월 30일에는 ‘독일재건법’을 공포, 연방제와 지방자치제도를 완전히 폐지했다. 독일이 1년 만에 완벽하게 전체주의 국가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그 이후의 역사는 여기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를 총리로 만들어준 사람들에 대해서는 몇 자 적어둘 필요가 있다. 슐라이허는 1934년 6월 30일 히틀러가 정적(政敵)들을 숙청한 ‘장검(長劍)의 밤’ 때 아내와 함께 나치 친위대에게 살해됐다. 파펜은 이때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고 주오스트리아 대사로 쫓겨났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4년 8월 2일 사망했다. 그의 아들 오스카르는 부친이 히틀러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공표했고, 그 대가로 얼마 후 장군으로 진급했다. 후겐베르크는 1933년 6월 장관 자리에서 사임했고, 그의 독일국민당은 얼마 후 나치당에 흡수됐다.
 
 
  결정적인 것은 사람이다
 
  이 책의 저자인 헨리 애슈비 터너2세는 “제3제국은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독일 역사의 산물이었지만, 그것이 당시 그 나라에 열려 있던 유일한 가능성은 아니었다”면서 “히틀러가 총리 자리를 건네받는 순간까지도 다른 정치적인 해결 방안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나치 지도자(히틀러)의 성공은 어떻게든 권력을 잡으려는 노력이 성공해 얻은 결실이 아니라, 그의 운이 다한 듯 추락하고 있을 때 어찌해서 손에 떨어진 것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히틀러의 운명이 역전되어 그가 권력의 자리에 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객관적인 힘들이 어떤 사건을 가능하게 할지는 몰라도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한 나라의 운명이 한 줌밖에 안 되는 사람들 속에 달려 있었던 1933년 1월 독일에서 그랬다.”
 
  “한 나라의 권력 배치가 이렇게 몇 안 되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었을 때, 인간의 감정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것 몇 가지가 -개인적인 친근감과 혐오감, 상처받은 마음, 우정이 깨지면서 느끼는 실망감, 복수심-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다. 3당 합당을 했다가 김영삼(金泳三)에게 배신당한 김종필(金鍾泌)이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金大中)과 손을 잡고, 이인제(李仁濟)가 독자 출마를 강행하는 바람에 김대중 정권이 출범할 수 있었고, 좌파 집권의 길이 열렸다. 정몽준(鄭夢準)이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노무현(盧武鉉)과 후보 단일화를 하기로 하는 바람에 다 죽어가던 노무현이 기사회생(起死回生)할 수 있었다. 2016년 총선 당시 진박(眞朴) 소동과 새누리당의 패배, 탄핵, 박근혜(朴槿惠) 정권 몰락과 문재인(文在寅) 정권의 출범은 당시 집권 세력 내부의 이기심과 갈등, 일부 언론의 선동적 보도에 힘입은 바 크다.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이 2020년 총선을 그르친 것도 당시 당 지도부 및 공천 관계자들의 교만과 사심(私心) 때문이었다. 지금 국민의힘이 표류하고 있는 것도, 야당 대통령 후보와 선대위 관계자, 당 지도부의 오만, 착각, 사리사욕(私利私慾) 때문이다.
 
 
  最惡이냐 次惡이냐
 
1933년 3월 21일 임시 국회의사당인 포츠담의 위수교회 앞에서 열린 국회 개원식에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오른쪽)에게 인사하는 히틀러. 가운데는 블롬베르크 국방장관.
  앞에서 소개한 파펜, 슐라이허, 힌덴부르크, 후겐베르크 말고도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데 도움을 준 자들은 더 있었다. 바로 사회민주당, 가톨릭중앙당, 공산당 정치인들이었다.
 
  바이마르공화국 정치의 양대 축(軸)이었던 사회민주당과 가톨릭중앙당 정치인들은 나치라는 전체주의 세력의 실체를 직시하지 못하고 눈앞의 정치에만 급급했다. 터너2세는 “1930년에 의회가 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포기하게 된 것은 결국 공화주의 정치가들이 의회 통치의 유지보다 당파의 이익을 우위에 두었기 때문”이라면서 “만일 권력이 의회에서 대통령에게 넘어가지 않았다면, 절대 권력을 차지하려 했던 히틀러가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은 또한 절대로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터너2세는 또 “공화파 지도자들이 쿠르트 폰 슐라이허와 같은 장군이 잠시 다스리는 비합법적인 정권이 히틀러와 같은 광적인 독재자가 합법적으로 취임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것은 고금을 통틀어 발견되는 가장 큰 정치적 실수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흔히 선거는 최선(最善)이 아니면 차선(次善)을, 그것도 안 되면 최악(最惡) 대신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터너2세는 히틀러의 전체주의 정권에 비하면 군사정권이 차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바이마르공화국의 뒤를 이어 제3제국이 아니라 군사정권이 들어섰다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분명히 대답할 수 있다. 그야말로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군사정권은 독일과 유럽의 다른 많은 지역에 히틀러의 제3제국처럼 그렇게 깊고 광범위한 상처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군사정권은 근본적으로는 보수적이었겠지만, 나치처럼 광적일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권위주의적이었겠지만 전체주의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며, 민족주의적이지만 인종주의적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혐오스러웠겠지만 그렇게 흉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정치적인 권리와 시민권을 일시 정지하거나 제한했겠지만, 깡그리 무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옥을 정적들로 가득 채웠겠지만, 곳곳에 집단수용소를 지어 사람들을 가득 채우고, 그곳에서 사디스트들이 일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반유대주의를 국가정책으로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체계적인 집단학살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국민주권을 경험한 나라에서 일어난 군사정권이 모두 그렇듯 합법성을 주장하기는 어려웠겠지만, 그것을 지배했던 인물보다 오래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장군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 독일의 공화주의자들이 다시 국가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을 것이다.
 
  독일의 군사정권은 인류에게 홀로코스트라는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게 했을 것이고,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의 대량 학살과 파괴도 피했을 것이다. 그런 대참사는 많은 부분 히틀러의 끝없는 야망과 인종차별적인 사회 다윈주의에 대한 병적인 집착 탓이었다.”
 
  어쩌면 우리도 지금 전체주의와 차악 사이의 기로(岐路)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無知와 무관심
 
  혹자는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참극을 경험했기 때문에 군사정권이 히틀러의 전체주의 정권보다는 나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길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터너2세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투쟁》이나 나치의 발언에는 그(히틀러)와 그의 당이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큰 외교정책을 펼치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풍부했다. 게다가 나치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음으로써 자기들이 법을 비웃고 감히 자기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힘을 이용해 짓밟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또한 히틀러와 그 측근들도 민주적인 공화제를 파괴하고 일당 독재로 대체해 독일인들에게서 정부에 대한 발언권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터너2세는 “독일이 파국으로 치닫게 된 가장 큰 책임은 1933년 1월의 드라마에서 주요 역할을 한 인물들에게 있다. 그들의 어리석음 뒤에는 나치즘에 대한 지독한 무지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힌덴부르크나 슐라이허, 파펜은 물론 관련된 사람 가운데 누구 하나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을 읽었거나 그것을 읽은 사람과 상의를 했다는 증거가 없다.… 게다가 정부 안에 있는 유능한 전문가들이 나치즘에 대해 연구하고 분석한 것이 있었을 텐데도 그것들을 요청해서 보려 하지 않았다. 공화제를 지지했던 프로이센주 정부는 히틀러당이 전국 정치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 후 그런 연구를 몇 번이나 의뢰했다. 그런 연구 결과는 이 폭력적인 운동이 독일인에게 독재정치를 강요하려 할 뿐 아니라 법에 의한 통치를 폐기하고 유대인 시민을 박해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어느 면을 보나 히틀러의 총리 취임에 도움을 준 사람들은 나치즘의 본질을 탐구한 그런 연구 결과를 참고하지 않았다.”
 
  지금의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하면 어떤 나라가 될지 문재인 대통령의 저서나 민주당의 총선·대선 공약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재명 후보가 어떤 사람이고 그가 대통령이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역시 이 후보의 저서나 민주당 공약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또 문재인 정권을 포획한 전대협 세력이나 이재명 후보 주위에 있는 한총련 세력이 어떤 자들인지에 대해서도 수많은 경고가 있어 왔다. 정치인이건 일반 국민이건 간에, 파국(破局)이 눈앞에 닥친 후에야 “이럴 줄은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들이 그만큼 무지하고 무관심하고 게을렀다고 자인(自認)하는 것에 불과하다.
 
 
  “개인들의 행위가 큰 차이를 만든다”
 
  터너2세는 이 책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나치 독재자의 역정이 남긴 것은 부정적인 유산밖에 없지만, 그것은 후대에 인류가 창조한 가장 강력한 제도, 그렇기에 또한 가장 치명적일 수 있는 제도인 근대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을 선택할 때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교훈을 주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어떻게 권력을 잡아 범죄를 저질렀는가를 보면, 인간사에서 피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변화 그 자체라는 것과 개인들의 행위가 큰 차이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무거운 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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