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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책으로 세상 읽기

줄리아 보이드의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全體主義 독일을 찬양한 ‘쓸모 있는 바보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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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는 ‘독일의 조지 워싱턴’… 의심할 나위 없이 평화를 지향하는 지도자”(로이드 조지 前 영국 총리)
⊙ “국가가 모든 힘을 가지고 있는 사회 체제가 곧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입 닥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영국 음악도 바버라 런클)
⊙ “노동자들은 일자리와 한 잔의 라테 커피면 충분… 히틀러 같은 사람 또 없다”(前 독일 공산주의자)
⊙ “우리가 독일의 유대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우리가 독일의 열망을 잘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영국 언론인 이블린 렌치 卿)
⊙ 노르웨이 작가 크누트 함순, 英 제국주의 비난하면서 히틀러 찬양… 괴벨스에게 노벨상 메달 선물
  태평천하(太平天下)다. 대형 쇼핑몰이나 백화점에 몰리는 소비자들, 아침이면 어린아이를 노란 버스에 태워 유치원으로 보내는 젊은 학부모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까르르 웃으며 거리를 걷는 여학생들, 아파트 단지 한구석에서 공을 차며 노는 사내아이들, 저녁마다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떠드는 직장인들, 카톡방(카카오톡 채팅방)에서 아파트 재건축 얘기를 열심히 하는 주부들, 연예인과 운동선수, 웹툰 작가 등이 나와 온갖 잡담을 늘어놓는 TV 프로그램, BTS와 걸그룹에 환호하는 10대 등을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코로나19 때문에 수천 명이 죽어 나가고,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고 “살려달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그건 남의 이야기다. 산업 기반이 무너지고 청년들이 취직을 못 하고 있지만, 그것도 내 일은 아니다. 특정 노조가 폭력을 예사로 행사하고 그 때문에 사람이 죽어도 경찰은 손을 놓고 있고, 검찰과 공수처는 집권 세력의 부정과 비리에는 짐짓 눈을 감으면서 야당의 일에는 득달같이 달려들지만, 그런 불의(不義)와 불공정은 일반 시민들에게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역사왜곡금지법이니 언론중재법 개정안이니 하면서 표현의 자유에 재갈이 채워지고 있지만, 그 역시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 표현의 자유,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라는 민주공화국의 기본질서가 무너져 내리고,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끔찍한 의사전체주의(疑似全體主義) 체제로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지만, 그런 경고를 실감 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드물다.
 

  국제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언론 관련 국제단체들이나 한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경고를 내놓고 있을 뿐, 대한민국은 여전히 민주적이고 활기찬 자유국가의 일원으로 여겨지고 있다.
 
  만일 장차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누려온 자유와 번영을 잃어버리고, 가난하고 억압적인 전체주의 국가로 퇴행(退行)하는 비극이 벌어진다면, 후일 역사는 이 시대를 어떻게 기록할까? 아니, 다가오는 전체주의의 그림자를 느끼지도 못한 채,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면서 ‘자신들은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이 시대의 한국인들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여행자들이 본 히틀러 치하의 독일
 
  최근 국내에서 발간된 영국 작가 줄리아 보이드의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원제: Travellers in the Third Reich)》(페이퍼로드 펴냄)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바이마르공화국을 거쳐 히틀러의 집권,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敗戰)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에 독일을 여행했던 외국인들이 당시의 독일을 어떻게 보았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양하다. 단순한 여행자나 유학생들, 신부수업을 받으러 유서 깊은 기숙학교에 입학한 양갓집 규수(閨秀)들, 당대의 저명 정치인·기업인·탐험가·작가·음악가·종교인 등….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묻는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잔학성에 대한 이미지들이 너무나 강력해서 완전히 없애거나 억압하는 것들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나 생겨난 이런 결과적 통찰이 없는 상태로 2차 대전 발발 이전의 제3제국을 여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당시에 벌어지는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며, 나치 당국의 프로파간다에 넘어가지 않고, 더 나아가 유대인 대학살을 예견하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나 터키를 관광하면서 시진핑(習近平) 체제나 에르도안 정권의 억압성을 체감(體感)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이렇게 말하는 기자도 ‘기업 하기 좋은 나라 중국’이나 ‘가성비 좋은 여행지 터키’에 대한 기사들을 쓴 적이 있다. 터키에 대한 기사에서는 에르도안 정권의 독재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기는 했지만, 이는 그에 대한 사전(事前) 지식이 조금 있었던 덕분이었다.
 
  따라서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많은 여행자·관찰자들이 ‘당시에 벌어지는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며, 나치 당국의 프로파간다에 넘어가지 않고, 더 나아가 유대인 대학살을 예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게 그리 이상하거나 비난받을 만한 일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후일 소설가가 되는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히틀러 집권 2주 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일의 정치는 정말 지루해졌어. 거지나 전차 차장의 몸짓에서 위기를 의식한다는 어렴풋한 흥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
 
 
  히틀러가 집권해도 태평했던 유대인들
 
1933년 3월 21일 포츠담 위수교회에서 열린 국회 개원식에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오른쪽)에게 인사하는 히틀러 총리. 힌덴부르크는 히틀러 독재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히틀러가 집권한 후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된 유대인이나 노조(勞組) 지도자들조차 위기가 닥쳐온 후에도 위기를 의식하지 못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총리가 된 후인 2월 6일 러시아계 유대인인 미국의 좌파활동가 에이브러햄 플로트킨은 베를린에서 여러 명의 유대인 부자와 만난 후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히틀러가 전면에 나섰는데도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올 것이 왔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히틀러의 불길이 탈대로 타다가 꺼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그리고 나치당의 정강·정책이나 선거공약 등을 통해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유대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혔음에도 유대인들이 이런 안일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지금 우리는 알고 있다. 히틀러의 불길은 탈대로 타다가 꺼지기는 했지만,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비롯해 수천만 명의 인명을 삼켜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이 유대인들을 두고 쉽게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건 아닐까?
 
  예컨대 문재인(文在寅)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이런 세상이 올 줄 정말 몰랐을까? 소주성(소득주도성장), 탈(脫)원전, 최저임금의 급속한 인상, 친노조-반기업(親勞組-反企業) 정책, 친북반미(親北反美), 성(性)과 가족에 대한 상식을 무너뜨리는 차별금지법 등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2012년 총선(總選)을 앞두고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이 연대(連帶)하면서 내놓았던 정책 공약들, 2017년 대선(大選) 당시 문재인 후보의 공약들에 다 나와 있던 얘기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민주당은 결코 자기들의 생각을 감춘 적이 없다. 국민들이 살피지 못했고, 게을렀을 뿐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586 전대협 정권이 97세대가 중심을 이루는 한총련 세대로 바통 터치를 하려고 한다”면서 “문재인 정권이 순도 60%의 운동권 정권으로, 그나마 자유민주적 시스템이 유지된 정권이라면, 한총련 정권은 상상을 초월할 순도 90%의 종북(從北) 주사파(主思派) 독재 정권이 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특정 유력 대권 후보의 언행(言行)과 공약, 캠프 구성원들의 이력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이런 경고가 기우(杞憂)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니 이런 경고가 있다는 것 자체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공약은 으레 그렇게 하는 것이고, 대통령이 되면 국가에 대한 책임감에서 잘할 것”이라고 말하지 마라. 세상에는 국가에 대한 책임감은 없이 자기 이념에만 목숨을 거는 탈레반 같은 자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지난 5년 동안 뼈저리게 체험하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베를린에서 모든 곳이 불타고 있대요!”
 
1933년 2월 27일 일어난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계기로 히틀러는 1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혹자는 “대한민국의 헌정(憲政)질서나 제도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애써 자위(自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글자 그대로 자위에 불과하다.
 
  앞에서 말한 플로트킨은 히틀러 집권 직후 만난 어떤 노조위원장에게 히틀러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노조위원장은 웃으면서 “힌덴부르크(당시 대통령)가 완전한 공포 전략이나 비헌법적 수단에 의해 수립된 독재 정권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히틀러라고 해도 헌정질서를 그렇게 쉽게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잘못된 예측이었다. 히틀러는 수권법(授權法)을 통과시켜 의회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정당과 노조, 시민사회단체들을 모조리 해산했으며, 지방자치제도를 폐지했다.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된 때로부터 1당 독재 국가를 완성하는 데까지 걸린 기간은 딱 1년이었다. 대통령과 군부(軍部), 사법부는 체제가 이렇게 둔갑해버리는데도 이를 저지하기는커녕 명시적·묵시적으로 지지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공감과 신념의 부족 때문이기도 했고, 자기 개인이나 소속 집단의 이권(利權) 때문이기도 했다.
 
  국민들의 ‘안전’에 대한 갈망은 히틀러가 그렇게 손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독일 국민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주고, 하이퍼인플레이션과 대량 실업(失業)의 경험,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자기들을 지켜줄 ‘보호자’를 갈망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 모든 것을 약속했다.
 
  1933년 2월 27일 일어난 국회의사당 방화(放火) 사건은 히틀러가 독재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됐다. 이 방화 사건이 덜 떨어진 네덜란드 출신 청년의 범죄이건 혹은 나치의 자작극(自作劇)이건 간에 사건 발생 직후 히틀러는 “이건 틀림없이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단언했다. 최고 권력자가 이렇게 수사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모습이다.
 
  그 무렵 독일을 여행하고 있던 영국의 군인이자 저널리스트인 오언 트위디는 여관집 여주인으로부터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접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베를린에서 모든 게 사라졌대요! 모든 곳이 불타고 있대요!”
 
  독일인들은 그런 공포감 때문에 ‘안전’을 위해 ‘자유’를 히틀러에게 헌납했다. 코로나19라는 감염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부가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고, 음식점이나 카페의 영업시간이나 교회의 예배를 제한하고, 개인의 동선(動線)을 추적하고, 사적(私的)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의 숫자까지 간섭해도 그저 순종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은 90년 전 독일의 모습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히틀러는 적어도 성실한 사람”
 
  적어도 집권 초기에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생존’과 ‘안전’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듯했다. 스위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드니 드 루즈몽은 히틀러가 집권할 무렵 나이 오십에 공산주의를 버린 독일인을 만났다. 그 독일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일자리와 오전 늦게 마실 한 잔의 라테 커피를 원했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노동자들은 일과 음식을 얻을 수 있다면 정치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히틀러? 이제 그는 선거에서 승리했으므로 그의 공약을 실천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건 우리의 희망사항과 거의 같습니다.… 나는 가서 그를 위해 싸울 겁니다! 히틀러는 적어도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이 전향한 독일 공산주의자는 “그 사람, 알고 보니 괜찮은 사람이더라” “그 사람, 그래도 일은 잘 하더라”라면서 쉽게 속아 넘어가는 오늘날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과 꽤나 닮았다.
 

  더 나아가 독일인들, 특히 젊은이들은 나치의 집단주의(集團主義) 체제 아래서 소속감과 자존감을 느끼기도 했다. 히틀러 집권 초기 독일을 여행했던 프랑스의 좌파 언론인 다니엘 게랭의 글이다.
 
  “합창으로 노래하면 배고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사태의 경위와 이유를 알아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당신의 양옆에서 똑같은 노래를 불러대는 사람이 오십 명이나 되다 보면 당신이 무조건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근혜(朴槿惠)를 탄핵해야 한다고, 조국(曺國)을 지켜야 한다고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밤을 새웠던 소위 ‘깨시민’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독일의 고립 상태’는 독일인들이 나치 체제에 순응하게 된 또 다른 이유였다. 영국의 내각사무국장(장관)을 지낸 모리스 행키 남작은 당시 독일 국민들이 해외여행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신문들도 엄중하게 검열을 당해서 독일 이외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잘 보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주목했다. ‘코로나19 이후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친(親)정부 언론들은 K-팝이니 K-방역이니 하면서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자화자찬(自畵自讚)을 쏟아내고, 비판 언론들에는 재갈을 물리는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대한민국은 장차 어떤 나라가 될까’ 하는 생각에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해진다.
 
 
  나치의 만행을 ‘이해’하려 애쓴 지식인들
 
1933년 5월 10일 베를린 베벨 광장에서는 선전장관 괴벨스 주도로 反독일적 서적들을 불태우는 ‘베를린 분서 사건’이 벌어졌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히틀러가 집권한 후 유대인들의 법적(法的) 권리를 박탈하는 입법이 차례로 이루어지고, 그들에 대한 폭력이 일상화됐다. 하지만 이러한 인권(人權) 유린을 직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영국의 귀족이자 권위 있는 잡지 《스펙테이터》의 편집인이었던 이블린 렌치 경(卿)은 베를린 청년들이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맹렬하게 외쳐대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독일 정부가 반(反)유대주의 운동을 거두어들이기 일보 직전’이라는 환상을 품고 귀국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가 독일의 유대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독일을 향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우리가 독일의 열망을 잘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눈도 귀도 입도 닫고 그저 ‘북한의 내재적(內在的) 입장에서 북한을 이해해야 한다’면서, 구두선(口頭禪)처럼 ‘대화’만을 되뇌는 일사병(日射病) 환자들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독일의 열망을 잘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은 렌치 경뿐이 아니었다. 1933년 5월 10일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는 베를린 베벨 광장에서 ‘반(反)독일적’ 서적들을 불태우는 만행(蠻行)을 저질렀다. 하지만 옥스퍼드대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영국인 학자 콘월 에반스는 독일의 책 화형식(火刑式)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전통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포괄적이라기보다 상징적인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독일 역사의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주장한 것이다. 우리나라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북한군에 의해 살해되어도 김정은이 유감 표명 같지도 않은 유감 표명 한 번 하자 “특별히 김정은 위원장이 우리 국민들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을 전해온 것에 대해 각별한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했던 문재인 대통령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분서(焚書)라는 야만을 기꺼이 승인한 사람들은 또 있었다. 1934년 8월 독일을 방문했던 미국 침례교 대표단이 그들이다. “그는 술·담배를 하지 않고 여자들이 겸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포르노그래피를 적극 반대합니다. 이런 지도자는 그리 나쁜 사람일 수 없지요”라고 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음란한 섹스 문학은 판매될 수 없고, 지저분한 영화와 폭력적 갱 영화는 상영이 되지 않는 나라, 이런 나라에 와 있다는 것에 깊은 안도감을 느낍니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독일은 유대인 관련 책자들뿐만 아니라 사람을 타락시키는 책과 잡지들을 대대적으로 불태웠습니다”라며 박수를 보냈다. 그들이 ‘그리 나쁜 사람일 수 없다’고 칭찬했던 사람은 그로부터 5년 후, 세계를 불태웠다. 책을 불태우는 사람은 세계를 불태울 수도 있는 법이다.
 
 
  “평화와 正義가 히틀러 정책의 핵심”
 
프랭크 부크맨 목사. 사진=퍼블릭 도메인
  외국의 지식인들이 나치에 대해 이처럼 유화적(宥和的)인 태도를 취한 데 대해 저자 줄리아 보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한밤중에 자기 집에서 끌려가고, 고문을 받고 위협을 받는다는 소문에 대해 많은 외국인은 그냥 외면해버렸다. 그들은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긍정적 측면에 집중하고 있으면 그런 지저분한 측면들은 곧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막연하게 희망했다.”
 
  여기에 독일인들의 경제적·사회적 여건이 개선되면 독일의 정치도 민주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도 더해졌다. 마치 북한·중국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면, 그들도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우리 시대의 기대처럼 말이다. 이런 ‘막연한 희망’들은 쉽게 히틀러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졌다. 영국군 중령 출신으로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토머스 모어는 1933년 9월 히틀러를 만난 후 이렇게 썼다.
 
  “내가 히틀러 씨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바로 판단해보면, 평화와 정의(正義)가 히틀러 정책의 핵심 어휘다.”
 
  영국 치체스터 교회의 참사회장인 아서 던컨 존스는 1933년 7월 독일을 방문, 히틀러를 만났다. 자신은 가톨릭 신자로서 개신교 일에 끼어들거나 교회의 자유를 간섭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히틀러의 말에 고무된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히틀러는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처럼 한미(寒微)하게 시작했으나 십 년의 투쟁 끝에 히틀러 운동이 그처럼 성공을 거둔 것은, 하느님이 기적을 행사하신 명백한 증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영국 교회가 독일 내의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표시하는 것은 ‘아주 처참한 패착’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정은을 두고 ‘계몽전제군주’ 운운하면서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한사코 눈을 감는 이들과 판박이다.
 
  미국의 루터파 교회 목사로 후일 도덕재무장운동(MRA)을 제창한 프랭크 부크맨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참관하고 귀국한 후 《뉴욕 월드 텔레그램》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돌프 히틀러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에 신(神)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유럽의 형제이자 친구”
 
  여경(女警) 창설을 주장했던 영국의 페미니스트 메리 알렌은 1934년 히틀러를 만났다. 히틀러가 그녀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독일에서도 여경을 창설하겠다고 말하자 알렌은 깊이 감동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는 영국의 지속적인 친구이고 유럽 보통 사람들의 피를 나눈 형제이다. 그들의 국적이 무엇이든 그들의 직업을 위해 평화를 원하고 자녀들의 안전을 바라는 모든 유럽인의 친구이다.”
 
  알렌은 나치가 여성들의 사회·경제활동을 극도로 배척하고, 여성을 단지 ‘민족을 위해 애를 많이 낳아주는 존재’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북한이 얼마나 여권(女權) 침해가 극심한 가부장제적(家父長制的) 사회인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선전물에 나타난 북한 여성들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면서 우리 사회에 젠더 갈등을 조장하는 K-페미니스트들과 닮은꼴이라고 할까.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자 작가인 영국의 그레이엄 세튼 허치슨 중령은 “독일은 군국주의(軍國主義) 국가가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확신합니다”라고 단언했다. 알고 보니 그는 나치를 선전해주는 대가(代價)로 돈을 받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조셉 크로스필드 중령은 히틀러를 만나고 온 후 “우리는 그의 소박함, 성실성, 조국에 대한 열광적인 헌신 등에 큰 감명을 받았다”면서 “우리는 그가 또 다른 세계대전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한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치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지만, 나치 체제의 억압성은 ‘남의 일’로만 생각했다.
 
  “잔인한 억압, 부패한 법률, 무자비한 반대 세력 탄압이 영국 정부에는 전혀 용납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제3제국에서는 그런 것이 용납되어도 국가가 잘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해 저자 줄리아 보이드는 이렇게 지적한다.
 
  “여기서 진정한 비극이 일어난다. 이런 화급한 문제들에 대해 이런 식으로 외면을 해버림으로써 이 역전의 용사들은 그들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그 갈등을 좀 더 가까이 당겨왔을 뿐이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 이래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는 북한의 인권 문제나 북핵(北核) 문제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온 이 땅의 이른바 ‘민주진보’ 세력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다.
 
 
  조국이 침략당해도 히틀러 찬양한 크누트 함순
 
크누트 함순. 사진=퍼블릭 도메인
  저명한 작가나 예술가들도 나치 독일에 대한 환상에 빠져들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노르웨이의 작가 크누트 함순이 대표적이었다. 영국인들을 ‘기만과 살인을 통해 세계 지배에 몰두하는 교만한 위선자들’이라고 비난해온 그는 히틀러는 ‘십자군’이고 ‘위대한 독일권 공동체’를 만들려는 준비가 된 개혁가이며, 노르웨이는 그 공동체에서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치 ‘미(美)제국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에 ‘중화제국주의’의 품 안에 기꺼이 안기면서 중국이라는 큰 봉우리를 떠받드는 작은 봉우리가 되겠노라고 다짐하는 오늘날 한국의 정치인·작가·지식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종북주의자(從北主義者)들을 두고 “전쟁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크누트 함순은 히틀러가 그의 조국 노르웨이를 짓밟아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1939년 5월 베를린에서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와 만나고 귀국한 그는 자기가 받은 노벨상 메달을 괴벨스에게 보냈다. “장관님만큼 이상적으로 유럽과 인류를 위해 아낌없이 글을 쓰고 발언을 해온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찬양과 함께.
 
  1943년 6월 함순은 히틀러를 알현한 자리에서 노르웨이를 통치하고 있는 나치 국가판무관(총독)의 폭압적 통치를 비판하면서 그를 교체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이 늙은 작가와 문학에 대한 한담(閑談)이나 나누고 싶어 했던 히틀러는 짜증을 내면서 테라스로 나가버렸다. 그래도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함순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은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를 보고서도 환상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놀라운 일이지만, 히틀러 집권 직후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만들었던 나치 독일은 이를 ‘범죄자 재활(再活)시설’로 포장해서 세계에 광고했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다하우 강제수용소는 미국이나 영국의 정치인·언론인들을 위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1935년 8월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방문했던 영국 해군소장 배리 돔벨은 “이런 인간쓰레기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해주니 나치가 얼마나 멋진 일을 하고 있느냐”며 감탄했다. 그가 만난 ‘인간쓰레기’, 즉 수용소 재소자들은 사실은 재소자로 위장한 간수들이었다. ‘진짜 재소자’들이 만든 목제 맥주잔을 선물로 받고 돌아온 돔벨은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썼다.
 
  “영국 언론들은 최근에 독일에 대한 가짜 뉴스를 너무 많이 전하는 수치스러운 짓을 했다.”
 
  1935년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방문했던 언론인이자 작가였던 마이클 번은 “이런 처벌에 전율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영국에도 이런 우범자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썼다. 그래도 그는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번은 이렇게 자성(自省)했다.
 
  “나는 과연 기자 노릇을 제대로 했는가? 재소자들에게 ‘당신들은 어떤 재판과 변호를 받았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던가? 나치에 ‘단지 정부를 비판한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을 이렇게 감금하는 행위를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고 물었던가? 당시 《글로벌 시티즌》 기자 자격으로 당연히 그런 질문을 던졌어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번의 이러한 자성은 언론인들에게는 따끔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히틀러의 올림픽
 
  강제수용소에서 간수들을 재소자로 위장해서 세계를 속였던 나치 독일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통해서 그보다 훨씬 큰 규모로 세계를 속였다. 나치는 독재 체제의 모순과 유대인 학대는 감추고 번영하는 독일의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독일 전역에서는 반유대주의 선전물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으로 후일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고대(古代) 그리스 이후 그 어떤 나라도 독일만큼 진정한 올림픽 정신을 담지 못했다”며 베를린올림픽을 찬양했다.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바로 귀국한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일주일을 더 베를린에 머물렀던 미국 농구선수 프랭크 J.루빈은 거리의 식당 창문에 유대인 소유임을 나타내는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고, 수영장에는 ‘유대인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내걸린 것을 발견했다. 루빈이 어리둥절해 하면서 “며칠 전만 해도 이런 표시는 전혀 없었다”고 말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제 올림픽은 끝났습니다.”
 
  내년 베이징(北京)동계올림픽 보이콧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시진핑의 올림픽’이 ‘히틀러의 올림픽’의 재판(再版)이 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로이드 조지, “히틀러는 평화 지향하는 지도자”
 
로이드 조지(왼쪽)와 히틀러. 로이드 조지는 ‘接神하여 황홀경에 빠진 사람’처럼 히틀러를 찬양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나치 독일을 찬양했던 참전용사·지식인·작가·체육인·종교인들은 레닌이 말했던 ‘쓸모 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었다. 그런 ‘쓸모 있는 바보들’ 가운데서도 가장 쓸모 있으면서 가장 바보스러웠던 사람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 총리로 재임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였다.
 
  1936년 9월 2일 베르그호프 산장(山莊)에서 히틀러와 만난 로이드 조지에게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협상국(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프랑스 등의 반독일 연합국)이 승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 공로는 군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위대한 정치인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당신, 로이드 조지입니다.”
 
  이런 찬사를 듣고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감동을 받은 로이드 조지는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독일인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니 특히 자랑스럽다”고 화답했다. 저자 줄리아 보이드는 “로이드 조지가 ‘마치 접신(接神)하여 황홀경에 빠진 사람’처럼 히틀러를 찬양했다”고 꼬집는다. 귀국 후 로이드 조지는 《데일리 익스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는 타고 난 지도자입니다. 대단히 매력적이고 정력적인 성격이며, 목적에 매진하고, 확고한 의지가 있으며 불굴의 심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의 조지 워싱턴입니다. 모든 압제자로부터 독립하여 나라를 얻어낸 사람이란 뜻이죠.”
 
  로이드 조지는 ‘히틀러는 의심할 나위 없이 평화를 지향하는 지도자’라고 주장했다.
 
  “독일이 그 막강한 군대로 국경으로 진군하며 유럽을 겁박하려 한다는 생각은 히틀러의 새로운 비전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난 전쟁에서 호되게 교훈을 얻었습니다.”
 
  제3세계 인사들 가운데서도 히틀러에게 매료된 사람이 있었다. 당시 인도의 이슬람교 지도자로 국제연맹 의장을 지낸 아가 칸 3세는 1937년 10월 히틀러와 만난 후 “히틀러는 평화의 대들보”라면서 “독일의 모든 계획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준비되었다. 히틀러 씨는 아주 위대한 인물이며, 누구도 그걸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로이드 조지나 아가 칸 3세의 언동을 보면 2000년 6·15정상회담 후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호기롭게 선언하는가 하면, “북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개발할 능력도 없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장담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 김정은에 대해 “결단력 있고 유연한 지도자” “매우 솔직하고 열정적이며,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다”느니 “김 위원장은 ‘자녀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길 원하며, 자녀들이 핵을 짊어지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느니 하면서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해온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을 ‘계몽전제군주’라고 표현했던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이 떠오른다.
 
 
  전쟁 한 달 전까지 독일 찬양
 
  영국 내 히틀러 찬양자들은 1935년 말 영독협회(AGF)라는 단체를 만들어 자기들이 ‘쓸모 있는 바보들’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이들은 1936년 11월부터 1939년 7월까지 《앵글로저먼리뷰》라는 월간지를 발행했다. 가정주부에서 국회의원에 이르는 각계각층의 친독 인사들이 독일을 찬양하는 글들을 실었다. 유대인 박해가 극심한 상황 속에서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몇 달을 지내고 귀국한 윌리엄 플레처라는 사람은 자신이 “금요일 저녁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유대인들이 유대교 회당으로 몰려드는 모습”과 “행복한 표정의 유대인 아이들이 유대인 학교 앞에서 노는 모습을 봤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1939년 8월에도 ‘쓸모 있는 바보들’은 바보짓을 계속했다. 독일과 영국이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 상황에 놓인 가운데 독일을 방문하고 돌아온 영독형제단의 퍼시벌 스미스는 《앵글로저먼리뷰》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열흘 동안 독일에서 보냈는데… 모든 사람에게서 극도로 친절한 배려를 받았다. 이러한 대우는 현재 독일인이 영국을 방문한다고 했을 때, 결코 보장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럼이나 남웨일스에서 14세에 학교를 떠난 이후 22세가 된 남자들이 단 하루도 노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비해 독일에서는 모든 청년이 어떻게든 고용되어 있다. 이런 경험은 영국인에게 훈계가 되는 것이다.”
 
 
  全體主義의 실체를 직시한 사람들
 
  많은 반공주의자가 히틀러를 공산주의에 대한 방파제라고 생각해서 그를 지지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치즘과 공산주의 모두 개인의 자유를 철저하게 억압하는 전체주의라는 점에 주목한 사람들도 있었다.
 
  스위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드니 드 루즈몽 교수는 프랑크푸르트대학의 나치당 신문에 실린 나치의 암송문(暗誦文)을 보고 이런 글을 썼다.
 
  “프랑스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이런 글에 나타나는 선동적 폭력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 측을 쫓아가 마지막 수단까지 동원하여 두들겨 부수고, 더 나아가 가장 깊은 내적(內的) 생활까지 쳐부수는 그들의 무례함, 투지는 정말로 악랄하다. 그들은 더 이상 온순한 굴복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나치당에 적극 봉사하며 광적(狂的)인 열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누구든 맹렬한 비난을 받는다.”
 
  드 루즈몽 교수가 지적한 내용들은 바로 전체주의의 요체(要諦)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언젠가 ‘양념’이라는 말로 미화(美化)했던 대깨문들이나 일부 노조의 패악질을 통해 우리는 그러한 ‘선동적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
 
  뮌헨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있던 영국 여성 바버라 런클은 나치당의 거물급 지도자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의 연설을 들은 후인 1937년 3월에 영국에 있는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연설장을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제복을 입은 SA돌격대원 하나가 클라우스한테로 와서 자기랑 같이 상관에게 좀 가자고 하더라고. 부인(나를 착각한 거겠지)이 명백히 모든 일에 반항적이고, 만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지 않는 데다 남편(마찬가지로 클라우스를 이렇게 착각한 거지)이 종이 묶음에 뭔가 적고 있었으니까…. 국가가 모든 힘을 가지고 있는 사회 체제가 곧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입 닥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거야. 그 사람은 뭐가 뭔지 정말 모르는 사람이니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에게 넋을 잃고 있는 사람들은 바버라 런클의 경고를 한 번쯤 음미해봐야 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비범한 용기를 발휘해 어려움에 처한 이를 구한 여행자들도 있었다. 1937년에 독일로 신혼여행을 온 영국인 윌리엄 보일 박사 부부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어떤 유대인 모녀를 만났다. 아이는 절름발이였다. 아이의 어머니는 보일 박사 부부의 차에 붙은 GB(영국)라는 스티커를 봤다고 하면서 딸을 제발 영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여행하는 동안 독일의 현실을 들여다본 보일 박사의 아내 에이트니 보일이 결단을 내렸다. 그는 장애가 있는 유대인 소녀가 나치 독일에서 결코 전망이 밝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 소녀 그레타를 맡기로 결심했다. 부부는 영국 영사관에서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았다. 그들은 한 생명을 구한 것이다.
 
 
  쓸모 있는 바보들, 쓸모 없는 시민들
 
  이 책을 읽는 내내 1980년대 이후 한동안 유행했던 ‘북한 바로 알기’류의 북한체험담이 생각났다. 목탄차 타고 가면서도 “더디 가도 사람 생각하며 가지요”라는 운전사의 말에 감격하면서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고 외쳤던 그런 유(類)의 책들 말이다. 김일성과 만나 후하게 대접받고서는 그의 ‘휴머니즘’이나 ‘민족주의’에 감동해서 그의 나팔수 노릇을 자처했던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나 음악가 윤이상의 얼굴도 떠올랐다. ‘메가트렌드’로 유명해진 자신의 명성을 가지고 중국 공산정권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는 존 나이스비트 같은 서양의 지식인이나, ‘저 인간, 중국 로비스트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중국을 열심히 찬양해대는 국내의 전·현직 정치인·관료들의 모습도 스쳐 갔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쓸모 있는 바보들’에 대한 고발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자기가 살고 있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체제가 전체주의 체제로 둔갑해가고 있는데도 ‘안전’을 위해 ‘자유’를 독재자에게 헌납했던 ‘쓸모 없는 시민들’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다. 의사전체주의 체제의 등장이 목전에 닥쳐온 상황에서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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