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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32〉 道詵과 無學이 어루만진 2000년 도읍 서울, 그 터의 流轉

“三角山에 의지하여 帝京을 마련하면 9년 되는 해에 四海가 모두 와서 조공하리라”(도선) / “인왕산을 鎭山으로, 백악–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으라는 내 말을 좇지 않으면 200년 뒤 틀림없이 내 말을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다”(무학)

글·사진 : 문갑식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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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서울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온조가 한성백제를 세우면서부터. 근초고왕 대 백제는 최고의 절정기를 보내다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기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 공민왕은 천도 생각하고 지금 경복궁 자리에 延興殿, 청와대 터에 天授殿 지어
⊙ 하륜은 무악, 무학은 인왕산, 정도전은 백악을 진산으로 삼자고 맞서… 끝내 정도전이 승리
⊙ 의상대사의 《山水記》,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스님의 말을 듣고 따르면 나라를 延存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 鄭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하면 5代도 지나지 않아 임금 자리를 뺏고 빼앗기는 재앙이 있으며 도읍한 지 200년쯤 뒤에 나라가 위태로운 국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창덕궁 후원을 일본인들은 비원이라 불렀다. 가을 단풍이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한 곳이다.
  명칭은 세월 따라 변했지만 지금의 서울이라 불리는 영역(領域)이 역사에 등장한 지가 2000년이 넘었다. 정확히 말하면 기원전 18년 고구려 시조인 주몽(朱蒙)의 아들 온조(溫祖)가 후계 경쟁에서 밀려나자 어머니 소서노, 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해 이곳으로 왔다. 온조는 지금의 송파구 올림픽공원 근처에 풍납, 몽촌토성을 쌓고 한성백제를 세웠다.
 
  비류는 미추홀(인천)로 자기 세력을 이끌고 갔으나 비류가 곧 죽자 백성들이 한성백제의 도읍 하남 위례성으로 이주했다. 한국인의 역사에서 서울은 중심에서 밀려난 적이 없다. 그것은 한강을 끼고 있으며 내사산(內四山) 즉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과 외사산(外四山) 즉 삼각산(북한산), 관악산, 용마산, 덕양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한성백제는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근초고왕 때까지 발전을 거듭하다 삼국간 치열한 다툼 끝에 진흥왕 때 신라의 품으로 넘어갔다. 그 뒤 신라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삼국을 통일한다. 이후 고려 때 도읍이 송도로 넘어갔지만 11대 문종 때 남경(南京)이 설치되며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남경은 서경(西京·평양), 동경(東京·경주)에 이은 세 번째 부도(副都)가 됐다.
 
송파구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몽촌토성의 흔적이다. 지금은 시민들의 산책길로 사랑받고 있다. 오른쪽 빌딩 숲을 지나면 한강이고 그 너머가 아차산이다.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여기서 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참수당했다.
  우리가 자동차나 버스나 지하철이나 도보로 무심히 지나치는 서울 곳곳에는 5000년 한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야말로 ‘터’의 유전(流轉)이라 하겠다. 고려 문종이 남경을 설치한 데는 설화(說話)가 있다. 오늘날 이 산하에 거대한 스케치를 남긴 승려 도선(道詵)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다. 이 책은 전해지지 않고 일부 내용이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삼각산은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한 선경으로서, 거기서 시작한 화맥(花脈·산맥)은 세겹 네겹으로 되어 산이 산을 등지고 명당을 수호하고 있으며 앞의 조산(朝山)은 다섯겹 여섯겹으로 되어 있고, 방계(傍系)·직계의 고산(姑山)·숙산(叔山)·부산(父山)·모산(母山)은 모두 솟아나서 주인을 모셔 다른 생각이 없다.
 
  좌우에 있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는 세력이 서로 비등하여 내외의 인물과 보화는 이곳으로 모여들어 오로지 국왕을 돕고 임자년(壬子年) 중에 이 땅을 개척하면 정사년(丁巳年)간에 훌륭한 아들을 낳을 것이며 또 삼각산에 의지하여 제경(帝京)을 마련하면 9년 되는 해에 사해(四海)가 모두 와서 조공하리라.”
 
도선국사의 진영.
  도선(827~898)은 신라 덕흥왕 2년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도선은 우리 풍수사상의 대가이자 우리가 지금 보는 많은 사찰의 창건자다. 전국을 다녀 보면 사찰을 많이 세운 승려는 대개 도선, 자장율사, 의상대사의 순(順)이다. 그의 속성(俗姓)은 김씨, 최씨라는 설과 함께 금씨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어느 게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도선은 15세에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로 출가해 중이 됐다. 월유산은 충북 영동과 황간 사이에 있는 산을 말하는데 최근에는 월유산이 지리산이라는 설도 있다. 도선은 불경을 공부한 지 4년 만인 문성왕 8년(846년), 대의(大義)에 통달해 신승(神僧)으로 추앙받았고 이후 수도행각에 나서 동리산(棟裏山) 혜철(惠撤)대사에게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에게서 무설설(無說說)·무법법(無法法)을 배운 그는 운봉산과 태백산에서 수도하다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자리 잡았다. 그의 도력이 전국적으로 소문나자 신라 헌강왕이 궁으로 모셨으나 도선은 왕에게 몇 가지 가르침만 줬을 뿐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도선이 전국을 답사하면서 만든 〈삼한도〉에 한반도 산천의 순역(順逆)이 표시돼 있다고 한다.
 
  고려 태조 왕건(재위 918~943)이 태어날 것을 내다보고 왕건의 아버지에게 왕이 나올 집터를 잡아 주었다는 것이 도선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 도선은 백두산에 올랐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송악 근처를 지나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이 새로 집을 짓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느릅나무를 심을 땅에 왜 마(麻)를 심는가?”
 
  이에 놀란 왕륭이 도선을 극진히 대접하자 도선은 왕륭의 뒷산에 올라 천문(天文)과 산수를 살피다 “송악산의 맥은 멀리 임방(壬方)에 있는 백두산에서 시작돼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 내려와 마두(馬頭)에 떨어져 명당을 일으킨 곳이다. 그대는 수명(水命)이니 물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삼십육구(三十六區)를 만들라.”
 
  그러면서 도선은 이렇게 덧붙였다. “송악산이 험한 바위로 되어 있으니 소나무를 심어 바위가 보이지 않게 하면 천지의 대수가 응(應)하여 명년에는 신성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건(建)이라 짓는 게 좋겠다.” 이 예언처럼 다음해 왕건이 태어나 고려를 세우고 삼국을 재통일했다. 왕건은 877년생이고 도선은 893년에 사망했으니 시기적으로 그럴듯하다.
 
  《도선비기(道詵秘記)》는 고려, 조선을 거쳐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제로 도선이 쓴 것인지 알 수 없는 《도선비기》를 들먹이고 그 제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면 그 도력이 짐작 간다.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 ‘절을 세우는 데 산수의 순역을 점쳐 지덕(地德)을 손박(損薄)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다. 이 역시 《도선비기》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나라 사찰을 만든 스님들의 순위에 따르면 도선국사는 모두 79개 사찰을 창건했고 17개 사찰을 중창했다고 한다. 아도화상은 17개 사찰, 원효대사는 87개 사찰, 의상대사는 84개 사찰, 지공선사는 12개 사찰, 나옹 혜근화상은 56개 사찰, 태고 보우화상은 11개 사찰, 무학 자초대사는 73개 사찰, 청허 휴정대사는 19개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전남 화순 운주사에는 도선국사가 천불천탑을 하루 만에 일으켜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도선이 지은 절에는 하나같이 기이한 전설들이 따라다니는데 그중 백미는 전라남도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단 하룻밤 사이에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도선은 사후에 더 명성을 떨쳤다. 효공왕은 그에게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고려 숙종은 대선사(大禪師), 왕사(王師)로 추증했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했다.
 
  여하간 문종이 남경을 설치하고도 길조(吉兆)가 안 보이자 남경은 다시 경기도 양주(楊州)에 포함돼 버렸다. 30년 뒤 숙종이 남경을 재설치하기 위해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 왕비, 세자, 신하들을 이끌고 남경을 둘러보러 왔다. 숙종은 중서문하성의 건의에 따라 서울을 4분했는데 동쪽이 낙산, 서쪽이 안산, 남쪽이 사평도(용산구 한남동), 북쪽이 북악이었다.
 
  남경은 공민왕 때 재차 새 수도의 후보지가 됐다. 공민왕은 몽골의 원(元)과 한족의 명(明)이 대륙에서 패권을 다투고 남쪽에서 왜구가 극성을 부리자 천문역학을 담당하는 판서운관사를 남경에 보냈고 왕궁을 지었지만 정작 천도에 이르지 못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지은 연흥전(延興殿)이 지금의 경복궁, 천수전(天授殿)이 청와대라고 한다.
 
전라남도 영암의 도갑사도 도선국사가 지은 것이다. 도선이 지은 절은 대개 고아한 맛이 있고 규모도 그리 크지 않다.
  정작 남경 천도를 단행한 것은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이었다. 홍건적과 왜구가 위아래로 침략해 오자 우왕은 1382년 시중 이자송(李子松)에게 송도를 지키라고 한 뒤 그해 9월 남경 천도를 감행했다. 하지만 준비가 부족해 이듬해 2월 송도로 돌아오고 말았다. 남경에 대한 우왕의 집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5년 뒤인 1387년 북한산성의 형세를 살피도록 했다.
 
  우왕은 또 최영 장군을 보내 중흥산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지금의 북한산성이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도 ‘개경이 임금을 쫓아낸다’는 도참설에 따라 1390년 남경 천도를 시도해 일부 관서를 옮겼지만 호랑이가 정무를 관장하는 문하부(門下府)에 뛰어드는가 하면 백성의 불평이 자자해 1년 만에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런 남경이 진짜 왕조의 수도가 된건 조선 때다.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한때 계룡산을 신도(新都)로 생각했으나 “지리적으로 남쪽에 치우쳤고 풍수적으로도 불길하다”는 경기 좌우도관찰사 하륜(河崙)의 주장에 따라 백악(白岳) 남쪽, 즉 서울 4대문 안을 새 도읍으로 정했다. 1393년 2월 하륜이 남긴 말은 조선왕조 《실록》에 그대로 옮겨져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본다.
 
  “도읍은 당연히 나라 가운데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땅이 남쪽으로 치우쳐서 동·서·북쪽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부친의 장례를 치르면서 풍수에 관한 여러 서적을 약간 보았습니다. 계룡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서북쪽)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남동쪽)으로 흘러가는데 이는 송나라 호순신(胡舜臣)이 말한 ‘물이 장생(長生)을 부수어 곧 쇠퇴할 땅’이라는 것으로 도읍으로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하륜은 풍수에 밝기로 유명했다. 이성계는 권중화, 정도전, 남재 등과 의논하게 하고 고려 왕조의 여러 산릉의 길흉을 다시 조사시키는 한편 하륜에게 천문과 풍수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주면서 새 도읍지를 물색하게 했다. 이에 하륜이 지금의 연세대가 있는 무악(毋岳)의 남쪽 지역을 새 후보지로 추천했다. 이에 권중화와 조준이 무악을 살펴본 뒤 반대했다.
 
  “무악의 남쪽은 좁아서 도읍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륜이 재차 반박했다. “무악의 명당은 좁은 것 같지만 송도 강안전(康安殿)이나 평양의 장락궁(長樂宮)과 비교해도 오히려 조금 넓은 편입니다. 또한 고려 왕조의 비록(秘錄)과 중국에서 쓰고 있는 지리의 법에도 모두 맞습니다.” 무악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해서 1394년 2월까지 결론을 내지 못했다.
 
  답답해진 이성계가 1394년 8월 무악으로 직접 행차했다. 직접 보니 무악 남쪽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윤신달, 유한우 등이 반대했다. 특히 유한우는 “송도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았으니 궁궐만 새로 짓고 송도를 그대로 도읍으로 삼자”고 했다. 이틀 뒤 이번에는 이성계가 남경의 옛 궁궐터(연흥전·천수전)을 보고 “여기는 어떠냐”고 윤신달에게 물었다.
 
  윤신달은 “우리나라 경내에서는 송도가 제일 좋고 이곳이 다음입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건방(서북쪽)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성계가 기뻐하며 “송도라고 어찌 부족한 것이 없겠느냐. 지금 살펴보니 왕도가 될 만하다. 조운(漕運·뱃길)도 통하고 각 도까지의 거리도 고르니 인사에도 편리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이성계는 마지막으로 왕사 무학에게 물었다. 무학은 “여기는 사면이 높고 빼어나며 가운데가 평평하니 성읍이 되기에 마땅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구하소서”라고 답했다. 태조가 왕궁을 어느 방향으로 할지 의논에 부쳤을 때 저 유명한 태조의 핵심 측근 무학(無學)대사와 정도전(鄭道傳)의 논쟁이 시작됐다.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북악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로 하는 것이 옳다.”(무학대사)
 
  “제왕은 남면(南面)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법도이니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면 궁궐을 남향으로 앉힐 수 없다. 북악을 주산으로 하는 것이 옳다.”(정도전)
 
  무학은 1327년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났으며 박씨다. 《순오지》 《지봉유설》 《연려실기술》에 이성계의 꿈 해몽에 관련된 일화가 전해지며, 구전설화는 전국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출생설화는 무학의 어머니가 빨래를 하러 갔다가 물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아이를 배어 낳게 되자 부모가 내다버렸는데 학이 날개로 보호해 살렸다는 것이다.
 
  그가 출가한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 설화가 전해지며 무학을 유명하게 만든 것이 동자승 시절에 있었다는 합천 해인사 화재 진압 일화다. 즉 무학이 상추를 씻으러 냇가에 갔다가 해인사에 불이 난 것을 알고 물을 뿌려 불을 껐는데 그 사실을 의심한 스님이 직접 해인사에 가서 그것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경복궁과 함께 正宮 역할을 했던 창덕궁 돈화문이다. 왼쪽으로 보이는 현대 본사는 원래 경우궁 터로, 갑신정변 때 김옥균이 고종을 피신시킨 곳이다.
  민간에 가장 잘 알려진 ‘무학대사 설화’는 이성계를 만나 조선왕조의 창업에 관여하게 된 것이다. 《설봉산 석왕사기》에는 고려 우왕 10년인 1384년 전라북도 금마(지금의 익산)에서 함경북도 학성으로 옮겨간 청년 이성계의 이상한 꿈 이야기가 전해진다. 꿈은 1만 집의 닭이 일제히 ‘꼬끼오’ 하고 울고 1000집에서 일제히 다듬이 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이성계가 기이하게 여겨 그 집에 들어갔다가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는데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져 깨졌다. 이성계는 잠에서 깨 이웃 노파에게 해몽(解夢)을 부탁했다. 노파는 “아녀자가 그런 꿈을 해석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여기서 40리 떨어진 설봉산 토굴에 있는 이상한 스님께 부탁해 보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노파의 설명에 따르면 솔잎을 먹으며 칡베옷을 입고 있는데 얼굴이 검어 흑두타(黑頭陀)라 불리는 중이 9년 동안 꼼짝 않고 수행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이성계가 찾으니 무학은 “앞으로 임금이 된다는 것을 예고하는 꿈”이라며 1만 집의 닭울음 ‘꼬기오’는 높은 지위(高貴位)를 뜻하며 다듬이 소리는 임금을 모실 사람들이 가까이 왔음을 뜻한다”고 했다.
 
  이어지는 해몽 역시 명쾌했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게 되고 거울이 깨지면 소리가 나게 되며 서까래 셋을 지게 되면 임금 왕(王)자가 됩니다.” 그러면서 무학은 부탁했다. “오늘 일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큰일은 쉽게 이뤄지는 게 아닌 만큼 이곳에 절 하나를 세우고 ‘왕 될 꿈을 해몽한 절’이라는 뜻으로 석왕사(釋王寺)라 했으면 좋겠습니다. …”
 
  거기에 그치지 않고 무학은 이성계에게 해몽 값을 톡톡히 받아 낸다. “너무 서둘러 짓지 말고 3년을 기한으로 잡아 500성인을 모셔다 재를 올리면 반드시 왕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성계는 1년 만에 절을 짓고 오백성재(五百聖齋)를 올리는 한편 3년 동안 불공을 드렸는데 주위 사람 아무도 이성계가 왜 그러는지 몰랐다.
 
충청남도 태안에 있는 간월암으로 落照의 명소다. 썰물이 돼야 걸어서 건널 수 있으며 밀물 때는 섬처럼 고립된다. 이 간월암을 만든 이가 무학대사다. 원래 폐사된 것을 1914년 만공선사가 중건했다.
  《청야만집(靑野漫潗)》에 이성계가 즉위한 뒤 종적을 감춘 무학을 찾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성계가 설봉산 토굴의 스님을 찾도록 영을 내리자 세 도(道)의 방백(方伯·도지사)이 황해도 곡산에 이르러 “고달산의 조그마한 암자에 한 고승이 홀로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 방백은 산골짜기 소나무 가지에 자신들의 관인(官印)을 걸어 놓고 산을 올랐다.
 
  한 스님이 채소밭을 손질하고 있었다. 세 방백이 물었다. “이 암자는 누가 지은 것입니까?” 노승이 답했다. “제가 지었습니다.” “뭘 보고 이런 곳을 택하여 절을 세웠습니까?” “세개의 관인 형상을 하고 있는 저 삼인봉(三印峯) 때문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삼인봉이라고 부릅니까?” “저 앞 세 봉우리가 삼인의 형국입니다.” 그다음 말에 세 방백이 놀랐다.
 
  “만약 이곳에 절을 지으면 삼도의 방백이 골 안의 나무 위에 관인을 벗어 거는 그러한 응험이 있게 됩니다.” 삼도 방백들은 노승이 말을 그치자마자 달려가 그의 손을 잡으며 “이분이 틀림없이 무학일 것”이라며 기뻐했다. 이성계가 무학에게 새 도읍지 선정을 요청하자 무학은 한양에 이르러 “인왕산을 진산(鎭山)으로, 백악과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자”고 했다.
 
  앞서 말했듯 무학의 제안은 정도전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에 무학은 무시무시한 예언을 했다. “내 말을 좇지 않으면 200년 뒤 틀림없이 내 말을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다.” 정확히 200년 뒤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國難)을 당해 나라가 망할 뻔한 위기를 맞게 된다. 이 이야기 못지않게 잘 알려진 것이 ‘무학을 꾸짖어 깨우쳐 준 농부’라는 이야기이다.
 
  태조가 무학에게 새 도읍 터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무학이 한양 땅을 도읍 터로 정한 뒤 대궐을 지으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상심한 무학이 어느 곳을 지나는데, 한 노인이 논을 갈면서 소를 나무라기를, “이랴, 이 무학이보다 미련한 놈의 소!”라고 했다. 놀란 무학이 노인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한양 땅이 학(鶴)터인데 등에 무거운 짐을 실었으니 학이 날개를 칠 것 아니냐. 그러니 궁궐이 무너진다. 성부터 쌓으면 학의 날개가 꼼짝 못하므로 대궐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 말대로 하니 대궐이 완공됐다. 그 노인은 삼각산 산신령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변형된 게 무학이 도읍터를 찾는 데 한 노인이 “십리만 더 가라”고 했다는 ‘왕십리(往十里)’ 이야기다.
 
창덕궁 인정전 앞마당에 품계석이 놓여 있다.
  신라 때 의상(義湘)대사가 지었다는 《산수기(山水記)》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양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는 이가 만약 스님의 말을 듣고 따르면 그래도 나라를 연존(延存)할 수 있는 약간의 희망이 있다. 그러나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시비하면 5대(代)도 지나지 않아 임금 자리를 뺏고 빼앗기는 재앙이 있으며 도읍한 지 200년쯤 뒤에 나라가 위태로운 국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용할 설화는 500년의 시차를 둔 두 도인(道人) 도선과 무학의 기이한 만남이다. 어느날 무학이 지금의 북한산 백운대로부터 맥을 찾아 만경대(萬景臺)에 이르러 다시 서남쪽으로 가다 비석봉, 즉 지금의 비봉(碑峰)에 다다르니 글씨가 새겨진 큰 돌이 보였다. 글씨를 자세히 보니 “무학이 맥을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었다.
 
  한문으로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라는 것으로 신라말의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것이다. 무학은 다시 길을 바꿔 만경대로부터 정남쪽으로 걸어가다 백악산 아래 세 개의 산맥이 모여 하나의 들을 이룬 것을 보고 마침내 궁궐터를 정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고려 때 이곳에서 왕기(王氣)가 서릴 것을 누르기 위해 오얏나무(李)를 심은 곳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구라’다. 조선말 대(大)금석학자였던 추사 김정희가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문을 해석했는데 도선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신라 진흥왕 때 세운 순수비였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양 도성을 쌓을 때의 이야기가 있다. 외성(外城)을 쌓을 자리를 놓고 무학과 선비들의 논쟁이 엇갈려 성의 둘레와 원근(遠近)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천하를 덮을 듯 폭설이 내렸다. 무학과 선비 등이 가 보니 눈이 안으로는 깎이고 밖으로는 계속 쌓여 성의 형상을 이뤘다. 태조 이성계는 무릎을 치며 “눈을 좇아 성을 쌓으라”고 명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북한산성이라는 것이다. 이런 무학의 미래를 보는 눈은 그가 1405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에 피를 부르는 사건으로 입증됐다.
 
태종 이방원의 헌인릉에서 본 장면이다. 원래 왕릉터였던 곳이 시민들에게 팔려 비닐하우스가 들어서 있다. 홍살문도 원래 더 바깥쪽에 있었으나 안으로 들여와 옹색하게 보인다.
  1398년 8월 정안군 이방원은 안산군수 이숙번 등과 함께 사병(私兵)을 동원해 세자 방석과 왕자 방번을 제거했다. 이른바 1차 왕자의 난이었다. 당시 방원의 집은 준수방(俊秀坊), 즉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迎秋門)과 가까운 종로구 통인동 137번지였다. 반면 그의 필생의 라이벌이던 정도전은 수송동 146번지 지금의 종로구청 자리에서 살았다.
 
  정도전은 그곳을 백자천손(百子千孫)의 명당터라 하여 수진방(壽進坊)이라 명명했지만 백자천손은커녕 이방원의 무력 앞에 당대에 비명횡사했다. 그날 정도전의 소실 집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남은(南誾), 세자 방석의 장인 심효생 역시 불의의 기습을 받고 황천으로 떠났다. 당시 정도전의 소실 집은 옛 한국일보사 맞은편 미국대사관 직원사택 자리다.
 
  그렇다면 이방원은 지금 편할까? 며칠 전 우연히 태종 이방원과 순조가 함께 묻혀 있는 헌인릉을 가 봤다. 순조의 능은 그런대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지만 태종의 능은 홍살문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뒤로 물러섰고 능 앞이 비닐하우스 천지였으며 오른편엔 국정원이 버티고 있었다. 안내원은 “(후손들이) 돈이 없어 땅을 팔아치워 이 지경이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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