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여립 사건 후 득세했던 정철, 世子 책봉 문제 거론했다가 실각
⊙ 선조, 광해군보다 仁嬪 김씨 소생 신성군에게 왕위 물려주려 해
⊙ 仁嬪 김씨의 자녀들과 결혼한 신립과 구사맹 집안, 仁祖反正 주도
⊙ 기축옥사로 동인 1000여명 처벌돼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선조, 광해군보다 仁嬪 김씨 소생 신성군에게 왕위 물려주려 해
⊙ 仁嬪 김씨의 자녀들과 결혼한 신립과 구사맹 집안, 仁祖反正 주도
⊙ 기축옥사로 동인 1000여명 처벌돼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정철이 실각한 후 집권한 유성룡.
1589년 터진 기축옥사(己丑獄事)는 그 후 1년여를 이어지며 1584년 서인(西人)의 이이(李珥)가 죽은 이후 줄곧 득세했던 동인(東人)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서인의 거두 정철(鄭澈)이 집권자로 떠올랐다.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 이후 정철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생(生)과 사(死)가 갈릴 정도였다. 선조는 이런 상황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면서도 견제의 필요성을 느꼈다.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만으로 정철을 견제하는 데 한계를 느낀 선조는 같은 동인인 유성룡(柳成龍)을 불러들인다. 이렇게 해서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정철, 우의정 유성룡의 의정부 체제를 갖췄다. 동인 2인에 서인 1인이었다. 물론 실권은 좌의정 정철에게 있었으니 서인 정권이 6년 만에 들어선 셈이었다.
정확한 실상이야 알 길이 없지만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자 이건창(李建昌)은 정철 쪽이 먼저 도발한 것으로 본다. 파주에 머물던 성혼(成渾)도 이조참판이 되어 조정에 들어와 있을 때였다. 성혼과 정철이 이산해를 축출하려고 모의를 했는데, 이를 송익필(宋翼弼)이라는 인물이 이산해에게 ‘알렸다[泄之(설지)]’. 사실 서인의 모사(謀士)인 송익필의 이력만 놓고 보면, 그가 동인의 영수(領袖)인 이산해에게 성혼과 정철의 논의를 밀고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측면도 있다. 다만 송익필과 이산해는 어릴 때부터 친분이 있었다. 이건창이 ‘밀고’라고 하지 않고 ‘누설’이라고 한 것은 어쩌면 일종의 실수였음을 강조하는 것일까?
世子 문제 거론했다 역린 건드린 정철
선발제인(先發制人), 상대의 노림수를 미리 알아내고서 선제적으로 공격한다는 말이다. 송익필을 통해 정철과 성혼 쪽의 움직임을 알게 된 이산해는 선제공격을 결심한다. 기회는 뜻밖에 빨리 왔다. 선조 24년(1591년) 2월, 윤국형이 세자(世子) 문제를 끄집어냈다고 좌천당한 지 정확히 2년 후였다. 막 우의정으로 임명된 유성룡이 좌의정 정철을 찾아와 3정승이 함께 세자 책봉 문제를 선조에게 건의할 것을 제안했다. 유성룡의 제안이 이산해의 시나리오에 따른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당시만 해도 이미 조선의 공론(公論)은 묵계(默契)의 형태로 광해군에게 모이고 있었다. 따라서 정철은 그저 정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로 간단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동서 당파의 문제로 볼 사안은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정철은 흔쾌히 허락했다. 좌의정이면 사실상 최고 실권자이기 때문에 경연(經筵) 자리에서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 자연스레 이산해나 유성룡도 동조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산해와 유성룡은 말이 없었다. 정철이 말을 마치는 순간 경연장에는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이어 선조의 분노가 터졌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데 경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그나마 홍문관 부제학 이성중과 대사간 이해수가 나서 정철을 거들었지만 역린(逆鱗)을 건드린 대가(代價)는 혹독했다. 선조는 이성중과 이해수를 지방으로 내치라고 즉석에서 명했다. 정철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선조가 분노했다. 사실 정철은 선조가 왜 그렇게까지 대로(大怒)하는지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西人 숙청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산해는 경연이 있기 전부터 인빈(仁嬪) 김씨의 오빠 김공량을 만나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인빈 김씨와 그 아들 신성군을 죽이려 하니 인빈 김씨로 하여금 빨리 주상께 말씀드리라’고 권유했다. 이때 인빈 김씨는 선조의 무한총애를 받고 있었다.
선조가 인빈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그럴 리가?’ 했겠지만 경연장에서 정철이 그 말을 끄집어내는 순간, ‘이자가!’ 하며 확신을 가졌다. 이런 치밀한 모함에 누가 걸리지 않을 수 있을까?
정철은 일단 좌의정에서 물러나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로 좌천당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끝날 동인이 아니었다. 정철은 정여립 사건 이후 동인에게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었다. 동인은 사건 처리의 과정에서 실제로 정철이 하지 않은 일, 심지어 정철이 구하려고 애썼던 인물의 죽음까지도 모두 정철 때문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다. 윤 3월 14일에는 사헌부 사간원 양사의 탄핵으로 정철은 돈녕부 영사 자리마저 내놓아야 했다. 파직(罷職). 그나마 지난 2년 사이에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이던 서인 세력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틀 후 선조는 대신의 교체가 아니라 파직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파직 사실을 알리는 방을 곳곳에 붙이라고 명한다. 세자 문제를 잘못 건드린 대가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6월이 되면 정철은 진주에서 강계로, 백유함은 경흥으로, 유공진은 경원으로, 이춘영은 삼수로 유배를 간다. 모두 마천령을 넘어 함경도로 가게 됐다. 그 밖에도 세자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우찬성 윤근수, 중추부판사 홍성민, 병조판서 황정욱, 승지 황혁, 호조판서 윤두수, 황해도관찰사 이산보 등이 억울하게 파직당했다. 7월 선조는 정철을 ‘간신(奸臣)’이라고 부르고 있다.
“간신 정철에게 모함을 당해 배척된 사람이 있으면 모두 벼슬을 주어 등용케 하라.”
정철은 이때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몰랐고
하늘을 이고도 하늘 보기 어렵구나.
내 마음 알아주는 것 오직 백발뿐
나를 따라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사실 이때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줄 뜻이 어느 정도라도 있었다면 정철이 이렇게까지 혹독한 처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조의 속마음은 인빈 김씨 사이에서 난 신성군에게 있었다.
선조 시대 시한폭탄의 뇌관, 建儲議
군주제 국가에서 현재의 국왕이 한창 왕성한 나이일 때 세자 문제를 언급한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수 있는 지극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미 조선에서도 이 문제에 잘못 관여했다가 멸문지화를 당한 적이 여러 차례였다.
시간을 10여 년 앞으로 돌려보자. 선조의 경우 선조 11년 9월 1일 대사헌에 오른 김계휘(金繼輝)가 가장 먼저 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선조 나이 겨우 27세 때였다. 이때는 세자를 정하자는 의견이라기보다는 후궁의 아들들에게도 왕자 교육을 해야 한다는 정도의 건의였다. 그러나 본부인인 정비에게서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김계휘의 이 건의는 사실상 건저(建儲), 즉 세자를 세우자는 의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의미를 선조가 모를 리 없었다.
실록은 “주상이 처음에는 허락을 하지 않다가 마침내 김계휘의 말을 따랐다”고 적고 있다. 사실 그래 봐야 이때 공빈 김씨에게서 난 임해군이 7세, 광해군이 4세였고 인빈 김씨에게서 난 의안군은 2세였다. 결국은 임해군이나 광해군을 염두에 둔 이야기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선조 16년 8월 5일 왕자들의 공부를 가르치는 하락이 임해군과 광해군의 공부에 큰 진척이 없다는 보고를 하는 대목이 나온다. 공부는 바로 이 둘을 겨냥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세조의 명을 받아 최항과 함께 《경국대전》을 편찬했던 광산 김씨 김국광의 현손(玄孫)인 김계휘는 명종 4년(1549년) 문과에 급제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홍문관 부수찬, 병조와 이조의 좌랑 등 요직을 거쳤다. 나이는 이이보다 열 살 위였지만 서인으로서 학문적 입장을 같이하며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다. 선조 즉위 후에도 황해도·경상도·전라도의 관찰사와 공조 및 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이때 대사헌에 올라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처음으로 발의한 것이다.
김계휘는 벼슬은 예조참판에 이르렀을 뿐이지만 영향력은 컸다. 그와 같은 서인 쪽에서 집필한 《선조수정실록》에는 그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전고(典故)에 숙달하였으며 인물을 알아보는 데 밝았고 정사를 처리하는 데 민첩하여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재주를 지녔으므로 당시 명현(名賢)들이 모두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인정하였다. 가정생활이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30년 동안 현직(顯職)에 있었으나 문정(門庭)이 포의(布衣·아무런 관직도 갖지 않은 사람) 시절과 같았다. 젊을 때부터 문명(文名)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권간(동인)이 득세하던 때를 당하여 한 번도 자신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십수 년 동안 폐척(廢斥)되었다.〉
훗날 송시열·송준길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예학의 종주(宗主)’ 김장생(金長生)이 바로 그의 아들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그러고 10년이 지나갔다. 선조 21년(1588년) 4월 1일 홍문관 부제학으로 임명돼 경연에 입시한 윤국형이 “세자를 일찍 세워 종사(宗社)의 계책을 정하소서”라고 말한다. 선조는 역시 말이 없었다. 이날 실록의 평이 의미심장하다.
〈그 의논이 더 이상 계속되지는 않았으나 식자들이 흡족히 여겨 윤국형을 칭찬하였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윤국형의 용기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해가 바뀌어 윤국형은 승지로 자리를 옮겼다. 선조 22년 1월 25일 윤국형은 다시 한 번 세자 세우는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러고 닷새 후 상주목사로 좌천을 당한다. 이에 영의정 유전까지 나서 그런 이유로 윤국형을 좌천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논했지만 선조는 묵묵부답이었다. 윤국형의 원래 이름은 윤선각인데 개명했다. 이날 실록은 “임해군은 연장자로서 가장 광폭하였으므로 조야(朝野)가 근심스럽게 여겼다”고 적고 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누가 나서서 선뜻 세자 세우는 문제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철은 경솔하게 처신하다가 동인의 꾀주머니 이산해의 계략에 걸려들어 불과 1년여 만에 권력을 다 내놓고 마천령을 넘어야 했다.
仁祖反正의 주력이 된 인빈 김씨의 家系
이번에는 먼 훗날의 당쟁(黨爭) 이야기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인빈 김씨의 가계도를 상세히 짚어둘 필요가 있다.
인빈 김씨의 아버지 집안을 간략히 살펴보자. 아버지 김한우는 첫 부인과의 사이에 김공근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정철 축출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되는 김공량이다. 장녀는 신경과 결혼하는데 그 딸 하나가 훗날 광해군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둘째 딸이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다.
인빈 김씨는 선조와의 사이에 4남 5녀를 두었다. 첫째 의안군은 1588년 열두 살의 나이로 사망해 인빈 김씨에게는 신성군이 장남이나 마찬가지였다. 신성군은 신립(申砬·1546~1592년) 장군의 딸과 결혼했다. 선조와 신립은 사돈인 것이었다. 신성군이나 신립 모두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던 해에 세상을 떠나지만, 이 혼사는 훗날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든든한 군사적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신립의 5대조 신개(1374~1446년)는 세종 때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할아버지 신상은 중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아버지 신화국은 4남 3녀를 두었다. 네 아들은 신잡, 신급, 신립, 신탁으로 그중 신잡과 신립은 고위관직에 오른다. 장녀는 구사맹(具思孟·1531~1604년)과 혼인했고, 그 딸이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이자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아버지 정원군과 결혼했다. 신립과 구사맹은 왕실, 그중에서도 인빈 김씨 소생들과 이중의 사돈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신립의 딸은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과 혼인을 맺었고, 그의 누이는 정원군의 장모였다. 인조의 외할아버지인 구사맹은 신립의 매부이자 정원군의 장인이었다.
구사맹은 1558년(명종 13년) 문과에 급제해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선조 즉위 후에는 황해도관찰사, 좌부승지 등을 지냈고 이후 공조, 이조판서와 좌찬성에까지 이르게 된다. 왕의 인척이면서도 청렴하고 근신하는 태도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에게는 구성(具宬), 구홍, 구용, 구굉의 네 아들과 딸 여섯이 있었다. 다섯째 딸이 정원군과 결혼해 인조를 낳았다.
김공량을 탄핵하려 한 구성
구사맹이 선조의 사돈이 된 일화는 조선 후기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기사본말체 역사서 《연려실기술》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인빈 김씨에 대한 선조의 사랑이 깊어지면서 오빠 김공량에 대한 총애도 함께 커갔다. 힘이 김공량에게 쏠리는 것을 목격한 조정 신하들이 그에게 줄을 대기에 바빴다.
이때 구사맹의 장남 구성이 “내가 대각(臺閣·사헌부)에 들어가면 반드시 이자를 탄핵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장담을 했다. 조정 관리들은 구성을 미워하여 김공량으로 하여금 구성을 중상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이를 알게 된 선조는 혹시라도 구성이 훗날 인빈의 자손들에게 해를 끼칠 것을 염려하여 구성의 누이동생을 정원군의 배필로 삼았다.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말한다.
〈후에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구성의 자제들은 훈척(勳戚)으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렸으니 그 까닭을 따져보면 모두 조관(朝官)이 구성을 중상하려고 계책한 것이 도리어 영화가 되었으니 길흉화복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인조반정에 신립 집안이 무략(武略)을 제공했다면 구사맹 집안은 이데올로그였다. 구사맹 이래로 이 집안은 서인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광해군의 대북(大北)파 몰락 이후 조선 300년의 지식인 사회를 서인이 지배하게 되는 단서도 여기서 생겨난다.
통신사 파견
최근 《임진왜란》(성균관대 출판부)이란 대작을 쓴 국민대 김영진 교수에 따르면 이미 임진왜란과 관련된다고 생각되는 일본의 사절은 1580년에 이루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2년 전이다.
그해 말 승려 겐소(玄蘇)와 대마도주의 가신(家臣) 시게노부가 내빙(來聘)해 조선을 통해 명(明)나라에 통공(通貢)하고자 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때는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집권하기 5년 전이었다. 당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때였지만 그도 일본 통일 뒤 명나라 침략을 계획한 바 있다고 한다.
이런 연장선에서 1586년 집권한 히데요시는 대마도주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 정벌 계획을 밝혔다. 물론 이 사실이 바로 조선 조정에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대신 히데요시는 자신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는 통신사 파견을 조선에 요청했다.
1589년 6월 대마도의 요시토시는 겐소 및 시게노부를 거느리고 부산의 동래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조선 국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한 것이다. 오랜 논란 끝에 국왕 입조는 실현되지 않았고 대신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기로 했다. 그 결정이 이뤄진 것은 1589년 9월이고 11월 중순에야 논란 끝에 통신사가 구성됐는데 그해 10월에 일어난 정여립 사건, 즉 기축옥사 때문에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첨지(僉知) 황윤길(黃允吉)과 사성(司成) 김성일(金誠一)이 각각 정사와 부사, 그리고 허성(許筬)이 서장관으로 임명됐다. 200명 규모의 이들은 이듬해 3월 6일 한양을 출발했다. 4월 29일 부산을 떠나 대마도에서 한 달가량 머물렀다. 그러고 수도 교토(京都)에 도착한 것은 7월 21일이다.
일본 측은 의도적으로 사행(使行)을 지체시키고 있었다. 교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핑계로 연기되다가 선조의 국서(國書)가 일본 조정에 전달된 것은 11월 7일이다. 한양을 출발한 지 8개월이 지나서였다. 그러고 히데요시와의 접견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곧장 귀국을 요구하는 바람에 11월 11일 조선 통신사 일행은 교토를 떠나야 했다.
히데요시 답서 형식의 국서도 처음에는 내주지 않았다. 사절들이 여러 차례 항의를 하자 “내가 명나라에 들어가는 날 (조선이)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군 진영으로 향한다면 두루 이웃의 맹약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등의 침략 야욕을 드러낸 내용이 포함된 국서를 내주었다.
이듬해 1월 28일 부산에 도착한 일행은 3월경에야 선조에게 복명(復命)했다. 1월 부산에 도착했을 때 황윤길은 이미 “반드시 전란(戰亂)이 있을 것입니다[必有兵禍(필유병화)]”라는 내용을 긴급보고 했다. 3월에 이들이 복명하자 선조는 이들을 인견(引見)하며 물어보았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3월의 기록이다. 참고로 수정실록은 뒤에 기록된 것이라 ‘월’만 나와 있고 ‘일’은 모두 1일로 돼 있음을 밝혀둔다.
〈복명한 뒤에 상이 인견하고 하문하니 윤길은 지난번의 치계(馳啓·긴급 보고)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고 성일은 이렇게 아뢰었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하게 만드니 일의 마땅함에서 볼 때 매우 어긋납니다.”
상이 하문했다.
“수길은 어떻게 생겼던가?”
윤길이 아뢰어 말했다.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력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성일이 아뢰어 말했다.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
이는 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한 것이었다. 당시 조헌(趙憲)이 화의(和議)를 극력 공격하면서 왜적이 기필코 나올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윤길의 말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 모두가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구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유성룡이 성일에게 말했다.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성일이 말했다.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
유성룡의 잘못된 판단
여기서도 언급됐듯이 옥천에 있던 전 교수 조헌이 일본의 국서가 패역스럽고 왜 사신도 함께 왔다는 말을 듣고서 대궐에 이르러 소(疏)를 올렸다. 장황하긴 하지만 당시 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서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 소의 일부다.
〈신이 삼가 오늘날의 사세를 헤아려 보건대, 국가의 안위와 성패가 매우 긴박한 상태에 있으니 참으로 불안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히 왜사(倭使)의 목을 베고 중국에 주문(奏聞)한 다음 그의 사지(四肢)를 유구(琉球) 등 제국(諸國)에 나누어 보내어 온 천하로 하여금 다 함께 분노하게 하여 이 왜적을 대비하도록 하는 한 가지 일만이 전의 잘못을 보완하고 때늦은 데서 오는 흉함을 면할 수 있음은 물론 만에 하나 이미 쇠망한 끝에 다시 흥복시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가 성주(聖主)께서는 속히 잘 생각하시어 사람은 못났더라도 말만은 버리지 말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지체하지 말았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불과 한 달 전에 정권이 서인의 정철에서 동인의 유성룡으로 바뀌었다. 사실 동인에 속했던 서장관 허성도 황윤길의 의견을 지지했다. 서인의 주전론(主戰論)을 꺾고 동인의 주화론(主和論)이 세를 얻게 된 데는 유성룡의 힘이 컸다. 즉 유성룡은 이 점에 관한 한 선조 못지않게 큰 책임을 갖는다는 말이다.
아마도 이제 막 정권을 맡은 동인의 수장(首長) 유성룡으로서는 전쟁 발발 가능성으로 인한 민심 동요가 자신들이 이제 막 잡은 정권에 변화를 초래할까 걱정스러웠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유성룡이 김성일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비를 느슨하게 만든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실제로 1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함으로써 유성룡의 실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南人과 北人의 분열
사실 동인이라고는 하지만 애당초 그것은 불안한 동거였다. 사림 세력 중에서도 대체로 왕당파 내지 왕권 존중파라 할 수 있는 동인이었지만 유성룡, 우성전(禹性傳), 김성일 등은 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온건파로 훗날 남인(南人)이 됐고 허봉(許篈), 이발(李潑), 이산해, 정인홍(鄭仁弘) 등은 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의 학설을 따르는 강경파로 훗날 북인(北人)이 됐다.
이건창은 《당의통략》에서 기축옥사 당시 이발이 죽는데도 유성룡이 구원하지 않은 것을 정인홍이 미워해 드디어 남인과 북인이 갈렸다고 말한다. 명칭은 우성전이 남산(南山)에 살았고 이발이 북악(北岳)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조금 늦게, 즉 정철이 실각한 다음에 그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요구한 이산해와 온건한 처벌을 요구한 우성전의 대립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기축옥사 처리 과정을 보면 남인들은 크게 피해를 당하지 않은 반면 옥사 과정에서 죽거나 정치적 피해를 당한 이발·이길(李洁)·최영경(崔永慶)·정개청(鄭介淸)·홍가신(洪可臣)·한백겸(韓百謙)·백유양(白惟讓) 등은 대부분 북인 계통이었다. 특히 최영경과 정개청의 죽음에 대한 북인들의 분노와 한은 깊었다. 지역적으로 보자면 남인은 지금의 경상북도였고 북인은 전라도와 경상남도였다.
최영경과 정철의 악연
다시 기축옥사의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중앙 조정의 연루자 색출이 끝나가던 1590년 3월 하순 편전(便殿)에서 국사를 논의하던 중 좌의정 정철은 선조에게 “전라도 감사에게 명하여 역적 여립과 밀접했던 자들을 샅샅이 캐내야 한다”고 건의했다. 2차 후폭풍(後爆風)의 시작이었다. 지난해 12월 전라도 생원과 진사 수십명이 연명(連名)상소를 올렸을 때 워낙 이산해를 적시한 사례가 많아 찜찜했던 차에 선조는 정철의 건의를 윤허했다.
5월 2일 사헌부 장령 구성이 평소 유림의 큰 신망을 얻고 있던 최영경(崔永慶·1529~1590년)을 지목했다. 물론 구성은 정철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선조도 처음에는 최영경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며 증거도 명확지 않으니 삭탈관작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정철의 거듭되는 주청을 이기지 못하고 주상은 윤허해주었다.
정철은 최영경에 대해 악감정을 갖고 있었다. ‘파주 3걸’이라던 이이·송익필·성혼보다 대여섯 살 위인 최영경은 한성에서 나고 자라 일찍부터 성혼과 가까웠다. 그런데 1558년(명종 13년) 전후해서 성혼이 정철과 가까워지자 최영경은 성혼에게 “정철은 천하의 형편없는 소인배(索性小人)이니 가까이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조언을 넘어선 명령에 가까웠기에 성혼은 기분이 상했다.
특히 술에 취하면 최영경은 성혼에게 두 무릎을 앞으로 내보이며 “끝에 가서는 이 무릎이 정철에게 고문당하게 되겠지만 내 무엇이 두렵겠는가”라며 큰 소리를 치곤 했다. 결국 이때부터 성혼과 최영경은 도를 중시하는 면에서는 비슷하면서도 당파적으로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정철과 최영경의 악연은 또 있었다. 최영경에게는 안민학이라는 친한 후배가 있었다. 그런데 안민학이 세월이 흐른 뒤 송익필·이이·성혼·정철 등과 가깝게 지내면서 하루는 최영경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의 벗인 정계함(정철의 자)은 참으로 착한 선비입니다. 바라건대 한번 만나보십시오.”
그러나 일찍부터 정철을 타고난 소인배로 단정한 최영경은 안민학의 청을 냉정하게 물리쳤다. 그런데도 얼마 후 또 찾아와서는 “이 사람(정철)은 국사에 마음을 다 쏟는 사람이니 만나보아도 좋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이에 화가 난 최영경은 분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안민학에게 쏘아붙였다.
“옛날 도성에 있을 때 그 사람이 벼슬을 좋아한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정사를 잘 하는 사람이란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
당연히 이 말은 정철의 귀에 들어갔고 이후 정철과 안민학 모두 최영경을 원수로 생각하게 된다.
길삼봉으로 몰린 최영경
한편 정여립이 죽은 직후 붙잡혀 온 정여립 무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길삼봉이 상장(上將)이요 정팔용·정여립은 차장(次將)”이라고 실토했다. 그래서 사건 초기부터 조정에서는 각 도에 삼봉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송익필은 사람들을 풀어 삼봉에 관한 다양한 설을 유포시켰다.
‘나이가 60쯤 되어 보이고 얼굴은 쇳빛이며 몸은 뚱뚱하다.’
‘나이는 30쯤 되었고 귀가 크고 얼굴은 여위다.’
‘나이는 50쯤 되었고 수염이 길어 복부까지 닿았으며 얼굴은 희면서도 길다.’
‘삼봉은 상장이 아니라 졸개로서 진주에 살펴 나이는 30쯤 되었고 하루에 300리를 간다.’
‘삼봉은 나주의 사족이다.’
‘삼봉은 성이 길이 아니라 최인데 진주 사노(私奴)다.’
온갖 설(說)이 분분해야 유언은 오래 가고 멀리 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깎이고 다듬어진다.
‘삼봉이는 다름 아닌 진주의 최영경이다.’
‘어떤 사람이 전주 만장동을 지나갈 때 역적 1만여명이 모여서 활쏘기를 겨루고 있었는데 영경이 맨 윗자리에 앉고 여립이 다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하는 여러 문집을 통해 재구성해본 당시의 모습이다.
상황이 이 정도 되면 최영경을 그냥 둘 수 없었다. 1590년 5월 진주옥에 두었던 최영경이 한성으로 압송돼왔다.
이항복의 직언
위관 정철을 도와 사건의 조사를 담당하던 문사랑(問事郞)은 같은 서인이면서도 곧은 성품의 이항복(李恒福·1556~1618년)이었다. 이항복이 캐묻긴 했으나 길삼봉과 최영경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6월 초 정철이 이항복을 집무실로 불렀다.
“그래 실상은 좀 드러났는가?”
“옥사가 일어난 이래로 이미 해가 바뀌었는데도 어찌된 일입니까? 일찍이 어떤 사람이 영경을 가리켜 삼봉이라고 하였으나 이제 아무 단서도 없이 길가에서 들은 말로 인하여 처사(處士·최영경)를 잡아 가두었으니, 불행하게도 죽게 되는 날이면 반드시 공론이 일어날 것이거늘 상공은 어찌 그 책임을 면하시겠습니까?”
뜻밖의 당돌한 발언에 정철은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린가? 나와 영경은 평소 비록 논의가 상반되기는 하였으나 어찌 서로 해치고자 함에 이르리오? 이것은 본래 길가의 뜬소문에서 나온 것이니 나에게 무슨 연관이 있는가?”
정철은 이항복이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여서 놀랐다. 그러나 이항복은 더욱 놀라운 발언을 했다.
“아닙니다. 상공이 영경을 함정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이항복은 분개의 기운까지 더해가며 말을 이어갔다.
“그 근거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앉아서 쳐다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는 것이 어찌 죄를 다스리는 관리의 도리이겠습니까? 역모에 관련된 죄수가 옥에 가득 찼으니 위관(委官)이 감히 하나하나 그 연유를 밝힐 수는 없겠지만 영경의 경우는 죄수 가운데 더욱이 역적이라 부를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사람인데도 어찌 진실로 구하려 하지 않습니까?”
일단 정철은 “내 마땅히 힘을 다해 구할 것이니 걱정 말라”고 무마했다. 이후에도 이항복은 최영경을 옥에서 꺼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동인의 우의정 유성룡을 찾아가 부탁해보았으나 유성룡은 “나 같은 이가 어찌 감히 구할 수 있겠느냐”며 한걸음 물러섰다.
이런 논란이 몇 달 넘게 이어지는 가운데 최영경은 결국 옥 안에서 병으로 죽고 만다. 억울한 죽음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최영경을 죽인 것은 정철이라는 이야기가 퍼졌다.
최영경, 三峯이라고 自號
그러나 최영경은 정철보다 성혼을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장본인으로 믿었다. 그가 한성옥으로 잡혀 왔다가 도중에 잠깐 풀려난 적이 있었다. 이때 성혼은 아들 성문준을 최영경에게 보내어 “누구의 죽음을 받아 이에 이르게 되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이때 최영경은 문준을 쳐다보며 “네 아비에게 미움을 받아 이렇게 되었다”고 면박을 준 적이 있다.
성혼이나 최영경은 세상을 버리려는 뜻이 강했기 때문에 저항적인 인물을 동경하곤 했다. 특히 두 사람은 아주 어릴 때부터 막역한 친구였기 때문에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없었다.
최영경은 성혼과 있을 때 스스로 호를 삼봉(三峯)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정도전(鄭道傳)처럼 새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기개와 학식을 갖고 싶다는 소망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지나가는 소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최영경이 감옥 안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아는 성혼의 제자들이 성혼에게 최영경의 구명(求命)을 부탁한 적이 있다. 이때 성혼은 단호하게 “그 사람은 편벽되며 또 어릴 때 자호(自號)를 혹 삼봉이라고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제자들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최영경은 이렇게 세상을 떠났고 기축옥사도 20여 개월 끌면서 한 고비를 넘고 있었다. 이미 이때까지만 해도 조정 관리 중에 이발, 이길, 백유양, 유덕수, 조대중, 유몽정, 김빙 등이 장형(杖刑)으로 죽었다. 윤기신, 정개청 등은 장형을 받고 유배 가는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최영경은 옥사했다. 지방,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는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자들은 훨씬 엄하게 다스려지는 바람에 수백명이 목숨을 잃고 수백명이 유배를 떠나야 했다.
이건창은 《당의통략》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방에서 고변하는 자가 계속 이어져 감옥을 다스린 지 한 해가 넘도록 동인(특히 북인)의 연루자는 모조리 처벌하여 1000여명을 헤아렸다.”⊙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 이후 정철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생(生)과 사(死)가 갈릴 정도였다. 선조는 이런 상황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면서도 견제의 필요성을 느꼈다.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만으로 정철을 견제하는 데 한계를 느낀 선조는 같은 동인인 유성룡(柳成龍)을 불러들인다. 이렇게 해서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정철, 우의정 유성룡의 의정부 체제를 갖췄다. 동인 2인에 서인 1인이었다. 물론 실권은 좌의정 정철에게 있었으니 서인 정권이 6년 만에 들어선 셈이었다.
정확한 실상이야 알 길이 없지만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자 이건창(李建昌)은 정철 쪽이 먼저 도발한 것으로 본다. 파주에 머물던 성혼(成渾)도 이조참판이 되어 조정에 들어와 있을 때였다. 성혼과 정철이 이산해를 축출하려고 모의를 했는데, 이를 송익필(宋翼弼)이라는 인물이 이산해에게 ‘알렸다[泄之(설지)]’. 사실 서인의 모사(謀士)인 송익필의 이력만 놓고 보면, 그가 동인의 영수(領袖)인 이산해에게 성혼과 정철의 논의를 밀고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측면도 있다. 다만 송익필과 이산해는 어릴 때부터 친분이 있었다. 이건창이 ‘밀고’라고 하지 않고 ‘누설’이라고 한 것은 어쩌면 일종의 실수였음을 강조하는 것일까?
世子 문제 거론했다 역린 건드린 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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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 |
당시만 해도 이미 조선의 공론(公論)은 묵계(默契)의 형태로 광해군에게 모이고 있었다. 따라서 정철은 그저 정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로 간단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동서 당파의 문제로 볼 사안은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정철은 흔쾌히 허락했다. 좌의정이면 사실상 최고 실권자이기 때문에 경연(經筵) 자리에서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 자연스레 이산해나 유성룡도 동조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산해와 유성룡은 말이 없었다. 정철이 말을 마치는 순간 경연장에는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이어 선조의 분노가 터졌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데 경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그나마 홍문관 부제학 이성중과 대사간 이해수가 나서 정철을 거들었지만 역린(逆鱗)을 건드린 대가(代價)는 혹독했다. 선조는 이성중과 이해수를 지방으로 내치라고 즉석에서 명했다. 정철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선조가 분노했다. 사실 정철은 선조가 왜 그렇게까지 대로(大怒)하는지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西人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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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
선조가 인빈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그럴 리가?’ 했겠지만 경연장에서 정철이 그 말을 끄집어내는 순간, ‘이자가!’ 하며 확신을 가졌다. 이런 치밀한 모함에 누가 걸리지 않을 수 있을까?
정철은 일단 좌의정에서 물러나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로 좌천당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끝날 동인이 아니었다. 정철은 정여립 사건 이후 동인에게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었다. 동인은 사건 처리의 과정에서 실제로 정철이 하지 않은 일, 심지어 정철이 구하려고 애썼던 인물의 죽음까지도 모두 정철 때문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다. 윤 3월 14일에는 사헌부 사간원 양사의 탄핵으로 정철은 돈녕부 영사 자리마저 내놓아야 했다. 파직(罷職). 그나마 지난 2년 사이에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이던 서인 세력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틀 후 선조는 대신의 교체가 아니라 파직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파직 사실을 알리는 방을 곳곳에 붙이라고 명한다. 세자 문제를 잘못 건드린 대가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6월이 되면 정철은 진주에서 강계로, 백유함은 경흥으로, 유공진은 경원으로, 이춘영은 삼수로 유배를 간다. 모두 마천령을 넘어 함경도로 가게 됐다. 그 밖에도 세자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우찬성 윤근수, 중추부판사 홍성민, 병조판서 황정욱, 승지 황혁, 호조판서 윤두수, 황해도관찰사 이산보 등이 억울하게 파직당했다. 7월 선조는 정철을 ‘간신(奸臣)’이라고 부르고 있다.
“간신 정철에게 모함을 당해 배척된 사람이 있으면 모두 벼슬을 주어 등용케 하라.”
정철은 이때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몰랐고
하늘을 이고도 하늘 보기 어렵구나.
내 마음 알아주는 것 오직 백발뿐
나를 따라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사실 이때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줄 뜻이 어느 정도라도 있었다면 정철이 이렇게까지 혹독한 처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조의 속마음은 인빈 김씨 사이에서 난 신성군에게 있었다.
선조 시대 시한폭탄의 뇌관, 建儲議
군주제 국가에서 현재의 국왕이 한창 왕성한 나이일 때 세자 문제를 언급한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수 있는 지극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미 조선에서도 이 문제에 잘못 관여했다가 멸문지화를 당한 적이 여러 차례였다.
시간을 10여 년 앞으로 돌려보자. 선조의 경우 선조 11년 9월 1일 대사헌에 오른 김계휘(金繼輝)가 가장 먼저 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선조 나이 겨우 27세 때였다. 이때는 세자를 정하자는 의견이라기보다는 후궁의 아들들에게도 왕자 교육을 해야 한다는 정도의 건의였다. 그러나 본부인인 정비에게서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김계휘의 이 건의는 사실상 건저(建儲), 즉 세자를 세우자는 의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의미를 선조가 모를 리 없었다.
실록은 “주상이 처음에는 허락을 하지 않다가 마침내 김계휘의 말을 따랐다”고 적고 있다. 사실 그래 봐야 이때 공빈 김씨에게서 난 임해군이 7세, 광해군이 4세였고 인빈 김씨에게서 난 의안군은 2세였다. 결국은 임해군이나 광해군을 염두에 둔 이야기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선조 16년 8월 5일 왕자들의 공부를 가르치는 하락이 임해군과 광해군의 공부에 큰 진척이 없다는 보고를 하는 대목이 나온다. 공부는 바로 이 둘을 겨냥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세조의 명을 받아 최항과 함께 《경국대전》을 편찬했던 광산 김씨 김국광의 현손(玄孫)인 김계휘는 명종 4년(1549년) 문과에 급제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홍문관 부수찬, 병조와 이조의 좌랑 등 요직을 거쳤다. 나이는 이이보다 열 살 위였지만 서인으로서 학문적 입장을 같이하며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다. 선조 즉위 후에도 황해도·경상도·전라도의 관찰사와 공조 및 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이때 대사헌에 올라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처음으로 발의한 것이다.
김계휘는 벼슬은 예조참판에 이르렀을 뿐이지만 영향력은 컸다. 그와 같은 서인 쪽에서 집필한 《선조수정실록》에는 그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전고(典故)에 숙달하였으며 인물을 알아보는 데 밝았고 정사를 처리하는 데 민첩하여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재주를 지녔으므로 당시 명현(名賢)들이 모두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인정하였다. 가정생활이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30년 동안 현직(顯職)에 있었으나 문정(門庭)이 포의(布衣·아무런 관직도 갖지 않은 사람) 시절과 같았다. 젊을 때부터 문명(文名)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권간(동인)이 득세하던 때를 당하여 한 번도 자신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십수 년 동안 폐척(廢斥)되었다.〉
훗날 송시열·송준길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예학의 종주(宗主)’ 김장생(金長生)이 바로 그의 아들이다.
그러고 10년이 지나갔다. 선조 21년(1588년) 4월 1일 홍문관 부제학으로 임명돼 경연에 입시한 윤국형이 “세자를 일찍 세워 종사(宗社)의 계책을 정하소서”라고 말한다. 선조는 역시 말이 없었다. 이날 실록의 평이 의미심장하다.
〈그 의논이 더 이상 계속되지는 않았으나 식자들이 흡족히 여겨 윤국형을 칭찬하였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윤국형의 용기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해가 바뀌어 윤국형은 승지로 자리를 옮겼다. 선조 22년 1월 25일 윤국형은 다시 한 번 세자 세우는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러고 닷새 후 상주목사로 좌천을 당한다. 이에 영의정 유전까지 나서 그런 이유로 윤국형을 좌천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논했지만 선조는 묵묵부답이었다. 윤국형의 원래 이름은 윤선각인데 개명했다. 이날 실록은 “임해군은 연장자로서 가장 광폭하였으므로 조야(朝野)가 근심스럽게 여겼다”고 적고 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누가 나서서 선뜻 세자 세우는 문제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철은 경솔하게 처신하다가 동인의 꾀주머니 이산해의 계략에 걸려들어 불과 1년여 만에 권력을 다 내놓고 마천령을 넘어야 했다.
仁祖反正의 주력이 된 인빈 김씨의 家系
이번에는 먼 훗날의 당쟁(黨爭) 이야기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인빈 김씨의 가계도를 상세히 짚어둘 필요가 있다.
인빈 김씨의 아버지 집안을 간략히 살펴보자. 아버지 김한우는 첫 부인과의 사이에 김공근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정철 축출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되는 김공량이다. 장녀는 신경과 결혼하는데 그 딸 하나가 훗날 광해군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둘째 딸이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다.
인빈 김씨는 선조와의 사이에 4남 5녀를 두었다. 첫째 의안군은 1588년 열두 살의 나이로 사망해 인빈 김씨에게는 신성군이 장남이나 마찬가지였다. 신성군은 신립(申砬·1546~1592년) 장군의 딸과 결혼했다. 선조와 신립은 사돈인 것이었다. 신성군이나 신립 모두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던 해에 세상을 떠나지만, 이 혼사는 훗날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든든한 군사적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신립의 5대조 신개(1374~1446년)는 세종 때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할아버지 신상은 중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아버지 신화국은 4남 3녀를 두었다. 네 아들은 신잡, 신급, 신립, 신탁으로 그중 신잡과 신립은 고위관직에 오른다. 장녀는 구사맹(具思孟·1531~1604년)과 혼인했고, 그 딸이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이자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아버지 정원군과 결혼했다. 신립과 구사맹은 왕실, 그중에서도 인빈 김씨 소생들과 이중의 사돈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신립의 딸은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과 혼인을 맺었고, 그의 누이는 정원군의 장모였다. 인조의 외할아버지인 구사맹은 신립의 매부이자 정원군의 장인이었다.
구사맹은 1558년(명종 13년) 문과에 급제해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선조 즉위 후에는 황해도관찰사, 좌부승지 등을 지냈고 이후 공조, 이조판서와 좌찬성에까지 이르게 된다. 왕의 인척이면서도 청렴하고 근신하는 태도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에게는 구성(具宬), 구홍, 구용, 구굉의 네 아들과 딸 여섯이 있었다. 다섯째 딸이 정원군과 결혼해 인조를 낳았다.
김공량을 탄핵하려 한 구성
구사맹이 선조의 사돈이 된 일화는 조선 후기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기사본말체 역사서 《연려실기술》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인빈 김씨에 대한 선조의 사랑이 깊어지면서 오빠 김공량에 대한 총애도 함께 커갔다. 힘이 김공량에게 쏠리는 것을 목격한 조정 신하들이 그에게 줄을 대기에 바빴다.
이때 구사맹의 장남 구성이 “내가 대각(臺閣·사헌부)에 들어가면 반드시 이자를 탄핵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장담을 했다. 조정 관리들은 구성을 미워하여 김공량으로 하여금 구성을 중상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이를 알게 된 선조는 혹시라도 구성이 훗날 인빈의 자손들에게 해를 끼칠 것을 염려하여 구성의 누이동생을 정원군의 배필로 삼았다.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말한다.
〈후에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구성의 자제들은 훈척(勳戚)으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렸으니 그 까닭을 따져보면 모두 조관(朝官)이 구성을 중상하려고 계책한 것이 도리어 영화가 되었으니 길흉화복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인조반정에 신립 집안이 무략(武略)을 제공했다면 구사맹 집안은 이데올로그였다. 구사맹 이래로 이 집안은 서인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광해군의 대북(大北)파 몰락 이후 조선 300년의 지식인 사회를 서인이 지배하게 되는 단서도 여기서 생겨난다.
최근 《임진왜란》(성균관대 출판부)이란 대작을 쓴 국민대 김영진 교수에 따르면 이미 임진왜란과 관련된다고 생각되는 일본의 사절은 1580년에 이루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2년 전이다.
그해 말 승려 겐소(玄蘇)와 대마도주의 가신(家臣) 시게노부가 내빙(來聘)해 조선을 통해 명(明)나라에 통공(通貢)하고자 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때는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집권하기 5년 전이었다. 당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때였지만 그도 일본 통일 뒤 명나라 침략을 계획한 바 있다고 한다.
이런 연장선에서 1586년 집권한 히데요시는 대마도주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 정벌 계획을 밝혔다. 물론 이 사실이 바로 조선 조정에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대신 히데요시는 자신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는 통신사 파견을 조선에 요청했다.
1589년 6월 대마도의 요시토시는 겐소 및 시게노부를 거느리고 부산의 동래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조선 국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한 것이다. 오랜 논란 끝에 국왕 입조는 실현되지 않았고 대신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기로 했다. 그 결정이 이뤄진 것은 1589년 9월이고 11월 중순에야 논란 끝에 통신사가 구성됐는데 그해 10월에 일어난 정여립 사건, 즉 기축옥사 때문에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첨지(僉知) 황윤길(黃允吉)과 사성(司成) 김성일(金誠一)이 각각 정사와 부사, 그리고 허성(許筬)이 서장관으로 임명됐다. 200명 규모의 이들은 이듬해 3월 6일 한양을 출발했다. 4월 29일 부산을 떠나 대마도에서 한 달가량 머물렀다. 그러고 수도 교토(京都)에 도착한 것은 7월 21일이다.
일본 측은 의도적으로 사행(使行)을 지체시키고 있었다. 교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핑계로 연기되다가 선조의 국서(國書)가 일본 조정에 전달된 것은 11월 7일이다. 한양을 출발한 지 8개월이 지나서였다. 그러고 히데요시와의 접견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곧장 귀국을 요구하는 바람에 11월 11일 조선 통신사 일행은 교토를 떠나야 했다.
히데요시 답서 형식의 국서도 처음에는 내주지 않았다. 사절들이 여러 차례 항의를 하자 “내가 명나라에 들어가는 날 (조선이)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군 진영으로 향한다면 두루 이웃의 맹약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등의 침략 야욕을 드러낸 내용이 포함된 국서를 내주었다.
이듬해 1월 28일 부산에 도착한 일행은 3월경에야 선조에게 복명(復命)했다. 1월 부산에 도착했을 때 황윤길은 이미 “반드시 전란(戰亂)이 있을 것입니다[必有兵禍(필유병화)]”라는 내용을 긴급보고 했다. 3월에 이들이 복명하자 선조는 이들을 인견(引見)하며 물어보았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 3월의 기록이다. 참고로 수정실록은 뒤에 기록된 것이라 ‘월’만 나와 있고 ‘일’은 모두 1일로 돼 있음을 밝혀둔다.
〈복명한 뒤에 상이 인견하고 하문하니 윤길은 지난번의 치계(馳啓·긴급 보고)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고 성일은 이렇게 아뢰었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하게 만드니 일의 마땅함에서 볼 때 매우 어긋납니다.”
상이 하문했다.
“수길은 어떻게 생겼던가?”
윤길이 아뢰어 말했다.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력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성일이 아뢰어 말했다.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
이는 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한 것이었다. 당시 조헌(趙憲)이 화의(和議)를 극력 공격하면서 왜적이 기필코 나올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윤길의 말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 모두가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구별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유성룡이 성일에게 말했다.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성일이 말했다.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
유성룡의 잘못된 판단
여기서도 언급됐듯이 옥천에 있던 전 교수 조헌이 일본의 국서가 패역스럽고 왜 사신도 함께 왔다는 말을 듣고서 대궐에 이르러 소(疏)를 올렸다. 장황하긴 하지만 당시 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서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 소의 일부다.
〈신이 삼가 오늘날의 사세를 헤아려 보건대, 국가의 안위와 성패가 매우 긴박한 상태에 있으니 참으로 불안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히 왜사(倭使)의 목을 베고 중국에 주문(奏聞)한 다음 그의 사지(四肢)를 유구(琉球) 등 제국(諸國)에 나누어 보내어 온 천하로 하여금 다 함께 분노하게 하여 이 왜적을 대비하도록 하는 한 가지 일만이 전의 잘못을 보완하고 때늦은 데서 오는 흉함을 면할 수 있음은 물론 만에 하나 이미 쇠망한 끝에 다시 흥복시킬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가 성주(聖主)께서는 속히 잘 생각하시어 사람은 못났더라도 말만은 버리지 말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지체하지 말았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불과 한 달 전에 정권이 서인의 정철에서 동인의 유성룡으로 바뀌었다. 사실 동인에 속했던 서장관 허성도 황윤길의 의견을 지지했다. 서인의 주전론(主戰論)을 꺾고 동인의 주화론(主和論)이 세를 얻게 된 데는 유성룡의 힘이 컸다. 즉 유성룡은 이 점에 관한 한 선조 못지않게 큰 책임을 갖는다는 말이다.
아마도 이제 막 정권을 맡은 동인의 수장(首長) 유성룡으로서는 전쟁 발발 가능성으로 인한 민심 동요가 자신들이 이제 막 잡은 정권에 변화를 초래할까 걱정스러웠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유성룡이 김성일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비를 느슨하게 만든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실제로 1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함으로써 유성룡의 실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南人과 北人의 분열
사실 동인이라고는 하지만 애당초 그것은 불안한 동거였다. 사림 세력 중에서도 대체로 왕당파 내지 왕권 존중파라 할 수 있는 동인이었지만 유성룡, 우성전(禹性傳), 김성일 등은 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온건파로 훗날 남인(南人)이 됐고 허봉(許篈), 이발(李潑), 이산해, 정인홍(鄭仁弘) 등은 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의 학설을 따르는 강경파로 훗날 북인(北人)이 됐다.
이건창은 《당의통략》에서 기축옥사 당시 이발이 죽는데도 유성룡이 구원하지 않은 것을 정인홍이 미워해 드디어 남인과 북인이 갈렸다고 말한다. 명칭은 우성전이 남산(南山)에 살았고 이발이 북악(北岳)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조금 늦게, 즉 정철이 실각한 다음에 그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요구한 이산해와 온건한 처벌을 요구한 우성전의 대립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기축옥사 처리 과정을 보면 남인들은 크게 피해를 당하지 않은 반면 옥사 과정에서 죽거나 정치적 피해를 당한 이발·이길(李洁)·최영경(崔永慶)·정개청(鄭介淸)·홍가신(洪可臣)·한백겸(韓百謙)·백유양(白惟讓) 등은 대부분 북인 계통이었다. 특히 최영경과 정개청의 죽음에 대한 북인들의 분노와 한은 깊었다. 지역적으로 보자면 남인은 지금의 경상북도였고 북인은 전라도와 경상남도였다.
최영경과 정철의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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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혼 |
5월 2일 사헌부 장령 구성이 평소 유림의 큰 신망을 얻고 있던 최영경(崔永慶·1529~1590년)을 지목했다. 물론 구성은 정철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선조도 처음에는 최영경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며 증거도 명확지 않으니 삭탈관작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정철의 거듭되는 주청을 이기지 못하고 주상은 윤허해주었다.
정철은 최영경에 대해 악감정을 갖고 있었다. ‘파주 3걸’이라던 이이·송익필·성혼보다 대여섯 살 위인 최영경은 한성에서 나고 자라 일찍부터 성혼과 가까웠다. 그런데 1558년(명종 13년) 전후해서 성혼이 정철과 가까워지자 최영경은 성혼에게 “정철은 천하의 형편없는 소인배(索性小人)이니 가까이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조언을 넘어선 명령에 가까웠기에 성혼은 기분이 상했다.
특히 술에 취하면 최영경은 성혼에게 두 무릎을 앞으로 내보이며 “끝에 가서는 이 무릎이 정철에게 고문당하게 되겠지만 내 무엇이 두렵겠는가”라며 큰 소리를 치곤 했다. 결국 이때부터 성혼과 최영경은 도를 중시하는 면에서는 비슷하면서도 당파적으로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정철과 최영경의 악연은 또 있었다. 최영경에게는 안민학이라는 친한 후배가 있었다. 그런데 안민학이 세월이 흐른 뒤 송익필·이이·성혼·정철 등과 가깝게 지내면서 하루는 최영경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의 벗인 정계함(정철의 자)은 참으로 착한 선비입니다. 바라건대 한번 만나보십시오.”
그러나 일찍부터 정철을 타고난 소인배로 단정한 최영경은 안민학의 청을 냉정하게 물리쳤다. 그런데도 얼마 후 또 찾아와서는 “이 사람(정철)은 국사에 마음을 다 쏟는 사람이니 만나보아도 좋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이에 화가 난 최영경은 분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안민학에게 쏘아붙였다.
“옛날 도성에 있을 때 그 사람이 벼슬을 좋아한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정사를 잘 하는 사람이란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
당연히 이 말은 정철의 귀에 들어갔고 이후 정철과 안민학 모두 최영경을 원수로 생각하게 된다.
길삼봉으로 몰린 최영경
한편 정여립이 죽은 직후 붙잡혀 온 정여립 무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길삼봉이 상장(上將)이요 정팔용·정여립은 차장(次將)”이라고 실토했다. 그래서 사건 초기부터 조정에서는 각 도에 삼봉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송익필은 사람들을 풀어 삼봉에 관한 다양한 설을 유포시켰다.
‘나이가 60쯤 되어 보이고 얼굴은 쇳빛이며 몸은 뚱뚱하다.’
‘나이는 30쯤 되었고 귀가 크고 얼굴은 여위다.’
‘나이는 50쯤 되었고 수염이 길어 복부까지 닿았으며 얼굴은 희면서도 길다.’
‘삼봉은 상장이 아니라 졸개로서 진주에 살펴 나이는 30쯤 되었고 하루에 300리를 간다.’
‘삼봉은 나주의 사족이다.’
‘삼봉은 성이 길이 아니라 최인데 진주 사노(私奴)다.’
온갖 설(說)이 분분해야 유언은 오래 가고 멀리 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깎이고 다듬어진다.
‘삼봉이는 다름 아닌 진주의 최영경이다.’
‘어떤 사람이 전주 만장동을 지나갈 때 역적 1만여명이 모여서 활쏘기를 겨루고 있었는데 영경이 맨 윗자리에 앉고 여립이 다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하는 여러 문집을 통해 재구성해본 당시의 모습이다.
상황이 이 정도 되면 최영경을 그냥 둘 수 없었다. 1590년 5월 진주옥에 두었던 최영경이 한성으로 압송돼왔다.
이항복의 직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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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 |
“그래 실상은 좀 드러났는가?”
“옥사가 일어난 이래로 이미 해가 바뀌었는데도 어찌된 일입니까? 일찍이 어떤 사람이 영경을 가리켜 삼봉이라고 하였으나 이제 아무 단서도 없이 길가에서 들은 말로 인하여 처사(處士·최영경)를 잡아 가두었으니, 불행하게도 죽게 되는 날이면 반드시 공론이 일어날 것이거늘 상공은 어찌 그 책임을 면하시겠습니까?”
뜻밖의 당돌한 발언에 정철은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린가? 나와 영경은 평소 비록 논의가 상반되기는 하였으나 어찌 서로 해치고자 함에 이르리오? 이것은 본래 길가의 뜬소문에서 나온 것이니 나에게 무슨 연관이 있는가?”
정철은 이항복이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여서 놀랐다. 그러나 이항복은 더욱 놀라운 발언을 했다.
“아닙니다. 상공이 영경을 함정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이항복은 분개의 기운까지 더해가며 말을 이어갔다.
“그 근거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앉아서 쳐다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는 것이 어찌 죄를 다스리는 관리의 도리이겠습니까? 역모에 관련된 죄수가 옥에 가득 찼으니 위관(委官)이 감히 하나하나 그 연유를 밝힐 수는 없겠지만 영경의 경우는 죄수 가운데 더욱이 역적이라 부를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사람인데도 어찌 진실로 구하려 하지 않습니까?”
일단 정철은 “내 마땅히 힘을 다해 구할 것이니 걱정 말라”고 무마했다. 이후에도 이항복은 최영경을 옥에서 꺼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동인의 우의정 유성룡을 찾아가 부탁해보았으나 유성룡은 “나 같은 이가 어찌 감히 구할 수 있겠느냐”며 한걸음 물러섰다.
이런 논란이 몇 달 넘게 이어지는 가운데 최영경은 결국 옥 안에서 병으로 죽고 만다. 억울한 죽음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최영경을 죽인 것은 정철이라는 이야기가 퍼졌다.
최영경, 三峯이라고 自號
그러나 최영경은 정철보다 성혼을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장본인으로 믿었다. 그가 한성옥으로 잡혀 왔다가 도중에 잠깐 풀려난 적이 있었다. 이때 성혼은 아들 성문준을 최영경에게 보내어 “누구의 죽음을 받아 이에 이르게 되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이때 최영경은 문준을 쳐다보며 “네 아비에게 미움을 받아 이렇게 되었다”고 면박을 준 적이 있다.
성혼이나 최영경은 세상을 버리려는 뜻이 강했기 때문에 저항적인 인물을 동경하곤 했다. 특히 두 사람은 아주 어릴 때부터 막역한 친구였기 때문에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없었다.
최영경은 성혼과 있을 때 스스로 호를 삼봉(三峯)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정도전(鄭道傳)처럼 새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기개와 학식을 갖고 싶다는 소망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지나가는 소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최영경이 감옥 안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아는 성혼의 제자들이 성혼에게 최영경의 구명(求命)을 부탁한 적이 있다. 이때 성혼은 단호하게 “그 사람은 편벽되며 또 어릴 때 자호(自號)를 혹 삼봉이라고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제자들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최영경은 이렇게 세상을 떠났고 기축옥사도 20여 개월 끌면서 한 고비를 넘고 있었다. 이미 이때까지만 해도 조정 관리 중에 이발, 이길, 백유양, 유덕수, 조대중, 유몽정, 김빙 등이 장형(杖刑)으로 죽었다. 윤기신, 정개청 등은 장형을 받고 유배 가는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최영경은 옥사했다. 지방,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는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자들은 훨씬 엄하게 다스려지는 바람에 수백명이 목숨을 잃고 수백명이 유배를 떠나야 했다.
이건창은 《당의통략》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방에서 고변하는 자가 계속 이어져 감옥을 다스린 지 한 해가 넘도록 동인(특히 북인)의 연루자는 모조리 처벌하여 1000여명을 헤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