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동가들은 당신들에게 거친 손을 숨긴 채 늘 친절한 다른 쪽 손만을 보여준다”
⊙ “무엇엔가 돈을 지출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지출할 돈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
⊙ “법이 있기 때문에 재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재산이 있기 때문에 법이 있는 것”
⊙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완력을 사용해 다른 개인이나 다른 집단의 인격과 자유, 재산을 침해하는 것이 정당할 수는 없다”
⊙ “법으로 강요되는 동포애는 필연적으로 自由를 파괴하고 正義의 기반을 잠식할 것”
⊙ “국가는 한 손으로는 국민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뺏어다가 다른 손으로는 그것을 나누어준다”
⊙ “무엇엔가 돈을 지출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지출할 돈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
⊙ “법이 있기 때문에 재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재산이 있기 때문에 법이 있는 것”
⊙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완력을 사용해 다른 개인이나 다른 집단의 인격과 자유, 재산을 침해하는 것이 정당할 수는 없다”
⊙ “법으로 강요되는 동포애는 필연적으로 自由를 파괴하고 正義의 기반을 잠식할 것”
⊙ “국가는 한 손으로는 국민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뺏어다가 다른 손으로는 그것을 나누어준다”
이재명(李在明)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그동안 국토보유세로 약 15조5000억원(추정치)을 조성해서 기본소득으로 국민 모두에게 나눠주겠다고 주장해왔다. 또 기업들을 상대로 64조원의 탄소세(炭素稅)를 거둔 후 그 일부를 기본소득 재원으로 활용하겠다는 소리도 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집 하나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종부세(종합부동산세) 폭탄이 떨어져 난리인데 또 다른 세금을 들고나온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했는지 이재명 후보는 2021년 12월 1일 “이름 짓기가 잘못됐는데 정확하게 얘기하면 일종의 토지이익배당”이라면서 “국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처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언뜻 보기에는 기존의 입장에서 한발 물러난 듯하다. 하지만 이 후보는 “전 국민에게 토지에서 생기는 이익을 공평하게 일부를 나누게 되면 부동산 투기 억제 효과도 있고 소득재분배, 양극화 완화 효과도 있다”고 주장, 국토보유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그에 앞서 11월 30일 윤석열(尹錫悅)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는 자기가 집권하면 소상공인들에게 50조원의 손실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주장하던 이재명 후보는 “윤 후보가 말한 (소상공인 손실보상금) 50조원 지원 약속, 저도 받겠다”며 수용 의사를 밝혔다. 김종인 국민의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은 한술 더 떴다. 그는 12월 8일 코로나19 피해 보상과 관련해 “윤석열 대선 후보가 50조원 투입을 공약했는데, 그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라며 “집권하면 100조원대 투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랏돈을 풀어서 국민들에게 나누어주자는 데는 여야(與野), 보수-진보가 따로 없는 셈이다. 다들 대단한 화수분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퍼내도 퍼내도 한없이 돈이 나온다는 화수분 말이다. 12월 3일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킨 607조7000억원 규모의 ‘슈퍼 예산’은 아마 그런 인식의 소산일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그런 화수분은 없다. 국토보유세를 내야 하는 부동산 가진 국민들도, 탄소세를 내야 할 기업들도, 마르지 않는 화수분은 갖고 있지 않다.
몇십 조를 우습게 아는 대선(大選) 후보들 눈에는 자기들이 뿌리는 돈에 환호하는 유권자들만 보일 것이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19세기 중반 활동했던 프랑스의 자유주의자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1801~1850년)의 《법》은 경제에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랄한 필치(筆致)로 보여주는 책이다. 바스티아가 활동하던 시대, 특히 1848년은 2월혁명으로 루이 필립의 왕정(王政)이 무너지던 정치적 격변기였다. 이를 틈 타 노동자·농민 등 소외계층은 물론 기업인, 지주, 문화예술인, 식민주의자 할 것 없이 너도나도 ‘국가’를 향해 자신들의 요구를 마구잡이로 들이밀었다. 《법》은 그런 거센 탁류(濁流)에 맞서는 외로운 외침이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 책의 첫머리에서 바스티아는 이렇게 말한다.
“경제활동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그것이 하나의 행동이든, 제도이든, 법이든 간에 한 가지 효과에만 그치지 않고 일련의 연속된 효과를 만들어낸다. 여러 가지 효과 중에서 당장 나타나는 효과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눈에 잘 띈다. 반면 시간을 두고 서서히 나타나는 효과들도 많은데, 그런 효과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것이 이 책을 일관하는 바스티아의 메시지다. 이 주장을 키(key)로 해서 바스티아는 세금, 재정, 복지, 고용, 보호무역, 각종 지원금(보조금) 등에 대한 자기의 생각들을 펼쳐나간다.
바스티아는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통찰하는 것이 ‘사이비(似而非) 경제학자’와 ‘진정한 경제학자’들을 나누는 기준이라고 강조한다.
“사이비 경제학자와 진정한 경제학자들 사이의 차이는 오직 한 가지이다. 사이비 경제학자들은 오직 눈에 쉽게 띄는 효과들에만 집착한다. 반면 진정한 경제학자들은 보이는 효과만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나타나는 간접적인 효과까지도 내다볼 수 있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차이지만, 그로 인한 결과의 차이는 엄청나다. 눈에 당장 보이는 효과가 좋아 보일 경우 그로 인한 장기적이고 간접적인 효과들은 십중팔구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주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이비 경제학자들은 당장 눈에 띄는 하잘것없는 이득에 집착한 나머지 두고두고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반면 진정한 경제학자들은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더 큰 이득을 추구한다.”
경제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바스티아는 ‘깨어진 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누군가의 집 유리창이 깨지면, 유리 가게 주인이 돈을 벌 것이고, 그런 식으로 돈이 돌면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이야기다. 아마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스티아는 “그 같은 주장은 보이는 결과에만 사로잡힌 소치”라면서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6프랑을 유리를 사는 데에 지출한 결과 다른 물건에 대한 지출이 그만큼 줄었다는 것을 당신은 보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 돈을 유리 사는 데에 쓰지 않았다면 새 구두를 사거나 책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엔가 돈을 지출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지출할 돈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늘에 가려진 제3의 인물
이런 논리는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 매달 들어오는 수입이 빤한 월급쟁이가 갑자기 폭등한 종부세나 이재명 후보가 주장하는 국토보유세를 내기 위해 지갑을 털어야 한다면, 그는 새 옷이나 TV 사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기업이 탄소세를 내야 한다면, 인건비나 연구개발(R&D) 투자를 줄여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라고 강제하거나 노조가 급격한 임금 인상을 요구할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코로나19 지원금이나 가덕도 신공항 건설에 수십조원을 쏟아붓는다면, 다른 분야의 예산을 줄일 수밖에 없다. 병사들의 월급을 올려주기 위해 전력(戰力) 증강 예산에 손을 댈 수도 있을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또 있다. 바스티아의 ‘깨진 유리창’ 이야기 속 등장인물은 유리창이 깨진 집주인과 유리 가게 주인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두 사람 말고도 ‘그늘에 가려진 제3의 인물’이 있다. 바로 신발 제조업자나 서점 주인, 그 밖의 다른 상인이나 제조업자다. 이들은 유리가 깨진 사건으로 손해를 본 사람들이다. 유리가 깨지는 바람에 그들은 구두나 책을 팔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바스티아는 “1프랑을 세금으로 낸 사람은 더 이상 그 1프랑을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없다. 그 1프랑에 해당하는 만큼의 만족을 잃게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면서 “1프랑어치의 만족을 위해서 일했던 노동자는 세금 때문에 그만큼의 만족을 빼앗겨버리는 셈”이라고 말한다.
“투표함이 國富를 증가시킬 수 없다”
12월 3일 607조7000억원 규모의 2022년도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재명에 의한, 이재명을 위한, 이재명의 예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내년 대선을 의식한 예산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강력히 요구해온 지역화폐 예산이 기존 6조원에서 30조원으로 대폭 확대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에 앞서 기획재정부가 무리한 예산 팽창에 이의를 제기하자 민주당은 “직무유기” “국정조사” 운운하면서 기재부 공무원들을 겁박(劫迫)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돈이 나오나? 도대체 그 돈은 어디서 나오나? 바스티아는 말한다.
“누구라도 그 돈이 투표함에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투표함이 우리 국부(國富)를 증가시킬 수 없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투표한다고 해서 없던 돈이 새로 생겨날 수 없음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결에 의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딘가에 있던 것을 뺏어다가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누군가가 그 돈을 받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가 그 돈을 뺏겨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바스티아는 “누구라도 그 돈이 투표함에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법’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면, 없는 돈도 만들어낼 수 있고, 얼마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국가를 빚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바스티아는 ‘법’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를 궁구(窮究)한다. 이게 이 책의 이름이 《경제》가 아니라 《법》인 이유다.
법의 역할은 개인의 권리 보장
그렇다면 바스티아가 생각하는 ‘법’은 어떤 것일까?
“개인적인 폭력이 개인적인 방어를 위해서 사용될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듯이, 각자가 가진 폭력의 합(合)인 법도 자기방어 이외의 다른 어떤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법이라는 것은 각 개인의 자기방어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던 각자의 권리를 집단화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바스티아는 ‘법’의 개념을, 이른바 야경(夜警)국가의 관점에서 너무 소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법은 개인의 자유권을 보장하는 차원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국민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사실 바스티아가 활동하던 170여 년 전에도 이미 이런 요구는 높았다. 2월혁명의 와중에 이런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바스티아는 이렇게 말한다.
“법이라는 것이 그것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강제력을 이용해서 노사(勞使)관계의 체계를 강요하거나, 교육의 방법 및 내용을 강요하거나, 신앙이나 종교를 강요한다면, 법은 금지(negation)의 원칙이 아니라 허용(positive)의 원칙 위에 서게 된다. 그 결과 입법자의 의지가 시민 각자의 의지를 대체하고, 입법자들의 주도권이 시민 각자의 주도권을 대체한다.”
“약탈의 금지 이상의 것을 법으로부터 기대해서도 안 된다. 제대로 된 법이라면 만인(萬人)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법이 그 이상의 것을 하려고 시도한다면 그 뒤에 오는 결과는 필연적으로 인권의 침해이다.”
바스티아가 걱정한 것은 법이라는 강제력의 확대가 궁극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가운데서도 바스티아가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재산권이다. 바스티아는 “사회, 인격, 개인은 법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면서 “법이 있기 때문에 재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재산이 있기 때문에 법이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바스티아가 말하듯 인간의 심성 속에 노동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 남들의 재산을 탈취하려는 성향이 내재되어 있다. 법의 이름으로 남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법률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문재인(文在寅) 정부하에서 만들어진 ‘징벌적(懲罰的)’ 종부세(종합부동산세) 관련 입법, 임대차보호법, 그리고 사학(私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개정사립학교법 등이 그 예이다. 바스티아는 “세상에 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한 약탈도 부도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재산의 소유자의 동의 없이, 그리고 보상 없이 소유자로부터 그 재산을 창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로 이전(移轉)되어간다면 그 수단이 강제력이든 사기든 간에 나는 그것을 재산권의 침해라고 부르는 동시에 약탈이라고 부른다. 법이 마땅히 막아야 할 것들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범한다면 그것 역시 약탈이며,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더욱 걱정스러운 약탈임이 분명하다.”
법의 이름으로 ‘약탈’을 자행하는 자들이 조자룡 헌 칼 쓰듯 내세우는 주장들이 있다.
하나는 국회의 다수결(多數決)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다수결이면 뭐든 다 해도 된다’는 믿음에서일까? 이재명 후보는 지난 8월 재난지원금 지급과 관련, “항상 민주당의 180석 얘기가 나오는데, 과감하게 날치기해서 강행 처리해야 한다”면서, 반(反)의회주의적인 날치기를 대놓고 독려하기까지 했다. 이 후보는 11월 24일 원내대책회의에서는 “행정기관이 입법기관을 반대하는 게 어딨느냐” “행안위는 (여당인) 위원장이 방망이를 들고 있다.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으면 하자”는 소리도 했다.
“집단의 완력으로 자유·재산 침해 안 돼”
요즘 그보다 더 애용되는 것은 그로 인해 손해를 보는 이는 소수(少數)이고, 국민의 절대다수는 그로 인해 이득을 본다는 논리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11월 17일 “1주택자 종부세 과세 기준이 공시가 기준 11억원으로 높아진 결과 실제로 종부세를 낼 1주택자는 전체의 1.7%뿐”이라고 주장했다. 정치인만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명색이 엘리트 공무원이라는 기재부 차관도 “98% 국민은 종부세와 무관하다. 과장된 우려들이 있다. 분명한 것은 전체 국민 중 약 98%의 국민들께는 고지서가 발송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98%의 국민은 종부세를 내지 않으니까, 그들의 이름 아래 나머지 국민은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인가? 다수의 국민에게 이익이 된다면 소수의 권리는 짓밟혀도 된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바스티아는 이렇게 항변한다.
“각 개인이 완력을 사용해서 타인의 인격과 자유와 재산을 해치는 것을 정당하다고 할 수 없듯이,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완력을 사용해 다른 개인이나 다른 집단의 인격과 자유, 재산을 침해하는 것이 정당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는 법을 통한 약탈”
약탈, 특히 합법의 탈을 쓴 약탈에 대한 바스티아의 경고는 계속된다.
“그들은 또 국가가 자신들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소비를 많이 할 것이기 때문에 가난한 노동자들에게도 더 많은 돈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할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다. 지금은 국민들의 뇌리에서 거의 잊혔지만, 문재인 정권의 대표 경제정책이었던 소주성(소득주도성장)의 논리와 흡사하다. 정부의 선전에 따르면 소주성은 ‘가계의 부담을 줄이고 소득은 높여, 늘어난 가계소득이 소비를 진작하여 경제성장을 이끌고, 경제성장의 성과가 좋은 일자리로 이어지는 선순환 경제구조를 만드는 경제정책’이라고 한다. 말은 아름답다. 하지만 소득을 높이는 방법이 문제였다. 기업의 활동과 일자리 창출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업의 팔을 비틀어서 최저임금을 올리거나 각종 명목으로 돈을 뿌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의 경제책사로 알려진 최배근 건국대 교수는 2020년 6월 민주당 주최 간담회에서 “한국은행이 돈을 마구 찍어서 물가가 100배 상승했다고 하면, 100억원 가진 사람은 돈의 실질가치가 1억원으로 줄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피해가 없다”는 주장을 한 적도 있다. 돈을 찍어서 서민들에게 나누어주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는 얘기다.
바스티아는 “그런 궤변으로부터 등을 돌려야 한다. 합법적 약탈은 바로 그런 식의 정교한 논리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또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의 희생을 대가로 해서 잘살 수 있다는 환상이 우리 시대를 풍미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그런 풍조를 한마디로 표현한다. 바로 ‘사회주의’이다.
“합법적 약탈을 자행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관세, 산업보호정책, 장려금, 보조금, 누진소득세, 무상교육, 근로의 권리, 이윤에 대한 권리, 임금권, 생존권, 생산수단을 소유할 권리, 무이자 대부 등 수없이 많은 것이 합법적 약탈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같은 합법적 약탈수단을 모두 합치면 사회주의가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스티아가 노동자를 비롯한 소외계층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들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을 위한 산업보호정책도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스티아는 ‘혜택은 나에게 주고, 비용은 남들에게 부담시키라’는 발상은 그것이 왼쪽에서 나온 것이든 오른쪽에서 나온 것이든 철저하게 반대한다. 그는 “보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그 발전단계만 다를 뿐 같은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꼬집는다.
‘소주성’의 실패 예언
앞에서 소주성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바스티아는 소주성의 파산을 예언하는 듯한 말도 했다.
“어느 투자자가 감히 공장을 세우려 하고, 누가 기업을 시작하려 하겠는가. 어제는 하루에 몇 시간 이상을 일해서는 안 된다는 법을 만들고, 오늘은 또다시 어떤 직종에 대해서는 얼마 이상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 것이다. 내일, 모레, 그리고 계속해서 어떤 법들이 만들어질지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일단 입법자들이 다른 시민들과 극복할 수 없는 거리를 두게 되고, 또 그들 자신의 재산처럼 되어버린 다른 사람의 시간과 노동력과 거래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고 믿는 한, 법이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바꾸어갈지에 대해서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상황하에서 과연 누가 새로운 사업을 벌일 수 있겠는가.”
실패한 정책의 입안자(立案者)들에게도 할 말은 있다. 그 의도는 선(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스티아는 말한다.
“각각의 계획이 내세우고 있는 의도는 모든 사람에게 번영의 결과를 고루 나누어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야 어찌 됐든 그 결과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가난을 나누어주는 것일 뿐이다.”
옛날 소련이 그랬고, 마오쩌둥(毛澤東) 치하의 중국이 그랬고, 차베스-마두로 치하의 베네수엘라가 그렇다.
바스티아는 ‘정원사들이 나무를 가지고 마음 내키는 대로 피라미드, 파라솔, 정육면체, 원뿔, 꽃병, 시렁, 실패, 부채 같은 것으로 다듬듯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理想)에 맞춰서 세상을 재단(裁斷)하려는 설계주의자들을 철저하게 반대한다. 바스티아가 그들의 실험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어설픈 실험에 애꿎은 국민들을 끌어들이지는 말라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의 비용과 위험을 부담하는 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고안해내고, 그들이 개혁안을 전파(傳播)시키고, 그것을 채택할 것을 설득시키고, 자기들 스스로에게 그것을 실험하는 것에 대해 반대할 의사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법을 통해서, 즉 경찰력과 우리 모두가 낸 세금을 이용해서, 우리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완강히 반대한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실험에 지난 5년 동안 우리 국민은 얼마나 많은 비용-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던-을 치러야 했나?
“박애를 강요하지 마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바스티아의 주장은 낡은 19세기적 자유 개념의 소산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또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소외계층에 대한 무관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즐겨 읽었다는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조차 지난달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의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오면, 국가는 그들을 돕지 말고 그저 멍하니 지켜봐야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스티아가 평등, 박애(博愛), 연대(連帶) 같은 생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법으로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박애라는 것이 강요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조할 수 없다. 우리는 법적인 강제력이 배제된 상태에서 베풀어지는 박애만을 인정한다. 자발적이지 않은 박애는 있을 수 없다. 법으로 박애를 선포하는 것은 박애를 절멸시키는 것이다. 법이 인간에게 정의(正義)로움을 강요할 수는 있지만, 자기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바스티아는 “혹자는 국가에 의해 강요되는 평등을 반대한다고 해서, 우리가 마치 평등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여긴다”면서 “이것은 마치 우리가 국가에 의한 곡물 경작을 반대한다고 해서 인간이 먹는 것을 반대하는 것쯤으로 여기는 것과 다름없다”고 꼬집는다.
바스티아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법으로 평등, 박애, 연대 같은 가치들을 강요할 때, 자유가 침해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법으로 강요되는 동포애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유를 파괴하고 정의의 기반을 잠식할 것이다.”
오히려 바스티아는 평등, 박애, 연대, 희생 같은 말들을 입에 달고 사는 인간들에게 “너 자신을 돌아보라”고 역공(逆攻)을 취한다.
내로남불
“무수한 정치이론가들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기심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개인주의를 저주하는 대신 헌신과 희생과 박애 같은 단어들을 끝없이 되뇌고 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을 한번 돌아보라고 하라. 그들이 남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거창한 덕목들을 과연 자기 자신들은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
바스티아가 그런 인간들을 두고 ‘자기가 쓴 책에서 실컷 개인주의를 비난해놓고는 되돌아서서 그 책의 인세를 챙길 것’이라고 꼬집는 대목에서는 절로 웃음이 나온다. TV에서는 “국회의장의 망치와 목수의 망치가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하고서는 자기가 마이크를 잡은 대가(代價)는 남들보다 훨씬 두툼하게 챙겼던 어떤 연예인을 비롯하여 소위 진보좌파 지식인들의 내로남불 행태들이 떠올라서였다.
국가에 의해 강요된 종교의 통일
‘박애정신’은 법이 무한대(無限大)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휘두를 수 있게 하는 아름다운 명분이었다. 바스티아는 법이 인간의 영적(靈的)·지적(知的) 영역까지 침투하려는 시도를 경계한다. 서구(西歐)의 전통에서 이 문제는 종교의 문제로 나타난다.
“아무리 박애정신의 이름을 내건다고 하더라도 국가에 의해 강요된 종교의 통일은 누군가를 억압하는 행위, 즉 정의롭지 못한 행위이다. 진리는 다른 곳에 있는데 국가가 나서서 엉뚱한 믿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단일 종교라는 것은 사람들이 자유로이 생각하는 가운데에 진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확신이 들 때에만 가능해야 한다.
우리가 법에 대하여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종교라도 믿을 수 있는 자유, 그것이 전부이다. 그것으로 인해 어떤 종류의 지적인 무정부(無政府) 상태가 올지라도 말이다. 그 같은 무정부 상태를 통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지적 무정부 상태의 끝에는 통일이 찾아온다. 지적인 진화(進化)의 과정을 거치면서 말이다. 통일이라는 것은 시작점이 아니라 종착점이다. 단일 종교를 강요하는 법은 정의의 원칙에 위배된다.”
종교의 문제와는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이 지점에서 문재인 정권하에서 강요되고 있는 소위 역사왜곡금지법이 떠올랐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지난 11월 28일 광주(光州)를 찾아가서 “당연히 인정해야 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왜곡하고 조작하고 부인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역사왜곡단죄법’을 반드시 만들어야겠다”고 주장했다.
바스티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가에 의해 강요된 역사 해석의 통일은 누군가를 억압하는 행위, 즉 정의롭지 못한 행위이다. 진실은 다른 곳에 있는데 국가가 나서서 엉뚱한 믿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국가란 무엇인가’
바스티아가 《법》에서 논의한 내용들은 결국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서 ‘법’ ‘재산권과 법’ ‘정의와 박애’를 거쳐 ‘국가’라는 장(章)으로 끝난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스티아의 주장들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歸結)된다.
“국가는 직접 무엇을 생산하는 자가 아니라 안정을 제공하는 역할에만 그쳐야 한다는 영원한 원칙이 지켜질 경우, 국가재정을 운영함에 있어서도 절약과 질서가 찾아온다. 이 원칙만 가지고도 번영은 찾아오겠지만, 그 밖에도 공평한 조세 부담이라는 부가적인 혜택도 주어진다.
국가는 그 스스로는 어떤 자원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노동자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뺏어오지 않는 한 국가는 그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국가가 무엇인가에 끼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은 국가의 대리인(代理人)들이 저지르는 한심하고 값비싼 행동들로 대체되어버린다.”
‘국가의 대리인들이 저지르는 한심하고 값비싼 행동들’을 우리는 지난 5년 동안 지겹도록 보아왔다. 그 ‘국가의 대리인’들이 외친 캐치프레이즈가 있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 그것은 1848년 2월혁명 직후 노동자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프랑스인들이 요구하고, 당대의 저명한 정치인, 아니 정상배(政商輩)들이 약속했던 것이기도 하다. 바스티아는 ‘국가’를 의인화(擬人化)해서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를 요구하는 인간들을 신랄하게 야유한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
“당신들은 국가가 모든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대신 일을 해주며, 기업가들에게는 자본을, 사업을 하려는 자들에게는 대출을, 상처받은 자들에게는 바를 약을,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향유를, 곤란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조언을, 모든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해결책을,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지루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락을, 어린이들에게는 우유를, 노인들에게는 포도주를 나누어줄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주고, 우리의 모든 욕구를 미리 알아서 해결해주며,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고, 우리의 잘못을 고쳐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국가가 제대로 일하는 한 우리는 미래를 내다볼 필요도, 신중할 필요도, 결단을 내릴 필요도, 현명해질 필요도, 경험할 필요도, 질서를 지킬 필요도, 절제할 필요도, 근면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내게 왜 그런 국가를 원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부(富)와 학식과 충분한 의료와 무제한의 국고(國庫)와 무오류(無誤謬)의 조언, 그런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국가라면 난들 왜 그런 국가를 마다하겠습니까. 내가 당신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지 그런 국가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달라는 것뿐입니다.”
곧이어서 바스티아는 “말은 이렇게 하지만 결국 그 일에 성공한 사람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혁명을 통해서 국가를 뒤엎어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국가가 할 수 있다고 호언(豪言)한 모순투성이의 계획들을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 이래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던 수많은 환상 중에서 가장 괴상한 환상에 의해 우리 모두가 기만(欺瞞)당해왔다는 사실을 다시 말할 필요가 있을까?”
바스티아가 보기에 국가라는 것은 ‘만인이 만인을 등쳐먹고 사는 거대한 허구(虛構)’이다. 하지만 법의 탈을 쓰고 약탈을 자행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국가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다.
“양심(良心)의 가책(呵責)을 잠재우는 데에 국가만 한 것이 있겠는가. 약탈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에 국가를 내세우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겠는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국가 자신이 약탈자가 된다.
“‘너,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도 공정하고 명예롭다는 소리를 듣는 국가에 이르노라. 많은 사람으로부터 빼앗은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줄지어다.’
세상에 맙소사! 국가라는 작자는 그같이 악마적인 요구를 기꺼이 들어줄 태세를 갖추고 있다.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각료들이나 관료들도 그들의 부와 영향력이 확대되기를 원하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그것이 자기들에게 가져다줄 기회를 놓칠 이유가 있겠는가. 국가는 대중이 자신들에게 맡긴 일로부터 많은 이익이 생긴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챈다. 국가는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것을 이용해서 국가는 조직과 특권을 늘려갈 것이다. 대중으로부터 떼어낸 자원의 압도적인 부분을 자신의 몫으로 착복하게 될 것이다.”
바스티아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면 그러기 위한 자원이 있어야 할 텐데 그 자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결국 받는 사람이 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면서 “그 과정에서 기생충처럼 탐욕스럽게 제 몫을 챙기는 거간꾼(공무원)들을 거쳐야만 할 텐데, 그 과정에서 거두어진 자원이 줄어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지적한다. 이재명 후보가 성남시장 시절 ‘공익(公益)’을 내세우면서 ‘설계’한 대장동 개발에서, LH공사에서, 박원순(朴元淳) 전 서울시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마을공동체사업이나 태양광발전사업에서 우리는 그 ‘기생충 같은 거간꾼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문재인 정권은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건강보험료를 더 내야 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권은 종부세를 통해 부동산값을 잡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집 한 채 가진 사람들도, 그리고 서울 강남뿐 아니라 웬만한 수도권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세금폭탄’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은 숨겼다.
이재명 후보는 기본소득·기본주택·기본금융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세금을 기본으로 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고 있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0.17% 수준인 부동산 실효 보유세율을 1%까지 끌어올리겠다면서 “(이렇게 거둔 세금을 기본소득으로) 국민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드리면 90%는 안 내거나, 내는 것보다 받는 게 더 많아 저항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과거 증세(增稅) 사례나 종부세 파동 등으로 볼 때에 그 10%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마어마한 부자들이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 중산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함정이다.
“국가는 양손을 가지고 있다”
바스티아는 “국가는 양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한 손으로는 국민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뺏어다가 다른 손으로는 그것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한 손은 친절하지만 다른 한 손은 거칠다. 친절한 손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쪽 손이 거친 행동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뺏어만 가고 다시 돌려주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손은 착복을 하려는 습성이 있다. 우리는 그 같은 일을 보아왔다. 국민들에게 나누어준다는 명목으로 거두어가 놓고서는 그 일부, 또는 전부를 착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 있다. 국민들로부터 거두어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국가가 국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반드시 그럴 것이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은 여전히 국민들로부터 거두어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누어주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바스티아는 “불가능한 약속을 할 수는 있지만 누구든 그것을 지킬 수는 없다”면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더 이상 기만당하지 마라. 선동가들은 당신들에게 거친 손을 숨긴 채 늘 친절한 다른 쪽 손만을 보여준다. 만일 두 손을 동시에 다 보여주어야 한다면 선동가들이 설 자리는 없어지고 만다.”⊙
그에 앞서 11월 30일 윤석열(尹錫悅)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는 자기가 집권하면 소상공인들에게 50조원의 손실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주장하던 이재명 후보는 “윤 후보가 말한 (소상공인 손실보상금) 50조원 지원 약속, 저도 받겠다”며 수용 의사를 밝혔다. 김종인 국민의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은 한술 더 떴다. 그는 12월 8일 코로나19 피해 보상과 관련해 “윤석열 대선 후보가 50조원 투입을 공약했는데, 그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라며 “집권하면 100조원대 투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랏돈을 풀어서 국민들에게 나누어주자는 데는 여야(與野), 보수-진보가 따로 없는 셈이다. 다들 대단한 화수분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퍼내도 퍼내도 한없이 돈이 나온다는 화수분 말이다. 12월 3일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킨 607조7000억원 규모의 ‘슈퍼 예산’은 아마 그런 인식의 소산일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그런 화수분은 없다. 국토보유세를 내야 하는 부동산 가진 국민들도, 탄소세를 내야 할 기업들도, 마르지 않는 화수분은 갖고 있지 않다.
몇십 조를 우습게 아는 대선(大選) 후보들 눈에는 자기들이 뿌리는 돈에 환호하는 유권자들만 보일 것이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19세기 중반 활동했던 프랑스의 자유주의자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1801~1850년)의 《법》은 경제에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랄한 필치(筆致)로 보여주는 책이다. 바스티아가 활동하던 시대, 특히 1848년은 2월혁명으로 루이 필립의 왕정(王政)이 무너지던 정치적 격변기였다. 이를 틈 타 노동자·농민 등 소외계층은 물론 기업인, 지주, 문화예술인, 식민주의자 할 것 없이 너도나도 ‘국가’를 향해 자신들의 요구를 마구잡이로 들이밀었다. 《법》은 그런 거센 탁류(濁流)에 맞서는 외로운 외침이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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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바스티아 |
“경제활동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그것이 하나의 행동이든, 제도이든, 법이든 간에 한 가지 효과에만 그치지 않고 일련의 연속된 효과를 만들어낸다. 여러 가지 효과 중에서 당장 나타나는 효과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눈에 잘 띈다. 반면 시간을 두고 서서히 나타나는 효과들도 많은데, 그런 효과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것이 이 책을 일관하는 바스티아의 메시지다. 이 주장을 키(key)로 해서 바스티아는 세금, 재정, 복지, 고용, 보호무역, 각종 지원금(보조금) 등에 대한 자기의 생각들을 펼쳐나간다.
바스티아는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통찰하는 것이 ‘사이비(似而非) 경제학자’와 ‘진정한 경제학자’들을 나누는 기준이라고 강조한다.
“사이비 경제학자와 진정한 경제학자들 사이의 차이는 오직 한 가지이다. 사이비 경제학자들은 오직 눈에 쉽게 띄는 효과들에만 집착한다. 반면 진정한 경제학자들은 보이는 효과만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나타나는 간접적인 효과까지도 내다볼 수 있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차이지만, 그로 인한 결과의 차이는 엄청나다. 눈에 당장 보이는 효과가 좋아 보일 경우 그로 인한 장기적이고 간접적인 효과들은 십중팔구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주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이비 경제학자들은 당장 눈에 띄는 하잘것없는 이득에 집착한 나머지 두고두고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반면 진정한 경제학자들은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더 큰 이득을 추구한다.”
경제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바스티아는 ‘깨어진 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누군가의 집 유리창이 깨지면, 유리 가게 주인이 돈을 벌 것이고, 그런 식으로 돈이 돌면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이야기다. 아마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스티아는 “그 같은 주장은 보이는 결과에만 사로잡힌 소치”라면서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6프랑을 유리를 사는 데에 지출한 결과 다른 물건에 대한 지출이 그만큼 줄었다는 것을 당신은 보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 돈을 유리 사는 데에 쓰지 않았다면 새 구두를 사거나 책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엔가 돈을 지출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지출할 돈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늘에 가려진 제3의 인물
이런 논리는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 매달 들어오는 수입이 빤한 월급쟁이가 갑자기 폭등한 종부세나 이재명 후보가 주장하는 국토보유세를 내기 위해 지갑을 털어야 한다면, 그는 새 옷이나 TV 사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기업이 탄소세를 내야 한다면, 인건비나 연구개발(R&D) 투자를 줄여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라고 강제하거나 노조가 급격한 임금 인상을 요구할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코로나19 지원금이나 가덕도 신공항 건설에 수십조원을 쏟아붓는다면, 다른 분야의 예산을 줄일 수밖에 없다. 병사들의 월급을 올려주기 위해 전력(戰力) 증강 예산에 손을 댈 수도 있을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또 있다. 바스티아의 ‘깨진 유리창’ 이야기 속 등장인물은 유리창이 깨진 집주인과 유리 가게 주인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두 사람 말고도 ‘그늘에 가려진 제3의 인물’이 있다. 바로 신발 제조업자나 서점 주인, 그 밖의 다른 상인이나 제조업자다. 이들은 유리가 깨진 사건으로 손해를 본 사람들이다. 유리가 깨지는 바람에 그들은 구두나 책을 팔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바스티아는 “1프랑을 세금으로 낸 사람은 더 이상 그 1프랑을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없다. 그 1프랑에 해당하는 만큼의 만족을 잃게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면서 “1프랑어치의 만족을 위해서 일했던 노동자는 세금 때문에 그만큼의 만족을 빼앗겨버리는 셈”이라고 말한다.
“투표함이 國富를 증가시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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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는 2021년 12월 6일 소상공인과 만난 자리에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재정지출 확대를 주장했다. 사진=조선DB |
하지만 그런다고 돈이 나오나? 도대체 그 돈은 어디서 나오나? 바스티아는 말한다.
“누구라도 그 돈이 투표함에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투표함이 우리 국부(國富)를 증가시킬 수 없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투표한다고 해서 없던 돈이 새로 생겨날 수 없음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결에 의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딘가에 있던 것을 뺏어다가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누군가가 그 돈을 받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가 그 돈을 뺏겨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바스티아는 “누구라도 그 돈이 투표함에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법’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면, 없는 돈도 만들어낼 수 있고, 얼마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국가를 빚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바스티아는 ‘법’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를 궁구(窮究)한다. 이게 이 책의 이름이 《경제》가 아니라 《법》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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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2월혁명. 군중이 들고 있는 붉은기와 약탈품들의 모습이 보인다. |
“개인적인 폭력이 개인적인 방어를 위해서 사용될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듯이, 각자가 가진 폭력의 합(合)인 법도 자기방어 이외의 다른 어떤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법이라는 것은 각 개인의 자기방어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던 각자의 권리를 집단화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바스티아는 ‘법’의 개념을, 이른바 야경(夜警)국가의 관점에서 너무 소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법은 개인의 자유권을 보장하는 차원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국민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사실 바스티아가 활동하던 170여 년 전에도 이미 이런 요구는 높았다. 2월혁명의 와중에 이런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바스티아는 이렇게 말한다.
“법이라는 것이 그것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강제력을 이용해서 노사(勞使)관계의 체계를 강요하거나, 교육의 방법 및 내용을 강요하거나, 신앙이나 종교를 강요한다면, 법은 금지(negation)의 원칙이 아니라 허용(positive)의 원칙 위에 서게 된다. 그 결과 입법자의 의지가 시민 각자의 의지를 대체하고, 입법자들의 주도권이 시민 각자의 주도권을 대체한다.”
“약탈의 금지 이상의 것을 법으로부터 기대해서도 안 된다. 제대로 된 법이라면 만인(萬人)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법이 그 이상의 것을 하려고 시도한다면 그 뒤에 오는 결과는 필연적으로 인권의 침해이다.”
바스티아가 걱정한 것은 법이라는 강제력의 확대가 궁극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가운데서도 바스티아가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재산권이다. 바스티아는 “사회, 인격, 개인은 법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면서 “법이 있기 때문에 재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재산이 있기 때문에 법이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바스티아가 말하듯 인간의 심성 속에 노동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 남들의 재산을 탈취하려는 성향이 내재되어 있다. 법의 이름으로 남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법률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문재인(文在寅) 정부하에서 만들어진 ‘징벌적(懲罰的)’ 종부세(종합부동산세) 관련 입법, 임대차보호법, 그리고 사학(私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개정사립학교법 등이 그 예이다. 바스티아는 “세상에 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한 약탈도 부도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재산의 소유자의 동의 없이, 그리고 보상 없이 소유자로부터 그 재산을 창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로 이전(移轉)되어간다면 그 수단이 강제력이든 사기든 간에 나는 그것을 재산권의 침해라고 부르는 동시에 약탈이라고 부른다. 법이 마땅히 막아야 할 것들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범한다면 그것 역시 약탈이며,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더욱 걱정스러운 약탈임이 분명하다.”
법의 이름으로 ‘약탈’을 자행하는 자들이 조자룡 헌 칼 쓰듯 내세우는 주장들이 있다.
하나는 국회의 다수결(多數決)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다수결이면 뭐든 다 해도 된다’는 믿음에서일까? 이재명 후보는 지난 8월 재난지원금 지급과 관련, “항상 민주당의 180석 얘기가 나오는데, 과감하게 날치기해서 강행 처리해야 한다”면서, 반(反)의회주의적인 날치기를 대놓고 독려하기까지 했다. 이 후보는 11월 24일 원내대책회의에서는 “행정기관이 입법기관을 반대하는 게 어딨느냐” “행안위는 (여당인) 위원장이 방망이를 들고 있다.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으면 하자”는 소리도 했다.
“집단의 완력으로 자유·재산 침해 안 돼”
요즘 그보다 더 애용되는 것은 그로 인해 손해를 보는 이는 소수(少數)이고, 국민의 절대다수는 그로 인해 이득을 본다는 논리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11월 17일 “1주택자 종부세 과세 기준이 공시가 기준 11억원으로 높아진 결과 실제로 종부세를 낼 1주택자는 전체의 1.7%뿐”이라고 주장했다. 정치인만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명색이 엘리트 공무원이라는 기재부 차관도 “98% 국민은 종부세와 무관하다. 과장된 우려들이 있다. 분명한 것은 전체 국민 중 약 98%의 국민들께는 고지서가 발송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98%의 국민은 종부세를 내지 않으니까, 그들의 이름 아래 나머지 국민은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인가? 다수의 국민에게 이익이 된다면 소수의 권리는 짓밟혀도 된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바스티아는 이렇게 항변한다.
“각 개인이 완력을 사용해서 타인의 인격과 자유와 재산을 해치는 것을 정당하다고 할 수 없듯이,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완력을 사용해 다른 개인이나 다른 집단의 인격과 자유, 재산을 침해하는 것이 정당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는 법을 통한 약탈”
약탈, 특히 합법의 탈을 쓴 약탈에 대한 바스티아의 경고는 계속된다.
“그들은 또 국가가 자신들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소비를 많이 할 것이기 때문에 가난한 노동자들에게도 더 많은 돈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할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다. 지금은 국민들의 뇌리에서 거의 잊혔지만, 문재인 정권의 대표 경제정책이었던 소주성(소득주도성장)의 논리와 흡사하다. 정부의 선전에 따르면 소주성은 ‘가계의 부담을 줄이고 소득은 높여, 늘어난 가계소득이 소비를 진작하여 경제성장을 이끌고, 경제성장의 성과가 좋은 일자리로 이어지는 선순환 경제구조를 만드는 경제정책’이라고 한다. 말은 아름답다. 하지만 소득을 높이는 방법이 문제였다. 기업의 활동과 일자리 창출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업의 팔을 비틀어서 최저임금을 올리거나 각종 명목으로 돈을 뿌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의 경제책사로 알려진 최배근 건국대 교수는 2020년 6월 민주당 주최 간담회에서 “한국은행이 돈을 마구 찍어서 물가가 100배 상승했다고 하면, 100억원 가진 사람은 돈의 실질가치가 1억원으로 줄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피해가 없다”는 주장을 한 적도 있다. 돈을 찍어서 서민들에게 나누어주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는 얘기다.
바스티아는 “그런 궤변으로부터 등을 돌려야 한다. 합법적 약탈은 바로 그런 식의 정교한 논리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또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의 희생을 대가로 해서 잘살 수 있다는 환상이 우리 시대를 풍미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그런 풍조를 한마디로 표현한다. 바로 ‘사회주의’이다.
“합법적 약탈을 자행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관세, 산업보호정책, 장려금, 보조금, 누진소득세, 무상교육, 근로의 권리, 이윤에 대한 권리, 임금권, 생존권, 생산수단을 소유할 권리, 무이자 대부 등 수없이 많은 것이 합법적 약탈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같은 합법적 약탈수단을 모두 합치면 사회주의가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스티아가 노동자를 비롯한 소외계층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들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을 위한 산업보호정책도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스티아는 ‘혜택은 나에게 주고, 비용은 남들에게 부담시키라’는 발상은 그것이 왼쪽에서 나온 것이든 오른쪽에서 나온 것이든 철저하게 반대한다. 그는 “보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그 발전단계만 다를 뿐 같은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꼬집는다.
앞에서 소주성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바스티아는 소주성의 파산을 예언하는 듯한 말도 했다.
“어느 투자자가 감히 공장을 세우려 하고, 누가 기업을 시작하려 하겠는가. 어제는 하루에 몇 시간 이상을 일해서는 안 된다는 법을 만들고, 오늘은 또다시 어떤 직종에 대해서는 얼마 이상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 것이다. 내일, 모레, 그리고 계속해서 어떤 법들이 만들어질지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일단 입법자들이 다른 시민들과 극복할 수 없는 거리를 두게 되고, 또 그들 자신의 재산처럼 되어버린 다른 사람의 시간과 노동력과 거래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고 믿는 한, 법이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바꾸어갈지에 대해서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상황하에서 과연 누가 새로운 사업을 벌일 수 있겠는가.”
실패한 정책의 입안자(立案者)들에게도 할 말은 있다. 그 의도는 선(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스티아는 말한다.
“각각의 계획이 내세우고 있는 의도는 모든 사람에게 번영의 결과를 고루 나누어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야 어찌 됐든 그 결과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가난을 나누어주는 것일 뿐이다.”
옛날 소련이 그랬고, 마오쩌둥(毛澤東) 치하의 중국이 그랬고, 차베스-마두로 치하의 베네수엘라가 그렇다.
바스티아는 ‘정원사들이 나무를 가지고 마음 내키는 대로 피라미드, 파라솔, 정육면체, 원뿔, 꽃병, 시렁, 실패, 부채 같은 것으로 다듬듯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理想)에 맞춰서 세상을 재단(裁斷)하려는 설계주의자들을 철저하게 반대한다. 바스티아가 그들의 실험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어설픈 실험에 애꿎은 국민들을 끌어들이지는 말라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의 비용과 위험을 부담하는 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고안해내고, 그들이 개혁안을 전파(傳播)시키고, 그것을 채택할 것을 설득시키고, 자기들 스스로에게 그것을 실험하는 것에 대해 반대할 의사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법을 통해서, 즉 경찰력과 우리 모두가 낸 세금을 이용해서, 우리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완강히 반대한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실험에 지난 5년 동안 우리 국민은 얼마나 많은 비용-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던-을 치러야 했나?
“박애를 강요하지 마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바스티아의 주장은 낡은 19세기적 자유 개념의 소산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또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소외계층에 대한 무관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즐겨 읽었다는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조차 지난달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의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오면, 국가는 그들을 돕지 말고 그저 멍하니 지켜봐야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스티아가 평등, 박애(博愛), 연대(連帶) 같은 생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법으로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박애라는 것이 강요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조할 수 없다. 우리는 법적인 강제력이 배제된 상태에서 베풀어지는 박애만을 인정한다. 자발적이지 않은 박애는 있을 수 없다. 법으로 박애를 선포하는 것은 박애를 절멸시키는 것이다. 법이 인간에게 정의(正義)로움을 강요할 수는 있지만, 자기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바스티아는 “혹자는 국가에 의해 강요되는 평등을 반대한다고 해서, 우리가 마치 평등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여긴다”면서 “이것은 마치 우리가 국가에 의한 곡물 경작을 반대한다고 해서 인간이 먹는 것을 반대하는 것쯤으로 여기는 것과 다름없다”고 꼬집는다.
바스티아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법으로 평등, 박애, 연대 같은 가치들을 강요할 때, 자유가 침해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법으로 강요되는 동포애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유를 파괴하고 정의의 기반을 잠식할 것이다.”
오히려 바스티아는 평등, 박애, 연대, 희생 같은 말들을 입에 달고 사는 인간들에게 “너 자신을 돌아보라”고 역공(逆攻)을 취한다.
내로남불
“무수한 정치이론가들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기심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개인주의를 저주하는 대신 헌신과 희생과 박애 같은 단어들을 끝없이 되뇌고 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을 한번 돌아보라고 하라. 그들이 남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거창한 덕목들을 과연 자기 자신들은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
바스티아가 그런 인간들을 두고 ‘자기가 쓴 책에서 실컷 개인주의를 비난해놓고는 되돌아서서 그 책의 인세를 챙길 것’이라고 꼬집는 대목에서는 절로 웃음이 나온다. TV에서는 “국회의장의 망치와 목수의 망치가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하고서는 자기가 마이크를 잡은 대가(代價)는 남들보다 훨씬 두툼하게 챙겼던 어떤 연예인을 비롯하여 소위 진보좌파 지식인들의 내로남불 행태들이 떠올라서였다.
국가에 의해 강요된 종교의 통일
‘박애정신’은 법이 무한대(無限大)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휘두를 수 있게 하는 아름다운 명분이었다. 바스티아는 법이 인간의 영적(靈的)·지적(知的) 영역까지 침투하려는 시도를 경계한다. 서구(西歐)의 전통에서 이 문제는 종교의 문제로 나타난다.
“아무리 박애정신의 이름을 내건다고 하더라도 국가에 의해 강요된 종교의 통일은 누군가를 억압하는 행위, 즉 정의롭지 못한 행위이다. 진리는 다른 곳에 있는데 국가가 나서서 엉뚱한 믿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단일 종교라는 것은 사람들이 자유로이 생각하는 가운데에 진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확신이 들 때에만 가능해야 한다.
우리가 법에 대하여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종교라도 믿을 수 있는 자유, 그것이 전부이다. 그것으로 인해 어떤 종류의 지적인 무정부(無政府) 상태가 올지라도 말이다. 그 같은 무정부 상태를 통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지적 무정부 상태의 끝에는 통일이 찾아온다. 지적인 진화(進化)의 과정을 거치면서 말이다. 통일이라는 것은 시작점이 아니라 종착점이다. 단일 종교를 강요하는 법은 정의의 원칙에 위배된다.”
종교의 문제와는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이 지점에서 문재인 정권하에서 강요되고 있는 소위 역사왜곡금지법이 떠올랐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지난 11월 28일 광주(光州)를 찾아가서 “당연히 인정해야 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왜곡하고 조작하고 부인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역사왜곡단죄법’을 반드시 만들어야겠다”고 주장했다.
바스티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가에 의해 강요된 역사 해석의 통일은 누군가를 억압하는 행위, 즉 정의롭지 못한 행위이다. 진실은 다른 곳에 있는데 국가가 나서서 엉뚱한 믿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국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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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일 국가 치매책임제 관련 간담회. 문재인 대통령 뒤로 ‘치매, 이제 국가가 책임지겠습니다’라는 글귀가 보인다. 사진=뉴시스 |
짐작할 수 있겠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스티아의 주장들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歸結)된다.
“국가는 직접 무엇을 생산하는 자가 아니라 안정을 제공하는 역할에만 그쳐야 한다는 영원한 원칙이 지켜질 경우, 국가재정을 운영함에 있어서도 절약과 질서가 찾아온다. 이 원칙만 가지고도 번영은 찾아오겠지만, 그 밖에도 공평한 조세 부담이라는 부가적인 혜택도 주어진다.
국가는 그 스스로는 어떤 자원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노동자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뺏어오지 않는 한 국가는 그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국가가 무엇인가에 끼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은 국가의 대리인(代理人)들이 저지르는 한심하고 값비싼 행동들로 대체되어버린다.”
‘국가의 대리인들이 저지르는 한심하고 값비싼 행동들’을 우리는 지난 5년 동안 지겹도록 보아왔다. 그 ‘국가의 대리인’들이 외친 캐치프레이즈가 있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 그것은 1848년 2월혁명 직후 노동자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프랑스인들이 요구하고, 당대의 저명한 정치인, 아니 정상배(政商輩)들이 약속했던 것이기도 하다. 바스티아는 ‘국가’를 의인화(擬人化)해서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를 요구하는 인간들을 신랄하게 야유한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
“당신들은 국가가 모든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대신 일을 해주며, 기업가들에게는 자본을, 사업을 하려는 자들에게는 대출을, 상처받은 자들에게는 바를 약을,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향유를, 곤란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조언을, 모든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해결책을,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지루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락을, 어린이들에게는 우유를, 노인들에게는 포도주를 나누어줄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주고, 우리의 모든 욕구를 미리 알아서 해결해주며,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고, 우리의 잘못을 고쳐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국가가 제대로 일하는 한 우리는 미래를 내다볼 필요도, 신중할 필요도, 결단을 내릴 필요도, 현명해질 필요도, 경험할 필요도, 질서를 지킬 필요도, 절제할 필요도, 근면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내게 왜 그런 국가를 원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부(富)와 학식과 충분한 의료와 무제한의 국고(國庫)와 무오류(無誤謬)의 조언, 그런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국가라면 난들 왜 그런 국가를 마다하겠습니까. 내가 당신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지 그런 국가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달라는 것뿐입니다.”
곧이어서 바스티아는 “말은 이렇게 하지만 결국 그 일에 성공한 사람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혁명을 통해서 국가를 뒤엎어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국가가 할 수 있다고 호언(豪言)한 모순투성이의 계획들을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 이래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던 수많은 환상 중에서 가장 괴상한 환상에 의해 우리 모두가 기만(欺瞞)당해왔다는 사실을 다시 말할 필요가 있을까?”
바스티아가 보기에 국가라는 것은 ‘만인이 만인을 등쳐먹고 사는 거대한 허구(虛構)’이다. 하지만 법의 탈을 쓰고 약탈을 자행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국가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다.
“양심(良心)의 가책(呵責)을 잠재우는 데에 국가만 한 것이 있겠는가. 약탈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에 국가를 내세우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겠는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국가 자신이 약탈자가 된다.
“‘너,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도 공정하고 명예롭다는 소리를 듣는 국가에 이르노라. 많은 사람으로부터 빼앗은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줄지어다.’
세상에 맙소사! 국가라는 작자는 그같이 악마적인 요구를 기꺼이 들어줄 태세를 갖추고 있다.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각료들이나 관료들도 그들의 부와 영향력이 확대되기를 원하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그것이 자기들에게 가져다줄 기회를 놓칠 이유가 있겠는가. 국가는 대중이 자신들에게 맡긴 일로부터 많은 이익이 생긴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챈다. 국가는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것을 이용해서 국가는 조직과 특권을 늘려갈 것이다. 대중으로부터 떼어낸 자원의 압도적인 부분을 자신의 몫으로 착복하게 될 것이다.”
바스티아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면 그러기 위한 자원이 있어야 할 텐데 그 자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결국 받는 사람이 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면서 “그 과정에서 기생충처럼 탐욕스럽게 제 몫을 챙기는 거간꾼(공무원)들을 거쳐야만 할 텐데, 그 과정에서 거두어진 자원이 줄어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지적한다. 이재명 후보가 성남시장 시절 ‘공익(公益)’을 내세우면서 ‘설계’한 대장동 개발에서, LH공사에서, 박원순(朴元淳) 전 서울시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마을공동체사업이나 태양광발전사업에서 우리는 그 ‘기생충 같은 거간꾼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문재인 정권은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건강보험료를 더 내야 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권은 종부세를 통해 부동산값을 잡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집 한 채 가진 사람들도, 그리고 서울 강남뿐 아니라 웬만한 수도권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세금폭탄’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은 숨겼다.
이재명 후보는 기본소득·기본주택·기본금융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세금을 기본으로 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고 있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0.17% 수준인 부동산 실효 보유세율을 1%까지 끌어올리겠다면서 “(이렇게 거둔 세금을 기본소득으로) 국민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드리면 90%는 안 내거나, 내는 것보다 받는 게 더 많아 저항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과거 증세(增稅) 사례나 종부세 파동 등으로 볼 때에 그 10%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마어마한 부자들이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 중산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함정이다.
“국가는 양손을 가지고 있다”
바스티아는 “국가는 양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한 손으로는 국민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뺏어다가 다른 손으로는 그것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한 손은 친절하지만 다른 한 손은 거칠다. 친절한 손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쪽 손이 거친 행동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뺏어만 가고 다시 돌려주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손은 착복을 하려는 습성이 있다. 우리는 그 같은 일을 보아왔다. 국민들에게 나누어준다는 명목으로 거두어가 놓고서는 그 일부, 또는 전부를 착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 있다. 국민들로부터 거두어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국가가 국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반드시 그럴 것이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은 여전히 국민들로부터 거두어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누어주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바스티아는 “불가능한 약속을 할 수는 있지만 누구든 그것을 지킬 수는 없다”면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더 이상 기만당하지 마라. 선동가들은 당신들에게 거친 손을 숨긴 채 늘 친절한 다른 쪽 손만을 보여준다. 만일 두 손을 동시에 다 보여주어야 한다면 선동가들이 설 자리는 없어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