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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영웅 리더십 7

고선지(下)

禍를 부른 過慾의 리더십

글 : 엄광용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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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선지,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연합군에게 참패
⊙ 連戰連勝에 따른 교만과 방심, 파트너인 監軍 변령성과의 갈등으로 몰락
⊙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군의 포로가 된 唐나라 군사 통해 서양으로 製紙術 전파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 현재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중
고선지의 몰락과 제지술의 서양 전파를 가져온 탈라스 전투.
  고선지(高仙芝)가 당(唐)나라 군사를 이끌고 서역(西域) 원정에 나선 것은 총 5회였다. 처음 달해부 원정(740년)을 비롯하여 제2차 토번국과 소발률국(747년), 제3차 걸사국(朅師國·사마르칸트, 750년), 제4차 석국(石國·타슈켄트, 750년), 제5차 탈라스 전쟁(751년) 등이었다.
 
  특히 750~751년 2년에 걸쳐 고선지가 연거푸 서역 원정에 나선 것은, 당시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이슬람제국과 당나라가 교역 상권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때문이다. 750년 우마이야조(朝) 아랍제국을 물리친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은 당나라 지배하에 있던 서역 여러 나라를 압박해왔다. 그중에서도 750년 고선지가 두 번에 걸쳐 서역 원정에 나선 걸사국과 석국은 지리적으로 ‘교통의 십자로’라 할 만큼 동서 교역의 요충지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었다. 새롭게 일어선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이 이 지역으로 세력권을 뻗쳐오자 당나라는 바짝 긴장했다.
 
  걸사국과 석국을 위시한 그 주변국들은 소그드(Sogd)인들이 주로 정착해 사는 지역으로, 지리적 여건상 교역이 발달하여 그들은 특히 상업에 밝았다. ‘소그드’란 ‘불로 정화된’ 또는 ‘청정한’이란 뜻으로 통하는데, 당시 실크로드는 소그드 상인들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인 걸사국과 석국의 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이슬람제국이 동진(東進)하면서 세력권을 뻗쳐오자, 당나라 현종(玄宗)은 750년 서역 원정의 명장으로 부상한 고선지를 원정군 총수로 삼아 출동시켰다.
 
  고선지는 원정군을 이끌고 톈산산맥을 넘어 걸사국을 쳐서 손쉽게 제압했고, 다시 같은 해 두 번째 원정으로 석국 공략에 성공했다. 이때 그는 걸사국왕 발특몰(勃特沒)과 석국왕 차비시(車鼻施)를 볼모로 삼아 장안으로 끌고 갔다. 석국의 경우 왕자와 공주까지 볼모 신세가 되어 장안의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석국왕 차비시가 고문 끝에 감옥에서 죽고 말았다. 이때 석국 왕자 나구차비시(那俱車鼻施)는 가슴에 한(恨)을 품고 죽기 살기로 탈출해, 귀국하자마자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이슬람제국에 군사를 요청했다.
 
  이렇게 되자 751년 7월 당나라 현종은 다시 고선지를 파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5차 서역 원정에서 고선지는 7만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톈산산맥을 넘었고, 마침내 석국-이슬람 연합군과 탈라스(Talas)성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다.
 
 
  탈라스 전투
 
  ‘탈라스’는 원래 서투르키스탄(현 카자흐스탄)의 강 이름이었다. 톈산산맥의 지맥(支脈)인 탈라스산에서 발원하여 ‘탈라스강’이라 명명했는데, 석국은 가로지르는 강을 천연의 요새로 하여 평지에 견고한 성(城)을 구축해놓고 있었다. 이 탈라스성에서 석국왕 나구차비시는 이슬람제국과 연합군을 형성해 고선지의 당나라 원정군 7만명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당시 이슬람제국의 호라산 총독 이븐 무슬림은 장수 지야드 이븐 살리흐를 파견하여 석국을 돕게 했다. 이때 톈산산맥 북쪽 기슭에서 유목을 하던 튀르크의 일족인 카를룩(Qarluk·葛邏綠)을 대당 보복전에 참여시켜 탈라스 전투는 실크로드 노상에 위치한 각 나라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국제전을 방불케 했다. 석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나라 감옥에서 부왕(父王)을 잃은 왕 나구차비시의 보복전이고, 이슬람제국의 입장에서는 동서 교역 상권을 확보하기 위한 쟁탈전이었으며, 카를룩은 당나라와 이슬람제국 사이에서 견제를 하면서 유리한 입장을 취하기 위한 외교적 전략이 강하게 표출된 전쟁이었다.
 
  이슬람 장수 살리흐는 휘하 군사들에게 ‘라 일라하 일라 알라, 무함마드 라술룰라’라는 주문을 외면서 전투에 임하게 했다. 이는 ‘알라 이외의 신(神)은 없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使者)다’라는 뜻으로, 군사들에게 주술적인 힘을 주입시켜 공포감을 없앰으로써 목숨을 걸고 싸우게 하였다.
 
  톈산산맥을 넘어온 고선지는 지난 제4차에 걸친 서역 원정이 그랬듯이 당나라 대군에게 휴식할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탈라스성을 공격도록 했다. 그러나 의외로 탈라스성은 견고했으며, 석국-이슬람 연합군의 방어력은 강했다. 5일째 되는 날 톈산산맥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온 튀르크의 카를룩 군대가 석국-이슬람 연합군을 지원해 협공하면서, 당나라군은 수세에 몰리는 형국이 되었다.
 
  원래 당나라와 카를룩족은 동맹 관계를 맺고 있어서 고선지는 당연히 자신의 군대를 지원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배반하는 바람에 전세(戰勢)는 뒤바뀌고 말았다. 카를룩의 군대 2만명이 후방에서, 석국-이슬람 연합군 4만명이 성문을 열고 나와 공격하면서, 고선지의 당나라 군대는 졸지에 앞뒤로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이전 제4차에 걸친 서역 원정에서 성공을 거둔 눈부신 전과가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의 발목을 잡고야 말았던 것이다. 과욕(過慾)이 화(禍)를 부른 결과였다. 그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단시일 내에 탈라스성을 탈취하고자 서두른 것이 참패(慘敗)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톈산산맥의 부족 카를룩을 우군(友軍)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도 그의 큰 실수였다.
 
  고선지는 탈라스 전투에서 부장 이사업(李嗣業)과 단수실(段秀實)의 분전으로 엄호를 받으며 겨우 사지(死地)에서 탈출해 귀환할 수 있었다. 아랍 사서(史書)의 기록에 의하면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 원정군 중 2만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또한 《통전(通典)》에서는 탈라스 전투에서 7만명의 군대 중 거의 다 죽고 살아남은 자가 많지 않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탈라스 전투에 참여한 당나라 원정군 수도 사료의 기록마다 2만, 3만, 6만, 7만명 등 제각각이다. 그중 7만명이라는 설이 가장 신빙성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당시 7만명의 병력이면 엄청난 대군인데, 그들이 거의 죽었다면 고선지로서는 치욕스러운 패전(敗戰)이라 할 수 있다.
 
 
  안녹산의 난
 
안녹산
  탈라스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고선지를 두고 당나라 조정에서는 수만의 군을 잃은 죄를 물어 처형하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현종은 예전 그의 공적을 높이 사서 형벌을 가하지는 않았다. 대신 안서사진(安西四鎭)절도사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현종은 752년 12월 고선지 밑에서 행군사마로 업무를 착실히 수행한 봉상청을 안서사진절도사로 임명했다. 한편 고선지는 그 이후 하서(河西)절도사로 임명되었는데, 안서보다 하서가 휘하에 병사와 군마(軍馬)의 수가 훨씬 많았으므로 문책성 인사라기보다는 승진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만큼 현종은 고선지의 능력을 인정했고,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중책을 맡겼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현종은 하서절도사 고선지를 난(亂)을 진압하는 장군인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에 임명했다. 이때 원수(元帥)는 현종의 아들 이완(李琬)이 맡았지만 이는 명목상의 직책일 뿐이었고, 고선지는 부원수에 어사대부(御史大夫)까지 겸했다. 여기서도 그가 여전히 현종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오랜 지기(知己)인 안서절도사 봉상청도 안녹산의 난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출동하였다.
 
  안녹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고선지가 군대를 이끌고 출전할 때도 역시 환관 변령성이 감군(監軍) 역할을 맡았다. 난을 일으킨 안녹산은 소그드인 아버지와 돌궐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민족(異民族)이었다. 난의 진압을 맡은 장군 고선지 역시 고구려 유민(遊民) 출신이므로 현종은 만약을 몰라 변령성에게 철저히 감시하라는 밀명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고선지는 감군 변령성의 존재를 가볍게 여겼다. 토번국 공략 후 소발률국을 치러 갈 때도 변령성에게 군사 3000명을 주며 이미 탈취한 연운보나 지키고 있으라고 할 만큼 그를 무시했던 것이다.
 
  한편 고선지보다 먼저 군사 6만명을 이끌고 출진한 봉상청은 낙양(洛陽)에서 반군 진압에 실패하였다. 사실상 봉상청은 고선지 휘하에 있을 때는 빛났지만, 그 단독으로 군사를 지휘하는 것은 처음이므로 전략에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 이때 봉상청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고선지가 주둔하고 있는 섬주(陝州)로 퇴각했다. 당시 고선지는 현종의 명으로 섬주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봉상청이 고선지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에 패잔병을 이끌고 섬주로 퇴각할 때, 안녹산의 반군이 무서운 기세로 들이닥쳤다. 결국 봉상청이 안녹산의 반군을 섬주로 끌어들인 셈이 되었다. 이때 봉상청은 고선지에게 동관(潼關)을 지켜야만 장안(長安)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했다. 고선지도 위기를 느끼고 일단 섬주에서 군사를 퇴각시키기로 했다.
 
 
  고선지의 최후
 
  고선지는 문득 반군의 수중에 들어갈지도 모를 섬주의 창고인 태원창(太原倉)이 걱정되어, 퇴각할 때 그곳으로 먼저 가서 금붙이와 비단을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어 사기를 진작시켰다. 어차피 그 재물이 반군에 넘어가면 안녹산의 군세(軍勢)를 더욱 키워주는 일이 되므로 취한 특단의 조치였다.
 
  그러나 감군 변령성은 곧바로 장안의 현종에게 달려가, 고선지가 봉상청과 함께 적을 앞에 두고도 피하여 달아난데다 태원창을 열어 보물과 비단을 휘하의 군사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취했다고 보고했다. 그 말을 듣고 현종은 격노하여 즉석에서 두 사람을 처형토록 명했다.
 
  황명을 받은 변령성은 먼저 봉상청을 체포해 칼잡이로 하여금 그의 목을 치게 하였다. 이때 고선지는 봉상청의 시체를 보고 “그대는 내가 발탁하였고, 또 나를 대신하여 절도사가 되었으며, 지금 그대와 함께 죽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고 곧 죽음을 받아들였다.
 
 
  실크로드 수첩
 
 
탈라스 전투와 제지술의 서역 전파

 
중국의 古代 제지술은 탈라스 전투 이후 중동을 거쳐 서양으로 전해졌다.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석국-이슬람 연합군은 당나라 군사 2만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그 포로 중에 제지 기술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에 의해 강국(康國)의 수도 사마르칸트에 제지술(製紙術)이 전해졌다. 그래서 서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종이를 ‘사마르칸트지’라고 불렀다.
 
  《후한서(後漢書)》 열전 ‘채륜전(蔡倫傳)’에는 원흥(元興) 원년(기원전 105년)에 후한의 채륜이 수부(樹膚·나무껍질)나 마두(麻頭·삼베), 폐포(蔽布·낡은 옷감), 어망(魚網·고기 잡는 그물) 등을 원료로 종이(채후지)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의 종이가 서역으로 전해진 것은 고선지가 제5차 서역 정벌에 나선 이후의 일이므로 750년대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한자문화권인 동북아시아에는 중국의 종이가 일찍부터 전해져 사용되어 왔지만, 서역 전파는 대체로 늦은 편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원(紀元)을 전후한 한사군 시대에 종이가 유입된 것으로 보며, 그 시기를 늦어도 3세기 이전까지로 잡고 있다. 일본의 경우 백제의 왕인(王仁) 박사가 종이에 쓰인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4세기 중엽에 종이가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역의 경우 8세기 중엽에 처음으로 제지술이 사마르칸트에 전해졌으며, 그전까지 중앙아시아의 아랍-이슬람제국에서는 양피지나 파피루스를 글쓰기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사마르칸트지의 제지술은 점차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카이로, 페스 등 이슬람 종교를 믿는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 제지술이 북아프리카를 거쳐 유럽 지역으로 상륙한 것은 12세기 중엽 아랍인들에 의해서였다.
 
 
  제지술의 확산
 
  제지술이 아랍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루트는 대략 세 갈래이다.
 
  첫째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지중해의 시칠리아~아프리카 서북단 페스~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안달루스(스페인)로 상륙하여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둘째는 다마스쿠스~터키의 이스탄불~발칸반도~이탈리아로 이어지는 육로를 통해 유럽 각지로 제지술이 전파되었다.
 
  셋째는 다마스쿠스~알렉산드리아~시칠리아~이탈리아~프랑스로 이어지는 육로를 통해 점차적으로 유럽 지역에 제지술이 전해졌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제지술이 발달한 곳은 바다와 접하고 있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였다. 스페인에는 12세기 초부터 제지소가 생겨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탈리아의 경우 12세기에 제지술이 전해져 14세기 초엽에 이르러서는 종이의 양이나 질이 스페인이나 다마스쿠스를 앞질러 가는 수준으로 발달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13세기 초부터 종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영국의 경우 한 세기 뒤인 14세기에 이르러서야 종이 문서를 쓰기 시작했다. 17세기 말에는 영국에서 약 100개의 제지소가 성업을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18세기 중엽에는 제지술이 특히 발달하여 제지소마다 초지기(抄紙機)를 갖추어 대량생산 체제에 돌입하였다. 영국의 제지술은 19세기에 북아메리카의 미국과 캐나다에 전해졌으며, 이후 신문 발행 등으로 인한 인쇄술과 함께 발전을 거듭해왔다.
 
  제국주의가 성행하던 19세기 말에는 제지술이 서양과 미국을 통해 다시 동양으로 전해짐으로써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셈이었다. 수작업이 아닌 초지기를 통한 종이의 대량생산 체제가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영웅 리더십
 
 
월트 디즈니의 성공과 실패

 
  전쟁과 사업은 서로 통한다. 두 가지 모두 성공이냐 실패냐의 결과론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과 같은 글로벌시대에는 지구촌이 하나의 시장으로 바뀌면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사업성과를 거두지 않으면 안 된다. 전쟁이나 사업이나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한 사람에 의해 성패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파트너를 잘 만나 합심을 통해 노력을 배가해야만 성공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고선지는 실크로드 영웅이지만 종국에는 비참한 최후로 삶을 끝냈다. 파트너를 잘못 만난 경우다. 그의 전쟁 파트너는 봉상청과 변령성이다. 그러나 고선지는 봉상청에게는 늘 잘해주었지만, 변령성에게는 황제가 보낸 감군임에도 불구하고 매사 도외시하기 일쑤였다. 그것이 결국 변령성의 모함으로 봉상청과 함께 죽임을 당하는 운명에 처하도록 만들었다. 서역 원정 때마다 승리를 거듭하면서 생긴 과욕이 고선지를 결국 패망의 길로 몰아갔던 것이다.
 
 
  파트너의 배반
 
월트 디즈니
  ‘미키 마우스’로 잘 알려진 만화영화의 선구자 월트 디즈니는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것이 없어 실패를 거듭했다. 실패 이유는 사업 파트너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펜과 종이가 유일한 친구였던 디즈니는 만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는 18세 때 광고대행사에 취직해 그림을 그렸는데, 사장은 그림에 소질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한 달 만에 해고했다.
 
  이때 디즈니는 사장이 그림을 볼 줄 모른다고 판단하고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당시 만화영화 〈고양이 펠리스〉가 공전의 히트를 치자, 디즈니의 꿈은 만화영화 제작자로 바뀌었다.
 
  디즈니는 1922년 그의 나이 21세 때 캔자스시티 필름 광고사에서 같이 삽화가로 일하던 어브 아이웍스와 함께 ‘래프 오 그램’사를 설립하였다. 이 회사에서 그는 단편 만화영화 제작을 했는데, 첫 번째 작품은 개봉하기도 전에 영화 배급자의 파산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두 번째로 〈앨리스의 모험〉이란 작품을 제작 중이었는데, 이때는 제작비가 바닥나서 중도에 그치고 말았다.
 
  1923년 디즈니는 캔자스시티를 떠나 미국 영화의 본고장 할리우드로 갔다. 서부행 기차를 탔을 때 그의 주머니에는 단돈 40달러밖에 없었다.
 
  디즈니는 할리우드에서 형 로이와 함께 월세(月貰) 10달러짜리 창고를 얻어 ‘디즈니 브러더스’란 간판을 걸고 만화영화 사업에 도전하였다. 거기서 〈앨리스의 모험〉이란 영화를 완성했고, 디즈니는 뉴욕으로 가서 당시 영화 배급자로 잘 알려진 마거릿 윙클러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디즈니는 윙클러의 남편 찰스 민츠와 만화영화 사업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고양이 펠리스〉에 버금가는 캐릭터인 ‘토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동업자인 민츠는 그가 그린 토끼 캐릭터에 ‘운 좋은 토끼 오스왈드’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토끼 오스왈드〉는 일반인들이 쉽게 즐길 수 있는 단편 만화영화 시리즈로, 디즈니에게 일단 성공을 안겨주는 듯했다. 그러나 사업 파트너인 민츠가 배반을 하여 오스왈드 캐릭터를 자기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디즈니도 모르는 사이에, 민츠와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캐릭터 판권을 공동 소유하는 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자네는 단순한 오스왈드 캐릭터 제작자일 뿐이야. 그리고 이제부터는 자네 영화사에서 일하던 유망한 만화가들이 나와 함께 일하기로 했네.”
 
  민츠의 이 같은 말에 디즈니는 화가 났다. 그러나 그가 오스왈드 캐릭터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을 만큼 민츠는 철저하게 법적으로 완벽한 계약서를 꾸며놓고 있었다.
 
 
  ‘미키 마우스’의 탄생
 
  결국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디즈니는 창고 같은 사무실에서 다시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그는 사업 파트너였던 민츠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머리를 마구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아아, 생쥐만도 못한 인간 같으니라고!”
 
  그때 문득 책상 밑의 쓰레기통에 빠져 찍찍대는 진짜 생쥐를 발견했다. 그는 생쥐를 잡아 작은 철망 속에 넣고 먹이를 주며 길렀다. 그러던 중 생쥐를 민츠로 생각하고 볼 때마다 욕을 해대던 디즈니에게 어느 날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바로 생쥐야! 생쥐를 캐릭터로 그려 민츠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말 테다.”
 
  디즈니는 생쥐 캐릭터를 열심히 그렸으며, 완성한 후에 이름을 ‘미키 마우스’라고 지었다. 그 후 제작비 1800달러를 투자해 미키 마우스를 주인공으로 한 〈플레인 클레지〉라는 만화영화를 만들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연이어 〈갤로핀 가우초〉 〈스팀보트 윌리〉 등 미키 마우스 시리즈를 내면서 공전의 히트를 쳤다.
 
  미키 마우스 캐릭터는 사업 파트너를 잘못 만나 꿈을 포기할 뻔한 디즈니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특급 보물이었다.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란 시에는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시구가 있다. 디즈니는 ‘재’가 아닌 ‘쓰레기통’에서 ‘기름’이 아닌 ‘미키 마우스’라는 보물을 건져냈다. 그의 끈질긴 도전 정신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고선지는 파트너를 잘못 만나 졸지에 죽임을 당했지만, 디즈니는 사업 파트너에게 억울하게 판권을 빼앗기고도 재기하여 ‘미키 마우스’란 캐릭터로 성공의 길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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