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宋나라 신종 때 新法黨과 舊法黨의 대립 계기로 國是 논쟁 등장
⊙ 君臣共定·君臣共治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君弱臣强으로 귀결
⊙ 조선 초기 “國是를 주장하는 것은 대신의 책임, 國是를 지키는 것은 臺諫의 직책”
⊙ 조선 예종 때까지는 國是라는 말이 안 보이다가 성종 이후, 특히 중종 때를 거치면서 사용 빈도 급증
⊙ 國是와 싸우다 쫓겨난 연산군, 國是에 굴복한 중종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君臣共定·君臣共治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君弱臣强으로 귀결
⊙ 조선 초기 “國是를 주장하는 것은 대신의 책임, 國是를 지키는 것은 臺諫의 직책”
⊙ 조선 예종 때까지는 國是라는 말이 안 보이다가 성종 이후, 특히 중종 때를 거치면서 사용 빈도 급증
⊙ 國是와 싸우다 쫓겨난 연산군, 國是에 굴복한 중종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北宋 시절 新法黨의 영수 왕안석(왼쪽)과 舊法黨의 영수 사마광.
중국의 위잉스(余英時) 교수는 《주희의 역사세계》(이원석 옮김, 글항아리)에서 ‘국시(國是)’라는 개념을 통해 송(宋)나라 사대부 정치의 특징을 추출해냈다. 그는 “이렇듯 중요한 정치 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아직 없다”고 자부한다.
위잉스 교수의 견해를 수용해 조선 역사에도 적용해보았다. 우선 《조선왕조실록》에서 국시라는 개념을 검색해보았더니 참으로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거짓말처럼 예종(睿宗) 때까지는 한 글자도 없다가 성종(成宗) 때 6건이 나오고, 전체적으로는 500건이 넘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조선에는 성리학자 혹은 주자학자들이 벌써 국시 개념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정확히 파악하고서 현실 정치에 적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훗날의 당쟁(黨爭) 또한 실은 국시를 통해 일단 임금의 권한을 통제하고 뒤이어 진행되는 사대부(士大夫) 신하들 내부의 권력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국시 문제와 직결된 사안이다.
당연히 국내 학계에서는 어느 누구도 국시라는 개념을 통해 조선 당쟁을 조명할 생각조차 못 했다. 먼저 위잉스 교수의 연구를 중심으로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으로 이어지는 기간에 국시라는 독특한 개념이 어떻게 전제 군주정 정치의 한복판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간략히 살펴보자.
유향의 《신서》에 처음 등장
한당(漢唐) 시대와 달리 송나라는 송 태조의 문치(文治) 중시 및 과거제도 등으로 사대부의 정치적 자각이 어느 때보다 컸다. 그것이 반영된 국가통치론이 바로 이런 국시로 나타난 것이다.
중국 문헌에서 가장 먼저 국시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한(漢)나라 때 유향(劉向)이 펴낸 책 《신서(新序)》 잡사(雜事)에서다.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재상 손숙오(孫叔敖)에게 “과인은 아직 국시가 될 만한 것을 얻지 못했다”고 하자 손숙오는 이렇게 말한다.
“나라가 옳다고 여기는 것[國是]을 대중은 비난하며 싫어하는 것입니다. 신(臣)은 왕께서 정할 수 없을까 봐 걱정입니다.”
“군주와 신하가 합일(合一)하지 않으면 국시는 정해질 길이 없습니다. 하(夏)나라 걸(桀), 은(殷)나라 주(紂) 임금이 국시를 정하지 못하여 자신의 취사선택과 합치함을 옳다고 여기고 합치하지 않음을 그르다고 여겨 망하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장왕이 말했다.
“훌륭하구나! 바라건대 재상과 제후 그리고 사대부들이 공동으로 국시를 정하라.”
조선 초 정도전(鄭道傳)이 내세웠던 군신공치(君臣共治)도 실은 이 같은 “임금과 신하가 공동으로 국시를 정한다[共定國是]”의 파생물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의 국시는 중국 역사에서도 쉽게 전면에 나오지는 못했다. 한나라나 당나라는 황제 절대권이었기 때문이고, 신하란 그런 황제를 보좌하는 선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시란 바로 이런 통치 방식에 전면적인 반기(反旗)를 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전통정치를 면밀히 살필 때도 중요한 도구일 수밖에 없다.
君臣共定國是
다시 송나라 신종(神宗) 때로 가보자. 송나라에서도 처음으로 국시를 사실상 공인한 임금이기 때문이다.
주희(朱熹)가 태어나기도 전에 북송에서 시작된 이 국시 문제를 지적하는 이유는 주희의 도학(道學)이야말로 그 혜택을 가장 크게 입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국시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정하는 것이지만 도학은 오히려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군자가 도(道)를 정할 수 있고 임금도 그 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군신공정국시(君臣共定國是)라는 여건이 미리 조성되지 않았다면 주희의 도학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잠깐 신종이 어떤 황제인지를 살펴보자. 1066년 황태자로 책봉되고 이듬해 영종이 죽자 즉위했다. 19세에 즉위한 신종은 황태자 때부터 명성을 들어온 왕안석(王安石)을 불러들여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했다. 당시 오랑캐의 압력으로 인한 국방비 증가, 대지주와 대상인 증가로 세수(稅收)가 감소되는 등 국정개혁이 절실했고, 왕안석은 신법(新法)을 반포해 대대적 개혁에 나섰다.
신법이 영세 농민 보호와 대지주 및 대상인 억제를 목표로 했기에 자연스럽게 지주와 상인 세력 그리고 그곳 출신 관료들의 강한 반대를 불러왔다. 이런 반대 세력을 구법파(舊法派)라고 하는데, 그 주도자가 우리에게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저자로 알려진 사마광(司馬光)이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할 때까지 북송은 왕안석파와 사마광파가 번갈아 집권과 실각을 반복하면서 국력은 쇠퇴했고, 결국 금(金)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달아나야 했다. 그것이 남송이다.
한마디로 군주가 강명(剛明)하지 못해 군약신강(君弱臣强)의 형세가 빚어지면 나올 수밖에 없는 게 군신공치·공정국시(共定國是)이고, 이보다 군권이 더 약해지면 도학(道學)이 활개를 치게 된다.
신종 때로 돌아가자. 왕조국가에서 국시가 전면에 내세워지면 재상(宰相)의 교체는 인물 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시의 교체이자 세력의 교체였다. 이렇게 되면 당쟁(黨爭)이 시작되고 점점 격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추세상 어쩔 수 없다. 조선 시대 선조(宣祖) 때부터 당쟁의 양상이 딱 그러했다.
이렇게 되면 임금과 재상의 관계도 바뀐다. 국시 이전에는 사안별로 임금이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면, 국시 이후에는 임금이 한쪽 당(黨)을 고르는 권한만 있고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권한은 그 당에 속하게 된다. 당연히 누가 군자(君子)이고 누가 소인(小人)인지도 임금이 아니라 당이 결정한다. 임금의 권한은 그저 자기가 선택한 당이 군자당, 선택을 받지 못한 당을 소인당으로 삼는 것뿐이다.
진회 ‘文字의 獄’
남송(南宋)이란, 1126년 금나라가 대규모로 송나라에 침략해 수도 개봉(開封)을 점령하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아가자 남쪽으로 달아나 임안[臨安·지금의 항주(杭州)]에 도읍하고 흠종의 동생 고종(高宗)을 세워서 만든 나라다.
남송은 딱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의 조선과 닮았다. 금나라와 화의를 맺었으나 조정 안에서는 늘 강화[和], 수비[守], 전쟁[戰]의 세 의견이 충돌했다. 이것이 당시 남송 왕조가 선택할 수 있는 ‘국시’였던 셈이다. 병자호란 이후 주전론(主戰論)과 주화론(主和論)이 충돌하던 모습 그대로다.
1130년 정월 금나라가 화의를 깨고 재차 명주(明州)에 침입하자 남송 또한 패망(敗亡) 일보 직전의 상황이 됐다.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仁祖)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겨우 몸을 피했지만 조정에서는 강화와 전쟁, 두 길을 놓고서 신하들끼리 충돌했다. 1138년 고종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사대부들은 (짐이나 나라가 아니라) 다만 제 몸을 도모할 뿐이다. 만일 명주에 있었을 때처럼 패망의 시기에 처했다면 짐이 오랑캐들에게 수백 번 절하더라도 사대부들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는 명분론에 사로잡혀 척화(斥和) 주전(主戰)을 외치는 사대부들의 위선과 허위의식에 대한 원망이자 경고였다. 이런 ‘굴욕적인 강화 구걸을 통한 나라 보전’ 노선을 함께한 재상이 그 유명한 진회(秦檜·1090~1155년)다. 1142년 금과 남송이 중국을 남북으로 나누어 영유하기로 합의했다. 그 조건으로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취하고[후에 숙질(叔姪)로 고침], 세폐(歲幣)를 바쳤다. 진회는 유능한 관리였으나 정권 유지를 위해 ‘문자(文字)의 옥(獄)’을 일으켜 반대파를 억압해, 민족주의나 이상주의를 내세운 후세의 주자학파(朱子學派)로부터는 특히 비난을 받았다. 그의 손에 옥사(獄死)한 악비(岳飛)가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받는 데 반하여, 그에게는 ‘간신’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南宋 시대 國是 논쟁과 朱熹
고종과 진회의 관계는 그래도 조선에서 인조와 최명길(崔鳴吉· 1586~1647년)의 관계와 많이 겹친다. 실제로 《인조실록(仁祖實錄)》 1636년 11월 8일 부교리 윤집(尹集)이 올린 상소의 일부다. 그해 12월 청(淸)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12월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윤집은 척화론자였다.
“아, 옛날 화의를 주장한 자는 진회보다 더한 사람이 없는데 당시에 그가 한 언어와 사적(事迹)이 사관(史官)의 필주(筆誅)를 피할 수 없었으니, 비록 크게 간악한 진회로서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한 것은 명확합니다. 대체로 진회로서도 감히 하지 못한 짓을 최명길이 차마 했으니 전하의 죄인이 될 뿐 아니라 진회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진회보다 더 간사한 자라는 말이다. 그것이 대체로 주전론자의 외피(外皮)를 쓰고 있던 정통 주자학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송의 주희는 《무오당론서(戊午黨論序)》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재상 진회가 오랑캐의 조정으로 돌아와서 힘써 그 화의를 주관했다. 이때는 인륜이 아직 밝았고 인심이 아직 올바라서 천하 사람들은 현명하든 어리석든 고귀하든 비천하든 한목소리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오직 사대부 중 고집스럽고 이익을 탐하며 수치를 모르는 몇몇만이 일어나서 진회에게 부화뇌동했다.”
여기서 우리는 국시 못지않게 조선 당쟁사를 살피는 데 있어 중요한 개념인 ‘공론(公論)’에 주목하고자 한다. 《송사(宋史)》 진회전(秦檜傳)이다.
“진회는 힘써 여론을 배척하면서 시종일관 화의를 자임했으니 왕차옹(王次翁)이 ‘주된 의론이 없다’고 말했던 것은 오로지 진회를 위해 자리를 깔아준 것이었다. 그래서 진회의 자리는 다시 편안해져 18년간 그 자리에 있었으니 공론이 그 자리를 흔들 수 없었다.”
왕차옹은 어사중승으로 진회 계통의 주화파인데 진회의 재상 자리가 흔들릴 때 글을 올려 국시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고종을 설득해 진회를 지켜준 일이 있었다. 그 점을 말하는 것이다.
군주제에서 공론은 무엇일까? 조정의 공론이 있고 또 다른 공론이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사대부, 특히 주자학을 신봉하는 신권주의(臣權主義) 사대부들의 의견이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이 말을 전면에 내세웠던 이는 바로 이이(李珥)였다는 점만 얘기해둔다.
“國是를 지키는 것이 臺諫의 직책”
국시(國是)라는 말이 실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성종 20년(1489년) 6월 18일 성종이 대비(大妃)들의 소원을 들어주어 원각사(圓覺寺)를 수리하려 하니 사간원 사간 김전(金琠)이 약식 상소인 차자(箚子)를 올려 중단할 것을 건의했다.
“만약 단서를 내고 말을 발하는 데에 받아들이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조금이라도 맞지 않은 것이 있으면 문득 꾸짖고 처벌을 더한다면 장차 상하(上下)가 서로 귀머거리가 되어 숨겨진 간악함을 발설할 수가 없고 국시를 베풀 바가 없을 것입니다. 아! 나라를 다스리면서 여기에 이른다면, 어찌 깊이 두려워할 만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는 국시라는 말이 특별히 이학(理學)이나 도학(道學)의 냄새를 풍기지는 않는다. 일반론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3년 후인 성종 23년(1492년) 홍문관 응교 표연말(表沿沫) 등이 올린 상소를 보면 그 점이 훨씬 분명해진다. 정승 윤필상(尹弼商)을 겨냥한 것이다.
“저 윤필상 등은 전하께서 더불어 그 정사를 도모하는 자입니다. 승도(僧徒)의 많아짐을 전하께서는 근심하시는데 윤필상 등은 근심하지 아니하고, 국시를 주장하는 것은 대신의 책임인데 도리어 아첨하는 말을 올리니, 이로써 일신의 은총을 굳게 하는 계책은 얻을 수 있으나 나라를 근심하는 도리에는 어떠합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시를 주장하는 것은 대신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판서급에 해당하는 대신이라는 말보다는 재상으로 바꾸는 것이 더 정확하다. 재상의 임무란 다름 아닌 “국시 주장”이라고 했다. 임금보다는 사대부들의 의견을 대변해 임금에게 그것을 주장해야 한다는 말이다. 표연말은 흔히 조선 도학의 종주(宗主)로 불리는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다.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경원으로 유배 가던 중 객사(客死)했고,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됐다.
1년 후인 성종 24년(1493년) 사헌부 대사헌 이세좌(李世佐)가 정성근이라는 자의 간사한 행위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다만 국시를 지키는 것이 대간(臺諫)의 직책이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상달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세좌의 경우 훈구(勳舊) 세력에 가깝기 때문에 주자학 계통의 사림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쓰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국시를 지키는 것이 대간의 직책”이라는 말이다. 이로써 재상은 임금을 보필하고 대간은 임금의 말과 행동의 허물을 살핀다는 전통적 재상관, 대간관은 크게 무너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재상의 임무는 국시를 주장하는 것이고 대간의 직책은 국시를 지키는 것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先王을 끌어들여 今王 無力化
눈 밝은 독자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연산군(燕山君)은 바로 이 국시와 싸우려 했던 것이고 결국은 그 싸움에서 패해 폐주(廢主)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연산군 때에는 성종 때에 비해 신하들의 국시 사용이 훨씬 노골화된다. 그것은 연산군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성종의 잘못이라고 봐야 한다. 연산군 때는 국시란 말이 다섯 차례 나오는데 3개가 연산군 1년, 1개가 연산군 3년, 1개가 연산군 10년이라는 점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연산군 1년(1495년) 2월 1일 병조정랑 권수평(權守平) 등이 상소를 올렸다. 돌아가신 아버지 성종을 위해 불교식 재(齋)를 올리려 하자 유생들이 이를 비판하니 연산군은 이들의 처벌을 명했다. 이를 비판하는 상소였다.
“대행대왕(大行大王·아직 상례가 끝나지 않은 돌아가신 임금)께서 특별히 직언(直言)을 잘 받아들이고 선비의 기풍을 배양하시어, 꺼림 없이 곧은 말을 하게 된 뒤로는, 선비들이 오히려 국시를 고집하여 기절(氣節)을 드높이며 좀처럼 굽히지 아니하매, 비록 언어 사이에 혹시 지나친 것이 있었을지언정 국가의 원기는 태산같이 높고 구정(九鼎·큰 쇠솥)처럼 무거웠습니다. 이는 정말 전하 자손만대의 복인데, 전하께서는 무엇이 싫어서 죄를 주십니까.”
같은 해 7월 5일 대간(臺諫)이 글을 올렸다.
“성종의 위(位)를 계승하여 성종의 정치를 저버리시면 어찌 대효(大孝)라 이르겠습니까. 불경(佛經)을 박아내는 과오는 신들과 시종(侍從)들만이 말할 뿐 아니라, 유생(儒生)들이 이제 또 소장을 올렸으니, 이는 이른바 ‘온 나라 사람이 모두 불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홀로 국시를 어기시고 상전(上殿)에게 책임을 돌리시며, ‘불경 박아내는 일은 내가 알지 못한다’ 하시니, 부모가 과실(過失)이 있더라도 모른다 하고 공경과 효도를 다하여 간해서 말리지 못한다면 효도라 이르리까. 신들이 성종의 큰 은혜를 받았는데, 전하의 과오를 보고서 죽음으로써 다투지 않는다면 다른 날에 무슨 면목으로 성종을 지하(地下)에서 뵈오리까.”
“전하께서 홀로 국시를 어기시고”라는 말에는 자신들은 성종의 신하이지 연산군의 신하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또한 주희가 즐겨 쓰던 논법으로 선군(先君)을 끌어들여 금왕(今王)을 무력화(無力化)하는 전략이다.
임금을 ‘한 사람’으로 격하
연산군 3년(1497년) 4월 4일에는 공론(公論)에 따를 것을 노골적으로 압박하는 차자를 올렸다.
“국시를 유지하는 자는 대간이요, 국정을 의논하는 자는 대신입니다. 지금 대간이 복합(伏閤)하고, 정부에서 집박(執駁)하는 것은 공론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한 사람의 의견이 여러 사람의 의견만 못하고, 한 사람의 지혜가 여러 사람의 지혜만 못하며, 백 사람이 모이면 공정하지 않게 의논하는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공론을 배제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시어, 공신만 높이고 총애하려 하시고 조정을 낮추고 관작을 천하게 함을 근심하지 않으시니 되겠습니까. 여러 가지의 잘못된 문호가 한 번 열리면 요행의 무리가 다투어 나와 뛰어나고 어리석은 것이 거꾸로 놓이고, 간사하고 곧은 자가 위치를 바꾸게 될 것이니 선한 사람들이 해체(解體)되어 나라가 나라 꼴이 안 될 것입니다.”
적어도 군주제 조선에서 임금은 황극(皇極), 즉 표준을 세우는 사람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임금이 부단한 연마와 수양을 해야 한다. 그래서 임금은 그 자체가 공(公)이 돼야 한다. 그러나 이 글은 임금을 ‘한 사람’이라 부르고 있다.
강하기만 하려 하고 사리에는 밝지 못했던[剛而不明] 연산군과 주자학으로 무장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 관리들이 충돌하고 있었고 재상이나 판서들은 설 자리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 연산군은 자포자기했고 반정(反正)이 일어나 폐주가 되고 말았다. 국시와 공론만으로도 조선사 특정 시기의 전혀 다른 결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주자학 운동’ 전체와 관련해서 보는 관점에 따라 사대부들의 정치적 각성, 정치 주도 세력이라는 자부심 확대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민주주의의 전조(前兆)로 볼 수도 있다. 그들이 입에 ‘개혁(改革)’을 달고 살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일반 백성의 정치적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코 민주주의적 사상이라 볼 수 없으며, 자기 계급의 정치적 주장 강화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그 안에 분열적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이 지적돼야 한다. 왕권과의 충돌이 곧 민주주의로의 전진은 아니라는 말이다.
“국시는 모름지기 조정에 있어야 한다”
실록을 검색해보니 중종(中宗) 때 93건, 선조 때 45건, 광해군(光海君) 때 37건이었다. 숙종(肅宗) 때 46건, 영조(英祖) 때 68건, 정조(正祖) 때 58건, 순조(純祖) 때 47건이었고, 심지어 고종 때도 18건이었다. 즉 국시는 조선 중기 이후를 관통하는 키워드인 셈이었다. 물론 중종의 재위기간이 39년이었기 때문에 많기는 하지만, 그보다 재위 기간이 길었던 숙종이나 영조 때와 비교해 보아도 두 배나 많음을 알 수 있다.
중종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아무런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 반정 주도 훈구 세력에 얹혀 있는 모습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주자학의 무리가 목소리를 형태로 정치가 진행됐다. 이런 흐름 속에서 중종 시기의 ‘국시’ 문제를 몇 가지만 짚어보자.
재위 초반부에는 거의 연산군 초반부와 비슷하다. 중종 10년(1515년) 8월 27일 대간에서 아뢴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이조판서 안당(安瑭·1461~1521년)이 “대간의 말이 어찌 잘못 헤아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국시는 모름지기 조정에 있어야 한다”고 발언하자, 대간이 이를 비판한 것이다.
사실 안당은 도학(道學)을 처음으로 노골적으로 부르짖은 조광조(趙光祖)의 든든한 후원 역할을 한 사람이다. 도학을 옹호한 조선의 첫 번째 재상이라 할 수 있다. 도학파 혹은 주자학파의 정치전술은 일차적으로 대간을 장악하고 다음으로 재상을 장악하는 것인데, 조선에서는 안당이 바로 그 재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강명한 군주가 임금 자리에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조선 당쟁의 흐름을 살피는 데 있어 그의 중요성은 너무도 크기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정리해보자.
안당은 1506년(중종 1년)에 연산군이 폐지했던 사간원이 부활되면서 대사간에 임명됐다. 1507년 정난공신(定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우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08년 12월에 순흥군(順興君)으로 봉작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형조·병조참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14년 11월에 호조판서, 1515년에 이조판서가 됐다. 이때 구폐를 혁신하고 분경(奔競·세가 등에게 하는 이권 운동)을 금지시켰으며, 관리 등용에 있어 순자법(循資法·근무 기간에 따라 차례로 승진시키는 제도)에 따르지 말고 어진 인재를 발탁해 쓸 것을 주장했다.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김식(金湜)·조광조(趙光祖)·박훈(朴薰)·김대유(金大有)·반석평(藩碩枰)·송흠(宋欽) 등을 탁용하거나 천거했다.
안당과 송익필
같은 해 8월 박상(朴祥)·김정(金淨) 등이 중종의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다가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구언(求言)해놓고, 죄를 주는 것은 언로를 막는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극구 변호했다. 이 일로 자신도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지만, 사림으로부터 높이 추앙받게 됐다. 앞서 본 대로 국시가 조정에 있다는 발언으로 탄핵을 받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림, 즉 주자학도들 편이어서 추앙을 받았다는 뜻이다.
1518년 5월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우의정 임명 과정에서 김전(金詮)과 경합했으나 사림 계열의 지지로 안당이 제수받게 됐다. 그만큼 이때가 되면 주자학 세력이 조정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소격서의 혁파 등을 계청(啓請)했다. 1519년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삭훈(削勳)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극구 찬성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조광조 등을 변호해 구원하고자 했다. 같은 해 11월 좌의정이 됐으나 대간으로부터 계속 탄핵받았다. 더욱 현량과(賢良科) 설치를 처음 주장한 사람으로서, 세 아들을 모두 천거되게 했다는 허물까지 쓰고 기묘당인의 우익으로 배척당했다. 이해 12월에 파직당했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다시 대간으로부터 고신(告身) 환수를 요청하는 등의 탄핵을 받았다. 이때의 대간은 이미 반(反)주자학파가 장악했기 때문이다.
1521년 아들 안처겸이 처가에서 종실 시산부정(詩山副正) 이정숙(李正叔), 권전(權磌) 등과 함께 국왕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제거하여 국세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을 나누었다. 이 사건으로 안처겸은 집안 사람이기도 한 송사련(宋祀連)에 의해 고변(告變)당했다.
이에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여러 대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됐는데, 안당도 고하지 않은 죄목으로 연좌돼 교사형(絞死刑)에 처했다. 이는 마치 남송에서 주희의 도학이 가짜 학문, 즉 위학(僞學)으로 몰려 금지된 상황과 겹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안처겸을 고변한 송사련이 바로 조선 주자학의 정치화를 다시 한 번 이룩하게 되는 송익필(宋翼弼)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사림의 보호자 안당의 아들을 고변한 서출(庶出) 송사련의 아들이 조선 300년 주자학의 원조(元祖)가 됐다는 역설적 사건이 뒤에 일어나게 된다.
조광조는 별도의 장으로 봐야 하니 다시 국시 문제로 넘어간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를 사사(賜死)했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제 중종 자신이 국시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어떤 말을 하면서 “조정에 국시가 이미 정해졌는데 필시 어떤 식자(識者)가 사단(事端)을 일으키고자 하여 이러한 말을 만들어냈을 것이다”라고 태연히 말하고 있다. 군명(君命)은 온데간데 없어져버렸다. 이는 마치 스스로가 남송의 신종과 같은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즉 약군(弱君)임을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國是와 公論
선조의 즉위와 함께 조선 역사에서 처음으로 적통(嫡統)이 아닌 임금이 탄생했다. 명종(明宗)은 세자(世子)가 일찍 죽고 후사(後嗣)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위로 거슬러 올라가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서 난 덕흥군의 아들 이균을 신왕으로 삼았다. 후궁의 아들도 아닌, 후궁의 손자가 임금에 오를 때부터 약군(弱君)은 예정된 것이었다. 그는 연산군과는 반대로 눈 밝기는 하지만 굳세지가 못했다[明而不剛].
선조 1년(1568년) 4월 11일 즉위하자마자 기묘사화로 죽은 조광조에게 벼슬과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다. 사림, 즉 주자학도들의 복권(復權)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여기서 벌써 선조 자신이 국시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번 즉위한 처음을 당하여 국시를 정하지 않을 수 없고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곧 선왕의 뜻을 잇고 일을 계승하는 일로서 세상의 도를 옮기는 것은 이 한 일에 달렸다. 이에 큰 벼슬과 아름다운 시호를 추증하여 사림의 나아갈 방향을 밝히고 백성의 큰 소망에 보답할 것이니, 이를 이조에 내리라.”
앞서 우리는 국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공론이라고 했다. 선조 3년(1570년) 5월 18일 옥당(玉堂·홍문관)에서 올린 차자에 이 둘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삼가 생각건대 한때의 국시는 어지럽힐 수 있어도 만세의 공론은 없앨 수 없으며 한때 사람들의 말은 막을 수가 있어도 만세 사람들의 마음은 속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옛부터 국시가 한때 전도(顚倒)되었더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는 공론에 의해 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국시가 이학(理學)의 정치술이라면 공론은 도학(道學)의 정치술이다. 본격적으로 주자학도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선조 8년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주자학도 안에서도 분화가 일어났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동서(東西) 당쟁의 시작이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은 그러나 성향에서 차이가 있었다. 선조의 왕권(王權)을 인정하는 쪽이 동인이었다면 서인은 직간접적으로 왕권과는 반대 방향의 길을 걷고 있었다. 서인이 좀 더 근본주의적인 주자학도였다고 할 수 있다.
노수신
여기서 우리는 선조 18년(1585년) 4월28일자 《선조실록》에 실린 사관의 평에 주목해 이야기를 풀어가보자. 이때면 당쟁이 본격화된 지 딱 10년이 됐기 때문이다.
좌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열 차례에 걸쳐 사직을 청하자 이성중을 보내 허락하지 않는 가르침을 내렸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여기에 사관의 평이 길게 붙어 있다.
“타고난 자태가 온화 순수하였고 평소 지조(志操)가 있어 재행과 명성으로 한 시대에서 대단한 추대를 받았다. 지난 정미년(丁未年·1547년) 간흉(奸凶·윤원형)에게 거슬려 재앙의 그물에 걸렸기 때문에 남쪽 변경에서 귀양살이한 것이 거의 20년이나 되었다. 명종 말년에 방환되어 조정에 돌아왔는데, 상(上)이 즉위하던 초기에 이미 그 명성을 듣고 순서를 거치지 않고 탁용(擢用)하여 몇 해를 지나지 않아 재상으로 세우니, 사람들이 모두 이마에 손을 얹고 기대했다.
임오년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해서 상주(尙州) 땅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고 나서는 여러 번 사양하며 오지 않았으나 상이 지극한 정성으로 간절히 부르니 드디어 명에 응하여 나아왔다. 이때 조정이 안정되지 않아 사류(士類)들이 고립되어 있었으니, 수신이 중망(重望)을 지고 성상의 지우(知遇)를 받는 몸으로 어찌 한마디 말로 임금을 깨우쳐 국시를 결정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시기를 잘 살피고 일을 주밀(周密)하게 처리하기 위해 경솔히 흑백(黑白)을 가리는 것을 급하게 여기지 않고서 원기(元氣)를 배양하고 사림(士林)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으니, 그 중후(重厚)함으로 물정을 진정시킨 공은 자못 재상의 풍도가 있었다.”
이산해와 정철
이 글을 정확히 읽으려면 당시의 정국(政局)을 꿰뚫어야 한다. 1년 전만 해도 동인과 서인은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서로 맞서고 있었다. 선조는 이런 정국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선조 16년(1583년) 9월 8일 서인의 이이가 이조판서로 조정에 복귀했다. 한 달 후인 10월 22일 선조는 이이를 위로하기 위해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첫마디가 이것이다.
“내가 마치 한 원제(漢元帝)가 임금 노릇 할 때와 같이 소인배를 멀리 물리치지 못하여 나라가 거의 망해가고 있다.”
그때까지 동인 위주의 정권을 유지해오던 선조는 아마 이이를 끌어들여 동인을 견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조판서가 된 지 4개월 만인 선조 17년 1월 이이는 49세, 많지 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정철과 함께 서인을 이끌던 이이의 죽음은 서인으로서는 치명적 타격이었다.
이조판서 후임은 이산해(李山海)였다. 이산해는 동인이었다. 정철(鄭澈)로서는 동지인 이이와 함께하던 정국을 정적(政敵)과 함께해야 하는 어려운 형국을 맞게 되었다. 이이가 없어진 때문인지 정철에 대한 선조의 총애는 더욱 깊어졌다. 선조 17년 2월 대사헌에 제수되었고 12월에는 의정부 우찬성으로 특진을 하게 된다. 어쩌면 그만큼 정철에 대한 동인의 공세가 극렬해지고 있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이산해는 만만치 않은 배경과 탁월한 학식, 그리고 적어도 이때까지는 깨끗한 처신으로 선조의 총애를 받기에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렸고 문장이 뛰어났다.
우리에게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李之菡)이 그의 작은아버지이자 스승이다. 이이나 정철보다 세 살 아래던 이산해는 정철보다 1년 빠른 1561년 23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명종 때 홍문관, 병조좌랑, 이조좌랑, 사헌부집의 등 청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선조 2년 홍문관 직제학에 올라 늘 지제교(知製敎)를 겸했다. 지제교란 국왕의 공식 문서를 짓는 일을 하는 직책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문장가였음을 뜻한다. 선조 8년 부친상을 당해 사직했다가 조정에 복귀해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대사간 등을 두루 지냈고 선조 13년 마침내 형조판서에 올랐다. 실은 이듬해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해 정계를 떠나 있었다. 문제의 선조 16년에 우찬성으로 기용됐다가 이때 다시 이이의 뒤를 이어 이조판서를 맡은 것이다. 이산해는 워낙 계략에도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어찌 보면 이이와 정철이 힘을 모아 함께 맞서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그런데 정철이 혼자서 대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에 앞서 선조 14년 7월 이이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선조와 이이가 이산해를 놓고 인물평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이가 “이산해는 그동안 벼슬살이를 할 때는 특별한 재주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사람을 선발하는 데 한결같이 공론을 따르고 청탁을 배격해 그의 집 앞이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습니다”고 말하자, 선조는 “이산해는 재기(才氣)가 있으면서도 과장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내가 일찍이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다”고 답했다. 선조가 이산해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랬다.
동인의 득세
선조 18년 5월을 넘기면서 동인의 서인 탄핵은 가히 파상공세에 가까웠다. 동인의 대사헌 이식이 서인의 이귀를 몰아세웠고, 서인의 핵심 인물이었던 심의겸은 파직당했다. 3월 실권이 없는 돈녕부 판사로 물러나 있던 정철도 계속 공박을 받다가 결국 8월에 파당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다. 당시 정철과 가까웠던 다수의 인물도 벼슬을 잃었다. 그만큼 이산해의 정치력은 막강했다.
세력균형이 무너지고 권력의 추가 지나치게 동인으로 기울자 좌의정 노수신은 무력감(無力感)에 빠졌다. 선조 18년 4월 노수신은 여러 차례 좌의정에서 물러나겠다며 사의를 밝혔다. 앞서 사관의 평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어쩌면 이이가 죽은 이후 선조는 노신(老臣) 노수신을 통해서라도 붕당을 완화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당쟁은 하루가 다르게 심화될 뿐이었다. 노수신의 중재 노력 실패는 곧 선조의 동서(東西) 화해 실패였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고서 사관의 평을 보면 “사람들이 모두 이마에 손을 얹고[加額] 기대했다”는 것은 서인들의 기대다. “사류들이 고립되어 있었으니”라고 했을 때의 사류(士類)란 다름 아닌 서인의 무리다. “국시를 결정하고 싶지 않았겠는가”라는 아쉬움은 동서(東西) 공존의 국시에 대한 노수신의 주장이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리학 혹은 주자학은 ‘국시’와 ‘공론’이라는 이름으로 일찍부터 조선 정치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위잉스 교수의 견해를 수용해 조선 역사에도 적용해보았다. 우선 《조선왕조실록》에서 국시라는 개념을 검색해보았더니 참으로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거짓말처럼 예종(睿宗) 때까지는 한 글자도 없다가 성종(成宗) 때 6건이 나오고, 전체적으로는 500건이 넘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조선에는 성리학자 혹은 주자학자들이 벌써 국시 개념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정확히 파악하고서 현실 정치에 적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훗날의 당쟁(黨爭) 또한 실은 국시를 통해 일단 임금의 권한을 통제하고 뒤이어 진행되는 사대부(士大夫) 신하들 내부의 권력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국시 문제와 직결된 사안이다.
당연히 국내 학계에서는 어느 누구도 국시라는 개념을 통해 조선 당쟁을 조명할 생각조차 못 했다. 먼저 위잉스 교수의 연구를 중심으로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으로 이어지는 기간에 국시라는 독특한 개념이 어떻게 전제 군주정 정치의 한복판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간략히 살펴보자.
유향의 《신서》에 처음 등장
한당(漢唐) 시대와 달리 송나라는 송 태조의 문치(文治) 중시 및 과거제도 등으로 사대부의 정치적 자각이 어느 때보다 컸다. 그것이 반영된 국가통치론이 바로 이런 국시로 나타난 것이다.
중국 문헌에서 가장 먼저 국시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한(漢)나라 때 유향(劉向)이 펴낸 책 《신서(新序)》 잡사(雜事)에서다.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재상 손숙오(孫叔敖)에게 “과인은 아직 국시가 될 만한 것을 얻지 못했다”고 하자 손숙오는 이렇게 말한다.
“나라가 옳다고 여기는 것[國是]을 대중은 비난하며 싫어하는 것입니다. 신(臣)은 왕께서 정할 수 없을까 봐 걱정입니다.”
“군주와 신하가 합일(合一)하지 않으면 국시는 정해질 길이 없습니다. 하(夏)나라 걸(桀), 은(殷)나라 주(紂) 임금이 국시를 정하지 못하여 자신의 취사선택과 합치함을 옳다고 여기고 합치하지 않음을 그르다고 여겨 망하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장왕이 말했다.
“훌륭하구나! 바라건대 재상과 제후 그리고 사대부들이 공동으로 국시를 정하라.”
조선 초 정도전(鄭道傳)이 내세웠던 군신공치(君臣共治)도 실은 이 같은 “임금과 신하가 공동으로 국시를 정한다[共定國是]”의 파생물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의 국시는 중국 역사에서도 쉽게 전면에 나오지는 못했다. 한나라나 당나라는 황제 절대권이었기 때문이고, 신하란 그런 황제를 보좌하는 선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시란 바로 이런 통치 방식에 전면적인 반기(反旗)를 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전통정치를 면밀히 살필 때도 중요한 도구일 수밖에 없다.
君臣共定國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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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신종. |
주희(朱熹)가 태어나기도 전에 북송에서 시작된 이 국시 문제를 지적하는 이유는 주희의 도학(道學)이야말로 그 혜택을 가장 크게 입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국시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정하는 것이지만 도학은 오히려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군자가 도(道)를 정할 수 있고 임금도 그 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군신공정국시(君臣共定國是)라는 여건이 미리 조성되지 않았다면 주희의 도학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잠깐 신종이 어떤 황제인지를 살펴보자. 1066년 황태자로 책봉되고 이듬해 영종이 죽자 즉위했다. 19세에 즉위한 신종은 황태자 때부터 명성을 들어온 왕안석(王安石)을 불러들여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했다. 당시 오랑캐의 압력으로 인한 국방비 증가, 대지주와 대상인 증가로 세수(稅收)가 감소되는 등 국정개혁이 절실했고, 왕안석은 신법(新法)을 반포해 대대적 개혁에 나섰다.
신법이 영세 농민 보호와 대지주 및 대상인 억제를 목표로 했기에 자연스럽게 지주와 상인 세력 그리고 그곳 출신 관료들의 강한 반대를 불러왔다. 이런 반대 세력을 구법파(舊法派)라고 하는데, 그 주도자가 우리에게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저자로 알려진 사마광(司馬光)이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할 때까지 북송은 왕안석파와 사마광파가 번갈아 집권과 실각을 반복하면서 국력은 쇠퇴했고, 결국 금(金)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달아나야 했다. 그것이 남송이다.
한마디로 군주가 강명(剛明)하지 못해 군약신강(君弱臣强)의 형세가 빚어지면 나올 수밖에 없는 게 군신공치·공정국시(共定國是)이고, 이보다 군권이 더 약해지면 도학(道學)이 활개를 치게 된다.
신종 때로 돌아가자. 왕조국가에서 국시가 전면에 내세워지면 재상(宰相)의 교체는 인물 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시의 교체이자 세력의 교체였다. 이렇게 되면 당쟁(黨爭)이 시작되고 점점 격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추세상 어쩔 수 없다. 조선 시대 선조(宣祖) 때부터 당쟁의 양상이 딱 그러했다.
이렇게 되면 임금과 재상의 관계도 바뀐다. 국시 이전에는 사안별로 임금이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면, 국시 이후에는 임금이 한쪽 당(黨)을 고르는 권한만 있고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권한은 그 당에 속하게 된다. 당연히 누가 군자(君子)이고 누가 소인(小人)인지도 임금이 아니라 당이 결정한다. 임금의 권한은 그저 자기가 선택한 당이 군자당, 선택을 받지 못한 당을 소인당으로 삼는 것뿐이다.
진회 ‘文字의 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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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과의 화의를 주장한 南宋 재상 진회. |
남송은 딱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의 조선과 닮았다. 금나라와 화의를 맺었으나 조정 안에서는 늘 강화[和], 수비[守], 전쟁[戰]의 세 의견이 충돌했다. 이것이 당시 남송 왕조가 선택할 수 있는 ‘국시’였던 셈이다. 병자호란 이후 주전론(主戰論)과 주화론(主和論)이 충돌하던 모습 그대로다.
1130년 정월 금나라가 화의를 깨고 재차 명주(明州)에 침입하자 남송 또한 패망(敗亡) 일보 직전의 상황이 됐다.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仁祖)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겨우 몸을 피했지만 조정에서는 강화와 전쟁, 두 길을 놓고서 신하들끼리 충돌했다. 1138년 고종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사대부들은 (짐이나 나라가 아니라) 다만 제 몸을 도모할 뿐이다. 만일 명주에 있었을 때처럼 패망의 시기에 처했다면 짐이 오랑캐들에게 수백 번 절하더라도 사대부들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는 명분론에 사로잡혀 척화(斥和) 주전(主戰)을 외치는 사대부들의 위선과 허위의식에 대한 원망이자 경고였다. 이런 ‘굴욕적인 강화 구걸을 통한 나라 보전’ 노선을 함께한 재상이 그 유명한 진회(秦檜·1090~1155년)다. 1142년 금과 남송이 중국을 남북으로 나누어 영유하기로 합의했다. 그 조건으로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취하고[후에 숙질(叔姪)로 고침], 세폐(歲幣)를 바쳤다. 진회는 유능한 관리였으나 정권 유지를 위해 ‘문자(文字)의 옥(獄)’을 일으켜 반대파를 억압해, 민족주의나 이상주의를 내세운 후세의 주자학파(朱子學派)로부터는 특히 비난을 받았다. 그의 손에 옥사(獄死)한 악비(岳飛)가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받는 데 반하여, 그에게는 ‘간신’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南宋 시대 國是 논쟁과 朱熹
고종과 진회의 관계는 그래도 조선에서 인조와 최명길(崔鳴吉· 1586~1647년)의 관계와 많이 겹친다. 실제로 《인조실록(仁祖實錄)》 1636년 11월 8일 부교리 윤집(尹集)이 올린 상소의 일부다. 그해 12월 청(淸)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12월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윤집은 척화론자였다.
“아, 옛날 화의를 주장한 자는 진회보다 더한 사람이 없는데 당시에 그가 한 언어와 사적(事迹)이 사관(史官)의 필주(筆誅)를 피할 수 없었으니, 비록 크게 간악한 진회로서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한 것은 명확합니다. 대체로 진회로서도 감히 하지 못한 짓을 최명길이 차마 했으니 전하의 죄인이 될 뿐 아니라 진회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진회보다 더 간사한 자라는 말이다. 그것이 대체로 주전론자의 외피(外皮)를 쓰고 있던 정통 주자학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송의 주희는 《무오당론서(戊午黨論序)》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재상 진회가 오랑캐의 조정으로 돌아와서 힘써 그 화의를 주관했다. 이때는 인륜이 아직 밝았고 인심이 아직 올바라서 천하 사람들은 현명하든 어리석든 고귀하든 비천하든 한목소리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오직 사대부 중 고집스럽고 이익을 탐하며 수치를 모르는 몇몇만이 일어나서 진회에게 부화뇌동했다.”
여기서 우리는 국시 못지않게 조선 당쟁사를 살피는 데 있어 중요한 개념인 ‘공론(公論)’에 주목하고자 한다. 《송사(宋史)》 진회전(秦檜傳)이다.
“진회는 힘써 여론을 배척하면서 시종일관 화의를 자임했으니 왕차옹(王次翁)이 ‘주된 의론이 없다’고 말했던 것은 오로지 진회를 위해 자리를 깔아준 것이었다. 그래서 진회의 자리는 다시 편안해져 18년간 그 자리에 있었으니 공론이 그 자리를 흔들 수 없었다.”
왕차옹은 어사중승으로 진회 계통의 주화파인데 진회의 재상 자리가 흔들릴 때 글을 올려 국시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고종을 설득해 진회를 지켜준 일이 있었다. 그 점을 말하는 것이다.
군주제에서 공론은 무엇일까? 조정의 공론이 있고 또 다른 공론이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사대부, 특히 주자학을 신봉하는 신권주의(臣權主義) 사대부들의 의견이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이 말을 전면에 내세웠던 이는 바로 이이(李珥)였다는 점만 얘기해둔다.
“國是를 지키는 것이 臺諫의 직책”
국시(國是)라는 말이 실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성종 20년(1489년) 6월 18일 성종이 대비(大妃)들의 소원을 들어주어 원각사(圓覺寺)를 수리하려 하니 사간원 사간 김전(金琠)이 약식 상소인 차자(箚子)를 올려 중단할 것을 건의했다.
“만약 단서를 내고 말을 발하는 데에 받아들이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조금이라도 맞지 않은 것이 있으면 문득 꾸짖고 처벌을 더한다면 장차 상하(上下)가 서로 귀머거리가 되어 숨겨진 간악함을 발설할 수가 없고 국시를 베풀 바가 없을 것입니다. 아! 나라를 다스리면서 여기에 이른다면, 어찌 깊이 두려워할 만하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는 국시라는 말이 특별히 이학(理學)이나 도학(道學)의 냄새를 풍기지는 않는다. 일반론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3년 후인 성종 23년(1492년) 홍문관 응교 표연말(表沿沫) 등이 올린 상소를 보면 그 점이 훨씬 분명해진다. 정승 윤필상(尹弼商)을 겨냥한 것이다.
“저 윤필상 등은 전하께서 더불어 그 정사를 도모하는 자입니다. 승도(僧徒)의 많아짐을 전하께서는 근심하시는데 윤필상 등은 근심하지 아니하고, 국시를 주장하는 것은 대신의 책임인데 도리어 아첨하는 말을 올리니, 이로써 일신의 은총을 굳게 하는 계책은 얻을 수 있으나 나라를 근심하는 도리에는 어떠합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시를 주장하는 것은 대신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판서급에 해당하는 대신이라는 말보다는 재상으로 바꾸는 것이 더 정확하다. 재상의 임무란 다름 아닌 “국시 주장”이라고 했다. 임금보다는 사대부들의 의견을 대변해 임금에게 그것을 주장해야 한다는 말이다. 표연말은 흔히 조선 도학의 종주(宗主)로 불리는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다.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경원으로 유배 가던 중 객사(客死)했고,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됐다.
1년 후인 성종 24년(1493년) 사헌부 대사헌 이세좌(李世佐)가 정성근이라는 자의 간사한 행위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한다.
“다만 국시를 지키는 것이 대간(臺諫)의 직책이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상달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세좌의 경우 훈구(勳舊) 세력에 가깝기 때문에 주자학 계통의 사림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쓰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국시를 지키는 것이 대간의 직책”이라는 말이다. 이로써 재상은 임금을 보필하고 대간은 임금의 말과 행동의 허물을 살핀다는 전통적 재상관, 대간관은 크게 무너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재상의 임무는 국시를 주장하는 것이고 대간의 직책은 국시를 지키는 것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눈 밝은 독자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연산군(燕山君)은 바로 이 국시와 싸우려 했던 것이고 결국은 그 싸움에서 패해 폐주(廢主)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연산군 때에는 성종 때에 비해 신하들의 국시 사용이 훨씬 노골화된다. 그것은 연산군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성종의 잘못이라고 봐야 한다. 연산군 때는 국시란 말이 다섯 차례 나오는데 3개가 연산군 1년, 1개가 연산군 3년, 1개가 연산군 10년이라는 점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연산군 1년(1495년) 2월 1일 병조정랑 권수평(權守平) 등이 상소를 올렸다. 돌아가신 아버지 성종을 위해 불교식 재(齋)를 올리려 하자 유생들이 이를 비판하니 연산군은 이들의 처벌을 명했다. 이를 비판하는 상소였다.
“대행대왕(大行大王·아직 상례가 끝나지 않은 돌아가신 임금)께서 특별히 직언(直言)을 잘 받아들이고 선비의 기풍을 배양하시어, 꺼림 없이 곧은 말을 하게 된 뒤로는, 선비들이 오히려 국시를 고집하여 기절(氣節)을 드높이며 좀처럼 굽히지 아니하매, 비록 언어 사이에 혹시 지나친 것이 있었을지언정 국가의 원기는 태산같이 높고 구정(九鼎·큰 쇠솥)처럼 무거웠습니다. 이는 정말 전하 자손만대의 복인데, 전하께서는 무엇이 싫어서 죄를 주십니까.”
같은 해 7월 5일 대간(臺諫)이 글을 올렸다.
“성종의 위(位)를 계승하여 성종의 정치를 저버리시면 어찌 대효(大孝)라 이르겠습니까. 불경(佛經)을 박아내는 과오는 신들과 시종(侍從)들만이 말할 뿐 아니라, 유생(儒生)들이 이제 또 소장을 올렸으니, 이는 이른바 ‘온 나라 사람이 모두 불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홀로 국시를 어기시고 상전(上殿)에게 책임을 돌리시며, ‘불경 박아내는 일은 내가 알지 못한다’ 하시니, 부모가 과실(過失)이 있더라도 모른다 하고 공경과 효도를 다하여 간해서 말리지 못한다면 효도라 이르리까. 신들이 성종의 큰 은혜를 받았는데, 전하의 과오를 보고서 죽음으로써 다투지 않는다면 다른 날에 무슨 면목으로 성종을 지하(地下)에서 뵈오리까.”
“전하께서 홀로 국시를 어기시고”라는 말에는 자신들은 성종의 신하이지 연산군의 신하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또한 주희가 즐겨 쓰던 논법으로 선군(先君)을 끌어들여 금왕(今王)을 무력화(無力化)하는 전략이다.
임금을 ‘한 사람’으로 격하
연산군 3년(1497년) 4월 4일에는 공론(公論)에 따를 것을 노골적으로 압박하는 차자를 올렸다.
“국시를 유지하는 자는 대간이요, 국정을 의논하는 자는 대신입니다. 지금 대간이 복합(伏閤)하고, 정부에서 집박(執駁)하는 것은 공론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한 사람의 의견이 여러 사람의 의견만 못하고, 한 사람의 지혜가 여러 사람의 지혜만 못하며, 백 사람이 모이면 공정하지 않게 의논하는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공론을 배제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시어, 공신만 높이고 총애하려 하시고 조정을 낮추고 관작을 천하게 함을 근심하지 않으시니 되겠습니까. 여러 가지의 잘못된 문호가 한 번 열리면 요행의 무리가 다투어 나와 뛰어나고 어리석은 것이 거꾸로 놓이고, 간사하고 곧은 자가 위치를 바꾸게 될 것이니 선한 사람들이 해체(解體)되어 나라가 나라 꼴이 안 될 것입니다.”
적어도 군주제 조선에서 임금은 황극(皇極), 즉 표준을 세우는 사람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임금이 부단한 연마와 수양을 해야 한다. 그래서 임금은 그 자체가 공(公)이 돼야 한다. 그러나 이 글은 임금을 ‘한 사람’이라 부르고 있다.
강하기만 하려 하고 사리에는 밝지 못했던[剛而不明] 연산군과 주자학으로 무장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 관리들이 충돌하고 있었고 재상이나 판서들은 설 자리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 연산군은 자포자기했고 반정(反正)이 일어나 폐주가 되고 말았다. 국시와 공론만으로도 조선사 특정 시기의 전혀 다른 결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주자학 운동’ 전체와 관련해서 보는 관점에 따라 사대부들의 정치적 각성, 정치 주도 세력이라는 자부심 확대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민주주의의 전조(前兆)로 볼 수도 있다. 그들이 입에 ‘개혁(改革)’을 달고 살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일반 백성의 정치적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코 민주주의적 사상이라 볼 수 없으며, 자기 계급의 정치적 주장 강화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그 안에 분열적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이 지적돼야 한다. 왕권과의 충돌이 곧 민주주의로의 전진은 아니라는 말이다.
실록을 검색해보니 중종(中宗) 때 93건, 선조 때 45건, 광해군(光海君) 때 37건이었다. 숙종(肅宗) 때 46건, 영조(英祖) 때 68건, 정조(正祖) 때 58건, 순조(純祖) 때 47건이었고, 심지어 고종 때도 18건이었다. 즉 국시는 조선 중기 이후를 관통하는 키워드인 셈이었다. 물론 중종의 재위기간이 39년이었기 때문에 많기는 하지만, 그보다 재위 기간이 길었던 숙종이나 영조 때와 비교해 보아도 두 배나 많음을 알 수 있다.
중종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아무런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 반정 주도 훈구 세력에 얹혀 있는 모습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주자학의 무리가 목소리를 형태로 정치가 진행됐다. 이런 흐름 속에서 중종 시기의 ‘국시’ 문제를 몇 가지만 짚어보자.
재위 초반부에는 거의 연산군 초반부와 비슷하다. 중종 10년(1515년) 8월 27일 대간에서 아뢴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이조판서 안당(安瑭·1461~1521년)이 “대간의 말이 어찌 잘못 헤아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국시는 모름지기 조정에 있어야 한다”고 발언하자, 대간이 이를 비판한 것이다.
사실 안당은 도학(道學)을 처음으로 노골적으로 부르짖은 조광조(趙光祖)의 든든한 후원 역할을 한 사람이다. 도학을 옹호한 조선의 첫 번째 재상이라 할 수 있다. 도학파 혹은 주자학파의 정치전술은 일차적으로 대간을 장악하고 다음으로 재상을 장악하는 것인데, 조선에서는 안당이 바로 그 재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강명한 군주가 임금 자리에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조선 당쟁의 흐름을 살피는 데 있어 그의 중요성은 너무도 크기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정리해보자.
안당은 1506년(중종 1년)에 연산군이 폐지했던 사간원이 부활되면서 대사간에 임명됐다. 1507년 정난공신(定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우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08년 12월에 순흥군(順興君)으로 봉작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형조·병조참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14년 11월에 호조판서, 1515년에 이조판서가 됐다. 이때 구폐를 혁신하고 분경(奔競·세가 등에게 하는 이권 운동)을 금지시켰으며, 관리 등용에 있어 순자법(循資法·근무 기간에 따라 차례로 승진시키는 제도)에 따르지 말고 어진 인재를 발탁해 쓸 것을 주장했다.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김식(金湜)·조광조(趙光祖)·박훈(朴薰)·김대유(金大有)·반석평(藩碩枰)·송흠(宋欽) 등을 탁용하거나 천거했다.
안당과 송익필
같은 해 8월 박상(朴祥)·김정(金淨) 등이 중종의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다가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구언(求言)해놓고, 죄를 주는 것은 언로를 막는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극구 변호했다. 이 일로 자신도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지만, 사림으로부터 높이 추앙받게 됐다. 앞서 본 대로 국시가 조정에 있다는 발언으로 탄핵을 받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림, 즉 주자학도들 편이어서 추앙을 받았다는 뜻이다.
1518년 5월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우의정 임명 과정에서 김전(金詮)과 경합했으나 사림 계열의 지지로 안당이 제수받게 됐다. 그만큼 이때가 되면 주자학 세력이 조정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소격서의 혁파 등을 계청(啓請)했다. 1519년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삭훈(削勳)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극구 찬성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조광조 등을 변호해 구원하고자 했다. 같은 해 11월 좌의정이 됐으나 대간으로부터 계속 탄핵받았다. 더욱 현량과(賢良科) 설치를 처음 주장한 사람으로서, 세 아들을 모두 천거되게 했다는 허물까지 쓰고 기묘당인의 우익으로 배척당했다. 이해 12월에 파직당했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다시 대간으로부터 고신(告身) 환수를 요청하는 등의 탄핵을 받았다. 이때의 대간은 이미 반(反)주자학파가 장악했기 때문이다.
1521년 아들 안처겸이 처가에서 종실 시산부정(詩山副正) 이정숙(李正叔), 권전(權磌) 등과 함께 국왕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제거하여 국세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을 나누었다. 이 사건으로 안처겸은 집안 사람이기도 한 송사련(宋祀連)에 의해 고변(告變)당했다.
이에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여러 대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됐는데, 안당도 고하지 않은 죄목으로 연좌돼 교사형(絞死刑)에 처했다. 이는 마치 남송에서 주희의 도학이 가짜 학문, 즉 위학(僞學)으로 몰려 금지된 상황과 겹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안처겸을 고변한 송사련이 바로 조선 주자학의 정치화를 다시 한 번 이룩하게 되는 송익필(宋翼弼)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사림의 보호자 안당의 아들을 고변한 서출(庶出) 송사련의 아들이 조선 300년 주자학의 원조(元祖)가 됐다는 역설적 사건이 뒤에 일어나게 된다.
조광조는 별도의 장으로 봐야 하니 다시 국시 문제로 넘어간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를 사사(賜死)했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제 중종 자신이 국시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어떤 말을 하면서 “조정에 국시가 이미 정해졌는데 필시 어떤 식자(識者)가 사단(事端)을 일으키고자 하여 이러한 말을 만들어냈을 것이다”라고 태연히 말하고 있다. 군명(君命)은 온데간데 없어져버렸다. 이는 마치 스스로가 남송의 신종과 같은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즉 약군(弱君)임을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國是와 公論
선조의 즉위와 함께 조선 역사에서 처음으로 적통(嫡統)이 아닌 임금이 탄생했다. 명종(明宗)은 세자(世子)가 일찍 죽고 후사(後嗣)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위로 거슬러 올라가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서 난 덕흥군의 아들 이균을 신왕으로 삼았다. 후궁의 아들도 아닌, 후궁의 손자가 임금에 오를 때부터 약군(弱君)은 예정된 것이었다. 그는 연산군과는 반대로 눈 밝기는 하지만 굳세지가 못했다[明而不剛].
선조 1년(1568년) 4월 11일 즉위하자마자 기묘사화로 죽은 조광조에게 벼슬과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다. 사림, 즉 주자학도들의 복권(復權)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여기서 벌써 선조 자신이 국시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번 즉위한 처음을 당하여 국시를 정하지 않을 수 없고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곧 선왕의 뜻을 잇고 일을 계승하는 일로서 세상의 도를 옮기는 것은 이 한 일에 달렸다. 이에 큰 벼슬과 아름다운 시호를 추증하여 사림의 나아갈 방향을 밝히고 백성의 큰 소망에 보답할 것이니, 이를 이조에 내리라.”
앞서 우리는 국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공론이라고 했다. 선조 3년(1570년) 5월 18일 옥당(玉堂·홍문관)에서 올린 차자에 이 둘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삼가 생각건대 한때의 국시는 어지럽힐 수 있어도 만세의 공론은 없앨 수 없으며 한때 사람들의 말은 막을 수가 있어도 만세 사람들의 마음은 속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옛부터 국시가 한때 전도(顚倒)되었더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는 공론에 의해 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국시가 이학(理學)의 정치술이라면 공론은 도학(道學)의 정치술이다. 본격적으로 주자학도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선조 8년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주자학도 안에서도 분화가 일어났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동서(東西) 당쟁의 시작이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은 그러나 성향에서 차이가 있었다. 선조의 왕권(王權)을 인정하는 쪽이 동인이었다면 서인은 직간접적으로 왕권과는 반대 방향의 길을 걷고 있었다. 서인이 좀 더 근본주의적인 주자학도였다고 할 수 있다.
노수신
여기서 우리는 선조 18년(1585년) 4월28일자 《선조실록》에 실린 사관의 평에 주목해 이야기를 풀어가보자. 이때면 당쟁이 본격화된 지 딱 10년이 됐기 때문이다.
좌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열 차례에 걸쳐 사직을 청하자 이성중을 보내 허락하지 않는 가르침을 내렸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여기에 사관의 평이 길게 붙어 있다.
“타고난 자태가 온화 순수하였고 평소 지조(志操)가 있어 재행과 명성으로 한 시대에서 대단한 추대를 받았다. 지난 정미년(丁未年·1547년) 간흉(奸凶·윤원형)에게 거슬려 재앙의 그물에 걸렸기 때문에 남쪽 변경에서 귀양살이한 것이 거의 20년이나 되었다. 명종 말년에 방환되어 조정에 돌아왔는데, 상(上)이 즉위하던 초기에 이미 그 명성을 듣고 순서를 거치지 않고 탁용(擢用)하여 몇 해를 지나지 않아 재상으로 세우니, 사람들이 모두 이마에 손을 얹고 기대했다.
임오년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해서 상주(尙州) 땅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고 나서는 여러 번 사양하며 오지 않았으나 상이 지극한 정성으로 간절히 부르니 드디어 명에 응하여 나아왔다. 이때 조정이 안정되지 않아 사류(士類)들이 고립되어 있었으니, 수신이 중망(重望)을 지고 성상의 지우(知遇)를 받는 몸으로 어찌 한마디 말로 임금을 깨우쳐 국시를 결정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시기를 잘 살피고 일을 주밀(周密)하게 처리하기 위해 경솔히 흑백(黑白)을 가리는 것을 급하게 여기지 않고서 원기(元氣)를 배양하고 사림(士林)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으니, 그 중후(重厚)함으로 물정을 진정시킨 공은 자못 재상의 풍도가 있었다.”
이산해와 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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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人의 영수 이산해. |
“내가 마치 한 원제(漢元帝)가 임금 노릇 할 때와 같이 소인배를 멀리 물리치지 못하여 나라가 거의 망해가고 있다.”
그때까지 동인 위주의 정권을 유지해오던 선조는 아마 이이를 끌어들여 동인을 견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조판서가 된 지 4개월 만인 선조 17년 1월 이이는 49세, 많지 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정철과 함께 서인을 이끌던 이이의 죽음은 서인으로서는 치명적 타격이었다.
이조판서 후임은 이산해(李山海)였다. 이산해는 동인이었다. 정철(鄭澈)로서는 동지인 이이와 함께하던 정국을 정적(政敵)과 함께해야 하는 어려운 형국을 맞게 되었다. 이이가 없어진 때문인지 정철에 대한 선조의 총애는 더욱 깊어졌다. 선조 17년 2월 대사헌에 제수되었고 12월에는 의정부 우찬성으로 특진을 하게 된다. 어쩌면 그만큼 정철에 대한 동인의 공세가 극렬해지고 있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이산해는 만만치 않은 배경과 탁월한 학식, 그리고 적어도 이때까지는 깨끗한 처신으로 선조의 총애를 받기에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렸고 문장이 뛰어났다.
우리에게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李之菡)이 그의 작은아버지이자 스승이다. 이이나 정철보다 세 살 아래던 이산해는 정철보다 1년 빠른 1561년 23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명종 때 홍문관, 병조좌랑, 이조좌랑, 사헌부집의 등 청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선조 2년 홍문관 직제학에 올라 늘 지제교(知製敎)를 겸했다. 지제교란 국왕의 공식 문서를 짓는 일을 하는 직책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문장가였음을 뜻한다. 선조 8년 부친상을 당해 사직했다가 조정에 복귀해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대사간 등을 두루 지냈고 선조 13년 마침내 형조판서에 올랐다. 실은 이듬해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해 정계를 떠나 있었다. 문제의 선조 16년에 우찬성으로 기용됐다가 이때 다시 이이의 뒤를 이어 이조판서를 맡은 것이다. 이산해는 워낙 계략에도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어찌 보면 이이와 정철이 힘을 모아 함께 맞서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그런데 정철이 혼자서 대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에 앞서 선조 14년 7월 이이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선조와 이이가 이산해를 놓고 인물평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이가 “이산해는 그동안 벼슬살이를 할 때는 특별한 재주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사람을 선발하는 데 한결같이 공론을 따르고 청탁을 배격해 그의 집 앞이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습니다”고 말하자, 선조는 “이산해는 재기(才氣)가 있으면서도 과장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내가 일찍이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다”고 답했다. 선조가 이산해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랬다.
동인의 득세
선조 18년 5월을 넘기면서 동인의 서인 탄핵은 가히 파상공세에 가까웠다. 동인의 대사헌 이식이 서인의 이귀를 몰아세웠고, 서인의 핵심 인물이었던 심의겸은 파직당했다. 3월 실권이 없는 돈녕부 판사로 물러나 있던 정철도 계속 공박을 받다가 결국 8월에 파당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다. 당시 정철과 가까웠던 다수의 인물도 벼슬을 잃었다. 그만큼 이산해의 정치력은 막강했다.
세력균형이 무너지고 권력의 추가 지나치게 동인으로 기울자 좌의정 노수신은 무력감(無力感)에 빠졌다. 선조 18년 4월 노수신은 여러 차례 좌의정에서 물러나겠다며 사의를 밝혔다. 앞서 사관의 평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어쩌면 이이가 죽은 이후 선조는 노신(老臣) 노수신을 통해서라도 붕당을 완화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당쟁은 하루가 다르게 심화될 뿐이었다. 노수신의 중재 노력 실패는 곧 선조의 동서(東西) 화해 실패였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고서 사관의 평을 보면 “사람들이 모두 이마에 손을 얹고[加額] 기대했다”는 것은 서인들의 기대다. “사류들이 고립되어 있었으니”라고 했을 때의 사류(士類)란 다름 아닌 서인의 무리다. “국시를 결정하고 싶지 않았겠는가”라는 아쉬움은 동서(東西) 공존의 국시에 대한 노수신의 주장이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리학 혹은 주자학은 ‘국시’와 ‘공론’이라는 이름으로 일찍부터 조선 정치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