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일성은 美帝와 대한민국, 김정은은 대한민국을 敵으로 상정
⊙ 김일성은 전쟁 준비 덜된 상태, 김정은은 핵·미사일 갖춘 상태에서 ‘국토완정’ 주장
⊙ 김일성은 박헌영 등과의 경쟁, 김정은은 김주애 후계구도 마련 문제
⊙ 김정은, 국제정세상 유엔 개입이나 미국 지원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
南廷屋
1958년생. 단국대 대학원 박사(사학과)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도서·연구실장, 유엔평화기념관·육군군사연구소 자문위원 역임 / 저서 《대한민국과 함께한 국군과 주한미군 70년》 《북한 남침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3일간 행적》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들》 등
⊙ 김일성은 전쟁 준비 덜된 상태, 김정은은 핵·미사일 갖춘 상태에서 ‘국토완정’ 주장
⊙ 김일성은 박헌영 등과의 경쟁, 김정은은 김주애 후계구도 마련 문제
⊙ 김정은, 국제정세상 유엔 개입이나 미국 지원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
南廷屋
1958년생. 단국대 대학원 박사(사학과)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도서·연구실장, 유엔평화기념관·육군군사연구소 자문위원 역임 / 저서 《대한민국과 함께한 국군과 주한미군 70년》 《북한 남침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3일간 행적》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들》 등
- 김정은은 2023년 8월 29일 한국과의 전면전을 가상한 ‘남(南) 점령’ 전군 지휘 훈련을 하는 지휘소를 방문, 작전 상황을 보고받았다. 사진=연합뉴스
2024년은 안보 면에서 어느 해보다 국제 상황이 좋지 않다. 유럽에서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칠 줄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대만 점령’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여기에 북한도 적극 가세하고 있다. 북한은 2024년 새해 벽두부터 미사일 도발과 서해안 지역에서 해안포 사격을 연일 강행하며 한반도를 긴장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작년 말 김정은이 행한 ‘영토완정(領土完整)’ 발언은 6·25 전쟁 이전 김일성이 ‘국토완정(國土完整)’을 주장하면서 소련·중공과 결탁하여 남침(南侵) 전쟁을 일으켰던 것을 연상케 한다.
김일성은 1949년 1월 신년사에서 ‘국토완정’을 부르짖었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 이후 첫 번째 맞이하는 신년사에서 김일성은 이렇게 주장했다.
“인민군은… 조국과 인민을 팔아먹으려는 반동 세력을 분쇄하며 우리 조국 강토의 ‘완정’과 안전을 보장하기에 항상 준비되어 있도록 되어야 하겠습니다. 조국을 식민지화하려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정책과 조국과 민족을 팔아먹는 남조선 민족반역자들의 소굴인 ‘매국적 괴뢰정부’를 타도 분쇄하고, 멀지 않은 장래에 ‘국토의 완정’과 자주독립국가를 쟁취하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김일성과 김정은의 차이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2023년 12월 30일 김정은은 느닷없이 ‘영토완정’을 들고 나왔다. 김정은은 노동당 전원회의 5일 차 회의에서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동족(同族)’이 아니라 ‘적대적인 교전국(交戰國) 관계’로 재규정하고, 유사시 핵 무력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수단과 역량을 동원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박차를 가해나가겠다”고 했다.
김일성의 ‘국토완정’과 김정은의 ‘영토완정’ 발언은 그 표현만 다르지 의미는 ‘무력을 이용하여 한반도를 적화(赤化) 통일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 한반도를 공산주의 체제로 완전히 정리하여 통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아가 김정은의 ‘영토완정’은 단순히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2023년 ‘수정 헌법’에 명시해놓기까지 했다.
김일성의 국토완정과 김정은의 영토완정 발언에서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먼저 김일성은 타도 대상을 미 제국주의 정책과 ‘괴뢰정부(대한민국 정부)’로 규정한 반면 김정은은 미 제국주의를 제외하고 대한민국과 국민 전체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적화 통일 수단도 김일성은 ‘인민군(북한 정규군)’을 통해 달성하려고 한 반면, 김정은은 ‘핵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수단(핵을 포함한 북한의 모든 무력 수단)’을 통해 이룩하겠다고 한다. 전쟁 발발 시기도 김일성은 ‘멀지 않은 장래(1년 6개월 후 남침)’라고 한 반면, 김정은은 그 시기를 못 박지 않으면서 남북관계를 ‘적대적 교전국’으로 규정함으로써 ‘언제든지 남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위와 같은 점을 고려할 때 김일성의 국토완정 주장은 ‘인민군’에게 곧 있을 전쟁에 대비해 준비하라는 ‘전쟁준비명령’의 성격이 강한 반면, 김정은의 영토완정 발언은 북한의 모든 무력집단에게 교전국으로 규정한 대한민국과 전쟁에 돌입했음을 알리는 ‘전쟁선포’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김일성,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 요청
김일성이 1949년 신년사에서 밝힌 ‘국토완정’ 발언은 남침 공식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김일성은 이를 기점(起點)으로 남침 준비에 몰두했고, 그로부터 18개월 후인 1950년 6월 25일 불법 남침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국토완정을 선언할 당시 김일성은 북한의 당·정·군을 완전히 장악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남침을 위한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남침의 핵심 전력(戰力)인 ‘조선인민군’은 병력과 무기 및 장비 그리고 훈련 면에서 아직 전쟁을 수행할 만한 충분한 전력을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은 10개 보병사단과 전차 242대, 각종 항공기 226대를 동원하여 남침을 감행하였는데, 국토완정 발언 당시 북한은 전투기와 전차를 갖추지 못한 채 단지 4개 보병사단만 보유하고 있었다. 남침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었다.
전차와 전투기 등 현대식 무기를 생산할 수 없었던 당시 북한으로서는 소련의 절대적인 지원과 남침 승인, 그리고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앞두고 있던 중공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런데도 김일성은 남한을 무력으로 적화 통일시키겠다는 ‘국토완정’을 선언했다.
김일성이 이렇게 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그로서는 북한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해줄 수 있는 ‘한반도 공산화’와 같은 불멸(不滅)의 업적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 대륙을 공산화한 것처럼 김일성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국토완정 발언 후인 1949년 3월 김일성은 남침 준비를 위한 첫 단계로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공산당 서기장 겸 수상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 요청과 필요한 무기 및 장비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스탈린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며 남침을 승인하지는 않았으나, 전쟁에 필요한 전투기를 포함한 각종 항공기 98대를 비롯하여 T-34전차 87대, 자주포 102문, 견인포 91문, 장갑차 57대, 모터사이클 122대 등 공격용 무기는 지원했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전쟁에 필요한 추가 사단 창설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중공군 내 한인부대, 북한군 편입
김일성은 소련 방문에서 많은 성과를 얻자 다시 중공의 마오쩌둥에게 특사를 보내 중공군 내 한인(韓人) 병사들을 북한으로 복귀시켜 북한군에 편입하려는 협상을 전개, 이를 성사시켰다. 그 결과 중공군 3개 사단과 1개 연대가 부대 명칭만 바꾼 채 그대로 북한군으로 편입되었다. 그 수가 무려 남침 당시 북한군 육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6만 명에 달했다. 이때 중공군에서 북한군에 편입된 사단이 북한군 5사단, 6사단, 12사단이고, 연대는 서울에 제일 먼저 들어온 4사단 18연대이다. 이 외에도 중대 및 대대 단위로 들어온 중공군 내 한인 병사들이 있었다. 국공내전(國共內戰)을 거친 그들은 전투 경험이 풍부해 6·25 전쟁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김일성이 남침을 위한 광폭 행보를 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주변 정세도 북한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한 데 이어 1950년 1월에는 미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발언이 나왔다. 이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한 미 합참의 잘못된 판단과 미국이 후원해 세운 대한민국을 감히 소련이 침략하지 못할 것이라는 미 국무부의 오판(誤判)에서 비롯된 조치였다. 또한 중공이 중국 대륙을 완전히 공산화한 후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고, 이에 앞서 소련은 그해 8월에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며 미국의 핵무기 독점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호재(好材)의 연속이었다.
김일성은 그 틈새를 적극 이용했다. 미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시킨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발언이 있은 지 얼마 안 된 1950년 3월 김일성은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해 남침의 승인을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 것으로 오판하고 남침을 승인해줬고, 다시 북한에 필요한 전투기와 전차 등 현대식 공격용 무기를 대량으로 지원함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전략가 20여 명을 북한에 보내 남침공격계획을 작성해주도록 했다. 나아가 김일성에게 전쟁 승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 중공의 마오쩌둥으로부터 동의를 받을 것을 종용했다.
김일성의 정치적 목적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승인을 얻은 김일성은 그 길로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을 대동하고 중국의 베이징(北京)으로 달려가 마오쩌둥에게 남침 지지를 요청했다. 이때 마오쩌둥은 스탈린으로부터 전문(電文)을 통해 남침 승인을 확인한 후 김일성에게 “만약 미국이 참전하면 병력을 보내 지원하겠다. 그러나 미국은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한반도 지칭)’를 위해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라며 남침을 지지하고 나섰다.
국공내전 시기 북한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만주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중공의 입장에서는 김일성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마오쩌둥은 6·25 때 중공군을 파병하면서 “‘오성홍기(五星紅旗)’에는 북한 인민의 선혈(鮮血)도 포함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북한에 우호적이었다.
소련의 남침 승인과 중공의 동의를 받은 김일성은 스탈린이 파견한 바실리예프 중장을 비롯한 소련 군사전략가 20여 명의 도움을 받아 1950년 5월 말에 남침공격계획을 완성하고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보고해 승인을 받았다. 그때가 남침을 불과 10일 정도 남겨둔 6월 16일이었다. 남침 일자는 김일성의 요구대로 1950년 6월 25일로 정해졌다. 이때 북한은 소련으로부터는 무기와 장비를, 그리고 중공으로부터는 전투병력을 지원받아 병력 20만 명에 10개 보병사단, 1개 전차여단(전차 242대), 전투기를 포함한 각종 항공기 226대, 대포 748문, 모터사이클 540대로 남침을 감행했다.
이로써 김일성은 신년사에서 밝힌 ‘국토완정’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의 참화가 김일성의 국토완정에 의해 촉발된 셈이다.
스탈린의 낙점(落點)과 소련 군정(軍政)의 비호(庇護)하에 북한 정권을 거머쥔 김일성이 국토완정을 거론하며 남침을 일으킨 것은 순전히 전공을 쌓기 위한 공명심에서 나온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국내 공산주의 거두인 박헌영이나 중국 연안파를 대표하는 김원봉과 무정, 그리고 소련파의 허가이에 비해 공산주의 투쟁과 경력에서 밀렸던 김일성 입장에서는 그들을 능가할 만한 ‘절대적 성과’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국토완정에 의한 남한의 공산화였다.
김정은의 김일성 따라 하기
김정은은 2023년 12월 말 74년 만에 ‘영토완정’을 꺼내 들었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부터 유난히 김일성 흉내 내기에 몰두했다. 복장에서부터 걸음걸이, 외모, 말투, 행동거지, 정적 제거 및 숙청에서의 잔인함에 이르기까지 김일성 따라 하기에 열중했다. 김일성은 북한 정권의 공동 주주(株主)이자 최대의 정적(政敵)인 박헌영을 숙청할 때 외딴집 오막살이에 가둬놓고 사흘을 굶긴 독일산 셰퍼드를 집어넣어 물어뜯게 하는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고문을 해 미국의 간첩임을 자백하게 해서 사형에 처했다. 김정은도 고모부(장성택)를 비행기 격추에 사용하는 고사포로 폭살하는 포학성을 드러냈다. 이런 김정은이 이제는 김일성이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국토완정을 들고 나왔다. 그것도 국토완정 선언 75주년(2024년)과 6·25 전쟁 발발 75주년(2025년)을 앞두고 내놓은 배경이 단순한 정치적 선언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의 영토완정 발언은 김일성의 국토완정과 비교할 때 정황 및 상황 논리상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김일성은 전쟁 준비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선언을 해놓고 소련과 중공을 방문하여 남침 준비를 하나씩 준비해간 반면, 김정은은 핵과 투발(投發) 수단인 각종 미사일을 개발한 상태에서 영토완정을 선언하였다. 김일성 때와 달리 전력 면에서 중국이나 러시아의 추가 지원 없이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남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 김정은이 전면전쟁을 일으켜도 유엔 차원의 집단안보 제재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유엔안보리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고 나올 경우, 6·25 때처럼 한국에 대한 유엔 차원의 대규모 군사적 지원이 어려울 것이란 점을 방증한다. 다만 대한민국 입장에서 한미동맹은 유효한 상황이다.
셋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중국과 대만 문제 등을 고려할 때 한반도에서의 전쟁에 미국의 지원과 역할이 제한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이다. 작금의 복잡다기한 국제 상황에서 김정은이 도발을 했을 때 미국의 의지와 역할이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과 푸틴과의 군사 및 군수(軍需) 협력, 대만 문제를 놓고 벌어진 미국-중국과의 대립, 북한과 중국과의 전통적 우호협력 관계 복원 등을 고려할 때 북한-중국-러시아 동맹축 강화는 결코 대한민국에 있어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다. 김정은은 영토완정 발언을 하면서 이러한 것을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후계자 계승 문제도 엮여 있어
김정은이 불쑥 영토완정을 74년 만에 꺼내 든 속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볼 수 있다.
첫째는 국토완정 75주년과 6·25 전쟁 발발 75주년을 앞두고 핵과 미사일을 완성한 단계에서 김일성의 미완성 과제이자 동시에 북한의 지상목표인 국토완정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선언함으로써 북한체제의 결속을 다져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고 미국과의 대화를 시도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를 위해 북한은 유리한 상황을 차지할 때까지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통해 한반도를 긴장 상태로 몰고 갈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건강 상태가 나쁜 김정은이 영토완정에 의한 한반도의 긴장 상태를 이용하여 당·정·군 특히 군부의 강력한 지지하에 후계자 계승 문제를 자연스럽게 그리고 공고히 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김정은이 계속해서 딸 김주애를 대동하고 그 역할이 강조된다면 가능성이 충분한 설이라고 본다.⊙
여기에 북한도 적극 가세하고 있다. 북한은 2024년 새해 벽두부터 미사일 도발과 서해안 지역에서 해안포 사격을 연일 강행하며 한반도를 긴장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작년 말 김정은이 행한 ‘영토완정(領土完整)’ 발언은 6·25 전쟁 이전 김일성이 ‘국토완정(國土完整)’을 주장하면서 소련·중공과 결탁하여 남침(南侵) 전쟁을 일으켰던 것을 연상케 한다.
김일성은 1949년 1월 신년사에서 ‘국토완정’을 부르짖었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 이후 첫 번째 맞이하는 신년사에서 김일성은 이렇게 주장했다.
“인민군은… 조국과 인민을 팔아먹으려는 반동 세력을 분쇄하며 우리 조국 강토의 ‘완정’과 안전을 보장하기에 항상 준비되어 있도록 되어야 하겠습니다. 조국을 식민지화하려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정책과 조국과 민족을 팔아먹는 남조선 민족반역자들의 소굴인 ‘매국적 괴뢰정부’를 타도 분쇄하고, 멀지 않은 장래에 ‘국토의 완정’과 자주독립국가를 쟁취하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김일성과 김정은의 차이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2023년 12월 30일 김정은은 느닷없이 ‘영토완정’을 들고 나왔다. 김정은은 노동당 전원회의 5일 차 회의에서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동족(同族)’이 아니라 ‘적대적인 교전국(交戰國) 관계’로 재규정하고, 유사시 핵 무력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수단과 역량을 동원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박차를 가해나가겠다”고 했다.
김일성의 ‘국토완정’과 김정은의 ‘영토완정’ 발언은 그 표현만 다르지 의미는 ‘무력을 이용하여 한반도를 적화(赤化) 통일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 한반도를 공산주의 체제로 완전히 정리하여 통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아가 김정은의 ‘영토완정’은 단순히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2023년 ‘수정 헌법’에 명시해놓기까지 했다.
김일성의 국토완정과 김정은의 영토완정 발언에서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먼저 김일성은 타도 대상을 미 제국주의 정책과 ‘괴뢰정부(대한민국 정부)’로 규정한 반면 김정은은 미 제국주의를 제외하고 대한민국과 국민 전체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적화 통일 수단도 김일성은 ‘인민군(북한 정규군)’을 통해 달성하려고 한 반면, 김정은은 ‘핵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수단(핵을 포함한 북한의 모든 무력 수단)’을 통해 이룩하겠다고 한다. 전쟁 발발 시기도 김일성은 ‘멀지 않은 장래(1년 6개월 후 남침)’라고 한 반면, 김정은은 그 시기를 못 박지 않으면서 남북관계를 ‘적대적 교전국’으로 규정함으로써 ‘언제든지 남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위와 같은 점을 고려할 때 김일성의 국토완정 주장은 ‘인민군’에게 곧 있을 전쟁에 대비해 준비하라는 ‘전쟁준비명령’의 성격이 강한 반면, 김정은의 영토완정 발언은 북한의 모든 무력집단에게 교전국으로 규정한 대한민국과 전쟁에 돌입했음을 알리는 ‘전쟁선포’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김일성,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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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왼쪽 두 번째)은 1949년 3월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세 번째), 부수상 홍명희(네 번째)와 소련을 방문,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요청했다. 사진=조선DB |
국토완정을 선언할 당시 김일성은 북한의 당·정·군을 완전히 장악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남침을 위한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남침의 핵심 전력(戰力)인 ‘조선인민군’은 병력과 무기 및 장비 그리고 훈련 면에서 아직 전쟁을 수행할 만한 충분한 전력을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은 10개 보병사단과 전차 242대, 각종 항공기 226대를 동원하여 남침을 감행하였는데, 국토완정 발언 당시 북한은 전투기와 전차를 갖추지 못한 채 단지 4개 보병사단만 보유하고 있었다. 남침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었다.
전차와 전투기 등 현대식 무기를 생산할 수 없었던 당시 북한으로서는 소련의 절대적인 지원과 남침 승인, 그리고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앞두고 있던 중공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런데도 김일성은 남한을 무력으로 적화 통일시키겠다는 ‘국토완정’을 선언했다.
김일성이 이렇게 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그로서는 북한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해줄 수 있는 ‘한반도 공산화’와 같은 불멸(不滅)의 업적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 대륙을 공산화한 것처럼 김일성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국토완정 발언 후인 1949년 3월 김일성은 남침 준비를 위한 첫 단계로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공산당 서기장 겸 수상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 요청과 필요한 무기 및 장비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스탈린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며 남침을 승인하지는 않았으나, 전쟁에 필요한 전투기를 포함한 각종 항공기 98대를 비롯하여 T-34전차 87대, 자주포 102문, 견인포 91문, 장갑차 57대, 모터사이클 122대 등 공격용 무기는 지원했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전쟁에 필요한 추가 사단 창설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중공군 내 한인부대, 북한군 편입
김일성은 소련 방문에서 많은 성과를 얻자 다시 중공의 마오쩌둥에게 특사를 보내 중공군 내 한인(韓人) 병사들을 북한으로 복귀시켜 북한군에 편입하려는 협상을 전개, 이를 성사시켰다. 그 결과 중공군 3개 사단과 1개 연대가 부대 명칭만 바꾼 채 그대로 북한군으로 편입되었다. 그 수가 무려 남침 당시 북한군 육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6만 명에 달했다. 이때 중공군에서 북한군에 편입된 사단이 북한군 5사단, 6사단, 12사단이고, 연대는 서울에 제일 먼저 들어온 4사단 18연대이다. 이 외에도 중대 및 대대 단위로 들어온 중공군 내 한인 병사들이 있었다. 국공내전(國共內戰)을 거친 그들은 전투 경험이 풍부해 6·25 전쟁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김일성이 남침을 위한 광폭 행보를 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주변 정세도 북한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한 데 이어 1950년 1월에는 미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발언이 나왔다. 이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한 미 합참의 잘못된 판단과 미국이 후원해 세운 대한민국을 감히 소련이 침략하지 못할 것이라는 미 국무부의 오판(誤判)에서 비롯된 조치였다. 또한 중공이 중국 대륙을 완전히 공산화한 후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고, 이에 앞서 소련은 그해 8월에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며 미국의 핵무기 독점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호재(好材)의 연속이었다.
김일성은 그 틈새를 적극 이용했다. 미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시킨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발언이 있은 지 얼마 안 된 1950년 3월 김일성은 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해 남침의 승인을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 것으로 오판하고 남침을 승인해줬고, 다시 북한에 필요한 전투기와 전차 등 현대식 공격용 무기를 대량으로 지원함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전략가 20여 명을 북한에 보내 남침공격계획을 작성해주도록 했다. 나아가 김일성에게 전쟁 승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 중공의 마오쩌둥으로부터 동의를 받을 것을 종용했다.
김일성의 정치적 목적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승인을 얻은 김일성은 그 길로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을 대동하고 중국의 베이징(北京)으로 달려가 마오쩌둥에게 남침 지지를 요청했다. 이때 마오쩌둥은 스탈린으로부터 전문(電文)을 통해 남침 승인을 확인한 후 김일성에게 “만약 미국이 참전하면 병력을 보내 지원하겠다. 그러나 미국은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한반도 지칭)’를 위해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라며 남침을 지지하고 나섰다.
국공내전 시기 북한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만주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중공의 입장에서는 김일성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마오쩌둥은 6·25 때 중공군을 파병하면서 “‘오성홍기(五星紅旗)’에는 북한 인민의 선혈(鮮血)도 포함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북한에 우호적이었다.
소련의 남침 승인과 중공의 동의를 받은 김일성은 스탈린이 파견한 바실리예프 중장을 비롯한 소련 군사전략가 20여 명의 도움을 받아 1950년 5월 말에 남침공격계획을 완성하고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보고해 승인을 받았다. 그때가 남침을 불과 10일 정도 남겨둔 6월 16일이었다. 남침 일자는 김일성의 요구대로 1950년 6월 25일로 정해졌다. 이때 북한은 소련으로부터는 무기와 장비를, 그리고 중공으로부터는 전투병력을 지원받아 병력 20만 명에 10개 보병사단, 1개 전차여단(전차 242대), 전투기를 포함한 각종 항공기 226대, 대포 748문, 모터사이클 540대로 남침을 감행했다.
이로써 김일성은 신년사에서 밝힌 ‘국토완정’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의 참화가 김일성의 국토완정에 의해 촉발된 셈이다.
스탈린의 낙점(落點)과 소련 군정(軍政)의 비호(庇護)하에 북한 정권을 거머쥔 김일성이 국토완정을 거론하며 남침을 일으킨 것은 순전히 전공을 쌓기 위한 공명심에서 나온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국내 공산주의 거두인 박헌영이나 중국 연안파를 대표하는 김원봉과 무정, 그리고 소련파의 허가이에 비해 공산주의 투쟁과 경력에서 밀렸던 김일성 입장에서는 그들을 능가할 만한 ‘절대적 성과’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국토완정에 의한 남한의 공산화였다.
김정은의 김일성 따라 하기
김정은은 2023년 12월 말 74년 만에 ‘영토완정’을 꺼내 들었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부터 유난히 김일성 흉내 내기에 몰두했다. 복장에서부터 걸음걸이, 외모, 말투, 행동거지, 정적 제거 및 숙청에서의 잔인함에 이르기까지 김일성 따라 하기에 열중했다. 김일성은 북한 정권의 공동 주주(株主)이자 최대의 정적(政敵)인 박헌영을 숙청할 때 외딴집 오막살이에 가둬놓고 사흘을 굶긴 독일산 셰퍼드를 집어넣어 물어뜯게 하는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고문을 해 미국의 간첩임을 자백하게 해서 사형에 처했다. 김정은도 고모부(장성택)를 비행기 격추에 사용하는 고사포로 폭살하는 포학성을 드러냈다. 이런 김정은이 이제는 김일성이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국토완정을 들고 나왔다. 그것도 국토완정 선언 75주년(2024년)과 6·25 전쟁 발발 75주년(2025년)을 앞두고 내놓은 배경이 단순한 정치적 선언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의 영토완정 발언은 김일성의 국토완정과 비교할 때 정황 및 상황 논리상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김일성은 전쟁 준비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선언을 해놓고 소련과 중공을 방문하여 남침 준비를 하나씩 준비해간 반면, 김정은은 핵과 투발(投發) 수단인 각종 미사일을 개발한 상태에서 영토완정을 선언하였다. 김일성 때와 달리 전력 면에서 중국이나 러시아의 추가 지원 없이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남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 김정은이 전면전쟁을 일으켜도 유엔 차원의 집단안보 제재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유엔안보리에서 러시아와 중국이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고 나올 경우, 6·25 때처럼 한국에 대한 유엔 차원의 대규모 군사적 지원이 어려울 것이란 점을 방증한다. 다만 대한민국 입장에서 한미동맹은 유효한 상황이다.
셋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중국과 대만 문제 등을 고려할 때 한반도에서의 전쟁에 미국의 지원과 역할이 제한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이다. 작금의 복잡다기한 국제 상황에서 김정은이 도발을 했을 때 미국의 의지와 역할이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과 푸틴과의 군사 및 군수(軍需) 협력, 대만 문제를 놓고 벌어진 미국-중국과의 대립, 북한과 중국과의 전통적 우호협력 관계 복원 등을 고려할 때 북한-중국-러시아 동맹축 강화는 결코 대한민국에 있어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다. 김정은은 영토완정 발언을 하면서 이러한 것을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후계자 계승 문제도 엮여 있어
김정은이 불쑥 영토완정을 74년 만에 꺼내 든 속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볼 수 있다.
첫째는 국토완정 75주년과 6·25 전쟁 발발 75주년을 앞두고 핵과 미사일을 완성한 단계에서 김일성의 미완성 과제이자 동시에 북한의 지상목표인 국토완정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선언함으로써 북한체제의 결속을 다져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고 미국과의 대화를 시도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를 위해 북한은 유리한 상황을 차지할 때까지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통해 한반도를 긴장 상태로 몰고 갈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건강 상태가 나쁜 김정은이 영토완정에 의한 한반도의 긴장 상태를 이용하여 당·정·군 특히 군부의 강력한 지지하에 후계자 계승 문제를 자연스럽게 그리고 공고히 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김정은이 계속해서 딸 김주애를 대동하고 그 역할이 강조된다면 가능성이 충분한 설이라고 본다.⊙