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地官 이의신, 광해군과의 교감 아래 교하 遷都論 제기
⊙ 광해군, 송익필·이이·성혼·심의겸 등 西人의 정신적 고향 파주로 천도해 西人 제압 기도
⊙ 정원군(인조의 아버지) 집의 王氣 누르려 경덕궁 공사
⊙ 西人이 옹립한 인조, 西人의 聖地 파주에 묻혀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광해군, 송익필·이이·성혼·심의겸 등 西人의 정신적 고향 파주로 천도해 西人 제압 기도
⊙ 정원군(인조의 아버지) 집의 王氣 누르려 경덕궁 공사
⊙ 西人이 옹립한 인조, 西人의 聖地 파주에 묻혀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인조가 묻힌 長陵. 경기도 파주에 있다. 사진=조선DB
《실록》에서 교하(交河) 천도론(遷都論)이 공식 제기된 시점은 광해군 4년(1612년) 9월 14일이다. 이날 승정원에서 광해에게 아뢰었다.
“지난번에 인의(引儀) 이의신(李懿信)이 소(疏) 한 장을 올려 괴탄스러운 말을 마구 늘어놓았습니다. 국도(國都)는 기운이 쇠하였고 (경기도 파주 지역) 교하(交河)가 길지(吉地)라고 한 것은 더욱 놀라운 말입니다. 이러한 괴이한 말은 덕스러운 말만 듣는 상께 아뢰어서는 안 되므로 신들이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서 겨우 수십 일이 지난 뒤에 또 와서 바쳤습니다.”
인의란 말 그대로 의식을 행할 때 식순에 따라 구령을 외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통례원(通禮院) 소속 정6품직이다. 광해는 “알겠다[知道]”고만 답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일개 6품 관리가 천도론을 제기했는데 임금의 반응이 무덤덤하다. 이 문제는 한 달 전인 8월 6일 《실록》에도 잠깐 나온다.
“인의 이의신이 소를 올렸는데 대개 좌도(左道)의 요언(妖言)에 대해 밝힌 것이었다.”
요언의 내용은 곧 경기좌도 파주 교하로 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광해가 “알겠다”고만 말한 것은 이미 임금과 이의신 사이에 교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의신은 목숨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광해군과 이의신
첫 반박은 예조판서 이정구(李廷龜·1564~1635년)가 맡았다. 이정구는 서인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으로 훗날 인조 때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11월 15일 그가 올린 소에 이의신이 올린 글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지금 의신은 임진년 병란(兵亂)과 역변(逆變)이 계속하여 일어나는 것과 조정 관리들이 분당(分黨)하는 것과 사방의 산들이 벌거벗은 것이 국도(國都) 탓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광해의 답을 보면 이미 광해와 이의신 사이에는 교감이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예부터 새로 도성을 세운 제왕이 많았으니 본래 세웠던 도성을 아주 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의신의 방술(方術)이 정미(精微)하다고 내가 지나치게 믿는지의 여부를 예관(禮官)이 어떻게 아는가?”
이렇게 해서 광해군 6년 말까지 2년 동안 서인(西人)들은 거의 매일 이의신의 처벌을 청하는 소를 올렸고 광해는 모두 들어주지 않는 상소 전쟁이 진행됐다. 처벌 논란이 한창이던 광해군 5년(1613년) 1월 1일 자에는 사관이 매우 중요한 사평(史評)을 실어 놓았다.
“왕이 일찍이 지관(地官) 이의신에게 몰래 묻기를 ‘창덕궁은 큰일을 두 번 겪었으니 내 거처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노산(魯山)과 연산(燕山)이 폐치되었던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의신이 답하기를 ‘이는 고금의 제왕가(帝王家)에서 피할 수 없었던 변고(變故)입니다. 궁전의 길흉(吉凶)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성의 기운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빨리 옮기시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로 말미암아 창덕궁에 거처하지 않았는데, 군신들이 거처를 옮기기를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그 후 행궁(行宮)에 변괴(變怪)가 나타나자 비로소 창덕궁에 거처하면서 더욱 꽃과 돌 같은 물건으로 꾸몄지만, 오래 있을 뜻이 없었다. 이에 창경궁(昌慶宮)을 짓도록 재촉하고는 궁이 완성되자 또 거처하지 않고, 드디어 두 채의 새 궁을 짓도록 하였다. 완성시킨 후에 거처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경덕궁(慶德宮·지금의 경희궁)을 먼저 완성하였는데 인경궁(仁慶宮)이 채 완성되지 않아 왕이 폐위(廢位)되었으니, 모두가 의신이 유도한 것이다.”
西人의 정신적 고향 파주
경덕궁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1580~1619년)의 집이 있던 곳이다. 인경궁은 광해가 인왕산 아래에 짓다가 만 궁궐이다. 앞으로 살피게 될 교하 신도(新都) 추진이 실패로 돌아가자 광해는 먼저 인경궁 공사를 시작하는데 공사 도중에 정원군 집 일대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설이 나돌자 서둘러 이곳에 궁궐을 짓게 했으니 그것이 경덕궁이다. 그 바람에 인경궁 공사는 중단되다시피 했고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준공을 보지 못했다.
이의신은 선조와 광해군 대에 걸친 당대 최고의 풍수가(風水家)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서 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선조 33년(1600년) 7월 21일이다. 이때 이미 선조에게 불려가 세상을 떠난 왕비의 장지(葬地) 문제를 함께 토의하고 있다. 그리고 장례가 끝난 이듬해 5월 14일 이의신에게 포상으로 관직을 내려주었다. 그러니 인의는 겉으로 받은 관직이고 본업은 지관(地官)이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광해와도 일찍부터 가까웠던 인물이다.
이의신은 전라도 해남 사람이다. 부인이 해남 윤씨이고 속설에는 윤선도(尹善道·1587~1671년)의 고모부였다고 한다. 윤선도도 풍수(風水)에 일가견이 있던 남인(南人)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효종이 승하하자 능자리를 선정하는 간산(看山)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을 융릉(隆陵)으로 옮기면서 그를 가리켜 “오늘날의 무학(無學)으로 신안(神眼)을 가졌다”라고 칭송했다.
그런데 이의신은 왜 새 도읍지로 다른 곳도 아닌 교하를 지목했을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서인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송익필·이이·성혼, 그리고 심의겸까지 모두 파주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서인들에게 파주란 공맹(孔孟)의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일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했으면 과연 서인들이 그토록 반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이처럼 2년 동안 매일, 어떤 경우에는 하루에도 두 번씩 일개 지관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지속적으로 올린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서인 전체가 들고일어난 것이다.
궁궐 조성에서 보듯 왕기가 있는 곳이면 누르려 했던 광해로서는 파주 땅이야말로 자신과 대립한 당파 ‘서인’의 정신적 고향이니 서인을 물리적·정신적으로 제압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여긴 것이다.
광해, “교하에 宮을 짓고 싶다”
광해는 천도 문제가 불거진 지 3개월여가 지난 광해군 4년 윤 11월 5일 교하 천도에 대해 2품 이상 관리들이 의견을 내게 했다. 대신들은 모두 반대했지만 의정부 찬성 박홍구(朴弘耉·1552~1624년) 한 사람만은 찬성했다. 박홍구는 좌의정에까지 이르는데 북인(北人) 당색을 가진 인물이다. 이날 《실록》은 “이로 말미암아 홍구가 더욱 사랑을 받았는데 당시 의논이 비루하게 여겼다”고 적고 있다.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해는 이듬해 1월 3일 비변사(備邊司)에 교지를 내린다.
“예부터 제왕들은 반드시 성읍을 따로 건설하여 예기치 않은 일을 대비했으니 도읍 옮기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교하(交河)는 강화(江華)를 앞에 마주하고 있고 형세가 심히 기이하다. 독성산성(禿城山城·경기도 오산 소재)의 예에 따라 성을 쌓고 궁을 짓고는 때때로 순행(巡幸)하고 싶다. 대신과 해당 당상(堂上)은 헌관(獻官)·언관(言官)·지관과 같이 날을 택해 가서 살피고 형세를 그려 오라.”
이로써 교하 천도는 본격적으로 국정 최고 이슈가 됐다. 이에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은 교하를 살피라는 명 자체를 철회해줄 것을 청했다. 교하는 군사적 중요성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거였다.
이에 남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1561~1613년)이 중재안을 냈다. 교하는 습한 저지대이니 도읍으로 부적절하다며 다른 술관(術官)과 관상감(觀象監) 관리들이 합동으로 살펴보도록 하자고 했다. 이에 광해는 대간(大諫)이 그치거든 그리하라고 부분적으로 수용한다.
4월 20일이 되면 삼사(三司)는 교하를 살펴보는 일을 중지할 것 외에 이의신을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대한 광해의 답변이다.
“지리상 형세가 좋으면 보장(保障)으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인데 안 될 것이 뭐가 있는가. 지관이 자기 방술에 입각하여 진언한 것 역시 그다지 죄줄 일이 못 된다. 윤허하지 않는다.”
인왕산 아래 궁궐 조성 추진
이처럼 가서 살피는 일은 조금도 진척되지 못한 가운데 광해군 6년 2월 22일 광해는 이의신에게 실직(實職)을 주라고 명한다. 두 달 후 이의신은 예빈시(禮賓寺) 주부의 관직을 받는다. 이후 신료들은 이의신 이름 앞에 지관 대신 ‘예빈시 주부’라고 붙이고서 역시 같은 내용의 처벌 주청을 계속 올린다.
광해는 때로는 도읍이라고 했다가 때로는 이궁(離宮)일 뿐이라고 하면서 신하들의 총공세에 맞섰다. 광해군 6년(1614년) 6월 14일 《실록》이다.
“역대에 모두 두 도읍이 있었다. 주(周)나라는 만세가 우러러 본받는 나라인데 호경(鎬京)과 낙양(洛陽)이 있었고, 지금 명(明)나라에도 남경과 북경이 있다. 의신이 국가를 위하여 큰 계획을 진달한 것은 이궁(離宮)을 창건하자는 데 불과할 따름이다.”
교하 새 수도를 둘러싼 광해와 신하들 간 한 뼘도 좁히지 못한 평행선 논쟁은 광해군 6년과 함께 잦아들었다. 그러나 광해군 7년(1615년) 5월 16일 광해는 새로운 이슈를 던진다.
이날 광해가 말했다.
“앞으로 궁궐을 영선(營繕)하는 역사(役事)가 있을 것이니 이의신을 군직에 부쳐서 관상감에 상사(常仕)케 하라.”
이의신에 대한 광해의 신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교하 천도 논쟁 때와 달리 이에 대해서는 큰 저항이 없었다. 이를 위해 만든 것이 선수도감(繕修都監)이다. 이때부터는 성지(性智)라는 승려와 시문용(施文用·1572~1623년)이라는 인물도 등장한다. 다행히 광해군 8년(1616년) 3월 24일 자 《실록》에는 그 배경이 명확히 풀이되어 있다.
“왕이 성지와 시문용 등에게 인왕산 아래에다 새 궁궐의 터를 잡게 하였다. 왕이 이의신의 말을 받아들여서 장차 교하에 새 도읍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중론(衆論)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에 성지와 시문용 등이 왕에게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 몰래 인왕산 아래가 궁궐을 지을 만하다고 아뢰자 왕이 크게 기뻐해 즉시 터를 잡으라고 명했다. 이에 이이첨이 비밀리에 아뢰기를 ‘교하에 대한 의논을 정지하고 이곳에다 궁궐을 지으면 백성들이 반드시 앞다투어 달려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에 여러 신하가 교하의 일에 대해 앞다투어 간쟁(諫爭)했었는데 인왕산 아래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간쟁하지 못했다.”
아마도 서인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은 교하 천도를 막아낸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여기에도 북인 출신 권간(權奸) 이이첨(李爾瞻·1560~1623년)이 개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시문용은 성씨가 보여주듯 명나라 사람인데 임진왜란 때 귀화한 장수다. 시문용은 군사·풍수·의술에 정통하여 1616년(광해군 8년) 정인홍(鄭仁弘)의 추천으로 성지·김일룡(金馹龍) 등과 함께 궁궐 및 왕릉 축조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쌓았다. 하지만 1623년(인조 1년) 광해군 정권이 몰락하면서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가렴(加斂)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풍수책 《감여지남(堪輿指南)》이란 저술을 지은 데서 보듯 이 분야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승려 성지의 항변
그래서 인경궁을 짓기로 했는데 광해군 9년(1617년) 6월 11일 다시 새문동(塞門洞)에 또 다른 궁궐을 짓는 논의가 시작됐다. 그것이 경덕궁이다. 그것은 당시 광해의 심리 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마침 이날 《실록》은 사관이 평을 실어 맥락을 자세하게 풀어준다.
“성지(性智)가 이미 인왕산 아래에다 신궐을 짓게 하고, 술인(術人) 김일룡(金馹龍)이 또 이궁(離宮)을 새문동에다 건립하기를 청하였는데, 바로 정원군(定遠君)의 옛집이다. 왕이 그곳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듣고 드디어 그 집을 빼앗아 관가로 들였는데, 김일룡이 왕의 뜻에 영합하여 이 의논이 있게 된 것이다.
인왕산의 터는 두 구역이 있는데, 하나는 사직 담장의 동쪽에 있고 또 하나는 인왕동(仁王洞)에 있는바, 바로 소세양(蘇世讓·1486~1562년)의 청심당(淸心堂) 터이다. 성의 담장은 양쪽이 함께하였으나 전우(殿宇)는 서로 달라서 실로 두 개의 대궐이었는데, 새문동에 또 하나의 대궐을 지어서 셋째 대궐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한꺼번에 공사를 시작하여 제조와 낭청이 수백 명이나 되었으며, 헐어버린 민가가 수천 채나 되었다. 여러 신하가 먼저 한 궁궐을 지어 이어(移御)한 뒤에 차례차례 공사를 일으키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들 성지를 허물하여 그의 살점을 먹고자 하였다.
그러자 성지가 노하여 조사(朝士)들에게 말하기를 ‘이 한 중놈의 모가지는 조만간에 잘려서 도랑에 내던져질 것이다. 다만 나는 인왕산의 새 터만 정하였을 뿐으로, 지금 세 대궐의 역사를 한꺼번에 하는 것은 본래 나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어찌하여 한마디 간언이라도 올려 중지시키지는 않고 한갓 나만 탓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듣는 자들이 이 말을 듣고는 부끄러워했다.”
스스로 허물어진 광해군
성지의 말은 당시 임금과 신하의 상황을 그대로 전한다. 그러나 성지 또한 광해의 총애를 배경으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실록》에 있는 사평이다.
“성지는 요승(妖僧)이다. 처음에 인왕산(仁王山) 아래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설을 가지고 왕을 미혹하여 인경궁(仁慶宮)을 세우게 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당상)에 올랐는데, 이번에 또 중추부 첨지사를 제수받아 머리에 옥관자를 두르고 말을 타고 다니는 등 그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지첨지(智僉知)라고 불렀는데 계해년에 복주(伏誅)되었다.”
계해년은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다. 성지는 반정 직후 처형됐고 김일룡도 두 달 후에 목이 달아났다. 이로써 인경궁 공사는 중단됐고 규모가 작아 늦게 시작하고도 먼저 완성한 경덕궁은 남았다.
이랬으니 안 쫓겨나는 것이 비정상이다. 태종이 왕(王)씨 몰살을 중단시키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씨가 도(道)가 있으면 100명의 왕씨가 있다 하더라도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이씨가 도를 잃으면 왕씨가 아니라도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나는 자가 없겠는가?”
광해는 인조반정 세력에 의해 내쫓겨지기 전에 이미 이렇게 스스로 허물어졌던 것이다.
인조, 파주에 묻히다
인조 13년(1635년) 인조비 한씨가 세상을 떠났다. 한씨의 능을 정한 것은 이듬해 2월 9일이다. 영의정 윤방(尹昉·1563~1640년)과 우의정 홍서봉(洪瑞鳳·1572~1645년)이 여러 지관과 상의한 결과 모두 파주 지방 산이 제일이라고 해서 그곳으로 정했다. 윤방은 서인 영수였던 윤두수의 아들이자 이이의 제자다. 홍서봉은 반정 공신이다. 그리고 12월 17일에는 능호를 장릉(長陵)으로 정했다. 고려 인종의 능호도 장릉(長陵)이다.
처음 능이 정해진 곳은 파주 북쪽 북운천리였다. 그리고 인조도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 서인의 본향(本鄕)으로 가서 묻히는 것도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파주에는 왕릉이 장릉 하나뿐이다.
그런데 인조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효종 즉위년(1649년) 5월 15일 대사헌 조익(趙翼·1579~1655년)이 상소를 올려 장릉이 좋지 않은 땅이라고 주장했다. 조익은 남인 장현광에게도 배우고 서인 윤근수에게도 배운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당초 장릉(長陵)을 의논해 결정한 것은 지사(地師·술사) 이간(李衎)이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사 김백련(金百鍊)은 그곳이 좋지 않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또 듣건대 그 뒤에 그곳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술사(術士)들이 많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길흉도 분간되지 않고 의혹도 풀리지 않았는데 그대로 그 자리에 능을 모신다면 무궁한 후회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술사들을 모아 다시 살펴보고 각각 소견을 진술하게 하면 그 길흉을 판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로 조익은 대사헌에서 물러났다.
숙종 때에도 장릉의 지리를 지적하는 상소가 여러 차례 올라왔다. 방숙제라는 유생의 상소가 있었고, 특히 숙종 13년(1687년) 8월 10일에는 전 훈련원 판관 허빈(許彬)이 소를 올려 “장릉 용혈(龍穴)이 사수(砂水)로 허물어진 데가 많다”고 하자 영의정 남구만(南九萬·1629~1711년) 등을 보내 장릉을 살펴보게 했다. 남구만은 송준길의 제자로 정통 서인이다. 10월에는 숙종이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11월 20일에는 소를 올려 장릉을 옮길 것을 청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옮기지 않기로 결정한 때였다. 대체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쪽은 당연히 남인 쪽 사람들이었다.
장릉 천릉(遷陵) 문제가 본격 제기된 것은 영조 때다. 영조 1년(1725년) 10월 23일 장릉이 화염에 휩싸였다. 조사 결과 방화(放火)였다. 벌목이 금지된 소나무를 도벌(盜伐)하다가 능을 지키는 병졸에게 잡혀 유배를 갔던 이들이 앙심을 품고 유배지에서 도망쳐 나와 불을 지른 것이었다. 사소한 해프닝이었다.
장릉의 蛇變
장릉을 옮기는 문제가 정식으로 제기된 것은 영조 7년(1731년) 3월 16일이다. 좌의정 이집(李·1664~1733년)이 말했다. 이집은 노론(老論)에 맞선 소론(少論)의 대표적 인물이다. 노론은 서인의 정통을 잇고 있었으니 다시 장릉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인-노론 반대파로서는 가장 고위직 인물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파주의 장릉(長陵)은 선조(先朝) 때 천봉(遷奉)하려는 의논이 있었으나 의논을 하다가 곧 중지하였습니다. 근래 듣건대 능침(陵寢) 사이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변이 있어 가끔 출몰한다고 하니, 어찌 놀랍지 않겠습니까? 세간에서 전해 오기를 ‘이 능을 처음 개광(開壙)할 때에 뱀의 변이 있었으나 총호사(摠護使) 김자점(金自點)이 숨기고 그대로 능을 봉했다’고 합니다.”
이때는 조정에 소론이 득세할 때라 특별한 반대가 없었다. 영조도 “풍수설에 미혹되지 말라는 선조(先朝)의 가르침이 만세의 교훈으로 내려왔으니 망령되이 의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더러운 물건이 지극히 경건한 땅에서 나왔다 하니 듣기에 아주 놀랍고 가슴 아프다”며 널리 의견을 들어보라고 명한다. 이를 사변(蛇變)이라 불렀다. 그러고 사흘 후에 장릉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당시로서는 속전속결이었다.
문제는 어디로 옮길 것인가였다. 교하로 결정됐다. 소론은 내심 파주를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드러낼 수 없었고 영조로서는 노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장릉이 있는 교하로 옮기게 된다. 8월 27일 옛 장릉에서 지금의 교하 장릉으로 옮겼다.
이처럼 서인 노론은 광해군의 공세로부터 교하를 지켜냈고 마침내 서인 정권이 만든 임금 인조를 교하에 묻음으로써 자신들의 성지(聖地)를 사수했다. 서인-노론-벽파 300년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는 사건들이다.⊙
“지난번에 인의(引儀) 이의신(李懿信)이 소(疏) 한 장을 올려 괴탄스러운 말을 마구 늘어놓았습니다. 국도(國都)는 기운이 쇠하였고 (경기도 파주 지역) 교하(交河)가 길지(吉地)라고 한 것은 더욱 놀라운 말입니다. 이러한 괴이한 말은 덕스러운 말만 듣는 상께 아뢰어서는 안 되므로 신들이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서 겨우 수십 일이 지난 뒤에 또 와서 바쳤습니다.”
인의란 말 그대로 의식을 행할 때 식순에 따라 구령을 외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통례원(通禮院) 소속 정6품직이다. 광해는 “알겠다[知道]”고만 답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일개 6품 관리가 천도론을 제기했는데 임금의 반응이 무덤덤하다. 이 문제는 한 달 전인 8월 6일 《실록》에도 잠깐 나온다.
“인의 이의신이 소를 올렸는데 대개 좌도(左道)의 요언(妖言)에 대해 밝힌 것이었다.”
요언의 내용은 곧 경기좌도 파주 교하로 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광해가 “알겠다”고만 말한 것은 이미 임금과 이의신 사이에 교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의신은 목숨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광해군과 이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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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경희궁 숭정전. 사진=조선DB |
“지금 의신은 임진년 병란(兵亂)과 역변(逆變)이 계속하여 일어나는 것과 조정 관리들이 분당(分黨)하는 것과 사방의 산들이 벌거벗은 것이 국도(國都) 탓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광해의 답을 보면 이미 광해와 이의신 사이에는 교감이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예부터 새로 도성을 세운 제왕이 많았으니 본래 세웠던 도성을 아주 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의신의 방술(方術)이 정미(精微)하다고 내가 지나치게 믿는지의 여부를 예관(禮官)이 어떻게 아는가?”
이렇게 해서 광해군 6년 말까지 2년 동안 서인(西人)들은 거의 매일 이의신의 처벌을 청하는 소를 올렸고 광해는 모두 들어주지 않는 상소 전쟁이 진행됐다. 처벌 논란이 한창이던 광해군 5년(1613년) 1월 1일 자에는 사관이 매우 중요한 사평(史評)을 실어 놓았다.
“왕이 일찍이 지관(地官) 이의신에게 몰래 묻기를 ‘창덕궁은 큰일을 두 번 겪었으니 내 거처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노산(魯山)과 연산(燕山)이 폐치되었던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의신이 답하기를 ‘이는 고금의 제왕가(帝王家)에서 피할 수 없었던 변고(變故)입니다. 궁전의 길흉(吉凶)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성의 기운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빨리 옮기시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로 말미암아 창덕궁에 거처하지 않았는데, 군신들이 거처를 옮기기를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그 후 행궁(行宮)에 변괴(變怪)가 나타나자 비로소 창덕궁에 거처하면서 더욱 꽃과 돌 같은 물건으로 꾸몄지만, 오래 있을 뜻이 없었다. 이에 창경궁(昌慶宮)을 짓도록 재촉하고는 궁이 완성되자 또 거처하지 않고, 드디어 두 채의 새 궁을 짓도록 하였다. 완성시킨 후에 거처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경덕궁(慶德宮·지금의 경희궁)을 먼저 완성하였는데 인경궁(仁慶宮)이 채 완성되지 않아 왕이 폐위(廢位)되었으니, 모두가 의신이 유도한 것이다.”
西人의 정신적 고향 파주
경덕궁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1580~1619년)의 집이 있던 곳이다. 인경궁은 광해가 인왕산 아래에 짓다가 만 궁궐이다. 앞으로 살피게 될 교하 신도(新都) 추진이 실패로 돌아가자 광해는 먼저 인경궁 공사를 시작하는데 공사 도중에 정원군 집 일대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설이 나돌자 서둘러 이곳에 궁궐을 짓게 했으니 그것이 경덕궁이다. 그 바람에 인경궁 공사는 중단되다시피 했고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준공을 보지 못했다.
이의신은 선조와 광해군 대에 걸친 당대 최고의 풍수가(風水家)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서 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선조 33년(1600년) 7월 21일이다. 이때 이미 선조에게 불려가 세상을 떠난 왕비의 장지(葬地) 문제를 함께 토의하고 있다. 그리고 장례가 끝난 이듬해 5월 14일 이의신에게 포상으로 관직을 내려주었다. 그러니 인의는 겉으로 받은 관직이고 본업은 지관(地官)이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광해와도 일찍부터 가까웠던 인물이다.
이의신은 전라도 해남 사람이다. 부인이 해남 윤씨이고 속설에는 윤선도(尹善道·1587~1671년)의 고모부였다고 한다. 윤선도도 풍수(風水)에 일가견이 있던 남인(南人)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효종이 승하하자 능자리를 선정하는 간산(看山)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을 융릉(隆陵)으로 옮기면서 그를 가리켜 “오늘날의 무학(無學)으로 신안(神眼)을 가졌다”라고 칭송했다.
그런데 이의신은 왜 새 도읍지로 다른 곳도 아닌 교하를 지목했을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서인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송익필·이이·성혼, 그리고 심의겸까지 모두 파주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서인들에게 파주란 공맹(孔孟)의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일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했으면 과연 서인들이 그토록 반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이처럼 2년 동안 매일, 어떤 경우에는 하루에도 두 번씩 일개 지관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지속적으로 올린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서인 전체가 들고일어난 것이다.
궁궐 조성에서 보듯 왕기가 있는 곳이면 누르려 했던 광해로서는 파주 땅이야말로 자신과 대립한 당파 ‘서인’의 정신적 고향이니 서인을 물리적·정신적으로 제압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여긴 것이다.
광해, “교하에 宮을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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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형 |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해는 이듬해 1월 3일 비변사(備邊司)에 교지를 내린다.
“예부터 제왕들은 반드시 성읍을 따로 건설하여 예기치 않은 일을 대비했으니 도읍 옮기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교하(交河)는 강화(江華)를 앞에 마주하고 있고 형세가 심히 기이하다. 독성산성(禿城山城·경기도 오산 소재)의 예에 따라 성을 쌓고 궁을 짓고는 때때로 순행(巡幸)하고 싶다. 대신과 해당 당상(堂上)은 헌관(獻官)·언관(言官)·지관과 같이 날을 택해 가서 살피고 형세를 그려 오라.”
이로써 교하 천도는 본격적으로 국정 최고 이슈가 됐다. 이에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은 교하를 살피라는 명 자체를 철회해줄 것을 청했다. 교하는 군사적 중요성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거였다.
이에 남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1561~1613년)이 중재안을 냈다. 교하는 습한 저지대이니 도읍으로 부적절하다며 다른 술관(術官)과 관상감(觀象監) 관리들이 합동으로 살펴보도록 하자고 했다. 이에 광해는 대간(大諫)이 그치거든 그리하라고 부분적으로 수용한다.
4월 20일이 되면 삼사(三司)는 교하를 살펴보는 일을 중지할 것 외에 이의신을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대한 광해의 답변이다.
“지리상 형세가 좋으면 보장(保障)으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인데 안 될 것이 뭐가 있는가. 지관이 자기 방술에 입각하여 진언한 것 역시 그다지 죄줄 일이 못 된다. 윤허하지 않는다.”
인왕산 아래 궁궐 조성 추진
이처럼 가서 살피는 일은 조금도 진척되지 못한 가운데 광해군 6년 2월 22일 광해는 이의신에게 실직(實職)을 주라고 명한다. 두 달 후 이의신은 예빈시(禮賓寺) 주부의 관직을 받는다. 이후 신료들은 이의신 이름 앞에 지관 대신 ‘예빈시 주부’라고 붙이고서 역시 같은 내용의 처벌 주청을 계속 올린다.
광해는 때로는 도읍이라고 했다가 때로는 이궁(離宮)일 뿐이라고 하면서 신하들의 총공세에 맞섰다. 광해군 6년(1614년) 6월 14일 《실록》이다.
“역대에 모두 두 도읍이 있었다. 주(周)나라는 만세가 우러러 본받는 나라인데 호경(鎬京)과 낙양(洛陽)이 있었고, 지금 명(明)나라에도 남경과 북경이 있다. 의신이 국가를 위하여 큰 계획을 진달한 것은 이궁(離宮)을 창건하자는 데 불과할 따름이다.”
교하 새 수도를 둘러싼 광해와 신하들 간 한 뼘도 좁히지 못한 평행선 논쟁은 광해군 6년과 함께 잦아들었다. 그러나 광해군 7년(1615년) 5월 16일 광해는 새로운 이슈를 던진다.
이날 광해가 말했다.
“앞으로 궁궐을 영선(營繕)하는 역사(役事)가 있을 것이니 이의신을 군직에 부쳐서 관상감에 상사(常仕)케 하라.”
이의신에 대한 광해의 신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교하 천도 논쟁 때와 달리 이에 대해서는 큰 저항이 없었다. 이를 위해 만든 것이 선수도감(繕修都監)이다. 이때부터는 성지(性智)라는 승려와 시문용(施文用·1572~1623년)이라는 인물도 등장한다. 다행히 광해군 8년(1616년) 3월 24일 자 《실록》에는 그 배경이 명확히 풀이되어 있다.
“왕이 성지와 시문용 등에게 인왕산 아래에다 새 궁궐의 터를 잡게 하였다. 왕이 이의신의 말을 받아들여서 장차 교하에 새 도읍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중론(衆論)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에 성지와 시문용 등이 왕에게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 몰래 인왕산 아래가 궁궐을 지을 만하다고 아뢰자 왕이 크게 기뻐해 즉시 터를 잡으라고 명했다. 이에 이이첨이 비밀리에 아뢰기를 ‘교하에 대한 의논을 정지하고 이곳에다 궁궐을 지으면 백성들이 반드시 앞다투어 달려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에 여러 신하가 교하의 일에 대해 앞다투어 간쟁(諫爭)했었는데 인왕산 아래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간쟁하지 못했다.”
아마도 서인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은 교하 천도를 막아낸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여기에도 북인 출신 권간(權奸) 이이첨(李爾瞻·1560~1623년)이 개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시문용은 성씨가 보여주듯 명나라 사람인데 임진왜란 때 귀화한 장수다. 시문용은 군사·풍수·의술에 정통하여 1616년(광해군 8년) 정인홍(鄭仁弘)의 추천으로 성지·김일룡(金馹龍) 등과 함께 궁궐 및 왕릉 축조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쌓았다. 하지만 1623년(인조 1년) 광해군 정권이 몰락하면서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가렴(加斂)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풍수책 《감여지남(堪輿指南)》이란 저술을 지은 데서 보듯 이 분야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승려 성지의 항변
그래서 인경궁을 짓기로 했는데 광해군 9년(1617년) 6월 11일 다시 새문동(塞門洞)에 또 다른 궁궐을 짓는 논의가 시작됐다. 그것이 경덕궁이다. 그것은 당시 광해의 심리 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마침 이날 《실록》은 사관이 평을 실어 맥락을 자세하게 풀어준다.
“성지(性智)가 이미 인왕산 아래에다 신궐을 짓게 하고, 술인(術人) 김일룡(金馹龍)이 또 이궁(離宮)을 새문동에다 건립하기를 청하였는데, 바로 정원군(定遠君)의 옛집이다. 왕이 그곳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듣고 드디어 그 집을 빼앗아 관가로 들였는데, 김일룡이 왕의 뜻에 영합하여 이 의논이 있게 된 것이다.
인왕산의 터는 두 구역이 있는데, 하나는 사직 담장의 동쪽에 있고 또 하나는 인왕동(仁王洞)에 있는바, 바로 소세양(蘇世讓·1486~1562년)의 청심당(淸心堂) 터이다. 성의 담장은 양쪽이 함께하였으나 전우(殿宇)는 서로 달라서 실로 두 개의 대궐이었는데, 새문동에 또 하나의 대궐을 지어서 셋째 대궐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한꺼번에 공사를 시작하여 제조와 낭청이 수백 명이나 되었으며, 헐어버린 민가가 수천 채나 되었다. 여러 신하가 먼저 한 궁궐을 지어 이어(移御)한 뒤에 차례차례 공사를 일으키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들 성지를 허물하여 그의 살점을 먹고자 하였다.
그러자 성지가 노하여 조사(朝士)들에게 말하기를 ‘이 한 중놈의 모가지는 조만간에 잘려서 도랑에 내던져질 것이다. 다만 나는 인왕산의 새 터만 정하였을 뿐으로, 지금 세 대궐의 역사를 한꺼번에 하는 것은 본래 나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어찌하여 한마디 간언이라도 올려 중지시키지는 않고 한갓 나만 탓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듣는 자들이 이 말을 듣고는 부끄러워했다.”
성지의 말은 당시 임금과 신하의 상황을 그대로 전한다. 그러나 성지 또한 광해의 총애를 배경으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실록》에 있는 사평이다.
“성지는 요승(妖僧)이다. 처음에 인왕산(仁王山) 아래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설을 가지고 왕을 미혹하여 인경궁(仁慶宮)을 세우게 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당상)에 올랐는데, 이번에 또 중추부 첨지사를 제수받아 머리에 옥관자를 두르고 말을 타고 다니는 등 그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지첨지(智僉知)라고 불렀는데 계해년에 복주(伏誅)되었다.”
계해년은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다. 성지는 반정 직후 처형됐고 김일룡도 두 달 후에 목이 달아났다. 이로써 인경궁 공사는 중단됐고 규모가 작아 늦게 시작하고도 먼저 완성한 경덕궁은 남았다.
이랬으니 안 쫓겨나는 것이 비정상이다. 태종이 왕(王)씨 몰살을 중단시키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씨가 도(道)가 있으면 100명의 왕씨가 있다 하더라도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이씨가 도를 잃으면 왕씨가 아니라도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나는 자가 없겠는가?”
광해는 인조반정 세력에 의해 내쫓겨지기 전에 이미 이렇게 스스로 허물어졌던 것이다.
인조, 파주에 묻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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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 이부(원종으로 추존)와 인헌왕후 구씨가 묻힌 김포 章陵. 최근 아파트가 들어서 경관을 훼손했다고 논란이 됐다. 사진=조선DB |
처음 능이 정해진 곳은 파주 북쪽 북운천리였다. 그리고 인조도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 서인의 본향(本鄕)으로 가서 묻히는 것도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파주에는 왕릉이 장릉 하나뿐이다.
그런데 인조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효종 즉위년(1649년) 5월 15일 대사헌 조익(趙翼·1579~1655년)이 상소를 올려 장릉이 좋지 않은 땅이라고 주장했다. 조익은 남인 장현광에게도 배우고 서인 윤근수에게도 배운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당초 장릉(長陵)을 의논해 결정한 것은 지사(地師·술사) 이간(李衎)이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사 김백련(金百鍊)은 그곳이 좋지 않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또 듣건대 그 뒤에 그곳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술사(術士)들이 많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길흉도 분간되지 않고 의혹도 풀리지 않았는데 그대로 그 자리에 능을 모신다면 무궁한 후회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술사들을 모아 다시 살펴보고 각각 소견을 진술하게 하면 그 길흉을 판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로 조익은 대사헌에서 물러났다.
숙종 때에도 장릉의 지리를 지적하는 상소가 여러 차례 올라왔다. 방숙제라는 유생의 상소가 있었고, 특히 숙종 13년(1687년) 8월 10일에는 전 훈련원 판관 허빈(許彬)이 소를 올려 “장릉 용혈(龍穴)이 사수(砂水)로 허물어진 데가 많다”고 하자 영의정 남구만(南九萬·1629~1711년) 등을 보내 장릉을 살펴보게 했다. 남구만은 송준길의 제자로 정통 서인이다. 10월에는 숙종이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11월 20일에는 소를 올려 장릉을 옮길 것을 청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옮기지 않기로 결정한 때였다. 대체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쪽은 당연히 남인 쪽 사람들이었다.
장릉 천릉(遷陵) 문제가 본격 제기된 것은 영조 때다. 영조 1년(1725년) 10월 23일 장릉이 화염에 휩싸였다. 조사 결과 방화(放火)였다. 벌목이 금지된 소나무를 도벌(盜伐)하다가 능을 지키는 병졸에게 잡혀 유배를 갔던 이들이 앙심을 품고 유배지에서 도망쳐 나와 불을 지른 것이었다. 사소한 해프닝이었다.
장릉을 옮기는 문제가 정식으로 제기된 것은 영조 7년(1731년) 3월 16일이다. 좌의정 이집(李·1664~1733년)이 말했다. 이집은 노론(老論)에 맞선 소론(少論)의 대표적 인물이다. 노론은 서인의 정통을 잇고 있었으니 다시 장릉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인-노론 반대파로서는 가장 고위직 인물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파주의 장릉(長陵)은 선조(先朝) 때 천봉(遷奉)하려는 의논이 있었으나 의논을 하다가 곧 중지하였습니다. 근래 듣건대 능침(陵寢) 사이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변이 있어 가끔 출몰한다고 하니, 어찌 놀랍지 않겠습니까? 세간에서 전해 오기를 ‘이 능을 처음 개광(開壙)할 때에 뱀의 변이 있었으나 총호사(摠護使) 김자점(金自點)이 숨기고 그대로 능을 봉했다’고 합니다.”
이때는 조정에 소론이 득세할 때라 특별한 반대가 없었다. 영조도 “풍수설에 미혹되지 말라는 선조(先朝)의 가르침이 만세의 교훈으로 내려왔으니 망령되이 의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더러운 물건이 지극히 경건한 땅에서 나왔다 하니 듣기에 아주 놀랍고 가슴 아프다”며 널리 의견을 들어보라고 명한다. 이를 사변(蛇變)이라 불렀다. 그러고 사흘 후에 장릉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당시로서는 속전속결이었다.
문제는 어디로 옮길 것인가였다. 교하로 결정됐다. 소론은 내심 파주를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드러낼 수 없었고 영조로서는 노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장릉이 있는 교하로 옮기게 된다. 8월 27일 옛 장릉에서 지금의 교하 장릉으로 옮겼다.
이처럼 서인 노론은 광해군의 공세로부터 교하를 지켜냈고 마침내 서인 정권이 만든 임금 인조를 교하에 묻음으로써 자신들의 성지(聖地)를 사수했다. 서인-노론-벽파 300년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는 사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