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저우, 京杭운하의 起點으로 발달한 상업도시 … 南宋의 수도로 중국 6大 古都 중 하나
⊙ 南宋 때에는 동아프리카와도 교역한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
⊙ 慧因高麗寺, 고려시대 義天이 공부하고 重創한 절
許又範
1961년생.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 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현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 南宋 때에는 동아프리카와도 교역한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
⊙ 慧因高麗寺, 고려시대 義天이 공부하고 重創한 절
許又範
1961년생.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교육학 석사, 박사 과정 수료(융합고고학) / 인하대 홍보팀장, 同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대외협력처 부처장 역임. 현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원 / 저서 《삼국지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 항저우의 기원이 된 첸탕(錢唐)강.
첸탕강과 징항(京杭)운하 덕분에 항저우는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됐다.
이른 아침, 상하이의 호텔을 나서 항저우(杭州)로 향했다. 태풍이 오는 중이어선가. 끈적끈적한 날씨가 일찍부터 목덜미를 적신다.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소낙비가 쏟아진다. 시원한 소낙비 사이로 우뚝 선 크레인들이 보인다.
저장성(浙江省) 초입(初入)인 자싱(嘉興)에 도착했다. 이곳은 징항(京杭)대운하 연안에 위치한 작은 수향(水鄕)도시다. 하지만 이 도시는 상하이(上海)와 장쑤성(江蘇省), 그리고 저장성을 연결하는 경계에 있는 교통의 요지다. 상하이에서는 고속열차로 15분, 자동차로는 90분 거리다. 상하이의 집값과 생활비 등이 버거운 사람들에게 이곳 자싱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안내인의 목소리도 들떠 있다.
“이곳은 상하이와 지역번호도 같습니다. 지하철도 개통될 예정이고요. 향후 엄청난 개발이 이뤄질 곳이라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싶은데, 집값은 벌써 평당 천만 원을 호가하고 있답니다.”
그래서인가. 자싱의 크레인은 분주히 움직인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목 좋은 곳은 갑부들의 차지다. 가난한 서민들은 알면서도 살 수 없는 ‘그림의 떡’인 셈이다.
자싱은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金九)의 피난처가 있었던 곳이다.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紅口)공원에서 폭탄투척을 한 이후, 임시정부는 일제(日帝)의 추적을 피해 중국 곳곳을 떠돌았다. 자싱은 상하이를 떠난 임정(臨政)이 첫 번째로 숨어 지낸 곳이다.
김구가 숨어 지낸 곳은 메이완지에(梅灣街) 76호다. 집 안에는 작은 선착장이 있어서 언제든지 배를 타고 난후(南湖)로 피신하여 일제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다. 잠시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잦아들었던 비는 다시 거세진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관리인이 반갑게 맞이한다. 찾아오는 사람이 드문 까닭이다. 2층으로 된 건물은 당시의 상황들을 알아보기 쉽게 정리해 놓았다. 낯선 땅에서 내일을 확신할 수 없이 쫓기는 망명객. 오직 구국일념(救國一念)으로 하루하루 마음을 다잡았던 그들. 피신처의 창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빗방울을 보며 숙연한 마음으로 ‘애국(愛國)’을 생각한다.
중국 7대 古都의 하나
저장성은 중국 동쪽의 동중국해와 접하고 있는 성으로 해안선의 길이만 6500km다. 크고 작은 섬들도 3000개가 넘어 중국 최다(最多)의 도서(島嶼)를 품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일찍부터 포구(浦口)가 발달했다. 오늘날도 크고 작은 항구가 41개에 이른다. 또한 내륙을 흐르는 첸탕(錢唐)강이 만든 각종 지류들과 어울려 고대로부터 강남수향(江南水鄕)으로 불리며 발전해 왔다.
항저우는 저장성의 성도(省都)다. 항저우의 이름은 원래 첸탕이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고 첸탕현을 설치한 데서 비롯했는데, 그 후 도시의 중심을 흘러가는 강의 이름이 됐다. 수(隋)나라 때 문제(文帝)가 항저우라 고쳤다. 양제(煬帝) 시절에 징항대운하의 강남지역 기점(起點)이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항저우는 중국 7대 고도(古都)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오대(五代) 때에는 오월(吳越)의 수도였고, 남송(南宋) 때에는 140여 년간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다.
항저우는 바다와 접하고 있는 해안이자, 운하를 통하여 내륙 깊숙이 화물을 운송할 수 있기 때문에 옛날부터 물류(物流)수송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고대(古代)에 황해와 남중국해를 통해 항저우에 도착한 배들은 대부분 큰 배들이었다. 이러한 배들이 운하를 통해 내륙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특히 항저우를 가로지르는 첸탕강은 항상 진흙이 쌓여 작은 배가 아니면 화물을 운송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큰 배들은 강의 하류에 정박하고 작은 배들을 이용하여 내륙으로 화물을 수송했다. 이러한 까닭에 항저우는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다. 인구가 늘어나자 해상무역 업무를 전담하는 시박사(市舶司)까지 설치됐다.
남송 때에는 멀리 동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까지 해상무역이 이루어졌다. 이곳에 오가는 배들은 대부분 500여 명을 태울 수 있는 정크선이었다. 이들 배는 주로 고가품을 싣고 왔는데, 벵골의 물소뼈, 인도 남부와 아프리카의 상아·산호·진주·수정·향료·장뇌 등이었다.
마르코 폴로가 극찬했던 도시
남송 때의 수도 항저우는 어떠했을까. 인구 100만이 넘는 중국 최대의 도시이자, 각지에서 온 상인과 여행객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이들을 위한 식사와 유흥장소도 성행했다. 대표적인 것이 다관(茶館)과 주루(酒樓)였다. 특히 주루는 회랑을 갖춘 건물에 호화롭고 화려한 장식을 한 기녀들이 술을 권하며 손님들을 유혹했다. 이곳을 여행한 적이 있는 마르코 폴로는 항저우는 세계 최고의 도시이며 다양한 즐거움이 있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라고 극찬했다.
첸탕강에 도착하니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잔뜩 습기를 머금은 더위가 숨을 턱턱 막는다. 강도 조망하고 시원한 바람도 쐴 겸 류허탑(六和塔)에 올랐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이겨내며 나선형 계단을 오르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거대한 첸탕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로가 길게 이어지고 그 사이로는 작은 배들이 연이어 화물을 실어 나른다. 강을 잇는 다리를 빼면 남송 때의 풍경과 별반 다름없으리라. 하류 쪽은 강폭이 넓어 바다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니 과연 첸탕강은 저장성 제일의 강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매년 음력 8월 18일경이 되면 무서운 속도로 바닷물이 밀려오는데 간만(干滿)의 차가 최대 9m에 이른다. 류허탑은 이처럼 빠르고 거대한 강물의 범람과 피해를 막고자 하는 염원으로 세운 것이다. 탑의 이름도 홍수를 막아 냈다는 전설에 나오는 소년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옛날에는 엄청난 피해를 주었던 첸탕강의 해일도 지금은 관광 상품이 되어 매년 그때가 되면 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서시, 백거이, 소동파
항저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시후(西湖)다. 시후는 시지후(西子湖)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소동파(蘇東坡)가 시후의 아름다움을 월(越)나라의 미인인 서시(西施)에 빗대어서 붙인 이름이다. 서시는 중국 4대 미녀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여인이다. 월왕 구천(勾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당한 굴욕을 갚고자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복수의 칼을 갈 때, 참모인 범려(範)와 문종(文種)이 미인계(美人計)를 제안했다. 이때, 빨래하는 일을 하던 서시가 발탁되어 오나라의 부차에게 보내지고 절세미녀 서시의 미색(美色)에 홀린 부차는 정사(政事)를 게을리하다가 월왕 구천에게 망하고 말았다.
시후는 원래 항저우만과 연결되어 배들이 오갔으나 첸탕강의 토사(土沙)에 막혀서 이뤄진 석호(潟湖)이다. 호수의 둘레가 15km에 이르는데 호수 안의 섬과 다리는 주변의 산들과 어울려 사계절 멋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당나라 때 백거이(白居易), 송나라 때 소동파가 이곳 항저우에 부임하여 시후에 제방을 쌓았다. 동쪽은 백거이가 쌓았다는 백제(白堤)가 뻗어 있고, 서쪽은 소동파가 쌓았다는 소제(蘇堤)가 있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의 산책로로 애용되고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시후는 오랫동안 문인과 묵객들에게 시서화의 대상으로 사랑을 받아 왔다. 그중에서도 소동파의 시는 최고의 명품이다.
출렁 물결은 빛나고 날은 맑고 좋아라
水光晴方好
산색은 가랑비에 어울려 그 또한 기이하네
山色雨亦奇
서호를 서시에 견주어 본다면
慾把西湖比西子
옅은 화장도 짙은 화장도 모두 아름답도다
淡粧濃抹總相宜
시후는 한여름의 폭염도 다 받아들이며 버들가지 나풀나풀 시원한 바람을 선사한다. 더위도 식힐 겸 잠시 그늘에 앉아 시후를 조망한다. 소제의 아름다운 다리를 산책하는 사람들과 유람선이 멋진 산수화를 그려 낸다. 화창해서 좋고, 비가 와서 좋고, 안개가 끼어서 좋은 시후. 그래서 “시후십경(西湖十景)을 다 본 자만이 시후를 안다”고 하는 것인가. 예로부터 이르기를 ‘계림의 산수는 천하의 제일이요, 시후의 풍경은 동남의 으뜸이다(桂林山水甲天下, 西湖勝槪甲東南)’고 했는데 그 말이 절로 실감이 난다.
의천의 발자취 남은 혜인고려사
시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혜인고려사(慧因高麗寺)’가 있다. 이곳은 고려의 승려인 대각국사 의천(義天)과 관계가 깊은 곳이다. 의천은 왕자의 신분으로 11살 때 승려가 됐다. 그는 승려가 된 후, 송나라의 화엄조사(華嚴祖師)라고 불리는 정원법사(淨源法師)와 화엄교리에 대한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 서신은 황해를 오가는 송상(宋商)들을 통해서 가능했다. 해상실크로드가 상품교역만이 아니라 종교와 사상, 문화의 전파(傳播)가 함께 이루어진 길임도 주시해야 한다.
의천은 왕실의 반대를 무릅쓰고 30살 때인 1085년에 송상의 배를 타고 항저우로 와서 정원법사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의천은 송나라의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고승(高僧)들과 두루 교유했다. 당시 정원법사가 있던 절은 927년에 창건된 혜인선사(慧因禪寺)였다.
의천은 귀국한 후, 스승에게 《금장경(金藏經)》 500부를 보냈다. 또한 오래되어 낡고 퇴락한 사찰을 대대적으로 중창(重創)할 수 있도록 황금 2000냥을 지원했다. 정원법사는 사찰을 중창한 후, 절의 이름을 ‘고려사(高麗寺)’라고 고쳤다.
의천이 혜인선사에 머물 때 소동파도 항저우 태수로 있었다. 소동파는 의천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아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고려의 승려와 관리들이 드나드는 것을 반대했다. 고려에는 이익이지만 송에는 손해만 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의천은 이러한 난관을 이겨내며 화엄교학(華嚴敎學)에 매진했다. 그리고 돌아와 해동(海東)에 천태종을 개창(開創)하고 그 시조(始祖)가 됐다.
소동파와 의천
소동파가 쌓았다는 소제(蘇堤)를 지나 인적이 드문 산길을 올라가니 ‘혜인고려사(慧因高麗寺)’라고 쓰인 사찰이 보인다. 바로 의천이 구법(求法)하며 머물렀던 곳이다. 사찰 안으로 들어서니 대웅보전 앞 연못을 가득 메운 연꽃이 먼저 반긴다. 석교(石橋) 너머에는 대웅보전이 있고 그 뒤에는 의천이 보낸 불경 등을 보관한 장경각(藏經閣)이 있다. 대웅보전 옆의 전시실에는 대각국사 의천의 소상(塑像)을 비롯하여 혜초·원측 등 한중불교 교류사에 길이 남을 20여 고승들의 부조상이 있다. 의천의 소상과 관련해서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어느 날, 장씨(張氏)라는 사람이 근처의 밭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무너진 흙담에 3일간 갇히게 됐다. 생사의 길목에서 금관에 중국 옷을 입은 선인(仙人)이 그를 구해 주고 사라졌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장씨는 절터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의천의 소상을 발견하고, 의천이 바로 자신을 구해 준 그 선인임을 알았다. 그는 곧 10여 칸의 전각을 세우고 소상을 봉안하여 은혜에 보답했다.
고려사는 18세기까지 여러 차례의 전란(戰亂)을 거치며 쇠락했다. 청(淸)나라 때 황제가 친히 방문한 후에 법운사(法雲寺)라는 편액(扁額)을 내리기도 했다. 이후 다시 잊혔던 고려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신건식(申健植)이 사찰을 수리하고 ‘고려사’로 복원했다.
2005년 항저우시는 한중불교교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곳을 대대적으로 복원, 사찰명도 의천과 정원법사가 연관된 ‘혜인고려사’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고려사는 원래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원래 고려사가 있던 자리에는 이곳에서 태수를 지낸 소동파의 석상과 정자 등 기념물과 호텔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소동파와 의천의 악연은 후세에도 이렇게 이어진 것일까.
손권의 고향을 찾아서
항저우에서 첸탕강을 따라 서남쪽으로 올라가면 푸춘(富春)강이 나온다. 첸탕강의 중류 지점이기도 한 이곳에는 중국 삼국시대의 오나라를 세운 손권고리(孫權古里)가 있다. 항저우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정도를 달려 푸양(富陽)에 이르렀다. 마치 우리나라의 시골에 온 것처럼 강줄기와 산세(山勢)가 평안한 마을이 보인다. 손권의 고리인 룽먼구전(龍門古鎭)이다.
마을 이름은 후한(後漢)을 연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죽마고우(竹馬故友)인 엄자릉(嚴子陵)과 관련이 있다. 그가 이곳에서 은거(隱居)생활을 하며, ‘산이 푸르고 물이 맑아 루량룽먼(呂梁龍門)보다 낫다’고 한 말에서 유래됐기 때문이다. 마을 뒤쪽의 룽먼산(龍門山) 중턱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마을을 두루 적시고 푸춘강으로 흘러드는 모양새가 한눈에 보아도 명당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은 손권의 후손들이 1100년 동안 자신들의 풍습(風習)을 지키며 살고 있는 곳이다. 7000명의 인구 중 90%가 손씨라고 한다. 오밀조밀한 골목 사이로 명청(明淸) 시기에 지은 건축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저녁 무렵이어선지 방문객도 없다. 골목 어귀의 노인네들만 무심한 듯 바라본다.
마을 안쪽에는 손씨종사(孫氏宗祠)가 있다. 이곳에는 오나라의 황제가 된 손권을 필두로 손씨 가문의 위인들을 진열해 놓았다. 대병법가인 손무(孫武)와 손빈(孫), 삼민주의(三民主義)로 근대 중화민국을 건설한 손문(孫文) 등이 눈에 띈다. 기둥에 쓰여 있는 ‘삼국시대 영웅호걸 많았지만 오래도록 선정 베푼 제왕의 가문이라(三國風雲多小事 千秋仁善帝王家)’란 대련(對聯)이 용문 손씨의 위대함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화의 대원정 뒷받침한 손곤
손씨 집안의 수많은 인물들 틈에서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손권의 41세손(世孫)으로 명나라 때 공부주사(工部主事)를 지낸 손곤(孫坤)이다. 그는 영락제(永樂帝)의 명을 받은 정화(鄭和)가 하서양(下西洋)을 항해하는 데 필요한 보선(寶船)을 건조(建造)할 때 실질적으로 제작에 참여했다고 한다.
삼국시대 오나라는 수군력이 막강했다. 창장(長江)과 수향도시들을 왕래하려면 조선술과 항해술은 필연적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다. 손권이 조조(曹操)의 대군과 적벽(赤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전선(戰船)과 전투능력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대로 전승되어 온 손씨 가문의 선박제조술이 정화의 대원정 시기에 빛을 발한 것이다.
푸춘강을 따라 올라가면 주장(九江)시에 도달하고 창장과 이어진다. 옛날 바다를 건너 항저우까지 온 각국의 상인들이 징항대운하를 거쳐 베이징(北京)으로 갔듯이, 푸양에서 푸춘강과 창장을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까지 나아갔다. 그 출발점이 항저우였다.
이후 항저우는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태평천국(太平天國)운동의 격전 속에서 많은 부분이 파괴됐다. 난징조약(南京條約)에 의해 상하이가 개항되면서 남송시대의 번영도 물려주었다. 하지만 항저우는 오늘도 저장성의 성도로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 역할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저장성(浙江省) 초입(初入)인 자싱(嘉興)에 도착했다. 이곳은 징항(京杭)대운하 연안에 위치한 작은 수향(水鄕)도시다. 하지만 이 도시는 상하이(上海)와 장쑤성(江蘇省), 그리고 저장성을 연결하는 경계에 있는 교통의 요지다. 상하이에서는 고속열차로 15분, 자동차로는 90분 거리다. 상하이의 집값과 생활비 등이 버거운 사람들에게 이곳 자싱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안내인의 목소리도 들떠 있다.
“이곳은 상하이와 지역번호도 같습니다. 지하철도 개통될 예정이고요. 향후 엄청난 개발이 이뤄질 곳이라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싶은데, 집값은 벌써 평당 천만 원을 호가하고 있답니다.”
그래서인가. 자싱의 크레인은 분주히 움직인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목 좋은 곳은 갑부들의 차지다. 가난한 서민들은 알면서도 살 수 없는 ‘그림의 떡’인 셈이다.
자싱은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金九)의 피난처가 있었던 곳이다.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紅口)공원에서 폭탄투척을 한 이후, 임시정부는 일제(日帝)의 추적을 피해 중국 곳곳을 떠돌았다. 자싱은 상하이를 떠난 임정(臨政)이 첫 번째로 숨어 지낸 곳이다.
김구가 숨어 지낸 곳은 메이완지에(梅灣街) 76호다. 집 안에는 작은 선착장이 있어서 언제든지 배를 타고 난후(南湖)로 피신하여 일제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다. 잠시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잦아들었던 비는 다시 거세진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관리인이 반갑게 맞이한다. 찾아오는 사람이 드문 까닭이다. 2층으로 된 건물은 당시의 상황들을 알아보기 쉽게 정리해 놓았다. 낯선 땅에서 내일을 확신할 수 없이 쫓기는 망명객. 오직 구국일념(救國一念)으로 하루하루 마음을 다잡았던 그들. 피신처의 창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빗방울을 보며 숙연한 마음으로 ‘애국(愛國)’을 생각한다.
중국 7대 古都의 하나
저장성은 중국 동쪽의 동중국해와 접하고 있는 성으로 해안선의 길이만 6500km다. 크고 작은 섬들도 3000개가 넘어 중국 최다(最多)의 도서(島嶼)를 품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일찍부터 포구(浦口)가 발달했다. 오늘날도 크고 작은 항구가 41개에 이른다. 또한 내륙을 흐르는 첸탕(錢唐)강이 만든 각종 지류들과 어울려 고대로부터 강남수향(江南水鄕)으로 불리며 발전해 왔다.
항저우는 저장성의 성도(省都)다. 항저우의 이름은 원래 첸탕이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고 첸탕현을 설치한 데서 비롯했는데, 그 후 도시의 중심을 흘러가는 강의 이름이 됐다. 수(隋)나라 때 문제(文帝)가 항저우라 고쳤다. 양제(煬帝) 시절에 징항대운하의 강남지역 기점(起點)이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항저우는 중국 7대 고도(古都)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오대(五代) 때에는 오월(吳越)의 수도였고, 남송(南宋) 때에는 140여 년간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다.
항저우는 바다와 접하고 있는 해안이자, 운하를 통하여 내륙 깊숙이 화물을 운송할 수 있기 때문에 옛날부터 물류(物流)수송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고대(古代)에 황해와 남중국해를 통해 항저우에 도착한 배들은 대부분 큰 배들이었다. 이러한 배들이 운하를 통해 내륙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특히 항저우를 가로지르는 첸탕강은 항상 진흙이 쌓여 작은 배가 아니면 화물을 운송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큰 배들은 강의 하류에 정박하고 작은 배들을 이용하여 내륙으로 화물을 수송했다. 이러한 까닭에 항저우는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다. 인구가 늘어나자 해상무역 업무를 전담하는 시박사(市舶司)까지 설치됐다.
남송 때에는 멀리 동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까지 해상무역이 이루어졌다. 이곳에 오가는 배들은 대부분 500여 명을 태울 수 있는 정크선이었다. 이들 배는 주로 고가품을 싣고 왔는데, 벵골의 물소뼈, 인도 남부와 아프리카의 상아·산호·진주·수정·향료·장뇌 등이었다.
마르코 폴로가 극찬했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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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탕강 가에 있는 류허탑(六和塔). 밀려들어오는 潮水를 막으려는 염원을 담아 세워진 탑이다. |
첸탕강에 도착하니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잔뜩 습기를 머금은 더위가 숨을 턱턱 막는다. 강도 조망하고 시원한 바람도 쐴 겸 류허탑(六和塔)에 올랐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이겨내며 나선형 계단을 오르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거대한 첸탕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로가 길게 이어지고 그 사이로는 작은 배들이 연이어 화물을 실어 나른다. 강을 잇는 다리를 빼면 남송 때의 풍경과 별반 다름없으리라. 하류 쪽은 강폭이 넓어 바다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니 과연 첸탕강은 저장성 제일의 강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매년 음력 8월 18일경이 되면 무서운 속도로 바닷물이 밀려오는데 간만(干滿)의 차가 최대 9m에 이른다. 류허탑은 이처럼 빠르고 거대한 강물의 범람과 피해를 막고자 하는 염원으로 세운 것이다. 탑의 이름도 홍수를 막아 냈다는 전설에 나오는 소년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옛날에는 엄청난 피해를 주었던 첸탕강의 해일도 지금은 관광 상품이 되어 매년 그때가 되면 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서시, 백거이, 소동파
항저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시후(西湖)다. 시후는 시지후(西子湖)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소동파(蘇東坡)가 시후의 아름다움을 월(越)나라의 미인인 서시(西施)에 빗대어서 붙인 이름이다. 서시는 중국 4대 미녀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여인이다. 월왕 구천(勾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당한 굴욕을 갚고자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복수의 칼을 갈 때, 참모인 범려(範)와 문종(文種)이 미인계(美人計)를 제안했다. 이때, 빨래하는 일을 하던 서시가 발탁되어 오나라의 부차에게 보내지고 절세미녀 서시의 미색(美色)에 홀린 부차는 정사(政事)를 게을리하다가 월왕 구천에게 망하고 말았다.
시후는 원래 항저우만과 연결되어 배들이 오갔으나 첸탕강의 토사(土沙)에 막혀서 이뤄진 석호(潟湖)이다. 호수의 둘레가 15km에 이르는데 호수 안의 섬과 다리는 주변의 산들과 어울려 사계절 멋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당나라 때 백거이(白居易), 송나라 때 소동파가 이곳 항저우에 부임하여 시후에 제방을 쌓았다. 동쪽은 백거이가 쌓았다는 백제(白堤)가 뻗어 있고, 서쪽은 소동파가 쌓았다는 소제(蘇堤)가 있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의 산책로로 애용되고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시후는 오랫동안 문인과 묵객들에게 시서화의 대상으로 사랑을 받아 왔다. 그중에서도 소동파의 시는 최고의 명품이다.
출렁 물결은 빛나고 날은 맑고 좋아라
水光晴方好
산색은 가랑비에 어울려 그 또한 기이하네
山色雨亦奇
서호를 서시에 견주어 본다면
慾把西湖比西子
옅은 화장도 짙은 화장도 모두 아름답도다
淡粧濃抹總相宜
시후는 한여름의 폭염도 다 받아들이며 버들가지 나풀나풀 시원한 바람을 선사한다. 더위도 식힐 겸 잠시 그늘에 앉아 시후를 조망한다. 소제의 아름다운 다리를 산책하는 사람들과 유람선이 멋진 산수화를 그려 낸다. 화창해서 좋고, 비가 와서 좋고, 안개가 끼어서 좋은 시후. 그래서 “시후십경(西湖十景)을 다 본 자만이 시후를 안다”고 하는 것인가. 예로부터 이르기를 ‘계림의 산수는 천하의 제일이요, 시후의 풍경은 동남의 으뜸이다(桂林山水甲天下, 西湖勝槪甲東南)’고 했는데 그 말이 절로 실감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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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이 머물렀던 혜인고려사 대웅보전. |
의천은 왕실의 반대를 무릅쓰고 30살 때인 1085년에 송상의 배를 타고 항저우로 와서 정원법사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의천은 송나라의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고승(高僧)들과 두루 교유했다. 당시 정원법사가 있던 절은 927년에 창건된 혜인선사(慧因禪寺)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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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고려사에 있는 의천상. |
의천이 혜인선사에 머물 때 소동파도 항저우 태수로 있었다. 소동파는 의천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아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고려의 승려와 관리들이 드나드는 것을 반대했다. 고려에는 이익이지만 송에는 손해만 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의천은 이러한 난관을 이겨내며 화엄교학(華嚴敎學)에 매진했다. 그리고 돌아와 해동(海東)에 천태종을 개창(開創)하고 그 시조(始祖)가 됐다.
소동파와 의천
소동파가 쌓았다는 소제(蘇堤)를 지나 인적이 드문 산길을 올라가니 ‘혜인고려사(慧因高麗寺)’라고 쓰인 사찰이 보인다. 바로 의천이 구법(求法)하며 머물렀던 곳이다. 사찰 안으로 들어서니 대웅보전 앞 연못을 가득 메운 연꽃이 먼저 반긴다. 석교(石橋) 너머에는 대웅보전이 있고 그 뒤에는 의천이 보낸 불경 등을 보관한 장경각(藏經閣)이 있다. 대웅보전 옆의 전시실에는 대각국사 의천의 소상(塑像)을 비롯하여 혜초·원측 등 한중불교 교류사에 길이 남을 20여 고승들의 부조상이 있다. 의천의 소상과 관련해서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어느 날, 장씨(張氏)라는 사람이 근처의 밭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무너진 흙담에 3일간 갇히게 됐다. 생사의 길목에서 금관에 중국 옷을 입은 선인(仙人)이 그를 구해 주고 사라졌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장씨는 절터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의천의 소상을 발견하고, 의천이 바로 자신을 구해 준 그 선인임을 알았다. 그는 곧 10여 칸의 전각을 세우고 소상을 봉안하여 은혜에 보답했다.
고려사는 18세기까지 여러 차례의 전란(戰亂)을 거치며 쇠락했다. 청(淸)나라 때 황제가 친히 방문한 후에 법운사(法雲寺)라는 편액(扁額)을 내리기도 했다. 이후 다시 잊혔던 고려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신건식(申健植)이 사찰을 수리하고 ‘고려사’로 복원했다.
2005년 항저우시는 한중불교교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곳을 대대적으로 복원, 사찰명도 의천과 정원법사가 연관된 ‘혜인고려사’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고려사는 원래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원래 고려사가 있던 자리에는 이곳에서 태수를 지낸 소동파의 석상과 정자 등 기념물과 호텔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소동파와 의천의 악연은 후세에도 이렇게 이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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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양(富陽)에 있는 孫權古里. 마을 주민의 90%가 손권의 후예들이다. |
마을 이름은 후한(後漢)을 연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죽마고우(竹馬故友)인 엄자릉(嚴子陵)과 관련이 있다. 그가 이곳에서 은거(隱居)생활을 하며, ‘산이 푸르고 물이 맑아 루량룽먼(呂梁龍門)보다 낫다’고 한 말에서 유래됐기 때문이다. 마을 뒤쪽의 룽먼산(龍門山) 중턱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마을을 두루 적시고 푸춘강으로 흘러드는 모양새가 한눈에 보아도 명당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은 손권의 후손들이 1100년 동안 자신들의 풍습(風習)을 지키며 살고 있는 곳이다. 7000명의 인구 중 90%가 손씨라고 한다. 오밀조밀한 골목 사이로 명청(明淸) 시기에 지은 건축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저녁 무렵이어선지 방문객도 없다. 골목 어귀의 노인네들만 무심한 듯 바라본다.
마을 안쪽에는 손씨종사(孫氏宗祠)가 있다. 이곳에는 오나라의 황제가 된 손권을 필두로 손씨 가문의 위인들을 진열해 놓았다. 대병법가인 손무(孫武)와 손빈(孫), 삼민주의(三民主義)로 근대 중화민국을 건설한 손문(孫文) 등이 눈에 띈다. 기둥에 쓰여 있는 ‘삼국시대 영웅호걸 많았지만 오래도록 선정 베푼 제왕의 가문이라(三國風雲多小事 千秋仁善帝王家)’란 대련(對聯)이 용문 손씨의 위대함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화의 대원정 뒷받침한 손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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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고리 앞의 푸춘(富春)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 |
삼국시대 오나라는 수군력이 막강했다. 창장(長江)과 수향도시들을 왕래하려면 조선술과 항해술은 필연적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다. 손권이 조조(曹操)의 대군과 적벽(赤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전선(戰船)과 전투능력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대로 전승되어 온 손씨 가문의 선박제조술이 정화의 대원정 시기에 빛을 발한 것이다.
푸춘강을 따라 올라가면 주장(九江)시에 도달하고 창장과 이어진다. 옛날 바다를 건너 항저우까지 온 각국의 상인들이 징항대운하를 거쳐 베이징(北京)으로 갔듯이, 푸양에서 푸춘강과 창장을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까지 나아갔다. 그 출발점이 항저우였다.
이후 항저우는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태평천국(太平天國)운동의 격전 속에서 많은 부분이 파괴됐다. 난징조약(南京條約)에 의해 상하이가 개항되면서 남송시대의 번영도 물려주었다. 하지만 항저우는 오늘도 저장성의 성도로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 역할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