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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영웅 리더십 9

칭기즈칸 〈마지막회〉

조직의 탄력과 속도의 리더십

글 : 엄광용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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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의 간결성과 순발력 있는 지휘체계, 말타기를 이용한 속도감을 무기로 유라시아대륙 정복
⊙ 세 차례에 걸친 西域 원정으로 東西 문명 교역의 길 열어
⊙ 제지술·인쇄술·화약·나침반·천문·의술 등 문명 교류
⊙ 잭 웰치, 속도(Speed)·간결성(Simplicity)·자신감(Self-Confidence)의 ‘3S 리더십’으로 위기의 제너럴일렉트릭(GE) 살려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 현재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중
칭기즈칸
  전쟁의 길은 동시에 상업의 길이기도 하지만, 문명 교류의 길이기도 하다. 자고이래로 ‘전쟁’이라는 수레에는 무기만이 아니라 각종 특산물과 전통예술, 그리고 그 나라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종교까지 실려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길면서도 넓은 영역에 걸쳐 전쟁의 길을 닦고, 상업의 도로를 열고, 불과 반세기도 지나기 전에 질풍노도처럼 다방면에 걸쳐 문명을 파급시킨 인물은 칭기즈칸이었다. 몽골제국을 세운 이후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전쟁의 신(神)’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리면서 닦아놓은 길은 동서양의 각종 물산(物産)과 문화가 오가는 유통의 십자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문명 교류의 활성화에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파괴자’라는 오명(汚名)도 얻었다. 서역(西域) 정벌에 나선 몽골군은 각종 이슬람 문화유적을 불태웠으며,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도시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칭기즈칸이 부하라(현 우즈베키스탄의 고도)를 점령했을 때의 일화가 있다. 그는 이 도시의 상징이며 가장 높은 이슬람 유적인 큰 탑(칼란 미나렛, 높이 46m)을 올려다보다가 그만 투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때 그는 허리를 굽혀 투구를 줍고 나서 휘하 군사들에게 말했다.
 
  “여봐라! 이것은 내가 고개 숙인 최초의 탑이니 절대 무너뜨리지 마라.”
 
  당시 호라즘제국 도시들의 이슬람 유적은 모두가 불탔지만, 오직 부하라의 칼란 미나렛만은 그대로 남아 현재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칭기즈칸이 은근히 자신의 위대성을 내보이기 위한 말 같기도 하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더욱 부풀려 신화(神話)로 만들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가 문득 이슬람 문화를 보고 큰 감화를 받아 그 탑을 남겨놓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강력한 의지의 정복군주
 
  몽골제국의 시조 칭기즈칸은 1162년 바이칼호(湖) 부근의 오논 강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보르치긴족으로 앙숙관계인 메르키드족의 칠레두의 아내인 호엘룬을 납치하여 아들을 낳았다. 열 달이 채 안 돼 아이를 낳았으므로 이미 임신한 상태의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의혹이 일었다. 칭기즈칸은 어쩌면 칠레두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설도 전해져오고 있다. 그래서일까? 예수게이는 자신이 죽인 타타르족의 전사(戰士)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아들 이름을 ‘테무친’이라고 지었다.
 
  한편 메라키드족의 칠레두는 보복심리로 테무친이 결혼했을 때 그의 아내 보르테를 납치해 동생 칠게르와 살게 했다. 그 후 테무친이 아내를 구출했을 때는 임신 중이었으므로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었다. 테무친은 아들의 이름을 ‘주치’라고 지었는데, 몽골어로 ‘이방인’이란 뜻이었다.
 
  이처럼 테무친과 아들 주치는 태생 과정에서 비슷한 곡절을 겪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놓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두 사람 모두 자라나면서 형제에게 자신들과 다른 피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이유로 놀림을 많이 받았다.
 
  그런 놀림을 받았을 때 테무친은 친동생 카사르와 함께 예수게이의 첫째 부인이 낳은 아들 베그테르를 화살로 쏘아 죽였으며, 그것이 평생 그에게 오명으로 남았다. 또한 주치는 동생들의 놀림을 받고 자란데다 나중에는 형제간에 권력다툼까지 벌어지자, 서역 정벌 당시 점령한 키르기스 초원과 남러시아에 따로 킵차크한국을 세웠다.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 불렀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부모형제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1188년 테무친은 몽골 부족연맹의 맹주(盟主)로 떠올랐으며, 1204년에는 부족들을 연합해 몽골 초원을 통일했다. 그러고 나서 1206년 그가 태어난 오논 강변에서 개최된 족장들의 모임인 쿠릴타이에서 몽골제국의 칸으로 등극, ‘칭기즈칸’이란 칭호를 얻었다. ‘칭기즈’는 몽골어로 단호함·강력함·성실함 등의 뜻으로, ‘강력한 의지의 군주’를 이르는 말이었다.
 
 
  자기에게 활을 쏜 자도 중용
 
  약 100만명에 이르는 몽골 부족들을 통일하는 데 25년이 걸린 칭기즈칸은, 기존의 부족집단체제를 바꾸어 좀 더 활동적이고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1000호 단위로 95개의 유목영주제(遊牧領主制)를 도입했다. 그가 이끄는 친위대는 10만~20만명으로 가장 먼저 고비사막을 건너 중국 서쪽에 자리한 서하(西夏)를 공격하였다. 서하는 탕구트족이 세운 나라로, 오늘날 중국 서부에 위치해 서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1209년 서하를 정벌한 칭기즈칸은 국왕 이안전(李安全)과 강화조약을 맺어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그런 연후 1211년 몽골 남쪽의 대국인 여진족의 금(金)나라를 공략했다. 인구 100만명인 몽골에 비하면 당시 금나라는 5000만명이었다.
 
  서하에서 고비사막을 건너 망명해온 피란민과 전사들까지 동원하여 금나라 정벌에 나선 칭기즈칸은, 주치·차가타이·오고타이·툴루이 등 아들 4명을 앞세워 속도전으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1202년 12월에 황하(黃河) 이북의 전 영토를 석권하였고, 1215년에는 수도 연경(燕京·현 베이징)을 점령함으로써 금나라를 완전히 제압했다.
 

  이처럼 정복전을 펼치면서 칭기즈칸은 각 지역에서 두루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처음에는 전투를 잘하는 전사들, 무기를 제작하는 기술자들을 뽑는 데 주력하였다.
 
  어느 전투에선가 적의 전사가 화살로 칭기즈칸이 탄 말의 목을 쏘았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는 포로들에게 자신의 말을 쏜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때 당당히 앞으로 나서서 자신이라고 대답하는 전사가 있었다. 칭기즈칸은 용감한 전사라고 칭찬하고 그를 자신의 휘하 장수로 삼았으며 이름을 ‘제베’로 지어주었다. 그 이후로 제베는 몽골군의 가장 위대한 장수 중 한 명이 되었다.
 
  칭기즈칸은 전사나 무기제작자뿐만 아니라 의술인, 목수·도공·토목 기술자 등 다양한 분야의 수공업자들, 그리고 수도사·점성술사·연금술사·예언자·현인 등도 만나기를 원했다. 그들은 그 소식을 듣고 아주 먼 거리에서도 칭기즈칸을 찾아왔다.
 
 
  호라즘 정벌
 
  칭기즈칸은 중국 금나라를 정복할 때만 해도 문명 파괴나 인명을 무자비하게 살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역 정벌 때는 인명 살상은 물론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여 문명사에 오명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이처럼 서역의 도시들을 초토화시킨 것은 원정(遠征)을 단행한 동기로 숙적(宿敵)에 대한 보복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일명 ‘오트라르 사건’이 서역 정벌의 직접적인 요인이었던 것이다.
 
  1218년 서요를 공략한 칭기즈칸은 당시 서역의 강국인 호라즘(Khwarezm: 카와리즘)제국에 3명의 사절과 함께 450명의 무슬림 대상(隊商)을 파견, 몽골과의 정식적인 관계 수립과 무역을 통한 교류를 시도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절단이 호라즘의 영토인 오트라르에 이르렀을 때, 그 지역을 관장하던 지사가 그들을 몽골에서 보낸 간첩으로 오인(誤認)하여 재물을 빼앗고 인명을 살상하거나 감옥에 가두었다. 이때 단 한 명의 낙타몰이꾼이 감옥에서 탈출하여 칭기즈칸에게 달려와 그 실상을 보고했다.
 
  칭기즈칸은 처음에 무슬림과의 두터운 신뢰를 쌓기 위하여 관용을 베풀고자 하였다. 그래서 호라즘의 군주 샤 무함마드 2세(알라웃 딘 무함마드)에게 사자를 보내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를 처형하라고 요구했다. 사건 당사자는 샤의 외삼촌이었기에 칭기즈칸의 요구는 거절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샤는 몽골제국을 먼 땅의 야만족으로 여겨 사자 1명을 처형하고 2명은 수염을 깎아 모욕을 준 후 추방하였다.
 
  이에 분개한 칭기즈칸은 쿠릴타이를 소집해 부족 원로·수장(首長)들의 의견을 조율한 후 즉각 서역 원정에 나서기로 했다. 1219년 봄에 그는 제1차 서역 원정을 단행하였다. 그는 아들 4형제 중 가장 사랑하는 아들 4남 툴루이와 함께 주력군을 이끌고 호라즘제국의 중심 도시인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로 출진하였다. 이때 2남 차가타이와 3남 오고타이는 오트라르를 점령해 사건의 당사자인 지사를 처형하였다. 장남 주치는 시르다리야강 하류를 따라 서진하면서 호라즘의 영향권 내에 있는 도시들을 공략하였다.
 
  이처럼 전방위적으로 공략을 당한 호라즘제국의 군주 샤는 1220년 말 카스피해 쪽으로 도망갔다가 끝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잘랄룻 딘은 계속 항전(抗戰)하며 게릴라전을 펼쳤으나, 결국 1231년 소아시아에서 한 쿠르드인에게 암살당했다. 이때 칭기즈칸은 힌두쿠시산맥과 사마르칸트를 오가면서 인도로부터 남러시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몽골 서정군을 총지휘했다.
 
 
 
바투와 훌라구의 西征

 
몽골군은 간결함, 순발력, 속도감을 무기로 유라시아대륙을 정복했다.
  한편 칭기즈칸은 잘랄룻 딘이 살해당하기 전인 1225년 봄, 서역 원정 6년 만에 귀향했다. 그 다음 해인 1226년 서하가 반기(反旗)를 들자, 다시 서하를 공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전투 도중 낙마(落馬)하였으나, 끝까지 적을 추격하여 1227년 왕 이현(李晛)을 죽임으로써 서하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낙마로 인한 상처가 악화되어, 귀로하던 중 그 후유증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칭기즈칸 사후(死後), 몽골군의 2차 서역 원정은 1235년부터 1244년까지 행해졌다. 이때는 3남 오고타이가 대(代)를 이어 제2대 칸으로 등극한 시대였다.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둘째 아들 바투가 50만 대군을 이끌고 서정을 단행하여 일명 ‘바투 서정(西征)’이라고 한다. 이때 오고타이의 장자 구육과 툴루이의 장자 몽케 등 칭기즈칸의 네 아들이 낳은 장자들이 출동하여 ‘장자(長子) 서정’이라고도 부른다.
 
  몽골군의 제2차 서역 원정은 러시아와 동유럽 제국, 그리고 유럽의 심장부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이때 러시아의 114개 도시를 초토화시켰으며, 흑해 북안의 크리미아와 드네프르강 중류의 키예프 등도 함락되었다. 몽골군은 폴란드와 독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오고타이칸의 사망으로 바투의 서역 원정군은 회군(回軍)을 하게 되었다.
 
  몽골군의 제3차 서역 원정은 1253년부터 1260년까지로, 이때는 오고타이 다음으로 그의 장자 구육이 대를 이었다가 물러나고 칭기즈칸의 4남 툴루이의 장자 몽케가 등극하였을 시기다. 몽케칸은 동생 훌라구를 서역 원정의 통수(統帥)로 삼아 카스피해 남부를 거쳐 메소포타미아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이 원정을 일명 ‘훌라구 서정’이라고 하는데, 바그다드·메카·예루살렘·다마스쿠스까지 점령하였다. 원래 훌라구는 이집트까지 공략 목표로 삼았으나 몽케가 남송(南宋)을 공격하다 사망하는 바람에 다마스쿠스에 일부 수비 병력만 남기고 주력군을 이끌고 회군했다.
 
  몽골은 칭기즈칸과 그 후손 3대에 걸쳐 서역 원정을 단행함으로써 동서 문명 교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원정을 통하여 몽골은 알타이산맥 일대에 오고타이한국, 아무다리야 유역에 차가타이한국, 동유럽 지역에 킵차크한국, 페르시아와 소아시아 지역에 일한국 등 4개 한(汗)국을 세워 몽골 대제국의 위상을 알렸다. 이로 인하여 유라시아의 동서남북에 걸쳐 광대한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동서 문명의 융합과 교류에 적극 기여할 수 있었다. 전쟁로는 곧 상업의 교통로이기도 해서, 몽골의 3차에 걸친 서역 원정 결과 상호간의 교통이 전례 없이 발달하게 되었다.
 
 
  실크로드 수첩
 
  몽골군의 서정이 동서교류에 미친 영향
 
  몽골제국 시대에 서방으로 통하는 길은 크게 두 갈래였다.
 
  첫 번째 길은 몽골의 카라코룸이나 대도에서 출발하여 둔황(敦煌)으로, 여기서 다시 서북 방향으로 오트라르와 우르겐치를 경유해 킵차크한국의 수도 사라이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을 ‘킵차크길’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더 서역으로 연장하면 크리미아반도를 거쳐 러시아나 유럽의 각지로 이어지게 된다. 원래 이 길은 몽골 제2차 서역 원정군이 이동한 노선인데, 이후 몽골까지 왕래하는 유럽의 사절이나 여행가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두 번째 길 역시 몽골의 카라코룸이나 대도에서 출발하는데, 둔황에서 서북 방향으로 톈산남로를 거쳐 파미르고원을 넘는다. 여기서 다시 호라산과 타브리즈를 거쳐 바그다드에 이르는 길로, 이를 ‘페르시아로’라고 한다. 유럽으로 가려면 배를 타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등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이렇게 페르시아까지 이어지는 길은 1차와 3차의 몽골 서역 원정군이 이용한 길이다.
 
  육로로 연결된 동서 교통로상에는 몽골제국이 만들어놓은 역참(驛站)이 있어 동서를 오가던 대상들이 많이 이용했다. 이를 역체제도(驛遞制度)라고 하는데, 역참에는 수참(水站)과 육참(陸站)이 있다. 주로 가축을 이용하는 육참에는 마참(馬站)·우참(牛站)·여참(驢站)·나참(騾站)·양참(羊站)·구참(狗站) 등이 있다. 또한 사람의 편에 전하는 역참으로는 보참(步站)과 교참(轎站)이 있다. 몽골이 세운 원(元)나라에는 1400여 개의 역참이 있었으니, 동서 교역서 상당히 많은 역참이 동서 간의 정보 유통과 문물 교류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송나라 때의 급각체(急脚遞)를 더욱 발전시켜 원나라가 만든 급체포(急遞鋪)는 중앙 정부와 지방 기관이 서로 주고받는 문서 전달의 목적을 가진 특수 역참이었다.
 
  몽골 서역 원정 당시 동서 문물교류는 아랍인들의 중간 매개를 거치지 않은 직접 교류가 활성화되었다. 이때 서구인들은 몽골군으로부터 다량의 화약을 구입함으로써 병기 발전과 전술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제지술과 인쇄술의 직접적인 전수를 통한 수용, 나침반의 사용으로 인한 항해술의 발전 등은 서구 문명을 크게 발전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이러한 물품뿐만 아니라 몽골군의 서역 원정을 계기로 하여 아랍-이슬람과 서구의 문명이 동방으로 대거 유입되었으며, 천문학과 의약 및 건축 분야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영향을 받았다. 더불어 기독교와 이슬람 등 종교도 유입되어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영웅 리더십
 
  속도·간결성·자신감의 슬림형 리더십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적은 군대로 중국 대륙의 금나라와 송나라는 물론 서역의 이슬람 강국들, 러시아와 유럽까지 공략한 저력은 활력 넘치는 조직력과 속도감 있는 말타기의 기술에 있었다.
 
  칭기즈칸은 몽골의 유목민 집단을 통일하여 대칸(大汗)이 된 직후 부족을 95개의 천호(千戶)로 하는 집단체제로 분할하였다. 이는 행정단위이면서 곧 군사단위이기도 하였다. 즉 천호란 약 1000명, 백호란 약 100명의 병사를 제공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이렇게 구축(構築)한 병사들은 공신 중에서 임명한 천호장·백호장 등이 이끌었으며, 이들은 총지휘관인 만호장의 지휘를 받았다.
 
  몽골군의 이동수단은 말이었는데, 그들의 군량인 육포는 개인마다 말에 싣고 다녔다. 한 달 이상의 군량도 개인이 너끈히 싣고 다닐 수 있었으므로 곡물을 주식으로 하는 금나라나 송나라, 서역 각국과 유럽 군대가 따로 보급부대를 두는 것보다 훨씬 유리했다. 몽골군은 조직의 간결성과 순발력 있는 지휘체계, 그리고 말타기를 이용한 속도감을 무기로 삼아 적은 군대로도 쉽게 동서양의 대륙을 경략할 수 있었다.
 
  칭기즈칸의 지혜는 오늘날 문어발식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들에 충분히 경종을 울려줄 만하다. 공룡처럼 몸만 비대해지면 순발력에서 뒤떨어지고, 방만한 경영과 나태로 위기에 처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중성자탄’ 잭 웰치
 
잭 웰치 전 GE 회장.
  발명가 에디슨이 설립한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 제너럴일렉트릭(GE)은 ‘공룡기업’이란 별칭을 들을 만큼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초일류 기업이다. 2020년 3월 84세로 세상을 떠난 잭 웰치는, 1981년 최연소 나이인 45세 때 GE 회장에 취임한 이후 2001년까지 20년간 개혁의 리더십으로 기업을 급성장시켰다. 회장 취임 당시 120억 달러였던 회사의 시가 총액을 2001년 퇴임할 때 4100억 달러로 무려 34배 성장시켜 ‘경영의 귀재’로 일컬어졌다.
 
  GE는 당시 세계적인 가전업체로 알려져 있었지만, 기업 규모가 커지면서 무리하게 각종 사업을 전개하다 보니 계열사가 늘어나 수익 구조가 크게 악화되어 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비만증에 걸린 것처럼,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는 데 비하여 기업의 성장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GE 회장으로 취임한 잭 웰치는 속도(Speed)·간결성(Simplicity)·자신감(Self-Confidence)으로 요약되는 ‘3S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그는 일단 국제시장에서 1, 2위를 다투는 사업만 남겨놓고 각 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또한 GE사의 주력 업종이던 라디오와 TV 제조 부문 등 부실 사업장을 매각하였다. 취임 후 5년 동안 41만1000명에서 29만9000명으로 무려 10만여 명의 임직원을 해고하는 감량경영을 실시한 것이다. 일종의 ‘군살빼기 전략’으로, 특히 중간관리자의 감원을 통하여 날로 새로워지는 시장 변화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는 기민한 조직을 만드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렇게 되자 미국 사람들은 잭 웰치는 ‘중성자탄’이라고까지 비난했다. 이는 ‘건물만 남기고 사람은 파괴한다’는 데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라디오와 TV 제조업을 포기하는 대신 독일의 지멘스사가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의료기기사업에 중점적으로 투자하였다. 의료기기 이외에도 전력(電力) 시스템, 항공기 엔진, 조명기기 등 자신 있는 분야에 사업을 집중시키는 등 이른바 ‘리스트럭처링’을 과감하게 단행했다.
 
 
 
“자신 있는 사람들이 심플해질 수 있다”

 
  잭 웰치는 구조조정을 통하여 GE를 핵심사업·첨단기술사업·서비스사업 등 크게 세 분야로 정리하였다. 이에 따라 회장 취임 당시 170개에 이르던 사업부가 110개 부문으로 줄어들었다. 그 대신 GE캐피털뱅크를 새롭게 설립하고, 전자회사 ‘RCA’와 증권회사 ‘키더피보이’를 인수하는 등 수익이 날 수 있는 사업구조로 개선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또한 잭 웰치는 ▲통합된 다양성 ▲세계화 ▲기업문화 ▲벽 없는 조직 ▲워크아웃(work-out) ▲스트레치 목표 ▲변화가속운동 ▲6-시그마 품질경영운동 등 지속적인 경영혁신운동을 전개하여 세계 초일류 기업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 1991년 GE는 IBM을 추월하는 미국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2001년 잭 웰치는 제프리 이멜트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고 퇴임하였다.
 
  “자신 있는 사람들이 심플해질 수 있다. 자신감이 없으면 복잡하고 어렵게 말을 하게 된다. 심플하지 않으면 빨리 내달릴 수 없다. 빠르지 않으면 글로벌 경제에서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직원들의 자신감을 구축시켜줌으로써 심플하게 일하도록 한다.”
 
  이것은 잭 웰치의 명언 중 한 토막이다. 그는 자서전 《잭 웰치: 끝없는 도전과 용기》란 책을 출간해 베스트셀러로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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