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부여 출신 주몽, 졸본부여 족장의 딸 소서노와 결혼하면서 고구려 건국 기반 다져
⊙ 주몽의 前 부인 소생 유류가 태자가 되자 아들 비류·온조와 함께 백제 건국
⊙ 백제 초기 13년간 국정 주도 … 死後 ‘國母’로 추앙받아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외 다수.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 주몽의 前 부인 소생 유류가 태자가 되자 아들 비류·온조와 함께 백제 건국
⊙ 백제 초기 13년간 국정 주도 … 死後 ‘國母’로 추앙받아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외 다수.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 활을 쏘며 사냥을 하는 고구려 무사들의 모습을 그린 지안(集安) 무용총 벽화.
‘주몽(추모)’은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가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지만, 광개토대왕 비문은 고구려 당대의 기록이므로 문자화된 것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사료(史料)라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건국자가 ‘주몽(朱蒙)’으로 되어 있으나, 광개토대왕 능비에는 ‘추모(鄒牟)’라고 나와 있다.
당시 부여나 고구려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추모’라고 발음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국 사서의 것을 한자어로 고쳐 쓰다 보니 ‘주몽’이라고 기록한 것을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주몽’은 고구려 시대의 발음 그대로 ‘추모’라 쓰는 것이 옳다. 여기서도 그 원칙을 살려 ‘추모’라고 쓰기로 한다.
《조선상고사》를 쓴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도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위서(魏書)》에는 추모를 주몽이라고 쓰고, 주몽은 부여 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지금 만주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리무얼’이라 하니 주몽은 곧 ‘주리무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주몽을 ‘추모’라 하였다. 문무왕(文武王) 조서(詔書)에는 ‘중모(中牟)’라고 하고 ‘주몽’이라 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경우 천제(天帝) 해모수(解慕漱)의 아들 추모가 건국했다고 역사 기록에 나온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파생된 국가이므로 그 핏줄 역시 천제와 닿아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므로 역시 천제의 아들이다.
건국신화(建國神話)는 당시 나라를 세운 영웅을 ‘신화’라는 포장술로 재구성해, 백성들로 하여금 통치자를 우러러보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를 통해 볼 때, 나라를 건국하는 일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 천명(天命)에 의한 대업(大業)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천제의 아들과 그를 따르는 몇몇 무리들만으로 건국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나라를 건국하기 위한 절대적 조건은 우선 지지기반을 가진 일정 지역과 거기에 사는 백성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나라를 일으키기 쉽지 않다. 즉 고구려는 군사력을 가진 추모와 경제력을 가진 소서노(召西奴)가 ‘정략결혼(政略結婚)’으로 세력을 규합해 세운 나라인 것이다.
주몽 神話의 시작
고구려를 건국하기 전 추모는, 동부여의 왕자 대소(帶素)가 자신을 해치려고 하자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 등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쳐 온 처량한 신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휘하에 일부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추격하는 대소의 군대에 비하면 그 세력은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했다.
그런데 추모의 무리는 대소의 기병들에게 쫓기던 도중 모둔곡에서 재사(再思)·무골(武骨)·묵거(默居) 등 3명의 현인(賢人)을 만나 도움을 얻었고, 마침내 비류수(沸流水) 가에 머물러 초막을 짓고 살았다.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사실상 이것이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우는 시발점이 되었다.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일단 세력을 규합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추모는 세 명의 무사와 세 명의 현인들에게 각기 재능에 따라 중요한 직책을 주고 세력 규합을 위한 여러 가지 전략을 짜 나갔다. 당시는 부족 국가 형태였기 때문에 세력을 규합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것이 강한 힘을 가진 인물, 즉 영웅의 출현이었다. 영웅이 나타나면 그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다. 따라서 무사와 현인들은 우선 추모를 영웅으로 만드는 일에 주력했을 것이다.
먼저 재사·무골·묵거는 지역의 현인을 자처하고 있었으므로, 비류수 인방을 돌아다니며 추모의 남다른 재주와 인물의 뛰어난 점을 백성들에게 인식시키는 데 주력했다고 추측된다. 이를테면 신화의 내용처럼, 추모가 태어날 때부터 신비로운 인물이고 활을 잘 쏘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을 것이다. 어쩌면 추모의 이야기가 신화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 세 사람의 현인들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인근 마을 사람들은 추모가 진짜 영웅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비류수 가의 초막으로 몰려들었고, 이때 오이·마리·협보 등은 추모에게 활쏘기 시범을 보이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영웅임을 믿게 만드는 임무를 맡았을 것이다. 실제로 사냥을 나가 추모는 활로 백발백중 사냥감을 명중시켜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그날 잡아온 노루와 사슴 등으로 축제를 벌임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수하로 끌어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침내 추모가 영웅이란 소문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비류수 서쪽에 있는 마을의 족장인 연타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 마을은 졸본천(卒本川)을 끼고 있었는데, 비류수와 마찬가지로 압록강의 지류에 속했다. 《위서》에서는 이곳을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도 했는데, 서노 마을 족장이 사는 작은 성을 이르는 말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졸본주(卒本州)’로도 나오며, 이곳을 현도군의 경계 지역이라고 했다.
주몽과 소서노의 결혼
졸본에 있는 이 부족 마을은 원래 부여족이어서 ‘졸본부여(卒本扶餘)’라고도 불렸다. 당시 이 마을 족장 연타발(延陀渤)에게는 ‘소서노’라는 둘째딸이 있었는데, 결혼한 지 몇 년 안 되어 남편이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되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둘째딸을 안타깝게 생각한 연타발은, 추모가 영웅이란 소문을 듣고 소서노의 배필로 삼고자 했다. 무엇보다 구미가 당기는 것은 추모의 활 쏘는 재주와 뛰어난 지략이었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만만치 않은 추세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졸본부여 근처에는 비류국(沸流國)이 있었는데,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거느린 군사력은 졸본부여보다 강했다. 졸본부여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연타발로서는 그 세력이 늘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추모를 사위로 삼게 되면 송양을 견제하는 데 유리할뿐더러, 단시일 내에 인근에서 가장 세력이 큰 부족국가로 부상할 수 있다는 계산까지 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연타발은 사람을 보내 추모에게 자신의 둘째딸 소서노와 결혼해 주지 않겠냐는 의사를 타진해 보았다. 이때 추모 측의 참모진 사이에서는 많은 의견이 오갔을 것이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이미 추모가 동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와 결혼한 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다음의 문제는 소서노가 한 번 결혼한 적이 있는 과부인 데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까지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 추모의 세력은 재사·무골·묵거 세 현인의 도움으로 여러 고을을 아우르는 데 성공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수하로 끌어들여 군세(軍勢)를 어느 정도 확보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비류수 인근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부족과 부족 간의 결합이야말로 피 흘리지 않고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결국 추모는 연타발의 둘째사위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하여 추모와 소서노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결혼은 추모의 군사력과 소서노의 경제력이 결합된 ‘정략결혼’이었던 것이다.
단재의 《조선상고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졸본부여에 이르니 이곳의 소서노라는 미인이 아버지 연타발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서, 해부루왕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의 아내가 되어 비류(沸流)·온조(溫祚) 두 아들을 낳고 우태가 죽어 과부가 되었는데, 나이 37살이었다. 추모를 보자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였는데, 추모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노(扶芬奴) 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를 경영하여, 흘승골(紇升骨)의 산 위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가우리’라 하였다.〉
나라 이름 ‘가우리’는 이두자(吏讀字)로 ‘고구려(高句麗)’를 일컫는다. 단재의 기사에는 소서노가 37세 과부였다고 하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백제 본기 기록을 분석해 보면 30세가량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추모의 나이 22세였으므로 소서노가 8년 연상이 되는 셈이다. 이처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과부인 데다 아들이 둘이나 딸려 있는데도 추모가 결혼을 결심한 것은, 당시 연타발과 소서노가 가지고 있는 세력기반과 재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서노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나오지 않고 백제 본기에 약간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소서노가 당시 남자들 못지않은 배짱과 용기를 가진 여장부였다고 여겨진다. 만약 소서노가 없었다면 추모는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 있어 더 많은 고난을 겪고, 그것을 이겨내려면 더 오랜 시일이 걸렸을 것이다.
고구려 건국의 두 주인공은 바로 추모와 소서노였다. 추모가 지략과 무술을 겸비한 뛰어난 인물로 고구려 건국을 주도했다면, 소서노는 그 뒤에서 여러 가지로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즉 추모는 소서노와 결혼을 하면서 기존 졸본부여의 세력으로 정치적 입지를 다졌으며, 연타발 집안의 재력으로 군사력을 강화해 송양왕의 비류국까지 부용국(附庸國)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강지처에게 밀린 소서노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소서노의 두 남편과 두 아들이 나온다. 두 남편은 전 남편인 우태와 재혼한 남편인 추모이다. 두 아들은 비류와 온조를 말한다. 그런데 두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애매모호하게 나와 있다. 백제 본기에 보면 앞에서는 추모와 소서노 사이에서 비류와 온조가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고, 뒤에 가서는 또 다른 일설로 소서노가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다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는 ‘혹은 추모가 졸본에 와서 건너편 고을(越郡)의 여자를 취(娶)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추모가 소서노가 아닌 다른 여자와 외도를 한 듯한 느낌이 드는 내용이다. 이처럼 사서의 오류가 여러 군데 보여 그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에 내조의 공이 많았기 때문에, 의붓아버지 추모는 비류와 온조를 마치 친아들처럼 대우하였다고 한다. 비류와 온조가 소서노의 전 남편 우태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추모의 첫째부인 예씨가 낳은 아들 유류(儒留·유리)가 고구려로 찾아왔을 때, 그 아들을 태자로 삼으면서 확실해진다. 만약 비류와 온조가 추모와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면, 태자가 될 우선권은 유류보다 비류에게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추모는 첫째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 유류를 태자로 내세웠다. 이는 비류와 온조가 추모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가장 확실한 단서다.
해모수에게 버림받았던 추모의 어머니 유화부인도 비련(悲戀)의 여인이지만, 그의 둘째부인인 소서노도 비록 여장부이긴 하나 비련의 여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추모가 첫째부인의 아들 유류를 태자로 내세우자, 소서노는 격분했다. 그는 자신이 낳은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으로 내려가 새로운 나라 ‘백제’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선상고사》에서 단재는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버리고 남으로 내려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유류가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동부여에서 찾아오니, 예씨가 원후(元后)가 되고 소서노가 소후(小后)가 되었다. 또한 유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온조 두 사람의 신분이 덤받이 자식이 됨이 드러났다. 그래서 비류와 온조가 의논하여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 하여 그 뜻을 소서노에게 고했다. 이때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많은 금·은·주보(珠寶)를 나누어 가졌으며, 비류·온조 두 아들과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8명을 데리고 낙랑국을 지나 마한으로 들어갔다.〉
백제 건국의 어머니
이러한 이야기는 단재가 어떤 고대의 사서를 참고해 기록한 것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생략되어 있는 부분이다.
아무튼 이러한 단재의 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벗어나 남쪽으로 내려올 때 추모와 담판을 지어 ‘재산분할’을 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소서노는 추모와 결혼할 당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파혼할 때 당당하게 그 권리를 주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려면 많은 재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를 건국할 때 소서노가 아들인 비류나 온조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여를 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가 ‘백제의 시조’라고 주장하면서 《삼국사기》의 오류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심지어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소서노가 재위 13년에 죽으니,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일 뿐만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온조 두 사람이 의논하여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 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聖德)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負兒岳)-지금의 한양 북악(北岳)에 올라가 서울이 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온조는 하남 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단재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기록된 온조 재위 13년까지를 소서노 통치기간으로 보고 있다. 즉 소서노가 죽고 나서 아들 온조가 그 뒤를 이었으므로, 실제로 본기의 온조 14년을 사실상 온조 원년으로 삼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보면 소서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모(王母)가 돌아가니 나이 61세였다.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할 날이 적다. 하물며 불길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스스로 편안할 수 없는 형세라, 반드시 나라 도성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나아가 한수(漢水)의 남쪽을 순관(巡觀)하였는데, 땅이 기름져서 마땅히 거기에 도읍을 정하고 영구히 안락할 수 있는 방책을 도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사를 보면 온조가 어머니 소서노를 ‘왕모’나 ‘국모’로 칭하고 있다. 또한 이때에 이르러서야 온조는 나라 도성을 옮길 계획을 발표한다. 이는 그 전에 소서노가 전면에 나서서 나라 정치를 좌지우지했으며, 여장부로서 군주의 역할을 해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해 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근거로 유추할 때, 단재가 주장한 ‘백제의 시조가 소서노여대왕(召西奴女大王)이며, 하북(河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은 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國母’가 된 소서노
하북의 위례성에서 소서노가 나라를 다스릴 당시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은 그 위세에 눌려 감히 갈라서지 못했다. 그러나 소서노가 죽은 후 두 아들은 그 백성을 나누어 나라를 분립했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지금의 인천)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를 ‘비류백제’라 한다. 온조는 하남 위례홀(慰禮忽)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했다. 백제 건국 후 13년간 소서노가 다스리던 이때 비로소 동·서 두 갈래로 갈라져 나간 것이다.
온조는 위례홀로 국도를 옮긴 지 3년이 되는 해 4월에 사당을 세웠는데, 바로 이때부터 국모인 어머니 소서노의 제사를 모셨다. 국모신앙은 원시시대 모계(母系)를 존중하던 유풍(遺風)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추모의 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을 모시는 국모신앙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백제와는 또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유화부인을 농사의 신(神)으로 떠받드는 한편 나라를 건국한 추모의 어머니라서 ‘시조모(始祖母)’ 내지는 ‘국모’로 추앙했다. 유화부인은 추모가 동부여에서 탈출할 때 여러 곡식을 주었는데, 보리 씨앗을 빼 놓아 비둘기를 이용해 전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유화부인은 맥류경작(麥類耕作)과 관련하여 농업신으로 숭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뒤 고구려 건국 시조모로서 부여신(扶餘神)으로 떠받들게 되었다.
그러나 소서노를 국모로 모시는 백제에서는 그 성격이 좀 다르다. 직접 나라를 건국한 여성으로서의 국모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재도 백제의 시조를 온조가 아닌 소서노로 보았다고 여겨진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서 특별히 ‘왕모’나 ‘국모’로 호칭하면서 죽음에 대한 기록까지 소개한 것을 보면, 소서노가 백제 건국의 주역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부여나 고구려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추모’라고 발음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국 사서의 것을 한자어로 고쳐 쓰다 보니 ‘주몽’이라고 기록한 것을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주몽’은 고구려 시대의 발음 그대로 ‘추모’라 쓰는 것이 옳다. 여기서도 그 원칙을 살려 ‘추모’라고 쓰기로 한다.
《조선상고사》를 쓴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도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위서(魏書)》에는 추모를 주몽이라고 쓰고, 주몽은 부여 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지금 만주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리무얼’이라 하니 주몽은 곧 ‘주리무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주몽을 ‘추모’라 하였다. 문무왕(文武王) 조서(詔書)에는 ‘중모(中牟)’라고 하고 ‘주몽’이라 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경우 천제(天帝) 해모수(解慕漱)의 아들 추모가 건국했다고 역사 기록에 나온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파생된 국가이므로 그 핏줄 역시 천제와 닿아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므로 역시 천제의 아들이다.
건국신화(建國神話)는 당시 나라를 세운 영웅을 ‘신화’라는 포장술로 재구성해, 백성들로 하여금 통치자를 우러러보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를 통해 볼 때, 나라를 건국하는 일은 당시 사람들 사이에 천명(天命)에 의한 대업(大業)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천제의 아들과 그를 따르는 몇몇 무리들만으로 건국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나라를 건국하기 위한 절대적 조건은 우선 지지기반을 가진 일정 지역과 거기에 사는 백성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나라를 일으키기 쉽지 않다. 즉 고구려는 군사력을 가진 추모와 경제력을 가진 소서노(召西奴)가 ‘정략결혼(政略結婚)’으로 세력을 규합해 세운 나라인 것이다.
주몽 神話의 시작
고구려를 건국하기 전 추모는, 동부여의 왕자 대소(帶素)가 자신을 해치려고 하자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 등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쳐 온 처량한 신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휘하에 일부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추격하는 대소의 군대에 비하면 그 세력은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했다.
그런데 추모의 무리는 대소의 기병들에게 쫓기던 도중 모둔곡에서 재사(再思)·무골(武骨)·묵거(默居) 등 3명의 현인(賢人)을 만나 도움을 얻었고, 마침내 비류수(沸流水) 가에 머물러 초막을 짓고 살았다.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사실상 이것이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우는 시발점이 되었다.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일단 세력을 규합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추모는 세 명의 무사와 세 명의 현인들에게 각기 재능에 따라 중요한 직책을 주고 세력 규합을 위한 여러 가지 전략을 짜 나갔다. 당시는 부족 국가 형태였기 때문에 세력을 규합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것이 강한 힘을 가진 인물, 즉 영웅의 출현이었다. 영웅이 나타나면 그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다. 따라서 무사와 현인들은 우선 추모를 영웅으로 만드는 일에 주력했을 것이다.
먼저 재사·무골·묵거는 지역의 현인을 자처하고 있었으므로, 비류수 인방을 돌아다니며 추모의 남다른 재주와 인물의 뛰어난 점을 백성들에게 인식시키는 데 주력했다고 추측된다. 이를테면 신화의 내용처럼, 추모가 태어날 때부터 신비로운 인물이고 활을 잘 쏘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을 것이다. 어쩌면 추모의 이야기가 신화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 세 사람의 현인들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인근 마을 사람들은 추모가 진짜 영웅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비류수 가의 초막으로 몰려들었고, 이때 오이·마리·협보 등은 추모에게 활쏘기 시범을 보이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영웅임을 믿게 만드는 임무를 맡았을 것이다. 실제로 사냥을 나가 추모는 활로 백발백중 사냥감을 명중시켜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그날 잡아온 노루와 사슴 등으로 축제를 벌임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수하로 끌어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침내 추모가 영웅이란 소문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비류수 서쪽에 있는 마을의 족장인 연타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 마을은 졸본천(卒本川)을 끼고 있었는데, 비류수와 마찬가지로 압록강의 지류에 속했다. 《위서》에서는 이곳을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도 했는데, 서노 마을 족장이 사는 작은 성을 이르는 말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졸본주(卒本州)’로도 나오며, 이곳을 현도군의 경계 지역이라고 했다.
주몽과 소서노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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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첫 도읍지로 알려진 중국 지안의 오녀산성(졸본성). 소서노는 졸본 토착족장의 딸이었다. 사진=조선DB |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둘째딸을 안타깝게 생각한 연타발은, 추모가 영웅이란 소문을 듣고 소서노의 배필로 삼고자 했다. 무엇보다 구미가 당기는 것은 추모의 활 쏘는 재주와 뛰어난 지략이었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만만치 않은 추세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졸본부여 근처에는 비류국(沸流國)이 있었는데,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거느린 군사력은 졸본부여보다 강했다. 졸본부여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연타발로서는 그 세력이 늘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추모를 사위로 삼게 되면 송양을 견제하는 데 유리할뿐더러, 단시일 내에 인근에서 가장 세력이 큰 부족국가로 부상할 수 있다는 계산까지 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연타발은 사람을 보내 추모에게 자신의 둘째딸 소서노와 결혼해 주지 않겠냐는 의사를 타진해 보았다. 이때 추모 측의 참모진 사이에서는 많은 의견이 오갔을 것이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이미 추모가 동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와 결혼한 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다음의 문제는 소서노가 한 번 결혼한 적이 있는 과부인 데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까지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 추모의 세력은 재사·무골·묵거 세 현인의 도움으로 여러 고을을 아우르는 데 성공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수하로 끌어들여 군세(軍勢)를 어느 정도 확보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비류수 인근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부족과 부족 간의 결합이야말로 피 흘리지 않고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결국 추모는 연타발의 둘째사위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하여 추모와 소서노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결혼은 추모의 군사력과 소서노의 경제력이 결합된 ‘정략결혼’이었던 것이다.
단재의 《조선상고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졸본부여에 이르니 이곳의 소서노라는 미인이 아버지 연타발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서, 해부루왕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의 아내가 되어 비류(沸流)·온조(溫祚) 두 아들을 낳고 우태가 죽어 과부가 되었는데, 나이 37살이었다. 추모를 보자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였는데, 추모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노(扶芬奴) 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를 경영하여, 흘승골(紇升骨)의 산 위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가우리’라 하였다.〉
나라 이름 ‘가우리’는 이두자(吏讀字)로 ‘고구려(高句麗)’를 일컫는다. 단재의 기사에는 소서노가 37세 과부였다고 하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백제 본기 기록을 분석해 보면 30세가량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추모의 나이 22세였으므로 소서노가 8년 연상이 되는 셈이다. 이처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과부인 데다 아들이 둘이나 딸려 있는데도 추모가 결혼을 결심한 것은, 당시 연타발과 소서노가 가지고 있는 세력기반과 재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서노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나오지 않고 백제 본기에 약간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소서노가 당시 남자들 못지않은 배짱과 용기를 가진 여장부였다고 여겨진다. 만약 소서노가 없었다면 추모는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 있어 더 많은 고난을 겪고, 그것을 이겨내려면 더 오랜 시일이 걸렸을 것이다.
고구려 건국의 두 주인공은 바로 추모와 소서노였다. 추모가 지략과 무술을 겸비한 뛰어난 인물로 고구려 건국을 주도했다면, 소서노는 그 뒤에서 여러 가지로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즉 추모는 소서노와 결혼을 하면서 기존 졸본부여의 세력으로 정치적 입지를 다졌으며, 연타발 집안의 재력으로 군사력을 강화해 송양왕의 비류국까지 부용국(附庸國)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강지처에게 밀린 소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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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발굴 현장. 소서노 사후 온조가 하북 위례성에서 옮겨가 건설한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된다. 사진=조선DB |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는 ‘혹은 추모가 졸본에 와서 건너편 고을(越郡)의 여자를 취(娶)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추모가 소서노가 아닌 다른 여자와 외도를 한 듯한 느낌이 드는 내용이다. 이처럼 사서의 오류가 여러 군데 보여 그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에 내조의 공이 많았기 때문에, 의붓아버지 추모는 비류와 온조를 마치 친아들처럼 대우하였다고 한다. 비류와 온조가 소서노의 전 남편 우태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추모의 첫째부인 예씨가 낳은 아들 유류(儒留·유리)가 고구려로 찾아왔을 때, 그 아들을 태자로 삼으면서 확실해진다. 만약 비류와 온조가 추모와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면, 태자가 될 우선권은 유류보다 비류에게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추모는 첫째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 유류를 태자로 내세웠다. 이는 비류와 온조가 추모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가장 확실한 단서다.
해모수에게 버림받았던 추모의 어머니 유화부인도 비련(悲戀)의 여인이지만, 그의 둘째부인인 소서노도 비록 여장부이긴 하나 비련의 여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추모가 첫째부인의 아들 유류를 태자로 내세우자, 소서노는 격분했다. 그는 자신이 낳은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으로 내려가 새로운 나라 ‘백제’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선상고사》에서 단재는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버리고 남으로 내려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유류가 어머니 예씨와 함께 동부여에서 찾아오니, 예씨가 원후(元后)가 되고 소서노가 소후(小后)가 되었다. 또한 유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온조 두 사람의 신분이 덤받이 자식이 됨이 드러났다. 그래서 비류와 온조가 의논하여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 하여 그 뜻을 소서노에게 고했다. 이때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많은 금·은·주보(珠寶)를 나누어 가졌으며, 비류·온조 두 아들과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8명을 데리고 낙랑국을 지나 마한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이야기는 단재가 어떤 고대의 사서를 참고해 기록한 것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생략되어 있는 부분이다.
아무튼 이러한 단재의 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벗어나 남쪽으로 내려올 때 추모와 담판을 지어 ‘재산분할’을 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소서노는 추모와 결혼할 당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파혼할 때 당당하게 그 권리를 주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려면 많은 재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를 건국할 때 소서노가 아들인 비류나 온조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여를 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가 ‘백제의 시조’라고 주장하면서 《삼국사기》의 오류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심지어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소서노가 재위 13년에 죽으니,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일 뿐만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온조 두 사람이 의논하여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 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聖德)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負兒岳)-지금의 한양 북악(北岳)에 올라가 서울이 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온조는 하남 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단재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기록된 온조 재위 13년까지를 소서노 통치기간으로 보고 있다. 즉 소서노가 죽고 나서 아들 온조가 그 뒤를 이었으므로, 실제로 본기의 온조 14년을 사실상 온조 원년으로 삼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보면 소서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모(王母)가 돌아가니 나이 61세였다.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할 날이 적다. 하물며 불길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스스로 편안할 수 없는 형세라, 반드시 나라 도성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나아가 한수(漢水)의 남쪽을 순관(巡觀)하였는데, 땅이 기름져서 마땅히 거기에 도읍을 정하고 영구히 안락할 수 있는 방책을 도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사를 보면 온조가 어머니 소서노를 ‘왕모’나 ‘국모’로 칭하고 있다. 또한 이때에 이르러서야 온조는 나라 도성을 옮길 계획을 발표한다. 이는 그 전에 소서노가 전면에 나서서 나라 정치를 좌지우지했으며, 여장부로서 군주의 역할을 해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해 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근거로 유추할 때, 단재가 주장한 ‘백제의 시조가 소서노여대왕(召西奴女大王)이며, 하북(河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은 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國母’가 된 소서노
하북의 위례성에서 소서노가 나라를 다스릴 당시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은 그 위세에 눌려 감히 갈라서지 못했다. 그러나 소서노가 죽은 후 두 아들은 그 백성을 나누어 나라를 분립했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지금의 인천)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를 ‘비류백제’라 한다. 온조는 하남 위례홀(慰禮忽)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했다. 백제 건국 후 13년간 소서노가 다스리던 이때 비로소 동·서 두 갈래로 갈라져 나간 것이다.
온조는 위례홀로 국도를 옮긴 지 3년이 되는 해 4월에 사당을 세웠는데, 바로 이때부터 국모인 어머니 소서노의 제사를 모셨다. 국모신앙은 원시시대 모계(母系)를 존중하던 유풍(遺風)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추모의 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을 모시는 국모신앙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백제와는 또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유화부인을 농사의 신(神)으로 떠받드는 한편 나라를 건국한 추모의 어머니라서 ‘시조모(始祖母)’ 내지는 ‘국모’로 추앙했다. 유화부인은 추모가 동부여에서 탈출할 때 여러 곡식을 주었는데, 보리 씨앗을 빼 놓아 비둘기를 이용해 전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유화부인은 맥류경작(麥類耕作)과 관련하여 농업신으로 숭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뒤 고구려 건국 시조모로서 부여신(扶餘神)으로 떠받들게 되었다.
그러나 소서노를 국모로 모시는 백제에서는 그 성격이 좀 다르다. 직접 나라를 건국한 여성으로서의 국모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재도 백제의 시조를 온조가 아닌 소서노로 보았다고 여겨진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서 특별히 ‘왕모’나 ‘국모’로 호칭하면서 죽음에 대한 기록까지 소개한 것을 보면, 소서노가 백제 건국의 주역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